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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 현대적 의미의 명당-공교육과 사교육의 명당을 중심
    Title:명당, 공교육과 사교육을 중심으로SubjectProfessorMajorstudent no.Ⅰ. 서 론현대 사회는 인구가 급증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점차로 거대화됨에 따라 복잡해졌으며 기능이 뚜렷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현대사회의 특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인 명당의 개념은 현대사회에서는 적용하기 곤란하다. 다시 말해, 절대적 기준점으로 ‘혈(血)’이라고 불리는 명당 대신에 상대적이고 다양한 기준점에 따라서 명당의 개념이나 규정이 달라질 수 있다.상업시설에서의 명당, 사무실에서의 명당, 주거공간으로서의 명당, 교육환경으로서의 명당 등 기준을 무엇으로 삼는가에 따라서 명당의 위치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인간의 생활공간은 변화하기 때문에 명당의 개념도 변화한다. 수백 년 전의 명당의 개념으로 현대의 생활공간을 설명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의 생활공간으로서의 명당을 규정짓는 일에 소홀하였다. 오히려 과거의 풍수 지리 사상으로 나타난 음택의 입지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며 우리 나라의 70%인 산지를 온통 묘지가 잠식하는 등 비효율적인 국토공간의 이용으로 토지의 부족현상을 초래하였다. 본 주제의 보고서는 현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본문에서는 과거와 달라진 현대적 의미의 명당의 개념을 알아보고, 현대 시대의 가거지로서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로 주목 받고 있는 ‘교육환경’ 적 측면에서 명당의 위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Ⅱ. 본 론1. 전통적 명당의 개념1) 명 당명당(明堂)이란 풍수지리설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이상적 환경으로서의 길지를 뜻하는 개념이다. 풍수지리는 그 원리에 따라 실제의 땅을 해석하려는 방법으로 간룡법(看龍法)․ 장풍법(藏風法)․ 득수법(得水法)․ 정혈법(定穴法)․ 좌향론(坐向論)․ 형국론(形局論)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명당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것은 정혈법(定穴法)이다. 명당은 혈 앞의 땅으로 내명당(청룡, 졌다. 장군대좌형의 대표적인 터는 우암 송시열과 암행어사 박문수의 모터이다.⑥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 - 보검출갑형은 보검의 예리함이 칼집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한번 칼집에서 나오면 '척사(斥邪)의 기상으로 어둠을 물리칠 수 있어서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다.⑦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 매화는 매우 우아한 꽃으로 사랑을 상징하는 백 가지 꽃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친다. 이러한 매화는 떨어지면서 사방이 향기로 가득 차기 때문에 자손이 크게 발복한다.⑧ 금거북이 형국 - 금거북은 하늘에 사는 영물로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해서 만물을 낳는다고 한다. 거북이가 진흙에 빠지는 형국이면 오행에서의 토생금(土生金)이 되어 땅 속의 기운을 더욱 힘차게 빨아들이므로 집터로서 길하다.이와 같이 풍수지리, 명당의 개념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돌아가는 자연의 한 피조물로 인정하여 자연에 의해 인간의 생활양식이 결정된다는 환경 결정론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연과 관계하면서 살아감을 인정한다. 이것은 지나친 숙명론적 사고로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으나 환경 친화적이고 생태적인 전통적 우주관을 반영하는 생활양식과 사고를 형성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환경 문제가 심각한 현대 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며 그 긍정적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4) 이중환의 《택리지》현대사회의 명당이라 함은 환경결정론적인 시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개념의 명당이 더 적합하다. 이중환에 의해 제기된 가거지의 조건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명당의 개념보다 오늘날 말하는 명당의 개념 설명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복거총론」부분에는 사대부들이 살기 좋은 가거지를 선택하는 기준을 제시해 놓았다. 가거지의 기준은 다음의 4가지이다.① 지리(地理) : 개인의 집터, 취락의 입지 조건으로 수구, 야세, 지형, 토색, 수리, 조산, 조수 등을 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② 생리(生利) : 1895년이었다. 그 이전 학교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서당, 학당, 학, 의숙, 공원, 학원, 학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배재학당이 창설된 것은 『배재사(培材史)』에 의하면 고종 22년(1885) 8월로 되어 있으나, 이화학당, 경신학교와 함께 1886년에 설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신교육으로 세워진 배제학당, 이화학당, 경신학당, 정신학당 등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신앙교육으로 시작된 공교육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국의 공교육의 입지는 서양의 공교육의 입지와 오히려 반대로 만들어진다. 기독교가 물론 먼저 들어오고 선교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교육 현장이지만, 성당이나 교회설립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만큼 학교가 세워지고 그 학교 안에서 채플이나 예배를 볼 수 있는 성당의 공간이 마련되었다.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현재 실업계 공교육 기관은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근대실업학교로 최초의 것은 상공학교(商工學校)인데 이 상공학교가 설립된 것은 광무 3년(1899) 5월이었고, 그 관제가 반포된 것은 다음달인 6월이었다. 상공학교는 지방에도 설치할 수 있었고, 관립 이외에 공립과 사립도 설치할 수 있는 규정이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후 일제의 간섭 아래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가 개편될 때 실업교육은 도리어 각광을 받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실업이 사회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이외에, 일제는 한국인에게 인문교육보다 실업교육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융희 3년(1909)에는 실업학교령이 반포되고 뒤이어 실업학교령시행규칙이 반포되어 실업교육이 크게 확충되었다. 우선 실업학교령이 반포되던 해에 관립인천실업학교(官立仁川實業學校)와 공립부산실업학교(公立釜山實業學校)가 설립된 것을 비롯하여 한일합방되던 1910년까지 도립으로 평양실업학교(平壤實業學校), 춘천실업학교(春川實業學校), 군산실업학교(群山實業學校), 정주실업학교(定州實業學校), 제주농림학교(濟州農林學校) 등이 설립되어 1910년 8월 현재의 통계에 의하면 관공립의 실근성이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접근성이 높다는 것은 그 만큼 유동인구가 많고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새로 설립되는 공교육의 입지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 공교육의 입지가 형성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환경을 고려한 입지유형이 바로 그것이다. 유해환경으로부터 분리된 곳이 공교육의 교육환경으로 좋다는 차원에서 주거지역과는 가깝지만 교통밀집지역과는 거리를 두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3. 현대적 의미의 명당-사교육1) 사교육 명당의 역사적 변천① 경당우리나라 사교육의 역사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경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초의 사학인 경당의 기능은 일반 평민과 지방 부호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소규모 형태로 지방에 위치하였다. 일반적으로 경전 읽기와 활 쏘기에 주력하면서, 문무 일치 교육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태학은 사교육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통일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서당의 전신이 된다.②12공도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학으로는 12공도와 서당이 있다. 12도는 유명한 12곳의 사립 대학을 말하며, 오늘날의 사립대학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 공교육 기관과 같이 일차적으로는 관리와 인재 양성을 위한 과거준비였으나, 일반교양을 높이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③서당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교육 기관인 서당은 글방, 서재, 책방이라고도 불리며, 전국에 산재해 있던 범 계급적 교육기관이었다. 초등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한문의 기초, 유교적 예절을 가르치는데 중점을 두었고, 지역사회 교화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또한 사설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개인이나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설립하여 운영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1948년 의무교육제도의 발달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된다.④서원조선시대 서당과 더불어 대표적인 사교육 기관으로 알려진 서원은 백운동 서원을 시작으로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는 사묘에 부속된 존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황에 의해 교화를 위해서, 이라는 감탄사를 자아내고,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듣기 위해 부모님들이 새벽같이 와 긴 줄을 서면서까지 학원 등록을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한 유명 강사의 수업시간은 매우 빡빡하기 때문에 어느 수업은 새벽1시 정도에 시작해서 동이 틀 무렵에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시간에 강의가 이루어진다 하여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그 수업을 듣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다. 이런 유명 강사의 수업은 모두 강남 지역의 유명 학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유명 강사가 유명해진 후에 강남 지역의 학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강남 지역에서 유명 학원 강사가 탄생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강남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전문직 종사자가 많으며,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따라서 다른 지역보다 부유하고, 자녀 교육열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괜찮다 싶은 강사가 생기면 그 입 소문이 무척 빨라 사람들 사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가게 되고, 어느덧 그 강사는 수백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유명한 강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실례로 다음카페(daum café ) 회원 수가 6천명을 육박하는 ‘손사모 (손선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는 강남 학원가의 유명강사의 강의를 들었던 사람,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동호회다. 손선생은 현재 강남대일학원(강남구 대치동), 서초대일학원(서초구), 참배움터학원(송파구), 정일학원(분당) 등 소위 교육8학군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만 한 타임 강의당 최소한 300명 이상의 수강생에게 강의를 하고 있다.② 과외과외 역시 학원과 마찬가지이다. 조사에 따르면 8학군 지역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나온 학생이 타 지역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보다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과목의 과외를 받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학원교육과 마찬가지로 과외 역시 접근성이 높은 곳이 과외 선생님들이 쉽게 갈 수 있고, 과외 또한 경제적 여력이 있는 집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외 선생님의 있다.
    인문/어학| 2004.04.20| 20페이지| 1,500원| 조회(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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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에 나타난 한국형 민족주의 평가A좋아요
    대~한민국 짝짝짝짝짝!-스포츠와 민족주의를 중심으로목차Ⅰ.민족주의란 무엇인가Ⅱ.사례-스포츠 경기를 중심으로1)월드컵2)동계올림픽-쇼트트랙 경기3)축구 한일전4)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Ⅲ. 한국적 민족주의에 대한 의견1) 스포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민족주의의 모습과 이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각2) 객관적 측면에서 바라본 한국적 민족주의 (외국인의 시각)Ⅳ.스포츠와 민족주의의 관계1) 민족주의의 대두와 스포츠2) 민족주의가 스포츠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3) 민족주의가 스포츠에 미치는 악영향 및 악용사례Ⅴ. 스포츠에 대한 한국적 민족주의- 사회학과 교수님 인터뷰- 붉은 악마 02학번 모임 부대표: 우리학교 경영학과 학생Ⅰ. Intro우리나라는 단일 민족 국가로서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민족주의적인 색깔이 사회 모든 전반에 짙게 깔려 있다. 과거에는 국가를 구하는 애국운동으로 국민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으로만 존재하던 민족주의가 현재에는 스포츠와 결합되어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민족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약화되고 있다는 민족적 동질감을 강화하고 자국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빈부의 격차, 학력의 차이,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이 스포츠 하나로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강하다.’ 라는 말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러나 스포츠와 결합된 민족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것의 어떤 의미를 지며 사회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본 조에서는 일반적인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국적 민족주의에 대해 정의해 보고 스포츠를 통해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특수한 ‘한국적 민족주의’의 발현된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다시말해 한국적 민족주의 현상을 월드컵과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한일전 축구, 야구 선수 박찬호 등의 사례를 통하여 스포츠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상을 조사해 그 긍부정적 효과를 고찰해본다.Ⅱ.민족주의란 무엇인가민족주의 『서양에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한국 서양사학회 편, 이상신, 7쪽~관계에 대해 알고자 한다.② 세계적 추세와 스포츠에 나타나는 한국민족주의 성향의 특수성20세기가 저물어가면서 근대 민족국가의 소멸과 탈 민족주의에 대한 심심치않게 제기되고 있다. 그와 함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린 세계화와 정보화가 바로 그러한 경향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지목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근대세계의 기본 단위인 민족국가의 바깥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표상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세계화와 문명의 충돌뿐인가? 이제 곧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서야 할 우리들에게 탈 민족주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다가오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우리가 월드컵에서 보여준 민족주의에 대한 우려 또한 심심치않게 제기되고 있다.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스포츠가 정치논리에 의해 오염되면 안된다는 주장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대형태극기를 물결치게 하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애국가를 부르던 붉은 악마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우월성과 민족적 자만감에 도취되어 있는, 다른 여러 나라들을앞선다는 민족주의적 발상에 따른 행동이라는 지식인들의 정치적 의미부여를 뜻한다고 할수 있다. 붉은 악마류 응원이 국가에 대한 특정한 태도, 즉 고도의 정치적인 관점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는 의견이 속출하고 있지만 이는 스포츠의 정치사회적 성격만을 강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스포츠를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에 연관시켜 해석, 실천하려는 세력에게 스포츠 헤게모니 장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단 스포츠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그것에서 즐거움을 구하는 행위는 그 독자적 영역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접하는 대중 스포츠가 전적으로 국가와 자본이 생산하고 통제하는 궤도 안에서 돌아간다고 하기에는 지극히 극단적인 생각이다. 스포츠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흥종교가아니다.Ⅱ. 사례-스포츠 경기를 중심으로1)2002 월드컵- 붉은 악마현상의 사회적 형성과 의미 월드컵은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겼나 월드컵 평가 대토론회 자료① 6월 항쟁에서 6월 축전으로1987년정도로 늘어났다. 이러한 물질적 변화는 삶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말할 것도 없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소비사회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이러한 개인주의의 우회로를 통해 공공성의 중요성이 새롭게 떠오르는 사회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예가 바로 신세대의 등장이고 팬덤문화이고 붉은 악마인 것이다.붉은 악마 현상이라는 순정한 열광과 그것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구분하는 것은 이 현상을 사회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이다. 소비사회화에 덧붙여 인터넷은 열광의 조작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붉은 악마 현상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놀랍게, 또한 즐겁게 느껴야 할 것은, 다른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자신의 취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는 1970년대와 여러모로 다르게 여겨졌고, 1990년대는 1970년대 및 1980년대와 여러모로 다르게 느껴졌다. 붉은 악마 현상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③ 붉은 악마 현상의 사회적 의미- 민족주의한 때 이나라에서 축구는 사람들이 사회적 중대사에 사회적 중대사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거나 국위를 선양해서 통치자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박스컵이 바로 그 예이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붉은 악마현상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도 잘못은 아닐 것이다. 정부가 나서서 이 현사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라도, 아무튼 축구에 대한 열광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러지기 쉬우니까.그러나 정치의 잘못을 축구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박정희는 명백히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박스컵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열광이 그 의도에 대한 무지나 승인을 뜻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차범근의 환상적인 실력을 보면서 열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정희에게 고마워했던 것은 아니다.땀이 밴다.식상하기는커녕 볼 때마다 새로운 감흥이 돋아납니다. 우리 민족의 끈기와 염원이 담긴 한편의 멋진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입니다. 여름에는 박찬호 선수 보는 맛에 살았는데 요즘은 월드컵 재미로 산다니까요.(한겨레21 1997 11, 01자 기사)물론 이러한 한-일전에서의 승리에 대한 열망은 축구경기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축구 경기는 물론 야구, 배구 등의 각 경기 종목에서 한국과 일본간의 대결은 다른 나라와의 경기보다 부각되었다. 그러한 모습은 언론보도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 중 예를 들면, 배구 경기 한-일전을 예고하는 장면에서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 라는 문구가 삽입되거나 다음의 신문기사가 있다.아시안게임 / 배구 / 강혜미 손끝에 日코트 ''와르르'' (세계일보 2002-10-07자 기사)...한국여자배구가 라이벌 일본을 격파하고 3연승을 질주, 결승진출에 파란불을 켰다.8년만에 아시안게임 정상복귀를 노리고 있는 한국여자배구대표팀은......위력을 발휘해 일본을 3-0(25-19,25-20,25-22)으로 완파했다. 지난해 전적 1승1패여서 이날 한일전은 팽팽한 접전이 예고됐으나 결과는......한국의 압승으로 끝났다.男농구 "日, 組선두 가리자" (세계일보 2002-09-30일자 기사)대회 이틀째인 30일 한국은 남자농구에서 한일전을 치르며...농구=한국과 일본 남자팀이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친다. ......같은 조에 속하게 돼 두 팀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을 다짐하고 있다.야구-농구-배구 일본은 없다(동아일보 2002-10-07일자 기사)대~한민국. 야구와 농구, 배구장에서 승리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이들 3개 종목의 한일대결은 영원한 라이벌전. 한국은 6일 맞붙은 3종목의 대결에서 모두 이겨 관중석을 가득 메운 팬들을 들뜨게 했다.위와 같은 언론의 보도는 한-일전이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보여준다. 즉, 한국인에게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단순한 스포나 하나가 한 국가나 사회에 큰 화제가 되고 경사가 되는 것은 한국사회의 민족주의 과잉 정서를 상징한다. 〃이러한 현상은 해외 스포츠 선수의 활약을 통해서 민족적 우수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하려는 한국사회의 열망을 나타내 준다. 박세리나 박찬호의 활약을 다룬「자랑스러운 대한의 딸」혹은「한국인의 우수성을 미국에 알린 박찬호」등의 기사 제목은 그러한 열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또한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활약하는 선수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애정과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99년도에 박찬호는 야구 경기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퇴장과 함께 7게임 출장정지와 3천 달러 벌금의 중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문화일보 1999년 06월 09일자 기사이때 한국 팬들의 반응은 박찬호의 행동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중앙일보 1999년 6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행해진 설문조사에서 설문에 응한 1만5백여명 가운데 무려 70%가 박찬호의 행동을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지닌 미국 선수들에게 따끔한 본보기를 보인 행동’이었고 ‘메이저 리거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는 반응을 보였다. 중앙일보 1999년 06월 14일자 기사에서 발췌많은 한국인들이 박찬호를 영웅시하면서 그의 폭력적 싸움까지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 선수들이 외국에서 성공하는 것은 곧 한국의 민족적 우수성을 널리 알린 것이며, 따라서 한국 선수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옹호하는 감정이 형성된다. 이러한 지지와 애정은 선수가 한국의 민족적 감정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면 곧 큰 분노와 배신감으로 바뀌기도 한다. 미국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골프선수 박세리가 국적 변경을 시사한 발언이 국내 언론에 전달되자 일반인들의 반응은 허탈감을 넘어 분노로까지 연결된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배신감을 느꼈다"라면서 마치 벌집 쑤신 듯한 한국인의 비난 물결에 놀란 쪽은 정작 미국 언론이었다. '골프 다이제스트' 3월 호의 기사에서는 "그것이 바로 한국적 현상이다(It's Korean세우고
    사회과학| 2002.11.12| 23페이지| 1,000원| 조회(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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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벅스의 신화] 스타벅스의 신화 서평 평가A좋아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하며, 모두와 함께 성공을 축하해야 한다. ”카페라떼, 카페모카, 카라멜 프라프치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스터벅스 커피를 제공하는 하월드 슐츠의 말이다. 기업은 협동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게 되고 한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하월드다. 그는 성공은 나누어 가질 때 가장 달콤한 것이란 것을 일찍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열정으로 다가간다”지금이야 Take out 커피의 선두주자지만 스터벅스의 신화, 하월드 슐츠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루클린의 빈민가인 보조 주택단지에서 전형적인 블루칼라 직종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보람을 느끼지 못했고, 아버지의 직장 역시 그를 종업원으로서의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자란 하월드 슐츠는 나중에 자기가 회사의 사장이 된다면, 종업원에게 최대한으로 대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근이 살았던 하월드는 겨우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연봉 7천5백 달러를 받는 안정적인 셀러리맨이 됐지만 ‘스타벅스’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다시 썼다. 그의 경쟁력은 달갑게 맞아주지 않는 스타벅스에서 비롯된다. 지역적 배타성으로 뉴욕출신인 그를 시애틀 사람들이 반겨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성적이면서도 논리적인 방법으로 커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표현했다.스타벅스 입사로 그의 커피 사랑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하월드가 이태리를 방문했을 때,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바에 그는 크게 매료되었다. 우아한 움직임으로 커피를 만들어 내며 아침인사를 가볍게 건네는 점원과 고객들의 정겨운 대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한 카푸치노의 맛은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무척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이태리의 에스프레소 바를 미국에서 재현시키고자 했다. 시애틀로 돌아온 하월드는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지만 그의 상사는 매우 회의적이었다. 정통 커피문화를 퓨전화하는데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하월온다.”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하던가. 하월드는 자신의 사업구상을 위해 철저한 계획서를 만들었다. 사업시작을 위한 자금유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에 몇몇 투자자들은 그에게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결국 하월드 슐츠란 CEO의 법인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하월드 슐츠란 자연인에게 투자한 것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그의 회사 경영방식은 매우 독특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기업은 부채를 떠안으면서도 사업주가 자신의 주식배당을 확보하고 경영권 유지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는 비록 투자자들이 자신보다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기업의 확실한 성공모델을 제시한다면 그들이 자신의 경영권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투자자들과의 신뢰채널을 확보해 나가면서 그는 마침내 최초의 스토어 일지오날레를 오픈했다. 실전경험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하월드는 전문가 고용의 필요성을 느꼈다..“사람은 존경과 품위로써 대한다.”그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보다 화목한 분위기의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서로의 파티에 초대하며 사적인 관계구축을 통해 동질감을 느꼈다. 이러한 기업 인적관리는 하월드가 훗날 스타벅스를 인수&합병하는데 있어서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그가 스타벅스를 인수하려 했을 때, 이사회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은 그의 그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그를 믿어주었다. 마침내 그는 스타벅스를 인수한다. 본래 인수&합병 후에 인수된 회사의 직원들은 정체된 느낌에 시달린다. 하월드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사원들에게 최대의 후생복리를 약속하며 그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여느 기업들과 달리 의료보험 혜택을 파트타임 직원까지 확대했고 스톡옵션도 제공했다. 앞선 이익에서 급급했다면 그의 이런 처사는 회사의 단기적 전망을 어둡게 만들 수도 있었다. 허나 장기적으로 이직률이 잦은 미국사회에서 사원들의 능숙한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조성해 주고 이직률도 그는 누구나가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쉬운 계획은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생각하고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는 눈앞의 단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좀 더 멀리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지속적인 성공을 생각한 것이었다. 직원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생각하지 않고 사회가 유기체처럼 움직이듯 나무의 가지로 생각했다. 또 완벽하게 보일 지라도 다음 단계의 도약을 고려하는 치밀한 경영을 우선으로 여겼다.그는 스타벅스의 장기적인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반은 필수적인 것이다. 사업 초기에 적자를 보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다. 그래서 흑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 이익을 나누기에 바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월드는 적자를 보고 있는 상황이나 흑자로 돌아서는 상황이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자를 계속하였다. 물론 투자자들은 그들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아 불안해하지만 하월드 슐츠는 그들을 이해시켰다. 버는 것 이상을 투자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주가에 울고 웃지 말고 경영에만 집중하라”스타벅스가 상장회사가 되던 날, 하월드 슐츠를 비롯한 스타벅스 사람들은 기대에 벅차 있었다. 그리고 'SBUX-스타벅스‘라는 이름으로 전광판에 떠오르고 주식 가격은 치솟았다. 그리고 그러한 주가 상승은 쭉 이어졌다. 하지만 주가는 외부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나쁜 소문이 있을 경우 주가는 크게 하락하였다. 그러나 정작 스타벅스는 변한 것이 없었다. 꾸준한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고, 어디에도 커다란 실수는 없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반응하는 주가가 장기적인 스타벅스의 장기적 목표를 가로막고 있었다.스타벅스는 상장된 이후로 크게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은 하월드에게 커다란 문제를 안겨 주었다. 일 지오날레로 출발할 때부터 그는 직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를 잘 알 수 있기를 바랬고 또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회사가 거대화되면서 일일이 세심한 것까지 모두 신경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회맨’을 가까이하라!”하월드는 하워드 비하라는 사람을 고용한다. 그는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흔히 고용된 사람은 회장에게 굽신거리고 회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만 하는 예스맨이 되기 쉽다. 하지만 하워드 비하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말하고 어떻게 보면은 상대방과 싸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솔직함이 종업원들과 경영진 사이를 더욱 편안하게 해 주었고 솔직한 의사소통의 계기가 되었다.이런 직원의 작은 아이디어가 회사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스타벅스는 철저하게 품질관리에 신경을 썼다.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프랜차이즈를 기반으로 하는 것과 달리 커피를 배전부터 스토어를 디자인, 개점, 커피판매까지 모든 것을 자체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이러한 바탕에는 스타벅스 커피의 품질을 최대한으로 보장하여 고객들에게 제공한다는 원칙이 있는 것이다.하월드는 직원들의 작은 아이디어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예가 프라푸치노와 CD 판매였다. 그것은 얼핏보면 커피 회사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추진해 나가 크게 성공한 예이다.“기업은 어떻게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또한 스타벅스가 성장과 더불어 이미지 마케팅에서 신경을 써야 했다. 대기업은 지역문화 파괴 등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춰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스타벅스의 성장은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스타벅스를 흑색선전으로 모함했다. 그럴수록 스타벅스는 그전부터 해오던 기부금이라던가 지역사회의 발전기여하는 등의 사업을 확장하였다. 스타벅스는 그러한 모습으로 그들을 이해시켰던 것이다.스타벅스는 이러한 성장가도를 달리면서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스토어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러한 디자인이 똑같아질 수도 있었지만, 스타벅스는 각각의 지역에 맞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개발하였다. 그래서 디자인팀을 구성하여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변화가 있는 그런 스토어 디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제품 개발에 힘썼다.결국 스타벅스는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하지만 하월드 슐츠는 그런 성공을 혼자서 만끽하지 않았다. 개인의 힘으로써 거둘 수 있는 성공에는 한계가 있다. 개인의 성공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협동하여 얻은 성공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성공은 나누어 가질 때 가장 달콤하다.’는 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협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보게끔 만든다.아침 7시, 눈을 뜬다.반쯤 잠이 덜 깬 난 약간은 부스스한 얼굴로 집을 나선다. 학교 앞 스타벅스 커피는 아침식사 대용으로 즐기는 내 필수품목이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베니건스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나도 모르는 새 내 하루일과는 외식업체인 스타벅스로 시작해 또다른 외식업체인 베니건스에서 끝난다.스타벅스의 신화란 책을 보면서 비단 스타벅스의 성공은 신화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기업철학으로 인간중심의 경영이 이 신화의 밑거름이 되었고, 다른 사람 보다 더 세심하되 지혜롭게 생각하는 CEO의 진심어린 경영이 그 위에 있었다.커피 한잔을 만들어도 다른 사람 보다 더 많은 꿈을 꾸되 현실적으로 생각했고, 다른 사람 보다 더 기대하되 가능성을 생각하는 신중한 선택이 스타벅스의 성공을 이끌어 냈다. 100년 이상 청바지를 만들어온 리바이스 역시 무한대의 활동성을 보장하는 엔지니어 진으로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다. 스타벅스, 리바이스의 예처럼 성공하는 기업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할 줄 안다. 또한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ㅗ은다면, 그들과 함께 더 큰 성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업 인적 철학도 바탕이 되어야 한다.하월드가 만약 혼자 결승선에 도달한다면 공허함만 남게 될 것이며, 결승선에서 모두 함께 한다면 더 큰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기업경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승리할 때 승리는 계속되는 것이다.세계적인 기업, 세계적인 성공가도를 달리는 .
    독후감/창작| 2003.10.22| 4페이지| 1,000원| 조회(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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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 작은 것이 아름답다 평가B괜찮아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E.F 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서론-대형주들이 시장을 주도하던 2000년 전반기 미국 주식시장에서 소형주들이 주도권을 잡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적이 있다. 전통적으로 대형주의 시장 잠식이 당연시 되던 미국 주식시장에서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당시 이같은 추세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시장 가치가 10억 달러 이하인 소형주의 수익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에 대해 한 투자 전략가는 "소형주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단순하고 기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즉 그들이 훨씬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런 소형주 중에는 에너지, 기본원료, 교통관련 회사들의 주식 수익 성장률이 가장 높을 것으로 예측됐다. 이처럼 농경사회-산업사회-기술중심의 정보화 사회로 '발전'해 오면서 더 창조적이고 효과적이며 편하고 즐겁다는 의미를 추구해온 경제상황은 과연 그 중심과 발전이란 부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만든다. 다시말해 '진보' 자체가 미덕일 수 없을 수 있으며 발전을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왜곡돼 있다면 그것의 결과는 결국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일단 E.F 슈마허는 이 '발전'이란 용어에 문제를 제기한다. 발전이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와 집단이 나아가고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지만 인류의 발전, 곧 진보 자체가 반드시 미덕일 수는 없다고 말이다. 즉, 발전을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 문제가 있다면 그는 오히려 해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E.F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통해 현재 기술문명을 논함에 있어 피해갈 수 없는 화두로 '환경'을 통해 기술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경고를 드러낸다. 또한 현대 기술문명 사회의 제반상의 문제점들에 대한 반성적인 성찰을 보이며 '진정한 발전은 무엇인가'라는 또다른 화두를 던져준다.본론- 이 책은 '근대세계', '자원', '제3세계'.'조직과 소유권'이란 주제로 4부로 구성돼 있다. 각 부분에서 E.F 슈마허의 구 없는 것으로 취급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나름에 근거가 있다. 사적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된 적도 없기 때문에 시장에 출현한 적은 없지만 모든 인간활동의 본질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것으로서 공기, 물, 토지, 그리고 사실상 살아있는 자연 전부를 특정 '재화'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그 근거로 인식된다. 이는 경제학적 방법론에 의하면 시장가치나 수익률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만을 중시하는 경제상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소중한 의미를 갖는 자연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하는 초경제학으로 귀결되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초경제학의 한 예로 '불교 경제학'이 제시된다. 불교경제학은 '최소비용, 최대효과'가 그 목적이 아니다. 단지 최소한의 수단으로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는 불교 관점에서 본 노동의 역할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통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것이다. 즉 이런 노동의 본질이 적절하게 평가되고 적용되는 것을 전제한다. 근대경제학은 소비를 경제활동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기며 토지, 노동, 자본 등의 생산 요소들을 그 수단으로 취급한다. 불교 경제학은 이와는 다른 개념으로 적절한 소비패턴(the optimal pattern of consumption)으로 인간의 만족을 극대화하려 한다. 근대경제학에서 최적의 생산패턴(the optimal pattern of productive effort)으로 소비를 극대화 하는 것과 비견된다. 결국 무차별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을 얻기 위해 자연을 개발하고 이용해 가시적인 이익극대를 노리기 보다 최소한으로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자족하자는 것이 불교경제학의 핵심논리다. 그렇다면 과연 최소한이란 것의 범주는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따라서 다음으로 등장하는 문제는 '규모 문제'다. 어떤 규모가 적당한가? 그것은 우리학자들은 미국 인구의 양극화에 대해 언급하며 (미국을)세 개의 거대한 메갈로폴리스 지역으로 구분하는데, 보스톤에서 위싱턴까지 건물이 계속 이어지는 인구6천만 명의 지역, 6천만 명이 살고 있는 시카고와 그 부근 지역,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고까지 건물이 계속 이어지는 인구6천만 명의 서해안 지역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나머지 지역은 실제로 인구가 거의없는 버려진 농촌 소도시가 되어 거대한 콤바인, 대량의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경작되는 토지로 남게 된다. 지금까지 제시한 논리들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 생활수준, 자아실현, 자기완성이란 말을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재화의 문제인가. 인간의 문제인가? 물론 이것은 인간의 문제라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집단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이는 소규모 단위의 다양성을 대처할 수 있도록 분절화된 구조(an articulated structure)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현재의 경제학의 사고방식이 이를 소화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러한) 경제학을 버리고 소규모 경제에 집중 할 수 있는 접근을 가져야 한다.'자원'-지금까지 지속성 있는 발전, 주위와 상호교류하는 발전의 전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발전'이 자원을 이용해 그 산출물을 얻어낸다는 대전제는 변함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이 E.F슈마허의 주장이다. 그는 이런 자원 중 최대의 자원을 교육이라고 제시한다. 현재의 경험 뿐 아니라 기본적인 자원을 공급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모든 경제개발의 결정 요인은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담성, 창의성. 발명, 건설적인 행위는 하나의 분야가 아니라 수많은 분야에서 그것도 한꺼번에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지속시키면서 좀 더 강화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이 인간으 살고 있는 생명체는 오로지 '생산요소'로만 취급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만 사용되고 있다. 최소의 비용을 위시한 공업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E.F슈마허는 "인간이 자연세계와 화해하는 것이 이제는 단순히 바람직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는 허바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한다. 이는 도시화에 따른 이농을 촉진하는 방안을 찾는 것 대신에, 농촌문화를 재건하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람있는 일터로서 토지를 개방하며, 토지 위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가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이라는 세가지 이상을 지향할 수 있는 정책을 모색해야한다고 분석된다. 대규모 기계화와 화학비료 및 농약의 대량 사용이 빚어낸(그리고 흔히 이것들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여겨지는) 농업의 사회구조는 인간이 살아 이쓴 자연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구조는 사실상 폭력, 소외, 환경 파괴와 같은 근대의 가장 위험한 경향을 지지한다. 여기서는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이 거의 논의되는 일 조차 없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무시되는 또다른 사례로서 경제주의라는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이런 '토지'에 대한 사고와 더불어 산업자원까지 고려해보자. 우리의 풍요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되는 공업의 발전은 공업자원으로부터 유래한다. 대부분의 이런 자원들은 한정된 상태적 특징을 가진다. 그것이 지금 모두 발견됐던 그렇지 않던 간에 많은 공업 자원들이 대부분 한번 쓰여지면 재생이 불가능한 일회용인 상태다. 이렇게 한정된 자원상태에도 불구, 선진공업국들은 국내의 인구에 비해 몇 배나 되는 자원을 소모하고 있다. 이런 식의 진행은 가까운 장래일 수도 있고 좀 더 먼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자원은 고갈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공업의 발전은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가.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자원의 소비량을 줄이고, 다른 방안을 찾는 것이 인류의 문명을 오래지킬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있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 중심의 기술'을 제시한다. 인간이 기계발명 이후 인간의 피조물인 기계에 너무나 많은 부분을 의존한 나머지 인간이 오히려 종속된 상태를 경험하게 되고 인간 자신이 창의성과 노동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케 된 것이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 직접적인 생산 시간은 이미 총 사회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대중에 의한 생산에 힘을 실으며 기술을 인간의 실질적인 욕구에 맞게 재편하자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실제 크기에 맞춰 인간은 작은 존재임으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다. 거대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자기파괴로 갈 수 있으며 이제는 방향전환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제3세계 -그렇다면 1,2부의 강대국 상황과 공업화 사회의 선두를 이끌었던 국가들에게 적용되는 E.F슈마허의 논리에 제 3세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선진국들이 범했던 실수의 발자국을 똑같이 따라만 갈 것인가. 우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일단 제3세계 국가들이 '발전' 하는데는 선진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방적이고 대책없는 원조가 아니어야한다. 물질적인 원조와 그 원조를 기틀로 삼을 수 있는 인프라, 교육, 조직, 규율 등이 갖춰지지 않으면 물질적인 원조는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3세계의 개발은 원조국의 입장이 아니라 원조를 받는 국가의 입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또하나 주목할 것은 제3세계에 자본집약적인 기술은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이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 수많은 지역에서 빈익빈 부익부 추세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지만, 기존의 대외원조 과정과 개발계획으로는 이 추세를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것들은 종종 추세를 조장하는 것 같다. 왜나하면 자립 능력이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돕는 것보다 언제나 쉽기 때문이다.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국과 유사한 근대부분이 존재하고 비근대적 부분도 존재하는데, 이 부분은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종사하는 곳이긴 하지만, 그것의 생활방식과 노동방식다.
    사회과학| 2003.10.22| 4페이지| 1,000원| 조회(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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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탈린 ] 스탈린의 생애와 정책
    들어가는말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공산주의를 현실속에서 적용하려는 노력은 레닌에 의해 계속되다 1924년 레닌 사망 후 스탈린에 의해 계승되었다. 권력을 잡고 난 후 스탈린은 근대화란 명분 아래 ‘집단 농장화 정책’과 ‘5 개년 계획’을 세우고 사적 소유는 일체 인정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집권 후, 비밀 경찰(NKVD)을 이용하여 그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공산당 지도자들을 감시, 체포한 후 숙청했다. 비록 공개 재판의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나, 대부분은 증거 없이 또는 날조된 증거에 의해 처형되었다. 비밀 경찰은 단순히 정치적 인물들을 감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라 곳곳에 보내져서 소련 사람들의 모든 생활 영역을 감시했으며, 이런 비밀 경찰의 활동 외에 일반 민간인들의 스파이 활동과 밀고도 많았다. 일단 비밀 경찰에 체포되면 처형을 당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또 스탈린은 자신과 당을 선전하는 데에 여러 기구를 사용했다. 대규모의 선전 캠페인, 교육, 글이나 영화 등은 모두 국가의 통제를 받았으며, 스탈린 '개인 숭배'를 위해 이용되었다.히틀러는 어린 시절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으나 일찍 포기하고 뮌헨으로 가서 살다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입대하여 참전한 히틀러는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뮌헨의 독일노동자당(DAP)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 당은 반자본주의, 반의회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인주의를 표방하는 극우 정당이었다. 1921년부터는 히틀러가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간 이 당은 경제공황으로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상에 오른 히틀러는 민주적인 공화국을 폭력에 기초한 독재국가로 만들었고 전체주의 경찰국가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어떤 형태의 저항도 잔인하게 억압되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 그의 동맹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당 외의 모든 정당을 불허했다.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기본권을 유린했으며 언론을 억압하였다. 히틀러 체제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테러로 대, 높은 생산력을 지닌 적대적인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전면적으로 포위된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는 조건에 처해 있던 소련에서, 유럽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신생 소비에트 체제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최종적으로 무산되고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 도발이 현실적 위협으로 가중되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다름 아닌 스탈린 노선이 소련에서 확립된 데에는 러시아의 국가주의적인 문화적 전통과 사회주의를 시급히 건설하려는 볼셰비키의 주관적 열망 및 스탈린 자신의 정치적 성향 등이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스탈린 공산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① 급격한 공업화로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내는 공산화스탈린은 가능한 한 빨리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고 그 결과 자영농은 분쇄되고농토는 집단운영되었다. 농업과 공업은 5개년 경제 계획에 따른 국가 계획 체제의 일부분이 되었다. 국내의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놀란 만한 속도의 공업화를 이루어냈는데 이는 시장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계획 수립자들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으며 국가가 임금과 가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것은 실제 생산 비용과 관련이 없었다. 또한 국가는 수많은 농장과 공장의 생산 목표를 결정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생산 단위들을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후진국 러시아를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바꾼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하였다.②계급 공동체와 집단주의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무 모순의 사회로 설정, 역사 유물론의 기본 범주인 생산력과 생산 관계를 분리시키고, 생산력을 기술적인 문제로 환원시켰다. 이는 생산력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계급 관계나 근로 생산 계층의 조직 방식을 사상함으로써 단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 대중을 경제적 효율성과 기술적 생산성의 한 단위로서만 파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생산 대중 자신이 노동 과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생산자들의 결합은 결국 위로부터의 강제적통치를 중앙집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로 의욕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근로자의 사명감에 호소하거나 강제력이 사용되었다.독재의 길- 히틀러나치스는 히틀러를 당수로 하여 1933~1945년까지 정권을 장악한 정당으로 정식 명칭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he Deutsche Arbeiterparteri: NSDAP)이다. 여기서 ‘나치’(Nazi)라는 용어는 ‘국가적’(National)의 두 글자와 ‘사회주의’(Sozialismus)의 중간글자 둘을 합한 것이다.여기서 국가주의는 국민의 자유․권리보다는 국가 우선시 하는 것으로 국가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한층 훌륭한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이란 뜻을 가진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사회개조의 사상이란 뜻이다.그러나 국가사회주의라는 당이름과는 달리 나치체제는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히틀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란 흔히 ‘사회적’이라고 불리는 활동들 가령 사회복지사업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를 표방한 이유는 노동자 계급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일 뿐 이였다.① 경제정책히틀러는 경제 정책의 우선 순위를 실업자의 수를 줄이는데 두었다. 그는 정부가 후원하는 대규모 공공 사업을 실시하고 전례가 없는 군비 산업에 힘을 기울였다.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사업, 대규모의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일으키고 기계 대신 인력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 감옥을 대폭 늘리고 군수산업을 진흥시켰다.징집제를 실시하여 5만 이상의 사람을 친위대를 구성하였으며, 여성에게는 결혼 대부금을 지원하여 여성 고용자를 남자 실업자로 대체시켰다. 이리하여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몇 년 안에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파업과 노동조합이 금지되었고, 그 대 기구를 창설함으로써 도태시키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대대 단위까지의 모든 군의 단위에는 해당 지휘관 위에 나치스 지도 요원이 배속되어 당 이념이 선정과 보급, 군의 감시를 위촉받아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단순한 조직 사회로 공동화하였다.Ⅱ. 차별? 억제?스탈린 체제에서 개인 기업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파시즘 아래 나치체제는 비록 많은 정부 간섭이 있었지만 개인 기업이 어느 정도 용납했다.사회적 억제의 측면에서 나치는 인종차별 정책을 따랐지만, 스탈린은 소수민족의 권리를 인정하는 ‘문화적 민주주의 원칙’을 승인했다.스탈린의 국가주의스탈린 공산주의는 국가 계획과 국가 통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었으며 중앙으로부터의 강력한 통제와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1930년대의 소련 중앙 정부는생산 품목, 생산량, 분배 계획을 결정하고 지시하였다. 이처럼 국가가 임금과 가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실제 생산 비용과 국민 대중의 수요는 별개의 문제가 되었다. 또한 국가는 수많은 농장과 공장의 생산 목표를 결정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수많은 생산 단위들을 전체적으로조정하는 일이 쉽지 않아 국가적 불균형과 낭비가 일어났다.결국 스탈린에 있어서 국가는 집권적 계획화와 사회, 경제 관리의 주체로서 시민사회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다고 미리 상정되어 있을 뿐, 시민 사회 내에서 표출되는 다양한 이해의 대립을 조정하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애초부터 상정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국가 우위 사상의 근원은 레닌의 전위당 이론과 러시아 혁명의 수행 과정에서 볼셰비키당이 획득하고 발휘한 지도력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전면화 된 당과 국가 기관의 유착 관계, 당의 역할이 국가의 역할과 융합되고 당이 국가 기관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책을 강제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가의 시민 사회에 대한 우월적 지위가 정당화되다.또한 1936년 헌법에서, 소련에서는 이제 ‘계급 투쟁이 종언되었다’라고 선언된 것이 지닌 정치적 함축도 국가 우위 사상을 정당화하고 있는 자치권을 박탈하고 비독일적인 정신이 담긴 모든 서적을 태워버리는 분서의식을 시초로 각급 학교의 교육 내용을 나치정신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③ 외교 정책나치스당의 외교 정책 목표는 크게 1) 외교 활동의 자유 2) 배상의 중단 3) 1914년 이전에 독일이 누렸던 중․남동 유럽에서의 지위 회복 등이었다. 1932년 로잔 회의에서 이미 독일의 군비 평등권이 보장되었으며, 후버 각서에 의해서 같은 해 배상금 지불은 중단되었다.하지만 히틀러의 외교 목표는 집권 초기부터 1914년의 국경선을 회복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치스 지도자들은 재무장의 초기 단계에서는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베르사유 체제의 수정을 평화적인 방법의 접근인 듯 인식시켰다. 연합국측은 독일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갖추었다고 판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스 정부가 바이마르 공화국보다도 더 민족 자결 원칙과 반볼셰비즘이라는 베르사유 체제에 입각한 정책 노선을 추구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3년 10월 전 년에 체결된 군비 평등 조약이 휴지가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국제 연맹을 탈퇴하였다. 국내에서는 국제 연맹을 베르사유 체제의 연장이라고 판단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대독일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자르 지방을 회복하고, 1936년 비무장 지역인 라인라트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병합하였고 이어서 3백여 만 명의 독일인이 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나중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전부를 병합하였다.나오는 말☞ 히틀러는기본적으로 공산주의를 적대했다. 따라서 히틀러가 등장한 후 독일 내의 공산주의자들은 발견되는 즉시,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히틀러의 권력은 강했지만 나치정부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치정부는 조직이 정비돼 있지 못했고, 권력 서열은 안정적이지 못해서 권력투쟁이 극심했다.☞스탈린은실제로 정치, 경제적으로 공산주의 사회였다GE 1
    인문/어학| 2003.10.22| 10페이지| 1,000원| 조회(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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