- 목 차 -1. 서 론2. 본 론1) 신사층의 형성2) 신사층의 특권3) 신사층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3. 결 론1.서 론한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은 다양하다. 왜냐하면 체제를 운영하는데는 독립적인 역할 담당도 필요하지만 구성원 사이의 상호융합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계층의 구성원을 연결 시켜 줄 수 있고 서로 쿠션 작용을 해 줄 수 있는 구성원의 다양성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구성원의 다양성은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유연성을 증가시키고 창의성을 고취시킨다는 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성원의 다양성만으로는 원만한 발전을 해내는 것이 불가능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이라는 성질의 이면에는 바로 분산과 분열이라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융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각 기의 의견과 계층이 흩어져 버린다면 그야말로 다양성을 추구했던 국가는 단기간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그 국가를 실제로 움직이는 핵심 축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바로 이 부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그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실무적인 역할을 하는 원동력이 되고 이 핵심 축을 중심으로 각계 각층의 구성원들이 융합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로 국가가 서게 될 것이다. 중국의 경우 역사 속에서 바로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계층이 바로 신사층이였다.2. 본 론1) 신사층의 형성각 시대 별로 그 시대의 중심 세력으로 공인되는 계층이 있게 마련이다. 이 계층은 신분적 우월성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사회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도적 위치에 서게 되며 그에 따른 특권적 힘을 지니고 특유의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었다.중국은 바로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조건으로써 비로소 지배층에 편입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수단인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이들의 형성 과정을 살펴 봐야한다.먼저 생원은 동시(童試)에 합격한 학생으로 성적에 따라 국자감에 진학 할 수도 있고 향시에 응시할 수도 있었거인은 명초부터 그 자격만으로도 입사가 가능하였고 국자감에서의 학업도 허가되었다. 이들도 역시 감생과 같은 특권을 국가로부터 부여받았고 그 지위도 역시 종신 보장되었다. 따라서 명대 이후의 거인은 전대의 거인과는 달리 사회적 특권층으로서 사대부계층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다.이와 같은 계층들이 바로 신사 계층의 초기적 단계의 구성원들이고 기본 구성원들이다.이들은 이전 시대와 다르게 과거제도와 학교제도의 보다 더 긴밀해진 체계 속에서 배출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 초부터는 이전과 같은 과거 제도의 합격자라 해도 약간의 그 의미상 신분상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단지 그 인식에 있어서의 변화가 신사층 형성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초기 단계에 과거를 합격한 이들은 사회의 관료로서 등용되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15세기 중반부터 생원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해 그 경쟁이 치열해 지는 반면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계층의 고정화가 일어나고 그만큼 관료 사회 진입이 어렵게 되었다.때문에 생원은 거인이나 감생의 지위에 오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이렇게 상위 계층으로 상승이 불가능해지자 상당수의 생원은 특권을 누리면서 향촌에 정착 할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이처럼 생원 수의 급증과 상부 사회로의 진출이 용이하지 못하게 되자 사회 저변에 수준 이상의 교양을 쌓고 일정 수준 이상의 특권과 지위를 누리게 되는 계층이 이전 시대보다는 두텁게 형성되게 된다.이 계층은 유교이념과 통치질서를 유지시키고 관료 보급원으로 확보된 계층이였기 때문에 비록 관료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다른 계층보다 사회적으로 갖는 우월성이 더 컸었다. 또 스스로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계층이라는 성격을 갖는다.하지만 이 부분은 유교 교육을 받고 관료로서 교육된 이전 시대의 사람들과 명 청 시대의 학위 소지자들 사이의 큰 차이라고는 볼 수 없다.이 계층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관료는 아니지만 약간의 특권을 보장받았으며, 사회 일반의 인식 및 볼 수 있을 것이다.즉 완전한 관료는 아니지만 또 일반 평민도 아닌 그 중간계층으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계층을 포함한 계층을 명 중기 이후 하나의 사회 계층 신사 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신과 사는 분명히 그 정확한 개념에 있어서는 관직경력자와 학위층으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념적인 면에서 사회에 대해 갖는 공의식이나 사대부로서의 자아의식이 같았고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서로 끈끈히 맺어진 사제 관계 등의 인간관계에서 떼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였다. 또한 동향의식에서 그들은 하나로 뭉칠 수가 있었다.여러 요소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명 중기 이후 관직 경력자와 학위층이 신과 사뿐 아니라 신사로서 동류의 계층적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2) 신사층의 특권신사층은 과거제를 통해 관료로 진출했거나 그 과정에 있거나 혹은 퇴직한 관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층이다. 이 계층은 과거제도를 통해 황제에게 충성하고 유교적 교양을 통한 우월성을 바탕으로 그 월등함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얻게 된 월등함은 그들에게 국가가 부여하는 특권들로써 표현되게 되는데 이 특권이 중요한 이유는 신사층에게 부여되는 특권들로 인해서 우월성이 표현되게 되고 향촌 조직의 리더로써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신사의 지위는 외형적으로 표출되는 것으로 의복이 대표적이다. 신사들은 그 단체의 독특성을 보이기 위해 특별한 의식이나 예절 등으로 지위를 나타내고 권위를 강조했다.예를 들어 1품관의 관리는 상단부에 루비가 박혀있고 그 중앙부에는 진주가 장식된 꽃모양의 금단추를 조관에 달았다고 한다.또 의복에 있어서도 1품관의 관리는 아홉 마리의 이무기가 그려진 조복을 입었고 학위소지자는 푸른색의 띠를 두른 검은 도포를 입었다.신사가 지닌 다른 공적인 특권으로 특정 의례에 참가할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가 있었는데 예를 들면 공자묘에서 실시되는 공적인 의식에는 신사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신사만이 참석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의식 이외에도 마을 모든 사람들이 참석하는 연회나 의례에서 신사들은 지위를 박탈하여 신사집단 전체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했다.신사는 사회적으로 지방의 수령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때로는 그 관품이 지방수령보다도 높았기 때문에 지방수령은 신사의 지위를 박탈하고 처벌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닐 수가 없었다. 특별히 하층신사에 대한 그와 같은 권한은 일반적으로 과거제를 통하여 신사를 통제하며 신사에 대한 재판권을 지니고 있던 학관에게 있었다.평민들의 무례한 행위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해 주는 조치였다.예를 들어 평민이 신사에게 모욕을 가했거나 상해를 가했을 때 평민에게 동일한 행위를 한 것보다 중한 처벌을 받았다. 신사들은 이와 같이 법적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집단이었다.뿐만 아니라 신사들에게는 특별한 경제적인 특권도 주어지고 있었다. 부역의 부담에 있어서 특별한 혜택이 부여되었다. 또 장학금이나 혹은 기타의 보조금도 이들의 학업증진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세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공적인 노동봉사인 역과 화폐나 현물로 내는 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사는 면역의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들을 육체적인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수련에 힘쓰게 한다는 것이었다.3) 신사의 긍정적 역할과 부정적 역할신사로서의 지위는 신사 자신들에게 많은 혜택을 제공했다. 그들에게는 법적 사회적으로 공인된 요역 우면의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신사들의 실제적인 이익은 이 같은 공적인 특권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그들의 지위 남용은 세부담의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신사들은 탈세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세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횡령하기도 했다. 원칙적으로는 신사들도 평민들과 동일한 지세를 납부해야 했다.그러나 실제상황에 있어서는 세부담의 특면에서 두드러졌다. 신사들은 탈세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세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횡령하기도 했다. 원칙적으로는 신사들도 평민들과 동일한 지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 있어서는 적인 행동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신사들이 납세거부 운동에 수천의 군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또한 역의 불균형 및 역 회피의 수단을 제공하는 신사들의 행위 등은 청대를 통해서 자주 논란거리가 되었다. 신사들이 평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신사 자신에게 속한 것처럼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신사들은 법적으로 면역의 특권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평민들도 그를 이용하여 역부담을 회피할 수 있었다.신사들의 비리 행태는 때로는 서리나 아역들과의 협조를 통하여 진행되었고 관리가 한 통속이 되기도 했다. 신사와 서리가 작당하여 평민들의 세금을 착복한 실례가 있고 또 신사지주와 농민들 사이에 발생한 분쟁에서 지방관이 그 판결에 있어서 공정하기 못했다고 기록된 사례들도 많다.신사와 관리들의 합작은 상호 빈번한 방문과 선물교환을 통해서 촉진되었다. 신사와 지방관이 밀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정부는 이와 같은 행위를 심히 비난했다.신사들은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부여된 지위와 특권으로 향유하는 계층이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특권을 이용해 세금을 착복한다거나 다른 평민들의 세금 납부를 대납해주는 척하면서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는 방법을 사용한다.또한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 될 경우에는 단체 행동이나 혹은 지방 세력을 이용해 이익 수호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지도적 지위와 특권을 향유했던 이들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신사들은 또한 특별한 사회적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사회적 책임과 사명의식을 기본적으로 교육 받았고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는 계층이였다. 이 사상의 발로로 그들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이익보호와 복지증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상당히 많은 공공 사업이 정부 주도가 아닌 이들 신사층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그들은 관리들에 대해서 지역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들은 복지 활동 중재활동 공공사업 때로는 단련의 조직이나 조세징수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국가 역시 신사층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향촌 사회였다.
국가의 건국 초기에는 역사상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개국을 한 용맹한 왕을 이어 체제를 굳건히 정비하고 문물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학문과 인성을 겸비한 文王이 존재해야만 그 국가의 최소 100년 이상의 존속을 논할 수 있었다.국가의 체계를 세우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들 중에 고대 왕권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귀족과 황제 사이의 권력 균형을 통한 황제 중심의 집권체제 완성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국가들의 흥망 성쇠가 바로 이 부분에서 갈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귀족과 황제 사이의 권력 균형의 방법에는 세제 개혁을 통한 또는 토지 개혁 등을 통한 권력의 재편성이나 중심 세력의 교체 등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친황제적 인재의 등용을 통한 기존의 지배층과 새로 등장한 지배층 사이의 권력적 투쟁 속에서의 물갈이를 꼽을 수 있다.누구든 권력의 중심 축에 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최고 권력자의 방침에 따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서있는 황제가 친황제적 인재 등용 제도를 만들고 새로운 인재들을 포용 할 수 있다면 황제 역시 자신의 안위를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중국에서는 인재 선발에 대한 고민과 여러 가지 과도기적 시도 속에서 사회 속에 수대 이후로 청 말까지 많은 왕조의 교체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 잡은 방법이 바로 과거 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제도를 단순한 시험이라고 보기보다는 인재 선발의 문제 또한 더 넓은 의미에서 통치 체제 속에서의 인재의 의미와 그 인재가 형성하는 사회 계층과 사회 속에서의 역할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본 론1. 인재 선발 제도의 기원1) 주나라의 인재 선발 제도먼저 가장 시대에 앞서 그 원류를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고대 초기 국가의 형태를 가졌던 주(周)나라다. 주나라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각 지방에서 중앙으로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 제도가 바로 향거이선 제도이다.향거이선 제도는 3년에 한번 각를 갖는다.주나라는 본래 혈연적 봉건제도에서 시작한 사회 체제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후국들 나름의 독립으로 인해 봉건제도는 붕괴하고 전국에 실력자들이 난립하는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춘추전국시대는 이전까지 주나라 왕실을 중심으로 한 혈족들 중심의 사회 중심 권력 체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다.이때까지 중심 세력에서 소외된 주변의 지식인 계층이 각 지방의 실력자들과 규합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이 시기 각 지방의 실력자들은 많은 지식인 집단을 거느리게 되고 이들을 우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세력 확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지식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그 재주에 있어서 다양성을 보였고 또 특출남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결국 전국시대의 지식인 계층인 사인들은 후에 관료층에 편입되어 文學之士로 불려진다.2) 한나라의 인재 선발 제도한나라의 찰거제도가 주대의 향거이선 제도를 잇는 새로운 인제 선발 제도로 손꼽히는데 한나라를 개국한 고조 유방은 조서를 내려 각 신하들에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명령했다. 유방의 이 조서는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실시한 전국적 규모의 사인 선발 제도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한나라 초기는 개국 공신 집단의 정국 장악으로 인해 왕권이 제약을 받았다.하지만 한무제때가 되면 비로소 중앙 집권 황제 제도가 완성되게 된다. 이때 서한 초기의 찰거방식은 정기적인 제도가 아니였는데 한무제가 이 공신 집단을 견제하고 황제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바로 유교적 교양을 갖춘 지방 호족을 중앙으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효렴을 신설하고 정기적 제도를 만들어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착되었다.당시는 대다수 추천에 의해 관리로 등용되고 고시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과거제도라고는 볼 수 없었다. 추천된 이상 고시에 의해 탈락되는 일은 없었고 성적에 따라 관리로 임용 될 때 그 직급을 정하는데 영향을 줄 뿐 이였다.한나라의 찰거 만큼의 능력이 있는 계층으로 관료가 될 수 있는 계층이 폐쇄화되고 만다.이 계층들의 권력이 날로 커지자 이에 반대하는 청의들이 나타나게 되고 조조가 하북을 통일한 후 조조와 세력 규합이 되어 그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좀 더 세밀화 되고 체계화 된 관료 선발 제도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품관임법 즉 구품중정제이다.각지의 중정관들이 적합한 인물을 선택해 1품에서 9품까지 그 품계를 나누어 중앙에 먼저 보고한다. 그러면 중앙에서는 후보자의 향품을 토대로 관품을 임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처음 관직에 등용될 때는 자신의 향품 보다 4단계 아래의 관품에 임명되고 자신이 받았던 향품까지 승진이 가능하다.구품중정제의 목적은 한 대의 관리들을 새로이 만들어진 위 왕조의 관리로 흡수하고 동시에 이전 위 왕부의 현직관리를 재인정해 국가의 기틀을 만들을 위한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후에도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아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졌다.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는 의미의 구품중정제는 결국 점차 각 권문 귀족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왜냐하면 한 대의 백성들은 개인으로서 바로 국가의 관리로 나설 수 있었으나 위진 남북조시대에는 향품 때문에 주변의 추천에 의해서만 국가의 관리로 나가게 되었다. 이 향품의 기준이 문제인데 기준이 집안의 명망과 재산의 정도 부친의 위치에 의해 정해지기에 결국 가문이나 문벌 등 종족의 배경이 있어야만 관계에 진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수·당의 인재 선발 제도수나라 문제는 즉위하고 나서 관리 임용에 있어서 큰 변혁을 꿰하게 되는데 그 변화가 바로 지방 관리를 포함한 각급 관리를 일률적으로 중앙에서 임명하게 하고 관리의 파견 시에도 자신의 출신지역을 회피하도록 하며 임기 또한 제한하도록 하는 제도적 개혁이 바로 그것이다.이와 비슷한 현상은 서양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 시점에 영국은 아직 왕권이 귀족들을 누를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가졌다기보다는 명분상의정제의 경우 지방 호족들의 장악으로 호족들의 누대에 걸친 지위 유지와 재생산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제도로 변화하고 말았기에 새로운 선발 제도의 필요성이 더해졌다.과거시험은 신분과 가문에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을 평가해 합격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 인재 선발제도와의 차별화를 꿰했으며 지난 세월 호족들에 의해 장악되어 온 관료층에 일대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했다.취지와 제도적 강치에 있어서는 모든 이에 대한 평등과 기회의 균등에 제공되지만 현실적으로는 호족의 세력이 이부를 담당함으로써 결국 다시 호족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제도로 변화하고 만다.하지만 수대에 현실적으로 구현은 되지 못했다고 해도 능력에 의한 인재 선발의 방법이 실현되고 실천되었으며 이 제도는 앞으로 청말까지 중국의 주요 인재 선발의 수단으로써 사용되었다.당대 역시 똑같은 인재 선발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당의 과거는 상거와 제거로 나뉘어 시험을 본다.당대에도 과거제가 시행이 되지만 주요한 인재 선발 수단은 아니었다. 임자제나 이원출신제 벽소제처럼 귀족의 자제가 다시 관리로 등용 될 수 있는 경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관직 진출자가 과거 출신자보다 3∼4배는 더 되었기 때문이다.이처럼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원이 적었을 뿐 아니라 제도상에서도 상당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의 과거 시험은 3단계의 지방 과거 시험과 중앙 과거 시험 그리고 이부 임관 시험을 통해서 관리로 등용되는 방법을 썼다.이부 시험은 주관적 요소가 많아 이미 이부를 귀족들이 장악한 상태에서의 이부 시험은 다양한 인재의 등용에 걸림돌이 되었다.즉, 통방의 방법으로 시험 전에 미래 내정된 합격자가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시험을 거쳐 합격하게 되는 의례에 지나지 않았고 제도상으로는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가문의 배경이라던가 재산의 유무에 상관없이 참가하고 뽑힐 수 있었으나 실제 통방에 의해 관리를 뽑았던 당시의 현실로 봐서 통방을 얻어 낼 만큼의 재물이 필요했고, 또 장기간의 학문에 정진 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을 유도했다.원래 중국에는 관리와 과거 응시자의 유착이 심해 자신을 뽑아준 관리와 합격자 사이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게 되고 또 같은 회에 합격한 합격자끼리의 관계 역시 특별했다. 바로 이런 관계를 황제와 맺게 됨으로써 과거에 합격한 합격자들은 관리로 등용된 후 황제에게 더욱 충성하게 되고 감히 황제의 권위를 넘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송대의 과거 시험은 이전 당대까지 보이던 부패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도입했는데 그것 중에 하나는 시험지의 이름을 가리는 호명법이고 다른 하나는 봉미법이다.봉미법은 답안지에서 수험자의 이름을 봉하는 것으로 이제 그치지 않고 그 답안 내용을 일괄적으로 필사해 필체의 차이가 나지 않도록 해 응시자의 신분을 모두 비공개화 하는 등 엄격한 관리 속에 공정성을 더욱 제고 시켰다.또한 송대 사회는 모든 사회의 출세를 위한 역량이 과거 시험으로 모여들어 현재 우리 나라의 수능시험처럼 그 과다 경쟁의 부작용을 안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러 번 시험을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횟수와 나이에 따라 예부에서 특별히 이름을 상주해 전시에 참가하고 합격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급제 혹은 출신을 주는 제도로 이는 오랫동안 과거 시험을 보게 되는 특주명 제도를 과다 경쟁의 부작용을 해소시키기 위해 시행했다.송대의 과거 시험에 응시했던 주요 계층은 바로 사대부들이다. 송대 사대부들은 이전 시대의 문벌 귀족들과는 다른 계층이다.당송 변혁기 속에서 농업의 생산성이 증강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잉여 농산물로 그 동안 귀족 중심의 시장에서 다양한 일반 서민들의 생필품 교역 거래도 가능해 지면서 경제 규모가 커졌다. 이 중국 역사상 유래가 없는 크나큰 변혁 속에서 적응해 낸 사람들이 성장해 형성한 그룹이 바로 신흥 지배층 사대부들이다.송대 과거는 대체로 개방되고 공평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은 부유층 사람들이 독점하였다. 왜냐하면 과거에 수요되는 경제부담은 일반 농가는 능히 부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송시대의
- 목 차 -Ⅰ. 서 론Ⅱ. 본 론1. 신화에 대한 정의2. 그리스 로마의 창세 신화3. 중국 창세 신화4. 신화의 비교1) 체계상의 비교2) 신성의 비교3) 자연 환경에 따른 비교4)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본 동서양 신화의 비교Ⅲ. 결 론Ⅰ. 서 론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관심이 다시 한번 붐으로 일어나면서 사회적 관심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많이 가있다.많이들 알고 있는 신화이지만 그 내용만 들어봤을 뿐 더 자세한 부분까지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중국과 그리스의 신화 비교는 신화와 신화의 비교만으로 그 의미를 가지지만 또한 동양의 대표 문화와 서양의 대표 문화를 비교해 살펴본다는 것에도 그 의의가 크다.일단 신화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정리해 보고 중국과 그리스의 신화를 비교해 본다.신화는 그 내용상 대단히 큰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 갈래 상 창조신화, 영웅신화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진다. 때문에 창세 신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Ⅱ. 본 론1. 신화에 대한 정의신화를 정의하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일이다.왜냐하면 신화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소설처럼 어느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체계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엮어진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이 신화의 특수성이다.즉, 신화의 경우 처음 시작이 언제인지, 누구부터인지 알 수 없고 전해 내려오는 경로 역시 불특정 다수에 의해 구전되었기 때문에 그사이 많은 변형이 일어나 내용상 일관성이 적고 다양성을 보이게 된다.한 지역의 똑같은 이야기일지라도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갈래가 갈려지고, 각 지역마다 그 지역에 따른 특수성에 더해져 그야말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통합한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일이 쉽지 않게 되는 것이다.이런 신화를 엘리아데는 원초의 시간, 태초의 신화적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창조에 대한 설명으로서 어떤 사건이 어떻게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이야기한다고 했다. 엘리아데의 이와 같은 정의는 지극히 신화에 대한 따지고 들어간다면 그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다. 단군을 역사적 사실의 범주에 완전히 들여놓고 봤다면 역사적 고증이 없는 단군은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쉴 수가 없다.하지만 단군은 우리 민족의 뿌리로서 역사의 첫 머리에 놓여있다.바로 이 부분이 신화가 다른 이야기와는 다른 성격 즉, 신성성을 갖기에 가능한 일이다. 신성성은 인간에게 있어 종교적 믿음이 아닌 사유적 믿음의 중심에 있다.신화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역사 이전의 역사와 사유를 시작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전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의 역사의 시작을 연결 시켜주는 중요한 사유적 고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라고 생각한다.인간의 역사라는 것 역시 마치 어린아이가 분명 태어나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스스로는 생후 1 ∼ 3년 정도의 일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즉, 이 세상이 어느 순간 생겨났고, 인간이 있었지만 인간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고 기억의 고리를 연속시켜 내기까지 사이의 빈 공백이 생겨나게 된다.그렇기 때문에 사유 활동이 가능한 인간은 이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해답을 얻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에 대한 의문, 자연에 대한 의문, 천지 만물에 대한 의문이 이어졌을 테지만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의 것들로 최소한 자신이 기억하기 이전의 것들로 눈으로 보거나 입으로 전해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며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그 사이를 연결 시켜주는 고리로써 신화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사실로서 인정받게 되는 신성성을 지닌 산물로 자리 매김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인간 사유의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사고를 시작한 이래로 그 균형적 중심에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은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신성성으로 포장된 신화라는 요소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맺어준다고 할 수 있다.결국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신화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신 에로스다.가이아는 높은 산들을 낳아 여신들의 거주지로 만들었고 마르지 않는 바다를 낳았다.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교합하여 아들 여섯과 딸 여섯을 낳는다.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낳은 12남매가 바로 티탄족 즉, 거신족이다.거대한 바다의 신인 오케아노스, 하늘덮개라는 뜻의 코이오스, 또 히페리온과 크리오스,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의 아버지 이아페토스 그리고 크로노스가 바로 그들이다. 딸들은 테아와 레아와 테미스와 기억의 여신을, 황금관을 쓴 포이베와 사랑스러운 테튀스를 낳았다.그 외에도 가이아는 외눈박이들인 퀴클롭스 3형제, 헤카톤케이레스를 낳기도 했다.그런데 거신 12남매는 문제가 없었지만 외눈박이 거인 3형제와 백수 거인 3형제는 걸핏하면 행패를 부리는 망나니들이었다.잦은 행패와 망나니짓으로 이들 여섯을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대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가두어 버렸다.그런데 이 대지는 바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뱃속이다. 가이아는 이들이 무한 지옥 안에서 벌이는 소동을 견딜 수가 없었기에 우라노스를 미워하게 되고 막내 아들인 크로노스와 모의해 하늘의 신 우라노스에게 복수를 하게 된다.우라노스는 뉘스가 깃드는 밤을 기다렸다가 아버지의 성기를 잘라버리게 되고 그 피가 사방으로 튀게된다. 그런데 이 피는 피의 정기와 사랑의 정기가 함께 서려있었는데 피의 정기는 가이아의 몸 위로 떨어졌고 사랑의 정기는 바다에 떨어졌다.피의 정기만 가지고 가이아는 자식들을 줄줄이 얻게 되는데 바로 에리뉘에스 자매들과 기간테스 형제들이 바로 이때 얻은 가이아의 자식들이다.바다에 떨어진 사랑의 정기로 아프로디테가 태어나게 되는데 아프로디테라는 말은 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이렇게 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 1대 신들이 모두 탄생하고 가이아와 우라노스를 중심으로 한 천지에 온갖 것들이 가득 하게 되어 세상이 완성된다.3. 중국 창세 신화중국에서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생긴 신이 반고(盤古)로 되어있다. 반고라는 이름은 삼국시대에 쓴 서정(갔다.이렇게 1만 8천 년이 지나자, 하늘이 지극히 높아졌고 땅도 지극히 두꺼워졌다.반고의 키 역시 아득하게 커졌다. 반고는 이렇게 하늘과 땅을 떠받친 채 외로이 서 있었는데 매일 매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괴롭고 힘든 일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하늘과 땅의 구조는 상당히 견고해져 이제 그는 하늘과 땅이 합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이제 몹시 지쳐 휴식이 필요한 반고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반고가 임종에 이르자, 그의 온 몸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내쉬는 숨은 맑은 바람과 구름으로, 목소리는 우레로, 왼쪽 눈은 태양으로, 오른쪽 눈은 달로 변했다. 그리고 그의 손발과 몸뚱이는 대지의 사극과 이름난 다섯 산으로, 그의 피는 내와 강으로, 근육은 길로, 피부와 살은 비옥한 밭으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별들로, 피부와 그 위에 난 솜털은 풀과 나무로, 이와 골수 등은 번쩍거리는 금속과 단단한 암석과 아름다운 진주와 옥석으로 변했다.심지어 아무 쓸모도 없는 땀조차도 만물을 윤택하게 하는 비와 이슬과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로 변했다.4. 신화의 비교1) 체계상의 비교신화의 전달 과정이 중국과 그리스 모두 민간에서부터 전해졌다는 것은 같다.하지만 신화의 체계가 잡힌 경로와 방법을 따지자면 상당한 차이나 나게된다.그리스 로마 신화의 경우 신화가 구전되던 시기를 넘어서 호메로스에 의하여 책으로 엮어졌으며 그 이후 호메로스의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고전이 되었다.하지만 중국의 경우 그 신화의 출연 시대는 빨랐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이 책으로 엮어져 체계를 갖추게되는 기회는 갖지 못한다.기본적으로 체계를 갖추었는지 갖추지 못했는지에 대한 기준을 책으로 엮였느냐에 두었다.그렇게 된 이유는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바로 문서의 중요성 때문이다. 사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차이이지만 이 둘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된다.책으로 저술되면 아무래도 일단 저술하는 사람이 내용의 논리성과 화의 중심에 신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신이 서있었기 때문에 신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그 확고한 자리를 자치하고 탄탄하게 발전해 올 수 있었다.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그 내용을 기록에 남기는 일도 적었을 뿐더러 하나의 이야기가 계승되지 못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일단 중국은 넓은 영토에서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각 민족들은 각자만의 독립된 자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각각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신화들이 하나의 정통적인 이야기로 통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에는 아직도 다양한 신화들이 보이게 되는데 창세 신화만을 놓고 보더라고 반고 신화와 여와 신화 등이 보이고 있다.또 중국은 고대 이래로 한가지 사상으로 청 대 까지 사상적 통일 속에서 발전해온 나라이다.이 사상적 통일의 기반이 된 것이 바로 유교인데, 유교의 경우에는 신화와 같은 신비스러운 대상을 배척했고 상당히 현실적인 논리성을 강조했던 사상 이였기 때문에 신화의 발전이 미약했다. 또한 송대 이전까지 중국 문학을 이끌어 오는 계층은 시민계층이 아니라 바로 지배층의 귀족 문학 이였다. 선진 시대의 민가 발달 이후로 줄곧 시경과 초사와 같이 글을 알고 글을 쓰는 형식을 아는 사람만이 향유 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문학 이였기 때문에 민간에서 더욱 많이 전래되었을 신화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가 원만히 이루어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물론 초사의 경우에는 시경보다 대단히 감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 많은데 굴원이 쓴 최초의 초사 이소의 경우에 신화의 내용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용 정도에 그칠 뿐 신화에 대한 구체적 저술이나 연구는 아니였다.후대로 와서는 지괴 소설과 같이 기괴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소설로부터 소설들이 발달하지만 신화에 대한 관심에 까지는 크게 못미쳤다.또 최근 근대에는 중국은 공산당의 사상적 결집 속에서 수 십년의 시간을 보냈다.그 사상적 결집은 신화와 부합되는 것이 아니였기에 발전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볼것이다.
운주사는 대학교 1학년 민속과 관련된 수업 시간 이후로 종종 들어온 이름이였다.알고 있다고 믿던 사실의 새로운 발견은 항상 신선함을 느끼게 하는데 운주사로 가는 길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운주사의 이름이 참 운치 있다는 것이다.운주사를 한자로 쓰자면 雲住寺 구름이 머무는 절이라니 절 이름으로 이 보다 더한 낭만이 또 있을까 싶다. 또한 전공이 요즘 세대와 달리 한자와 친해 이 운치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참 기분 좋은 일 이였다.운주사는 사실 요즘 교통이 좋아 사람들도 많이 찾아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정말 산 속 깊은 곳에 구름이 머물 만큼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화순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를 지나는 동안에는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주변도 구경했다.그런데 운주사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논길 밭길의 구불구불한 길들을 따라 가면서는 마음이 한결 차분해 지고 조용해진다.부처님 만나 뵈러 가는 길 정갈히 하고 오라는 뜻에서 이렇게 운주사까지 가는 길은 요즘 같지 않게 구불구불하고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야 하나보다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유명 사찰들은 대부분 산 속에 있지만 운주사 들어가는 길처럼 투박한 맛은 없는 것 같다.교수님께 논두렁에 그냥 불상들이 널부러져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엄마 말로도 몇 년 전에 오셨을 때는 그랬다고 한다. 요즘은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그 땅들은 모두 잔디로 바뀌어 있었다. 운주사에는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불상과 불탑들이 많았는데 내 눈길을 끄는 몇 가지 것들을 소개하자면 먼저 석조불감이다.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돌로 지붕과 방을 만들어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 속으로 부처님 비 맞으실 까봐 지붕도 만들고 방에 모셨나보다 하면서 이 석조불감은 전문가이기보다 일반 부처님을 믿는 신도의 입장에서 토속적으로 만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 원형탑이다. 사실 원형탑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우리 나라에 있는 석탑은 육층 칠층석탑만 있다고 생각했고 사각형 육각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둥그런 원판이 올려진 탑들이 여기 저기서 보이는 것이다.불교를 믿기에 절 집에 잘 다니는 아는 언니에게 물어보니 이 원형탑은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떡탑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 듯도 하다.여기 저기 널려 있는 듯이 있는 석불들은 입체적인 모양이 아니라 평면에 세져진 것 들이였다. 하나 같이 세월의 흔적에 그 모습이 두리 뭉실하게 변해있었지만 그 모습이 편안하고 신비했다.
고대 서양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내라는 숙제에 조금 난감해 진 것이 사실이다.독서를 특별히 싫어한다거나 감상문 쓰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고대적 문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느낌이였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고전의 문체는 쉬운 말도 어렵게 느끼게 하는 고약함을 가지고 있어서 읽는 맛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번 역시 어쩔 수 없이 고역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구나 하고 책을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나의 예감이 멋지게 빗나갔다는 것이다.오이디푸스는 성 심리 시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듣고 알고 있었던 인물이였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를 이번에 알게 됐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아버지를 질투하는 유아기부터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에 붙여진 명칭인데 실제로 오이디푸스는 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사실 이 책에서 놀라운 것은 오이디푸스 한 사람의 기구한 삶이 아니라 오이디푸스라는 작품의 뛰어난 구성력과 치밀하게 짜여진 복선들 그리고 단순히 계산된 트릭 속에서 재미를 추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나름대로의 철학과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이래로 모든 비극들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기에 또 재미가 있는 것인데 우리는 첨단이라는 고대의 것들보다 훨씬 과학적으로 발전된 시간에 살고 있지만 사실 고대를 뛰어 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또한 살고 있는 것이다.테베의 역병이 돌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받게 되고 신탁에 따라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살해자를 숨겨주지도 말라고 그 살해자에게 어떤 탈출구의 여지도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천명한다. 결국 스스로 뱉어낸 말이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올가미가 될 줄은 모르고 있다. 여기서부터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은 시작된다.이보다 한층 더한 비극적 요소는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원래 살던 곳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되도록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으며 평생 마음속에 가장 무거운 짐이자 경계하는 부분 이였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평안할 수 있고 자신의 꿈을 가장 잘 펼친 곳이 바로 가장 큰 불행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공포영화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포를 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으로 자신의 곁에 있던 것들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할 때 제일 크다고 한다.바로 이와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한다. 이것을 소포클레스가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으로써 최선의 선택만을 하고 최고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때 알게 되는 자신의 최악의 선택에서 오는 공포는 그 어느 것에도 비견 될 수 없는 것일 것이다.그리고 인간이 거역 할 수 없는 운명과 그 속에서 인간이 최소한 누릴 수 있는 행운과 안식조차 허락되지 않게 숨막히게 몰아가는 최악의 비극의 상황을 통해 어느 순간에라도 조금의 여유와 능력이 생기면 오만 해 질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무서운 경고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