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 책은 내가 한 학기 동안 ‘서양고전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접한 책들 중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읽기를 시도했다가 포기하기를 세 번쯤 했을 때 수업시간 이 책의 발표를 맡은 조의 발제문에서 짜라투라스라 속에 니체가 여러 가지 독자 유형에 대해 언급해 놓은 글을 보게 되었고 왠지 모를 반발심과 오기 같은 것이 생겨서 다시 이 책을 읽기를 시도하게 되었다. 비록 시도는 불순했지만 이 책을 꼭 다 읽고야 말겠다는 나의 마음은 2부~3부로 갈수록 어느새 니체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뀌어 있었다.짜라투스트라의 끊임없는 방황과 자기 개발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간 지 10년이 지나던 해에 인간세계로 내려와 ‘위버멘시(극복하는 사람, 초인)’로 대표되는 그의 이상에 대해 설교한다. 하지만 대중들의(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다시 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꿈속에서 거울을 가지고 온 어린아이를 만나 자신의 가르침이 왜곡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 하산을 하나 이 사상을 전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다시 느끼고 산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뒤에도 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깨달아 가는 인간의 생과 영원 회귀 사상의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떠나고 방랑한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이른바 죽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에 대해 비판하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진실로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선과 악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꾸준히 그 자신을 초극하지 않으면 안된다.’ (짜라투스트라 2부 자기초극 中)짜라투스트라는 초인이 아니다.니체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위버멘시’에 대한 언급이다. ‘위버멘시’는 그 당시 니체가 보아온 인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간으로서 대지의 주인이 되며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 갈 자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초인 즉 위버멘시는 니체도 아니며 화자인 짜라투스트라도 아니다. 다만 나타나야 할, 나타날 것이라 믿는 자이다. 책에서는 -인간이 ‘몰락’하여야만 구현될 수 있는 자아-라고 나타나 있다.짜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초인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초인이 될수 없으면 초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얼마나 많은 편견과 오해 질서 규범들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판단하기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니체는 이 책에서 바로 우리 사회의 이 부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신은 죽었다.이 말은 내가 이 책을 접하기 전부터 여기저기서 흘러가는 말로도 수차례 접했던 문구였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된 ‘신은 죽었다’는 대사는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니체는 신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지하고 편협하며 일정한 사회적 윤리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좋아하는 대중들이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신을 죽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살았던 당시의 기독교 교리와 성직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당시 뿐만아니라 기독교 사상은 항상 대중들에게 영혼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으며 니체는 이러한 사상이 자신의 육체를 고행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못한 채 죽음후의 삶에 대해서만 가치를 두는 것을 비판한다. 현세의 행복이나 안락을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기독교 사상은 자연적으로 이성을 강조하게 되고 그로인해 사람들 마음속에서 대지-즉 감성이 소멸되어 가기 때문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 들에게 간절히 바라노니 대지에 충실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저승의 희망에 대하여 운운하는 자의 말을 믿지 말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독을 끼얹는 자들이다. (짜라투스트라의 서곡 中)어린이와결혼에 대하여짜라투스트라는 ‘결혼이란 창조한 자보다 나은 것을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다. 이러한 의욕을 지닌 자로서 서로 존경하는 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대중들이 동물적인 육욕이나 잘못된 가치 판단으로 이루어진 결혼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하늘나라에서 맺어진 것이라고 착각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대지의 의미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나이도 그의 아내를 보는 순간 한낱 놈팽이의 소굴로 보였다고 하며 이를 성자와 거위의 결합이라고 칭한다.‘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축배도 역시 쓰디쓰다. 이리하여 사랑은 초인을 동경하게 되고 그대들에게 창조자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게 한다. 초인에 대한 화살과 동경-형제여 이것은 그대들이 결혼하려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를 이러한 결혼을 나는 신성시 한다. (짜라투스트라1부 어린이와결혼에 대하여 中)그렇다면 니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초월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쓰디쓴 사랑의 축배를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제도나 사회 윤리에 의해서도 구속 받지 않는 결혼생활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결혼에 적합한가의 여부를 알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일정한 기간과 작은 결혼을 달라! 부부가 언제나 같이 있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중략) 오 나의 형제여, 결혼의 정원이 그대들에게 힘이 되기를! (짜라투스트라3부 낡은 게시판과 새로운 게시판中)
이 책은 내가 서양고전의 이해를 들으면서 접한 책 중 가장 나를 당황스럽게 만든 책 이였다. 어릴 적부터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던 나에게 그것이 정말 올바른 신앙이였느냐? 라고 묻는 느낌 이였다.나 역시 살아가면서 파프뉘스 처럼 내가 기도하던 것이 이루어 졌을 때 그것을 응답이라고 믿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과 자만심으로 내 신앙을 키워간 것은 아니였을까? 난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부정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맞아 성찬식을 하면서도 내내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고 주변에 서 게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께 이 책을 읽어보셨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마음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내 신앙에 대한 믿음을 흔들리게 만든 이 한권의 책은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스승을 필요하게 만들었다.우선 내가 가장 의문을 가졌던 부분은 수도사 파프뉘스가 타이스를 교화 시키고 구원의 길로 이끌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일로 인하여 그 자신은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였다. 또 그가 타락을 이겨내기 위해 힘들게 고행하던 모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는데 그 고행은 알고보니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악마의 속삭임에 의한 행동 이였다는 점이였다. 이처럼 너무나도 역설적인 두 가지 내용은 책을 세 번이나 읽어본 지금도 명쾌한 해답을 찾아 낼 수 없었다.이 소설은 주인공인 안티노에 수도원장 파프뉘스가 자신의 청춘 속에 머물던 욕정의 대상 타이스를 죄에서 구원 하겠다는 명분으로 속세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려는 마음을 먹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파프뉘스가 떠나기 전 은자 팔레몽은 “마른땅에 끌려나온 물고기가 죽고 말듯이 암자를 떠나 속인의 무리 속에 섞인 수도사도 마찬가지로 원래의 훌륭한 목적에서 멀어지는 수가 있다” 는 스승 안토니의 말을 들려주며 그를 만류하지만 파프뉘스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타이스를 구원하기 위해 속세로 가야 한다고 확신한다.하지만 이것은 파프뉘스의 자만심에 의한 인간적인 확신이라고 보여진다.그가 진정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면 타이스 하나만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 만난 도인과(티모클레스) 자신의 지기였던 니시아스까지도 구원 하려 힘써야 했다. 타이스는 구원하려 그토록 애쓰면서 티모클레스는 방관자의 입장으로 바라보고 니시아스는 경멸의시선으로 바라보는 파프뉘스는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수도사라고 보기 힘들었다. 왜 파프뉘스는 타이스와 니시아스가 똑같이 더럽고 불결한 짓을 했다고 경멸하지만 타이스는 구원하려 하면서 니시아스에게는 무서울 만치 적대적인 시선을 던지는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이는 무의식 중에 타이스와 니시아스 사이를 질투하던 그의 본심에 이끌린 행동이라고 보여진다.주님의 종이라 자처하며 고행을 이룬 수도사였던 파프뉘스가 사랑하는 여인 타이스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정당하게 표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위는 그녀를 자신과 같은 주님의 종으로 만드는 것 이였고 결국 파프뉘스는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수녀원으로 데려가 성녀로써 새 삶을 살도록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자신은 그 후 갈수록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결국 마지막에 흡혈귀로 변해가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부르짓게 된다.훌륭한 수도사였던 파프뉘스가 왜 이렇게 까지 타락하게 되었을까?여기서 파프뉘스의 실수는 자신의 마음을 좀 더 솔직하게 바라보지 못한 데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가 처음부터 오만을 버리고 좀 더 솔직하게 주 앞에 자신의 감정을 고백했더라면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타이스와 함께 주님의 전으로 진실되게 다가갔다면 성녀로써 행복하게 임종을 맞이하는 그녀 앞에서 홀로 사랑을 울부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가 좀 더 신중하게 자신이 타이스에 느낀 감정을 되새겨 보았더라면 그것이 불순한 욕정이 아니라 사랑이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직자인 파프뉘스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가져서는 안 될 죄악일 뿐이였던 것일까? 성경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파프뉘스는 무엇이 두려워 자신이 감정을 주 앞에 솔직히 고백하지 못한 것일까?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 큰 의미의 사랑이며 나 역시 파프뉘스가 타이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나서 당장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파프뉘스가 좀 더 너그럽고 관용적인 마음을 가졌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하지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도 그랬듯이 고전 속의 주인공들은 운명적 사랑 앞에서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며 그것을 통해 작가들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 이였을까?
방송의 개념사전적 의미로는 point of mass 즉 일정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말한다.백과사전에서는 '일반인에게 전달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있다. 방송은 반드시 통신이라는 과학적 의미에서만 해석되는 것 은 아니다. 방송이 하는 사회화과정 영향등도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방송은 여러 차원에서 개념화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접근을 통해 규정을 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리고 이것은 나라마다 다르게 개념화하기도 한다.공공 커뮤니 케이션→공공성 제고의 수단공학 기술적 관점→표현 송신, 수용에 필요한 모든 과정문화적 관점→ 대중문화 취향문화..등정보 산업론적→정보화 사회의 핵심사업 삼권 분립으로 표현 입법 사법 행정권력의 4권력이라고 불림문화 산업론적→이윤을 얻는 행위그러나 가장 일반적으로 방송에는 무선통신의 개념, 방송의 내용, 전송방법, 수용자 등을 고려한 방송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현대에 들어와서 방송은 그 초기부터 계속되어온 기술 선도 매체로서 채널의 발견이나 양적확대, 매체의 융합, 쌍방향성의 강화 과정을 밟아 왔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많은 변화에도 시종일관 중시되는 것은 바로 기술성과 더불어 공익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방송의 기술성과 공익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방송 전파의 희소성이 희석되더라도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은 희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최신 기술의 발달로 방송 채널이 디지털화에 의해 수백 개로 늘어난다고 해도 공익성 이라는 기본 개념은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기술의 발달로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이용자들은 쉽게 기술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매체의 수와 종류가 증가하였으며 대중화, 전문화하는 결과를 낳았다.이는 발전하여 서로 원하는 대상에게만 정보를 전달할수 있는 선별성을 가능하게 하였다.멀티미디어 시대의 방송은 규제보다 자율성이 확보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세계의 각 나라는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방송을 정의하고 있는데 우에 기인하지만 방송 기술을 핵으로 하는 방송환경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방송 개념의 궁극적인 변화가 초래되고 있으며 특히 채널의 융합은 공중파 방송과 뉴미디어 방송이 수용자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차이가 없어져서 기존의 방송 개념이 모호해 지고 있다.다 채널화와 여러가지 제도의 혼재 상황에서 방송이란 `공중' '직접수신'`통신의 수신'이라는 세가지 기존의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즉 방송에 대한 개념을 점차 공익성을 달성해야하는 사회적 도구가 아니라 사적인 소유로서 이윤 획득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기업으로 방송 개념을 정리하는 시각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현재 우리나라가 정해놓고 있는 방송의 개념은 전파차원의 유한성의 의미가 사라진 다채널다매체에 사대에 맞지 않는다. 이제 방송은 전통적인 개념인 `사회적 책임을 띤 사회기구'로서 보다는 '한사회가 존재하는 산업이 수행해야할 일반적인 공익성의 개념'인 것이다.따라서 방송의 개념은 환경과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상호 작용해야 한다.이념의 개념이념이란 이성적 판단으로 얻은 최고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념은 이상과는 다르다.즉 이상은 공상적이고 비현실적 미래 지향적인 반면 이념은 이상과 실천 가능한 현실성과의 중간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방송의 이념추구는 어떻게 하면 방송의 사명을 최고도로 발휘하는가를 탐구하고자 하는 데 있다.매스미디어의 목적이 인간의 지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심미적 능력을 함양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보면 방송에서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천명하는 곳이 곧 방송의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방송의 가치관 문제는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가치관은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의 경영이념과 편성이념이 대립할때 올바른 판단의 기준은 방송 이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좋은 방송과 그 실천 방법"좋은 방송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무엇을 공중에게 주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여기에는 `방송과 공중'에 관한 명제의 검토가 필째는 기술적 차원에서의 소수자로, 방송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나 난시청 지역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방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적 소수자이다.셋째는 수신설비를 수입, 소유하지 못하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소수자와 생활조건 생활환경 때문에 방송에서 제외된 소수자를 들 수 있다.넷째는 신체 장애적인 이유로 방송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서는 특수장치가 부착된 수신시설과 특별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한다.그러나 좀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수자는 방송인의 편견이나 섭입관에 의해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예컨대 인종, 종교, 사상 등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는 사람들, 편견을 가지고 차별대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방송 내용이나 등장인물 등에 대해 이질성을 느끼고 거기에 반발감을 갖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은 보내는 측이나 받아들이는 측이 모두 논리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하는 데서 생겨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해결책을 생각해 본다면..첫째 프로그램 전체의 수준을 향상시켜 지적 소수자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있고.둘째 내용과 형식에 어떤 변화를 줌으로써 다양한 소수자의 기호에 상응토록 하는 방법이 있다.셋째 방송 내용을 가능한 한 대상별로 분류 실시하는 것과넷째 수익성이 높은 프로그램이 질적 균등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거기서 얻은 수익을 소수자를 위한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하는 방법이 있다.마지막으로 미디어 회사가 방송인이나 가치를 고용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비율로 일종 장애나 종교 등에 차이를 두지 않는 고용 정책이 필요하다 하겠다.▶소수자 집단.. 의 정의..소수자 집단이 있다는 것은 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와 보다 큰 특전을 가진 우세한 무리가 있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소수자 집단은 반드시 구성원의 수가 적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점은 식민지에서 인구가 많은 토착민이 인구가 적은 통치자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식민지에서의 토착민을 비롯 이들 소수자는 그 사회의 지배계급 혹은 우월 집단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하거나, 또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어 그 집단적 자기동일성까지도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사회적 약자가 되면, 설사 그 수가 다수라 하더라도 소수자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있다. 소수자의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한 전형적인 예는 '국제인권규약 B 규약'의 제27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규약에서는 소수자집단에 속하는 개개인의 권리보장에만 한정하여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1990년 7월 10일부터 이 규약의 당사국이 되었다.새로운 방송 이념의 설정...방송 기술의 발전, 방송 구조의 변화, 수용자들의 기대 수준 향상과 더불어 방송인들의 가치관 변화에 따라 방송 이념의 정립은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 방송 이념은 위에서 논의한 대로 변화하는 방송 환경에서 도출되는 방송 개념과 사회, 문화적인 당위성이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정립된다.. 따라서 방송 이념은 각 사회의 구조, 방송 환경의 특수성 등에 의해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Habermas 와 Baudrillard의 언론관.Habermas 와 Baudrillard는 Marx의 이론을 재고하면서 사회변화의 중요한 동인은 이분법적인 생산 관계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라는 데 동의한다.하버마스는 '이상적인 대화 상황'을 척도로 사회변화의 정도를 파악한다. 즉 그에 의하면, 대화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아 이상적인 대화상황 조성이 요원해질 때 사회에 내재한 억압의 정도는 심화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는 그러한 불안한 대화체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다만 그의 개념이 다분히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하버마스의 공공영역 개념은 정치적인 그리고 공적인 담화가 이루어지는 공개적인 장으로 정의 된다. 공공영역은 국가와 구별되는 존재로서 국가에 대해 본질적으로 비판적인 담론이 형성되는 곳 주체는 국가권력이나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 사회적 교환의 기능을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즉 사회적 교환에는 상품의 교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하기 위해 필요한 상징체계를 통한 의미의 전달도 포함된다. 그 밖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교환관계에는 반드시 의미의 교환이 발생하며 결국 상징을 이루는 코드는 사회변화를 이끄는 힘이라고 한다.. 보드리야드는 교환되는 상품을 사회적 '기의' 라하여 교환되는 상품은 교환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강조하였다.의미의 교환을 촉진하여 문화가 발전할 때 이를 이끄는 동인은 기술발달이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등장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표현양식은 메시지의 소비와 새로운 코드를 탄생시키는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현대인은 대중화된 매체가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보드리야드는 침국과 수동성이 대중이 정보의 홍수를 적절히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한다.즉 대중은 계속 쏟아져 나오는 정보와, 매체에 의해 형성된 가상의 세계를 흡수하고 외면함으로써 정보 위력을 무력화시킨다.보드리야드는 막스의 생산양식 변화를 기표양식 변화로 설명한다.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징교환이 진정한 사회의 변화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상징교환의 토대인 기표양식은 의미를 공유하는 가운데 새로운 기표양식을 창출시킨다.따라서 현대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교환의 장인 매체는 새로운 기표양식을 구성하고 이끄는 책임을 안고 있다. 하버마스의 공공영역은 오늘날의 방송의 위력을 고려할 때 방송이 담보해야 할 영역이 넓어진다.. 보드리야드의 상징교환도 방송에 접목시킬 경우 방송은 올바른 코드의 생산을 책임져야 할 임무를 띤다.상징체계가 기본적인 경제적 생산양식보다 인간의 문화와 기술을 변모시키는 데 더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다만 방송이라는 사회 문화적 도구가 지니는 이념적 의미는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통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의 자류를 누릴 때 가능하다는 명제를 하버마스와 보드리야드의 언론관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하버마스...에 대해..프랑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