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林과 士林政治目 次머리말 3. 士林과 黨爭1. 兩班과 士林 4. 士林의 政治思想2. 士林과 士林派 맺음말머리말조선후기는 士林의 여론정치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士林이란 어떠한 부류이며 士林이 지향하는 정치란 어떠한 것인가?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첫째, 士林의 개념이 무엇이며 士林과 兩班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인식체계에도 수정되거나 보완되어야 할 문제점은 이 시기에서 사용되어온 ‘士林'이란 역사적 용어는 오늘날의 현재적 관점에서 해석할 경우, 비조직체로서의 ‘士林'이란 개념과 조직적인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士林派'란 두 가지 개념으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이 둘이 별 구분의식 없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이후 등장하게 되는 士林派이란 어떠한 집단인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셋째, 士林政治의 특성인 黨爭에 대해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黨爭이 나오게 되는 배경인 士林의 정치사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1. 兩班과 士林조선 후기의 정치는 士林의 여론정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를 士林政治라고도 한다. 士林政治를 논하려면 우선 士林의 개념이 먼저 규정되어야 한다.士林의 본래의 개념은 ‘士大夫之林’, 즉 사대부의 무리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였다. 文官의 5품 이하를 ‘士’, 4품 이상을 ‘大夫’라 하였으니 士林은 문관 관료의 무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麗末鮮初에는 문관과 무관을 통틀어 사대부라고도 하였으니 士林이라면 문?무 양반관료 전부를 뜻하기도 하였다. 사대부층이 넓어져 관직에 다 수용할 수 없게 되자 관직이 없는 지식인 선비들이 많아지게 되어 이들을 士林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兩班이 되기 위해서는 혈통과 관직이 필수요건이었지만 16세기 이후에는 儒敎敎養만 있어도 양반이 될 수 있게 되어 이들이 士林의 구성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兩班은 문?무관 뿐만 아니라 그 일족을 의미하기도 하였으니 士林은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까지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士林은 士族?士類와 함께 양반층을 지칭하였으원이며, 조선초 집권 官學派에 밀리어 낙향, 程朱學에 몰두하는 한편 在鄕地主層으로 성장하면서 세조의 찬탈에 동조한 훈구파를 비판하고 유향소를 통해서 재기를 준비하다가 김종직이 성종의 知遇로 등용, 그 門徒가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각하였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에 회의를 가지고 향촌에 은거하여 ‘沈潛性理'하는 학문적 자세와 후진 교육활동에 치중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훈구파 주도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하에서 수행된 士林의 이러한 노력은 향리 주도하의 향촌사회를 在地士族 중심의 향촌사회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향촌사회는 장차 집권 훈구파에 대응되는 세력으로서의 士林을 배출하는 공급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士林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당시 유일한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지위를 누려오던 훈구파에 대해 견제 내지 압력 기능을 행사함으로써 기존세력으로부터 그 상대성을 인정받게 될 만한 수준의 집단이 된 것은 성종 15년 이후이다.그러므로 15세기 후반기부터 士林은 역사적인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세조의 집권으로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18년간 250명의 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가 정권을 차지하자 여기에서 소외된 부류들을 士林派라 부르면서부터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주로 지방에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사류였다.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 대신하여 신진사류들을 불러 들였으며, 예종이나 성종도 훈구파를 누르기 위하여 신진사류들을 불러 들였다. 김종직과 같은 사류들이 그들이었다. 정계에 새로운 피가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사림정치가 건국 후 1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야 본격화된 것은 이 때가 사회의 안정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건국 초창기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사회개혁과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고, 사회의 안정기에는 이상적인 德治가 요구되어 유교 본래적 민본정치를 주장하는 파가 등장하게 되는데 즉, 창업초는 민족의 외향적 성장에 기여한 패도가 대두하고 안정초는 민족의 졌다. 김종직은 언관직을 맡아 왕을 보도하며 훈구대신의 전횡을 약화시키어 왕권의 안정에 기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에 염증을 느낀 국왕이 반동적으로 훈구 세력과 협력하여 몇 차례의 士禍를 일으켰다.그러나 士禍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어떻든 士林派의 정치적 성장이 현격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17세기 이후의 사림정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오히려 사림파의 세력은 역사적인 도도한 물결을 타고 훈구세력을 넘어뜨리고 사림의 시대를 열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훈구파가 주도하는 중앙중심의 정치가 서서히 사림파가 주도하는 지방중심의 정치로 전개되었다.훈구 세력과 權臣이 물러나자 士林은 적대 세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士林은 스스로 분열하여 朋黨을 이루어 서로 다투게 되었다. 이것이 黨爭이다. 선조 초년에는 비록 士林으로 전향하기는 하였으나 명종조에 활동하던 구신 세력인 전배와 새로 진출한 士類들인 후배들 사이에 黨爭이 벌어지게 되었다.3. 士林과 黨爭)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시대 중앙집권적인 양반관료제 사회에 있어서 臣僚들 간에 朋黨을 조성하여 黨爭을 일으키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大明律 吏律 奸黨條에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자는 모두 목을 베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신성시되는 조선 사회에 있어서 국왕과 신료는 하늘과 땅, 지배?복종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신료들이 派爭을 일으키는 것은 금물로 되어 있었다.그러나 신라 통일 이후로 한번도 정복 왕조가 들어선 적이 없는 한국에 있어서 귀족이나 양반과 같은 신료들의 세력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道學政治가 성행하던 士林政治 시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유교 국가에 있어서 통치자 그룹인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도덕적 수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지식인 관료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文治主義 국가에서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기도 하였다. 도덕적 수양은 신료체가 되자 朱子의 兩是兩非論이 도입되어 다른 붕당 가운데도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으니 군자들만을 들어 써야 한다는 이른바 調劑論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전제 왕권 하에서 원칙적으로 붕당이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사림들의 정치적인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공공연히 붕당을 공인되는 정국으로 되었다. 이것이 조선 후기 黨爭의 실상이었다.그런데 朋黨은 강력한 學緣性과 地緣性을 가지고 있었다. 朋黨의 ‘朋’은 ‘동사’?‘동문’의 ‘師弟’?‘朋友’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붕당은 강한 학연성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다시 기호?영남 등 지연성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붕당의 ‘붕’이 이와 같이 좋은 뜻이라면 ‘黨’은 ‘도당’?‘파당’?‘사당‘?’偏黨’을 의미하는 나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끌어들이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배척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붕당이라 하더라도 ‘당’ 자가 들어가면 편당이 되어 처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朋黨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朋黨의 폐해를 지적하고, 자기 쪽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朋黨을 한다고 우기는 경우가 많다. 君弱臣强의 정국에서 朋黨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펴놓고 파당을 짖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왕은 朋黨을 미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를 억제하려고 애썼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여 제어하지 못하였을 뿐이었다. 國王의 존재가 양반 사림들의 지지 위에 서 있어서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사림들이 국왕의 전제권은 인정하지만 도학이 국왕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여겨 도학에 어긋나면 국왕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이처럼 17세기 이후 在地士林들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향촌차지구조를 통하여 그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적게는 지방사회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크게는 중앙정치에 관여하였다. 黨爭은 바로 이러한 士林政治의 특성을 반영한 권력투쟁의 전형적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4. 士林의 政治思想조선전기의 정치사상은 주로 군주와 신하파 중심의 지배체제 내에서 소외와 고립을 체험한 김종직에게서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상실한 과도기적인 대응의식 내지 자세가 엿보이는데, 이로서 부정부패한 훈구세력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성향은 ‘修己'와 ‘治人' 취향의 두 갈래로 갈림을 보게 되었는데,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순서에서 治人에만 골몰한 훈구세력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였다.사림파는 經學, 특히 성리학의 탐구에 주력하는 세력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며, 그것도 그들의 입지가 확고하게 다져진 뒷날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건국 후 1세기는 성리학 자체의 깊이를 천착하기보다는 그 정착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준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朱子家禮』의 보급과 같은 실천적인 면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받던 김종직대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음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의 학문적 성향이 지닌 양면성은 그의 문인대에 와서는 사장을 추구하는 부류와 經學, 즉 성리학을 탐구하는 부류의 두 갈래로 분기, 계승되었다. 이들의 현실대응의식은 그 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적극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김종직은 훈구파가 정치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현실에 적응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굳혀가기 위해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우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는 현실 개혁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자족적이고 현실 안주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는 그가 성종 15년(1484) 이조참판이 되어 “관을 태거하고 현량을 천용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고는 하나, 문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천거로 진출한 사림파 인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다. 이같은 그의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는 학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문하도 두 갈래로 갈리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하나는 보수적?고답적이며 소극적인 성향을 띠면서 ‘修己'를 지향하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治人’ 경사의 계열이었다. 이는 것이다.
Ⅰ.머리말渤海는 한때 海東盛國으로 불릴만큼 번영했던 국가이다. 발해는 전성기에는 그 영토가 현재의 중국, 북한, 러시아에까지 걸쳐 있었으며 698년 건국한 이후 926년 거란에 멸망할 때까지 오랜 기간 번영을 구가하였다. 이런 이유로 渤海史 연구는 중국, 남한, 북한, 러시아는 물론 발해가 사신을 빈번히 파견하였던 일본에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내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관심이 고조되기도 했고 혹은 역사에서 배제되기도 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 실증적 연구가 시작되었고 8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국외의 발해사 연구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간헐적으로 발해사 연구가 있었으나 전문적 연구는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세기말에 실증적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소강상태에 있다가 1970년대에 들어 새로이 연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에서는19세기에 이미 나타나 1950년대에 들어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연구 주제를 살펴보면 지리고증, 대외관계, 유민활동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는 문제는 발해사의 귀속문제이다.)이러한 국내외의 연구의 진행 속에서 渤海史는 많은 부분이 논란의 여지로 남아 있고 관련 국가들의 자기역사의 일부분으로 수용하려는 이해관계에 따라 그 주장을 달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는 여러 가지 주제가 있으나 이 논고에서는 渤海의 滅亡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渤海의 滅亡에 관한 연구는 이미 여러 가지 시각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주요한 견해들을 살펴보면 화산 폭발로 인한 국력 약화라는 견해, 지방제도의 특이성에서 기인하였다는 견해, 遷都와 관련짓는 견해, 唐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의 붕괴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 都城의 방위기능에 관한 견해 등 대략 다섯 가지 정도로 축약될 수 있으나 그 주류는 민족의 이중적 구성에 대한 문제와 통치계급의 내분의 문제로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 일본과 중국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다.)이성과의 종합적 고찰과 보완은 발해의 멸망이 발해 내적 문제와 외적 문제의 복합적 요인의 실패에 의한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Ⅱ.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한 고찰과 종합적 시각1.외교적 대응의 문제渤海의 마지막 王인 大??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新羅가 後三國으로 분열되어 新羅 ?泰封 ?後百濟가 세력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唐도 907년 朱全忠에 의하여 멸망하고 923년 後唐이 세워졌다. 이러한 혼란은 거란이 발흥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여 주었고 이에 따라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발해는 거란의 이러한 팽창에 국가적 위협을 느끼고 있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발해국왕 大??은 본래 奚?契丹과 함께 脣齒를 이루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란 태조가 처음에 일어나 8部를 병탄하고 이어서 군사를 내어 奚國도 병탄하였다. 이리하여 대인선이 두려워하여 몰래 新羅諸國과 結援하였다. 거란 태조가 이를 알고 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葉隆禮, 《契丹國志》 卷 1 ) )즉 발해는 거란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고 911년 직후 신라와 연계를 하게 된다.) 그러나 발해의 의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이 보인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공격할 때 신라가 참전했던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지만 일반적인 견해를 따르면 발해의 공격에 신라가 참전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部族表와 屬國表에 있다. 이를 정리하여 보면 911년경 신라와 발해가 비밀리에 結援 하였으나 이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915년 10월에 신라는 태도를 바꾸어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가 한참 공백기를 두어 925년 11월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925년의 파견은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기 시작한 12월 16일 보다 26일 앞선 11월 20일이다. 따라서 이 사신은 거란의 발해공격과 관련된 모종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신라와 연계하려 했적인 대책수립은 아닌 것이다.이것 외에도 발해의 외교노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924년과 925년에 後唐에 사신을 보내는 기록이 보인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러한 사실이 거란과 충돌한 직후 大?選 王朝가 대응책 마련에 腐心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물론 타당해 보이지만 발해의 체계적 대응의 부재라는 일면도 엿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였다고 느끼면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을 시도해야 타당하다. 발해의 이러한 태도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발해의 내부 사정에 기인하지 않았나 한다. 다음의 두 단락을 보자. 이것은 거란과 발해 사이에는 오랜 분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거란은 발해와의 924년의 대치 이후 925년 거란 태조가 서방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개선할 때까지 발해공격을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서방정벌이 발해공격의 정지작업으로 행해진 것인 만큼 12월16일에 조서를 내려 직접 발해의 중심부 공략에 나섰다.)㉡거란의 東京遼陽府가 원래 발해의 땅이었으나 거란 태조가 20년간 힘써 싸워 얻은 것이라는 기록과 926년 발해를 ‘다시’치려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거란 태조가 여러 번에 걸쳐 발해를 공략하였음을 알 수 있다.)㉠과 ㉡으로 볼 때 발해는 거란의 장기간에 걸친 침입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음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 대응책을 강구 했어야만 한다. 더구나 뚜렷한 대안 없이 실시된 924년의 對契丹 공격)은 분명 거란으로 하여금 반드시 발해를 정벌해야 하는 자각을 일깨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는 감정적인 대처를 함으로써 다가올 침입의 계기를 확고하게 하였다. 더구나 이 사건 이전에도 분명한 거란 침입의 징후들이 있다. 발해에서 이러한 징후들을 감지하였다는 사실은 위에서 살펴 본 사신파견으로 보아 자명하다. 그렇다면 발해는 외교적 노력 이외에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을까? 이것은 사료의 한계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 안일한 외교적 대응으로 볼 때 각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발해 내부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발해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국제적인 연합의 실패와 내부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그 지배세력이 고립되어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고립의 상황은 내?외적으로 거란의 침입에 대해 도움을 받을 만한 기반이 상실되었음을 뜻하고 결과적으로 예견된 거란의 침입에 아무런 원조를 받지 못하고 쉽게 무너졌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거란의 침입 이전에 실질적으로는 발해가 무너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전술상의 문제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는 발해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의 일부가 될 수 있겠지만 충분하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발해는 예상되던 거란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침공 한 달여 만에 무너졌다. 이것은 역사상 그 예를 살펴보기 어려운 일이다. 이에 거란의 발해침공전술과 발해의 군사대응상의 문제라는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공격전술상의 탁월함과 방어전술상의 실패라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를 살펴보자.910년을 전후하여 거란이 遼東으로 진출하자 발해와 거란사이에는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리하여 918-919년과 922년에 거란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발해의 영토를 점령하게된다.)이와 같이 거란이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발해영토를 점령할 때 발해는 924년 5월 거란의 통치권인 遼州를 공격하고 2개월 뒤 거란의 반격이 이어지나 거란은 아무런 소득 없이 퇴각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거란은 이를 계기로 발해에 대한 전면침공을 계획하게 된다.) 이리하여 925년 서방정벌을 완수한 거란은 다시 발해를 공격하는데 이전에 발해와 충돌한 경험을 되살려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거란은 西邊의 전통적인 방비체제와 이전의 충돌과정을 참고하여 직접 수도를 공격하는 방법을 취한다. 단 보급로 차단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먼저 부여부를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란의 공격과정에 대해서는『遼史』本紀에 잘 나타나 있다. 거란은 925년 윤 12월 4일에 木葉山에 제사를 지냈으며 14일에는 烏山맞게 성이 축조되었다. 발해는 이와 같이 수도 방어를 위한 국가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거란의 우회적인 기습공격에는 그 군사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다.) 발해수도의 함락을 설명하는 이와 같은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모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정치사적인 문제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적 문제(내부적인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간략하게 몇 가지만 살펴보자.발해의 부여부는 발해의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신당서 발해전에 기록된 부여부는 옛 부여국의 고지로서 扶州 仙州의 두 州를 관할하고 있었고 거란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으므로 발해는 항상 여기에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놓고 그곳을 방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더구나 거란의 침입이 이미 임박하였고 발해로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여부가 너무도 쉽게 함락 당한 점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역시 정치적인 문제와 연계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여부가 쉽게 함락된 사실로 전략적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자각하고 있던 부여부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거란에 대하여 위기를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은 발해 내부적인 요인에서 기인하였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결국 단순한 군사적 대응상의 실패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김은국씨의 논문에서는 과거부터 주장되어 왔던 주장들을 진부한 것으로만 인식하여 별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발해내부의 문제점에 의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전부는 될 수 없지만 무시할 수 있는 요인은 아니다. 사실 이러한 내부적 분열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증명된다. 末王 대인선 시기 고관들과 많은 武官職의 주요인물들이 高麗에 來投한 사실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 지도층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있었고 이로 인해 내부사정이 취약하게 되었음을 생각 할 수 있다.다음으로는 부여부가 함락되고 홀한성을 포위하기까지.
Ⅰ. Bruner모형의 핵심 내용1-1. Bruner 수업이론의 구성요소(4대 특징)1학습경향성(학습의욕) : 학습경향성이란 학습하고자 하는 의욕 또는 경향으로 준비 성 또는 출발점 행동과 유사한 개념이다.2지식의 구조 : 지식구조의 3가지 특징은 표현방식, 경제성, 생성력이다.3학습계열성 : 계열이란 학습과제를 순서대로 조직·제시하는 원칙으로, 작동적·영 상적·상징적 표현에 순서에 따라야 한다.4강화(상·벌) : 상·벌은 학습활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알려주고, 거기서 만족 또는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외적 보상과 내적 보상이 있다.)1-2. Bruner의 수업과정 분석1> 수업목표의 설정2> 학습자의 개인차 고려3> 학습자의 학습동기 형성4> 학습자의 계열화와 구조화5> 수업사태의 조직6> 수업평가2. 발견학습1) 개념발견학습은 교사의 지시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학생 스스로 자발적인 학습을 통해, 학습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는 교수·학습과정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학생 스스로 기본개념이 나 원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탐구능력과 태도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2) 특징* 기본구조 에 대한 철저한 학습을 강조한다.* 학습효과의 전이를 중시한다.* 학습의 결과보다 과정과 방법을 중요시한다.* 학습자의 주체적인 학습을 강조한다.3) 발견학습의 절차* 문제의 발견 → 가설의 설정 → 가설의 검증 → 일반화(적용)4) 발견학습의 장점* 교과 내용의 전달이 용이하다.* 유의미학습이 도와준다.* 문제해결력을 길러준다.* 전이가 잘된다.* 동기유발이 촉진된다.* 고등정신기능을 길러준다.Ⅱ. Bruner모형의 수업적용필자는 사학전공자로서, 만약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된다면 역사 과목―특히 세계사를 가르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교육방법에 관련된 서적을 살펴본 결과 Bruner 모형은 주로 과학·수학관련 과목에 해당되고 있는 실태를 보였다. 하지만 개념학습을 위한 방법으로 발견식 모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힌트를 얻어, 나름대로 Bruner모형에 적용하여 보았다.그 중에서도 저는 특히 서양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기에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대한 예(1-1)와 그 학습지도안(1-2)을 다음과 같이 만들어봅니다.1-1.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대한 학습지도안{주제근대 시민사회의 형성학습과제1. 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 배경2. 근대 시민사회의 성격과정단계학습활동유의점도입학습과제의 선정학습과제를 제시하고 필기한다.·시민혁명을 통해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의 배경과 성격을 이해 한다.·중심개념 : 시민혁명전개중심 개념의 진술시민혁명의 정의와 속성을 학생들 자신의 용어로 진술한다.·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가?·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가?·시민혁명은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진술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를 검토한다.자료의 분석주어진 자료를 통해 위의 진술이 맞는지를 검토한다.자료 : 「권리청원」과 「권리 장전」,「프랑스 인권선언」과 「라 마르세예즈」「독립선언」과 「미합중국 헌법」: 각 자료에 나타난 개념의 공통 속성의 확인개념의 정의 및속성의 확인·시민혁명의 배경 : 시민층의 성장, 중앙집권 국가의 형성, 절 대왕정 프로테스탄트의 확대·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 : 계몽주의, 자연법, 사회계약설·시민혁명의 영향 : 근대 민주국가의 형성정리학습 과제의 정리시민혁명이 근대 시민사회 형성과정과 성격에 끼친 영향을 정리한다.·시민혁명은 근대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다.·시민 혁명의 정신은 근대 민주주의의 정신의 토대가 되었다.1-2.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대한 지도안 수업방법의 예 근대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그 개념을 이해한다.(문제발견)1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 배경2근대시민 사회의 성격 1영국 ― 「권리청원」과 「권리 장전」2프랑스 ― 「프랑스 인권선언」과 「라 마르세예즈」3미국 ― 「독립선언」과 「미합중국 헌법」 3∼5명이 한 조로 조를 짠 다음, 각 조별로,1) 영국의 시민혁명―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살펴본다.(자료제시)1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가?2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은 무엇인가?3시민혁명은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유의하여(자료관찰)2) 위의 123에 근거하여, 미국 독립 혁명을 살펴본다.(자료의 추가제시·추가관찰)3) 위의 123에 근거하여, 프랑스 혁명을 살펴본다.(자료의 추가제시·추가관찰)4) 주어진 자료를 통해 시민혁명의 개념의 정의와 속성을 찾도록 한다.(일반화 추리)5) 다른 조와의 결과를 비교하게 한다.(검증/재검증)6) 시민혁명이 근대 시민사회 형성과정과 성격에 끼쳤다. 와 같은 일반화를 이끌어 내게 한다. 이 때, 결론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학생의 만족감을 얻게 하라. 그리 고 칭찬하라.(강화)7) 근대 시민 국가의 개념 및 각국의 시민혁명과 근대 시민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8) 시민혁명의 정신이 근대 민주주의 정신 의 토대가 되었음을 알려준다.(발전)2. 어떤 이유로 Bruner 모형의 예라 할 수 있는가?필자는 나름대로 두가지 측면에서 Bruner이론을 파악하였다. 그것은 수업의 틀을 짜는데 있어서는 발견식 그리고 나선형 수업모형을 정립하고, 그 계획과정을 진행해 나가면서 그 의 4가지 수업이론을 적용해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대한 학습지 도안(1-1)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1-2의 수행절차를 굳이 따로 표현한 것은 그 이유에서다.따라서 필자가 이 학습지도안을 Bruner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첫째로 교사가 직 접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능동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발견식 수업과정을 밟았고, 그 과정이 구체적인 자료에서부터 포괄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반화 과정이었다. 둘째 학습 경향성 측면에서 볼 때, 학습과제를 제시함에 있어서 적절한 수준의 불확실성을 갖도록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학습하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기 위해 학생이 스스로 가능성 을 탐구하도록 자료를 제시하였다. 셋째, 일반적으로 교육과정에서 사용되는 개념을 학습 대상이 되는 여러 사물, 아이디어 또는 사건을 분류하거나 범주화하며 체계적으로 조직하 는데 유용한 추상적 단어나 구 라고 정의한다면, Bruner가 구조를 한 교과의 기초를 이루 고 있는 일반적 원리나 아이디어 라고 정의했으므로, 개념은 지식의 구조화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경자·김한종, 「역사과 수업모형의 이론과 실제」,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연구원 편, 『기본수 업모형의 이론과 실제』, 명문사, 1989, p.281.
1. 볼링의 역사-기원 및 변천사영국의 프란다스 페트리(Flinders petrie)교수가 이집트의 고분을 발굴하던 중 B.C 5200년경의 어린아이 무덤에서 현재의 볼링 용구와 비슷한 대리석 볼과 핀이 나왔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긴 것을 무덤에 같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현대 볼링의 원형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볼링이 고대 이집트에서 어떠한 경로로 해서 중세 유럽에 전해졌는가는 명확하지 않지만, 13세기에는 교회(독일)에서 케겔 이라는 종교적 의식으로 다시 등장, 성행하게 되었고, 점차 취미화되어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세의 볼링은 현재와 같이 게임을 유쾌하게 즐긴다는 것보다 종교상의 의식이나 점을 치는데 이용된 것으로, 신을 받드는 승려들의 신앙 정도를 공을 굴려 실험했는가 하면, 장군이나 귀족이 원정을 앞에 두고 운을 점치곤 하였다. 그 후 1841년 뉴욕에 처음으로 볼링센터가 생겼고, 이듬해 NBA(National Bowling Association)가 설립되었다. 1895년에는 ABC(America Bowling Congress)가 창립되어 1901년에는 시카고에서 첫 토너먼트가 열리게 되었다.1) 케겔(Kegel)넘어뜨리기독일의 교회에서 성행하는 종교적 의식으로서, 케겔(막대기)을 악마로 간주하여 복도 구석에 세워 놓고, 일정한 거리에서 둥근 물체를 굴려, 이것을 넘어뜨리는 것으로, 케겔이 잘 넘어지면 신앙심이 두텁고, 잘 넘어뜨리지 못하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므로 단순한 놀이가 아니고 자신의 운명을 점치는 신중한 의식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케겔 넘어뜨리기가 재미가 있어서, 점차 신앙심과는 관계가 없이 취미로 즐기게 되었고, 흥미본위의 놀이로 되어 교회 밖으로 나와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 볼링을 하는 사람을 케구 라고도 하는데, 이는 케겔에서 파생된 독일어의 흔적이다.2) 나인 핀즈 (Nine Pins)1571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케겔 넘BA(National Bowling Association)가 설립되어, 레인의 길이와 볼의 크기 등 여러 가지 경기규칙을 통일하였다. 그 후 1890년에는 아메리카 아마추어 볼링연맹이 발족하여, NBA의 업무를 이관하였고, 1895년에는 ABC(America Bowling Congress)가 창립되었다.4) 현대의 볼링현대의 볼링은 유럽과 미국에서 스포츠로 전파되어 19세기말 동남아 각 국에 널리 보급되었다. 즉 1890년 영국의 웨일즈와 빅토리아에 초대 볼링협회가 탄생되었고, 1915년 미국에서는 잔디 볼링협회가 생겨났으며, 1938년에는 국제 볼링연맹이 조직됨으로서 현대 볼링의 기수가 되었다. 1952년에는 수동식에서 자동식으로 핀세터가 발명되어 볼링이 폭발적인 인기를 받아 퍼져 나갔고, 이 해에 국제주기자연맹(F d ration Internationale des Quilleurs, FIQ)이라는 국제조직이 창설되어 볼링이 정식 스포츠로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마추어 볼링선수들이 참가할 수 있는 볼링대회 중 가장 규모가 큰 FIQ토너먼트(세계선수권대회)가 각 가맹국을 중심으로 해마다 개최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78년 제8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던 볼링 경기는 1982년 제9회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제외되었다가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볼링경기의 전망을 한층 밝게 해주고 있다.2. 볼링의 기본스텝-4step 투구방법4step형은 크게 Push away(제1스텝), Down Swing(제2스텝), Back Swing(제 3스텝), Forward Swing(제4스텝), Release, Follow Through로 이루어진다. 는 발의 위치를 정하고 핀을 겨냥하여 볼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1) Push away앞으로 내딛는 첫 걸음을 push away라 한다. adress자세에서 오른발부터 좁게 1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양손에 받친 볼을 앞으로 가볍게 밀어내는 동작이다. 자세가 동시에 왼손은 볼에서 떼고, 오른팔이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이 때 왼발을 내딛으면 볼은 스윙 곡선의 최하점에 온다. 어프로치를 할 때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왼발과 오른팔이 상호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일단 어프로치를 시작하면 밀려가기가 쉽다. 즉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째에서 좌우로 쏠리기 쉽다는 뜻이다. 만일 두 걸음째에서 왼발이 왼쪽으로 쏠렸다면 세 걸음째에는 오른쪽으로 되돌아가려 하고, 그리고 나서 슬라이드를 할 때는 왼쪽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비틀거리게 된다면 투구 폼 전체가 엉망이 된다. 그러니까 두 걸음째는 옆으로 갈 것이 아니라 똑바로 내딛어야 한다. 오른팔을 볼 뒤쪽으로 가져갈 때에 반드시 몸에 붙인다는 점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두 걸음째에는 팔을 완전히 뻗어서 똑바로 아래로 휘둘러지도록 한다. 오른팔은 아래쪽에 두고, 왼팔은 몸이 비틀거리는 것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몸에서 뗀다. 이 때, 체크해야 할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ㄱ. 전후의 움직임이 같은 속도로 스윙되게 한다.ㄴ. 옆으로 빠지지 않고 똑바로 스윙한다.ㄷ. 엄지손가락의 방향을 일정하게 한다.ㄹ. 손목의 편다.ㅁ. Back Swing의 높이를 적당히 조정한다.3) Back SwingDown Swing으로 내려온 볼이 진자운동으로 뒤쪽으로 올라가게 되는 단계이다. 이 때 오른발의 제 3스텝은 약간 넓게 내딛는다. 또 상체를 서서히 숙이면서 중심을 앞으로 이동 시켜 밸런스를 유지하고 톱의 위치를 앞으로 숙인 자세에서 어깨 높이와 같도록 한다. 오 른발로 내딛는 세 걸음째에는 약간 속도를 준다. 급한 동작이나 비틀거리는 동작을 방지하 고 미끄러지듯 동작하도록 주의한다. 오른발을 똑바로 앞으로 냄과 동시에 몸은 다소 앞으 로 기울어진다. 볼의 타성에 따라(뒤로) Back Swing을 계속한다. 세 걸음째가 완료될 때 볼은 Back Swing의 정점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경우 어깨보다 낮은 높이에서 끝난다. 손 목은 고정시켜야만 팔 스윙을 똑바로 이동에 의해 멈추어진다. 왼발이 파울라인에 다 가가면 오른팔로 볼을 릴리스 포인트로 옮긴다. 허리와 왼무릎을 구부리는 정도 는 각자의 체형에 따라 달라진다. 구부리는 첫째 목적은 볼을 지나치게 들어올리 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볼의 위치가 낮아짐으로써 릴리스 의 위치가 충분히 낮아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 충분히 낮아지지 않으면 볼 은 상당히 높게 허공을 날아 레인 위에 난폭하게 떨어지고 만다.5) ReleaseBack Swing톱에서 스윙해 내려온 볼을 자연스럽게 굴리듯이 볼을 던지는 단계 이다. 이 때 슬라이딩해온 왼발은 파울라인 5cm저도 앞에서 멈추게 된다. 양어 깨는 파울라인과 평행하도록 유지하며 얼굴은 똑바로 목표를 향한다. 볼은 팔꿈 치를 펴서 앞으로 밀어내듯이 한다. 이때 손목에 무리한 힘을 주거나 비틀어서는 안된다. 볼을 잡지 않은 반대 팔은 바깥으로 뻗어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한다. release는 투구할 때의 또 하나의 중대한 장면으로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처럼 볼을 레인 위에 매끄럽게 착지시켜야 한다. 손목을 고정시키고, 팔은 똑바 로 뻗어 있어야만 한다. 이 떠 엄지손가락은 11시 방향을 가리키고, 가운데, 약 손가락은 볼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볼을 훌(hook)시키기 위하여 스핀(spin,회 전)을 거는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틀거나 할 필요는 없고, 우선 엄지손가락부터 뺀다. 그러면 볼의 무게는 나머지 두 손가락, 특히 가운데 손가락에 걸린다. 다음 순간 두 손가락으로 볼을 약간 들어 올리는 것이다. 이 위쪽으로 손가락을 끄는 것으로 스핀이 걸리는 것이다. release할 때에는 가운데, 약손가락이 볼의 아래쪽 에 있어야만 한다. Back Swing때에는 항시 두 손가락이 뒤쪽에 있도록 해야한 다. 이렇게 하면 Release때에 소리도 없이 스핀이 걸린다. 그런 다음은 follow through를 한다. Release하였으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오른팔을 위쪽으로 신속 히 끌어 올린다. 적어도 눈의 뒤에 끼워서 손바닥이 곧 바로 핀을 향하도록 한 다음 스윙한다. 이 위치를 유지하면서 먼저 첫째 손가락 을 뺀 다음 세째 손가락과 네째 손가락으로 볼에 곧장 전진 회전을 주는 듯한 느 낌으로 걸어 올리면서 두 손가락을 뺀다. 볼을 놓은 손은 그대로 손바닥을 이로 향해서 Follow Through에 들어간다. 목표를 향하여 곧바로 팔을 내밀어 볼에서 빠진 세째 손가락과 네째 손가락도 정면의 핀을 향하여 마지막 동작까지 흐트러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3. 볼링장의 설비1) 레인의 구조●레인 : 공이 굴러가는 바닥으로 3 15의 판목 39개로 이루어진다. 레인길이는 19.15m(실격선에서 핀까지는 18.28m)이고 폭은 1.042-1.066m이다.●접근구역(Approach) : 실격선까지 4.75m이상의 간격을 두는 구역, 공을 던질 때 쓰 인다.●실격선(Faultline) : 레인과 어프로치의 경계,선을 밟거나 넘어서 던지면 실격된다.●거터 : 흔히 도랑 이라고 부르는 레인 양 끝쪽의 홈통, 폭 22.5-23.7cm, 깊이는 8.75cm●공선반(Ballreck) : 공을 올리는 선반2) 레인위의 표시●접근점(Approach Spot) : 접근구역의 4.75m지점과 3.66m지점에 5개의 둥글고 검 은 점이 실격선과 수평으로 같은 간격을 두고 표시되어 있어 공을 던질때 처음 설 곳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공놓기점(Release Spot) : 실격선에서 2.5cm 떨어진 7개의 점●안내점(Guide Spot) :실격선 앞 2.14m 지점에 있는 점,좌우 측면에 각각 5개씩 있 다.●조준점(Aim Spot) : 안내점에서 2.14m앞에 산 모양으로 늘어선 7개의 쐬기형 점3) 핀단풍나무로 만들고 플라스틱 코팅(마모방지용)을 한다.키는 37.5 ,너비는 목부분에 서 5, 배에서 12(단위는 모두 cm)이며,무게는 약 1.45Kg이다.배열시에는 변길이 91.4인 정삼각형의 바닥에 10개를 30.48(단위는 cm)간격으로 세운다.4) 공직경 21.5, 둘레 68.58 계산
Ⅰ. 머리말투키디데스(Thucydides)는 고전기 그리스에 있어서 과학적 합리주의 사관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적 현상의 원인을 인간의 심리에서 구하려고 노력한 최초의 역사가였다.) Harry Elmer Barnes, 『A History of Historical Writing(AHHW)』, Dover Publications Inc., New York, 1973, pp. 30-31.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전 Ⅵ권을 기술하면서, 인간의 심리현상으로서 공포심·증오심·질투심 등은 전쟁수발의 강한 동기가 된다고 하였으며, 인간 심리와 정치의 연관성을 추구하여 그 인과관계를 찾으려 하였고, 그의 예리한 분석을 통하여 역사로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또한 이와 같은 고전기 역사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시기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같은 역사기술은, 고대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그 중요성이 자못 크다 하겠다.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서술이라도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만으로 고전기 그리스의 역사 모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데마고고스 클레온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클레온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을 감출 수가 없었던 투키디데스의 서술은 클레온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어둡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그러므로 우리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타난 당시 상황과 그 현상에 주목하면서도, 별도의 참고자료와 연구된 논문을 통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시(戰時)·전후(戰後) 그리스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특히 본고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이후 ―민주정의 완성이라고도 표현되는― 급격화되고 대중화된 아테네의 민주정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아테네를 위시한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이 어떻게 하여 고대의 종말을 맞이하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Ⅱ.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민주정본래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계속적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던 것이 아니고, 근 30년간에였을 뿐만 아니라, 항구에 이르기까지 튼튼한 방어벽을 구축하였다. 반면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스파르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다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스파르타는 내부의 혼란과 폭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지만, 기존의 정치·군사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으며, 사회와 경제의 구조도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과 특히 메가라(Megara), 테살리(Thessaly), 유보에아(Euboea)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스파르타의 인접국인 아르고스와 협정을 맺었고, 스파르타는 이에 앞서 보에오티아 동맹의 종주국인 테베(Thebes)와 아테네의 경제적 경쟁국인 코린트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수년 동안 그리스는 천천히 두 개의 대립되는 진영을 갖추게 되었으며,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사실상 스파르타와 아테네와의 전쟁은 페리클레스가 명성을 획득하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가 테베를 공격하여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테베의 산업과 무역이 몰락하였고, 상업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아이기나(Aegina)가 아테네에 병합되었다. 양측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한 15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형식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조약 체결 중에도 전쟁준비를 계속하였으며, 그 평화조약은 3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력을 소모한 그리스에서 평화가 선언되었지만 적대와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 동안 델로스 동맹의 회원국들은 아테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경쟁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와 테베 사이의 상업적인 경쟁도 전쟁을 재개시킨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조인형 편(編), 『서양 고대사』, 강원대학교 출판부, 1996, pp. 229-230.이와 더불어 아테네 제국의 서방 무역의 독점 시도도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반발하고 나서는 원인이 되었다.2. 아르키다모스 전쟁) 투키디데보하고, 또 적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는 아테네의 함대에 모든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전략상 아테네인들을 아테네에서 철수시켰다. 그래서 아테네인들은 아티카를 버리고 아테네의 성벽 안과 피레우스(Piraeus) 항구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기원전 430년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이 전술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끔찍한 흑사병이 인구 밀도가 조밀한 도시 지역을 강타하여 수천 명의 인명을 앗아갔으며,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은 그 후 기원전 426년에도 재발하였는데 두 차례에 걸친 인명손실이 합하여 아테네 총인구의 약 1/3에 이르렀다. 그 결과 아테네는 병력동원에 큰 곤란을 겪게 되었다. 또 그러한 인적 피해말고도 아테네인들이 입은 정신적인 타격은 매우 컸다.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페리클레스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이제 전쟁의 전망은 불투명하고 누적된 재정 적자, 전염병에 의한 피해 등으로 타격이 겹치자 아테네는 크게 동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안정기 때에 은폐되던 긴장(緊張)과 욕구가 분출되는 경향이 강한 법이다. 투키디데스도 언급했듯이 "평화와 번성기에는 급박하게 일용품을 찾는 일이 없기 때문에 국가와 개인들이 더욱 선성(善性)을 지닐 수가 있지만, 전쟁 때에는 일용품이 쉽게 조달되지 않으며 전쟁은 인간 대부분의 성품을 그들의 운명에 맞게 이끄는 폭력의 교사인 것이다." 이렇듯 아르키다모스 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용적인 물자와 식량의 조달이 어려워지고 비관적인 상황이 연속되자, 종전에는 국가의 업무에 비교적 무관심하던 민중들 역시 그들 자신의 역할이 더욱 더 중요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제껏 귀족출신 정치가들의 지도를 받으면서도 평화와 번영이 겹쳐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한, 이에 대해 별 불만을 갖지 않던 민중이 막상 곤궁에 빠지자 종전의 지도체제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대로라면, 이제 데모스는 '선량한 자들'이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자, '비천한 자들'을 그들의 지도자로 나선 것이다.)이러한 상황 속에123.1) 데마고고스 클레온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 아테네제국이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는 위기를 맞이하여 데마고고스 클레온을 탄생시켰다. 특히 클레온은 자신의 적극적인 제국지배정책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또한 그 뒷받침으로서의 재정확보를 동맹국에 대한 공납금 압력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동맹국에 대한 이러한 억압적 태도가 아테네 제국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억압이 심하면 그만큼 동맹국은 아테네에 불만을 갖게 되는 그러한 딜레마가 심화될 뿐이었다. 그러나 아테네로서는 제국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더욱이 제국과 그 생활기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민중이 그 지도자로서 내세운 인물은 무엇보다 제국의 수호에 열렬한 관심을 보여야 했다. 이것이 클레온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같은 책, pp. 139-140.하지만 그는 선동정치가란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지만 페리클레스와 비교되고 있다.클레온의 정책은 종래의 아테네제국 정책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기원전 420년대의 상황변화에 따른 적응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결국 데마고고스 클레온은 제국지배정책을 표방해 온 아테네가 이제 그 위기적 상황에 처해 만들어낸 역사적인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테네에 있어서의 제국정책과 급진적 민주주의가 갖는 맞물림에서 오는 문제였다.3. 과두주의) 과두정(oligarchia)은 소수(oligos)의 지배를 말한다. 과두정에서 소수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기준은 혈통이나 재산이다. 귀족적이 세습적인 혈통을 중시하는 측면이 있는 데 비해, 과두정을 혈통 뿐 아니라 재산도 중시했다. 그러나 과두정이든 귀족정이든 둘 다 소수의 능력있는 자들의 지배이고 이 둘의 체제를 극명이 구분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민주정에 대한 반대자는 과두주의자로 불렀다.(김진경 외, 앞의 책, p. 32, 재인용.)정변한편, 급진적 민주정의 전개와 데마고고스의 출현은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 소외된 귀족집단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네스가 제거되면서 30인 집권은 폭력과 공포의 참주정으로 변화하였다.) 최자영,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 신서원, 1995, p. 189.정권을 장악한 귀족들은 귀족들이 국가의 운명을 주도하던 과거의 정체를 선호했으며, 일부 하층민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관직 수당도 없앴다. 말하자면 급진적 민주주의 기반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두 차례의 정변들은 모두 바로 다음 해에 막을 내렸다. 민주정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확고한 의지가 입증된 셈이었다. 이제 민주정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후 이 경험은 과두주의자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선례가 되기도 했다. 이제 어느 과두주의자도 이제 공개적으로 자신이 민주정의 원리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결국, 절망에 빠진 아테네인들은 정치적 쿠테타를 시도하여 과도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정부를 설립하였으나, 곧 반혁명이 발발하여 혼란만 가중되었을 뿐이다.Ⅲ. 그리스의 몰락1. 아테네의 쇠퇴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전기 그리스의 역사상 하나의 전환기를 이룬다. 전반적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과 군사적 기술의 변화 조짐이 이 전쟁을 시점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이후로 계속된 폴리스들끼리의 소모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각국은 국력을 쇠진시키고 국내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다.아테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테네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전쟁중의 전염병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겪었다. 또한 장기적인 전쟁과 제국정책에 대한 대립으로 시민단 내에 분열이 생겼고, 기원전 4세기에는 빈부간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급진적 민주정하에서 아테네인이 국내 문제를 해결할 길은 다시 제국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인은 제국 회복과정에서 오히려 국력만 소모하게 되었고, 기원전 350년대에는 이제 제국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만큼 국력이 쇠진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테네인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공세에 시달리다가 결국 카이로네이나(Chaironeia)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