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 ? 鄕 학계의 분기와 京華士族조선 전기의 사림파를 계승하여 조선 정계 ? 학계를 장악하는 山林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 학계는 조선사회를 이끌어가게 되고 조선사회의 지도 이념으로서 朝鮮朱子學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이 단계에서 이미 정치적 이념이나 학문관의 차이로 인한 붕당간의 대립을 가져 오지만 이미 이것은 조선주학자들이 구현 하고자 하였던 學問政治의 이념이나, 正統 ? 異端 ? 君子 ? 小人을 엄격하게 분별하는 주자학적 명분론의 속성으로부터 예정됬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퇴계 ? 율곡 이후 뚜렷이 그 계통을 달리 하였던 노론 ? 소론 ? 남인의 각 정파 ? 학파의 학풍과 학통 전승과정에서는 당시의 조선 사회의 변화 과정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 되었을 것이다.우선 퇴계 ? 남명 그리고 서경덕의 문하 학자로 구성되었던 동인 학자들의 경우, 南北分黨을 거쳐 광해군의 大北政權의 몰락 이후에는 북인계열 학자들까지도 퇴계의 적통 계승을 표방하는 남인학파로 결집되어가기에 이른다. 하지만 1695년 甲戌換局 이후 서인으로부터 결정적 타격을 입고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자, 영남의 향촌 근거지로 완전히 밀려난 영남남인 세력은 경 ? 향 분기의 사회 추세와 경 ? 향 학계분기의 한 극단에 서서 정통 주자학을 고수하는 것이 불가피 하였다. 집권 노론학자들조차도 무시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의 퇴계학풍과 학통으로부터 이들의 존립 기반이었고 또 향촌사회 내의 위세를 보장 받는 길이었다. 한편 기호남인들은 일부는 영조의 탕평정권에 참여하였으며, 노 ? 소론 학자들과도 활발히 교유하는 등 개방적 학풍을 이루었으며 훗날 개화기의 개명적 지식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星湖 이후 허훈(許薰)계열과 정약용(丁若鏞)의 두 계열로 나뉘어 학풍의 전승이 이루어 진다. 반면에 동인에 대립하여 학파를 형성하였던 서인의 경우엔 숙종대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회니지쟁(懷尼之爭)이후 노 ? 소론이 분립함으로써 학통도 달리 계승하게 되었다. 송시열을 추종하였던 노론의 경우 율곡 이이의 계승하였음을 표방하였고, 윤증을 추종했던 소론은 조광조와 성혼를 표방하는 학통관을 성립시켰다. 소론은 영조 ? 정조대 국왕 주도의 탕평론에 호응하고 노론독주를 견제하려 한 국왕의 배려에 부흥하는 정치세력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장기간 지속되는 노론정권의 정치상황에서 소론의 행촌의 재지적 기반에 극히 위축되어 학통이 점차 강필효(姜必孝)같은 주변인물로 계승되어갔다. 반면 영조를 뒷받침하여 즉위시킴으로써 영조대 이후 조선정계를 주도하게된 노론세력은 학계 ? 사상계의 주도권을 쥐고 어느 세력보다 유력한 학파를 형성했다. 하지만 숙종대 후반 이들은 송시열을 계승하는 두 계열의 학맥으로나뉘어 심성논쟁을 펼쳐 人物性異 ? 聖凡心異를 주장하는 호서지방의 호론(湖論)과 人物性同 ? 聖凡心同을 주잫하는 서울 근거지의 낙론(洛論)으로 분립하였다. 호론은 순조이후 크게 쇠퇴하였으나 낙론은 영조대 후반 노론정류로 결집하여 정조의 친위관료로 대거 진출하고, 순조대 이후로는 세도가나 경화거족적 문벌관료가 되어 중앙의 경화학계도 주도하게 되었다. 낙론은 누대에 걸친 서울 생활로 문벌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자제 교육도 재야 산림을 찾음이 없이 점차 재야산림의 학풍과 학통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의 산림학자들의 정치적 위치는 우암 이래 선배 산림학자들이 비록 서울에서 떨어진 향촌에 머무른 재야지식인임에도 전사회적 영도력을 행사하였던것에 전혀 미치지 못하였다. 이들은 실제로는 외척세도가들에게 지위를 넘겨준 채 그들의 보조자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기에 경향학계와 주변의 이러한 동향을 주시하면서 서울 경화사족과 기성 산림학자들까지도 비판하는 세력이 재야에서 새로이 나타나는데 호남(湖南)지방의 재야유림 세력이 그들로서, 이들은 전통적인 주자주의적 의리지학풍을 다시 현양하면서 그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왔다. 이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보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는데 경화사족들이 앞장서 수용하던 청조문물 및 서양풍과 서양문물도 강력히 배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60년대 위정척사론은 망국에 이르는 격동기에 한계속에서나마 의병투쟁과 반일투쟁을 전개하는 실천력을 보이면서 재야유림으로써 독특한 입지를 확보하였다. 이들의 대두는 19세기 경 ? 향 학계 분기의 일 면모였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랫동안 중앙과의 연결을 희구하여 왔던 향유들로써는 신분이나 出自가 무의미해진 명분론 약화의 시대 흐름에 편승하여 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 나가는 셈이었다. 즉 순조대 이후 19세기 노론학계의 전면적 재편과 분열은 전통적인 노론주자학의 학문적 전통성이 분괴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는 경향학계의 분기와 산림의 영향력 쇠퇴, 그리고 주자학에 대한 사회 전반의 신뢰약화에 나타난 현상이었다.영 ? 정조대 핵심적 산림학자의 후배 ? 문생 ? 제자 ? 후배들은 서울의 경화사족적 관료학자로 전환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경화학계는 조선사회 전체를 주도하는 위치로까지 부상하였다. 이들은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이후 정조대에 문벌을 이루었으며 그중 일부는 순조대 이후 세도정권에 참여하는 세도가와 경화거족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쇠퇴해 가는 산림학자나 유림으로부터 전통 주자학풍을 계승하기 보다는 서울 부근의 학자를 찾아 수업하거나 가내에서 기초를 닦고 가학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물론 이들 가운데도 외척세도에 대하여는 일부의 반대 입장을 포함하여 여러 갈래의 대응이 있었고 경화거족간의 분기도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선 노론산림의 직접적 문하생으로서 정조 ? 순조대의 경화학계의 한 학파를 구성하고 있던 것은 홍대용 ? 박지원등과 그 후배 문생의 부류들이었다. 흔히들 북학파로 불리우는 이들은 소론 ? 남인의 경화사족적 지식인들과도 당색과 학파를 뛰어넘어 교류하는등 이들의 폭넓은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가면 이들은 시대문제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며 개화지식인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19세기 이래 조선 사회가 맞았던 심각한 대내외적 위기와 모순앞에서, 재편과정에 처하였던 조선학계와 사상계는 경 ? 향의 학계 모두는 제각기 사상적 고립성과 보수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경 ? 향의 분기에 따른 이러한 학계 재편과정에서 산림에 연원을 두었던 경화학계의 경화사족들은 아직 전통적인 학풍계승에 매어 있었으나, 이제 사상적 ? 학문적 공감대를 가지게 된 경화사족 학자들의일각에서는 당색을 뛰어넘는 학문적 ? 사상적 교류가 이루어 지기도 하였다. 北學思想 등 이른바 實學이라 불리우는 학문적 성과는 대체로 경화학계 내에서 교류하던 확대된 외연의 경화사족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변화된 성장배경과 사회적 현실 속에서 이들이 가지는 士로서의 자기반성과 현실 직시, 그리고 전통주자학과 주자주의에 대한 반성과 외래문물 ? 학술에의 개방적 태도 등과 관련되었다.
학번 : 20000611이름 : 양채주마르코 폴로 - 동방견문록 (원제 : 세계의 서술)서론 : 동방견문록의 개요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제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다. 하지만 김호동 교수님이 책의 서문에서 쓰셨듯이 동방 견문록은 나에게는 유명한 고전 이었을 뿐 책을 정식으로 읽어본적은 없었다. 단지 어렸을때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마르코폴로의 모함담을 보았을뿐 동방 견문록의 원래 제목이 뭐였는지, 아니 원래 제목이 있을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적도 없었고, 마르코 폴로가 어디를 여행했는지, 그의 위치가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원(元)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는 내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김호동 교수님이 번역한 동방 견문록을 읽기 전에 우선 나에게 동방견문록에 대해 생각난건 어렸을때 보았던 ‘마르코폴로의 모험담’이라는 만화책의 내용만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그 만화책에서의 마르코 폴로는 머리가 매우 좋고, 잘생기고, 싸움도 잘하며, 잘생긴 전형적인 만화 주인공이었다.이런 이미지를 가지고 동방견문록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충격을 받은것은 원래 제목이 ‘세계의 서술’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동방견문록에 원제목이 있을것이라고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서양 사람이 썼으니 당연히 동방견문록이라고 썼겠지라는 생각만 있었을뿐이었다. 제목을 ‘세계의 서술’로 바꾸니 책의 스케일이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방 견문록일때는 중국이나 동남 아시아만 생각이 나지만 ‘세계의 서술’로 제목을 바꾸니 머릿속에 동 남 ? 북 아시아만이 떠오르는게 아닌 인도나 시베리아, 태평양의 여러 섬들이나 인도양의 여러 섬들까지 포함하는 정말 거대한 지역의 여행기로 변하는 것 같았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만 보다가 뒤를 돌아보니 더욱더 멋진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동방견문록 즉 ‘세계의 서술’은 마르코 폴로가 제네바와의 전쟁 도중 포로로 잡혀 있을때 당시 같이 감옥에 있던 ‘루스티켈로’에게 구술하여 쓰여졌다. 이후에도 이 ‘세계의 서술’은 수많은 판본이 나오는데 어차피 필사본이니 소실된 부분이 있을 것 이고 그때그때 여행기를 쓴 것이 아니라 제네바와의 전쟁중에 포로가 되어 잡혀있을때 구술에 의해 쓰여 졌으니 인간 두뇌의 기억력의 한계로 외곡 되었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리고 중국내의 기록같은 것은 마르코 폴로가 외국인이었으니 한문으로 이름을 쓰기가 어려워서 다른 이름만을 기록했을 수 도 있을 것이다.지명에 관련된걸로도 동방견문록의 내용은 내가 보기엔 정말 난해했다. 차라리 현대의 지명으로 적혀 있었다면 지도라도 보면서 어떤 경로로 여행을 했는지 알수 있었을텐데 전부 예전의 지명, 그것도 알아먹기 힘든 지명(고려가 카울리로 나온다는지 황하강이 카라모라로 쓰여짐)만의 언급되어 있어서 여행기라기 보다는 단순한 지명의 서술로만 느껴졌다. 물론 중간 중간에 여러 가지 일화가 있어서 재미가 있긴 했는데, 가장 기억나는 이야기는 프레스터 요한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시 유럽인들이 믿고 있었던 동쪽의 거대 제국의 왕 프레스터 요한이 이슬람을 무찔러 줄 것 이라는 이야기였는데 실존하지도 않았던, 아니면 다른 왕으로 착각한 사람을 프레스터 요한으로 묘사한 내용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마르코폴로의 기독교적인 믿음의 일면을 본것같았다. 또한 당시 중세사회의 교회의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케 한다. 지금 보면 정말 한심한 종교적인 쇼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권위였던 것 같다.본론 ① : 동방견문록의 여행경로에 따른 줄거리마르코 폴로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보석상인이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신임장을 받아 중국으로 떠나면서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대 ? 서 아르메니아와 투르크메니아를 거쳐 현재의 이라크 지방과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아시아를 지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파미르를 넘어 타림분지를 경유하여 1274년 3년간의 여행끝에 중국에 도착하게 되는데 중국에 도착한 마르코폴로는 쿠빌라이의 신하로써 중국에서 17년간 벼슬살이를 하게된다. 중국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것을 동방견문록에 기록했는데 그 100명과 예루살렘의 등잔위에 있는 기름을 조금 가져오라는 일, 여행의 시작, 귀향등이 어떻게 일어 나는지를 크게 설명해 주고 있다.니콜로와 마페오는 교황(클레멘스 4세)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 돌아왔는데, 그들은 새 교황이 선출되기를 베네치아에서 끈기있게 기다렸지만, 2년이 지났는데도 후임자가 선출되지를 않았다. 초조해진 폴로 가족은 마르코를 데리고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1271년). 팔레스카인지방에서 교황 특사인 피아첸자의 테오발도는 몽고 제국의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들에게 주었다. 폴로 일가는 다시 여행길에 오른 지 며칠 지나기도 전에 테오발도가 교황(그레고리우스 10세)으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아크레로 돌아가서, 정식 신임장을 받고 2명의 수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2명의 수사는 여행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폴로 일가만 여행을 계속 하게 되었다.여기서 마르코 폴로는 처음부터 여행에 참가 하지는 않았는데 그의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페오가 칸의 사신이 되어 교황에게로 갔을때 교황이 죽자 교황이 다시 선출되기를 기다리며 베니스에 잠깐 들렸을때부터 폴로의 여행은 시작된다.우선 여행지의 시작은 위어서 언급했듯이 소 아르메니아부터 시작하는데 이 소아르메니아의 생활은 예전엔 살기 좋았지만 이제는 남자들이 호색가에다가 말라빠져서 아주 살기 않좋은 곳이라고 소개하고 투르크메니아에서 시작하여 대아르메니아, 모술 지방, 이라크와 페르시아 지방을 포함하는 서남 아시아를 소개한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전설을 이야기 해주는데, 바우닥에서 일어난 산의 커다란 경이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산상의 노인의 아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그야말로 전설이나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사람이라면 믿었겠지만 현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폴로는 사막을 지나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사푸르간시에 도착한다. 아마도 1277년 초에 이들은 오늘날 터키 동부에 있는 에르주룸과 오늘날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좋아하는데 저자인 마르코 폴로는 아무래도 직접 만나본 쿠빌라이 칸을 더 위대하게 보고 있는 듯 하다. 예를 들면 대카안의 수도에는 쿠빌라이의 수도인 상도(샨두)의 모습과 대카안이 통치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여기서 마르코 폴로는 칭기스칸을 제외한 모든 칸의 능력을 합하여도 쿠빌라이 칸에게는 상대도 안된다고 설명을 하는데 그 엄청난 아부가 놀라웠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나얀칸과의 사이에의 전쟁에서 나얀을 어떻게 죽였는지 얘기하고 대카안의 아들들 그리고 궁정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그리고 대카안의 축제와 백성들에게 자선을 배푸는 방법들을 자세하게 기록을 한다. 몽고인의 풍습중에 귀족의 피가 땅바닥에 흘려지면 나쁜 징조라 하여 나얀칸을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죽인다든지 12000명이 넘는 신하들에게 금으로 만든 옷을 하사한다는 내용은 정말 쿠빌라이 시대의 부유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4장과 5장은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벼슬살이를 하면서 보았던 중국의 북부와 사천 ? 운남을 거쳐 미얀마에 이르는 지역을 설명하고, 당시 ‘만지’라고 불리던 남송의 영역 즉 중국의 동남부에 대해 설명을 해 놓았다.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에는 중국식 이름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여러지방의 소개와 강의 소개, 그리고 프레스터 요한과 금왕과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티벳지방에 대해 설명을 할때는 우상숭배자라고 하며 질이 않좋고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주민들이라고 묘사했다. 그 후 여러 지방에서도 아주 안좋은 악행을 일삼는 민족이 있었으나 대카안의 지배 후에는 그러한 일들이 생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북부와 서남부에는 쉬주을 제외하면 중국식 이름이라기보다는 중앙아시아쪽의 이름과 비슷한 왕국과 지방이 나온다.중국의 동남부쪽에는 그나마 약간 익숙한 지명이 나오는데, 창루, 창리, 신주, 남긴지방, 창주, 수주, 푸주등의 여러 지명이 나왔다. 하지만 카칸푸시나 카이주, 킨사이등은 여전히 어려운 지명이었다. 이장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생활사, 종교등 여러 가지 시시콜콜한 것들, 다른데습과 주민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며 특히하게도 지방에 대한 설명보다는 여러 가지 전설과 신화에 대한 설명이 주가 되는 장이었다.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엄청나게 방대한 분량이지만 주석을 보아서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정말로 많고 대부분의 내용이 3인칭 폴로가 무엇을 보았고 어디에 뭐가 특산물이고 돈이 될만하다는 내용이 많아서 읽기에도 난해하고 요약하기에는 더더욱 난해한 것 같다.특히 지명에 관한 것이 어려웠는데 현재 불리는 지명과 그 당시에 불리던 지명이 확연히 틀리기 때문에 이 도시에 대한 느낌이 정말 다가온다는 느낌이 없었다. 여행기에는 그사람이 어떤 지역을 여행하면 눈앞에 펼쳐진다는 느낌이 정말로 중요한 듯 싶은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일단은 그 지역이 어떤 지역에 있을까를 우선 생각나게 하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기보다는 아 거기에서는 뭐를 조심해야겠구나 라든지, 그 지방 사람은 어떻게 다루어야겠다라든지, 여기가 정말 지구에 존재하는곳이 맞는가? 라는 의문만이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특히 여기의 우상숭배자는 어떻고 생강이나 향료가 정말싸고, 동서로 몇마일 남북으로 몇마일이라는 묘사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제일 읽기 난해했던 부분은 예를들면 “카물은 탕쿠트 주에 속하는 지역이다. 이 주에는 도시와 성이 많고 위대한 카안에게 예속되어 있다” 라든지 “텐둑은 동쪽에 있는 주로서, 도시와 성들이 많다” 는 식으로 수백페이지가 설명되어있다. 중간중간에 어떻게 여행을 했고, 어디에서 정말 힘들었다는 내용없이 정말 지도의 지리지같은 설명의 나열뿐이었던게 이 책의 지루했던 하이라이트였던것 같다.본론 ② : 베네치아의 귀환과 동방견문록의 저술1292년경에 몽골족의 한 공주가 바닷길로 페르시아에 가서 아르쿤 칸의 왕비가 될 예정이었다. 폴로 가족은 공주를 수행하여 페르시아에 가겠다고 제의했는데 쿠빌라이칸은 마음에 내켜하지 않았지만 결국 허락을 내렸다, 당시 쿠빌라이칸은 거의 80세에 가까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