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지*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34
검색어 입력폼
  • [문학]까뮈의 생애와 시지포스 신화 그리고 부조리
    1. 까뮈의 생애와 작품에 관하여 간략히 알아보시오.(1)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 1913-1960)의 초기 생애알자스 태생의 궁핍한 노동자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카뮈가 태어나서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벌어진 마른 전투(1914. 9)에서 전사했다.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카뮈와 형 뤼시앵)을 데리고 알제리의 노동 계급이 모여 사는 빈민굴로 이사하여 외할머니와 불구자인 외삼촌과 함께 방이 2개뿐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정부로 일했다. 카뮈가 처음으로 발표한 수필집 〈표리 L'Envers et l'endroit〉(1937)는 어린 시절의 어둡고 가난한 생활과 어머니와 외할머니 및 외삼촌을 묘사하고 있다. 2번째 수필집 〈결혼 Noces〉(1938)에는 알제리의 시골에 대한 서정적인 명상이 담겨 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부(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2권의 수필집은 모두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약함과 물질세계의 영속성을 대비하고 있다.1918년에 카뮈는 공립국민학교에 들어가, 뛰어난 교사 루이 제르맹의 가르침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카뮈가 1923년에 알제 리세(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제르맹이었다. 34년 뒤에 카뮈는 노벨 문학상 수상연설을 제르맹에게 바쳤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스승에 대한 카뮈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어서 카뮈의 지성이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카뮈는 스포츠, 특히 축구와 수영 및 권투에도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0년에 결핵 증세가 나타나는 바람에 카뮈는 운동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공부도 중단했다. 그 후 결핵은 여러 차례 재발하여 카뮈를 괴롭혔다. 아파트 생활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여 카뮈는 15년 동안 살았던 그곳을 떠나야 했다. 카뮈는 잠시 푸줏간 주인이며 열렬한 볼테르주의자인 친가 쪽 아저씨 집에 얹혀살다가일에 점령당해 있던 마지막 몇 년과 해방 직후에 언론인으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누렸다.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나중에는 파리에서 일간지로 발간된 〈콩바 Combat〉의 편집장으로서, 카뮈는 정의와 진리 및 모든 정치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후 카뮈는 좌파와 우파의 구태의연한 편의주의에 차츰 환멸을 느끼고, 1947년에 〈콩바〉와 관계를 끊었다. 이무렵 카뮈는 이미 프랑스 문단을 이끄는 주요인물이 되어 있었다. 카뮈가 전쟁 전에 쓰기 시작하여 1942년에 발표한 첫 번째 단편소설 〈이방인〉은 아랍인을 쏘아 죽였다는 범행 사실보다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려 들지 않고 사회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한 '아웃사이더'의 초상을 통하여 20세기의 인간 소외를 탐구한 뛰어난 작품이다. 같은 해에 영향력 있는 철학 평론인 〈시지프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도 발표했는데, 여기서 카뮈는 당시의 허무주의와 '부조리' 의식을 상당한 공감을 가지고 분석했다. 그는 이미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페스트〉(1947)는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을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불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우애를 역설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카뮈는 이제 초기의 주요개념인 부조리에서 또 다른 주요개념인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반항'으로 옮아갔다. 그는 2번째로 발표한 장편 평론 〈반항적 인간 L'Homme revolte〉(1951)에서 이 반항이라는 개념과 정치적·역사적 혁명을 대비했다. 이 평론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들은 물론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에게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밖에 카뮈의 중요한 문학작품으로는 기법이 뛰어난 장편소설 〈전락〉(195649) 속에서 열렬히 변호되는 제정 러시아의 혁명당원의 행동을 주제로 한 에세이인데, 형이상적·역사적·예술적 반항의 역사를 서술하고, 혁명적 수단과 유물사관에 반대하여, 점진적·개량적인 중용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그로부터 4년 후에 발표된 《전락》(56)은 깊은 내성에서 우러나온, 어두우면서도 순수한 반짝임을 지닌 걸작으로, 사르트르도 절찬하였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 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정치참여에서 정관주의로 처신을 바꾼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나, 그 침묵의 배후에 영혼의 격렬한 갈등과 고뇌가 없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그는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자료: 동아백과 사전2. 까뮈의 [시지포스 신화]를 읽고, ‘부조리’가 무엇이며, 부조리를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 알아보시오.(1) 까뮈의 ‘부조리’[…]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가 서른 살이구나 하고 확인하거나 혹은 그렇게 말하는 때가 온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젊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시간과의 관련 하에 자신을 자리 매김한다. 시간 속에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다. 그는 따라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한 곡선의 어떤 순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그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나타나는 것이 낯설음이다. 즉, 세계가 ‘두껍다이 세계를 만져볼 수 있으며 이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나의 모든 지식은 여기서 멈춘다. 그 밖의 것은 조작이다.[…] 판독불가능하며 한정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운명은 비로소 그 의미를 갖게 된다. 한 무리의 비합리가 분연히 일어나 종국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에워싼다.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지닌 유일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 세계는 엄청난 비합리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만이라도 ‘분명하게 알겠다.’ 고 말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구원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열망뿐인 사람들은,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고 모두가 혼돈이며, 인간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스스로의 명증성과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뿐임을 공언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부조리의 개념 속에 요약되지 않는다. 부조리의 감정이 우주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는 짧은 한 순간만은 예외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되고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부조리의 감정은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죽어버리지 않는다면 더 깊숙이에 까지 반향을 일으켜야 마땅하다.부조리에서 출발한 그들은, 기묘한 논리에 의하여,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신격화하고 자신을 헐벗겨놓는 것 속에서 희망의 이유를 발견한다. 그 누구의 것이건 강요된 희망의 본질은 종교적인 것이다.[…] 야스퍼스는,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으며 그 무슨 만족스러운 원리를 이끌어낼 만한 아무런 구실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숨에, 초월적인 것을, 경험의 존재와 삶의 초인간적 의미를 동시에 단정한다. 이리하여 부조리는 신이 되고, 이해상의 무력함 그 자체가 모든 것을것을 다 반박할 수는 있으나 오직 이 혼돈, 이 설쳐대는 우연 그리고 무정부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이 기막힌 등가성만은 물리칠 수 없다. 나는 이 세계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지금 나로서는 그것을 인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조건을 벗어나는 의미가 존재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직 인간적인 언어로 된 것만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 손에 만져지는 것, 나에게 저항해 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것이다.[…]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한 순간 한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 삼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갈망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그러나 그런 확인이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한 채의 확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2) ‘시지프 신화’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었다.호메로스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신중한 자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가 직업이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가 지옥에서 무용한 노동을 하도록 벌 받게 된 원인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대함에 있어서.
    인문/어학| 2006.06.06| 7페이지| 2,000원| 조회(1,019)
    미리보기
  • [작품론]오정희 초기작품 연구
    Ⅰ. 서론한 작가가 작품에 접근해나감에 있어 그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가를 짚어나가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더욱이 만약 독자가 접근방법의 다양함 그 속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 순간 독자는 텍스트를 직접 쓴 작가의 시간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1968년 「완구점 여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정희는 이후 1990년까지 근 30여 년간의 작가생활 중에 세권의 작품집과 두 권의 작품선집을 발간했다. 『불의 강』(1977)과 『유년의 뜰』(1981), 그리고 『바람의 넋』(1986)이 작품집이고 동인문학상 수상 작품집인 『동경』(1983)과 『야회』(1990)는 작품선집이다. 이 중에서 두 권의 작품선집을 빼면 세 권의 작품집만이 남게 되는 셈인데, 작품집에 실리지 않은 초기의 작품들과 최근작을 다 합해도 30여 년간 그녀의 작품은 편수로 마흔 편 정도에 불과하다.) 이 같은 작품 편수는 그녀가 과작의 작가임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증거이며, 또한 작가로서의 오정희 자신의 완벽주의 혹은 소설 집필에 대한 결벽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정희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작이 결코 흠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발표된 그녀의 작품들 모두가 작품의 구조나 그 주제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쉽게 수긍할 수 있겠다.또한 오정희는 1968년 등단 이래로 그의 긴 필력에서 드러나는 독특한 세계로 말미암아 비평가들로 하여금 작품 해석을 둘러싸고 심심치 않게 논란의 거리가 되었다. 행동에의 결단과 실천 의지를 촉구하는 다혈질적 가락을 주류로 삼았던 1970년대의 문학적 분위기에서 거친 외부 세계에 대한 항변보다는, 좁지만 일정한 테두리가 둘러진 공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추적해 나간 그녀의 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작품의 미학적 근거는 높이 샀지만 관심의 일선에서는 얼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현재까지 오정희 작품에 대한 연구는 평론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지금까지의 연형태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그녀는 반드시 무엇엔가 빗대어 묘사하거나, 그것을 환상적으로 뒤바꾸거나, 때론 상징을 이용해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예감되는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오정희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죽음에 대해 익숙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죽음은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은 모두 죽음에 대하여, 망자에 대하여 아득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정희 작품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극도로 분출된 슬픔이나 아픔은 결코 오정희가 말하려는 죽음이 아니며 죽음이 또한 끝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물과 불이 섞이듯 생(生)과 사(死)도 섞이며, 생의 가치만큼 사(死)도 그 가치를 갖는 것이 당연한데도 현실의 우리는 죽음에 대해 냉담하다. 이러한 우리의 사고를 환기시켜주는 것이 바로 오정희식 죽음의 인식이며, 그녀의 작품이 갖는 날카로우면서도 푸근한 아름다움이다.오정희의 초기 작품 가운데 「불의 강」, 「별사」 그리고 최근작인「옛 우물」까지, 이들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죽음의 문제가 이 작품들의 전체를 감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들은 죽음을 하나의 키워드로 삼아서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나가길 원한다. 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자.1. 생명과 죽음의 공존; 「불의 강」)사막의 한복판에 꽃을 든 그가 서 있다. 아랍식의 터번 아래 드러난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납빛이다. 왜 그러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에게 외친다. 그는 꼼짝 않고 직립해 있을 뿐이다. 그의 손에서 진한 자줏빛 꽃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내 목소리는 곳곳에 구릉지대를 이루고 겹쳐 있는 모래 언덕에 스며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는 보이지 않는데 모래빛의 반사로 하늘과 땅은 붉은색의 셀로판지를 통해 보듯 온통 붉은빛이다.(「불의 강」, p. 25.)금주시대였는데 술집 주인은 먼 입구에서 정옥은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의 틀을 가지고 생각해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 스스로가 설정해둔 죽음은 묘지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껏 정옥이 느껴왔던 죽음의 흔적들은 결국 그녀 자신만의 상상 속에 기반을 갖고 있지는 않는지 의심해볼 만하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죽음의 징후를 통해 무엇을 감지하려 했는가. 이러한 그녀의 심리적 상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묘사된다.정옥은 조금 당황했다. 일상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풍경과 확연히 구분 짓는 어떤 표시를 머리에 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녀가 지나는 길의 이어짐에 , 등뼈처럼 밋밋하게 누운 산의 또 하나의 갈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망자(亡者)의 세계, 떠도는 혼들을 보려했던가,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다른 빛깔, 냄새, 형태의 고요로움을 감지하려 했던가.(「별사」, p.19.)죽음에 대해서 정옥이 가지는 생각은 두려움이 대부분이다. 남편이 집을 나서는 순간, 대문 닫히는 소리에 정옥은 그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막막하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갖는다. 꿈과 현실 가운데 죽음은 늘 정옥의 주변은 맴돌고 있다. 정옥은 죽음에 대해서-죽은 뒤의 시간과 동간에 대해서-종종 생각해본다. 이 때 미래는 결코 이전에 보아왔던, 또는 느껴왔던 죽음의 징후들처럼 어둡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죽음에 대해서 ‘일상적이고 현세적인 삶의 풍경과 확연히 구분짓는 어떤 표시“쯤으로 여겼던 정옥은 ”길의 이어짐에, 등뼈처럼 밋밋하게 누운 산의 또 하나의 갈래“에 불과한 죽음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이는 삶과 죽음이 어떠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가치 판단으로 이어진다. 죽음에 대한 재해석은 정옥이 남편의 죽음에 대해 감정의 절제의식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생각이라 하겠다. 즉,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3. 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여자 역시 어린 날 정옥의 죽음과 장년에 맞이한 ‘그’의 죽음을 두고서 자신을 비춰본다. 그러나 여자는 일관된 모습으로 죽음을 부인하려 한다. 이는 이 순간 생을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Ⅲ. 모성성의 탐구오정희는 그녀의 작품들에서 불안, 공포, 죽음, 파괴라는 소재를 적극 이용하여 다양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시제에 있어서도 과거형과 현재형 그리고 대과거형 등의 사용으로 다소 복잡하게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더욱이 초기 작품들 중에서는 주인공의 기형적인 모습과 낙태, 출산, 부모 되기의 거부 등을 여성들의 입장에서(오직 여성들만이) 혹은 여성들이 더 빈번히 겪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보여준다.오정희 작품 속의 모성성은 그녀의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에서 조금의 차이를 보여준다. 초기 작품에서는 주로 전쟁의 모습과 경제적인 궁핍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서 주인공에 의해 모성성이 비판적으로 보여 진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의 거리」경우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시간여행을 해보지만, 결국 자신의 정체성은 찾지 못하고 절망하는 모습과 그에 따른 막막함을 보여준다. 이는 어머니의 출산에 의해서 비추어 지는데, 이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의 ‘출산이 곧 죽음’이라는 인식에 의해 모성성이 표현된다. 다른 초기 작품의「번제」의 경우는 낙태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주인공이 부모 되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혼전 임신으로 인해 미혼 여성의 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부장제도의 규범에 의한 모습으로서 모성성이 보여 지고 있다.흔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모성은 여성이 어머니가 되면서 느끼는 감정으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가 오정희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모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어머니와는 다른 새로운 자신만의 삶을 추구하려는 듯 한 모습을, 후기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여있을 뿐 의미론 상으로는 동등하다. 이 경우 모두 피를 동반하며, 이때 그 피는 일종의 심리적, 그리고 상징적 상처인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인 거리」의 주인공의 성인됨의 각성은 소설 내적인 맥락에 기대어볼 때, 기본적으로 그녀의 어머니의 삶의 양태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녀가 여덟 번째로 아이를 갖은 어머니의 다산에 의한 삶을 동정했으며, 어머니의 구역질에서 비통함과 처절함을 읽어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머니가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 라고 나름대로 확신했던 인물임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데, 사실상 이러한 정황은 자신의 어머니가 여덟 번째 출산을 죽음으로 확신하는 이상, 그녀의 어머니의 삶, 특히 여러 번 분만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은 이미 죽음과 동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어머니가 비유적인 죽음을 완수하는 그 순간에 여주인공이 자신의 잠재적 모성에서 죽음의 징후를 인지했을 것은 자명한 이치다. 그리고 그 점을 확인한 이 여주인공이 이후의 성장과정에서 자신의 잠재적 모성에 대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태도를 견지하게 될 것인지 또한 자명한 일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분만은 이미 죽음인 것을 나타낸다.2. 모성내부의 균열들 ; 「번제」)「번제」에서는 여성 자신이 어머니 되기를 거부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 진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거부는 태아 살해의 형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번제」는 정신병원으로 추측되는 곳에 감금된 한 여성의 낙태에 대한 죄의식과 이에 대한 속죄의식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결혼을 거부하는 남자의 아이를 지우고 정신병원에 입원한 나의 독백이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유년 시절 어머니와 함께 갔던 바다엣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번제」, p. 193. )그러나 밤마다다.)
    인문/어학| 2007.01.02| 16페이지| 3,500원| 조회(571)
    미리보기
  • 판매자 표지 [중국어]중국어최상급
    [중국어]중국어최상급
    중국어에서 측정가능 한 동사구의 최상급은 부사 “最”를 써서 나타낸다. 이때 “最”는 동사 바로 앞에 오거나 동사구를 수식하는 부사 바로 앞에 놓인다. 이 표현은 동류의 사물 중 가장 돌출됨을 나타내며, ‘무엇보다도 ~하다’, ‘가장 ~하다’로 해석된다. 만약에 최상급 표현에 쓰인 동사구가 형용사성 동사이면 “最” 대신에 “顶”을 쓸 수도 있다. 『汉语语法』, Li and Tompson 原著 黄宣范 编著, 文鹤出版有限公司, 1972, p 405.① 这件事情最麻烦。 이 일이 가장 골치 아프다.② 那个熊顶漂亮。 저 곰이 가장 멋있다.③ 我最爱小动物。 나는 작은 동물을 가장 좋아한다.④ 他最晚起床。 그는 가장 늦게 일어난다. ①과 ②에 쓰인 동사는 모두 형용사성 동사(麻烦, 漂亮)이다. 그것들은 모두 “最”나 “顶”과 함께 쓰일 수 있다. ③의 동사 “爱”는 타동사이면서 비동작성 동사이고, ④는 측정 가능한 부사가 동사를 수식하고 있다. 그래서 ③과 ④에는 “顶”보다는 "最"를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위의 책, p 406. 그렇지만 일부 방언에서는 둘을 혼용하기도 한다. 또한 영어에서처럼 “最”는 ‘一 + 양사’와 함께 쓰여 ‘매우’라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① 他是一个最中要的领导人。 그는 매우 중요한 지도자이다.② 这是一件最头疼的事。 이것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이다. 이 예문의 해석에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예문 ①과 ②는 결코 ‘그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명이다. 문장을 중국어로 바꾸면, ‘他是最重要的领导人员之一。’이다.’ 혹은 ‘ 이것은 가장 골치 아픈 일 중의 하나이다. 문장을 중국어로 바꾸면, ‘这是最头疼的事之一。’이다.’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문/어학| 2006.12.24| 1페이지| 무료| 조회(441)
    미리보기
  • 현대 중국어 비교구문의 범위와 종류 분석
    현대 중국어 비교구문의 범위와 종류 분석- 비교 구문 각각의 유형?특징을 실례를 중심으로 -학과: 한국어 문학과학번: 12013814이름: 최지혜지도교수: 채영순 교수님제출일: 06.12.- 목 차 -Ⅰ. 서론Ⅱ. 본론ⅰ. 비교구문의 범위ⅱ. 비교구문의 실례1.전치사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1) “比”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2) “?”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2. 기타 형식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1) “有”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2) “不如”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3) “越來越”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4) “像”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ⅲ. 비교구문에서의 생략1. “比”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2. “?”, “像”, “有”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ⅳ. 중국어에서 최상급 표현Ⅳ. 결론Ⅰ. 서론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날이 갈수록 신속해짐에 따라 지구는 갈수록 좁아지게 되어 지구상의 각국 사람들의 상초접촉의 필요성과 기회도 증대되어 가고 있다. 언어라는 도구는 이전부터 문화와 과학을 소통시키고 상호이해와 우의를 다지는 훌륭한 교량이었다. 따라서 현재 외국어 학습은 이미 모든 국가의 교육수혜자의 필수과목 중 하나가 되었다.언어의 학습은 어휘, 어음, 문자와 또한 문법의 학습이다. 흔히들 문법은 무미건조한 과목이라고 인식하기도 하며, 나 또한 그래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법은 또한 많은 사람이 한 언어를, 특히 외국어를 배울 때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과목이며 실제로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문법은 언어의 규칙을 나열하고 있으며 그 규칙을 알고 나면 언어를 잘 이해하고 바르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언어는 일정한 질서에 따라 표현된다. 시중의 많은 논고들은 이러한 질서를 일반화하여 서술한 것이다. 즉, 말하자면 실제의 언어현상 중에서 귀납하여 정리한 규칙의 총체가 바로 다량의 논고들이라는 것이다. 언어란 수많은 구성요소로 구성되고, 그 구성방식 또한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논고의 내용이 한 언어의 모든 언어현상을 완벽하게 규칙화하여 빠짐없이 일일이 기술하여 주기는 어렵다문에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ⅱ. 비교구문의 실례1.전치사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1) “比”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어떤 두 사람 혹은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 전치사 “比”를 써서 비교의 대상을 나타낼 수 있다. 이 구문은 해석하면 대부분 ‘~보다 ~하다.’의 식으로 해석된다.여기서 “比”의 앞뒤는 일반적으로 같은 품사 및 구로 이루어져 있다. “比”구문은 위에서 논한 세 가지 비교의 범위 중 우등 비교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중국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구문이라고 할 수 있다. “比”구문을 크게 ‘비교의 결과’를 중시하는 A식과 ‘비교지점’ 자체를 중시하는 B식의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외 기타사항과 부정 표현법을 함께 살펴보자.(1) A식: 비교결과를 중시비교되는사람이나 사물(주어?주제어)+ [比+비교대상] +비교결과(술어)+비교차이(보어)A식의 구조는 간단하게 위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A식에서 [比 + 비교대상]은 문장 내에서 보통 부사어로 쓰인다. 이 A식은 ‘비교결과’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다시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비교결과가 “형용사(동사)”인 경우① 他比我有??。 그는 나보다 경험이 있다(경험이 많다).② 他比我大。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③ 我比小王喜?????。 나는 ‘小王’보다 이 직업을 좋아한다.④ 他?在的生活水平比?去提高了。 그는 현재 생활수준이 이전보다 높아졌다.⑤ ?比我能??人。 너는 나보다 다른 사람과 단결을 잘한다.①처럼 동사 “有”가 비교구문의 술어로 쓰일 때는 반드시 “有知?”, “有魅力”, “有?容” 등과 같이 목적어를 동반하여야 하고, 목적어는 대체로 추상명사가 온다. 이때 “有”는 비교대상보다 “大(크고)”, “高(높고)”, “多(많은)”, 한 마디로 간단히 말하자면 “?富(풍부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②처럼 두 사람의 나이를 비교할 때는, “多”와 “少”를 사용하지 않고, “大”와 “小”를 사용하며, 나이의 구체적인 차이를 말할 때는 “年”대신 “?”를 사용하阿Q。 그는 阿Q보다 더 阿Q 같다.② 他比卓?林)?卓?林。 그는 채플린보다 더 채플린 같다.①에서 뒤의 “阿Q”는 정신의 승리를, “卓?林”은 그의 유머를 대표한다.? 부정형식전치사 “比”의 앞에 부정부사 “不”을 두어 만든다. 그러나 부정부사 “不”을 술어 앞에 놓을 수 없다.① 他不比我高。 그는 나만큼 크지 않다.② ?州的天?不比上海冷。 ?州(광주)의 날씨는 上海(상해)보다 춥지 않다.③ ?件毛衣也不比那件的?多少。 이 스웨터는 저것보다 얼마 비싸지 않다.부정형식 “A+不比+B”는 “A가 B보다 더욱 어떠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B가 A보다 어떠어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①의 경우 “不比”의 뜻은 “差不多”의 뜻이며, ②의 경우 “~보다 …하지 않다”의 뜻이다. 그리고 ③의 “不比~多少”의 경우는 차이가 많지 않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①은 “我比他高”의 의미를 포함할 수는 있지만, “我比他高”의 의미는 아니다. 상반된 의미를 나타낼 때는 일반적으로 반의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전달하며, 예를 들어 “我比他高”와 상반되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경우, “我比他矮”라고 하거나, “他沒有我高”라고 표현한다.2) “?”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사람 혹은 사물이 서로 “같거나 다름”을 구별하려면 전치사 “?”을 써서 비교대상을 나타낼 수 있다. 그 구조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비교되는사람이나 사물+?+비교대상+비교결과이 구조에서 술어는 비교의 결과를 설명한다. 술어를 이루는 성분을 중심으로 구문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때 “?”은 “和”, “同”, “?”로 바꾸어 쓸 수 있으며, “一?”은 “相同”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또한, 비교되는 것과 비교대상에는 명사, 대명사 이외에도 동사), 동사사조), 주술사조) 등이 올 수 있다.)(1) “一?”, “相同” 등이 술어로 충당되는 경우 : "A +? +B +一? (等)" 이때 “?+비교대상(B)”는 전치사 구로 주로 술어 앞에서 부사어로 사용되고, 이때 형용사 “差不多”는 그 앞에서 “一??弟弟比?高。 네 동생은 너 보다 크다.④ ?支??比那支一?。(X)2. 기타 형식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1) “有”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두 사람 혹은 사물이 어느 방면에서 ‘유사한 수준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를 나타낼 때는 동사 “有”를 써서 비교의 대상을 끌어낼 수 있다. 즉, 두 사람 혹은 두 사물이 서로 유사한 점이 있을 경우에 “有”를 사용한 비교구문을 쓸 수 있다. 이때 “有”를 사용하여 비교의 대상을 이끌어내고, 술어는 비교의 방면이나 표준?도달기준을 나타낸다. 이 구문은 부정의 형식으로 상용되는 비교구문으로, 구조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비교되는사람이나사물+(沒)有+비교대상+“?(那)?”정도표시+비교지점이나 표준이때, “有”는 “?到”의 뜻이고, “??”나 “那?”는 성질이나 정도를 가리키며 생략해도 무방하다. 비교대상은 "有“와 함께 술어 앞에서 부사어로 표현된다.) 또한 부정형식은 일반적으로 ②의 예처럼 “(沒)有”를 쓰면 되고, “比” 비교구문으로도 나타낼 수 있다. ③처럼 정반의문식은 비교대상이 “~한지 ~하지 않은지”의 사실을 확인 할 때 사용할 수 있다.① 他有??的??好。 그는 당신만큼 이렇게 잘 그린다.② 孩子?有父?高。 아이는 부친만큼 크지 않다.-> ⑵ 父?比孩子高。 부친은 아이보다 크다.③ ?弟弟有?有???漂亮? 네 동생은 너 만큼 예뻐요 안 예뻐요?④ 他高一米六, 七我高一米七一。 그는 167cm, 나는 171cm 이다.-> ⑷ 他?有我高。(O) 그는 나만큼 크지 않다.他?有我高一点?。(X)“有” 비교구문을 사용할 때 술어는 주로 “高, 大, 多, 深, ?, 粗, ?, ?, 厚” 등의 형용사나 정도를 나타내는 동사로, 동사의 경우 “比” 비교구문에서 쓸 수 있는 동사와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有” 비교구문에서는 ④의 마지막 예처럼 술어의 뒤에 비교의 차이를 나타내는 수량보어를 동반할 수 없다.2) “不如”를 사용하는 비교 구문어떤 사람 혹은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만 ‘못함’을 나타낼 때 “不如”를 사용한 비교 구문을 쓴다. 하므로 ③의 문장은 틀리다. 또한 발전이나 변화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越?越”와 마찬가지로 문장의 끝에 “了”를 붙인다.① 大人越批? 孩子越不??。 어른이 꾸중할수록, 아이는 더욱 말을 안 듣는다.② 文章?的越?越?人看。 글을 길게 쓰면 쓸수록, 보는 사람이 없다.③ ?越刮越?大。(X)④ 雨越下越大了。 비가 내릴수록 더 세차다.4) “像”을 사용하는 비교 구문두 사람 혹은 사물이 ‘서로 닮음’을 나타낼 때는 동사 “像”을 써서 비교 대상을 끌어낸다. 이 때 뒤의 술어는 비교하는 방면이나 표준을 나타낸다. 그 구조를 크게 둘로 나누어 보면 아래와 같다.(1) 구조♣ 구조⑴비교되는사람이나 사물+像+비교대상① 他像他??。 그는 그의 아빠를 닮았다.② ???西的形?像火箭。 이 물건의 모양은 로케트처럼 생겼다.구조⑴의 경우 비교의 의미가 약하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비교구문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구조⑵비교되는사람이나사물+像+비교대상+“?(那)?”정도표시+비교지점이나표준구조⑵에서 “像+비교대상”은 일반적으로 술어 앞에 부사어로 쓰인다. 술어는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像”이 직접 술어로 쓰이는 경우이다. 이때 “像”에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어를 사용할 수 있다.① 他?像一?演?。 그는 배우와 무척 닮았다.② ?非常像?者。 너는 매우 기자 같다.두 번째는 아래 ①처럼 “像+비교대상”이 부사어로 쓰이고 형용사나 동사가 술어로 쓰이는 경우이다. 이때는 ②처럼 “像” 앞에 정도부사를 사용할 수 없고, ③처럼 술어 앞에 일반적으로 지시대사 “??(??)”나 “那?(那?)”을 사용하여 정도를 표시해 준다. 이것들은 술어의 앞에만 올 수 있으며 “像”의 앞에는 올 수 없으므로, ④는 틀린 문장이다.① ?次任?像上次??。 이번 임무는 저번처럼 긴장된다.② 他?像他??那?高。(X)③ 他的眼睛像?的??好看。 그의 눈은 너처럼 이렇게 예쁘다.④ 他的眼睛那?像?的好看。(X)(2) 기타사항? 부정형식“像”의 부정형식은 “不像”이다.① ?不像十五?的人。 그녀는 열다섯 )
    인문/어학| 2006.12.22| 19페이지| 3,500원| 조회(842)
    미리보기
  • [역사]이대교-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창도자
    목차Ⅰ. 들어가며Ⅱ. 이대교의 시간 순 사상과 활동ⅰ. 출생 ~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 이전ⅱ. 신문화운동과 그 시기 활동ⅲ. 5.4운동과 그 시기 활동ⅳ. 중공창당과 국공합작기의 활동Ⅲ. 마르크스주의 수용 과정ⅰ.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파ⅱ. 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 수용과정ⅲ. 이대교와 중국식 마르크스주의Ⅳ. 이대교와 진독수Ⅴ. 나오며Ⅵ. 이대교 연표Ⅶ. 참고 문헌Ⅰ. 들어가며이대교(李大釗: 1889~1927)는 38년 동안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 형성기(1910~20년대)에 사상과 정치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 사회는 신해혁명의 실패, 원세개(袁世凱)의 탈권적 전제통치, 군웅할거의 군벌시대를 거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이 극심한 혼란과 피폐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중국사회에는 새 시대를 준비하는 새로운 사상의 모색과 정치세력의 태동이 동시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교는 이러한 때 독창적인 사상과 과감한 실천으로 여러 번의 중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정치와 사상을 주도한 인물이었다.이대교는 문화?사상 면에서 신문화운동 기간(1915~1921)에 ≪갑인(甲寅)≫, ≪신청년(新靑年)≫, ≪매주평론(每週評論)≫ 등 당시의 대표적 문화?사상 잡지를 통해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노신(魯迅), 전현동(錢玄同) 등과 더불어 옛 중국의 전통 타파와 서구의 근대 민주사상 전파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달리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중국 사상과 서양 근대 사상을 융합한 독특한 사상을 제시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 뒤 중국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하였다. 정치적 실천면에서도 그는 5.4운동의 전개, 중국공산당의 창건, 초기 노동운동의 조직과 확대, 그리고 국공합작(國共合作)등 여러 과정에서 모두 중심구실을 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구실 때문에 이대교는 오늘날 학계에서 중국 현대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으며, 중국대륙에서는 그들 중국공산당卽自由亡)"고 하면서 당시 원세개의 복고(復古)와 제재(帝制)기도를 옹호하는 자들을 국가에 대한 반역이자 국민의 공적(公敵)으로 규정하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대교의 ‘민이’사상은 톨스토이(L. N. Tolstoi)의 ‘민중의 창조적 힘’에 대한 강조와 밀(J. S. Mill)의 자유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의 역사관은 아직 유심론(唯心論) 단계에 머물러 있어 유물사관적인 요소가 부족하다고 말 할 수 있겠다.ⅱ. 신문화운동과 그 시기 활동중국 지식인들에게 신해혁명 이후 일어난 지적 변화 중의 하나는 서구사상의 수용일 것이다. 이것은 대체로 프랑스와 일본, 러시아, 미국의 영향이었다. 실용주의로 특징 되는 미국보다는 프랑스에 유학했던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사회와 정치문제에 더 민감하였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며 부지런히 배우자는‘근공검학(勤工儉學)운동’에 몰두하면서, 중국의 전통질서였던 지식인과 일반 서민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기여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치던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크로프트킨(P. kropotkin)의 인간을 신뢰하는 바탕 위에 전개된‘상호부조론(相互附助論)’에도 깊은 감명을 받아 억압과 전제 등, 평등과 자유를 방해하는 어떠한 장애물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1910년대의 중국에는 무정부주의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작용하였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중국의 대동주의와 같은 다른 사상들도 서로 혼재되어 각기 새로운 지식인들을 사로잡으면서 희망한 미래로의 활력을 제공하였다. 그들은‘민주’와‘과학’을 부르짖으며, 과거의 봉건전제와 봉건예교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문화운동이 탄생하였다.1915년 진독수)는 상해에서 잡지 ≪청년≫(2호부터 ≪신청년≫으로 개칭)을 창간하고 을 발표하여 당시 중국 사회의 암흑을 열거하고, ‘민주’와‘과학’이라는 구호를 제출하여 청년들의 사상해방과 진취적인 정신의 추구를 요구함으로써 신문화운동에 불을 지폈다. 신문화운동은 신사상운동(新思想??)과 신문학운동(新文學??)의 두혁명 승리의 서광으로 간주하였다. 10월 혁명이 폭발하자 중국에는 신속하게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전래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우주관으로 국가의 운명을 관찰하고 중국 혁명의 길을 신중히 모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ⅳ. 중공 창당과 국공합작기의 활동5.4 사건 뒤 마르크스주의에 완전히 기울어진 이대교는 문필생활보다는 마르크스주의 실천을 위한 정치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파, 노동운동 조직, 그리고 중국공산당 조직에 이르게 되었다.먼저 이대교는 1920년 1월 상해로 떠나는 진독수를 전송하기 위해 함께 천진으로 가면서 그와 중국공산당 건립문제에 관해 의논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진독수가 떠난 뒤 천진의 소련영사관에서 레닌(V. I. Lenin)이 파견한 소련 인을 만나 혁명운동 조직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그해 3월 ‘마르크스학설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연구회를 통해 이대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개적으로 전파할 계획을 세웠으며, 같은 해 4월에는 북경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소련인 교수를 통해 당시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의 보인틴스키(G. Voitinsky)와 만나 중국공산당 건립의 필요성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그를 상해에 있던 진독수에게 소개함으로써 5월 상해에 중공임시중앙위원회를 조직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중공 설립의 첫 걸음이자, 첫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뒤부터 진독수는 보이틴스키의 도움으로 상해에 ‘공산주의 소조(小組)’를, 이대교는 북경에서 공산주의 소조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상해와 북경의 두 공산주의 소조를 중심으로 각 도시, 북방과 남방의 여러 성에서 공산조직의 성립을 분담 책임지기로 합의하였다.또한 이대교는 공산당 창당을 위해 노력하면서 노동자들에 주목하여 그들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그는 북경에서 제자들과 함께 ≪노동음(勞動音)≫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1년 1월에는 장신점(長莘店)에 공인(工人)보습학교를 열고 철도노동자를 조직하였다. 자가‘기본적으로 사회혁명의 색채를 가진 국민주의적 혁명’인데 비해 전자는‘근본적으로 세계혁명의 색채를 가진 사회주의혁명이며 제3의 신문명으로 가는 위대한 첫 걸음’이라고 하였다.)그러나 이 논문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정확한 이해에서가 아니라 종래 그의 유전적(流轉的) 역사관과 서구적 민주주의 개념의 기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대교는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확정된 뒤 1918년 11월 ≪신청년≫에 연속으로 와 두 편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두 글은 볼셰비키혁명에 대해 앞 글 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더 적극적인 견해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논문에서 볼셰비즘을“20세기 세계혁명의 새로운 신조”라고 찬양하면서“앞으로 세계도처에는 볼셰비즘 전승 깃발이 보일 것이며 볼셰비즘의 개선가를 들을 것”이라고 하였다.)오늘날 중국 역사가들은 이 두 글을 이대교가‘초보적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증거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당시 이대교가‘진보적 개량주의의 지식인’으로서 10월 혁명의 웅대한 승리에 매료되었을 뿐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잘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들은 그 뒤 이대교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본격적 연구를 하게 되는 시발이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이대교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1918년부터였다. 당시 이대교는 북경대학교에서 그를 따르던 학생들과 함께‘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자료를 수집, 연구, 토의하였다. 토의는 비밀리에 북경대학교 도서관 이대교의 사무실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모임에는 뒷날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모택동, 구추백(瞿秋白), 장국도(張國燾), 등중하(鄧中夏)가 참여했다. 이러한 모임과 관련된 연구성과로 보이는 그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관한 긴 논문이 1919년 5월 초 ≪신청년≫에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이대교는 유물사관의 진보사관이나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상부구조는 가지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첫째는, 인민주의적인 색채이다. 아마도 이대교는 청년 지식인에게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에게 배워“농촌으로 들어가라.”고 호소한 최초의 중국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다. 인민주의는 일반적으로 서로 결합된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를 증오하여 자본주의를 회피하거나 뛰어넘어서 사회주의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희망을 농촌이나 농민에게 기탁하는 점이다. 이렇게 농촌으로 돌아가도록 호소하는 것, 농촌을 중시하고 농민을 칭송하는 것은 진독수 등 다른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에서처럼 이론적?실천적으로 독립된 성격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인민주의는 처음부터 마르크스주의 내에 침투하여 영향과 작용을 발휘하였다. 농촌과 농민의 중시 같은 것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중국의 실제에 부합되었으며, 중국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승리에도 기여하였다.이대교가 해설한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인도주의라는 것이다. 이대교는 처음으로 계급투쟁 학설을 소개함과 동시에, 특히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附助論)을 중점적으로 선전하였다. 그는 상호부조에 의해 계급투쟁을‘보충’하고자 하였다. 즉 경제구조가 계급대립에 기초하여 있는 시기에는 이 상호부조의 이상과 윤리의 관념이 늘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항상 그것은 경제구조에 의해 훼손당하기 때문에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 학설 속에 내포된 진리이다. 경제구조가 인류의 상호부조위에 건립되는 시기에 이르면, 이 윤리의 관념은 종전처럼 경제구조에 의해 훼손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르는 과도기에는 윤리적 감화, 인도적 행동에 좀 더 배가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인류가 전 역사 속에서 받은 나쁜 감염, 나쁜 습관을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물질적 변화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이대교는 이것이 마르크스 학설 속에서 응당 바로잡혀야 할 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처음부터 이대교는 윤리?
    사회과학| 2006.12.02| 20페이지| 3,500원| 조회(60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9
9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2
  • A좋아요
    3
  • B괜찮아요
    4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03일 금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2:51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