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시인 연구1. 시대배경3.1운동의 좌절은 민족 전체에게 절망과 방향 상실의 비애를 안겨 주었다. 정치적 좌절감과 함께 경제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세계 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궁핍화 현상의 심화로 민족 생존이 위협을 받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3 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통치로 전환함으로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고, 《창조》, 《폐허》 등의 각종 동인지들도 간행됨으로써 문단이 형성되고 문학의 저변이 확대된 시기가 1920년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수입과 함께 카프가 형성되었으며, 본격적인 서구 문예 사조의 도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우리 문학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현대 문학으로 출발하면서 예술의 한 갈래로서의 문학이라는 관점을 정립시켰다.2. 1920년대 시의 흐름(1) 감상적 낭만주의의 유행3 1 운동의 실패는 지식인들 사이에 엄청난 좌절감을 가져왔고, 때마침 수입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으로 우리 시단은 퇴폐적 낭만주의 시들을 양산하게 된다. 1920년대 초의 이러한 경향은 박영희, 홍사용, 이상화 등의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의 시는 감정의 과도한 노출과 현실 도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영탄적 어법을 많이 사용하여 감정의 노출이 심했으며, 꿈이나 밀실, 동굴, 죽음, 님, 영원, 눈물 등과 같은 시어를 주로 사용하여 현실 도피적 성향을 노골화하였다. 밀실이나 동굴, 병실 등의 이미지는 현실적 공간이기보다 현실 도피적 공간으로 당시의 지식인들이 암울한 자신들의 정서를 토로하는 무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로 《폐허》나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신경향파 문학이 소개되면서 현실주의 시에 눈을 뜨게 된다.{작 가작 품박영희'월광으로 짠 병실', '유령의 나라', '권태' 등이상화'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등박종화'흑방비곡', '사의 예찬', '월광송' 등홍사용'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하나', '나는께 《백조》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 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1922) 〈단조〉(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 〈이중의 사망〉(1923) 〈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나의 침실로 中〉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고, 복합적인 인습에의 공공연한 반역 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 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개벽, 1925) 〈비음〉(개벽, 1925) 〈이별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이와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비가 옵니다.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비가 옵니다.들 위에, 창 밖에, 지붕에남모를 기쁜 소식을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그는 미국시인 휘트먼(Whitman, W.)과 일본 낭만파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시를 썼지만, 그들과는 달리 전원과 자연을 바탕으로 하여 맑고 차분한 서정의 시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특색은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1924)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경향은 초기에 해당되는 것이고, 광복 후에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 관여함에 따라 그에 관한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근대시의 형성기에 그 선구자적 공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 소재 새문안동산에 안장되어 있고, 1979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았다.시집으로는 《아름다운 새벽》 외에, 《3인시가집》(三千里社, 1929), 《봉사꽃》(世宗書院, 1930) 등이 있고, 일반논저로는 《자유의 구름다리》(泰成社, 1959), 《부흥논의》(大成文化社, 1963), 《안도산전서》(三中堂, 1963) 등이 있다.(4) 임화(林和)1908 1953. 시인. 평론가. 본명은 인식(仁植).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청로(靑爐) 등의 필명을 썼다.1908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3년 8월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1921년에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 〈담 일구이칠〉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의1959.4.)에 연재된 바 있다.(7) 김억(金億)1893~?. 시인 평론가. 본명은 희권(熙權). 필명은 안서(岸曙).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 문과를 중퇴한 후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한때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 근무하였다. 20세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투르게네프 베를렌 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 이 땅에 상징주의와 퇴폐주의 경향을 탄생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개인시집으로는, 23년 간행된 《해파리의 노래》가 있는데, 이는 근대 최초의 개인시집으로 자연과 인생을 민요조 형식으로 담담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50년 6 25 때 납북되었으며, 58년 행방불명될 때까지 재북 평화통일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다.밤이도다봄이다.밤만도 애닯은데봄만도 생각인데날은 빠르다.봄은 간다.그가 남긴 저서로는 《불의 노래(1925)》 《안서시집(1929)》 《안서민요시집(1948)》 외에 번역시집 《신월》 《원정》 등이 있다. 1914, 1915년 《학지광》에 시 〈이별〉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밤과 나〉 등을 발표한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번역과 소개 및 창작시를 발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 뒤 창조 및 폐허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창조》 《폐허》 《영대》 《개벽》 《조선문단》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시 역시 평론 수필 및 그 밖의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1910년대 후반부터 활발해진 프랑스 상징파의 시와 타고르 투르게네프 등 해외문학의 번역 소개에 있어서의 구실과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정에 그가 남긴 공적은 매우 컸다. 특히, 1921년 광익서관에서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시집 《오뇌의 무도》가 폐허 및 백조동인들의 초기시에 미친 영향은 더욱 주목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행한리고 1929년에는 주요한 이광수와 함께 제3시집 《삼인시가집》을 펴냈고, 이어 1942년에는 제4시집 《해당화》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국경의 밤〉 〈북청 물장수〉등 북방의 정서를 보여준 초기시와, 〈우리들은 칠인〉 〈오호 태평양상의 군신〉 등 자기 안주를 위하여 현실에 순응하여 친일성과 야합한 중기 시, 그리고 〈무명전사 묘 앞에〉 〈33인의 송가〉 등 자신의 친일적인 행각을 참회하고 애국주의를 표방한 광복 후의 후기시로 구분해볼 수 있다.1"아하, 무사히 건넜을까,이 한밤에 남편은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왔다 갔다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2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어 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눈보라에 늦게 내리는영림창(영림창)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이 가운데 특히 〈국경의 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두만강일대의 겨울밤을 배경으로 하여 밀수꾼으로 위장하고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불안한 마음을 통하여 망국민의 민족적 비애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세계의 커다란 맥을 형성하는 일련의 민요시들 가운데 〈산너머 남촌에는〉은 따사로운 자연과 순박한 인정을 노래한 것으로 곡을 붙여 널리 불리고 있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밖에 그가 납북된 후 최정희가 유고를 모아 펴낸 제5시집 《돌아온 날개》(1962)가 있으며, 《삼천리》에 실린 논설들을 모은 산문집 《평화와 자유》(1932)가 있다. 또, 시 소설 평론을 함께 묶은 《조선명이었다.
1. 탈이란2. 탈의 역사1) 탈의 기원2) 우리탈의 역사3.탈의 분류1) 하회탈2) 병산탈3) 방상씨탈4) 본산대탈5) 해서탈6) 오광대탈7) 사자탈8) 산대탈9) 야류탈4. 우리탈의 생김새1) 우리탈의 이목구비2) 우리탈의 색상1. 탈이란탈이란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모양을 만들어 주로 얼굴 분장에 사용하는 것으로, 한자로는 면(面), 면구(面具), 가면(假面), 대면(代面), 가두(假頭){) 얼굴 앞을 가리는 면구를 가면, 뒷머리까지 가리는 것을 가두, 가수, 투두(套頭)로 구별하기도 한다. 오늘날 ‘탈’이 가면과 같은 말로 쓰이지만, 우리 탈놀이〔가면극〕에 사용되는 탈은 모두 얼굴을 가리게 되어 있고, 뒤에는 뒷머리를 가리 는 ‘탈보〔假面布〕’가 있다. 때문에 우리 탈은 가두에 가깝다., 가수(假首)라 하고, 우리말로는 광대, 초라니, 탈, 탈박, 탈바가지라고 하기도 한다.이렇게 탈의 뜻을 보아 알수 있듯이 우리 민족에게 탈이란 주변 가까이에 두기를 싫어하는 물건이였다. 탈을 사용한 것은 원시시대부터로 생각되며 수렵생활을 하는 원시인들이 동물에게 접근하기 위한 수렵가면으로 사용했으며, 후에는 동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사용했으며 점차 주술적 의미가 부여되어 종교나 신앙의 의식용으로 변화되었다.가면의 한자를 풀어보면 가짜 얼굴이란 뜻이지만 원래의 얼굴을 감추고 다른 모양의 얼굴을 하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탈을 씀으로써 동물이나 신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의 인격이나 신격을 이루어 낸다. 즉 탈은 나외의 다른 사람을 단순히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탈을 씀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탈이란 먼 옛날부터 신앙성, 수렵, 전쟁등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온 역사적 조형물이라 할 수 있겠다.2. 탈의 역사1) 탈의 기원원초적인 탈은 악신을 물리치고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 얼굴이 아닌 상징적 신격의 또 다른 얼굴을 만들었다. 원시인들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착한 영혼과 나쁜 영혼의 싸움에서 빚어진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쁜 영혼을 쫏는 방법으로다. 현재는 고구려악의 유산들을 찾기가 쉽지 않아 오히려 일본에 전해진 우방악 곧 고마가쿠에서 흔적을 찾아보아야 할 형편이다. 물론 고마가쿠의 전체곡들은 삼국악과 발해악 서역악등이 모여진 것으로 고구려악만으로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악서"에 전하는 내용과 일본에 현존하는 탈들이 고구려악을 비롯한 삼국악으로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의견이라 하겠다은 악기와 탈춤의 수용으로 백제악, 신라악을 능가하여 삼국악의 총칭으로 불리며 '악(樂)'이란 '악'과 '무'가 함께 조화되는 넓은 의미의 '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현재 고구려악의 유산들은 일본에 전해진 우방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도리소, 신쇼도쿠, 나소리, 소리고등 12곡의 탈춤은 우리의 탈을 살피는 좋은 자료가 된다.2 백제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외침을 많이 당했으나 신라 나름의 독창적인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중국 남조 왕조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백제는 "고려사-악지"에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등 백제의 다섯가락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도 백제 무왕13년(612)에 백제 사람 미마지가'기악'을 남중국의 오나라에서 배워 일본에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악의 내용은 13세기 중엽의 일본 아서"쿄쿤쇼"에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7,8세기의 기악면이 일본에 현재 2백여 개나 보존되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내용은 익살스러운 춤과 몸짓으로 연출하는 10과정으로 된 가면 묵극이다.오늘날 우리나라에 전하는 산대놀이와 기악이 같은 계통의 놀이라는 의견에 따른다면 백제시대에 우리에게서 건너간 기악의 옛형태가 일본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묵극인 기악에서 대사극으로 신앙성을 띤 연희에서 세속적인 연희(산대놀이의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쨋든 백제시대의 탈 유산이 우리보다 일본에 더 많이 남아 있어서 관심을 그곳으로 돌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많지는 않지만 백제 시대의 귀면 와당들에서 그 모습을 살필 수베풀었다'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팔관회 행사중 탈놀이나 탈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5 조선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고려조에서와 같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등회나 팔관회 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서서히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과 나례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왕조는 나례도감 또는 산대도감이 관장하던 [산대나희]는 [나례], [나희], [산대나희]등 여러가지 명칭이 혼용 되었는데, 역시 중국 사신의 영접 때나 나라의 대소 연락환오에 두루 불렀다. 그러나 정조(1777-1800)이후 공식적 의식으로서의 [산대나희]는 없어지고 관청의 지원을 받던 '도감패'들은 뿔뿔이 흩어지지만 서민 사회에 자생적으로 전승되어 온 탈놀이를 비롯한 산대잡의들은 면면히 그 생명력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오늘에 전하고 있고 전국 방방곡곡에 그 나름의 독창적인 탈들이 전승되고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대표적인 탈춤의 하나인 처용무와 동물의 탈을 쓰고 추는 학춤까지 있었으며, 정해진 거처가 없이 무리지어 떠도는 광대를 '뜬광대'라 칭했으며 이들놀이패중 탈놀이를 한 놀이패는 남사당패-덧뵈기, 대광대패-오광대놀이 계통, 초란이(또는 초라니)패-초란이굿, 중매구-오광대놀이 계통 이들의 탈과 탈놀이는 현재'남사당패'의 [덧뵈기]말고는 독자적인 전승은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대광대패와 중매구의 탈놀이는 경상남도 일원에 잔존하고 있는 오광대놀이들에서 그 옛 자취를 찾아볼수 있다. 이밖에도 사자탈놀이(북청사자놀이로 전수됨)와 연산조에 왕이 스스로 탈을 쓰고 춤을 추었다는 [풍두무]가 있으나 어떤 탈춤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6 오늘날오늘날의 탈들은 무형문화제로 지정된 종목의 탈놀이에서 쓰이는 탈들이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자생적인 전승력을 지니는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그대로 놔두면 아주 없어질 염려가 있어 취하는 임시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무형문화재라고 함은 역사발전과 함께 가변 판자의 표면에는검은색과 붉은 색으로 눈을 그렸다.주위에는 보자기를 달 수 있는 구멍이 있고 코위에는 구멍을 통해서 끈을 꿰게 되었다.{{{{{{{{2){병산탈 [국보 제21호]2개의 병산탈은 병산마을에서 전래하던 것으로 같은 안동군인데도 작품은 하회탈과 꽤 다르다. 2점 모두 아래턱이 없는데 이는 하회탈의 이매처럼 미완성품이 아니라 본디 아래턱이 없이 탈꾼의 턱이 아래턱 역활을 하면서 자유로이 재담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3) 방상씨탈 [중요 민속자료 제16호]방상씨란 악귀를 쫓는 탈을 뜻한다. 이 방상씨탈은 창덕궁 창고에서 장례 용구와 함께 발견되었다.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의 유일한 유물인 방상씨탈은 장례행렬의 맨 앞에서 춤을 추며 잡귀를 쫏는 역할을 한다. 이런 형태의 풍속은 중국의 풍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연원이 중국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동양권 문화의 "장례행사"나 "나례행사"에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유물중의 하나다. 일반 민가에서는 나무가 아닌 싸릿대나 키 짚등을 엮어 만들기도 했다. 1940년대까지만해도 규모가 큰 시골의 장례행사에서 이 탈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4) 본산대탈산대놀이는{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원 중부 지방에 전승되어 온 탈놀이의 이름인데 [본산대]라 불려오던 [애오개],[녹번],[사직골]등지의 것은 놀이가 전하지 않고 현재 "양주 대놀이","송파 산대놀이" 두가지가 전해져온다. 산대탈은 원래 거의가 나무탈(현존하는 탈은 17점임)이었으나 지금은 바가지탈로 바뀌었다. 이 탈들은 하회탈이나 병산탈이 보여주는 완벽함과는 달리 서민적인 소탈한 여유를 지니고 있으며, 배역에 따라 보여지는 세심함과 이목구비의 그림새나 물감에서까지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즉 "본산대탈"은 우리 민족이 창출한 미적 소산의 탁월한 전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5) 해서탈해서탈춤은 황해도 일원에 전승되어 오는 탈놀이다 해서탈춤은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의 세가지이며 탈들의 형채가 귀면적이고 사실적인좌(甲,乙),봉사,애기, 큰상제,작은상제,몽돌이,포수,담보,사자등이다.{♣ 가산오광대가산마을은 사천군내의 해변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로서 1980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다. 송파탈은 28점이 있다. 중앙황제장군,동방청제장군,북방흑제장군,서방백제장군,남방적제장군,영노,도문둥이,문둥이(1,2,3,4), 어딩이,손님하는아이, 큰양반,작은 양반1,2, 말뚝이,소무,서울애기,노장,상좌,할미,마당쇠,옹생원,봉사, 큰무당1.2.3.4,등이다.{♣ 고성오광대현재 경남도 고성에서 전승되고 있으며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되었다. 고성탈은 19점이 있으며, 개개별 이름은 다음과 같다. 문둥이,원양반(청보양반),젓양반,젓광대(5),말뚝이,초랭이,중(2),소모(각시,2),비비양반,비비(영노), 영감,저밀주(작은어미),할미(큰어미)등이다.7) 사자탈 [중요 무형문화재 제15호]{사자춤은{{인도특유의 동물 의장무로서 서역과 동방의 여러나라에 널리 유행하게 되어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 이용 되고 있는 춤이다. 신라 "오기" 가운데 "산예로"까지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사자탈놀이]는 고종 24년(1887)이며, 현재[북청 사자놀음]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놀이꾼은 사자,꺽쇠,양반 꼽추,길라잡이,애원성추꾼,거사춤꾼,사당춤꾼, 칼춤꾼,무동,꼽새,승무춤꾼,중,의원,영감등인데 이중에서 탈을 쓰는 양반,꺽쇠,꼽추,길라잡이,사자(2)이다. 사자탈은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으로 나뉜다. 머리는 피나무로 만들었으나 요즘은 종이로 만든다. 사자털의 경우 요즘은 털실이나 인조 섬유를 오색으로 쓰지만 옛날에는 삼 껍질을 추려서 가늘게 쪼갠다음 오색으로 물들여 그물에 달았다. 이 오색실은 굵은 끈을 꿰어 사자 머리와 그물을 꿰매어 단다. 탈꾼들은 오색실이 달린 바지와 무릎 바지를 입고 신을 신고 사자탈에 들어가서 논다.{북청 사자놀이 봉산탈춤 사자놀이 가산오광대 사자놀이{{은율탈춤 사자놀이 통영오광대 사자놀이 수영야류용 사자놀이8) 산대탈산대놀이용 탈은 지금으로부터 70-80였다.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어머니인 신사임당에게서 교육을 받고,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며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도왔다. 그는 기호 학파의 시조로, 이황의 영남 학파와 더불어 조선 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다.율곡은 교육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교육의 이론 뿐 아니라 스스로 스승의 입장에서 교육을 실천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율곡의 학의 본령은 수기치인을 궁극의 목표로 삼고 있는 성학에 두고 있다. 이 성학은 말할 것도 없이 성현의 도를 배우는 것이다. 도학사상을 종지로 삼고 있으므로 사유나 행동까지도 도학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적게는 개인의 수신이나 처세의 방법, 크게는 국사에 관한 의견이나, 사회 정책등이 모두 이 유교주의, 즉 도학 사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이러한 교육 사상은 그의 저서인 「擊蒙要訣」에 잘 나타나 있다.먼저 교육지상론적 견해이다. 즉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을 하지 아니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또 인문 중심적 견해로는 학문은 별다른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합당한 바를 얻을 수 있도록 함에 있다고 하고, 현묘한 이치를 얻어 기이한 효과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학문공효론적 견해로는 학문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마음이 편치 못하여 견식이 어둡게 되니 글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여 사람으로서 행한 길을 밝힌 뒤에야 가는 길이 바르고 밟는 것이 중도를 얻게 된다고 갈파했다. 당시의 학자들이 학문을 일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학문을 허망하게 높고 먼 고답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擊蒙要訣」 서문에서는 사람이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이 곧 학문이라 하였다.{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되지 못한다. 소위 학문이란 역시 이상하고 별스러운 물사(物事)가 아니다. 다만 어버이 된 자는 마땅히 자애로워야 하고, 자식된 자는 마땅히 효도해야 하고, 신하된 자는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용 사이에 있다. 집에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에게 공순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일에 손댈 때는 경건하며, 남을 대할 때에는 충(忠)으로써 하고 이득을 볼 때에는 의리를 생각하는 등 이러한 것일 뿐이다. 위에서 말한 학문이 곧 도의 이해와 실천임을 알 수 있다.율곡은 입지(立志)를 설명하면서, "배우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하며 도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아야 한다. 고 했다.{도는 높고 먼 것이 아닌데도 사람이 스스로 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배우는 뜻, 교육의 목표가 바로 도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도라는 것은 나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배우는 자가 날로 공부가 있어 마음을 항상 도에 둔다면 오래 쌓이게 됨에 반드시 그 현저한 효과가 있어서, 심지(心志)가 안으로 정착될 뿐 아니라 용모와 사기(士氣) 또한 종전보다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학자는 반드시 성심으로 도에 마음을 쏟으면서 세속의 잡된 일로 그 뜻을 어지럽히지 않은 뒤라야 학문 할 기초가 마련된다. 따라서 학문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도에다 마음을 쏟아 외물에 빼앗긴 바가 되어서는 안되며, 외물의 바르지 못한 것은 일체 마음에 유념하지 말아야 한다.이와 같이, 율곡에 있어 교육의 목표는 도에 있었던 것이다.그러면, 교육의 동기는 무엇인가? 율곡은 이를 입지로서 설명한다. 율곡은 한 개인의 인격수양이나 한 나라 임금의 자질 함양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할 것이 입지라고 한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도 뜻을 세우고 뜻을 갖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율곡은 「擊蒙要訣」에서 "처음 배움에는 모름지기 입지를 먼저하고, 반드시 성인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해야 된다" 하였다. 그런데, 지(志)란 의(意)가 정해진 것이요 의란 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의지(意志)라고 하지만 의보다 지가 마음의 지향성을 더욱 뚜렷이 한 개념이다. 志란 마음의 가는 바로서, 선으로 가고 악으로 가는 것이 모두 율곡의 학문에 대한 스스로의 모습을 밝힌 것으로 율곡의 학문이 이러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해준다.{인성은 본시 선하여 고금지우의 별이 없거늘 성인은 왜 홀로 성인이 되고 나는 왜 홀로 중인이 되었는가, 진실로 뜻이 서지 못하고 지를 밝히지 못하며 행함이 독실치못한 까닭이다. 이 입지, 명지, 독행은 다 내 안에도 있는 것이니 어찌 다른데서 구하랴, 안연의 말에 수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이니, 힘써 행하기만 하면 다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였으니 나도 안연의 말을 본받아 항상 분발하여야 한다.이와 같이 「擊蒙要訣」에 술회하여 학문은 입지와 명지, 독행이 그 요체임을 말하고 있다. 이 삼요체에서도 학문은 입지에서 비롯하여 명지에 이르고 이 명지는 공리공념적인 것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반드시 명지는 독행을 수반하여야 제자리를 찾을 수 있고 학문의 경지가 이렇게 되어야 유가의 학인 실천 도덕이 빛을 발할 수가 있게 되어 학행일치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보고 있다.율곡은 학문의 기저가 입지에 있다 하였는데 그 입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상화되어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명되면 우선 율곡의 학문에 대한 의의가 구체화된다. 율곡은 입지를 못하는 즉, 지불립의 병인을 세 가지로 파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불신이요, 또 하나는 부지이며, 마지막을 불용이라 하였다. 첫 번째 불신은 성현이 후학에게 계시하는 것이다. 명백하고 조리가 서므로 후학들이 그 계시된 말대로, 순서에 따라 나아가면 성현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명한 일인데 후학은 부질없이 성현의 말을 믿지 아니한다. 다만 성현의 글을 완독할 뿐 몸소 독행하지 아니하니 글은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몸은 시속의 유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 곡 불신이니 이로 말미암아 입지를 할 수 없다 하였다. 두 번째의 부지는 사람은 그 자질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나 힘써 알려고 하고 힘써 행하면 성공하는 것은 같다고 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자질이 좋지 못하다 하여 체념하고 전진해 보려는 노력가는 오히려 그 보다 더 물러서는 것을 불용이라 했다. 이렇게 되면 그가 읽는 것은 성현의 글이 지만, 안일하기는 구태를 벗지 못한 것이니 이것도 입지가 되지 못한다고 성학집요에서 설파하였다.율곡의 학문의 근간이 입지이나 그 입지 되지 못하는 세 가지의 요건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지불립의 요건인 불신, 부지, 불용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각각 다르다 하겠으나 신, 지, 용이 한결같이 유가 경전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과 이 세 요건이 성현의 글에서 인증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신은 성현의 글을 믿지 아니하는 것을 이르고, 부지는 진하면 성현히 되고 퇴하면 불초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음을 이르며, 불용은 성현의 말대로 분발하지 아니함을 이르고 있다. 따라서 신, 지, 용이 한결같이 성현과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가있다. 이로서 율곡의 학은 학문을 위한 학도 아니고, 공소한 개념만을 터득하는 생활과 유리된 학도 아니다. 생활과 직결되어 성현의 길을 몸소 행하는데 그 학문의 목적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학문적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이 생활과 관계없는 공소한 이론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학문이 될 수 없고, 참 학문은 성현의 도 안에서만 존재하고 그것도 몸소 행했을 때 참 뜻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유가의 실천 도학과 합일하고 있다.율곡에 있어 교육적 인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인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입지에서도 보았듯이 그가 뜻을 세움에 반드시 성인을 일컫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본래 유가 철학에서는 바람직한 인가의 모습을 성인, 군자, 사, 대, 인, 대장부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지만, 율곡은 주로 성인, 진유(眞儒), 도학지사(道學之士)로서 설명하고 있다. 진유나 도학지사는 현실적인 교육적 인간상이라면 성인은 이상적인 교육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가까이는 진유가 되길 바라지만 멀리는 성인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율곡에 있어 성인이란 중인의 준칙(準則)이며, 천리에 순하여 성(誠)의 온전함을 품득(稟得) 인간상이었던 것이다.그러면, 이러한 교육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율곡은「擊蒙要訣」에서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하나는 맹자가 말한 인간의 성선(性善) 가능성이다. 대개 중인과 성인은 그 본성이 마찬가지이다. 비록 기질은 청탁수박(淸濁粹駁)의 다름이 없지 않겠으나, 진실로 능히 참답게 알고 실천하여 그 구습(舊習)을 버리고 그 본성을 회복한다면 털끝만큼도 보태지 아니하여도 온갖 착함이 고루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고 있는 요소만 제거된다면 본성은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이 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질변화의 가능성이다. 사람의 기품은 혹은 맑고 흐리나 수위(修爲)의 노력을 하면 본선(本善)의 성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마음은 허령통철(虛靈洞徹)하여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어 탁한 것은 변하여 맑게 할 수 있고, 박(駁)한 것은 변하여 순수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위의 노력이 홀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 하겠다.이와 같이, 율곡은 일면 인간의 본래적인 성선과 일면 기질의 변화 가능성을 긍정함으로서 교육의 가능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율곡은「擊蒙要訣」에서 공부하는 내용과 순서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먼저『소학』을 읽고 그 후에『대학』,『혹문』,『논어』,『맹자』,『중용』의 사서를 공부한 다음『시경』,『예경』,『서경』,『역경』,『춘추』의 오경을 공부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송대 선유의『근사록』,『가례』,『심경』,『이정전서』,『주자어류』및 다른 성리설을 공부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역사에 관한 공부도 하되, 이단이나 그밖에 잡류(雜類)의 부정한 서적은 읽지 말라 하였다. 또한,「학교모범」에서는『호학』을 먼저 배워 근본을 배양하고, 다음에는『대학』과『근사록』으로서 그 규모를 정하고, 그 다음에는『논어』,『맹자』,『중용』등과 요경을 읽고『사기』와 선현의 성리서를 간간이 읽어, 의취(意趣)를 넓히고 식견을 정밀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아울러 성인의 글이 아닌 것은 읽.
* 교통사고교통은 자동차, 도로 시설, 교통 법규, 운전자 등의 여러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종합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통 사고의 원인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적 요소에 비하면 인적 요소가 더 중요하므로 그 해결책도 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현대의 교통 체계는 상당한 질서 의식이 요구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동차 문화는 그것이 확립되기 이전에 도입됨으로써 교통 법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운전자들의 질서 의식이 부족하고 교통 법규가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교통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이러한 운전자들의 의식은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내면화된 경쟁 의식과 결합되어 이기적인 교통 문화를 발생시켰다. 교차로에서 느긋하게 신호를 기다리거나,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운전자에게 경적을 울려대는, 인내심과 자제력의 부족도 조금이라도 남을 앞서야 한다는 경쟁 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이러한 의식은 추월이 추월이나 과속 운전을 유발하여 교통 사고로 직결되는 것이다.교통 사고의 인적 요원은 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인명 경시 풍조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교통 사고 사망률이 세계 1위라는 사실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인간의 생명이 가장 존귀하다는 생각이 모든 운전자들의 기본적인 신념으로 자리잡고 있다면 교통 사고라는 결과는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운전자가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동승한 경우보다 자신의 가족을 태운 경우에는 교통 사고를 발생시키는 비율이 낮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운전자의 부주의도 교통 사고 요인의 큰 몫을 차지한다. 자동차는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운전자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순간의 방심이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자가 보행자를 발견하고 제동하는 시간은 매우 짧지만, 자동차의 속도가 빠를 경우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자동차는 수십 미터를 진행하게 된다. 따라서 보행자를 늦게 발견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 종교이 세상에서 완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종교라 해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종교도 사람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마련한 여러 가지 문화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이 만든 문화 현상으로서 종교도 각기 그 결함을 가질 수 있다.여러 종교가 인류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인정되는 사실이다. 가치와 규범을 정하고 인간 생활의 지침이 되는 원칙들을 제시해줌으로써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고정된 형식과 교리 속에 진리를 가두려고 애쓰는 한편, 기성 교단과 지배적인 사회 질서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복종의 철학을 설교함으로써 부정적인 영향도 끼쳤다. 이 점은 우리가 종교에 접근할 때 거치게 되는 종파라는 관문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종파의 울안에 갇히면 드넓은 종교의 지평을 내다볼 시력을 잃게 된다. 이런 현상은 요즘의 우리 종교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다.종파적인 면에 빠져서는 결코 바람직한 진리의 길을 갈 수 없다. 종교가 인간의 자유로운 진리 탐구를 막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진리 탐구의 장애물이었음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는 갈릴레이의 말속에서 입증되고 있다. 종교는 진리의 추구라는 인간의 의지를 막아서는 안 된다.그러면, 이 종교와 우리 사회는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종교는 종파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지 않을 때 보다 진실한 모습을 보여 주며, 이 때 각각의 개인은 틀 을 깨고 열린 눈을 가지고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개인들의 바람직한 삶을 통해 종교는 사회의 통합에 기여하게 된다. 사회 통합에 대한 분해와 분열의 위협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종교에 대한 믿음인 것이다.한편 종교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발휘하지만, 여러 사회적 부작용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폐해와 유고 내전 등에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대립에 의한 수많은 인명의 살상 및 국가적 분열 등 종교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