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와 이문열의 [선택]을 읽는 동안 나는 많은 혼란을 느꼈다. 한편은 여성에 의해 쓰여진 페미니즘 소설이고 다른 한편은 남성에 의해 쓰여진 페미니즘 소설이란 사실이 나의 혼란을 부채질 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성인 나로서도 이문열의 [선택]을 읽고 기분이 약간은 불쾌했다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 작품은 매우 다르면서도 닮아있기도 했다. 많은 생각들이 나의 생각을 바꾼 것이다.우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등장하는 여성과 [선택]의 여성은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이 몇 년의 차이로 나온 동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것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화 된 작가의 시선에 의해서 말이다. 우선 전자의 여성들은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밝히고, 후자의 여성은 그 삶 자체에 운명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덧씌워 그 것이 인생이라며 순응하고 살아간다. 물론 그 선택 자체가 삶의 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 선택이 미덕이며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있는 감이 없지 않았다.이문열의 [선택]은 바로 여성으로서의 복종하는 삶, 인내하는 삶 또한 아름다운 삶 일수 있고, 그것도 하나의 선택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이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이문열씨 특유의 비판불능의 논리 (비판을 받을 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방식)를 거쳐 나타나있다. 소설 속의 정부인 장씨가 딸, 아내, 며느리, 할머니로서 주어진 위치가 바뀌면서 오늘의 여인에게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며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의 정부인 장씨도 글과 예에 재주가 있으나 여성에게는 그런 것이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며 책과 그 동안 쳐온 서화를 불태워 버리고 집안 살림을 선택한다. 가난한 양반 딸이라 재취자릴 선택하며 가문을 선택한다. 정부인 장씨는 여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딸, 아내, 며느리, 할머니를 선택함으로써 그 선택의 정당성을 외친다. 자기 성취를 위해서 아기 갖기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나는 오직 자신의 혈통승계를 위해 출산을 강요하던 전 시대 남성들의 독선적인 논리와 다름없는 맞은편의 극단을 본다. 가사분담에 대한 너희의 과격한 요구도 가끔씩은 못마땅하다. 남녀의 노동분배가 반드시 논리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타고난 신체의 구조나 성향에 따른 자연적인 분배도 있었음을 기억하는 게 좋다.그러나 나는 그것이 장씨 부인의 선택이지 모든 여성이 선택해야 하는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부인 장씨가 선택한 길은 정부인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겠지만 정부인이 생존한 조선시대의 사회적 환경에 의한 선택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개명한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 선택이 정부인 장씨가 걸어온 길이라도 좋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좋다. 그건 이 시대 여성의 권리이다. 그들에게도 이 시대 환경에서 선택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을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되며, 저마다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가려서도 아니 된다. 각 시대마다 나라마다 그에 걸맞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이 있으므로 조선시대 여인이 오늘의 여성에게 조선시대 가치관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것도 작가가 4백년 전의 여인의 입을 빌려 여성 독자에게 잔말 말고 노예로 살라고 간 큰 행동을 했다. 그 간 큰 선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속한 페미니즘을 지적하기 위함인가.한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과거의 조선시대 여성들보다는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우선은 여성의 성의식이 그렇고 결혼에 대한 개념이 그렇다. 여성도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당당히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에 대한 선택권도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극단적으론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도 여성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가깝게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살아왔던 방식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삶을 영위해 나가는 여성의 모습이 오늘날의 여성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 자신도 인지하고 있듯이 그 많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식을 걱정하고 남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여성이 조선시대의 여성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조금 더 낳아진 것뿐이다.공지영의 작품에서는 여성들의 진솔한 삶의 채취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우리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사했는가 라는 진지한 물음을 했었다. 여성작가 특유의 (경험에서 비롯된) 탁월한 심리 묘사로 인해 혜완, 선영, 경혜의 삶이 우리사회 전반에 걸친 남성위주의 권력구조 하에서 얼마나 힘겹고 버거운가를 느낄 수 있었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극단적으로, 적이 되는 남성을 그리 면서도 여성 자체를 적으로 삼는 여성들에 대한 모순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한다.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이 공유되기 힘든 우리 사회의 조건에서 그런 문제의식을 가장 수월하게 이슈화하고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데는 역시 문화예술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 것이 얄팍한 선전론의 수단으로 머물면 곤란하다. 물론 문화 예술은 공동선의 대중적 환기를 위해 자신을 선전의 매체로 기꺼이 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때도 중요한 것은 주장이 아니라 설득력이다. 그런 면에서 [선택]은 반페미니즘 선전 방법에 설득력을 얻는 것에 실패한 감이 있다. 특별한 케이스를 내세워 그것이 일반적이라고 가변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볼 수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역시 마찬가지다. 꼭 페미니즘적인 틀로서만이 아니라 상식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분노를 사는 남성들을 등장시켜 그 것을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페미니즘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으로 삼는 것은 단순한 일반화의 오류에 가까운 것이다. 일상의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외관으로는 여성 옹호적이지만 실상은 여성 억압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 그래서 사실은 인간 일반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하고 있는 대목 등을 포착하고 문제삼는 것 등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아마 나 같은 평균적인 한국남성은 그런 것에 급소를 찔려 아파하고, 그런 것에서 성찰의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나는 두 작품을 읽는 동안 남편과 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깊게 생각해봤다.여성은 얼마나 두 단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요즘도 남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말은 아주 많다. 흔한 것은 성별이 다른 벗이라는 것인데 아마도 가장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정신적인 추구의 협력자 또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경제 행위의 동반자도 넓은 의미의 벗에 들어갈 것이다. 육체의 정념을 더불어 풀고 삶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달래는 상대로 볼 때도 벗의 뜻이 들어있다. 보호자나 후견인도 남편의 오래된 딴 이름이다. 남편은 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봐주고 감싸주는 존재로서 권위를 인정하는 것인데 남녀의 평등이 손상 받는다는 점에서 요즘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워낙 전통이 깊은 데다 현대의 부부 생활에서도 부분적으로는 여전히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쉬 없어지지 않을 남편의 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