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은 기독교 2,000년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도 바울의 신학을 다시 발견한 사람이요 중세와 종교개혁 그리고 근대기독교 신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어떤 한 역사가의 역사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히 그의 방법론에 관한 원리들을 탐구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성 어거스틴은 특히 그의 명작이며 22권으로 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역사해석을 시도하였다. 실제로 성 어거스틴은 인간의 全歷史를 시작부터 종국까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 Civitas Terenna)이라는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다루고 있다.성 어거스틴은 개인과 인간 사회 양 측면에서 역사를 연구한다. 그는 ?하나님의 都城?에서 사회 전체의 역사를, ?고백록?에서는 개인의 역사를 다룬다.?하나님의 도성?은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한 명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종국까지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성 어거스틴은 진리론 및 실재론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분명히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에 적용시켰다.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역사는 본직적으로 종교사다. 그래서 혹자는 성 어거스틴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역사신학을 기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을 바꾸어, 성 어거스틴의 역사연구방법은 방법론의 특성상 독특한 것으로 철학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다.성 어거스틴은 변증론적인 역사가이다. 그의 방법론은 그것을 지배하는 엄격한 신학체계 때문에 반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 신조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취급했고 그 신조 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경험이나 역사과정의 경우는 그 신조의 규칙에 순응하게 하였다. 어거스틴의 역사연구의도는 역사의 발전양식과 윤곽을 발견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는데 있다. 성어거스틴의 역사 연구 방법의 근본적인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며, 역사연구를 포함해 그가 연구하는 주요 한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것이다.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은 그의 독특한 지식론에 의해 결정된다. 그 내용을 보게 되면실존 : 회의론자의 모진 의심이 전혀 뒤흔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실존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먼저 자신의 실존을 이해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자아실존을 신지식의 주체로 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 어거스틴을 “어거스틴은 자아의식을 지식의 근본적인 기초로 수립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야말로 그가 이룩한 가장 큰 공로들 중의 하나이다”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이성 : 어거스틴은 이성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에 있어서 불가분의 요소로 간주한다. 지식을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이성을 통하여 아는 것이라고 보았다.신앙 : 성 어거스틴은 신앙에 입각하여 신지식의 근원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믿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관계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성 어거스틴은 세계사를 여섯 무대로 구분함으로써 세계사에 하나의 유형을 부과한다. 역사는 순환적이며 나선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직선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며, 여섯 무대로 구분한 것은 구역사가 분명히 어떤 구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여섯 무대는 1)아담에서 노아까지, 2)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3)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4)다윗에서 바빌론 포로까지, 5)바빌론 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6)그리스도의 탄생부터 마지막 심판까지이다. 이는 또한 세계사의 발전과 인간 개인의 성장 간에 유사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성 어거스틴의 직선사관은 다른 사관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 기독교적인 사관이다.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성 어거스틴의 관점은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Marx)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인간 사회는 자체의 물리학과 본래의 자체적인 질서 및 발전을 지니고 있다. 인간 사회는 하나님이 부여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나간다. 성어거스틴은 역사과정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성 어거스틴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따라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직선적으로 계속 진행해 나가는 것으로 믿는다. 다시 말해서 성 어거스틴은 인간역사는 처음부터 종국의 마지막 심판까지 6장면으로 되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두 도성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과 이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세조의 즉위는 조선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적 입장에서 명분상의 취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점에서 많은 비판이 되어 왔다. 연산군에 이르러 발생하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 속에서 세조 정권에 대한 평가가 정책적으로 이용당하게 된다. 김일손의 사초문제와 이 속에서 제기된 조의제문 을 통해 세조왕권의 성격을 바라볼 수 있다.연산군 4년 7월 1일 발생한 김일손의 사초문제는 조의제문 으로 비화되고 사초에 기록된 김종직의 제자들에 대한 추핵으로 진행된다. 당시 김일손에 대한 심문에서 사초를 중심으로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적인 항목이 5개이다.항목 1은 허반의 진술을 통해 세조의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김일손의 잘못된 기록에 의해서 세조가 권씨를 육체적으로 탐하려 했다는 의도로 다뤄지게 된다. 그리고 세조의 며느리들에 대한 배려는 질투의 형태로 증폭되어 가문간의 갈등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다.다음 2∼3항목은 김종서와 황보인이 절개로서 죽었다 라하는 김일손의 진술이다. 즉 계유정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김일손과 사림계열로 친교가 두터웠던 정여창은 김종서, 황보인의 모반사실을 명확히 하면서 정분에 있어서는…김종서와 황보인은 모반이 명백하였기 때문에 모두 참형에 처해졌습니다. … 죽는 것은 같으나 명절에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즉 김종서 등과 더불어 동모하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죄없이 죽는 것 같아 마땅히 전을 짓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편지를 보내준 것입니다.정여창은 세조 즉위 전인 1450년에 출생하였고 세조조에서 종실과 혼인하고 있으며 공직을 담임하고 있었던 부친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던 당시의 정세 흐름과 역사적인 상황을 일정하게 접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세조조 전기간을 통틀어 정여창은 만 18세 김일손은 만4세를 초과하지 못한다. 동일한 사안들에 대한 두사람이 판단에 어느쪽에 신빙성이 더있을 지는 자명해진다. 그리고 항목3에 나타나는 탄승려이 말에 대해 정여창은 탄승려의 말에 대해 믿을 수 없다 고 전했으나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기록한다. 계유정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믿을 수 없는 내용은 기록할 수 없다는 정여창의 충고를 김일손은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김종직도 정여창과 같이 계유정난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항목 4∼5에서 드러나는 김일손의 진술은 사건이 김종직의「조의제문」으로 비화된다. 김종직은 재야유림을 대변하는 영남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세조조에 적극관료생활을 하고 있다. 김종직은 그의 문집인『점필재집』을 보면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의 덕을 찬양하는 애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숙자가 선친은 평생 벼슬생활 이라 했듯이 세조 3년 타계할 때까지 경외관직을 역임하였다.정난이 있는 계유년에 23세로 진사에 합격한 김종직은 세조 즉위년도에 25세로 셋째형인 종석과 동당시에 급제하고 있었고 그리고 사육신사건이 발생하는 해인 세조 2년 저월에 형인 종석과 함께 회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벼오한중이었던 아버지와 작별하고 서울로 출발하여 모두 급제하고 환향하는 노상에서 부친을 사망소식을 접하고 애통해 하고 있었다.또한 「실록」에는 세조 8년경부터 중견관직으로 진출한 김종직은 세조의 학문 전문화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여 세조로부터 경박인(輕薄人)이란 질책을 받고 파직된다. 세조11년 영남병마평사가 되었고 세조가 운명하는 때까지 관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세조실록」편찬자 63명가운데 한사라므로 기사관에 참여하였다. 즉 김종직은 세조조에 줄곧 참여 활동하였던 인물이다.이러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과 유자광, 윤필상 등의 해석이 『연사군일기』권 30, 4년 7월 신해조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축 10월 어느날 내가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가는 도중에 답계역에서 숙박하였는데 꿈소게서 칠장의 옷을 입은 신이 나타나 혼연히 내게로 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초나라 회와인 손심인데 서초패왕에서 시해되어 침강에 잠겼다라고 하고는 문득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깨고 놀라서 생각하기를 회왕은 남쪽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쪽의 조선사람인데 지리적인 거리가 서로 만여리 이상 떨어져 있으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년 이상이 된다.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 무슨 상서로움인가. 또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강물에 잠겼다는 말은 없는데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격살하고 그 시신을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가히 알 수가 없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의를 표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부과하여 사람에게 부여하였으니 4대(大)와 5상(常)이 존귀함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중화라서 풍요하고 변방이라서 인색한 것이 아니면 어찌 예전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따라서 내가 변방사람이고 또 천년 뒤의 사림이지만 공손히 초나라의 회왕에게 조의를 표한다. 예전에 조룡(진시황)의 회롱이 짐승의 이빨과 불처럼 날카로워 사해의 물결이 검붉었다. 비록 상어나 다랑어, 미꾸라지, 도룡인들 어찌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그물에서 바져나올 생각에만 골몰하였다. 당시 6국의 후손들은 국경을 넘어 깊어 숨거나 겨우 평민들과 결혼하여 짝이 되었다. 양은 남쪽나라 장군집안 출신으로 어호를 계승하여 일을 일으켰고 왕위를 얻기를 구하여 백성들의 뜻을 따랐으니끊어졌던 제사에 웅역(초나라 시조)을 모실 수 있었다. 건부(천자의 상징)를 장악하고 남쪽을 향함이여 천하에 진실로 간(초나라 성)씨보다 큰것이 없구나 어진 자를 파견하여 관문에 드어가게 하였으니 또한 족히 그 어질고 옳음을 볼 수 있겠도다 양한낭탐(양이 다투고 이리가 탐욕을 냄)하듯이 마음대로 관군을 멸함이여 어찌 사로잡아 제부(징벌도끼)에 기름칠 아니하였는가. 오호라 형세가 크게 그렇지 아니하였으니 나는 왕을 더욱 두렵게 여겼다. 오히려 반서(잡힘)되어 해석되었으니 과연 천운이 어그러졌구나. 침의 산은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전경은 흡사 해가 저물어갈 때와 같이 어둡다. 침의 강물은 밤낮으로 흐르고 물결은 출렁이고 되돌아오지 않는데 천지는 장구하니 한이 끝이 있겠는가 혼은 지금도 흩날린다. 나의 마음이 금속을 관통하니 왕이 문득 꿈속에 나타났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르자니 삼가 조심스러워 생가기 안정되지 못한다. 술잔을 들어 땅에 술을 조금 부으니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조룡의 희롱이 이빨과 뿔 이라는 것은 조룡은 진시황이며 종직은 시황을 세조에 비유한 것이다. 그가 말한 왕위를 얻기를 구하여 백성들의 뜻을 따랐다. 에서 왕이란 초희왕 손심이다. 초기에 항양이 진을 주살하고 손심을 의제로 세웠는데 종직은 의제로써 노산(단종)에 비유한 것이다 .그가 말한 양한낭탐하듯이 마음대로 관군을 멸한 이란 종직이 양한낭탐을 세조로 지칭하였고 마음대로 관군을 멸하였다는 것은 세조께서 김종서를 주살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사로 잡지 못하고 오히려 세조에서 해석을 당했다는 것이다. …공업이 높고 더 높어 덕은 모든 왕의 으뜸이신데 뜻하지 않게 종직과 그 문도들이 성스러운 덕을 비난하고 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터무니없는 사실을 기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말미암은 일이겠느냐. …이일에 대하여 동·서반 3품 이상과 대간 및 홍문관으로 하여금 형벌을 읫논하여 보고하도록하라연산군은 세조게서 한번은 종직이 불초하다고 하셨는데 종직이 원망하여 비방하는 글을 지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이는 적어도 세조 9년이후에 해당하며 김일손의 진술한 김종직이 관직생활하기 전 이라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김종직의 「조의제문」에 대한 권경유의 심문에서 권경유는 김일손의 사초를 읽은 것이 아니기에 다른 의미 부여 않고 의제를 추모한 글로 이해한다. 그러나 권오복의 심문에서 권경유와 다른 시각에서 종직은 의제를 노산에 비유하여 조문을 지었기 때문에 제가 사초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라고 진술하게 된다. 권오복은 김일손의 영향속에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점필재집』에 의하면세조대왕 3년 선생 27세였다. …「조의제문」에 말하기를 정축 10월 어느날에 내가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가는 도주에 답계역에서 숙박했다 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아마 잘못된것이다. 선생은 집에서 사숙하면서 홀로 포은선생을 추대하였다. …어찌 상중있으면서 출입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라고 하여 김일손 권오복등이 조의제문을 세조와 관련 시키는 것과 다른 입장의 보여준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등재한 의도를 3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다.1 김일손이 순수하게 스승의 행적을 추모하고 기린다는 의미에서 사심없이 사초에 수록하였을 가능성2 김종직 자신이 단종과 세조와의 관계를 비판하여 조문을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의도를 간파한 기일손이 그이 사초에 게재하였을 가능성
목차Ⅰ. 들어가며Ⅱ. 산업사회이전의 영국사회Ⅲ. 산업혁명의 원인Ⅳ. 산업혁명의 전개과정Ⅴ. 산업혁명의 영향1. 사회전반적인 변화2. 노동계급의 출현Ⅵ. 맺음말참 고 문 헌Ⅰ. 들어가며산업혁명은 근대사에 있어서 프랑스혁명과 비견될 만큼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단순히 기계의 발명과 사용이라고 할 기술적 측면만을 의미하는 산업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상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는 먼저 18세기말 영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산업혁명에 의해서 기초가 이룩되었으며, 물론 산업혁명 이후 경제사회는 수다한 변용을 보여왔으나 우리들의 사회의 원형은 원래 산업혁명에 의해서 형성되었던 것이다.따라서 이 사회의 본질적 특징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산업혁명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산업혁명 발생의 유래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을 이해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국의 산업혁명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근대 유럽에 있어서 최선진국이었으며 「자생적」인 이른바 고전적인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이에 본교는 산업혁명의 전반적인 문제 중에서 다만 영국산업혁명의 역사를 하나의 순수형에 한정시켜 구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영국산업혁명으로 나타난 가장 큰 사회적 변화인 노동계급의 출현을 바라보고자한다.Ⅱ. 산업화이전의 영국사회18세기 중엽의 영국경제는 우리가 현재 공업화 이전 경제의 특징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현상들을 보여주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약간의 경제적 잉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영국경제는 가난했고 오나전히 정태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정체적이었으며 상업과 공업의 중요한 부문이긴 하였으나 주요경제활동은 농업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국민대중은 언제나 경제적인 재난의 위협을 받으며 살고 있었으며 비상하게 운이 좋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한 자기의 생애 동안에 상당한 생활수준의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사회의 경제적 결정은 대부분 가족을 단위로 한 생산단위에 의해 이루어일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의 원인규명에 관한 문제는 산업혁명의 전체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기초적인 과제가 되며 이에 대한 해결은 쉽지 않다.산업혁명의 원인에 관해서는 Arnold Toynbee로부터 Pyllis Deane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제사가들이 그들의 견해를 밝힌 바 있었다. 본교에서는 자본형성의 중요성을 말한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이를 정리하여 보겠다.) 김순곤, 『영국산업혁명의 원인분석』, 건국대사회과학(1978), pp. 25∼30.M. Dobb은 산업혁명의 원인을 규명함에 있어, 단순인과율 ( simple causation ) 로서는 그 기원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보고, 이런 종류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해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복합인과율 ( complex ca-usation ) 의 관점에서 입각하여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산업혁명의 동인으로 다음의 세가지 조건을 지적하고 있다.첫째, Dobb 은 산업분야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가진 형태가 성숙하여 17∼18세기에는 토지소유의 점진적인 집중과정이 진전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생산성향상에 유용했을 뿐만아니라, 동시에 증가도상에 있었던 도시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잉여생산의 증대에도 유용했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은 국내시장의 확대와 함께 그 세기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을 실현시켰다는 것이다.둘째, 그는 17∼18세기를 통해 임금로동의 현재화와 발전을 수반하면서 이미 오랜 발전의 경험을 갖고 있는 수공업의 놀랄만한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독창력이 풍부하고 생산활동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규모, 또는 신용으로 자기자본을 충족할 수 있을 정도의 거래관계를 갖고 있었던, 모험심을 가진 소규모 기업가군이 가내공업을 중심으로 육성되었다는 것이다.세째, Dobb 은 또한 국내시장의 확대 위에 18세기 영국에 있어서의 수출무역의 급속한 발달이 추가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세기에 영국은 광대한 해외 식민지를 바탕으로 혹은 그 이상의 원인을 가려뽑는 경향이 있지만 영국의 산업혁명은 많은 원인의 복합적 작용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노먼 F. 캔토, 사무엘 버너 편, 진원숙 역 : 서양 근대사 2000년 7월 pp495~498즉, 그것은 투자의 촉진을 고무시켜 주는 저이자율과 인플레이션, 그리고 세계무역의 증가와 이로 인한 영국의 엄청난 이익획득, 기술혁신과 새로운 기계의 발명 및 산업조직의 변화, 자유방임사상의 전파 및 부에 대한 합리적 논리 등으로서 이것들이 합하여 기업의 발달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이렇듯 경제적 변화는 단일의 주도적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Hartwell은 강조하고 있다.) 지석효, 『영국 산업혁명 초기의 자본형성에 관한 연구』, 충북대(1985), pp. 14∼15.산업혁명의 원인을 종합해 보면 자본축적, 국내시장의 확대, 기술혁신, 자유방임주의, 은행 및 기업가의 존재, 낮은 이자율과 물가등귀에 의한 높은 이윤동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Hartwell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가들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제력에 대한 인상적인 범위를 밝혔을 뿐, 그들 제력의 상대적 중요성이나 그것이 경제 변화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견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산업혁명에 대한 사가들의 설명에는 영국경제의 전략적 변수와 그 함수관계를 측정 하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고, 변화요인을 가져오는 외재적, 내재적 요인을 구별하고 그 가중치를 매기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으며, 또한 성장과정을설명할 수 있는 경제의 동태적 모델을 세우려는 시도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석효,『영국산업혁명 초기의 자본형성에 관한 연구』, 충북대학교, 1985 , pp.18∼20.Ⅳ. 산업혁명의 전개과정영국에 있어서의 중상주의, 농업혁명, 경공업 및 중공업에 걸친 산업혁명은 모두 시민혁명에 의해서 성립된 초기 시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더우기 중상주의정책은 초기 시민국가의 경제정책이었기 때문룩된다. 이에 따라 초기자본이나 초기지주의 이해를 중심으로 하는 중상주의정책은 폐기되고, 마침내 산업자본이나 근대지주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 즉, 자유방임주의, 자유무역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소위 자유주의정책이 나타나게 된다.1640년의 시민혁명의 발생으로부터 1832년의 제 2차 시민혁명의 수행을 가져올때까지의 약 2백년의 기간은 경제사상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간주된다. 1603년의 Stuart 조의 즉위에서 시작되는 17세기의 영국은 세계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으로서의 「 청교도혁명 」이나 「 명예혁명 」은 확실히 봉건제사회로부터 근대자본주의사회에로의 이행을 통하여 농업, 토지문제, Manufacture, 초기독점등의 형태를 취하면서 다음 단계인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달성시킨 획기적인 시대로 전공업화 사회로부터 공업화사회에 이르는 최종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선군성, 『영국산업혁명의 역사적 진전과정』, 영남대대학원(1978), pp. 7∼9.1640년의 혁명은 출발점이 이제까지 진행되어 왔던 지주·초기자본가의 지배확장의 계기면서 동시에 다른 의미에서 자본제사회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Ⅴ. 산업혁명의 영향1. 사회전반적인 변화18세기 중엽에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기간 동안에 영국의 특징적인 경제새활의 속도에 있어서 중대하고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났고 이와같은 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업화 이전의 경제조기 형태에서 공업화된 경제조직 형태에로의 이행의 전형이 되는 하나의 전환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필리스 딘 『영국의 산업혁명』1987 pp14산업혁명의 시발점을 18세기중엽으로 잡는다면 비록 공업화 과정이 이미 이에 앞서 시작된 것이 확실하지만 공업화 이전의 영국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이다 이때부터 1세기 이내에 영국의 사회 및 경제생활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영국의 물질적 외형을 변모시켰으며 또한 영국민 대중의 생활 및 노동양식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형시켰다.) 필리스 딘 『영국의 산업혁명』198창출하였다. 새로운 기계와 기술은 또 다른 새로운 발명과 기술의 혁신을 불러 일으키고,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민석홍 편, 서양사 개론 1984년 pp598~511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새로운 제품을 그것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고 교통기관의 발달은 이를 전세계에 확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물질면에서의 발전은 경제, 사회, 정치 그리고 문화면에서도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화를 야기시키고 그것은 다시 기술의 혁신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산업혁명의 진행과 이에 따른 공업의 발달은 국민소득과 국민생산에서의 공업의 몫을 크게 증가시키고 농업인구와 노동력을 공업으로 흡수하게 되었다. 이런 공업화는 보다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변화인 근대화의 핵심이었다.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는 완성단계에 접에 든 것이다. 새로운 공업지대에는 새로운 도시가 출현하여 농촌인구를 흡수하면서 도시화현상이 일어나고 공업화 이전 단계에 비하여 사망률이 급격하게 감소하고 관료제는 보다 능률적이 되고 중앙집권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날로 새로워지고 발달하는 기술과 공업의 충족을 위해 새로운 교육제도가 마련되고 널리 보급되게 된다.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더불어 공장제도의 출현은 오늘사회의 중추를 구성하는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자계급을 발생시키게 되었다.2. 노동계급의 출현산업혁명은 전통사회에 대한 일련의 수정 과정으로 이 과정 속에서 일반민중은 노동빈민으로부터 노동계급으로 전환하였다.) J. F. C헤리슨 편, 이영석 옮김. 영국민중사 1991년 pp211인구폭발이 산업혁명에 필요한 새로운 노동력의 원천을 창출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이것이 일반 민중이 그들의 새로운 역할을 인식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사실은 그들의 일상적인 노동 조건이 때로는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알게 모르게 점진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례없는 경제적 부의 증대와 인구 증가의 결합이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으며 면공.
당대의 과거제도(科擧制度)Ⅰ.들어가며...인류가 야만사회에서 문명사회로 나아가면서 통치집단의 정치관리 인재의 선발 등용이 시작되었다. 과거 요순(堯舜)시대의 최고 통치자는 공동추천 방식의 기초위에서 탄생되는 선양(禪讓)의 형식이었고 그 이하 각급 행정수령도 추천에 의해 임용되었다.세습적 전제군주시대 이후 이러한 추천제도는 상당 기간 존재하였다. 그후 군주가 각급 관원에 대한 임명권을 강화함에 따라 추천된 자들에게 모종의 시험 형식을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험 즉 고시는 인재선발의 중요한 방법을 이루었다. 중국 수천년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치무대의 관리에 나아가는 것은 대체로 두가지의 방법이 있다. 즉 수대이전은 추천위주의 방법이고 시험은 보조단계 수단이었으며 당대이후에는 고시 위주였고 추천은 보조 역할 내지 전적으로 고시에 의지하는 수단이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연원과 당대 이후에 나타난 과거제도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과거제도의 연원주대이전의 사회문명의 발전은 아직 초보단계였다. 단지 통치집단 가족의 구성원만이 교육을 받아 지식계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식계층만이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통치집단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국가기구의 각 구성부분은 실제로 통치집단 내부 구성원들이 주로 세습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종법과 가족을 범위에서 이루어진 모종의 추천선발방법이었다.기록에 의하면 주대에 향거리선의 방식이 있었다. 그 방법은 향로가 본토 지방 선비중에서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사를 선발하고 지방장관이 다시 추천을 하여 중앙에 직접 보내진다. 향리에서는 매3년에 한번씩 대비를 거행하여 향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덕행과 학식을 시험하여 현자와 능자를 선발하였다." 왕은 추천된 현명한 사인들을 친히 시험을 치루는데 그 내용은 활쏘기였다.추천시기에 이르러 예가 무너지고 음악이 파괴되었으며 주의 천자는 제후국을 통제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게 되었고 많은 제후들도 경대부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봉건영주들의 토지와 인구쟁탈을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것 확산시키게 되었다. 특히 '사(士)'계층의 변화가 변화가 가장 컸으며, 성분도 날로 복잡해져서 심지어는 어중이 떠중이의 잡배들과 마차를 끄는 시중잡배들도 모두 어느 정도의 문화지식과 기능을 가진 사인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로부터 제후와 경대부들이 초청하고 내왕하는 관계의 대상이 되었다.Ⅲ. 당대의 과거제도배경 - 당대는 중국 봉건사회가 고도로 번성한 성세였다. 이러한 시대 배경아래에서 과거제도는 양한이래 장기간 전개과정을 거치고 당조 삼백년간 부단히 발전을 거듭하여 완성되었다. 이 제도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 중국사회와 문화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618년 당조가 건립된 후, 인재선발문제가 논의 사항으로 제기되었다. 당고조 무덕(武德)4년 령을 내려 "제주에 학사 및 일찍이 존재하였던 명경·수재·준사·진사들과 리(理)와 체(體)에 밝다고 향리에서 지칭되는 자들을 그 지방의 현에 위임하여 고시를 실시하고, 주에서 다시 시험을 거친 뒤 합격자를 선발하여 매년 10월 그 시험성적과 함께 입공시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과거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진사를 제시하고 있으며 매년 10월 조정에 가서 정기시험에 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현 등에서 지방 예비시험을 실시하였음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즉 이것은 후세 '향시'의 방법이며 수대의 선거제도와 같이 반드시 관부의 추천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당대의 과거는 전쟁과 재해 등의 원인으로 잠시 정지한 것 이외 매년 실시되었다. 청대 서송(徐松)의 「등과기고」(登科記考) 통계에 의하면 당대 과거에서 진사과의 급제자 수가 6천명 이상으로 당대의 걸출한 인재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포함등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과거의 응시자 - 당대 과거의 응시자들은 크게 생도와 향공 두부분의 사람으로 구성되어있다. 생도는 관학의 학생으로 그들은 수학기간을 마치면 과거에 참가 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향공은 지방사인들이 독학을 하였거나 혹은 민간 사숙에서 수학한 사람으로 그 지방 주현의 예시 시험에 비율은 당초기에는 대체로 생도가 향공보다 많았으나 성당(盛唐)·중당 이후 생도의 비율이 점차 적어지고 향공이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당대 세족·사족의 양대 계층의 역량변화를 의미한다.당대의 과거과목 - 당전기 과거에서 생도의 대부분은 세족권문 자제였으며 향공은 대부분 서족사인이었다. 후대에 비록 향공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최후에는 생도를 압도 하였으나 세족대족 세력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생도가 과거고시중 점차 특권을 향유하지 못하므로 세족대족의 자제들이 점차 향공의 행렬에 들어온 것이다. 경조부에서 선발한 향공이 대부분 합격했다는 사실은 세족·권신귀족들이 특권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비합법적인 특권이라는 것이며 그들이 가졌던 합법적인 특권이 비합법적인 특권으로 바꿔졌다는 것은 이미 세족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합법의 특권은 당말까지 계속되었고 당 멸망 원인 중의 하나가되었다.당대 과거 과목은 수재·명경·준사·진사·명법·명자·명산·일사·삼사(三史)·개원(開元)례·도거·동자(童子)과 등이 있다. 또한 당대 무측천시에는 무과도 설치되었다. 당초기에는 한에서 수대에 걸쳐 실시한 '수재'과를 답습하였다. 수대에는 수재과가 특히 어려웠고 당대에는 이러한 영향을 받아 수재과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반사인들이 응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명경과는 기원을 한 대에 두고 있다. 당대의 '명경'과 고시는 각종 유가 경전을 시험쳤으며 그 외에 『노자』를 포함하였다. 명경과는 고시는 첩경과 묵의로 구분된다. 첩경이란 시험관이 경전중에서 임의로 한 단락을 선택하여 종이로 그 중 여러 글자 또는 여러 구절을 붙여서 응시자로 하여금 유사하게 답해 빈 곳을 채우도록하는 방법이다. 매 10첩 중 여섯 개 이상 맞으면 합격이다.묵의는 필답시험인데 시험관이 경전에 의거해 문제를 출제하여 응시자로 하여금 그 해당되는 경문에 대한 전대 사람의 주소 혹은 상하의 문장을 쓰도록 하는 방법이다. 첩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명경과가 진사과에 비해 시종 경시되었다. 현종 개원년간 명경과는 첩경·묵의·시무책 등 세자기의 고시제도가 정형화 되었으며 급제자는 성적에 의해 가·을·병·정 네등급으로 나눠었다. 당대 과거의 각 과목중에서 명경과를 통한 관리 선발이 가장 많았는데 매년 약 백명정도였으며 진사과는 매년 불과 삼십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명경과가 입사의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은 진사과였다.당초기의 진사과 시험은 '시무책' 다섯가지였다. 시무책은 국가 현실문제에까지 미쳐서 독서인들로 하여금 오래된 책더미속에서 사회관찰과 사고문제에 까지 해결방법을 설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 초기 진사는 단지 옛 책문만을 암송하고 실제 재주는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진사과에 시책외에 첩경을 첨가하고 약간의 조문과 잡문 두 수를 첨가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진사과에도 잡문·첩경·책문 등 세가지 고시제도가 형성되었다. 첩경방식과 명경과는 서로 같으며 합격표준은 일반적으로 첩경은 10문제에서 4문제 이상으로 난이도가 명경과 보다 낮았다. 책문은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구책문을 외우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공론적인 것이므로 진사과 시험에서 최고의 관건은 잡문 두 수의 시험이었다.수대와 당초기에 수재·진사과의 책문 시험은 커다란 의미에서 이미 일종의 문학 고시였으며 당 고종때는 진사과에 잡문 두수를 첨가하여 더욱 고시의 문학성이 증가되었다. 현종 개원년간에 이르면 잡문 두수는 시·부가 가장 중요하였다. 당대 사람 조광은 개원년간에 「거선의」를 올려 말하기를 '시험관이 채점하는데 있어 실재는 시부의 우열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대의 사람들은 진사과를 일러 사과라 하였으며 후인들은 당대는 시부로 인재를 뽑았다고 하였다.성시(省試)와 방방(放榜) - 당대 과거고시는 매년 봄 서울 장안의 상서성에서 거행했으므로 약칭해서 성시라 칭하였고 이같은 이유로 성시시 또는 성제시라고도 하였다. 각 지방에서 거행하는 향공 거인의이후에는 이등과 삼등을 구별하여 방안·탄화라고 칭하였다. 당이후 봉건시대에는 과거의 방이 붙으면 일시적인 파문이 일어날 만큼 큰 일로 여겼다. 새로 진사급제한 사람은 장차 국가정치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매년 급제자 명단이 발표되면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진사의 이름과 당년의 시험제목을 베끼고 어떤 때는 명경등 기타과목 급제자들도 베껴 썼는데 이로 인해 소위 『등과기』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잡극 『서상기』(西廂記)중에 보구사 장로가 장생을 장안에 보내 과시를 보게 하면서 말하기를 "가난한 승려가 『등과기』의 내용을 준비하여 이익을 본다."라 하였다. 여기서 각 지방에는 『등과기』를 판매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등과기』는 개인의 자전을 기록한 것이었는데 당 선종때는 한림원에 명을 내려 역대 진사급제 명단과 시부 제목을 기록하라 하였다. 이후 역대에 걸쳐 모두 『등과기』작성을 당안에 포함시켰다.당대의 제과(制科) - 당대에 이르러 매년 정기적인 과거제도가 생겼으며 동시에 임시명령을 통한 고시의 방법도 존재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과(制科)이다. '제'의 의미는 조(詔)와 같고 황제의 명령이다. 제과와는 상대적으로 매년 거행하는 진사과와 명경과의 과거고시를 상과라 칭했다. 제과의 응시자는 거의 평민이며 과거 급제자·현직관리 혹은 파직된 전직 관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제과시험 성적은 5등급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일등과 이등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제 삼등이 가장 우수하다고 할 수 있으며 직접 관직에 제수되었다.Ⅲ.과거와 당시(唐詩)의 발전당대는 시가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이다. 당대 시가 내지 문학의 번영은 물론 사회·경제·정치적인 요인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 제도가 시부를 통해 사인을 선발했다는 학술문학적인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다. 당 이전의 중국 시단(翅端)은 기본적으로 군주와 귀족들의 통제하에 있던 궁중문인들에 의해 농단되었다. 그들은 권위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향락을 누리는 호강생활을 하였으므로 사회생활 체었다.
다산 정약용의 민본 위민사상시름에 싸여서1어려서 성인을 배우려중년엔 현자를 바랐더니늙어선 바보가 되었노라시름에 싸여서 잠못이뤄2밤에도 빛나는 야광주를우연히 뜬 배에 실었더니중도에 풍랑만나 갈앉으니만고에 광채를 잃었어라3입술이 다 타고 입은 말라혀닳고 목마저 쉬였어라내마음 그 누가 알아주랴해 벌써 저물어 뉘엿뉘엿4취하여 북산에 올라 통곡하니그 소리 창공에 울려퍼지네남이야 이내속어이 알랴나더러 신세의 한이라네5만사람 술주정 부리는데한 선비 단정히 앉았노라만사람 도리여 손가락질하며나더러 신세의 한이라네6비뚤어 얽혀진 이 세상 일이제격에 맞는건 하나도 없어라이 일 누가 바로잡으랴생각할수록 도리여 속상해지누나7양잡아 삼키는 호랑이와 승냥이시뻘건 피가 입술에 발리웠구나호랑이와 승냥이의 위신만 추켜받들며여우와 토끼는 그들 하는 노릇에 찬사드린다◎정약용(1762∼1836)조선말기의 대학자 호는 다산 또는 여유당. 경기도 양주태생 1789년(정조13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승지까지 이르렀다. 그는 문장과 유교경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과학 등에도 밝아 진보적인 신학풍을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자이다.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지방수령으로 다니자 아버지를 따라 진주지방에 가서 산 적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지방 행정을 몸소 겪게 되었다.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고 있을 적에 천주교를 믿었다고 하여 금정찰방이라는 하직을 받고 조정에서 밀려난다. 얼마 후 정조는 다시 정약용을 불러 올려 승지 등의 벼슬을 주어 임금 곁에 있게 한다. 1797년(정조21년)임금은 그를 곡산부사로 내려보낸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지방의 실정을 알게 하고자 하는 임금의 깊은 뜻이었으며 이곳에서 정약용은 명 목민관으로서의 이름을 떨친다. 그가 외직에 있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모략은 끊이지 않았고 정약용은 벼슬길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정조의 죽음 후 천주교를 믿었다는 혐의로 18년간의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신유사옥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노론들에 의해 많은 남인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당시의 당쟁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정약용은 오랜 유배생활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면서 보냈다. 실로 빛나는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의 저술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는 귀향지에서 돌아와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학문에 연마하였다. 그리고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정약용이 활동한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조선 사회는 내부 모순이 더욱 첨예화되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기였다. 정조 18년 화성 수원으로의 후사가 시작되고 정조는 남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한다. 화성으로의 천도는 집권세력인 노론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기반인 한양을 떠나는 것이고 이것은 그들의 정치적 와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수원성 완역 다음 해에 정조는 사망한다. 순조 즉위 후 노론은 남인을 제거한다. 그리고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당쟁의 여지마저 없어지고 독점적 권력에 의한 전횡만이 자행되는 것이다. 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관리들은 극도로 부패하게 되고 토지가 겸병된다. 유교 본래의 이상인 민본·위민의 정치 사상은 찾아볼 수가 없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중소농민들은 파산과 기아의 상태로 빠지고 화전민과 도적 농민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 시기의 문학 분야에서는 실학사상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실사구시 이용후생 경세치용의 학문을 주장했다.이러한 시기에 정약용은 진정한 목민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민란이 자주 일어나는 곡산에 부임한 정약용은 수령의 부정에 항의하여 1천여 명을 데리고 관가에 들어와 따지고 들었던 이계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렸다.정약용의 이러한 노력의 흔적을 그의 문학작품, 저서 그리고 그의 실학사상을 통해 알 수 있다.우선 그는 시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농업생산이 주가 되었던 당시의 생산 양식 하에서 민중의 주 세력은 농민이다. 정약용은 대다수의 국민이 농민이었기 때문이 아닌 농민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이었기 때문에 농민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농민을 시의 대상으로 삼았다.큰아들 절룩이며 바가지 들고 섰고작은아인 누렇게 떠 안색이 초췌하에우물가의 또 한 놈은 너무 야위어배는 불룩 성난 두꺼비 같고볼기짝엔 쭈글쭈글 주름이 졌네이 시는 가상의 한 늙은이가 산으로부터 마을에 내려와서 본 광경을 묘사한 형식으로 쓰여진 시의 일부로 처참하기 짝이 없는 농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정약용은 이러한 굶주림의 근본적인 원인을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에서 찾는다. 극소수의 부유층에 의해 토지가 소유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게다가 삼정의 문란과 지방관들의 횡포로 농민들은 더욱 고통받았다.큰 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세 살 난 작은 놈도 군적에 올라 있어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푼을 물고 나니빨리 죽기 바라는데 옷이 다 무엇이랴아전놈들 파지촌 덮쳐 휩쓰니시끄럽고 소란하기 군대 점호 같구나주려죽은 시체에 병든 시체 뒤섞여농가엔 남자 하나 보이지 않고호령소리 고아, 과부 옭아매는데채찍질 앞길을 더욱 재촉해···이 두 시는 군정의 문란과 지방과의 횡포를 드러내고 있다.위세도 당당한 수십가에서대대로 국록을 먹어치더니그들끼리 붕당이나뉘어서엎치락뒤치락 죽이고 물고 뜯러약한놈 몸뚱인 강한 놈 밥이라···위의 시는 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이다. 정약용은 그 시대의 모든 착취가 봉건적 신분제도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농민문제와 함께 봉건지배층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적인 여러 장치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정약용은 인습에 인습을 더해온 현실정치구조 중 어느 것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고 부분적인 개선만으로는 병든 사회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고 느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정약용은 국가체계의 근본적 대 개혁 대 변동의 단행을 주장하는 『경세유표』를 저작하게 된다. 경세유표의 원래 이름는 『방례초본』이 었다. 여기서 방례라 함은 주공이 주나라를 경영하기 위해 제정한 주례와 대조되는 것이고 초본이라 함은 우리 나라를 새로이 경영할 국가제도를 수정과 윤색을 기다려 후에 운용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 글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전달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죽어서나 혹시 올리게 될 국가 개혁론이라는 의미의 경세유표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의 경세유표는 문헌으로 남았지만 현실정치에는 쓰여지지 않았다. 그보다 경세유표와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과 일상 목민의 실정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책으로 널리 활용되어 간다.목민심서는 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쓰여진 것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형벌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이 중 민본 위민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쓰다 좀 더 현실문제를 직접적으로 타개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저작하게 된다.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직접 백성들의 일을 맡아보았고 유배 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위민사상의 정수이다. 목민은 백성을 살찌운다 는 뜻이고 심서는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뜻이다. 그가 귀향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이책을 엮고 난 뒤 그는 한 백성이라도 그 혜택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고 말했다. 그의 애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