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근대사] 세조왕권의 성격
- 최초 등록일
- 2003.06.11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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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여창은 세조 즉위 전인 1450년에 출생하였고 세조조에서 종실과 혼인하고 있으며 공직을 담임하고 있었던 부친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던 당시의 정세 흐름과 역사적인 상황을 일정하게 접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세조조 전기간을 통틀어 정여창은 만 18세 김일손은 만4세를 초과하지 못한다. 동일한 사안들에 대한 두사람이 판단에 어느쪽에 신빙성이 더있을 지는 자명해진다. 그리고 항목3에 나타나는 탄승려이 말에 대해 정여창은 “탄승려의 말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전했으나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기록한다. 계유정난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믿을 수 없는 내용은 기록할 수 없다는 정여창의 충고를 김일손은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김종직도 정여창과 같이 계유정난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항목 4~5에서 드러나는 김일손의 진술은 사건이 김종직의「조의제문」으로 비화된다. 김종직은 재야유림을 대변하는 영남사림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세조조에 적극관료생활을 하고 있다. 김종직은 그의 문집인『점필재집』을 보면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의 덕을 찬양하는 애도문을 작성하기도 하였고 아버지 숙자 ‘선친은 평생 벼슬생활’이라 했듯이 세조 3년 타계할 때까지 경외관직을 역임하였다.
정난이 있는 계유년에 23세로 진사에 합격한 김종직은 세조 즉위년도에 25세로 셋째형인 종석과 동당시에 급제하고 있었고 그리고 사육신사건이 발생하는 해인 세조 2년 저월에 형인 종석과 함께 회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벼오한중이었던 아버지와 작별하고 서울로 출발하여 모두 급제하고 환향하는 노상에서 부친을 사망소식을 접하고 애통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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