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京大虐殺 - 그 참혹한 역사의 흔적● ‘남경대학살’ 조사 및 발표 ●2004.4.70091193 중문 최정연0091139 중문 이영지1. 서론 - 들어가면서2. 남경대학살의 역사적 현장(1) 남경대학살의 배경,원인(2) 남경대학살의 내용(3) 남경대학살의 결과3. 남경대학살에 대한 여러 시각(1) 중국의 입장(2) 일본의 입장(3) 한국의 입장(4) 제3국의 입장4. 시사적 관점에서 본 남경대학살(1) 일본의 교과서 왜곡(2) 신사참배(3) 그 외의 사건들5. 결론(1) 정리 및 마무리 / 남경대학살을 보는 우리의 시각6. 참고문헌 및 자료1. 서론‘역사(歷史)’란 인간 사회가 거쳐 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이다. 역사는 어느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 그 나라의 민족성, 주변 국가들의 정세 등등 많은 요인들이 통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살아 있어서 어떤 것은 미미하게, 어떤 것은 강하게 현재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일본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던 중 ‘중일전쟁’부분, 특히 ‘남경대학살’에 관련된 서술 부분에서 의문점이 생겼다. 사실 지금까지 남경대학살에 대해 정확히는 몰라도 엄청난 학살 사건이었고, 그래서 일본인들이 중국의 난징(南京)에 가길 꺼려한다는 얘기만 들었었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사건이었었구나’ 생각했었는데 책에서는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하게 서술)하고 끝난 점이 좀 의아했다. 그래서 도대체 ‘남경대학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고 자세히 알고 싶어졌고, 그 후 인터넷과 인쇄매체를 통해 접하게 된 이 사건의 내용과 장면들은 충분히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우리가 조사한 ‘남경대학살’ 역시 역사 중 역사로, 과거의 사실로 기록이 되어 남았지만, 지금에까지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의 여러 나라 가운데 아직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 많다.도대체 이 ‘남경대학살’은 어떤 역사일까. 일본인들이 ‘왜곡’과 ‘사죄’를 끊임없이 번복하며, 건드리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 장제스는 일본군에 대행해 난징을 사수해야 할지, 아니면 수도를 더욱 안전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할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난징을 군사 훈련 총책임자인 탕생치에게 맡기고 12월8일 장제스 총통과 그의 부인, 고문들은 비행기를 타고 이 도시를 떠났다. 중국 공군 역시 함께 떠나버렸다. 정부 관리들이 충칭으로 떠나가며 통신 및 교신 도구를 모두 가져가는 바람에 난징에 남아 있는 군대는 서로 연락할 수가 없었다. 넓은 중국 지역에서 모인 병사들은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중국 병사들은 단 하룻밤 만에 군복을 입은 경우가 허다했다. 결집력도 없고 목표 의식도 없었다. 그래서 난징은 12월 12일 4일만에 함락되었고, 결국 탕생치와 나머지 군인들도 퇴각하고 말았다.일본군이 난징의 성문을 통해 도시에 진입했을 때, 대략난징 주민의 절반 정도가 도시를 빠져 나갔다). 군인들이떠난 후 이 성벽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이들, 노인들,가난한 사람들과 도시를 빠져 나가기엔 몸이 불편한 사람들로 그들이야말로 가장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③ 학살의 방법과 내용: 난징을 공격하러 간 일본인 군대는 9만명이었는데 그 당시 난징 시내에는 50만명의 일반 시민들과 9만명의 중국군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난징함락 후 시내에 남아있던 민간인들과 포로군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제한된 병력으로 인해 일본군은 전적으로 ‘속임수’에 의존하여 포로들을 죽였다. 우선 중국인들에게 저항을 그만두면 공정한 대우를 할 것임을 약속한다. 그 후 이들에게 항복을 강요해 이를 받아들이게 한 후 포로를 100~200명 그룹으로 나눠 난징 근교의 각기 다른 지역에 분리 수용한 후 처형한다.군인들이 대규모로 항복하고 나자 난징 시민들을 보호해줄 수 있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군은 골목길에서,대로에서,대피호 에서,관공서에서,시내 광장에서 닥치는 대로 중국 양민을 학살했 다. 희생자들이 신음하며, 울부짖으며 쓰러졌고 이 함락된 도시 의 거리와 골목과 55년석방)이타가키 세이시로GGGGGXGGGU사형가야 오키노리GGGGG***XX종신형(1955년석방)기도 고이치GGGGGXXXXX종신형(1955년석방)기무라 헤이타로GGGGG***GG사형고이소 구니아키GGGGG**XXG종신형(1950년사망)마쓰이 이와네XXXXX*XXXG사형미나미 지로GGXXX***XX종신형(1954년석방)무토 아키라GGGGGX*XGG사형오카 다카스미GGGGG***XX종신형(1954년석방)오시마 히로시GXXXX***XX종신형(1955년석방)사토 겐료GGGGG***XX종신형(1956년석방)시게미쓰 마모루XGGGGGX*XG7년형(1950년석방)외무장관에 임명시마다 시게타로GGGGG***XX종신형(1955년석방)시라토리 도시오GXXXX*****종신형(1949년사망)스즈키 데이이치GGGGG*XXXX종신형(1955년석방)도고 시게노리GGGGG**XXX20년형(1948년사망)도죠 히데키GGGGGG*XGU사형(1978년 야스쿠니신사에 안치)우메즈 요시지로GGGGG**XXX종신형(1949년사망)G : 유죄 , X : 무죄 , U : 기타 , * : 미결3. 남경대학살을보는 각국의 시각에 대하여(1) 중국의 입장중국은 정부에서 일반 민중들까지 남경대학살에 대해 분개하고, 일본의 대외적인 입장인 남경대학살에 대한 전면적 부인의 입장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일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① 중국 정부의 입장일본 자민당의 유력정치인인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의원이 일제의 한반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난징(南京)대학살을 날조라고 망언을 한 데 대해 한국. 중국이 강력히 비난하는 등 파문이 일고 있다.중국 외교부는 14일 "난징 대학살은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침략 전쟁 과정에서 일으킨 잔악하고 포악한 범죄행위로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며 "일본은 절대적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② 중국 지식인의 입장베이징교통 대학 석사과정의 양전위(楊振宇) 중-일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소개했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남경대학살, 만주년까지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일본인 구보타 데쓰지(久保田哲二·82). 그는 24일 대구 곽병원 대강당에서 ‘대구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주최로 열린 ‘남경대학살 참전 일본병사 강연회’에 참석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45년 일본 패전 후 시베리아 등에서 포로로 생활한 뒤 56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지금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시민단체인 ‘중국 귀환자 연락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3) 한국의 입장우리나라의 경우는 중국과 같이 일제 식민지 하에서 무수한 탄압과 학살, 징용과 징병을 당한 나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이 주장하는 남경대학살의 전모에 대해서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분위기이다. 남경대학살에 대한 서승 교수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러하다.“세상의 상식이 된 남경대학살이 없었다고 부인하는 나라가 어떻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서 교수는 일본의 비정상화 원인으로 `강국'' 일본 부흥을 꿈꾸는 일본 지도층의대국주의적, 군국주의적, 배외주의적 과거회귀본능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묵인과 일본내 진보세력의 몰락, 그리고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비판과 견제기능 상실을 꼽았다.”다음은 신문 기사의 일부이다. 이 역시 남경대학살과 일제 식민지 하에서의 일본의 만행에 대한 행위를 일치시켜 보는 입장이다.문제의 본질은 미청산된 역사이다. 관동대지진 때의 수천명 조선 양민 대학살, 수십만 일본군 '종군위안부'의 비참한 삶과 죽음, 강제징용과 강제징병 과정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 넋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은 남경대학살, 원폭피해자의 차별적 방치, 현재진행형인 역사교과서 왜곡은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 일본의 국가적 폭력과 범죄는 동아시아 민중에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과 자존을 짓밟지 않았는가? 과거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에 급급한 일본정부의 행태는 오늘날 일본의 양심과 이성을 가로막고 있다.(4) 제 3국의 입장위에서도 알아보았듯이 남경대학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중국의 시각과. 병화와 난리)'은 전부 조선에 원인이 있었고, 일본은 조선을 위해 국운을 건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지라 공명(空名. 빈소리.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한국의 독립을 취소하고 합병했다. 한국 문제는 일본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높은 허들(높이뛰기에서의 장애물)이다.……이것을 뛰어넘지 않는 한 일본의 자학사관이라는 것도 뛰어넘을 수 없다.또 이 책을 쓰는 데 함께 참여했던 고보리 게이이치로 교수 등은 책 속에서 "패전 망국사관과 동경재판 사관을 극복하려면 사상 투쟁을 결착지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사정은 정식 역사교과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어서 자신들의 잔학 행위에 대해서는 학설이 들쭉날쭉' 이라던가 '연구중'이라는 구실로 구체적인 기술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잔학 행위들에 대해 신문에 연재된 것들이『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는 책으로 출판되어 일부 교사들에게는 교재로 쓰이기까지 했다.서기 1998년에는 정촌신효(町村信孝) 문부상이 국회 답변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특히 명치(메이지)시대 이후에는 부정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쓴 것 같다는 인상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 옮긴이)어느 동경대 교수는 "전시(戰時)에 강간이나 학살, 군대위안부는 당연한 것이다. 교과서에 왜 엉터리 위안부 내용을 넣어 후손에게 자학사관(自虐史觀)을 주입시키느냐?"라고 주장했다. 그럼 서기 2000년, 21세기를 코앞에 둔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 신(新) 악몽 - 서기 2000년일본 언론은 우익단체가 펴낸 교과서 등 8종의 역사교과서가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사실을 3일 오후 일제히 주요기사로 보도했다...... 요미우리신문도 새모임 교과서외 나머지 7종의 교과서에서도 검정 신청 당시부터 실려 있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기술이 사라졌고 남경대학살을 "사건"으로 표현한 대목 등이 두드러졌다고 전했다. 계열 출판사인 후쇼샤가 새모임 교과서를 찍어내기로 된 산케이 신문은 종군위안부, 남경대학살 등 논의가 엇갈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삭말했다.
동이족과 치우그리고 우리 민족과목명: 한국인의 역사 의식교수님:학 과: 중어중문학과학 번: 0091139이 름: 이영지目次서론 - 연구의 목적본론 1. 우리 민족은 동이족이다.(1) 동이족의 夷에 대해1) 夷 = 鐵2)夷 = 활의 모양, 大 = 활을 당기는 사람의 모습(2) 동이족이란1) 동이족 vs 화하족2) 대문구 문화3) 중국 설화나 고문 속에 나타나는 동이족과 동이족의 후예들4) 동이족의 활동 무대였던 황하와 그 근거들2. 치우와 황제, 그리고 그들간의 전쟁(1) 인 물 비 교(2) 두 인물에 대한 사서의 기록1) 치우 2) 황제 (헌원) 3) 치우와 황제에 대한 평가(3) 탁록의 전쟁 - 사서내용의 비교3. 최초의 전쟁과 역사의 맥(1) 치우와 황제를 역사적 인물로 인정해야 한다.(2) 치우천자의 위치를 우리역사에 삽입해야 한다.결론A. 현 우리 민족의 치우에 대한 인식B. 여전히 남은 치우천왕에 대한 의문들C. 황제천왕에 대한 보충자료서론-연구의 목적서양의 학자들뿐만이 아니라 동양의 학자들도 한국 사상이나 문화를 중국의 변방적 변용 이나 중국의 패러디 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불교나 유교 혹은 도가의 탈을 쓰지 않은 우리의 인식 틀은 없는 것인가? 현재 많은 역사학자들이 중국이나 일본과 구별되는 우리의 인식 틀과 문화의 구성원리를 찾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우리의 고유한 무엇을 찾아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는 샤머니즘·무속에 주목하고,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지도 않고 이론적 틀도 없는 무속을 우리의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90년대 말부터 축구에 대한 관심이 불거지고, 심지어 200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개최되면서, 우리 나라도 축구를 응원하는 데 있어, 굉장히 조직적인 체계를 지니게 되었다. 소위 우리들이 발하는 붉은 악마 를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그들은 치우 천왕 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만의 이미지를 형성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치우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근래에 이르러 꽤 활발하 왔다. 일찍이 제10세 갈고 한웅이 여와의 왕위를 빼앗은 신농을 화산족의 최고통치자로 임명할 당시 신농이 그 자리를 보전하는 대가로 약속한 공상의 동쪽 영토를 영원히 넘지 않겠다고 한 국경협약을 어긴 것이다.이에 치우는 전쟁을 선언하고 활과 창, 갑옷과 투구 등을 만드는 한편 쇠로 만든 칼 등 여러 새로운 신무기로 무장했다. 아울러 전 배달민족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갈로산으로 집결시켰다. 특히 그는 신농과 유망이 원래 한겨레였으나 화산족 세력을 등에 업고 이제 영토까지 넘보는 것을 응징하고자 했고 이 참에 한민족의 지배력과 영토도 확고히 해두고자 했다.(2) 두 인물에 대한 사서의 기록1) 치우천자(자오지환웅){왕 대재위년한웅이름서 력12345*************4*************9*************1*************9567248거발한 환웅거불리우야고모사라태우의다의발거 련안부련양 운갈고(독로한)거야발주무신사와라자오지(치우)치액특축다리혁다세거불단BC38***************************************971*************5*************1l 치우천자에 관한 기록은 『환단고기』에 포함되어 있는『삼성기』 전하편 『태백일사』 및 『규원사화』 그리고 중국의 『25사』에 많은 면을 할애하여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중점적으로 설명 하도록 한다.2 『삼성기』상하편에 의하면 신시역대기에 치우천자는 14대 환웅으로 적혀 있다. 신시역대도표참료참고 : 치우학회 http://chiwoo.org/3 『태백일사』의 신시본기진나라의 『천문지』를 인용하여 "치우기는 꼬리별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 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통지』씨족략"치우씨는 치우의 후예이다."라고 했고 혹은 창서는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도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치우에 대한 정서와 평가는 일반 대중과 학계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지난 월드컵 이후 국민들은 치우를 당연히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학계는 '치우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줄 실증적 자료가 없다'며 여전히 '중국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그나마 치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들은 모두 위서(僞書)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곳곳에서 치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1) 재액과 악귀를 막아주는 신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주요 건물 입구에 서있는 해치(또는 해태, 사천왕)의 모습으로 치우는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밀한 홍소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는 무서운 포효로 보이는 표정을 통해 악귀로부터 마을의 재액을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또 기와집 치미나 막새기와(귀면와)에 위치하여 집을 화재와 재액으로부터 보호해주고,동짓날에는 붉은 빛 팥죽이 되어 병마와 액운을 막아준다. 또한 단오절 적령부(赤靈符)라는 붉은 부적을 통해 개인과 집안을 보호해주기도 하고, 군사들의 방패와 무기와 군기(軍旗), 투구 등에 새겨져 승리를 일궈내는 군신으로 작용을 한다.(2) 치우의 뿔 - 도깨비와 황소치우는 잡귀를 막아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붉은 도깨비로 항상 우리 곁에 머물렀다. 도깨비 연구가 조자용 박사나 윤열규씨에 의하면 도깨비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한국의 도깨비만이 소뿔이나 자신감에 넘치는 홍소 등 치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뿔 투구를 쓰고 경기를 하는 치우희, 고구려 벽화에서는 각저희라고 했던 씨름은 현재 우리 민속의 대표적인 놀이가 되어 있으며, 소뿔 대신 황소를 상으로 주고 있다.4. 최초의 전쟁과 역사의 맥중국 민족계인 공손씨 헌원이 화산족과 하족을 화하족(오늘날의 중국민족)으로 하나로 단결시키고 군병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이후 동양 역사의 쟁탈전이 10여년에 걸쳐 70여회의 대회전을 치르며 계속되었다. 물론 치우는리(려)국의 천자가 “치우”였으며 구리국의 백성이 묘민이었음을 정사의 기록은 명확히 전하고 있다. 구리의 강역과 “삼묘”의 강역이 일치하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아래 보충자료 참조) 본문중에 “황제 하나만 중화민족의 시조로 내세워서는 도저히 지나를 정통으로 끌어부치는데 한계를 느낀 중화민국 정부는 염제는 동이족 조상, 황제는 화하족 조상,치우는 묘족 및 남만, 월족 등의 통합적 조상으로 보아 이들 염황치를 대륙민족의 적장자곧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으로 자리매김해 보기 시작했으며....“라는 글처럼 동이 민족사를 중국역사화 하기 시작했다 치우의 역사를 잃어버리면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역사도 당연히 잃게 된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하는 우리의 각성이 필요할 때이다.참고 자료A. 현 우리 민족의 치우에 대한 인식1. 붉은 악마와 치우 천왕{치우천왕(蚩尤天王)치우천왕(蚩尤天王)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천왕으로서,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합니다.다른 이름으로 자오지(慈烏支)환웅 이라고도 합니다.삼성기 하편에 의하면 그는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 집니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제작술이 뛰어나 세상사람들은 치우천왕이라 불렀답니다.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국인 학자 왕동령이 저술한 에 의하면 4천년전(?) 현재의 호북성,호남성,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들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라 기술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사서인 를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책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이다' 라고 되어 있고, 같은 를 송나라의 배인이라는 인물이 주해한 책에 따르면 '치우는 옛 天子이다'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온갖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치우천왕은 그야말로 문무겸전의 이념으로 겨레의 앞날을 열고자 땀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이겨레 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던 무리가 있었다.그들은 동이겨레가 늘 외경하던 '밝은 하늘의 뜻'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이단성을 주도하던 인물 이 한족(漢族)인 공손헌원이었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공손헌원과 일전을 별렀다. 그러 던 중 마침내 공손 헌원족의 한갈래인 '소호'의 부대와 맞 붙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치우천왕은 각종 기술과 기상을 조화하여 커다란 안개를 펼쳤다고 한다. '소호'의 부대는 앞을 가리지 못한 채 괴멸하여 갔다.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공손헌원' 부대는 치우천왕 측에게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물과 불을 마음껏 다스릴 줄 알았던 치우천왕측을 도저히 담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치우천왕의 놀라운 웅략(雄略)이 그들을 압박하였 다. 이른바 '분출사도(分出四道)'라고 하는 전법이 공손 헌원 부대를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 것이다. 더군다나 치우 측은 '돌날림치게'라는 신전투장비를 만들기에 이르렀다.마침내 치우천왕부대는 대승하였다. 뛰어난 전법과 신장비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치우천왕은 겨레 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우천 왕은 각종의 기와에 '도깨비'무늬라고 하여 남아있다. 어느덧 치우천왕의 영웅적 자취는 엉뚱한 도깨비 환상으로 옮겨진 것이다.어쨌거나 치우천왕의 웅략은 소중한 우리의 정신자산 이 분명하다. 몹시 어려운 오늘에 있어 더욱 곱씹어 볼만 한 가치가 있으리라.B. 여전히 남은 치우천왕에 대한 의문들(1) 치우천왕은 어떤 분인가?{에 에서는, 치우천왕을 우리의 조상인 한국(桓國) 14세 자오지 한웅이라 적고 있다. "한웅"은 곧 "왕"과 같은 의미이며, 청동기-철기시대의 제왕일것으로 추측된다. 무릇 전쟁에서 진적이 없어, 한-중의 많은 장수에게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었으며, 이들이 전쟁에 나설때 치우신에.
(2003년 1차 계절학기)중국차(茶)문화에 담긴 중국어과목명: 중국의 언어와 문화교수명: 신승희 선생님학과,학번,이름 : 중어중문과 0091130 이세희중어중문과 0091139 이영지중어중문과0177281이아형 소비자인간발달 0087066 소소평目次서론본론Ⅰ.차(茶)의 개념과 기원, 유래1. 차의 개념2. 차의 기원3. 茶의 역사Ⅱ. 중국 사람들과 차 문화1. 중국 사람들의 차도(茶道)2. 중국의 음차 풍속3. 중국인들의 飮茶 습관과 관습Ⅲ. 차(茶, 다)에 관한 술어1. 혼례와 관련하여2. 의식에 관한 것3. 식생활에 관한 것4. 중국인들이 차를 마셨던 시간에 관한 표현들5. 직업과 관련된 것6. 화해와 중재와 관련된 것7. 사람의 심리와 관련된 것8. 차에 관련된 기타 표현들9. 다도에 관한 표현들Ⅳ. 차와 인생의 함수관계결론A. 차를 소개한 책들B. 茶의 독음에 관하여- 차 or 다C. 차의 분류 ( 7대 차를 중심으로 )D. 소수민족의 茶E. 차와 더불어 먹는 다식(茶食)서론중국 속담에 “아침에 차(茶)를 마시면 하루종일 위풍당당하고, 정오에 차를 마시면 일하는 것이 즐겁고, 저녁에 차를 마시면 정신이 들고 피로가 가신다”라는 말이 있다. 속담이라는 것이 고전(古典)이나 고사(故事)에서부터 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오래 전부터 중국인의 일상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료가 차임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차 문화는 중국어에도 영향을 끼쳐 차에 대한 다도관이나 차의 채집, 차의 가공방법에서 다도관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중국인의 삶과 함께 오랜 역사를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차, 그리고 중국의 다도는 한국 일본 등에 전파되었고 티벳을 거쳐 서양으로 전해지기 시작하였고 현재 동양과 서양, 더 구체적으로는 각 국의 독특한 다도가 형성되어 있다.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중국의 차가 중국문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위치와, 더 나아가 그 발전 과정과 그에 따라 각 국의 문화와 역사에 미친 영향과 더불어 중국의 파는 장사꾼들이 정부의 단속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부로서는 이들을 평정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용서하고 군대로 조직하였다. 이들이 바로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차 장사꾼으로 편성된 다상군(茶商軍)이다.9 元 나라 - 차 마시는 습관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도 전파되어 차에 버터나 밀크를 타서 마시곤 하였다. 오늘날 서양사람들이 커피나 홍차를 마실 때 크림을 넣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⑩ 明 나라 - 주원장이 정권을 쥐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차 제조법이 너무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이를 개량하여 가마에서 덖어내는 방식을 개발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엽차(葉茶)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절강(浙江)이나 안휘(安徽), 강소(江蘇)의 화중 지방이 차의 명산지로 부각되어 용정차(龍井茶), 무이차(武夷茶) 등이 아직도 유명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민들 사이에는 차에 이것 저것을 섞어 마시는 습관이 남아 있었는데 이것을 악습이라 하여 차만을 마시는(淸飮) 방식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오늘과 같이 뜨거운 물에 불려 마시는 포다법(泡茶法) 방식이 대중화하게 된다. 다기로는 광동(廣東) 조주(潮州)의 조그마한 다완(茶碗), 다호(茶壺)가 유명해지고 찻잎을 보관하기 위한 엽차호(葉茶壺)도 등장하였다. 차의 온도와 향을 유지하기 위해 다완에 뚜껑을 덮은 개배(蓋杯)며 개완(蓋碗)이 등장한 것은 명이 끝나갈 무렵이다.⑪ 淸 나라 - 화차(花茶)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지방도시에까지 다관(茶館)이나 다루(茶 樓)가 들어섰다.4. 중국차에 얽힌 근현대사1 유럽에서의 다회(茶會, Tea Party)17세기 네덜란드인을 통해 중국의 차(茶)가 처음 전래될 당시의 유럽 사회는 술 마시고 취하는 풍습이 상, 하 계층에 상관없이 매우 심하였다(그도 그럴 것이 차나 커피가 전래되기 전까지 그들의 음료는 물과 술 뿐이었으며. 특히 술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그 역할이 컸다). 이에 포르투갈에서 영국 찰스2세에게 시집 간 캐서예(茶藝)를 통해서 자연에 순응하고 하늘의 천성을 배운다고 하였다.둘째는 정(靜)이다.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 정(靜)이란 것을 말할 때 천지만물을 가장 진실하게 가장 깨끗하게 거울에다 비추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이 본래적인 심성으로 돌아가 자연을 통찰하고, 자아를 발견하는 그 순간 참된 정을 깨닫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은 수양을 닦는 기본적인 자세와 관련이 있으며 차를 정갈한 품종으로 골라 정좌한 채 마시는 것은 수양의 도리를 행하는 기본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정은 일종의 심미안의 체험이다. 정갈하게 마시는 차 한 잔 속에 인간은 심신의 정화작용을 느낄 수 있다.셋째는 이(怡)이다. 이(怡)라는 것은 곧 희열이고 즐거움이다, 차도에서 말하는 희열은 여러 가지와 함께 한다. 우선 차밭의 환경이 희열을 안겨다 줄 수 있고, 아름다운 차의 도구들이 희열을 안겨다 주며, 차의 향기는 물론이거니와 쌉쌀하고 은근한 차의 맛에서도 인간은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넷째, 차 문화는 진(眞)과 관련이 있다. 진은 진짜이며 진실한 그 무엇이다. 중국 차 문화에서 추구하는 진이란 아름다운 산과 깨끗한 물로 인해 얻어지는 진짜 품종의 차가 우선이며, 차의 도구들이 진짜가 되어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간의 정서적인 활동이 진정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2. 중국의 음차 풍속고대에 차를 마시는 것은 일종의 수준 높고 우아한 활동이었다. 문인들의 시나 그림 또한 대부분이 차를 떠나 이야기 할 수 없고, 그윽한 차의 향은 시인들과 화가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예술적 정취(義境 yijing)에 빠지게 하여, 창작의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문인들은 차를 좋아하여, 차에 대한 많은 시들을 썼다. 어떤 이가 짐작하여 말하길, 역대의 저명한 차에 관한 시(茶詩)는 수천 수나 될 것이라 하였다.당송시대에 문인들은 투차(鬪茶 doucha) 를 좋아하여, 모두 함께 차를 품평(品茶 pincha)하고, 차의 좋고 나쁨을 평가하여, 가장 좋은 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粗茶淡飯): 변변치 않는 음식.주두다각(酒頭茶脚) : 술은 술독의 위의 것이 좋고, 차는 주전자 밑에 있는 것이 진미라는 말.開門七件事 (-ㅁ),米,油,醬,鹽,醋,茶:우리 생명에 가장 필요한 필수품 7가지.다고지리(茶 之利): 차와 술을 팔아서 얻는 이익다점(茶點): 간식4. 중국인들이 차를 마셨던 시간에 관한 표현들일차경(一茶頃): 차를 한잔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짧은 시간.차여주후(茶余酒后)=차여반후(茶余飯后): 차를 먹거나 밥을 먹은 후 한가한 휴식시간.일차간(一茶間): 여행도중 쉬어서 차를 마시는 것5. 직업과 관련된 것다모군사(茶母軍士): 차를 끓이는 일을 맡아 하는 군사.다박사(茶博士): 옛날 다방의 심부름꾼차위(茶圍): 옛날 기관에서 기생들과 차를 마시고 노는 것다방(茶房): 잔치, 제가, 연회가 있을 때 고용되어 술이나 요리 심부름을 하던 사람다상(茶上): 임시로 고용되어 찻물을 제공하고 술좌석을 시중들던 사람6. 화해와 중재와 관련된 것흘강차(吃講茶) : 옛날 건달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쌍방이 찻집에 모여 중재자를 두고 시비를 가리고 화해의 차를 마시다.(비용은 잘못한 쪽이 부담함)금지강차(禁止講茶):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것을 찻집에서 내놓는 차에 대하여 함부로 평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레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차의 품평 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말다툼이 생기면 당사자들 을 차루(茶樓)로 데려가 화해를 시키고 사례를 받곤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 화 해 작전이 반드시 성공하는 법은 없어, 가끔은 우리가 꿍후 영화에 보듯이 주 먹질을 하기도 하고 음식점 기물을 부수기도 하여 음식점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런 손님이라면 안 받고 싶은 심정에서 그 같은 표어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7. 사람의 심리와 관련된 것이다양렴(以茶養廉): 청렴결백한 품성을 닦다.주만경인, 다만기인(茶滿欺人): (의도적으로) 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손님을 접대할 때 뜨거운 차를 주면 다치거나 뜨거워 차를 업을 수 있게끔 고격에 따라 발음을 달리한 것은 우리 민족뿐인 것 같다. 오늘날 아래와 같이 그 쓰임새를 구분할 수 있다.1. {차}로 쓰이는 경우ㄱ. 실제의 마른 차와 마시는 차를 가리킬 때- 차, 작설차, 햇차, 선차(仙茶), 동차(東茶), 산차(山茶는 동백나무를 가리킴), 차원(茶園,차나무밭), 차탕(茶湯), 차향(茶香), 박차(薄茶, 맛이 나쁜 차, 자기가 대접하는 차의 낮 춤말) 등ㄴ. 다른 독립어와 같이 만들어진 복합어일 때는 {차}이다. 특히 한자로 쓰지 않는 말과의 복합어는 예외없이 {차}이다.- 차그릇, 차도구, 찻독, 차떡, 찻방(차를 보관하는 방), 차벗, 차살림, 차세간, 차숟갈, 차솥, 차손님, 찻집, 찻잎, 찻자리 등ㄷ. 차세간 낱낱에 쓰일 때(일반적으로 {다}로 쓰기도 한다)- 찻장(茶欌), 차탁(茶托), 차반(茶盤), 차완(茶椀), 차합(茶盒), 찻잔, 차상 등ㄹ. 궁중이나 불가의 용어가 아닌 여염집의 일이나 일상적인 일 또는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할 때- 차례(茶禮, 사회적인 행사인 다례와 구분), 차사(茶祀), 차인(茶人), 차회(茶會) 등2. {다}로 쓰이는 경우한자와 어울린 말로서 복합명사가 아닌 때 {다}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격을 높이는 뜻이 있을 때 {다}를 쓴다.ㄱ. 차를 다루는 행위 (verb+茶)- 팽다(烹茶), 행다(行茶), 헌다(獻茶), 진다(進茶), 끽다(喫茶), 음다(飮茶) 등ㄴ. 궁중이나 불가의 용어이거나 국가적, 사회적 용어이거나 격을 높일 때- 다방(茶房, 고려시대의 차 관청), 다시(茶時), 시다림(屍茶林, 죽은 이를 위해 장례 전에 행하는 의식), 다도(茶道), 다담(茶談), 다신계(茶信契) 등ㄷ. 차 이외의 다른 용도로도 쓰이거나 차를 직접 가리키지 않을 때, 옛글이어서 한문을 보기 전에는 그 뜻을 알기 어려울 때- 다실(茶室), 다정(茶亭), 다천(茶泉), 다로(茶爐) 등- 다려(茶侶, 차벗), 다갈색, 산다(山茶, 동백나무), 다식(茶食) 등ㄹ. 지명(地名)- 다동(茶洞, 서울), 다공리(茶貢理, 경남 거
⑴ 사례 Ⅰ(AT&T)◈ AT&T의 e-HRM 체제 구축 원칙e-HRM 체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는 AT&T는 웹 기반 시스템을 구축하기에 앞서 다음의 원칙을 체제 구축의 불문율로 설정하였다.▷ 사업 목표와 정합성을 갖는 목표의 수립과 유지동사는 지난 수년 동안 사업부를 스핀오프하고 이제는 적극적인 인수합병에 나서는 등 급격한 사업 구조 변화를 겪고 있다. 이에 따라 e-HRM 체제는 필요 인재 확보/유지 등 사업 전략의 변화 방향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즉‘멋진’ Technology의 구현이 아니라 사업의 성공 여부에 기여하는 것을 중시한 것이다.▷ 투자에 대한 정량적인 성공 판단 기준 설정동사는 서류에 기반한 HRM 관련 커뮤니케이션을 금지하거나 최소화하여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한편, 생산성 증가, 종업원 서비스의 향상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지표를 설정하였다.▷ 종업원 편의성, 수용성, 신뢰성의 중시동사는 e-HRM 체제의 한계를 종업원 탓으로 돌리지 않고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극복하고자 노력하여 종업원의 편의성과 수용성을 높였다. 그리고 e-HRM 체제 구축 과정을 종업원들이 납득 가능하도록 알려 주어 체제 개혁에 대한 신뢰성을 높였다. 또한 편의성, 수용성,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시스템을 테스트하고, 여러 분야의 종업원들로 구성된 포커스 그룹과의 모임을 통해 발생 가능한 문제점을 사전 점검하고 개선하는 노력을 지속하였다.이 밖에도 데이터를 항상 점검하여 정확성을 확보하고, 100%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단계별로 향상이 가능하도록(Buildable)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원칙 중 종업원의 편의성, 수용성, 신뢰성을 중시하는 원칙이 체제 구축 과정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시스템이 구축된 첫 해 종업원들은 접속해서 모델링을 해보고는 등록을 위해 담당 부서에 전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웹을 통해 업무를 처리하더라도 1분이 되지 않아 담당 부서에 전화를 시트만 출력하고는 접속을 끊고 등록을 위해 전화를 거는 겁니다. 그리고 등록을 하더라도 확인을 위해 담당 부서로 전화를 하는 겁니다.”그러나 AT&T는 종업원을 탓하거나 행동을 변화시키려고 홍보하는 노력보다는 종업원들이 쉽게 이해하고 편리하도록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노력을 우선적으로 시행했다.즉 종업원의 모델링이 끝나면, ‘Enroll now’와 ‘Print this and go to IVR’버튼이 바로 뜨도록 시스템을 개선하였다. 만약 바로 등록하지 않고 IVR(Interactive voice re- sponse)을 이용한다고 선택하면, 모델링한 사본(Script)을 통해 바로 입력 하여 처리 시간을 단축하였다. 그리고 어느 버튼을 누르든지 업무 처리 완료 후 제대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을 실시간(Real-time)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사례 Ⅰ에서 AT&T는 e-HRM의 도입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회사의 상황 분석과 함께 그에 맞는 정확한 체제를 갖추기 위한 명확하고도 확고한 원칙을 설정했다는데 있어서 큰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HRM의 도입이 인력관리의 전산화에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e-HRM 체제 구축 이전에 명확한 도입 원칙을 설정하고 이를 시스템으로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AT&T는 기존의 p-HRM과 혼용을 철저히 막음으로 인해서 투자에 대한 정량적인 성공 판단기준을 설정하였고, 종업원의 편의성을 우선시하고 신뢰를 구축함으로 인해서 새로운 변화에 걸맞는 인적자원관리를 수행하였다.⑵ 사례 Ⅱ(Schlumberger) Schlumberger는 기술 서비스를 주 업종으로, 100여개국 이상에 6만 4천여명의 종업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연 매출이 110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임.)◈ Schlumberger의 e-HRM 도입 프로세스Schlumberger는 이미 1980년대 초에 인트라넷을 도입하는 등 정보 기술 활용의 선도 기업 중 하나였지만, 이러한 강점을 HRM에는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 정보 기술 중심의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으므로, 직접 인터넷을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사용자의 편의와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단계적으로 시스템의 완성도와 활용 범위를 확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전략적 방향성에 입각하여 동사는 1997년 미국내 종업원들을 대상으로 한 Self-service 시스템 구축에 착수하였다. 이후 2년에 걸쳐 사용자 친화적이고 탄력적인 SABL(Schlum-berger automated benefits link)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동사의 SABL 구축 프로세스를 보면, 우선 복리후생 관리자들이 현업 관리자들과의 미팅을 통해 의료 보호(Health care), 퇴직 등 복리후생 관련 제안과 요구 사항(Wish lists)을 확인하여, 종업원들에게 정확히 제공해야 하는 프로그램과 제공하는 방법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SABL을 출범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분명하고 일관적인 메시지를 프린트, 이메일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홍보하였다. 복리후생 프로그램은 이익 공유(Profit sharing)에 대한 정보, 연금과 주식 부여 제도 등이 순차적으로 제공되었고 1999년에는 건강, 생활, 장애 복리후생이 시행되었다.현재 동사는 투자 교육을 제공하여 종업원들의 재무계획을 돕고, 궁극적으로 SABL을 글로벌하게 종업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전략적인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단계적이고 주도면밀한 시행한 결과를 놀라운 것이었다. 1999년 11월 복리후생 등록 기간에 98.4%의 미국 종업원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이용해서 성공적으로 복리후생 등록을 마쳤다. 심지어 이러한 온라인 등록이 단지 현재의 복리후생 프로그램을 유지하거나 수정하여 등록하는 수준이 아니라 새롭게 리디자인되어 등록되는 경우도 있었다.동사는 이러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계획을 짜고 있다. 예를 들면 PC를 가지고 일하지 않는 종업원들이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설치한 키오스크를 단지 정보를 얻어 보다 효과적인 복리후생 프로그램의 설계와 성공적인 e-HRM 체제의 구축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사례 Ⅱ 에서는 Schlumberger가 회사의 유리한 점을 잘 파악하여 새로운 시스템의 구축을 추진한 결과 e-HRM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e-HRM의 성공을 위해서 전략적 방향성에 입각하여 주도면밀한 계획을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그 내용을 보면 모두 사용자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고 종업원의 복리 후생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Schlumberger는 개개인을 위한 인적자원관리를 시행했고 과거와 같은 성과주의가 아닌 공유를 그 신념으로 했다.⑶ 사례 Ⅲ(Container Store)◈1999년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회사 1위 컨테이너 스토어컨테이너 스토어는 1621명의 종업원을 가진 장식용 간이 선반 판매업체이다. 동사는 구성원들을 올바르게 대우하면 좋은 경영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신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다.컨테이너 스토어의 구성원들은 다음의 6가지 원칙을 준수해야 하나, 이러한 원칙 이외의 세세한 규정이나 통제는 없다. 즉 누구나 지켜야 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이 필요한 권한을 활용하여 고객 만족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 고객의 바구니를 가득 채워라. 그러면 돈 버는 것은 간단하다.¤ 둘째, 고객에게 원하는 상품만 줄 것이 아니라, 좋아 할 것 같은 모든 것을 권 하라. 고객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올바른 행위이다.¤ 셋째, 한 명의 탁월한 사람이 10명의 좋은 사람보다 낫다.¤ 넷째, 직감은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올 리 없다.¤ 다섯째, 어디서든 최고의 선택, 최고의 서비스, 최선의 가격을 제시하라.¤ 끝으로, 열정적 태도를 가져라.동사의 HR Practice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구성원에 대한 신뢰라 할 수 있다. 회사의 재무 정보를 완전 공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익 분배를 실시하고 있다. 또한 고객과 관리직 각각 업계 평균(74%, 34%)보다 현저히 낮은 23%, 5%의 이직율을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금전적 보상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이는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금전적 보상을 경쟁력 있게 제공한다 할지라도 다른 기업에서 보다 나은 금전적/비금전적 조건을 제시하면 구성원들은 얼마든지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전적 보상 이외의 그 무엇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사람들은 물질적/물리적 욕구가 충족되면 보다 높은 수준의 욕구, 즉 자기 존경이나 자아 실현과 같은 욕구들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원론적 이야기 같지만 바로 이러한 욕구들을 조직에서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두 번째로 고려해야 할 내재적 보상이다. 내재적 보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충족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첫째, 본질적인 직무 만족이다. 이는 도전적인 직무를 수행하면서 해당 구성원이 업무 수행상의 흥미를 느끼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때 형성 될 수 있다.둘째 성장 기회이다. 이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개인적인 성장 기회나 조직내에서의 성장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형성된다. 특히 조직내에서의 성장 기회는 소속 기업이 해당 산업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 중요하겠지만, 경영층의 경영 방식으로부터도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영층의 사고와 행동이 시장/고객 등 시장의 환경에 사후 반응적(reactive)으로 대응하거나, 필요한 역량 확보를 위해 과감하게 투자를 실행하지 못하고, 의사결정이 신속하지 못하다고 구성원들에게 인식될 경우,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조직내 성장 전망을 좋지 않게 판단할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성원들이 공식/비공식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이 향상되고 있거나 향상될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공식적인 교육 훈련도 분명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행을 통한 학습(Le
일제는 우리의 국권을 강탈한 후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민족을 통치 하려하였는가?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해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조약(8월 22일)을 계기로 완전한 식민지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무력으로 조선을 완전히 강점한 일본은 이후 조선을 영구히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이권을 얻기 위해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우선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의 공급지 확보를 위해 한국내의 생산기반을 강화하였으며 수탈을 합법화하기 위해 여러 전근대적인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정비와 수탈은 35년 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사회·경제적 수탈 뿐 아니라 한민족의 정신까지 말살시키려는 무단하고 악랄한 것이었다.일제의 식민통치는 그 시기와 성격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1910년∼3·1독립운동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3·1독립∼중일전쟁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중일전쟁∼패전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이 글에서는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라 할 수 있는 1910년대의 일제 초기 식민통치에 대해 알아보겠다.(1)무단통치의 내용1910년 8월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지배기구 및 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지배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국 민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강력한 헌병경찰력을 바탕으로 한 폭력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는 무관총독에 의한 직접통치와 헌병경찰제도를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1910년 10월 일제는 식민지배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총독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하여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 가운데서 임명되었는데(실제로는 해군대장 사이토오 마코토를 제외하고는 모두 육군대장으로 채워졌다.) 일본 천황의 직접 지시를 받아 입법, 행정, 사법 및 군 통수권에 이르는 모든 정무에 대한 독재권을 갖고 통치권력을 장악하였다. 이는 사실상 한국을 일본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적 방식에 의한 무단통치를 행하도록 승인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에는 총독관방 외에 총무부, 내무부, 탁지부, 농상공부, 사법부의 5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밖에 취조국, 철도국, 통신국, 임시토지조사국, 전매국, 인쇄국 및 경무총감부와 각도 이하 각급 지방행정기관과 학교가 설치되었다. 통치체제의 기능별로는 중앙행정기관, 지방행정기관, 탄압기관, 자문조사기관, 동화정책기관 및 경제약탈기관 등의 구조로 분류된다. 관리는 구한국 정부의 관리 중 일어에 능통하고 친일적이며 실무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채용하였는데 이는 한국을 통치하는데 한국민중을 매개로 하기 위함이고 대한제국 관리들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이라고 볼 수 있다.구왕조를 해체시켜 식민지 체제로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민족적 저항이 거세지 자 그에 대항하여 일제는 헌병경찰제라는 특이한 무단통치기구를 만들었다. 헌병은 본래 군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군사조직이지만 군의 통수체제와는 다른 천황 직속의 조선총독의 권력체계 속에 편입시켜 일반적 치안유지업무를 수행케 했다. 헌병경찰제도에 의하면 헌병사령관의 중앙의 경무총감이 되고 각도의 헌병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다. 또 위관이 경시, 하사관이 경부, 사병이 순사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곧 일본헌병이 민간인에 대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일본은 헌병경찰관서와 헌병경찰을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과 함께 전국에 편성하였으며 의병토벌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을 장악하고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감시·감독하였다. 이시기 조선의 치안책임 총수였던 초대 경무총감 겸 헌병사령관은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조선통치비법으로 와포성산의 방법을 이용했다고 자랑삼아 밝힌 바 있다. 즉 그의 통치비결이란 '마치 바둑판에 바둑알 깔아 놓듯 가을 하늘에 무수히 떠 있는 별들 모양' 깔아 놓은 무수한 경찰서와 순사주재소를 통하여 조선반도를 물샐 틈 없이 통치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무단통치의 실상과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게다가 일본정규군을 한국에 배치하고 한국 민의 완전무장해제를 명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더불어 같은 해 9월 '총포급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단속을 강화하면서 위반하면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또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을 칙령으로 발표하여 한국민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본의회를 경유하지 않고 칙재에 의한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대신하도록 하는 법령체계를 만들어 한국인을 억압하기 위한 각종 악법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일제가 구한국시기에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했던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을 그대로 존속 시행하였다.(2)무단통치의 배경일제의 무단통치에는 몇 가지 역사적·현실적 배경이 있다. 우선 일본은 수천 년 동안 문화적으로 조선에 비해 낙후된 상태였다. 비록 조선보다 일찍 근대화를 하였다고는 하나 조선에 대하여 문화적인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또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조선병합으로 각지에서 의병들의 무장항쟁 등 거센 저항이 일어나 통치에 큰 위협이 되었으므로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는 식민통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예속할 만큼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으므로 군사적 침략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일본군부의 입장에서 무력에 의한 조선병합은 조선의 영토를 장악하고 군사력에 의한 대륙진출의 전진기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3)경제적 침탈일본은 식민지 수탈구조를 구축하고 원활한 경제적 침투를 위해서 화페정리사업에 착수하였는데 한국의 화폐본위를 일본과 동일하게 만들고 엽전 및 백등화를 무효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상인들의 화폐자본은 소멸되었고 많은 상인들이 파산하였다. 이로서 금융제도나 화폐제도는 일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의 상업도 서서히 일본 상업 자본에 의하여 지배되어 갔다.한편 토지제도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실시하여 수탈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신고된 토지는 신고자의 소유로 인정하되 신고되지 않은 토지는 식민지 당국의 소유로 귀속시키는 '신고주의'에 의하여 시행되었다. 이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일본자본의 토지점유에 적합한 토지소유의 증명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것. 둘째, 지세수입을 증대시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조세수입 마련을 위한 것. 셋째, 국유지를 창출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유지로 개편하기 위한 것. 넷째,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내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미간지를 무상으로 점유하기 위한 것. 다섯째, 토지조사사업 이전까지의 일본 상업고리대자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하기 위한 것. 여섯째, 식량과 원료, 특히 미곡의 일본으로의 수출증가를 위하여 이를 지원할 수 있는 토지제도를 정비하기 위한 것. 일곱째, 일본공업화에 따르는 일본산업자본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식민지 내 소작농을 임금 노동자화 함으로써 충당하도록 하는 제도적·구조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사회·경제생활과 농업부문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임야까지 포함해서 당시 전국토의 50.4%를 국유화하였다. 또 토지신고가 토지소유권의 신고에 국한되어 소작인들의 권리는 신고대상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소작농들은 몰락하여 유이민이 되거나 임금노동자가 되어 농민층의 분화가 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지세수입의 원천을 확보하고 이후 식민정책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일본인의 토지소유가 한층 늘어났다. 그리고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비단 농지 뿐 아니라 산림까지도 탈취하였다.게다가 자신들이 중점적으로 수탈해가고자 했던 쌀, 면화, 누에고치, 소등을 손쉽게 많이 가져가기 위해 그들의 구미에 맞는 품종을 보급시키고 이를 헐값에 수탈하여 갔다. 이러한 일제의 한국 농업의 식민지적 구조 개편은 우리의 농업구조를 악화시키고, 농업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일본은 한국을 원료공급지와 독점 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 12월 29일 제령 제13호로 이른바 '회사령'을 발표하여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전문20개조로 구성된 회사령은 '한국내의 회사설립은 반드시 조선총독의 사전허가를 받고, 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투옥하며, 허가를 받고 설립한 회사라도 언제든지 정지, 폐쇄, 해산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 한국인은 회사설립허가를 얻지 못하였으며 민족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회사령의 발포는 한국의 자본주의적 공업화를 저지하고 식민지적 식량·원료의 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 묶어두기 위한 침략정책의 소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