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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미국사] 전통적 연방제의 붕괴와 패권적 연방의 탄생 - 미국 남북전쟁 -
    전통적 연방제의 붕괴와 패권적 연방의 탄생― 미국 남북전쟁 ―I. 서론II. 연방제의 근본적 취약성III. 1850년대의 위기1. 갈등의 정치화2. 정당지지구조의 재편(realignment)3.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IV. 전쟁― 연방정부의 선택V. 결론I. 서론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이 어떠한 원인에 의해 일어났고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가에 관해서는 시기와 입장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전후 30여 년 동안 남부와 북부의 역사가들은 서로 자신들의 지역을 정당화하는 데 전념하였다. 북부의 역사가들은 남부의 농장주들이 사악한 노예제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공격하였고 남부 역사가들은 북부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려고 남부의 제도를 무너뜨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말하였다.) 이후 1890년대와 20세기 초까지의 학계는 당시에 팽배했던 국가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노예제를 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규정하였고 남북전쟁은 결과적으로 근대적 미국으로의 통일을 가져다준 비개인적인 힘의 작용이었다고 해석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 당시에 팽배했던 혁신주의의 물결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경제적 해석이 등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남북전쟁은 본질적으로 산업경제와 농업경제의 대립이었다.) 혁신주의 사가들의 경제적 해석은 1940년대 이후 이른바 수정주의 사가들의 도전에 직면한다. 수정주의 사가들에 의하면 남북전쟁은 비정상적인 적대 감정의 팽배에 기인한 것이었다. 북부와 남부의 여론 주도자들이 지역적 차이에 관한 잘못된 신화를 만들어 서로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조장하였다는 것이다.)이러한 견해들 중에서 승자인 북부 쪽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가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북부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노예제를 미국에서 없애기 위하여 남부와 싸웠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노예 해방이라는 인도적(人道的) 목적을 위해 전쟁이라는 극단의 비(非)인도적 수단을 동원했전쟁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II. 연방제의 근본적 취약성미국의 13개 식민지들은 1776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13개의 공화국이 되었다. 이러한 미국혁명의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권력의 오용에 기인하는 억압, 즉 국가의 폭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신념이었다.) 방가(邦家))들의 연합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합은 공동방위와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방가들 사이의 단순한 동맹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집행부인 연합회의(Confederate Congress)는 과세권과 통상규제권 없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만을 행사하였고, 거기에서 각 방가는 동일하게 한 표를 행사하였다.이러한 연합의 체제로는 미국이 당면한 대내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 미국인들은 마침내 1787년 제헌의회에서 연합에 중앙정부를 세우기 위한 헌법을 초안하였다. 이것이 헌법으로서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전체 방가 수의 ⅔ 이상, 즉 9개 이상의 방가로부터 비준을 받아야 했다. 각 방가의 의회는 비준 문제를 다루기 위해 특별협의회를 소집하였고 그 대표들은 선거를 통해 뽑혔다. 이들은 비준의 찬반을 놓고 연방파와 반연방파로 갈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 전에 결별했던 권력 체계와 비슷한 것이 될지도 모를 국민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 이룩했던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방향을 역전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그들 자신을 혁명으로 인도했던 원칙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상황에 재적용해야 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권력을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원칙 위에서 창조함으로써,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반연방파는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서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오랜 신념― 집중된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에 근거하여 는 아동들의 완구로부터 의류, 농기구 및 조면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생활용품과 생산수단을 북부나 유럽의 제품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남부의 상황 하에서 보호관세는 생계비용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었다. 더구나 당시에 남부의 면화가 미국 전체의 수출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상주의 정책은 북부의 이익을 위한 남부의 일방적 희생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남부는 중상주의에 반대하면서 연방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자유무역을 지지하였다.이렇듯 노예제 문제와 경제구조의 차이는 모두 연방제의 이중적 주권에 관한 논쟁으로 귀결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연방정부입니까, 통합정부입니까? 입헌정부입니까, 절대정부입니까? 각 주들의 주권을 바탕으로 한 정부입니까, 다수의 무제한적인 의지에 기초한 정부입니까? 고삐 풀린 모든 정부 형태가 그렇듯이, 후자를 택하면 궁극적으로 부정, 폭력, 무력이 판치게 될 것입니다.”) 남부 정치가 컬훈(John Calhoun)이 했던 이 말은 남부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고 있으나 당시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2. 정당지지구조의 재편(realignment)중도(中道)의 정신을 바탕으로 끝없는 타협을 통해 헌법을 비준한 것이 선례가 되어 타협을 통한 갈등의 해결과 점진적 변화가 ‘미국적’ 정치 방식을 특징짓는 핵심이 되었다. 실제로 전쟁 전까지 존재했던 대부분의 갈등은 이러한 방식으로 비교적 잘 해결되고 있었다. 특히 의회는 연방파 헌법초안자들이 기대했던 바대로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 ‘미주리 타협’), ‘1850년의 타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의회는 전쟁 전(前) 시기의 갈등들을 훌륭하게 조정하고 있었다.)그런데 1850년대에 이르러 노예제 문제는 미국 사회를 양분하는 최대의 이슈가 되었고, 이 정치적 균열은 남부와 북부라는 지리적 구분과 일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적 지지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민주당과 휘그당은 노예제 문제에 대한 명확한 탈퇴 자체가 전쟁으로 직결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상대로부터 무엇인가를― 영토, 부, 명예, 자유, 권리 등 ― 빼앗기 위한 것이었음을 전제할 때, 남북전쟁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 남북전쟁은 무엇을 빼앗기 위하여 누가 일으킨 전쟁이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우리는 남북전쟁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남북전쟁은 연방정부가 남부 주들의 탈퇴 권리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그렇지만 연방정부가 전쟁을 쉽사리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연방정부의 수반이었던 링컨은 물론 확고한 연방주의자였으나 앞서 살펴본 취임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중도의 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거듭된 고뇌 끝에 그는 결국 무력을 동원하여 연방을 ‘구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연방을 구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그가 구하고자 하는 연방은 전통적 연방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이었다. 토마스 제퍼슨과 같은 반연방파는 물론이거니와, 연방의 권리를 강조하는 연방파 조차도 주의 탈퇴를 무력으로 저지하는 것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 연방제가 중도의 정신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연방파로서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에 따르면, 그 헌법을 비준한 사람들은 “하나의 전체적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아니라 각자가 속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주를 구성하는 개인들”이었다. 매디슨이 보기에 주권을 지닌 것은 주였고 연방정부는 주들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결성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는 완고한 연방주의자였지만 1839년에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탈퇴의 기본적 권리를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만약 각 주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저버리는 날이 온다면 … 우리는 헌법을 구성하고 채택했던 초창기로 되돌아가서 더 이상 결속력을 보이지 못하는 체제를 해체하고 더 완벽한litary governor)라는 선례 없는 직책을 만들었다. 이러한 전시 지사들은 연방에 충성스러운 정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헌법을 준수하지 않아도 되었고, 링컨은 그들에게 “편의에 따라 법적 형태를 취하라”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링컨의 전시 지사 파견은 “주의 내정에까지 간섭하는 연방정부 권한의 급진적인 확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링컨은 점령된 남부 지역에서 민정을 수립하는 일은 행정부의 책임이며 군부에 의해 시행될 것이라고 밝히고, 해방된 노예들의 안전과 연방에 충성하는 소수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재건 과정에 군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이와 같이 링컨은 헌법 안에서 이전의 대통령이나 어느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대통령의 권한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위헌적 권력 장악을 정당화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헌법의 총사령관 조항을 “법률이 안정적으로 집행될 수 있도록 대처한다”라고 하는 대통령의 의무와 결합함으로써, 대통령의 ‘비상대권’이라는 명목으로 일체의 법, 심지어 헌법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백지위임장이 자신에게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역사상 링컨처럼 “행정부 권한의 새로운 근거를 수없이 만들어 내고, 이미 존재했던 행정부 권한을 증대시키고 완수한” 대통령은 없었다.)연방정부가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은 미국의 헌정 질서를 새로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북전쟁으로 헌법 제정 이후 60년간 계속되었던 헌법의 이중적 연방개념에 대한 논쟁은 사라지게 되었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연방 정부와 행정부의 역할이 극적으로 높아지게 되었다.V. 결론전쟁 시기에 일어났던 일련의 정치적 상황들은 반연방파가 우려했던― 연방파가 미국의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던 ― 바로 그것들이었다. 연방은 중상주의라는 획일적 경제 정책을 강제하려 했다. 파당적 갈등의 첨예화는 결국 남부의 탈퇴로 이어졌고 이는 (비록 상비군은 아니었으나) 의회의 동의 없이 소집된 연방군의 출정으로 이어졌다. 전시 남부 시민들에게는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음에도 불
    인문/어학| 2004.12.21| 16페이지| 3,000원| 조회(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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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서양중세문명 서평
    구조를 위한 구조에 역사는 없다 서평자크 르 고프의 은 독특한 관점으로 쓰여진 개설서이다. 저자는 역사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는 표층보다는 변화하지 않는 심층, 즉 장기 지속의 구조에 주목할 것을 역설하면서 중세를 4세기부터 19세기까지로 규정하였다. 로마 제국 말기부터 산업 혁명까지 동일한 구조(봉건적 생산 양식이라는 물질적 구조와 기독교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정신적 구조)가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중세를 '암흑 시대'로, 근대를 진보의 시작으로 단정짓는 단절적 역사 인식을 불식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강조되었던 구조가 표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구조 자체는 어떻게 변화하여 나가는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본 서평에서는 전자의 문제점을 서술 구조와 관련하여 살펴보고, 후자의 문제점을 내용에 있어서 정신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 보려 한다.먼저 전자의 문제점은 구조사의 존재 가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구조 개념은 그것이 어떻게 표피적인 사건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이 병행될 때에만 역사를 설명하는 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서술 구조부터가 그러한 설명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역사적 사건 전개를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서술하였고 2부에서는 구조적 측면을 주제별(공간과 시간, 물질 생활, 사회, 망탈리테)로 서술하였다. 이는 한 마디로 사건사와 구조사가 유리된 서술이다. 한 책 안에 있는 것이 무색할 만큼(마치 일반 개설서 뒤에 중세에 관한 에세이를 붙여놓은 것 같다) 둘 사이에는 커다란 단절이 존재한다. 이 책이 진정한 가치를 지니려면 구조와 사건 사이의 연관성이 내용의 핵심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에 맞는 서술 구조가 도입되어야 한다. 제1부 3장에서 십자군 원정의 원인과 결과를 정신적 구조의 측면에서 고찰한 부분을 바람직한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사건들을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도 좋고, 구조를 먼저 상정하고 그것이 개별 사건들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조의 존재 가치가 표층과의 연관성에 있다는 사실이다.후자의 문제점은 전자와는 달리 구조 자체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다시 구조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와 구조의 변화에 관한 문제로 나누어진다. 구조의 변화에 관해 논의하기 전에 구조 자체가 실제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는지 먼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저자는 중세를 지배한 정신적 구조를 기독교라고 규정하였는데 여기에는 구조를 단일한 것으로 파악하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가 유일한 정신적 구조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피지배층의 정신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 기독교의 장악력은 그렇게 강력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민중들은 의식 구조가 근본적으로 기독교화되지 않은 채 이교 문화의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생 제르맹 수도원의 장원 문서를 보면 거기에 등장하는 한 중세 농부는 다산을 기원하는 이교적 제의를 수행하면서 땅의 정령 이름 대신 예수를 부르고 끝에 '아멘'을 덧붙일 따름이다) Eileen Power, Medieval People, New York: Barnes & Noble, 1966, pp. 18-38.. 이러한 중세의 민중 의식에 관해서는 미시사적 연구들이 괄목한 만한 성과를 보인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세의 정신적 구조는 민중 문화와 엘리트 문화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카를로 진즈부르그, "마녀연회: 민중적 제의인가, 이단 신앙의 전형인가", 미시사란 무엇인가(곽차섭 편, 서울: 푸른역사), 2000.. 결국 기독교는 중세 정신 구조의 전부가 아니라 그 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그러나 저자는 중세의 정신 구조를 이와 같이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중세 문명의 기초를 설명하는 제5장에서 르 고프는 이교 문화와 기독교 정신 사이의 갈등을 화두로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지식인 계층의 학문적 차원에서만 다루었다. 정신적 구조에 대한 본격적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제9장 '망탈리테, 감수성, 태도' 역시 대부분 일부 계층에 국한된 설명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상징, 색과 빛의 의미를 텍스트를 통하여 분석하고 있는데 중세에 문자의 향유는 식자층만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것은 엘리트 계층에 한정된 분석이다. 궁정식 사랑이나 사치에 대한 설명은 그 자체로 귀족이나 부유층에 한정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이제 중세의 정신적 구조가 층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구조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장기 지속을 중시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구조는 정태적이고 억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조는 분명히 변화하며,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역사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기독교 지배 이데올로기가 장기적 중세 속에서 지속되었다고 하였으나 중세의 정신적 구조는 분명 변화를 겪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변화로서 마녀사냥 및 종교재판, 종교개혁, 르네상스) 이들에 관하여 저자는 르네상스를 제외하고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저자는 장기적 중세를 상정하여 놓고 정작 본문에서는 5세기부터 15세기의 전통적 중세만을 다루었으며, 그나마 14-15세기는 짧은 언급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 이후 시기까지 지배 구조가 지속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관건인데 이를 회피한 것은 논지에 있어서 치명적인 타격임에 틀림없다.를 들 수 있을 것이다.먼저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앞서 보았던 층위의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그것은 기독교 지배층이 그때까지 방관하여 왔던 이교적 민중문화를 철저하게 억압, 통제하여 정신 구조를 기독교로 완전하게 통일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구조의 층위 간 역학 관계의 변화를 의미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기존 기독교의 경직, 부패, 무능력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완전히 새로운 교리(Justification by faith)를 갖춘 신교가 등장하여 순식간에 계층을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파급되어 상당 수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칼뱅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장악력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기존 기독교 주도의 본격적 기독교화였다면 종교개혁은 신교를 통한 본격적 기독교화라는 점에서 정신 구조의 혁명적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저자의 언급이 있는데 그는 르네상스를 "권위를 과거에서 찾고 황금 시대를 옛날에서 추구하는 중세의 특징적 현상"(p. 13)으로 규정하면서 중세에 여러 르네상스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의 시작으로 알려진 르네상스(저자는 이를 '대grande' 르네상스라고 불렀다)에는 과거로의 회귀 외에 또 다른 키워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휴머니즘(humanism)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저자는 스스로 휴머니즘을 "고대에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p. 436)이라고 하였다. 르네상스는 휴머니즘을 통하여 오랜 세월 정신세계 전반의 패러다임으로 군림해 왔던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객관화하여 세속화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르네상스는 본격적 기독교화의 시작이었던 종교개혁과는 정반대 의미로 중세 정신 구조의 혁명적 현상이었다.
    독후감/창작| 2003.06.21| 5페이지| 4,000원| 조회(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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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사] 파시즘의 네 가지 주요한 변형(4 Major Variants of Fascism)
    4 Major Variants of Fascism제2차 세계대전 이전, 오로지 두 파시스트 운동만이 권력을 장악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파시스트 체제를 창출하였다. 나찌 독일의 영향과 결부된 공황 여파의 과격화가 몇몇 국가들에 파시스트 운동의 주요한 자극을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의미 있는 지지를 가까스로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독립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스페인, 헝가리, 루마니아의 사례는 특별히 주목해 볼만 한데, 이들은 비록 짧긴 하였지만 다른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파시스트 운동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는 권위적 민족주의의 세 얼굴을 유럽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두 온건우익 권위주의 분파(기독사회당[Christian Social Party]과 범게르만주의 집단[pan-German groups]), 향방단(鄕防團, Heimwehr)이 주도했던 보다 과격하고 공공연하게 권위주의적이며 폭력적인 우익 분파, Austrian Nazis의 형태로 존재하던 혁명적 파시스트 민족주의자들.오스트리아 공화국은 처음 15년 동안 기독사회당과 그 주요 반대세력인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s)에 의해 지배되었다. 둘은 원래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옹호하였으나 이는 평화 조약에 의해 금지되어 있었으며, 평탄치 않은 협조를 통해 새로운 의회 체제를 구축하였으나 민주주의 지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권위적 행동주의를 옹호했던 가장 중요한 단체는 향방단이었는데, 이는 거대한 유입의 시기에 국경을 지키고 맑시즘으로부터 보수적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창설된 몇 개의 준(準)군사단체 중 가장 큰 것이었다. 향방단은 독일의 Freikorps에 어느 정도 대응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민족주의, 준군사적 행동주의, 좌파에 대한 반대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향방단은 확고한 조직적 통일성이나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를 구축하지는 못하였다.보수파와 사회주의당파와의 마찰은 1927년에찌 독일을 배격하고 그의 정부의 카톨릭적 가치를 역설하면서 게르만 문화의 보고(寶庫)는 이제 오스트리아라고 선언하였다.사회주의자들의 패배 이후 이제 체제의 주적이 된 오스트리아 나찌는 테러리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6월에 일어난 쿠데타 시도에서 마찰은 절정에 달하였고 여기에서 돌푸스가 살해되었다. 그러나 쿠데타는 반란자들에 대한 완전 진압으로 끝이 났으며 돌푸스의 체제는 슈슈니크(Kurt von Schuschnigg)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향방단장이었던 슈타헴베르크(Starhemberg)는 1933-34 동안 부수상으로 임명되었으나 날이 갈수록 슈슈니크의 온건성과 반파시즘적 성격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1936년 결국 그는 해임 당하고 향방단은 정부 명령에 의해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 체제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박해, 인종주의, 활동적 반유태주의에 반대했던 비교적 신실한 기독교도들이었다. 새로운 헌법은 모든 시민들의 평등을 보장하였지만 독립적 정당을 창설할 권리는 주지 않았다. 유태인들에 대한 비공식적 차별이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많은 오스트리아 유태인들(가장 주목할 만한 이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은 돌푸스-슈슈니크 체제를 나찌즘에 대한 문명화된 보루로서 지지하였다.체제는 제한된 외적 파시즘화를 겪기는 하였다. 조국전선은 향방단과 다른 우파 준군사단체들을 대체하기 위해 1936년 전선군(Frontmiliz)을 창설하였다. 1937년 중엽에는 Sturmkorps라고 하는 특별한 엘리트 주축이 조직되었다. Sturmkorps원들은 군청색 제복을 입었으며 "우리의 의지가 법이 될 것이다(Unser Wille werde Gesetz)"라는 모토를 도입하였다. 청년 운동과 다양한 국가 사회 단체들이 형성되었으나 체제는 의식적으로 파시즘 특유의 강령과 목표는 회피하였다. 체제는 애국적인 기독교도 오스트리아인 외에 혁명적 '신(新)인간'을 배출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고 불필요한 폭력, 군사주의, 그 어떤 공격적인 대외정책도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결국 오각한 저항 없이 19세기 초기의 엘리트적 자유주의 모델이 1930년대까지 지속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와 유사하게, 문화적 삶은 19세기 자유주의 또는 전통적 기독교주의의 가치와 태도에 지배된 채 새로운 주의나 철학의 도입, 확산을 막았다.제1차 세계대전에 즈음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진행되었던 좌경화가 스페인에서도 1917년에서 1923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의 군사쿠데타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는 193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하였으나 분명한 강령과 새로운 제도의 부족으로 실패하였다. 이는 군주제의 폐지로 이어져 1931년 스페인 제2 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스페인 공화국은 1930년대에 있어서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조류에 반하는 유일한 정치체였다. 그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만의 고유한 성향을 정립시키려 하였다. 공화국은 처음에 중산층 공화주의자들과 개혁적 사회주의자들 간의 동맹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1931년과 1933년 사이에 일련의 개혁들을 시도하였는데 그 중에는 카톨릭 박해로 변질된 정교분리와 같이 역효과를 낸 것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권위주의 우파가 형성되었으며 1933년 공화국의 두 번째 선거에서는 중도파와 우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민주적 개혁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난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이른 바 혁명적 볼셰비키화에 접어들어 1934년에 폭동을 일으켰다. 1936년 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점으로부터 스페인은 역사가들이 이른 바 전(前)혁명적[prerevolutionary] 상황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무질서, 거리 폭동, 파업, 재산의 파괴 및 몰수를 의미했다. 이것이 1936년 7월에 시작된 내전의 배경이 되었다.공화국 하에서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의 세 변형들(보수, 과격우익, 파시스트)이 명확한 형태를 갖추었다. 온건하고 명목 상 합법적인 조합 권위주의가 CEDA(Spanish Confederation of 였다. 지방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속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정치적 기독교주의가 자유주의나 좌파에 대한 가장 유력한 대안이 된 것도 한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1930년대에 좌파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나라가 스페인이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하였다.내전에서는 우익 쿠데타 군부가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그 지도자였던 프랑코는 1936년 독재체제를 수립하고 1937년에는 팔랑헤를 기초로 카를로스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우파들을 통합하여 유일 정당(Falange Espa yola Tradicionalista)을 창설하였다. 프랑코 체제는 파시즘 체제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일반적 파시즘에 의해 정립되고 지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팔랑헤는 새 체제에서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였고 카를로스주의와의 합병을 의미하는 Tradicionalista라는 형용사는 주류 우익의 파시즘에 대한 제약을 암시하였다. 따라서 프랑코 체제는 준(準)파시스트[semifascist]의 범주에 넣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헝가리간전기(間戰期) 유럽에서 헝가리는 사람마다 복잡다양하게 파시스트적, 준파시스트적, 또는 우익 과격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상을 받을 만할 것이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토적, 인구적 손실로 보아 전쟁으로 인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나라였을 것이다. 이는 1919년 혁명적 공산주의 독재였던 벨라 쿤(Bela Kun) 체제에 의해 잠시 지배되었다. 그 사회적 구조의 제한된 발전에 비해 헝가리는 미고용되거나 불완전고용된 거대한 국가 관료 중류층을 가지고 있었다. 국토의 절단은 잃은 영토로부터 교육받은 중류층과 하층 젠트리의 거대한 유입을 야기하였다. 부분적으로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잔류해 있던 헝가리는 전쟁 이전 제국의 규모와 같은 공무행정을 유지하였으나 그것은 훨씬 적은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형편없는 급여와 커다란 불만을 낳았다. 헝가리 문화는 과격 민족주의를 강조했던 독일어권 세계의 지적 문학적 조류에 편승하고of Work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그 문장 때문에 Scythe Cross로 알려졌다. 이 당은 원조 나찌의 사회 프로그램을 헝가리에 도입할 것을 추구하였다. 1933년 동안 세 개의 새로운 민족사회주의 당들이 조직되었다. Zoltan Mesko는 Hungarian National Socialist Agricultural Laborers and Workers Party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은 그 이름과는 달리 대부분의 지지를 농촌 중류층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었다. Sandor Festetics는 Hungarian National Socialist People's Party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원조 나찌의 25개 강령들을 대부분 차용하였고 Fidel Palffy는 또 다른 National Social Party를 창설하였는데 이는 NSDAP의 만(卍)자 십자장과 프로그램을 둘 다 받아들였으며 SA와 SS의 축소판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 두 분파는 정부의 의해 즉각 금지되었다.사회적으로 가장 급진적이었던 두 지도자는 Boszormeny와 Mesko였는데 이들은 그들의 단체들을 하나의 National Socialist Party of Hungary로 재조직하였으나 1935년 11월 Palffy는 가까스로 Mesko를 축출하고 조직을 혼자서 장악하였다. Mesko는 이후 그의 오래된 Hungarian National Socialist Agricultural Laborers and Workers Party를 재건립하였다. 이 소조직들 중 유일하게 국가적 사건의 책동으로 나아간 것은 Scythe Cross였는데 이는 1936년 노동자의 날에 반란을 기도하였다. 이것은 즉시 실패하였다. 지도자였던 Boszormeny는 망명하였고 그의 추종자 87명은 투옥되었다.유일하게 중요했던 파시스트 운동은 살라시(Ferenc Szalasi)에 의해 창설된 화살십자단이었다. 살라시는 1931년 경 헝가리주의(Hungarism)를 발전시켰다. 이것은 카르파티아-다뉴브 대조국(Carpa.
    인문/어학| 2003.06.19| 9페이지| 1,000원| 조회(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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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코올과 예술가>에 관한 분석적 감상
    술과 친한 예술- 를 읽고 -예술가에게 술은 묘약인가 독약인가? 이러한 류의 질문이 대부분 안고 있는 이분법의 함정을 피한다면 "예술 활동에 있어서 술의 도움을 받는 예술가가 있을 수 있지만 지나친 음주는 그의 인생을 파괴할 수 있다." 정도의 모범 답안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모범 답안답게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중의 잣대를 사용한 분석이다. 앞의 질문은 음주가 예술가보다는 예술 그 자체에 기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예술이 아닌 예술'가', 즉 인간의 신체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면 지나친 음주는 논란의 여지없이 해로운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따라서 에밀 졸라가 그의 대표작 에서 "술이 민중을 잡아먹고 있다"며 육체적, 정신적 타락을 가져다주는 술집을 폐쇄하고 대신 학교를 지으라고 부르짖었다던가, 주정뱅이 부친을 두어 우울한 청년기를 보낸 제임스 조이스가 에서 “알코올 중독자는 한번도 자신에게 가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며 술 취한 가장들을 통렬히 비판했다던가, 모파상이 에서 술 취해 아내를 패고 또 팬 뒤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아침 자신의 옆에 잠든 아내 대신 피에 엉켜 형체를 알 수 없는 살덩이 몇 점이 나뒹굴고 있음을 발견하는 남편 이야기를 썼다던가 하는 것으로 술이 예술가에게 해롭다는 증거를 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식으로 따지면 술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롭다. 주목하여야 할 것은 인간이 아닌 예술에 대해 술이 기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책에는 그것에 대해 긍정적인 예들이 나와 있다. 술이 예술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술과 관련된 예술의 역할과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먼저 음주는 사회, 제도, 가치, 기존 질서에 대한 참여, 도피, 비판, 반란으로서의 예술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그것에 기여하며 그것을 촉진한다. 보들레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전의 문인들이 귀족으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생활을 했던 데 반해 부르주아 계급이 돈으로 사회의 주도권을 쥔 20세기에 보들레르는 '상징적 지위실추'를 최초로 인식했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 지위실추를 알리기 위해 그가 찾아낸 방식은 댄디즘이었다. 그는 요란한 색채의 벨벳 옷을 입었고, 실크 조끼 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외알박이 안경을 걸쳤으며, 머리카락을 초록색으로 물들이기도 했고, 일부러 동성애자처럼 보이려고 했으며, 가는 곳마다 주변사람들의 경멸을 사려고 애썼다. 댄디즘이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공장들을 건설하던 시대에 초연함과 기괴한 독창성을 주장하는 것이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귀족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눈에는 봉급의 효용가치와 그것이 전제하는 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둔 부르주아의 생활방식만큼 추악한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유용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언제나 더없이 흉측한 것으로 보였다.한편 음주는 예술의 속성에 있어서 순간성, 즉 시간의 예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구체적인 장르로 환언하면 문학이나 미술보다는 음악에 있어서 시간의 문제가 중요하다. 문학이나 미술은 작품이 완성되면 그것이 물리적으로 남아 있어 영속적으로 감상된다. 그러나 음악가는 음악 창작을 '완성'함으로써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예술을 한다. 음악가에게 있어 주된 예술 활동은 앨범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하는 것이다. 이 때 음악이라는 예술은 시간상에 존재한다. 음주는 그러한 예술의 시간에 촉매가 될 수 있다. 취한 '시간'을 예술의 '시간'과 일치시킬 때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즉흥 연주를 백미로 하는 재즈는 그런 면에서 술로부터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it'을 찾는 데 술은 불가결한 도구였을 것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힙합이 또한 그러하다. 힙합의 백미는 각운(rhyme)을 맞추는 즉흥 랩(rap)에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가사가 있어 앞서 살펴본 사회 비판의 내용적 측면까지 들어간다. 힙합이 술과 마약에 절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그런데 작품을 완성시켜 영속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창작 활동의 '과정'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미술에서도 시간은 중요할 수 있으며, 따라서 술이 거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잭 케루악은 재즈의 밥(bop) 양식을 글쓰기에 도입하여 즉흥성을 살렸고, 써놓은 원고를 끌어안고 끙끙 앓으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몇 번씩 새로 썼으며, 글쓰기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120피트의 종이를 이어 타자를 쳤다. 시를 써서 남기는 것보다는 읊는 것을 즐겼던 중국의 시선(詩仙)들은 곧 주선(酒仙)들이었으며, 취화선(醉畵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겼을 뿐 자신의 작품이 후대에 전해지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술은 예술 작품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의미 부여와 예술의 내용에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문/어학| 2003.06.19| 3페이지| 1,000원| 조회(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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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프랑스혁명의 가족로망스' 에 관한 분석적 감상 평가B괜찮아요
    에 관한 분석적 감상1.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무엇인가?프랑스혁명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그 자자한 명성 때문에 오히려 사건 자체가 이념적, 추상적으로 이해된 채 화석화되어 있는 것 같다. 프랑스 혁명이 곧 자유, 평등, 박애의 발현이라는 이해는 진부하다 못해 유아적이기까지 하다. 당시 프랑스인들 모두가 루소 같은 위대한 사상가였을 리 만무하다. 사실 프랑스혁명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프랑스인들은 신과 동격으로 여겨지던 그들의 왕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엽기적(!)인 일을 행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여 준다.저자는 사회적 무의식의 차원에서 프랑스 혁명 전후시기의 권력, 권위, 정통성 그리고 성별간의 갈등의 문제에 대해 다각적이면서도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녀는 이른바 신문화사적 방법론으로서 소설, 신문, 포르노그라피, 회화 등의 비정통적인 사료들을 동원하였다. 이는 일상과 문화의 차원이라는 역사학의 새로운 영역을 새로운 방법론으로 개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정치권력의 동인으로서 정치적 무의식, 즉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스며있는 정치문화의 존재를 발견해 낸 것은 말 그대로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아울러 '박애'는 사실 '형제애'였고, 프랑스 혁명은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남성 중심의 반쪽 혁명이었다는 책의 결론은 여성사에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2. 무의식이 혁명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저자는 혁명의 원인을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견해를 원용하여 무의식적 차원에서 분석한다. 저자가 원용한 프로이트의 견해는 에 속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선사시대에 아들들은 아버지가 모든 여성을 독점하고 자라나는 아들을 쫓아버렸다는 이유로 서로 단합해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몸을 먹어버렸다. 그들은 아버지를 먹음으로써 아버지와의 동일화를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저지르고 나서 느끼게된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두 가지 터부를 만들었다.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토템동물을 죽이는 것에 대한 터부, 또 한가지는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이다. 이들은 각각 종교와 친족이라는 사회제도를 발생시켰고, 그 결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두 가지 중요한 소망(부친살해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을 효과적으로 억압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지라르는 의식적 희생이라고 하는 절차가 공동체의 폭력에 대한 공동체 자체의 공포를 숨기고 위장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단지 아버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될지 모르는 희생양을 뽑는 일은 지라르에게 있어서 모든 신화, 의식, 친족 제도의 진정한 기원으로서, 상징적 사고 자체의 진정한 기원이 된다.이러한 무의식에 관한 견해를 원용하는 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프로이트의 견해는 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이것을 곧바로 왕과 국민 사이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왕이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가족의 정신분석학을 국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국가는 규모에서나 구조에서나 본질적으로 다른 개체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왕과 국민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가시적이며 의식적이다. 왕이 아버지와 같다는 '무의식적' 이미지보다는 국가와 가정, 왕과 아버지에 대한 '의식적' 분리가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다.또한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견해는 인간의 무의식에 관한 것으로서 완전히 증명되기 어려운 차원의 것이며, 게다가 그러한 무의식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무리 선사시대라고 해도 모든 아들들이 아버지를 잡아먹었을 리 없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가 사실이라고 해도 실제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일이 실행되기는 어렵다. 그런데 저자의 견해는 혁명이 곧 이러한 무의식의 실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의식적 통제가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아는 원초아에 대한 초자아의 규제로 규정된다는 것이 또한 프로이트의 견해가 아니었던가. 프랑스 혁명은 부친살해가 가능했던 선사시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게다가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의식적 행위 중에서도 고도로 정제된 의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옳다. 그 중에서도 혁명은 사회적 맥락까지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만약 무의식을 혁명의 원인으로 친다면 혁명은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무의식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무의식을 혁명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의식 차원의 분석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을 '원인'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유용한 다른 각도의 '해석'이 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서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다. 무의식과 의식은 실제로 공존하고 있다. 혁명의 원인은 의식적으로 찾되 혁명기 인간의 심리 상태를 무의식의 차원에서 고찰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의미 있는 일이다.
    독후감/창작| 2003.05.06| 3페이지| 1,000원| 조회(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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