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속의 성과 여성한국의 성단오놀이(신윤복 조선후기)기녀들이 속살을 드러낸 체 목욕을 하는 이 장면은 그야말로 남자들을 뇌쇄시킬 만큼 매혹적이다. 또한 이녀들의 붉은 치마와 배경에서의 녹색의 대비는 보다 그녀들의 살색의 몸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또한 훔쳐보고 있는 어린 사미승과 관람자의 시선이 합치되면서 이러한 노출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관음증적인 그것이 된다. 이 단오의 풍경을 그린 혜원의 작품은 풍속 화 가운데 여체의 노출이 가장 심한 것 중의 하나로 화면에 흐르는 춘의를 은밀하게 이끌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에로틱한 장면이 익살스럽게 표현되어 잇는데 그것은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의 맵시있는 자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의 밑등 부분에 여성의 심볼이 은근히 그려져 있는 것이다.월하밀회(신윤복 조선후기)이 장면은 독특하게도 밀회를 훔쳐보는 사람이 여성인데 이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훔쳐봄이 아니라 벽에 의지해서 훔쳐보는 이의 옷차림을 통해서(장옷) 이 여인의 신분이 양반집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 기생과 달 아래서 밀회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기생의 집을 전전하며 도락을 즐기던 남성과 이를 담 뒤에 숨에 몰래 지켜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입장차이가 극명하다.빨래터(김홍도 조선후기)이는 만약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훔쳐보고 있는 양반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평범한 풍속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소박한 일상의 평민을 볼래 훔쳐보는 양반을 등장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계층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가질수 없는 것에 대한 욕구와 훔쳐보는 행동이 어우러져 단순히 풍속화로 치부하기엔 좀 더 에로틱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춘화(조선시대)춘화란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일종의 점잖은 포르노라고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유교적인 엄격한 도덕률이 지배하던 조선시기에 제작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본능은 이성적인 사회적 규율이나 규범보다는 더욱더 강 우아하고도 균형있게 통합시켰다.헬레니즘 미술잠자는 목신(헬레니즘 시기)이 조각상은 숲의 신인 목신이 술에 취해 나른한 잠에 빠져든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개방적이고도 대담한 자세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부담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기의 작품으로 원작에는 남성의 생식기를 그대로 드러내었는데 르네상스시기에 다시금 발굴되어 보수하면서 나뭇잎으로 이를 가렸다고 한다. 이는 성에 대하여 개방적이지 못한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어 주는 것이다.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누드상이며 근육이 잘 발달된 강건하면서도 잘생긴 젊은 남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적인 전통에서의 동성애 취향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집트 미술이그나톤 4세와 그의 가족(이집트 기원전 1355년)이그나톤 4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돌출적인 파라오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그가 단행한 종교개혁과 천도 등의 역사적인 사실과 그의 독특한 외모 때문이었는데 이 작은 석판은 그의 그러한 외모에 대한 짐작을 가능케 하는 단서들이 있다. 이러한 특이한 신체적인 특징은 이집트 왕실의 오랜 전통인 근친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이집트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혼인으로 인한 성관계로 인하여 왜곡된 신체적 특징, 즉 기형적인 유전병이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한다.여기엔 지상신인 파라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란하고도 사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왼쪽의 파라오와 마주보고 있는 오른쪽의 왕후는 네페르티티이다. 그리고 마치 아기와 같이 표현된 2명은 바로 그들의 자녀인 2명의 공주들이다.중세 미술수태고지(시모네 마르티니 1333)마르티니의 제단화인 이 수태고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장면인데 성모는 갑작스러운 천사에 등장에 매우 놀란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둘 사이엔 성모의 처녀성을 뜻하는 백합이 꽂힌 꽃병이 놓여져 있다.기본적으로 두 사람의 표현은 두터운 의복으로 완전히 몸의 곡선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장하고 우변한다.바로크 미술젊은 바쿠스(카라바지오)술잔을 들고 있는 카라바지오의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의 제재를 빌어 동성애적인 분위기의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카라바지오 자신이 동성애자였다.)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하나는 술에 신인 바커스를 표현한 것이라는 설과 제우스가 그 미모에 반하여 납치해온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를 표현하였다는 해석이 있으나 두 가지설을 종합하여 술로 표현되는 향략과 퇴폐적인 메시지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홀로페로스의 목을 베는 쥬다스(젠틸레스키)젠틸레스키는 몇 명되지 않는 르네상스시기에 여성작가로서 그녀가 여러 장 같은 그림을 그린 이 주제는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민족을 침입으로부터 유대민족을 구한 한 과부의 이야기이다.그러나 이 주제를 화폭에 담은 작가가 비단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이 주제는 조각으로도 또 그녀 이전에 여러 대가들이 즐겨 다루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 작품이 여타의 다른 남성 작가들과 다른 특징을 갖는 이유는 그 처절한 잔인성의 표현에서이다.적장의 머리는 칼로 베는 쥬다스는 여성적인 가늘고 우아한 몸이 아니라 결단력있고도 단호한 모습으로 칼을 들고 적장의 목을 베는 그녀의 팔과 손은 힘이 넘친다. 게다가 적장의 피에서 흘러나온 피는 침대의 시트를 적셔 흘러내리고 있어 그녀의 행동이 얼마나 과감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었는지 알게 해준다.그리고 그녀가 이러한 주제를 이러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그린 이유를 그녀의 불행한 개인사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던 시기에 아버지의 도공들로부터 어느 날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이를 법정에 고발하지만 그녀를 폭행했던 그 도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그녀는 고립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레우키포스의 딸들의 납치(루벤스 1617)그리스의 형제 신 카스토르와 폴록스가 말을 타고 나타나 강제로 레우키포스의 두 딸을 납치하는 신화를 소재로 다룬 루벤스의 걸작이다.그리고 사람들은 납치 당하는 여인은 일부러 애인에게 보이려고 한 발을 번쩍 들어올리다가 신이 벗겨 공중에 떠 있고 애인은 더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모습이다.도둑맞은 키스(프라고나르 )상류층 귀족 여인들의 세속적이고 쾌락만을 쫓는 생활을 나타내고 있는 예이다.근대 미술고야의 1797고야는 근대기의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스페인의 미술의 역사 속에서 나체화는 매우 드물었는데 고야의 는 스페인 회화 중 나체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스페인에서 최초의 나체화는 벨라 스케스의 라는 작품이었는데 1800년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고야의 후원자였던 마누엘 고도이라는 사람이 여인의 나체화만을 보관하기 위해 에로틱 케비넷 이라는 방을 마련하고 벨라스케스의 함께 고야의 를 걸어놓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종교적인 금기가 매우 강했던 사회로서 어떤 화가도 감히 여자의 나체를 묘사하지 못했는데 당시 종교 재판소의 힘이 너무도 강했기에 고야도 1805년까지 이 그림에 대한 추궁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사회가 종교로 인하여 성의 묘사에 대해서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고야의 속의 여인은 사회의 매춘부이며 고야는 이 매춘부의 몸을 종래의 신화적인 표현이 아닌 노골적이며 도전적이며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그림 속의 여인의 배경인 베개와 쿠션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살색을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인 마하라 함은 상류층 남자가 성적으로 접하는 하류층 여자를 뜻하고 즉 매춘부를 가르키고 있다. 이렇게 당시 스페인의 귀족층과 사회 일반에 퍼져 있던 성은 고야의 그림 속에서 교묘하게 표현되어 지고 있다.앵그르의 1814이 작품은 근대기의 고전주의를 이러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앵그르의 나부 중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다. 1813년 카롤리느 뮐러 여왕의 의뢰로 그렸으나 여왕에게 전해지지 않고 프로이센 왕의 시종장 풀타레스 고르제 백작이 1819년 구입하였다. 오달리스크란 터어키 궁전의 궁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허리가 길 또한 다른 네모난 화폭인 아닌 둥근 모양을 사용한 것은 앵그르가 마치 문 구멍으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다. 이는 여인들이 모여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고 성적 쾌감을 얻고 싶은 남성의 심리, 즉 관음증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터키탕 속의 여인들은 서로 안고 있는 등 동성애적인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당시 사회 속의 성과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들라크루아의 1827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명품기운데 하나로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사르다나팔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자신의 왕비와 미희들, 말 등을 부하들을 시켜 학살하고는 평온히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이 그림은 불꽃같이 붉은 배경 속에 몸부림 치는 육체들이 극단적이고도 과장되게 묘사되고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한 명암은 그림 속의 여성의 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인공인 사르다나 팔왕은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 기대어 누워 육감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 당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왕 앞에서 왕의 침대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여인의 매끈한 피부와 하인에게 잡혀 칼에 찔려 죽는 순간에 보여지는 뒤틀리고 휘어진 여체의 풍만함과 곡선미는 당시의 동양적인 소재의 관심에 부흥하면서 방탕한 왕의 생활과 여인의 관능적인 누드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당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동양의 신비에 빠져들었고 이러한 동양적인 배경 속에서 관능적인 여인과 함께 있는 그림 속의 왕을 보면서 자신의 욕구를 간접적이나마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쿠르베 1856이 작품은 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처녀가 세느 강변에 누워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쿠르베는 근대기의 매우 사실적인 화풍으로 주목을 받은 화가 였는데 그녀는 당시 여인의 유행 복장과 매끄러운 피부를 매우 세밀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기호품의 역사Ⅰ.들어가는 글기호품의 역사 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서양, 특히 유럽의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 즉 기호품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여 당시 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신선하고도 흥미로움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매료되었던 식품들, 커피를 비롯하여 초콜릿, 맥주, 브랜디, 담배와 마약에 이르기까지 책 속에는 이러한 기호품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들, 그리고 이러한 기호품들의 시초와 변천사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가지각색의 삽화들과 함께 곁들어져 있다. 책 속의 삽화들은 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상상력을 북돋아 주기도 하였고 더불어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미술에 대해 유명했던 명화가 아닌 일상적인 삽화를 통하여 당시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기호품의 역사 는 그리 길지 않은 책이었지만 그 안에는 흥미롭고 새로운 사실로 가득 차 있었고 기호품을 통하여 역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기 때문에 책 한 권의 지식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다음의 본문을 통하여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살펴보도록 하겠다.Ⅱ.본문1.향신료 혹의 근대의 시작이 부분에서는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들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서술하고 있다. 향신료는 고대 로마시대에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중세에 이르러서야 활달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계급이 높아질수록 향신료의 사용을 늘어갔으며 이는 마치 부와 권력의 상징물로 변화했다고 한다. 이러한 향신료들이 다른 재산들과 함께 상속까지 되었다고 하니 당시 향신료의 사회적 위치를 실감케 한다. 더불어 십자군 원정{)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 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 이에 참가한 기사들 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 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 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을 통하여 동방과의 무역이 발전하고 이를 통하여 후추를 비롯한 사치품들이 무역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태리의 베니스는 유럽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는데 이 베니스의 황금기라 부르는 12-16세기 경에 유럽에서 후추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것과 일치한다고 하는 점은 후추 무역이 당시 유럽의 무역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무역의 활기는 점차로 내륙에 전파되어 전 유럽에 경제적 발전의 활기가 감돌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기도 중세 말에 이르면 향신료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여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져야 했으며 그것의 단 한가지 방법은 바로 값싼 새로운 항로를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유럽인들의 향신료에 대한 욕구는 지리상의 대발견, 즉 신대륙의 발견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짧은 역사적 지식으로 단지 미지의 세계의 발견을 위한 탐험으로만 생각했던 바스코 다가마{) Vasco da Gama 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는 포르투갈 왕의 후원을 얻어 1498 년 가브리엘호(Gabriel), 라파이엘호(Rafayel), 베리오호(Berrio)등 선단을 이끌고 Bartolomeu Dias의 희망봉(the Cape of Good Hope)루트를 따라 탐험 길에 올랐다. 그 해 11 월 희망봉을 통과하고 아프리카 동해안의 여러곳을 거치면서 인도양을 건너 1499 년 5 월 드 디어 인도의 칼리카트(Calicut)에 도착, 1499 년 9 월 리스본에 귀환했다. 그 항해에서 처음 170 여명이 떠났으나 무사히 돌아 온 사람은 고작 55 명뿐이었다. 이로써 포르투갈이 인도무 역을 독점하는데 길이 열렸다., 콜럼버스 등의 항해가 향신료의 새로운 산지를 모색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던 것이다. 또한 향신료가 도대체 당시 유럽인에게도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직접지배 혹은 토후(土侯)를 통한 간접지배로써 특산품의 강제 재배 ·매입을 행하 여 이 땅의 향신료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1652년부터 장기간에 걸친 영국 ·네덜란드전쟁 의 패배 등을 통하여 네덜란드가 영국과의 상업전쟁에서도 지게 되고 또 18세기 이후 향신료 무역이 부진하게 되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경영을 주로 하게 되었으며, 1799년에는 영토를 본국정부에 이양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쪽 ·면포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무역에 주력을 쏟아온 영국 동인도회사(1600년 설립)는 18세기 유럽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에 규제되면 서, 인도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1604년 설립, 1664년 재건)와 격렬하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플래시전투를 계기로 하여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무역을 거의 독점함과 동시에 인도의 식민 지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시기까지 유럽의 미각과 무역을 지배했지만 향신료의 새롭고 특권적인 매력이 사라지게 되자 더 이상 중요한 상품 군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향신료의 의미상실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향신료를 대체할 다른 기호품을 찾게 하였고 그것들이 바로 커피, 차, 초컬릿등의 식민지 상품들이었다.2.커피커피는 17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귀족과 부르주아 사이에서 다른 방식으로 유행하였다. 궁정 귀족들이 커피 마시기를 하나의 장식으로서 형식을 중요시하여 심지어 커피를 마시기 위해 거기에 맞게 옷까지 갈아입기도 했다고 하니 당시 귀족의 허영을 알 수 있다. 반면 같은 시대의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음료 자체가 중심으로 서게 된다. 당시 커피는 알코올과 대비되어 정신을 일깨우는 음료 로 여겨졌다. 이러한 커피의 특징은 프로테스탄트, 계급적으로 근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부르주아들에게 점점 사무실에서 정신노동을 하게 하였으며 바야흐로 “자기의 생명이나 건강보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밤늦게까지 작업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18세기 자연과학자 칼 폰 린네) 효율성의 음료로서 역사적인 약제로 작용하게 되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커피 이전의 맥주가 사람들에게 신체의 비만을 초래하고 당시 육질이 많은 신체가 탐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건조한 것으로 구별되는 커피는 금욕적인 음료로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피는 이제 대중적으로 발전하여 커피하우스 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최초의 커피하우스였던 로이드의 커피하우스가 후에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색다르고 신기한 사실이었다. 또한 영국에서는 여성에게 커피하우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역시 당시 사회의 여성차별의식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커피하우스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당시의 커피하우스라는 곳이 단지 커피를 마시고 즐기는 곳이 아닌 문학, 정치등 남성들의 사회의 장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기방에서 정치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정치를 의논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커피하우스는 남성들만의 전유장소였던 것이다. 이제 커피는 점점 유행하여 커피하우스뿐 아니라 일상 가정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데 이는 커피 공급의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물론 영국, 네덜란드등 식민 열강들은 커피 공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그들은 중상주의{) 근대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의해 지배를 확립하기까지의 초기 단계에서 원시적 축적을 수행 하는 데 사용된 여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이론체계이다. 경제정책으로서의 중상주의의 핵심 은 초기 산업자본을 위해 국내시장을 확보하고, 국외시장을 개척할 목적으로 수행되는 보호주 의 제도로서 외국제 완제품의 수입금지와 제한, 외국산 원료의 수입장려, 국내상품의 수출장 려, 국내원료의 수출금지 등의 조치를 직접 입법 및 관세정책으로 실행하였다. 이것은 절대왕 정이 타도되어 산업자본이 국정을 지배하게 되는 명예혁명(1688) 때부터 약 100년 사이에 걸 쳐 원시적 축적의 체제로서 추진되어 온 정책이다. 경제이론으로서의 중상주의를 보면, 근대자 본주의는 아직 생산부문까지를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 획기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이 당시 유럽인들에게 다시 정복해야할 새로운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3.초콜릿17-18세기 커피와 함께 유행하였던 기호품인 초콜릿은 뜨거운 물이나 우유에 녹여서 뜨거운 액체상태로 마시는 음료였다고 한다. 초콜릿의 유행은 스페인으로부터 시작된다. 16세기 초에 황금의 도시를 찾으러 원정을 떠난 스페인인 들은 향기가 강하고 윤기가 나는 ‘갈색의 금’을 발견한다. 이후 유럽에 전래된 초콜릿은 오랫동안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소비품이었지만 산업혁명과 몇몇 발명가들의 천재적이고 모험적인 개척 정신 덕분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호품이 되었다. 이 초콜릿에 대해서도 커피에서와 같이 당시 사람들의 성과 관련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유럽인들은 초콜릿을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최음제로 여겼다. 그것은 육체에 영양을 공급해주고 이는 성능력을 길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초콜릿의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이것을 팔았던 상점이나 초콜릿 하우스들은 귀족과 화류계가 특별히 결합하는 장소였다고 하니 초콜릿에 대한 성적인 관념들이 얼마나 보편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초콜릿은 앙상레짐(구체제)의 신분음료였다는 사실은 당시 부르주아 층의 환영을 받았던 커피와 비교해 볼 수 있다.4.담배담배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책에는 자세히 나와있지는 않아 개인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담배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인 1492년에 스페인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 상륙하여 보니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오들이 피우는 담배를 처음으로 본 이후 비로소 문명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식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향신료를 찾아 나섰던 항해가 다시 담배라는 기호품을 유럽에 전래한 결과를 낳은 것이니 참 재미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유럽인들에게 담배는 안정, 쾌적, 명상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당시 담배에 대한 인식은 정신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다.
근대 미술고야의 1797고야는 근대기의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스페인의 미술의 역사 속에서 나체화는 매우 드물었는데 고야의 는 스페인 회화 중 나체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스페인에서 최초의 나체화는 벨라 스케스의 라는 작품이었는데 1800년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고야의 후원자였던 마누엘 고도이라는 사람이 여인의 나체화만을 보관하기 위해 에로틱 케비넷 이라는 방을 마련하고 벨라스케스의 함께 고야의 를 걸어놓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 스페인 사회는 종교적인 금기가 매우 강했던 사회로서 어떤 화가도 감히 여자의 나체를 묘사하지 못했는데 당시 종교 재판소의 힘이 너무도 강했기에 고야도 1805년까지 이 그림에 대한 추궁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사회가 종교로 인하여 성의 묘사에 대해서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고야의 속의 여인은 사회의 매춘부이며 고야는 이 매춘부의 몸을 종래의 신화적인 표현이 아닌 노골적이며 도전적이며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그림 속의 여인의 배경인 베개와 쿠션들은 아름다운 육체의 살색을 강조하고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인 마하라 함은 상류층 남자가 성적으로 접하는 하류층 여자를 뜻하고 즉 매춘부를 가르키고 있다. 이렇게 당시 스페인의 귀족층과 사회 일반에 퍼져 있던 성은 고야의 그림 속에서 교묘하게 표현되어 지고 있다.앵그르의 1814이 작품은 근대기의 고전주의를 이러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앵그르의 나부 중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다. 1813년 카롤리느 뮐러 여왕의 의뢰로 그렸으나 여왕에게 전해지지 않고 프로이센 왕의 시종장 풀타레스 고르제 백작이 1819년 구입하였다. 오달리스크란 터어키 궁전의 궁녀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허리가 길다는 이유로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관능적인 미를 표현하기 위한 앵그르의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앵그르는 주제를 택할 때에도 아카데미적인 것 보다 할렘의 후궁같은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주제를 많이 선택했다. 오달리스크는 누드로 관자 하얀 피부와 그녀가 들고 있는 깃털 장식의 부채, 장막 같은 비단 시트와 털이 깔린 침대의 모습 등이 먼저 들어온다. 아름다운 오달리스크의 얼굴은 이 화면에 생기를 넣어주며 세부적 묘사와 분위기 표현에 압도된다 . 이와 같이 앵그르의 그림은 여인의 누드를 세부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해 내었지만 해부학적으로 매우 왜곡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앵그르의 동양적인 배경 묘사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에서도 보이듯이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오리엔탈리즘을 보여준다. 당시 사회의 귀족 남성들은 동양적인 여인과 동양을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통하여 성적인 만족을 찾으려했고 이러한 경향은 예술에서 또한 나타나 당시 사회의 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앵그르의 1863앵그르는 위의 와 같은 관능적인 여성 누드를 주로 그렸는데 누드화 가운데에서도 앵그르는 목욕하는 여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터키탕 이라는 배경은 동양적인 요소로 당시 동양에 대한 관심이 여성의 누드로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 터어키 욕탕의 누드여인들은 보다 구성적이며 퇴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동양적인 터키탕이라는 배경 속에 여인들은 개방적인 포즈로 마치 그림을 보고 있는 남성들을 의식이라도 하는 듯이 저마다 관능적인 몸매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다른 네모난 화폭인 아닌 둥근 모양을 사용한 것은 앵그르가 마치 문 구멍으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들여다 보고 있는 듯한 효과를 주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다. 이는 여인들이 모여 목욕하는 모습을 엿보고 성적 쾌감을 얻고 싶은 남성의 심리, 즉 관음증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터키탕 속의 여인들은 서로 안고 있는 등 동성애적인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당시 사회 속의 성과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들라크루아의 1827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명품기운데 하나로 매우 유명한 작품이다.사르다나팔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으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적의 침공을 앞두고 자신의 왕비와 미희들, 말 등을 부하들을 시켜 학살하고는 평온히 최후를 맞았다고 한이 극단적이고도 과장되게 묘사되고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한 명암은 그림 속의 여성의 육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주인공인 사르다나 팔왕은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 기대어 누워 육감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 당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왕 앞에서 왕의 침대를 끌어안고 죽어가는 여인의 매끈한 피부와 하인에게 잡혀 칼에 찔려 죽는 순간에 보여지는 뒤틀리고 휘어진 여체의 풍만함과 곡선미는 당시의 동양적인 소재의 관심에 부흥하면서 방탕한 왕의 생활과 여인의 관능적인 누드를 그림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당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동양의 신비에 빠져들었고 이러한 동양적인 배경 속에서 관능적인 여인과 함께 있는 그림 속의 왕을 보면서 자신의 욕구를 간접적이나마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쿠르베 1856이 작품은 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처녀가 세느 강변에 누워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쿠르베는 근대기의 매우 사실적인 화풍으로 주목을 받은 화가 였는데 그녀는 당시 여인의 유행 복장과 매끄러운 피부를 매우 세밀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하다는 도덕적 입장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강가에 매여져 있는 보트로 미루어 근처에 상대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두 처녀의 모습은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상징들은 이 처녀들이 남자들과 함께 세느 강변으로 물놀이를 나온 것이며 남자들과의 성관계로 인하여 지쳐 강변이 누워 낮잠을 자고있는 것을 표현 했다고 하여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 당시 세느 강변은 남녀의 은밀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었으며 이러한 곳을 배경으로 처녀들이 누워 자고 있다는 설정은 당시 특히 보수적인 예술계에서는 용인 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쿠르베는 잠자고 있는 처녀들과 보트등 여러 배경들을 통하여 당시 솔직한 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드가 이 작품은 마치 무대 뒤의 분장실 근 처를 지나치다 것이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여지는 분장실은 마치 출입이 금지된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관음증과도 연결지을 수 있는 부분이며 그림을 그린 드가 뿐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남성 관객을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다. 드가는 다른 화가들처럼 정식으로 화실 안에 모델을 보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혼자 있을 때 혹은 밀폐된 방안에 홀로 있을 때 마치 훔쳐보듯이 그림을 그렸다. 드가의 이러한 변태적인 눈으로 모델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린 것은 당시 남성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러한 드가의 그림의 특징은 여성을 성적인 대상과 도구로 여기는 남성들의 성의식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드가 이 작품도 위의 그림과 같이 드가의 훔쳐보는 듯한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막 성관계를 끝마치고 몸을 씻기위해 들어가는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도 드가는 마치 여인의 뒤에 몰래 훔쳐보는 듯한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러한 드가의 의도는 당시 사회의 남성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마네 1863마네는 1865년 아카데미 살롱에 매춘부를 주제로 한 를 출품하여 파격적으로 입선하였는데 이 시대에는 매춘부들이 사회의 저변에서 중심가로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사회는 비너스가 아닌 거리의 여인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특히 시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도덕적 모욕이었다. 따라서 마네의 는 성적이고 선동적이며 반전통적이라 하여 평론가와 시민들의 야유와 항의를 받았다. 이 그림은 티지아노의 에서 영향을 받아 그려졌는데 마네는 비너스 대신에 파리의 매춘부를 대치시켰고 머리에는 장미대신 난초를 꽂게 하고 주인에게 충실한 개 대신 성적으로 방종한 검은 고양이로 바꾸어 당시 사회의 성적 문란을 은유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이 시대에 돈을 벌기 위해서 몸을 파는 매춘 행위는 육체와 돈을 다 같이 타락시키는 도덕적, 사회적 죄악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올랭 미술무샤 [Salon des Cent]무샤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아르누보 운동의 선구자라 할수 있다. 아르누보의 특징은 여성을 휘감기는 선을 통하여 매우 성적으로 섹시하게 표현했다는 것에 특징이 있다. 이러한 아루느보 시기의 회화는 주로 포스터와 삽화등에서 볼수 있는 데 이 작품 또한 가슴을 거의 드러내고 있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살롱 드 상이라는 까폐의 포스터를 제작 한 것이다. 이 시기의 여성은 주로 상업적인 목적으로 상품화되었던 것을 보여주고 이러한 광고나 삽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주로 팜므파탈 의 이미지가 강했다. 팜므 파탈(femmes fatales)이란 주로 이브, 살로메 등 남성을 죽음이나 고통 등의 절망적 상황으로 몰고 가는 요부 또는 악녀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당시의 사람들 즉 남성들을 요조숙녀들 보다는 마음 속으로는 팜므 파탈 적인 여인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매우 유행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러한 그림 속에서 그들의 숨겨진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클림트 1907이 그림은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터질듯한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극단적으로 클로즈 업하여 농염함을 극대화했다. 풍만한 허벅지와. 상대적으로 가냘픈 종아리가 그것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으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제우스 정랑을 보라. 온통 황금빛이다.관능은 이렇게 황금빛으로 출렁이며 빛난다. 그는 색으로 황홀한 심리마저 잡아낸 것이다. 여인은 강렬한 엑스타시에 몸을 싣고 꿈같은 몽환의 세계에 침몰했다. 한편 클림트는 다나에의 손을 통해서 퇴폐적 아름다움마저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손을 잘 보라. 무엇인가 긴 막대 같은 것을 살짝 감아 쥔 오른 손은 긴장되어 떨릴 듯 하다. 물론 그 대상은 그림 속에서 생략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벌어진 입, 쾌락에 지펴 감긴 눈은 제우스의 성기를 감아 쥐고 탐닉하는 중이다. 그리고 분명 그녀는 왼 손으로 자신의 성말한다.
♣신라의 역사와 불교1.신라의 역사신라의 역사는 보통 6기로 나눈다. 제1기는 혁거세거서간으로부터 흘해이사금까지, 제2기는 내물마립간으로부터 지증왕까지, 제3기는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제4기는 태종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제5기는 선덕왕부터 진성여왕까지, 제6기는 효공왕부터 경순왕까지이다. 제1기는 연맹왕국 성립기, 제2기는 귀족국가 태동기, 제3기는 귀족세력 연합기, 제4기는 전제왕권기, 제5기는 호족세력 등장기, 제6기는 쇠퇴와 멸망기로 구분한다. [삼국사기]에서는 1기에서 3기까지를 '상대신라', 4기를 '중대신라', 5기에서 6기까지를 '하대신라'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제1기와 2기를 '상고신라', 제3기를 '중고신라', 그리고 제4기 이후를 '하고신라'로 구분하고 있다.2.신라의 신분제도신라 사회의 특유의 신분 계급제도로서 골품제도가 있었는데 성골(聖骨), 진골(眞骨), 6두품(六頭品), 5두품(五頭品), 4두품(四頭品)등이 있었다. 골(骨)은 혈연(血緣), 품(品)은 품위(品位)를 표시하여 피(血)를 중심으로 한 가통(家統)을 말한다. 성골과 진골을 왕족으로, 성골은 양친(兩親)이 모두 왕족(王族)인 자를 칭하고, 시조부터 진덕여왕까지 왕위를 독점세습하였으며, 진골은 양친 중 한편이 왕족인 자로서 제2골이라고도 하여, 태종무열왕 때부터 왕위를 세습하였다. 벼슬에 있어서도 제1위관인 이벌찬에서 제5위관인 대아찬까지를 진골에서 독점하였다. 6두품, 5두품, 4두품은 제6위관인 아찬 이하 말위(末位)인 제17위관 조위(造位)까지의 관직을 가질 수 있어 지배계급으로 귀족의 대열에 속했다. 3두품, 2두품, 1두품의 기록은 없으나 평민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분계급의 구분은 관도(官途) 출세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고 의복이나 가옥에도 골품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3.신라의 중앙 관제통일 신라 이전의 관제는 골품제도를 바탕으로 한 귀족 연합의 전통위에 형성되었다. 법흥왕 때에 설치된 상대등(上大等)은 귀족을 대표하는 지위에서 국사를 총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중앙관제가 완성되는 것은 통일기에 들어와서였다. 통일기의 관제도 물론 삼국시대부터의 전통대로 골품제도에 토대를 두었으며, 따라서 상대등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긴 하였으나, 삼국의 통일에 따라 확대된 영토와 국민, 개인적인 세력이 더욱 성장한 귀족등을 하나의 통일된 조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가 정치 기구의 확대정비가 필요하였다. 또한 귀족 연합적인 형태에서 점차 왕권이 전제적인 방향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보다 많이 섭취할 수도 있었다. 이미 삼국시대 말기인 서기651년(진덕여왕 5년)에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집사부(執事部)가 설치된 것은 신라의 관제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집사부는 귀족 연합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인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는 상대등과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당제(唐制)의 채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景德王)때에 이르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 졌다.4. 불교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이세상 모든 것은 마하바라타에 있나니...나에게 인도 미술사를 공부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마하바라타」는 실로 생소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평소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관심이 많았던 편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텔레비전의 다큐 프로그램이나 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을 통하여 단편적인 지식 정도만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 학기에 듣게된 인도 미술을 배우게 되면서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서 참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인도의 예술성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뛰어남을 깨닫고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3권의 책 중에서 마하바라타 는 구하기도 어려웠고 책의 양도 많아 솔직히 읽는 시간도 많이 걸렸고 생소한 단어들도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편식으로 나누어진 이야기들은 생소한 단어들을 제외하고는 쉽고 재미있는 스토리로서 책을 읽는 즐거움 또한 안겨주었다.우선 책을 읽은 도중이나 읽고 난 후에도 나는 이 마하바라타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어떻게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궁금증이 들어서 책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알아보게 되었다. 마하바라타는 '바라타족(族)의 전쟁을 읊은 대사시(大史詩)’란 뜻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구전(口傳)되어 오는 사이에 정리 ·수정 ·증보를 거쳐 4세기경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리고 18편 10만송(頌)의 시구(詩句)와 부록 《하리바니사 Harivanisa》 1편 10만 6000송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렇게 방대한 양이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정리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들만 접해 오던 나에게 인도라는 곳에서 이러한 로마 그리스 신화를 방불케 하는 이러한 서사시가 있었다는 것이 상당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보다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원래 이 마하바라타 의 주제는 바라타족에 속한 쿠르족과 반두족의 불화로 18일간의 큰 싸움이 벌어져 반두족이 승리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본제(本題)는 전편의 약 5분의 1밖에 되지 않고, 그 사이에 신화 ·전설 ·종교 ·철학 ·도덕 ·법제 ·사회제도 등에 관한 삽화(揷話)가 많이 들어 있다. 제목이 마하바라타 라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야기를 기본 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줄거리를 요약해 보자면 ,옛날 쿠루(Kuru) 자바의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델리의 동북)라는 도시에 일찍이 북인도에서 웅비하던 바라타의 후예로서 드리타라슈트라(Dhrtarastra)와 판두(Pandu)라는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백부인 비슈마(Bhisma){) 산타누 왕과 여신 강가 사이에 태어난 데바브라타가 부친과 어부의 딸과의 결혼을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일생 독신을 맹세하니 그에게는 비슈마라는 칭호가 붙게 되었다.아래서 양육되고 있었다. 형은 장님이었으므로 동생인 판두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 판두 에게는 영특한 다섯 왕자가 있어서 그들은 판다바(pandava. 판두의 후예){) 판두 왕의 아들 5형제를 합쳐 부르는 명칭(유디슈티라, 비마, 아르쥬나, 니쿨라, 사하데바)라고 불렀고, 형인 드리타라슈트라에게는 100명의 왕자가 있어서 그들을 카우라바(Kaurava. 쿠루의 후예)라고 불렀다. 그러나 판두 왕은 젊어서 죽었으므로 장님인 형이 왕위를 이어 정사를 돌보는 한편 동생의 다섯 왕자를 자신의 왕자들과 함께 길렀다. 나이 많은 드리트라슈트라 왕은 죽은 아우에 대한 각별한 정 때문에 그의 다섯 왕자에게 특별한 배려를 해 주고 싶었다. 더군다나 다섯 왕자는 모두 무예가 뛰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의 맏형인 유디슈타라가 지모와 용기가 빼어나 그를 왕위의 계승자로 삼았다.그러자 카우라바는 이를 질투하여 온갖 박해를 가하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며 다섯 왕자를 불태워 죽이려고도 했다. 결국 다섯 왕자는 은둔자로 변장하여 여러 나라를 방황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 판찰라(pancala)에 이르렀을 때 왕녀 드라우파디(Draupadi)의 배필을 뽑는 시합이 열리고 있었다. 왕자들은 모두 이에 참가하여 무예를 겨루었다. 그 중 가장 활 솜씨가 뛰어난 아르주나(Arjuna)가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고 왕녀를 획득하였다. 전래의 관습도 그러하였지만, 다른 형제들도 그녀를 사랑하였으므로 드라우파디는 다섯 사람의 공동의 아내가 되었다.그런 다음 고국에 돌아가 눈먼 왕으로부터 왕국의 반을 나누어 받아 카우라바는 하스티나푸라에, 판다바는 인드라프라스타(Indraprastha. 현재의 델리)에서 자기의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판다바의 유디슈티라 왕은 인덕이 높아 그의 명성은 매우 높았고, 나라가 번영하였으므로 카우라바의 맏형인 두르요다나는 이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디슈티라 왕은 단지 도박을 즐긴다는 것이 한낱 결점이었다. 이를 안 쿠루의 두르요다나는 숙부인 샤쿠니(Sakuni)와 공모해, 그의 궁전으로 유디슈티라를 맞아들여 대도박을 벌렸다. 판두 왕에게 모든 재물, 우마, 도성, 왕국 나아가서는 이 형제 공동소유의 아내 들라우파디까지 걸게 하여 유디슈티라를 산산히 타도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왕국, 재물, 아내, 형제를 가로챘다.그러나 노왕의 중재로 판다바는 노비가 되는 신세를 면하였다. 근신할 수 있도록 12년 간 숲속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13년째는 신분을 숨기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민가에서 보낸 후 국토를 회복하도록 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다섯 왕자는 아내와 더불어 12년 간 숲에서 살면서 갖가지 기이한 모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13년째에는 변장을 하고 마트스야국에 숨어 들어가 비라타(Virata) 왕 밑에서 하인으로 봉사했다. 때마침 카우라바의 군대가 마타스야국을 침략하여 다섯 왕자는 은밀히 마트스야국을 도와 그들을 격퇴했다. 이 전쟁이 끝나자 13년의 기한을 마치게 되어 다섯 왕자는 그들의 정체를 비라타 왕에게 밝히고 동맹을 맺을 것을 서약하였다. 이윽고 다섯 왕자는 쿠루 왕에게 사신을 보내 왕국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사신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판두족과 쿠루족의 양군은 각각 그들의 동맹군과 함께 쿠루평원에 출전, 18일 간에 걸친 대 전투를 벌였다. 그 격전의 결과 카우라바는 괴멸하고 판다바의 승리로 끝났다. 유디슈티라는 드리타라슈트라와 화해하여 하스티나푸르의 도읍지에서 왕위에 올라 성대한 마제(馬祭)를 베풀고 공정히 나라를 다스렸다. 눈먼 노 왕은 재위 15년 동안 일족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