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송[chanson]; 프랑스어로 ‘노래’라는 뜻199804145 법학과 김동환200100712 언론정보학과 홍혜선조원소개 200300684 사회학과 한선미200404024 생물자원공학부 성인모 200501703 경영학부 원승연< 목 차 >1. 샹송이란 ? --------------------- 32. 샹송의 특징 -------------------- 33. 샹송의 종류 -------------------- 34. 샹송의 내력 ------------------- 45. 19세기 전후의 샹송 ------------- 66. 현대 샹송의 발달 --------------- 97. 한국의 샹송 ------------------- 138. 유명한 샹송가수 ---------------- 139. 조별과제를 마치며 -------------- 191. 샹송이란?샹송이라는 프랑스 말은 스페인의 칸시온이나 이탈리아어의 칸초네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어, 가요라든가 노래를 의미한다. 프랑스의 파퓰러 송을 모두 샹송이라 말해도 무방하지만, 자료를 조사하면서 전통적인 샹송에서 다른 나라들의 노래와는 상이한 몇 가지 특징에 대해 알 수 있었다.2. 샹송의 특징흔히 샹송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일컬어지듯이, 가사가 이야기로 되어 있는 것이 많은 것도 그 특색의 하나이리라. 곡은 쿠플레(couplet)라는 스토리 부분과 르프랭(refrain)이라는 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리고 일상 대화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알기 쉬운 말을 쓰고, 때로는 아르고(은어)를 섞어서 엮는다. 세계 각국의 파퓰러송 중에서도 샹송에서는 특히 가사가 중요시된다. 따라서 샹송 가수는 단지 멜로디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사의 내용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대부분의 가수가 음악 학교는 나오지 않았더라도 대개 딕션(화법) 공부를 하는데, 이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그리고 소리가 아름답다든가 음악적으로 정확하다든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곡을 어떻게 해석하여 개성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에게샹퇴르 드 샤름이라고 한다.이 말은 1930년대에 미성으로 당시를 풍미했던 티노 로시에 대해 처음으로 붙여졌고, 앙드레 클라보에게 계승되었다. 여성 가수의 경우는 샹퇴즈 드 샤름이라 하며, 뤼시엔 부와예 등이 이에 속하지만, 오히려 샹퇴즈 상티망탈(감상적 샹송 여가수)라 불릴 때가 많다. 이밖에 샹송 폴리티크( chanson politique ) 이미 중세 무렵부터 있었던 정치적 샹송, 샹송 앙가제(chanson engagee) 참여 샹송, 프로테스트 샹송, 혹은 샹송 드 메티에(chanson de metier) 직업에 관한 샹송 등 여러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다.4. 샹송의 내력어느 나라에서나 노래는 사람과 함께 태어난다. 샹송의 역사도 아주 오래되어, 아마 2천 년 전 옛날부터 프랑스인은 그들 자신의 노래를 부르 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진보적인 교회의 수도 사나 사제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퍼퓰러 송의 형식을 사용하여, 보다 친해지기 쉬운 전도가를 만들려고 착안했다.이리하여 성자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신의 은총 을 설명한 종교적인 샹송이 태어났다. 그 이외의세속적인 것도 있었음에 틀림없지만, 간행되지는 않은 채 그늘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날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샹송은 라고 일컬어지는데, 이것은 881년 발랑센의 수도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마침내 중세 무렵이 되자, 순례자나 음유 시인들이 샹송을 만들어 그것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즉, 트루바두르라고 불리는 음유 시인은 암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10세기 말부터 13세 경까지 성하게 활약했고, 샹송 드 제스트 등을 불렀다. 트루베르는 이보다 조금 늦게 북부 프랑스에 나타난 음유 시인인데, 주된 레퍼터리는 앞의 것과 같다. 둘 다 작가 겸 가수로서 반드시 자기가 작사, 작곡한 것을 불렀으며, 고귀한 집안의 출신자가 많아 성주들에게도 기사의 대우로 맞아들여졌다. 이에 대해 종글뢰르란 이를테면 떠돌이 가수로서 반드시 자작을 부를 필요는 없었고, 시장이라든가 예배당 등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 노래여 일반 손님에게도 개방했다. 그래서 브뤼앙은 그 자리를 사들여 밀리통이라는 이름의 카바레를 만들고 1895년까지 이곳을 근거로 해서 활약했다.* 카페 콩세르 cafe concert이들 카바레와 나란히 샹송의 발달에 공헌한 것이 카페 콩세르였으며, 이것은 요컨대 음악을 들려주는 음식점을 말한다. 프랑스에 처음으로 카페가 생긴 것은 17세기의 후반인데, 자랑으로 내세우는 커피의 보급과 함께 급속히 퍼져서 민중의 집합소가 되었다. 동업자가 늘어 서로의 경쟁이 심해지자 손님을 끌어모으는 어떤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그래서 1759년에 파바르라는 작가가 카페 앞의 거리에서 탁자를 앞에 놓고 노래와 춤과 곡예를 보여주었다. 1770년 경에는 가게 안에서 노래를 들려주는 카페(카페 샹탕cafe chantant)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카페 콩세르의 시초였다.19세기의 후반에 이르러 카페는 크게 유행했다. 가수들은 계약을 맺고 저마다의 업소에 출연했으며, 그 속에서 인기 스타가 탄생했다. 즉, 현재와 같은 의미의 직업적인 샹송 가수가 나타난 것이다. 카페 콩세르의 대스타로서 우선 꼽아야 할 사람이 이베트 길베르다. 그녀는 근대 샹송의 창법을 확립한 위대한 아티스트였다.가사의 내용을 존중하고 말의 리듬을 살려 풍부한 시정을 자아내면서 노래함과 동시에 이야기하는 현대풍의 창법,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화법을 확립하고, 후배 가수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길베르가 1928년에 쓴 이라는 책은 오늘날의 샹송의 기본이며, 샹송 가수의 금과옥조가 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녀는 옛 민요 수집에도 의욕을 불태워, 11세기부터 19세기까지에 불리고 있었던 노래를 모아 독창회나 강습회를 가끔 열어 이것을 리바이벌시켰다. 따라서 과거의 샹송은 이베트 길베르에 의해 집약되고 그녀를 통해 현대적인 형태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길베르가 전성기를 누린 것은 벨 에포크라고 일컬어지는 1900년 전후였다. 이것은 엄밀하게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가 열렸던 1889년부터 제1차 세계 대렀다. 그 무렵 카지노 드 파리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은, 1924년부터 이곳의 지배인이 된 앙리 바르너이다.그는 본명이 앙리 방탈이라고 하며, 1887년 마르세유 태생이었다. 처음에는 리옹의 극장에서 연극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910년 샤토 도라는 극장에서 레뷰를 상연하여, 쇼 비즈니스계의 거물로 많은 뮤직홀을 경영하는 오스카르 뒤프렌에게 인정받아 콩세르 마이욜, 앙바사되르 드으이 뮤직홀을 대리로 관리했다. 1924년에는 3000명 수용의 대뮤직홀 앙필을 설립하여 제1급의 스타를 출연시키는 동시에 카지노 드 파리에서는 레뷰를 흥행하여, 미스탕게트, 모리스 슈발리에, 조세핀 베이커, 마리 뒤바 등을 키워냈다. 후에 모가돌에서 공연하기도 하다가 1969년 파리에서 타계했다. 또한 앙필은 1931년에 영화관으로 바뀌어, 그 후 서커스와 오페레타를 상연한 적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시네라마의 상영관이 되었다.* 샹송 레알리스트의 융성롤링 투웬티라고 해도 사람들은 쾌활하게 들떠서 떠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한편으로는 불안한 세태를 반영해서 어두운 현실적인 샹송이 융성하여 많은 팬에게 사랑받았다. 그 중심이 되었던 가수가 3대 샹퇴즈 레알리스트라고 일컬어진 다미아, 프렐, 이본 조르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다미아는 뮤직홀 올랭피아의 무대에서 '이제르의 야간 보초'를 초연하여 그 명성을 결정지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이 올랭피아의 지배인은 폴 프랑크였는데, 그가 추구한 의도는 어떤 의미로는 카지노 드 파리의 앙리 바르너와 대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에는 이본 조르주를 올랭피아에서 데뷔시켰고, 1923년에는 외국에서 방랑 생활을 하고 있던 프렐을 파리로 돌아오게 한 것도 그였으며, 1924년에는 리스 고티를 발굴했다.무명 시대의 뤼시엔 부아예도 같은 무렵에 올랭피아의 무대를 밟고 잇었다. 1927년에는 마리 뒤바와 계약했고, 그녀는 여기서 '페드로'를 초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리하여 폴 프랑크는 투르 드 샹의 전통을미국에서 귀환한 그녀는 함께 온 재즈 밴드를 반주로 노래와 춤을 선보여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으나, 병 때문에 쓰러져 미스탕게트와 교체되었다. 1920년대부터 재즈의 기법은 조금씩 샹송 속에 도입되어, 폭스 트로트 풍의 노래 등도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결국은 빌어온 것에 불과하여, 이제까지의 샹송과는 동떨어진 이색적인 분야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레유는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두 가지 면을 완전히 결부시켰다.빠른 말로 리드미컬하게 부르는 독특한 창법을 개척하여, 새로운 형태의 샹송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더구나 그녀의 노래는 클래식 음악의 소양에 뒷받침되어 고상한 부드러움을 결코 잃지 않았다. 미레유는 1906년 파리 태생으로, 3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파리 음악원에서 배웠으나, 손가락이 짧았기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연극으로 전향하여 14세로 첫 무대를 밟았으며, 1926년에는 레뷰의 주역을 맡을 정도까지 되었다. 1931년에 그녀는 작사가인 장 노앙과 알게 되었는데, 노앙은 본명을 장 마리 르그랭이라 하며, 시인 모리스 르그랭의 아들로, 1900년 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변호사를 거쳐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젊은이 대상의 신문을 편집하면서 시를 쓰고 있었다.두 사람은 쉽게 의기투합하여 노앙 작사, 미레유 작곡에 의한 샹송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색다른 그들의 노래는 좀처럼 일반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윽고 그녀는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났다. 1933년에 귀국하자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3년 카지노 드 파리의 레뷰 속에서 듀엣 팀인 필스와 타베(자크 필스와 조르주 타베)가 노앙과 미레유가 만든 '건초 안에 누워서'라는 노래를 불러 대히트시켰고, 그 레코드도 같은 해 4월 ACC 디스트 대상을 수상했던 것이다.이 곡은 미국에서도 앤드류 시스터즈에 의해 불려진 바 있다. 필스는 후에 뤼시엔 부와예나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한 사람인데, 1932년에 알제리 태생의 피아니스트 타베와 컴비를 이루어 이 곡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 장 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