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상황화의 정의‥‥‥‥‥‥‥12. 상황화는 왜 하여야 하는가‥13. 상황화의 세 가지 태도‥‥‥21) 상황화의 거부‥‥‥‥‥22) 무비판적 상황화‥‥‥‥‥33) 비판적 상황화‥‥‥‥‥‥44. 상황화의 방향성‥‥‥‥‥‥45. 결 연‥‥‥‥‥‥‥‥‥‥‥61. 상황화의 정의)상황화란 말이 나오기 전에 그것과 비슷한 용어로 많이 사용한 것은 토착화라는 말이다. 1938년 마드라스 국제 선교 대회에서 토착교회는 “그리스도를 순종함에 근거를 두고 교회가 처한 환경 가운데 자연스럽고 친숙한 사고의 형태를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교회”라고 규정하였다. 일찍이 토착화의 문제는 켄트버리의 어그스틴, 마테오리치, 노빌리 등에 의해 제기 되었고, 근래는 안델선, 벤 그리고 니비어스에 의해 주장되었다. 상황화는 토착화의 많은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토착화의 성취 위에 편승함과, 그것의 오류, 편견, 틈을 메꾸기 위한 시도이다. 상황(context)이란 말은 라틴어의 contextus에서 온 말로서 그 뜻은 함께 엮다 이다. context는 text에 동반하고 둘러싸인 모든 것을 지시한다. 또 다른 정의는 그것은 한 단어나 구절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의견이나 그것들의 의미에 빛을 던지는 것 그리고 주변에서 존재하고 일어나고 관계된 조건들을 지시한다.인간의 실존은 대단히 상황적임은 자신의 존재 구성과 인식과 의사소통에 있어서 그러하다. 스페인의 철학자 가세트 말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나이고 나의 환경이다”고 한다. 개인은 상황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개인에게 있어서 전제와 이해 그리고 의사소통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개인은 상황에서 사상, 태도, 가치 그리고 느낌을 함께 엮어 나가는 것이다. 인간 단체 또한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의 묶음 가운데 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 취해야 할 관계, 해석 그리고 취해야 할 유용한 개념과 상징, 접촉점 그리고 생길 수 있는 오류와 왜곡, 장애 등을 취급함이 상황화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제 3세계에서 기독교는 사회 정치적으로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환경에서 시작된 과거와 자본주의적, 세속주의적 환경의 현재라는 상황에 놓여있다. 제3세계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적용시켜야 할가가 상황화의 문제일 것이다.2. 상황화는 왜 하여야 하는가)상황화의 당위성은 문화의 다양성과 신학의 상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선교적 측면에서 복음의 청자들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임과 동시에 문화적으로 형성된 문화의 자녀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전화는 복음이 지역의 문화적 형태와 상징을 사용하여 의미를 부여하며 전하여야만 청자의 복음수용과, 회개와 순종에 이르게함이 효과적일 것이다. 문화와 개인 그리고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란 상황화의 당위성을 말한다.문화의 속박성에 따른 상황화와 함께 문화 개혁의 과업도 선교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선교사는 선교지의 문화에 문화화하며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그곳의 풍속, 언어, 신념의 체계를 획득함과 청자의 문화에 일치하는 메시지를 전함과 복음을 수용하는 문화에서 존재하는 복음에 장애적인 요소를 동시에 극복함이 요구된다.성경은 현재를 살고있는 사람들의 이해와 그것에 대한 응답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노력은 바울, 베드로, 요한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곧 아람어, 히브리어와 그 문화를 헬라어 그 문화권의 상황, 즉 사고유형에 맞추어 진리를 표현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하나님, 교회, 죄, 회심, 회개, 말씀 등의 단어는 헬라적인 용어였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적용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한 해답 역시 그 헬라적인 상황에서는 할례가 행하여지지 않아도 좋다는 해석은 상황화의 다른 하나의 좋은 예이다(행 15장). 이상과 같은 상황화의 이유와 실례는 서양신학 위주에서 토착신학의 수립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유럽인의 사고에 알맞은 서방신학이 절대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타문화권에 진입할 때 문제는 뚜렷하여진다. 예를 들면 각 문화와 사회가 안고 있는 결정에 의해 대부분의 옛 관습을 “이교도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해 버린 적이 많았다. 북, 노래, 연극, 춤, 몸치장, 특정한 옷과 음식, 결혼관습과 장례식 등은 정통적인 종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정죄되었다. 이러한 거부는 흔히 선교사의 자문화중심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선교사들은 복음을 자신의 문화와 동일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문화의 관습들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간혹 선교사들은 전통적인 문화에 있어서 종교적 관습과 비종교적 관습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많은 사회의 경우 종교는 문화의 핵심으로 삶의 전반에 스며있으며, 현대 사회와는 달리 신념과 행위, 제도들에 있어서 성과 속의 구별이 없다. 그럼에도 선교사들 중에는 대부분의 관습이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전통적 관습에 대한 이러한 무조건적인 거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먼저 이 거부는 문화적 진공상태를 만들어 내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많은 경우 선교사의 관습을 받아들이곤 하였다. 북과 징 같은 전통적 악기 대신 올갠과 피아노가 도입되었다. 또 토착음악에 맞는 가락으로 찬송가를 만드는 대신 서구의 찬송가를 번역하여 그대로 사용하였다. 맨바닥에 앉는 대신 긴의자를 예배당 안에 들여놓았고, 주변에 있는 오두막과 흙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서구식 예배당을 지었다. 따라서 기독교가 외국 종교로 간주되고 그리스도인 개종자들이 자기 땅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곤 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는 데 따르는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실제로는 없어지지 않고 단지 지하로 숨어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기독교식 결혼을 교회에서 정식으로 하고 전통적 예식을 위해 고향으로 가는 일이 흔히 있다. 장기적으로 이교적인 관습이 몰래 행해지면 차츰 공식적인 기도교의 가르침과 혼합되어 기독교적 신념과 비기독교적 신념이에 부여하는 높은 가치를 존중한다. 이들은 또한 복음의 “이질감”이 이 세상의 많은 지역에서 복음이 수용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장애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회심자의 삶에 있어서 변화를 최소화하는 무비판적 상황화를 주장한다.이 방식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들은 죄에는 개인적인 죄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며 문화적인 죄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죄는 노예제도 및 억압적인 구조, 세속주의의 형태로 제도와 사회의 관습 속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죄는 사람들의 문화적 신념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집단적 우월감, 차별대우와 우상숭배의 형태로 드러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도 변화할 것을 요구한다. 상황화는 복음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 뿐 아니라 사람들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으로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도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복음을 받아들인 처음 세대 사람들은 종종 변화의 필요를 아주 깊이 느끼기 때문에 과거의 특정 관습들을 거부하는데 있어서 확고하다. 그들은 모두 예 관습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옛 관습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 한다. 이와 같이 개종자들 스스로 옛 관습을 거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변화는 밖으로부터 이들에게 강요된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무비판적인 상황화의 두 번째 약점은 그것이 온갖 종류의 혼합주의로 나가는 첩경이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적대적인 신념과 관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결국 새로 도입된 신앙과 혼합되어 다양한 형태의 신이교주의를 만들게 된다. 새로 개종한다 하더라도 옛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또 변화되어야 할 모든 것을 즉시로 변화시킬 수도 없다. 심지어 성숙한 신자들조차도 성경적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있는 삶의 영역들이 많다. 그러나 신자들은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행동과 믿음을 성경적 기준에 비추어 봄으로써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삶을 살아야다.둘째로, 현지교회 지도자와 선교사는 문제되고 있는 전통적 관습을 신자들이 일단 편견없이 수집하게 한 뒤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잘 분석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셋째로, 담임목사나 선교사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안과 관련이 있는 성경공부를 하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이 때가 가장 중요한 단계이므로 이때 사람들이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전통적 문화에 대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하여 진리를 스스로 분별하는 능력을 키워가도록 하는 것이다.네 번째 단계는 신자들이 스스로 새롭게 깨달은 성경적 진리에 비추어 과거의 관습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 관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들이 결정하고 실천에 옮기기 전에 그 결과를 확신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들이 경차 역할을 맡는 것을 피하려면 최종 결정은 신자들이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이 함께 결정한 사항은 시행될 것이며, 자신들이 거부한 관습들을 몰래 향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사람들이 자신의 문화를 평가하는 데 참여함으로 그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옛 문화를 선교사들보다 더 잘 알기 때문에 성경적 지침만 갖게 되면 더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사람들이 선택하여 새롭게 보존하기로 한 관습 중에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선교지의 그리스도인들이 결정한 바를 수용하고 그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권리인 실수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4. 상황화의 방향성)한 문화 속에서 복음이 상황화되는 과정에는 초문화적인 절대성과 문화적 상대성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근원이시며 변치 않으신다. 우리는없다.
선교현장 연구 및 실습 독후보고서선교사는 누구인가?선교와 문화인류학을 읽고...Ⅰ. 서 론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나의 1차 목표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 믿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어디서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정작 선교사가 되겠다는 나는 선교사가 누구인지 몰랐다. 아니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놓고 그것이 선교사라고 생각했다. 복음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멋진 주님의 군사.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바로 그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일.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주님께 헌신된 꿈같은 일. 날마다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진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 내 안에 있는 선교에 대한 생각, 선교사에 대한 이미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다분히 낭만적이고 감상적이었다. 그러나 난 선교사의 자세한 어려움들과 세부적인 사역적인 부분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폴 히버트의 '선교와 문화인류학'은 다른 수업에서도 교재였고, 꼭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가지고 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와 강한 동기 부여가 없었기에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독후 보고서라는 과제를 계기로 읽게 되었던 것이 나에겐 좋은 기회였다. 선교와 선교사에 대해, 사역에 대해 알 수 있는 간접 체험의 계기였다.Ⅱ. 독서보고제1부 복음과 인간의 문화1)선교와 인류학우리는 복음을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인 상황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안에서 우리 자신과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적 메시지와 현재 상황을 알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인류학은 선교에 도움을 준다. 인류학은 타문화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성경번역과 같은 특별한 선교 사역에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우리의 복음을 듣는 자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고 모든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류학에서 문화는 단지 인간 사고와 행또한, 반드시 문화적 형태 안에서 포함되어야 한다. 복음은 모든 문화의 어떤 부분은 변화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모든 문화는 죄악된 구조와 관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교회들은 계속적으로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문화이며 그것들 간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의 문제로 씨름해야 한다.COMMENT: 문화와 복음의 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기대했었지만, 명확한 답이란 없는 것 같다. 역시 문화 안에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복음 전달의 통로로 사용될 지에 대한 것은 교회 공동체 간에 항상 고민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문화는 절대적으로 악하지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은 것이다.제2부 문화차이와 선교사1)문화차이와 신임선교사신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처음 도착하면 여행과 이국적인 풍경의 낭만으로 인하여 흥분하곤 한다. 그러나 문화차이로 인해 여러 어려움들이 실질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표면에 나타나는 보이는 차이보다 더 심각한 차이는 사람들 간에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과 세계에 대한 사고방식 등의 차이이다.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 처음의 낭만적인 분위기는 금새 사라지고 문화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리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문화충격이란 어릴 때부터 배워온 모든 문화적 틀과 지침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할 때 경험하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말한다. 삶을 영위하던 모든 기준들이 허물어질 때 혼동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 무엇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고 그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더더구나 알 수 없다. 문화 충격에는 의사소통의 불능, 일상생활의 변화, 관계의 변화, 이해력의 상실, 감정과 가치관의 혼돈 등이 주원인이고, 증상으로는 막대한 스트레스의 발생, 그로 인한 신체적 질병, 심리적·영적 우울증 등이 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문화충격은 불가피 한 것이다. 이를 인정하고, 배우려 노력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아가고, 스트레스를 해결한다면 문화충격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COMMENT: 타문화권 고 선교사의 문화와 그 지역 문화 둘 사이를 비교하고 해석해야 한다.문화를 오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자문화중심주의는 지양해야 할 태도이다. 다른 문화와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므로 자문화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문화에는 가치가 있어서 단순히 보존시킬 뿐 아니라 권장해야 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문화권에서 잘못되었거나 악한 것들이 있다.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로써 배척하는 자세나 자기들만의 다른 문화를 만드는 구획화의 두 자세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성경적 진리에 뿌리를 둔 잘 개발된 초문화적 틀 위에서 두 문화권 간에 통합을 이루어 가도록 해야한다.COMMENT: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문화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보는 내 모습이 그렇듯이 선교지에 나간 나의 모습 또한 그럴 것이다. 그 가운데 초문화적 틀, 성경에 근거한 초문화적 틀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절실한 일인 것이다. 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은 그곳에 가서 부딪쳐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인가? 선교학에 관한 많은 지식들을 쌓는 것이 내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까? 문제의식을 가지게 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닌가?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욱 필드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3)서구 선교사들의 문화적 전제서구 선교사들의 문화적 전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사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분명한 구분, 물질주의와 번영에 대한 강조, 개인의 소유권의 인정, 진보에 대한 믿음, 분석적 접근의 태도, 양극적 사고, 계획적 삶, 실용주의, 기계적인 세계관, 생산과 이익 중심의 가치관, 수량화, 개인주의, 자기 의존, 계약적인 집단, 인도주의, 평등, 경쟁과 자유기업에 높은 가치, 직접적이고 대결적인 생활 태도, 협력, 시간을 중시, 직선적인 시간관, 미래 지향적 사고, 젊음에 대한 강조, 보는 것에 대한 강조,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글의 활용, 지식에 대한 강조, 조선택하는 일에 많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는 본문을 수정하면 안 된다.번역을 시도함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떤 문화에서든지 각각의 어휘들이 그 문화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내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하려는 지역 언어에서 가장 적합한 단어를 선정한 후에, 설교나 강의를 통해서 그 단어가 그 언어에서 지니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그 단어로 옮긴 단어의 성경 원문에서의 의미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문화를 넘어서 의사를 전달할 때는 메시지와 함께 부차적 메시지에도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주메시지를 이해될 수 있도록 돕는 부차적 메시지는 무의식 중에 전달되기 때문에 더 근본적인 메시지로 인식된다. 문화에 따라 전달매체가 노래나 시, 기억 등의 우리와는 다른 것들인 경우들이 있다. 이런 부차적 전달매체를 잘 활용하면 복음전달에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을 전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듣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회심이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COMMENT: 성경 번역에 관해 항상 고민이 있었다. 성경을 토착화 한다면 어떤 부분은 토착 문화에 맞게 변형하고, 어떤 부분은 원의미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성경의 메시지의 뜻하는 바를 완벽히 알아서 그런 것인지.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부분적으로 지침을 제공 받았다. 중요한 것은 복음을 훼손없이 전하고자하는 열정과 서로간의 이해의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와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2)비판적 상황화문화는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 및 궁극적인 실체에 관하여 만들어낸 묵시적인 가정들 위에 세워진 신념과 관습의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 문화마다 저마다의 전통문화가 있다. 그런 전통문화에 대하여 새로운 회심자들은 을 처리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문제는 어느 한 개인이 감당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믿음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경에 근거한 내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3)자기 신학화선교에 대한 가부장적인 태도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저해한다. 루퍼스 앤더슨과 헨리 벤은 신생교회들의 독립의 기초가 되는 세 가지 원칙, 즉 자전, 자립, 자치를 제안하였다.선교사 뿐 아니라 현지 교회도 전도와 선교에 참여하여야 한다. 신생 교회들이 자립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외부의 지원에 계속적으로 의존하면 그들이 올바르게 성숙하고 성장할 수 없다. 신생교회 스스로 교회의 자치권을 갖지 못하고서는 성장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이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자기 신학화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많은 부분에서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현지 교인들이 성경을 다르게 보는 관점에서 신학적 충격을 경험한다. 그런 문제들을 점검하기 위해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야 하고, 기독교 공동체를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 현지의 문화와 상황에 맞는 상황화 신학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지 신학자를 양성하여 스스로의 신학을 고민하게 장려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상황 신학과 함께 문화차이를 초월하여 성경적 보편성을 탐구하는 초문화 신학이 함께 필요하다. 항상 내부인 볼 수 없는 것을 외부인 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식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견해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타종교에 대한 태도로는 우리 종교가 우월하다는 생각이 아닌 복음이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복음의 유일성을 잃지 않으며, 복음의 메시지를 선언할 때는 겸손과 사랑으로 해야하며, 타종교인들의 비판과 그들의 통찰력, 견해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삶을 그들과 나누어야 할 것이다.COMMENT: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복음은 어느 한 문화나 한 나라, 한 신학, 한 사람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그 어느 것에 얽매여 있을 교이다.
한국교회 타문화권 선교신학과 사역의 문제와 대안한국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의 그릇된 인식-성장제일주의적 관점에 관해들어가는 말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해 받은지 120년이 지난 지금, 선교 역사 100여년 밖에 안 된 한국이 선교 파송 2위의 국가라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만큼 타문화권 선교(이하 선교)에 대한 한국 교회의 열정이 크고 관심이 많다는 데 대한 반증일 것이다. 교회의 존립 이유가 복음의 전파이고 선교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적 급성장 만큼이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선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문제는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선교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잘못됨으로 인해 개교회 중심의 후원 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 선교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선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들 중에 성장제일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짚어보고 그 문제에 대한 실천적 대안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한국교회의 성장제일주의 비판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 같이 외침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부흥”이다. 모든 교회들이 다 부흥을 외친다. 교회에 대해 물어볼 때, 꼭 빠뜨리지 않고 물어보는 것이 있다면, 교회의 크기, 곧 성도 수이다. 성도간의 교제, 봉사, 선교 등은 차후의 질문이다. 물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감당한다는 간접적인 징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지표는 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난 30여년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왔다. 30여년간 16배가 넘도록 증가하는 성장을 보였다. 눈부신 성과이고, 이에 대해 쉐러(R. E. Shearer)박사는 “한국교회는 요원의 불길처럼 성장하고 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하지만 교회 성장론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으나, 성장제일주의를 표방한 교회성장론에 의한 역기능도 만만치 않다. 성장이 교회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리게 하고 ‘성장신화’에 빠지게 하고 ‘성장’으로 신앙의 모든 것이 정당화되며 ‘성장’으로 질적성숙이 쉽게 희생되어 버리고 제도화된 외형적 교회를 절대시하는 ‘교회지상’ 주의가 하나의 ‘우상’이 된 것이다.)교인의 수에 의해 목회자가 평가되고, 그 교회의 가치가 평가된다. 부교역자들에게도 교인의 수라는 잣대를 놓고 평가한다. 알곡같은 믿음에 굳건히 선 성도의 숫자를 파악한다기 보다는 우선은 교인의 수를 보고 평가를 한다. 다른 것들에 부족하다 하여도 교인 수를 늘리는 부교역자라면 부족한 다른 것들은 용서된다. 성품이 진실하고 진정한 목회자 임에도 교인의 수를 늘리지 못해 낮게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이미 성장제일주의 가치관에 물들어 있다. 복음서에서 헤롯 성전의 크고 웅장함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염려된다. 분명 하나님은 웅장한 솔로몬의 성전보다 초라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장막을 더욱 기뻐하셨다. 초대교회는 웅장하지도 교인이 많지도 않았지만, 초대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셨다. 분명 성장제일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장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각 교인들의 성도화를 더욱 중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외형적인 크기를 염두에 두기 이전에 목회자의 성품을 더욱 염두에 두어야 하고, 교회가 건강한지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내제적인 성장을 갖추지 못한 외형적인 성장은 기형적인 성장일 뿐이기 때문이다.한국교회의 성장제일주의가 선교에 미치는 영향전술하였듯이, 한국교회가 성장제일주의에 많은 부분 물들어있는 것이 지금에 현실인 것이다. 개교회 중심의 선교파송이 많고, 교회별 후원이 대부분인 한국선교의 경우 교회의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어떤 가시적인 실적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선교사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무능한 선교사인 듯 보기도 한다. 가시적인 실적이란, 크게 교회 개척과 교인의 증가인 것이다. 한국 교회들이 선교 파송 후 1년에 어떤 결과를 보고자 하는 데 비해 세계의 유수한 선교단체들은 대부분 2~3년 정도의 기간을 현지 문화의 적응을 위한 훈련으로 할애한다.이런 차이를 볼 때,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함을 느낄 수 있다. 한국교회에 세계 선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늘어나고 있지만, 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선교 현지의 사정은 아랑곳 없이 교회 개척의 성과와 구령의 머릿 수 보고만을 들으려 한다. 그래서 파송 선교사들은 문화의 차이에 순응해야 하는 타문화권에서 국내의 목회방식과 신앙 열심으로 조급히 행동한다. 이는 자기 자신을 무리하게 소모시키고 선교지 사람들에게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성장제일주의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실천적 대안한국 교회에 만연하여 있는 성장제일주의를 비판하고, 선교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 해봤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장제일주의에 관한 인식을 전환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의 본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교육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목회자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명예나 부를 위한 일체의 어떠한 노력도 배제해야 할 것이고, 첫 소명을 받았을 때의 그 마음을 계속 되새김질 하며,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여야 할 것이다. 목회자 한 명이 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목회자 스스로의 개혁이 진정으로 중요할 것이다.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 또한 학문과 경건의 조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 장신대만 하여도 경건과 학문을 모토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학교 자체적으로 학문에 많이 치우친 느낌을 어찌할 수는 없는 듯 하다. 경건은 신학생 개인에게 맡기는 듯하다. 분명 개인의 신앙과 경건은 개인의 문제이지만, 많은 영혼을 책임질 신학생을 길러내는 신학교에서 경건의 문제에 좀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학문보다 경건을 앞세우고 있지만, 학문과 경건이 반, 반으로도 가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원론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선교의 관점에서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해 보자. 한국전체의 교회를 생각하기 전에 좀더 좁게 생각하여 후원교회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선교에 대해 물질적 후원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식의 의식에서 전환을 꾀해야 할 것이다. 선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킬 수 있는 교회차원의 프로그램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의 사역에 방해되지 않는 한에서 선교사와 후원교회와의 인간적인 관계와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선교는 선교사 혼자, 혹은 후원교회의 물질 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양자간의 파트너쉽이 절실히 요구되어진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아담의 대표성의 원리에 대하여기독교의 보수주의 진영의 신학 중 아담의 대표성에 따른 원죄 이론은 중요한 것이다. 아담의 대표성으로 인한 인간의 원죄가 성립되어야 로마서5:19의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 처럼 예수님의 대표성이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죄가 성립되지 않을 때의 또 다른 문제로는 신적인 구세주로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불분명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 이전의 피조물의 선함을 회복하도록, 타락한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도록 보내어진 신적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죄가 없다고 한다면, 예수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자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 만큼 원죄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다.필자의 견해는 권성수 목사님과 수정된 곽선희 목사님의 주장을 수용한다.로마서 5:12에서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한다. 이후 14절에 보면 이 한 사람을 아담이라고 밝히고 있다. 5:19절에서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을 통해 아담의 대표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말씀하고 있다.죄의 유전의 문제에 관해서, 로마서 5:14절에서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라는 말씀과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에서 아담의 죄가 유전됨을 말하고 있다.아담의 대표성에 대해 살펴보게 되면서, 마치 만인 구원론도 같이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는 표현 가운데 만인 구원을 이야기 하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성경은 한 구절만 가지고 교조적으로 해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있다. 한 구절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에 그 구절을 보완해 줄 다른 내용이 성경 안에는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결론부터 말하면, 만인 구원론은 성경적으로 옳지 못하다. 마태복음 25:46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요한계시록 20:13b~14에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는 말씀 외에도 만인 구원론에 반대되는 말씀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는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못밖고 있다. 만인 구원론에서는 역사의 끝에 가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영벌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벌 즉, 영원함을 의미하고, 마 25: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에서의 영원한 불 또한 영원한 형벌을 의미함으로 마지막 때의 만인 구원이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아담으로 인해 후손들도 죄 아래 있게 된다고 했을 때, 핏줄을 통한 유전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담을 통해 죄와의 어떤 계약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필자가 앞부분에서 수정된 곽선희 목사님의 주장이라고 언급한 내용이다. 로마서 5:14의 왕 노릇이라는 표현, 요한복음 8:34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라는 구절, 갈라디아 5:1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의 구절들을 통해 볼 때 아담이 죄를 짓게 되면서, 죄의 종이되는 계약관계가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에게 속한 종의 자녀 또한 종이 되듯이 아담의 후손도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예수 중심 패러다임의 전환에 관해-목 차Ⅰ. 들어가는 말······························································· 1Ⅱ. 타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 2Ⅲ. 예수 중심의 사고에서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혁명?··············· 3Ⅳ. 기독교는 어디에? 종교위에 종교······································ 6Ⅴ.나오는 말·································································· 8참고문헌······································································· 9Ⅰ. 들어가는 말오늘날의 세계를 바라본다. 종교들이 넘쳐나고 있다. 기존에 있었던 기독교, 카톨릭,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의 대종교들부터 시작해서 출처가 모호한 사이비 종교, 기존 종교에서 파생된 이단들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교들이 난립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이들 모두를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종교성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종교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떤 종교를 갖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행동,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각 종교인들은 그들 나름의 종교의 눈과 생각의 틀을 가지고 다른 종교를 바라본다. 기독교인들도 자신들 나름의 눈과 생각의 틀로 타종교인들을 바라본다. 그에 따른 결과들이 정죄와 외면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아직은 많은 것 같다.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욱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종교인구는 더욱 늘어만 간다.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개의 종교를 갖는 일도 이제 놀랄 일이 아니다. 이제 어느 곳에서나 타종교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종교다원시대에 그들을 외면하거나, 정죄하거나 하는 등의 극단적이 태도를 비전으로 품고 있는 필자가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정립하지 않고서야 일관된 선교원칙이 정립될 수 없다는 긴박감도 이 주제를 택하게 하는데 한 몫의 작용을 하였다. 타종교의 구원문제가 당장에 풀릴 수 없는 문제라고 하여도 타종교에 대한 태도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타종교에 대한 여러 신학적 이론들이 나와 있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제하에 많은 주장들이 있으나, 지금 쓰는 글이 소논문임을 감안하여, 종교다원주의 이론들 중 예수 그리스도 중심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종교 다원 상황의 시대에서 타종교인과의 대면은 무인도에서 홀로 살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타종교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Ⅱ. 타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 다원상황이 하나의 현실이 되었는데, 이렇게 된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는 타종교에 대한 지식의 증가이다. 서점에 가면 알기 쉽게 씌어진 종교서적들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 각 종교의 교리나 특성 등에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다른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그러면, 기독교인은 그런 지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다른 종교에도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자비를 이야기 하며, 인류 공동의 선에 이바지할 선한 것들을 이야기 한다. 다른 종교인들 중에도 정상적인 행복한 인간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오히려 기독교인보다도 더욱 사랑과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비판 이론가 찰스 데이비스는 만약 관습 이후적인 우리의 개인적 정체성이 "보편적"가치를 근거로 하여 그 위에 순수하게 서려고 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보편주의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편협하게 자기 주변의 것들만 경험하고 그 안에 갇혀 사고한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 '기독교보다는 천주교가 낫다. 불교가 낫다'고 이야기 한다.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크리스쳔의 모임이 아닌 것이다.우선은 타종교를 대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종교에는, 특히 기독교에는 배타적인 속성이 존재한다. 필자의 말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배타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무시하는 태도, 그들 안에 있는 선한 것 까지도 외면하는 태도, 그들에게 우리는 배울 것 없고, 무조건 가르쳐야 한다는 태도 등의 그릇된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들도 한명의 인간으로서, 종교인으로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롬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부분적인 계시를 발견한 종교로써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Ⅲ. 예수 중심의 사고에서의 전환-코페르니쿠스적 혁명?타종교와의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듯이 이제 독불장군처럼 기독교만을 주장하는 시대는 지난 듯 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에서도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의들이 있다. 그 중에서 종교다원주의의 입장 중 대표적인 예수 중심의 사고에서의 전환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른 주장들 보다 이 주장을 살펴보고자 함은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의 핵심이라 생각되고,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인 예수를 희석시키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이다.신 중심적 모델에 대해서 주장했던 신학자 중에 존 힉이 있다. 그는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제창한다.제 신앙의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 중심적 혹은 예수 중심적 모델에서 신 중심적 모델에로의 페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에 우리는 위대한 세계종교들을 하나의 신적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역사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서로 다른 자각들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게 된다.)즉, 중세시대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오류 속 그것이 때에 따라 바뀐다면 그런 사람은 다중인격자라고 불리는 사람일 것이다. 힉의 말은 타종교와 대화하기 위해 기독교의 기독교 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포기하라는 이야기인 것이다.종교다원주의의 주창자로서 파니카는 참된 보편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실재: 즉 신, 인간,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다”라고 하며, 예수가 그리스도 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가 예수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곧, 역사 속의 예수를 유일회적, 궁극적 그리스도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라마, 크리슈나, 이스바라, 푸루샤, 타타가타 등의 많은 역사적 이름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한 분이지만, 그리스도는 많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힉과 파니카 등의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주장은 일면 그럴 듯 해 보인다. 타종교와의 대화에서의 걸림돌인 예수만이 구원이라는, 예수로 인하여 생길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제거한다면 타종교와의 대화는 가능해 질 것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만이 궁극적인 구원의 종교라는 것은 자기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장이라는 것 또한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 속에는 기존 기독교인들의 심기를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애쓰면서, 타종교의 배타적 기독교의 이미지를 벗어보려는, 어떻게든 예수를 없어보려는 혹은 약화시켜 보려는 노력이 안쓰러워 보인다.그러나 힉의 주장은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아니라 아리우스주의의 현대판일 뿐이다. 신으로 가는 사다리 중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신이 중심이고, 신으로 가는 사다리가 여러 개가 된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것이다. 파니카의 보편적 그리스도론은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인 것이다. 예수만이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벗어나 예수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도 있다는 파니카의 말이 바로 다른 복음인 것이다. 바울이 갈1:7-8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시 되는 것은 바로 예수 그 이름인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예수만! 이라는 배타적인 태도가 문제시 되었던 것이다. 예수 이름 때문에 타종교와 대화하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세계 평화와 세계의 존립을 위한 공동의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물론 그들의 문제제기는 옳고 그 동기는 바르다. 폴 니터의 "다(多)는 어떻게든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을 말살시키거나 나에게로 흡수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배우고 서로 돕기 위해서이다.")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역사 속에서의 기독교 제국주의의 문제점 또한 옳은 것이다. 기독교가 선교라는 이름 하에 제국주의와 함께 토착문화 대신에 서구 문화를 이식하고 토착종교와 그들의 세계관을 생각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강요했던 역사들을 볼 때 분명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그 해결 방법에 있다. 기독교의 잘못과 지금의 기독교의 문제점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는 기독교의 배타성과 타종교와 대화하지 못하는 기독교의 문제점을 예수에서 찾는 것은 올바른 해결방법이 아니다. "톰 드라이버나 로즈마리 류터 그리고 도로테 죌레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 그리스도의 유일성, 궁극성, 규범성이 기독교의 죄악-성차별, 인종차별, 반유대주의-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 문제는 예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과 성경이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예수의 삶을 내면화 하지 못한 기독교에 있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바로 알고 접근해야 바른 대안이 나오는 것이고 바른 대안이 바른 해결을 가져오는 것이다.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예수의 이름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차용하고, 예수의 이름은 뒤로 하고 신 중심으로 할 때, 과연 기독교가 기독교 일 수 있는가?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만을 받아들이고, 예수가 그리스도나 복음에 대해서 하나의 그리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언급하는 모든 것들, 나아가 오직 한 주요,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