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분석표작품명: 밤으로의 긴 여로 작가명: 유진 오닐이름: 조 은 희 학년: 3학년 학번: 2000019161 1. 희곡의 주제Man is born broken. He lives by mending.The grace of God is blue !인간은 불구로 태어나, 조각난 삶을 기우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접착제는 바로 신의 은총이다.2. 인물*이름: 제임스(아버지) 나이: 55세흥행의 보증수표 대우를 받던 미남배우였다. 제임스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는 호탕한 척 했지만, 집에서는 전기값이 아까워서 집안에 불을 하나씩만 키게 했고 세금이 아까워서 집을 사지 않았던 노랭이다.*이름: 엘란(어머니) 나이: 54세아편중독자였다. 꿈많던 소녀시절에 수녀를 꿈꾸었던 엘란은 미남배우의 청혼에 못이겨 인생의 꿈을 접고서 제임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는 못하였다. 제임스의 공연 때문에 집없이 유랑하던 엘란은 남편이 없는 동안 친구 없이 호텔 방에서 외롭게 지내야 하는 생활을 못견뎠다.*이름: 제이미7살이었던 유진의 첫째 형. 2살박이 동생 에드먼드(Edmund)에게 홍역을 감염시켜 결국 사망케 한다.*이름:에드먼드유진의 죽은 둘째 형이었다.3. 사건의 발단아내를 보고싶다며 성화를 부리는 제임스의 청에 못이겨 엘라는 홍역에 걸린 첫째 제이미에게 동생 근처에는 절대 가서는 안된다는 주의를 주고 잠시 남편을 만나러 외출한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에드먼드는 홍역에 걸렸고 곧 세상을 떠난다. 이 사건은 유진의 가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엘라는 제임스의 성화 때문에 에드먼드가 죽었다며 남편을 원망했다. 그리고 제임스는 제이미가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장남을 쳐다보기 싫다며 집에서 내보내 버렸다. 형이 기숙사가 딸린 학교로 쫓겨간 지 3년 후에 유진이 출생하였다. 유진의 어머니는 유진을 낳고서 심한 출산 후유증에 시달렸다. 출산과정이 난산이라서 그랬다기 보다는 유진의 아버지가 흥행배우로서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호텔방에서 싸구려 의사를 불러 출산을 돕게끔 시킨 것에 대해서 엘란이 심한 분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후 엘라는 마약중독자가 된다.4. 발단의 전개유진의 형 제이미는 미남이었던 데다가 대사를 암기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일찌감치 맹배우감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부모에 대한 반항기 때문에 제이미의 학창시절은 술과 방황으로 얼룩져 갔다. 유진의 형 제이미는 알콜중독 상태에서 창녀와의 섹스에 탐닉하는 폐인 생활을 하다 45세에 세상을 떠난다.유진은 어머니 엘란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마약을 끊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제임스에 대해서는 돈 때문에 어머니를 그렇게 방치해서 결국 마약중독에 이르게 했다는 것 때문에 심한 분노감을 가지고 있었다.5. 위기결국 유진도 사춘기부터 방황하기 시작해서 술에 찌들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지만, 갖은 기행으로 소위 말하는 전설적인 인물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술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기숙사를 “쓰고난 다음의 콘돔”으로 장식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고 또 술에 취해 기물을 파괴해서 고발당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다. 결국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업석정 불량으로 퇴학당하게 된다.6. 절정그 후로 유진은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놀라울 정도의 알콜중독 상태에서 5년의 세월을 방랑하며 밑바닥 생활을 한다. 유진은 금광을 찾겠다는 꿈을 간직하고서 떠나온 여행이 아무런 결실도 못 맺은 채 좌초되자, 그 후 사실상 구걸하며 지내게 된다. 그는 항구에 정박한 배에 다가가 깡통을 들고서 음식을 채워달라고 악을 쓰기도 했으며 주로 노숙자를 위한 구호시설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스프와 5센트짜리 위스키로 끼니를 해결했다. 그는 결국 결핵에 걸렸고 병자가 되어 집으로 귀향하게 된다.7. 대단원우여곡절 끝에 게이로드(Gaylord) 요양원에 가게 된 유진은 거기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데이비스(Davis) 박사를 비롯한 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그는 당시로서는 치명적이었던 결핵과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치료 과정에서,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이처럼 게이로드 요양원에서 가슴뭉클해지는 무언가를 경험한 그는 생애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그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소의 원류를 찾아 실크로드를 가다’는 석굴암 본존불 서산 마애삼존불 등의 고졸한 미소가 서기전 5백년까지 초기 그리스 조각에서 발견되는 ‘아르카익스마일’과 같은 흐름이라고 규정하며 석굴암 본존불에서 출발, 그 미소의 발상지로 추적되는 그리스 아테네까지 2만㎞ 실크로드를 따라 미소의 근원을 하나씩 역추적해 가는 다큐멘터리였다. 이 프로에서는 중국과 파키스탄 불상 속에 들어있는 미소들에 대한 현지 박물관장, 고고학자들의 분석과 고증을 통해 그리스·로마 문화의 미학을 의미하는 ‘아르카익 스마일'이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 상이나 아폴로 상에서 시작해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반도로 유입됐다는 학설을 설명해 주고있어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특히 중국 운강 석굴 서안박물관 및 인도 마투라박물관 사르나트 불상 등과 대륙 동방 끝에 위치한 석굴암 대불을 함께 소개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모습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 미소만은 이어졌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실크로드를 거쳐 한반도에서 완성된 아르카익 미소의 역사를 통해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고자 하는 제작진들의 의지를 보며 고개가 숙연해질 정도였다.우선 그리스의 쿠로스상부터 살펴보면 이는 아르카익 시대(BC700~480) 고식(古式)이라는 뜻으로, 이 시대에는 아크로풀리스신전에 바치는 봉납상(奉納像)이 무수히 제작되었다. 이들 상에는 남성 나체상과 옷을 입은 소녀상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정면성(正面性)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를 바로 아르카익 스마일이라고 하는데 그 치졸한 안면표정은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물씬 풍겨 보는 이로 하여금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또한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특히 아르카익 초의 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었다. 즉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었음이 바로 그 증거였다고 한다.다음으로 인도의 불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정벌을 계기로 간다라에서 인도의 마차라와 거의 동시에 불상의 역사상 최초로 조성되어 미소가 탄생되었다고 한다. 물론 인도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도 나름데로 전통을 기반으로 삼아 이를 조화 융화시켜 인도 특유의 불상과 예술을 창출해 내었고 거기서 한 층 더 세련되면서도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이제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중국 용문 석굴을 살펴보도록 하자.이는 돌 특유의 속성과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그 역사가 매우 깊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난 동양이 서양보다 월등히 높고 깊은 석조미술의 예술성과 역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석주를 비롯하여, 간다라의 석불, 아잔타의 석조(石彫) 등과 함께 바로 이 용문석굴(룽먼석굴[龍門石窟])등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의 미소인 은은한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것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임에도 불구하고 시작부터가 고요한 적막감마저 들게 했다. 가야산과 상왕산 자락에 휩싸인 작은 산골마을, 그곳에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국보84호)이 있었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감 가득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 신비감이라는게 서산마애삼존불의 해맑음이 보여주는 감흥에 비할 수가 없었다. 좀 더 꼼꼼히 살펴보면 도톰한 양 볼과 뎅그런 두 눈, 넓적한 코와 은은한 미소, 연꽃 문양의 화려한 광배를 뒤로하고 있으나 그 모습은 필시 소박했던 옛 백제인의 모습을 닮았을 것이리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들 중 석탑, 부도와 더불어 상당수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마애불이라고 한다. 마애불이란 절벽이나 암반에 새겨진 불상을 말하는데 부처의 의미만 보고 생각한다면 종교적 성격이 다분하겠지만 그 모습에는 당시 바위에 불상을 새기던 석공 또는 같은 시대를 공존했던 사람들의 심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것만 같았다. 서산마애삼존불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결코 근엄한 부처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온유하며 인심 좋고 넉살스러운 모습, 영락없는 백제인의 모습이며 당시 이 땅을 살다간 수수한 민초들의 모습이였다.수 백년의 걸쳐 머나먼 동방에 나라 한반도에 이른 아르카인의 미소가 소박하고 고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삼국시대의 미소는 실크로드 어느 지역의 미소보다 정감이 넘치고 인간적이었다. 이 미소를 선인들은 휴대산 건너 일본열도에 전해주기도 했다. 삼국통일의 의협을 이룩한 통일신라 석굴암의 미소. 그 미소는 태양이 새롭게 떠오르듯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의 미소를 보내주는 것만 같았다.'고선지'실크로드가 번성했던 시기, 중앙 아시아에는 동양과 서양의 중개 무역으로 富를 축적했던 나라 석국(石國)이 있었다. 구 소련 연방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가 바로 석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석국은 750년 이민족의 침략으로 왕은 살해되고, 도시전체가 잿더미로 변했다. 옛 왕궁의 잔해는 그 침공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의 성벽중간층에는 아직도 당시의 불탄재가 손에서 부스러지고 있었다. 현지고고학자 부르야코프박사는 이 재가 바로 750년 침공의 흔적이라고 증언한다. 실크로드의 한 국가를 이렇게 폐허로 만든 침략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지만 곧 그 장본인은 바로 고구려 출신의 장수 '고선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머나먼 중앙 아시아까지 오게 됐으며, 왜 한 국가를 이렇게 잿더미로 만든 것일까?이 49일간에 걸친 답사기간 중 국내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고선지 관련 문서가 발견됐는데 이 문서는 중국 신강성 투르판 지역의 고선지 부하였던 장무가의 무덤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는 중국신강성박물관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이 문서에는 고선지가 중앙 아시아를 침공했던 사실을 담고 있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고선지 원정의 루트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문서의 제작연도는 751년 바로 고선지의 석국 침공 다음해였다.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역사의 현실들이 참으로 신기하고도 흥미로웠다. 이런 나와 같은 흥미 때문 이였는지 취재팀은 고선지의 파미르원정의 대미를 장식하는 파키스탄의 힌두쿠시산맥 탄구령을 직접등반 고선지의 길을 직접 카메라에 담은 것을 보면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실로 대단하나는 것을 느꼈다.빙하로 덮여있는 해발 4580미터의 고개는 고선지의 부하들이 더 이상 전진을 거부했던 곳이라고 한다. 20세기초 이 고개를 실제 등반한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대탐험가인 스타인은 여기에서 바로 "고선지 원정은 나폴레옹의 알프스원정을 능가한다"라고 기술했다는데 그의 방대한 저서 곳곳은 고선지의 원정에 대한 찬사로 채워져 있기도 했다. 고산증에 고통받아 등반이 지연되던 이곳을 고선지는 일만(一萬)의 기병을 이끌고 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중국 사서가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던 고선지를 고구려인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바로 고구려 유민 2세였다. 고선지 가문이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곳은 바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중국 서부 감숙성의 무위라는 도시였다. 고비사막과 이어지는 곳인 이 곳은 멸망한 조국에서 강제로 끌려간 포로의 아들, "고선지". 그가 자신의 가장 찬란한 업적이었던 북부 파키스탄 원정을 마치고 안서 도호부로 돌아왔을 때, 그가 들은 말은 "개똥같은 고구려 노예"라는 욕설이었다. 나라가 망했어도 끝까지 당에 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이 두려워 唐은 이들을 사막으로까지 끌고 갔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 후손에게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후에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였음에도 그들의 문화에 녹아버리지 않았던 자주성 시작 이였을까? 어쨌든 강제로 사막으로 끌려가고 다시 당의 변방을 지키는 병력원으로 이용되던 고구려인들 중 두각을 나타낸 고선지일가. 고선지는 몇 차례의 대원정을 성공하자 747년 드디어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안서대도호부의 안서절도사에까지 오른다. 포로의 아들은 실크로드의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의 세 길을 모두 장악한 실크로드의 지배자로 떠올랐다.
1. 서문현대 연극의 아버지인 아토냉 아르토.그의 독특한 인생만큼이나 그의 문체는 난해하고 어려웠지만 형언하기 힘든 강한 매력을 지닌 것 또한 사실 이였다. 그의 사상은 굉장히 추상적이며 비논리적, 관념적이여서 처음부터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연극이론들이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시켰다.그의 연극이론 저서라 할 수 있는 은 각종 현란한 수사와 비유들로 가득 차 있어서 그가 시인이였단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줄 만큼 시(詩)적이다.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 한 점은 그의 이론과 사상 그리고 그의 인생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눈에 비춰지는 아토냉 아르토는 그다지 화려하지도 관념적이지도 않았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내게 비춰진 아르토는 유명한 업적을 이뤄낸 연극 이론가, 시인이기 이전에 고단한 삶에 지쳐 안식처를 찾으려는 한 나약한 인간이였고 바로 거기에 우리가 추구함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우리 삶으로써의 '연극'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만 그것을 발견한 것뿐이었다.그렇게 절망의 밑바닥까지 경험을 했던 아르토의 연극 이론 안에는 그의 치열한 연극정신이 녹녹히 스며있으며 그것이 연극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컸다. 오늘날까지도 아르토와 그의 연극 이론은 연극 분야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창조적 아방가르디스트들에게 정신적 바탕이 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아르토에게 있어서 예술 혹은 연극의 존재의의는 바로 '우주의 재창조' 에 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엄숙한 실현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표상의 세계, 추구되어야 할 정신의 세계, 새롭게 구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카오스의 세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부단히 창조의 세계를 포착해야 한다. 잔혹연극이 혹독하고 엄밀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새로운 삶의 정수를 발견하기 위해 현실의 부조리와 관념의 절망을 초극하려는 지독히도 인간적인 몸부림이기 때문일 터이다.이 아니라 자기 삶의 내면으로 쏠리게 된다.1936년 하바나를 경유하여 2월에 멕시코에 도착, 4월경부터는 오지의 타라우마라족의 땅으로 들어가 그들의 마술을 접한다. 이 시기는 비교(秘敎)주의적 시기로 아시아나 멕시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과 이동이 그의 글에 나타난다. 또한 이 때, 아르토는 자신의 첫 선언문을 발표한다.1937년 신비한 목적으로 아일랜드에 건너갔으나 덤블린에서 정신병자로 간주되어 병원에 수용된다.1938년 [연극과 그 이중 Theatre et son Double]이 간행된다.정신병원에 감금된 이후 9년간 여러 도시에서의 정신병원 생활이 지속된다. 계속된 저기 쇼크 치료와 투약으로 피해망상에서 차츰 회복되어 [반 고흐-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Van Goho le suicide de la societe]라는 뛰어난 텍스트를 산출해 내기에 이른다. 말년의 2년 간은 비교적 평온하게 보냈으나, 그는 이미 직장암에 걸려 있었다. 1948년 3월4일 이브리의 요양소 침대 밑에서, 한 짝의 구두를 손에 쥔 채 죽어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3. 아르토의 연극론은 아르토가 1948년 정신 요양소에서 죽기 전까지 1932-38년 사이에 연극의 혁신을 위해 고심했던 생각들을 강연 혹은 원고를 통해 발표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그의 사상은 체계적이지도 교조적이지도 않다. 그는 이 책에서 사상가, 이론가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예언자, 시인으로써 이야기 하고있다. 그의 비정상적이면서도 풍부한 감성과 강렬한 상상력을 느낄 수 있다.이제 그의을 살펴보도록 하자.1)연극과 페스트"연극은 페스트 같아서 전체에 영향을 주고 동일한 방법으로 이들을 전도시키므로 환각적이며, 전염병 적이다. 페스트같이 연극에도 기세가 만만한 그 무엇인지 모를 독 같은 것이 있다. 페스트는 잠자코 있는 잠재의 무질서한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가 불현듯 가장 '극한적인 제스처'로 확대되고 연극은 다른 하나의 제스처를 택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밀고 나간다. 페스트와 같이 유와 무, 가능성과 이 사용했다. 발리극단 연기자들은 종교처럼 연극을 숭배하도록 엄격한 훈련을 거친 그룹으로 무아경의 상태에서 무대에 등장했고 또 극중인물들은 이야기의 구성과 무관했으며 단지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상황을 표현했다. 동작들은 단편적이며 부분적인 것들을 동시에 보여주도록 구성되었으므로 상황 하나 하나가 완전한 개체로서 흥미를 주었다. 논리적인 연속성을 기대하지 않고 단편적인 것들을 독자적으로 완전하고 결정적인 복합적 동작들을 만들어냈다. 발리극단 연극의 목표는 현실을 초월하고 내적인 자아와 접촉하는 것이었고 잠재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가면을 벗는 것이었다. 이것만이 무대 위에 선 연기자들의 유일한 현실이었다.발리극단의 출현은 아르토의 기본신념을 확인시켜 주었다. 즉 연극은 주술적이며 연출자는 무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연기자는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발견해야 하며 또 하나의 자신, 즉 거울에 비친 자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두 개의 음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여 연기자는 진정한 자아, 참된 심력을 발견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침투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가 맡은 바 배역에 생명을 불어넣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계속 갱신할 수 있고, 근본을 이해하며 그것의 형태를 재창조 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자아를 제한하는 억압과 금기를 해방시키는 한편 연기자는 관객의 집단 잠재의식을 떨쳐냄으로써 관객뿐만 아니라 연기자도 변형시키는 상호관계를 낳는다.4)동양연극과 서양연극일반적으로 사실주의자의 환상을 고집하는 서양연극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연극은 일부러 사실주의적인 환상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연기자들은 일반적인 무대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플랫폼을 이용했으며 대사 대신 리듬이나 소리를 이용했고 관객은 '사실성' 보다는 연기자들의 연기에서 감동을 받았다.또 아르토가 희곡 텍스트를 연극의 부차적 요소로 간주하고 무대 자체의 기호체계들과 그 역동적 기능에 역점을 두게 된 것은 바로 언어, 즉 이성에서 연극을 해방시키고자 함이며 그러한 그의 생각은 동양연극에서 영향을었다. 아르토에게 신화는 한계가 뚜렷한 질서를 나타낼 뿐 아니라 자신의 것과는 다른 감수성을 표현해 주었다. 서양의 신화는 보수적이며 안정되어 있고 귀족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낭만적이며 유동적 혁신적인 것으로 보았다.4. 아르토의 잔혹연극론1) 잔혹극의 정의잔혹극이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겨져 있는 '진정한 생'에 대한 갈증, 자신의 뿌리로 회귀하고픈 욕망, 우주와의 합일의 꿈 등을 실현시키려는 연극적 모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선 마비된 인간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뒤흔들어 깨우고 다음에 이성의 찌꺼기를 씻어내야 한다. 그러한 청산산업을 거친 후에야 관객은 영적 인식을 할 수 있고, '정신의 순수한 지점'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잔혹극은 육체와 정신, 감각과 지성을 분리시켜서는 안되고, 우리의 원초적인지가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부차적으로 감각적 충격을 사용할 수도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인체의 모든 조직에 호소하기 위한 거대하고 질감있는 스펙터클이 필요하며, 다른 한편 새로운 정신에 사용된 모든 사물과 제스처와 기호들을 강하게 동원시키는 일이 요구된다.2) 아르토가 말하는 '잔혹성'이란?육체적 혹은 도덕적 잔혹성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새디즘도, 피도 잔혹연극의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잔혹'의 개념은 오히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서 비롯된다. 세계의 근원적인 이원성, 분리, 집착,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은 일종의 잔혹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 삶을 위한 우리의 노력, 그 노력에 의한 존재도 잔혹이다. 에로스적 욕망도 그것이 우연성을 불태우니까 잔혹이고, 죽음, 소생, 변모도 잔혹이다. 사물들의 응집력, 생각이 창조로 이어지는 힘 등은 잔혹에 의한 것이다. 1932년 11월9일 친구 장 폴랑(Jean Paulhan)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르토는 자신이 삶을 지배하는 힘 혹은 '필연성'을 말하고자 할 때 대신 '잔혹'이라고 말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잔혹'은 우주적 엄격성, 가차없는 필연성에 다름 아니다를 더한다.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 신체의 전 조직과 관련하여 그것들 상호간의 교감이나 상징을 이용하여 구성한다. 그리하여 말과 제스처와 표현의 형이상학을 창조하는 것이다.다양한 표현기술의 사용(대화체로 꾸며진 말들 이외의)은 관객이 모든 이성적 지표를 잃어버리는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지도록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관객은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가는데,그 소용돌이는 원초적이며 제의적인 감정을 되찾도록 해준다.=일종의 주술-음악장치-악기들은 무대장치의 한 구성원이 될 수 있듯이 그 자체가 오브제로 사용될 것이다.음성기관을 통한 소리. 익숙하지 않은 음의 특질과 진동 탐구. 망각하고 있던 과거의 악기 사용. 새로운 악기 개발 즉 악기들은 음악의 범주를 벗어나서 금속의 새로운 합금이나 독특한 융합에 기초하여 새로운 음역에 도달할 수 있고, 찌르는 듯한 참을 수 없는 소리와 음향들을 산출할 수 있다.-빛(조명)-불화살을 동시다발로 쏘아대는 것처럼 빛의 파장효과가 빛의 다양한 층위를 통과함으로써 그 파장 속에서 빛줄기를 퍼뜨리는 새로운 수법이 모색되지 않으면 안된다. 특수한 색조에 따르는 성질을 만들어내기 위해, 즉 뜨거움과 차가움, 분노와 공포 등의 성질을 창조하기 위해 조명에서 미묘함과 강렬함 그리고 불투명함의 요소들을 다시 끌어와야 할 것이다.-의상-가능하면 현대적인 의상을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물신숭배나 과거취향 때문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비록 옛 의상들이 어떤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오직 제의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몇몇 의상들은 탄생 당시의 전통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아름다움이나 외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무대와 객석-무대와 객석을 분리하는 장벽이나 칸막이를 모두 제거시킴으로써 공연장을 하나의 유일한 장소로 바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재의 극장을 포기하고 헛간이나 창고를 선택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교회 건물이나 성지, 티벳 사원들 모양의 건물을 짓도록 했던 건축술에 따라 공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