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1942년 2월 16일 러시아 브야츠크에서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는 주장도 있고 브야츠크에서 남쪽으로 500㎞ 떨어진 하마탄 부근에서 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북한의 주장을 따르면 김정일은 백두산의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대체로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1948년 초여름 그의 동생 슈라가 죽었고 이듬해인 1949년 9월22일 어머니를 잃게 되었는데 어머니를 일찍 잃은 이 같은 가정 환경이 김정일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한다.김정일은 1949년 9월 평양 남산인민학교에 입학했고 다음해 6·25전쟁 발발로 만주로 피난가 길림학원에서 공부했다. 1952년 11월에는 만주로 소개되어 온 만경대 혁명가 유자녀 학원(만경대 혁명학원 전신) 3학년에 편입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평양에 돌아와 평양교외에 있는 삼석인민학교로 전학했고 얼마 후 개교한 평양 제4인민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다. 그후 평양의 제1초급중학교를 거쳐, 1960년 고위층 자제들이 다니는 남산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959년 1월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에 참석하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동행했다.김정일은 1964년 3월 김일성 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직후인 6월에 중앙당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중앙당 사업에 참여했고 1967·1971년 당 조직지도부 과장과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73년 당 문학예술부 부장을 거쳐 1973년 9월 당의 조직 및 선전선동담당 비서라는 막강한 지위를 차지했다.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회 위원(정치국원)까지 겸함으로써 김정일은 후계자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 그는 '지도자 동지' 또는 '당중앙'으로 호칭되었으며 33세되던 1975년 2월 15일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김정일은 1980년 10월10~14일 개최된 제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공식적인 제2인자 자리를 . 아버지가 만든 국가를 인계 받았을 뿐, 누구를 숙청한 경험도 없다. 대신 연극 연출이나 영화 제작 등 예술계통에 관심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의 성격과 인품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적 성격을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괴팍하다'는 말도 있지만 '효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양쪽이 다 맞을 것이다. 지난 82년 제가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야오방(胡耀邦) 등의 초대로 중국에 갔을 때 통역자들이 그의 성격에 대해 '덩샤오핑이나 후야오방에 비해 굉장히 괴팍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 대한 효심은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이기적 차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그 동안 국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내성적 성격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우쭐한 자세로 별 달린 군복을 입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외국 손님이 북한을 방문할 때 화려하게 환대하거나 접대하는 일도 드물다. 이를 두고 내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처지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주력하기 때문이다.또한 김정일은 예술적 식견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면서 여러가지 영화제작을 지도했다. 특히 69년에 발표된 '피바다',70년의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72년의 '꽃파는 처녀' 등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아버지의 빨치산 운동 때 얘기를 토대로 극본을 만들었는데, 김일성 주석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양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작품과 비교·연구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 평양의 개선문이나 주체탑도 그가 만들었다.서방세계의 문물에 대한 이해나 수용 정도 역시 한국은 물론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평양에서는 1주일에 한차례씩 당 간부를 대상으로 '평양순보'가 발행되는데 국제뉴스가 빠짐없이 실려 있다. 북한을 '봉쇄된 나라','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다음으로 김정일의 말로써 김정일과 북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 가 되었다. 김정일 체제는 김정일 정권의 과제와 전망에서 보듯이 개방을 통해 경제난을 해결하고 남북문제도 개선 해야 할 것이다.1.북한문제이해, 1999, 통일 교육원2.http://www.dprk.com/kimjongil/who.htm3.김정일과 현대 북한, 오코노기 미사오, 을유문화사4.북한, 그 충격의 실상, 조선일보사5.북한조감, 내외통신사, 북한 상식집6.김정일체제의 역량과 생존전략,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 함택영외 6명1. 이름 : 김정일2. 생년월일 : 1942년 2월 16일 생3. 키 : 165㎝(10㎝ 내외의 「키높이구두」를 착용한다고 함)4. 몸무게 : 85㎏5. 이력1942년 02월 16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와츠꼬예(일명 부아츠크) 빨치산부대에서 출생1945년 08월 함북 웅기를 경유해 구 소련에서 귀국1949년 09월 평양 남산인민학교 입학1949년 06월 22일 생모 김정숙 사망(당시 나이 8세)1950년 07월∼52년 11월 중국 길림학원(피신중인 당 고위간부 자녀들의 임시교육기관)1952년 11월∼53년 08월 「만경대혁명가 유자녀학원」(만경대 혁명학원의 전신) 3학년 편입1953년 08월 평양 귀환.1954년 평양교외의 「삼석인민학교」, 평양 제4인민학교 졸업1957년 평양 「제1초급중학교」 졸업(15세)1960년 「김유라」에서 「김정일」로 개명1960년 07월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민청부위원장 역임(18세)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 입학1962년 김일성과 함께 평양시 사동구역 이현 협동농장 「현지지도」첫 동행(제왕학 수업 시작)1964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1964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22세)1965년 김일성 인도네시아 방문시 동행1967년 당 선전선동부 과장(25세)197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28세)1973년 당중앙위 비서(조직 및 선전담당), 3대혁명소조운동 총책임자(31세)1974년 당 정치위 위원(「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당 미혼 간부대원들과 여성대원들간에 결혼을 장려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아이의 출생이 많아지게 돼싼. 때문에 여단지휘부에선 탁아소를 설치했고 아동단과 소년단 등 조직도 만들어 10세 이하는 아동단에, 10세 이상은 소년단에 편입시켜 일찍부터 사상교육과 함께 군대식 규율을 익히게 했다.아이가 있는 여성대원들은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남자들과 함께 주야로 각종 훈련에 참여했다. 김정일도 1∼4살 시절은 동생 슈라와 함께 대부분을 이곳에서 자랐다. 김정일은 아동 때부터 성격이 괴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증언을 예로 들면 김정일은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을 줄곧 물어뜯었다고 한다.1945년 해방 이후 지난 70년대까지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출생과 관련한 어떠한 사실도 선전하지 않았다. 또한 김정일이 소련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현재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왔다. 오로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해 오고 있다.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김정일의 후계작업이 시작됐으며 그의 카리스마 형성화 작업에서 '정당성', '우월성', '권위성', '자비성' 등을 조작해왔다. 수많은 조작중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그의 '신기성'이다. 그것은 김정일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일명 '백두산 밀영출생 신화'로부터 시작된다.(「백두광명성에 비친 김정일」편에서 서술)김정일은 4살 때 해방과 동시에 김일성을 따라 북한에 입성했다. 그의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시기는 김정일이 8살 때인 1949년 6월22일이다. 그만큼 김정일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서인지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특히 그의 계모 김성애와의 관계도 처음부터 마찰 일변도여서 김정일의 셩격형성에는 악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흔히 김정일은 성격이 괴팍하다고 한다. 실제로 김정일은 어려서부터 장난이 심하고 말썽꾸러기였으며 벌레를 보고는 기어이 죽이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잔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김정일의 성격을 기상으로 향도의 담력을 달래어 미래의 태양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향도의 해발(햇발). 력사의 등대인양 그 빛발은 20세기 80년대의 높은 령마루 우에서 우리 시대의 백전백승의 기치, 김일성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주체혁명위업의 종국적 승리를 위한 투쟁의 앞길을 휘황히 밝혀주고 있다.』또한 88년 11월 16일 북한중앙방송은 "백두산 밀영의 해돋이 바위에서 아침해를 맞아 정일봉에 비춰주면 김정일 동지께서는 용마바위에 올라 장검바위를 비껴드시고 백두산으로 날아 오르셨다"고 김정일을 신기성으로 찬양했다.여기서 정일봉이란 백두산 정상부위의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한 봉우리(해발 1800미터)를 말하는데 김정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북한의 선전기관들은 이 정일봉이 김정일의 이른바 고향집이라는 백두산밀영에서 정확히 2백16미터 거리에 위치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김정일의 생일이 바로 2월 16일이기 때문에 이같은 선전은 우상화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던 것이다.김정일 참모부는 이와 함께 북한의 모든 선전매체들을 동원, 70년대 중반부터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신화를 퍼뜨려 왔다. 각종 문학작품들도 이를 사실적으로 입증이라도 하듯 그가 백두산의 어느 2월 눈 내리는 밤에 성스러운 통나무집(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 막사)에서 태어났다는 장면을 아주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각종 화보에서는 백두산밀림 속의 이 통나무집(70년대 중반에 건조한) 사진을 대대적으로 게재하고 있다.그렇다면 북한은 왜 이토록 김정일이 백두산밀영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왜곡하면서까지 부각시킬까.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시원이 열린 민족의 영산으로서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아로새기고 있는 민족정기의 발원이며 상징이다. 때문에 김일성도 항일혁명 활동의 배경을 백두산으로 미화해 등장시켰으며 그가 이룩한 업적 또한 '백두산 혁명정신'이란 용어로 수식하고 있다.따라서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은 그가 항일무장투쟁의 총성이 울려 퍼지는 백두산밀림 속에서 태어남으로써 운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