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제 1편 * 자유롭게 노닐다『장자』제1편은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라는 제목이 보여 주듯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고대 문헌에서는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맨 앞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편에서 말하는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와 ‘초월’, 이것이 『장자』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고 [1]『장자』첫머리에서는 물고기가 변하여 엄청나게 큰 새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붕새는 이런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사람을, 그리고 그 거침없는 비상은 이런 ‘변화(變化)’나 ‘변혁(變革)’을 이룬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초월(超越)’을 상징한다. 이처럼 인간이 생래적으로 지닌 실존적 한계를 초월할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라 하겠다. 이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면 한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볼 수 있다.첫째, 이런 엄청난 변화가 자연과 동떨어진 어떤 초자연적 힘이나 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다 기운이 움직여 물결이 흉흉해지”거나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타고”날듯이 모두 자연 안에서, 그것에 순응하고 힘입어, 가능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래적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발현해서 생긴 일임을 말한 셈이다.둘째, 여기 나오는 알, 물고기, 붕새가 겉으로 엄청나게 달라 보이는 것들이지만 본질을 보면 본래 따로 독립한 사물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고기나 붕새도 본래는 알이었다. 그렇게 큰 것들도 조그만 알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씨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무한한 가능성을 자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일이 중요하다.[2,3,4]주목할 일은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듯이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다”고 하여, 붕새의 초월적 비상을 위해 특히 ‘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점이다. 왜 바람이 비둘기 [5]그 동안 ‘인간의 조건’으로 숙명처럼 뒤집어쓰고 다니던 실존적 한계의 껍질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훌훌 날아다닐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초월적 삶은 우리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도대체 뭘 먹자고 저렇게 높이 날아다닐까? 정신 나간 짓이 아닌가? 하는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마침내 우리도 붕새처럼 변해 자유를 누려야 하겠지만, 당장은 매미나 새끼 비둘기처럼 어리석은 짓이나 말아야겠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나날이 없애 가는’도(道)의 길을 걸으며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의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 이런 자각이 건전하고 싱싱한 종교를 추구하는 시발점이기 때문이다.[6]『장자』첫머리에 나오는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첫째 이야기에서는 큰 물고기가 ‘변해서’ 큰 새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둘째 이야기에서는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두 자료 중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더 정확한 것일까? 이런 질문은 그야말로 우문이다.『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든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든 이런 이야기의 일차적 목적은 우리들에게 정확한 역사적, 혹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변화(transformation)를 일깨우려는 것임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첫째『장자』에서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현실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엄청난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둘째『장자』라는 책이 ‘문자로’로 이해할 자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셋째 ‘상징’을 넘어서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변해서’새로운 실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자유의 네 단계 [7]최종의 절대 자유를 누리는 진정한 자유인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바로 ‘구경(究竟)에 이른’라는 미친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미쳤다’는 것이,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 보통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고, 접여 자신이 미친 척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전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무튼『장자』는 여기서도 이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신인은 ‘온갖 것과 하나가 된’상태로 만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물처럼 흐르듯 살아간다. 신인들의 능력, 초월적인 경지와 그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는 우리 속인들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이야기 한 것이다.송나라 모자 장수와 요 임금 [11]요 임금이 신인들을 만나고 나서 자기 나라를 잊어버리는 변화와 초월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신인들이야말로 ‘쓸모없음의 더욱 큰 쓸모(無用之大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큰 박과 손 트는 데 쓰는 약 쓸모 없는 나무? [12,13,14]장자의 가르침이 쓸모없는 것이라는 ‘장자 무용론’을 편 혜자에게 장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더 큰 가치와 뜻이 있다고 했다. 혜자의 본질론적 견해에 입각한 유용성 시비에 대해 장자는 유용성을 여러 가지 시각과 차원에서 봐야지 어느 한 쪽의 어느 한 차원에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물은 쓰기에 따라 쓸모 있기도 하고 쓸모 없기도 하다는 것이다. 장자의 이런 생각을 ‘비본질론적 견해, 시각주의적 접근(perspectival approach)’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머리 속에 이미 형성된 ‘쓸모’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이제 그렇게 변혁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이 다음에 나오는 제2편의 중심 과제이다.* 제 2편 * 사물을 고르게 하다이 편의 주제는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궁극적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립(對立)의 세계에서 대립을 초월(超越)한 ‘하나’의 세계, 실재오상아(五喪我,본래의 자아, 큰 자아)’는『장자』의 핵심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변화를 의식(意識)상태로 설명하면, 일상의 이분법적 의식 세계에서 벗어나 초이분법적 의식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꼭 막힌 자의식(自意識)에서 탁트인 우주 의식(宇宙意識, cosmic consciousness)으로 변한 것이다. 내 일상의 이분법(二分法)적 고정 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자기를 잃어버리고 비운 상태, 이른바 상아(喪我), 무아(無我), 망아(忘我), 망기(忘己)라는 자기초월(自己超越)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수 인식 능력(特殊認識能力)의 활성화(活性化)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齊物論)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하늘의 퉁소 소리 [2,3]제1편의 바람이 우리가 타고 ‘신바람 나게’날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면, 여기 나오는 바람은 퉁소 속으로 통과하면서 소리를 내듯 속으로 불어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적 바람인 셈이다.바람과 더불어 생겨나는 소리는 이런, 물리적 소리만이 아니다. 인간은 이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보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소리, 생각, 의견, 심리 작용, 감정, 정서 상태와 다양한 정도의 생동성과 생명력 등을 얻는다.지적(知的) 활동과 감정의 작용 [4,5]장자는 일상적인 마음,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주관한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모르는 마음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런 마음의 불완전함을 깨달아 이를 잃고 초극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제 2편 전체를 통해 이렇게 변하지 못한 마음에서 나오는 단견과 고집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그는 일종의 ‘충격 요법’을 쓴 셈이다.[독후감]나는 장자의 절묘한 풍유들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뜻을 어을 쓰면서 살고 있다. 붕새의 의미를 알고서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는 극히 적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도다”라고 한 공자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고 한 양사언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달을 탐사하고 하는 것은 그 순간 위대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없이 계속되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 속에서 그러한 사건들은 모두가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붕새는 이러한 우주만물의 이치를 알고 있는 생명체로 상징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장자에 따르면 붕새가 가는 길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도의 길인 것이다.앞에서 붕새라는 거대한 존재를 등장시켜 상징적인 이야기를 했다면 다음에 나오는 요와 허유의 얘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야기였다. 요 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했다는 이야기는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어온 이야기지만 장자 속에서 다시금 읽어보면 그 느껴지는 바가 새롭고 다양하다. 절대 부와 권력의 상징인 왕의 자리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우리는 보통 요와 허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달을 구하지 않고 속세로부터 떠나 심신의 결백을 보존하는 ‘허유’라는 은자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 정도에 그치고 만다. 허유는 특이했던 사람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는 다르다. 우리는 눈앞의 조그만 이익을 챙기기 위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도 쉽게 한다. 조금이라도 부를 쌓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악착같이 살아간다. 우리의 일상의 모습과 우화 속의 허유의 모습을 비교해본다면 도를 따르는 삶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는 아닐지라도 어렴풋이 그 방향을 느낄 수 있다. 허유는 요 임금에게서 제의를 듣고, 더러운 소리를 들어 귀가 더러워졌다면서 영수에 나가 귀를 씻었다고 한다. 중국역사의 성군의 대명사인 요 임금은 그런 허유를 보고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장자가 서술하였다면 아마 ‘요 임금이 비록 뜻을 이루지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