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윤리부정의한 국가에 대하여 불복종해야 할 이유가 성립하는가?목 차Ⅰ. 들어가며Ⅱ.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복종의 이유에 대한 비판적 검토 - “국가와 윤리” 13장을 중심으로1. 정의의 관점2. 불의한 법의 교정 필요성3. 자기중심주의와 불복종행위4. 관용의 원리5. 권리유보의 원리6. 인격교화의 원리7. 국가와 고상한 거짓말Ⅲ.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불복종’에 관하여1. 불복종 = 악(惡)?2. 불복종과 무질서 상황3. 개인의 정의 실현과 불복종Ⅳ. 나오며부정의한 국가에 대하여 불복종해야 할 이유가 성립하는가?Ⅰ. 들어가며최근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권위가 제대로 성립하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지난해의 낙천, 낙선운동과 의료계의 파업사태는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할 뿐이고 국민들의 한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환멸은 극에 달해 심지어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다수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설문 결과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국가의 권위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런 걱정들을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국가의 측면에서 권위의 실추에 대한 우려로 보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한 국가의 국민이라면 지니고 살아야 하는 국가에 대한 복종의 미덕을 많은 사람들이 결여하고 있음에 대한 우려이다.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한국 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은 국가가 부정의 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한 국가에 대해서 불복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복종해야 하는 것인가?지난해 시민불복종을 외치며 낙천?낙선운동을 펼쳤던 시민단체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고 있다. 시민불복종은 그대로 부정의한 국가에 대하여 불복종하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서로우는 이에 대해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말로 시민 불복종을 정당화시킨 바 있다.일반적으로 부정의한 국가에 대하여 불복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고 시민불족종의 정당성에 대하여 고찰을 해나가게 될 것이다.Ⅱ.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복종의 이유에 대한 비판적 검토 - “국가와 윤리” 13장을 중심으로1. 정의의 관점1) 내용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불완전 절차적 정의의 세계이다. 비교적 합리적이라고 하는 민주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정의를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으며 때때로 부정의와 불공정성 및 불공평성을 산출할 수밖에 없는 ‘차선의 제도’ 또는 ‘차악의 제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부정의와 불공정성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용인될 수 있는’ 불의의 범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제도상의 불의와 부정의야 말로 선거 민주주의나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향유할 수 있는 혜택에 대하여 시민들이 지불해야할 비용이기도 하다.2) 비판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불완전 절차적 정의의 세계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결하기 힘들기 때문에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가령 어느 학급에서 수학 수업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매우 어려운 문제가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자. 그 학급에서 가장 수학을 잘한다고 하는 학생조차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그 학급의 학생들은 그 문제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타당할 것인가? 역사가 지금까지 발전해 왔던 원동력은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해결해 내려고 했던 수많은 노력들이었다. 만약 과거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들이 “너희들은 선천적으로 우리와 다른 족속이니 우리와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라는 귀족들의 말에 자신의 문제들을 포기했었다면 지금과 같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가 가능할 수 있었을 지 의문이다. 과학에서 불가능에 도전해서 성공했던 수많은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과학의 진보가 있었듯이 사회도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도전하고 해결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존중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2. 불의한 법 바꾸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기존에 있는 틀을 깨뜨리는 것이다. 창문이 닫혀 있는 방안에서 모든 사람이 덥다고 느낄 경우라고 해도 창문을 열 사람이 없다면 결국 모두 계속해서 덥고 답답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인식시키는 데에 흑인 노예 출신인 조지 워싱턴 카버라는 농학자가 기여한 바가 크지만 결국 실질적으로 제도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적극적인 민권운동가의 힘이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또한 우리는 부정의한 국가에 대해서 불복종하는 것은 악(惡)이 아님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물론 무질서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면에서 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나쁜 부모’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곧바로 ‘탈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부당한 국가에 대해서 불복하는 것이 곧바로 악행과 동일시 될 수는 없을 것이다.3. 자기중심주의와 불복종행위1) 내용불의한 법에도 복종할 “일정한” 이유가 성립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논거는 인간 개인의 나약한 본성과 불충분한 선에 대한 동기로부터 정당화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강한 존재가 아니며,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존재라는 상정은 비교적 커다란 쟁점 없이 받아들일 만한 상정이다. 모름지기 ‘나’는 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또한 남에 대한 칭찬에는 인색하고 비난에는 사정이 없다. 이런 경향은 국가의 법이나 제도에 대한 평가에서도 쉽게 목격된다. 흔히 개인이나 집단은 자기 자신에게 실익이 돌아오는 법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정의로운 법으로 단정하고 불이익이니 희생을 강요하는 법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불의한 법이나 제도로 치부하게 마련이다.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 일단 ‘무지의 베일’을 쓰고 최악의 상황이 된 경우를 상정하거나, 혹은 하사니의 ‘동등확률의 원리’에 입각하여 ‘나’ 자신이 문제의 상황에서 어떤 입장에라도 귀속될 확률이 n분의 1이 되리라는 가정하에 문제되는 사안의 공익성을 파악하했을 때에 부정의한 국가에서 부당하게 빼앗긴 자신의 몫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약 부정의한 국가 제도 때문에 나의 권리나 이익이 침해당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것을 보호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 민주국가의 장점이 아닐까?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은 공익성과 함께 어느 정도의 개인의 이기심을 수반할 수 있는 것이다.4. 관용의 원리1) 내용로크는 종교의 관용 문제를 진리의 불확실성 문제로 풀어갔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분열되어 상호간에 상대방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유일무이한 진리로 강변하는 상황에서, 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참된 종교를 가늠할 수 없다는 논리에 기초하여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신봉한다면,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견해도 존중할 이유가 있다. 비록 의견은 ‘나’와 달라도, 그가 ‘나’와 같은 이성과 판단력 그리고 도덕성을 가진 존귀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를 ‘수단’보다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그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따라서 사실적 불확실성, 도덕적 불확실성, 및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한 관용의 논리는 직접적으로 법불복종 행위에 대한 함의를 가진다. 국가의 법이나 정책이 ‘나’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진리관이나 가치관에 배치된다고 해서, 법불복종행위에 나선다면, 시민불복종행위의 범위는 너무나 넓어져, 결국 법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이유조차 소진될 것이다.2) 비판옳고 그름에 대한 불확실성의 문제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여도 미지의 영역은 항상 남아있게 마련이며 국가의 정책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은 선한 것과 선한 것이 충돌할 때나 혹은 악한 것과 악한 것이 충돌할 때이다. 이런 때에 국가는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따르게 된다. 물론 개인적인 신념에 배치된다고 해서 국가의 정책에 불복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정진 권리를 자유자재로 행사하는 사회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정한 권리를 가지면서도 그 ‘권리’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사회, 혹은 그 권리를 사려깊고 신중하게 행사하는 사회야말로 ‘좋은 질서를 가진 사회’의 한 속성이다.2) 비판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권리를 유보해야 할 때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나 병원에서 다급한 환자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경우 등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나 부정의한 국가에 대해서 불복종하는 것이 권리라고 했을 때에 그 권리를 유보하고 부정의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것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부정의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은 시민들의 정의감이나 개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국가 정책의 시정을 추구하는 다급한 요구이다. 버스에서의 자리양보(권리유보)가 미덕이고 병원에서의 순서양보가 미덕일 수 있는 이유는 더 급박하고 절실한 이유를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부정의할 때에 그에 불복종함으로써 이를 시정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급박하고 절실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권리의 유보보다는 권리의 행사가 옳은 일일 수 있다. 민주국가에서 참정권을 지니고 있는 시민의 경우 일반적으로 투표를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것이 미덕일 수 있듯이 국가가 부정의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수 있는 것이다.6. 인격교화의 원리1) 내용정의롭지 못한 법, 도덕적으로 불확실한 법에 대한 복종은 시민 개인에게 있어 인내와 의지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 때때로 ‘좋은’ 부모뿐 아니라 ‘나쁜’ 부모에 대하여도 복종이 요구되는 이유는 자녀 개인의 인내와 의지를 키우기 위함이다. 만일 한 개인이 좋은 사람들이나 올바른 사람들만을 조우하면서 역경 없이 자란다면, 그것은 마치 ‘온실 안의 화초’처럼 나약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한 개인은 역경을 만나면 어떻게 대비할 지를 몰라 허둥거리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법이 정당한가 부당한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이 어떤 생활 철학을 체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있다.
국제 사회에서 윤리의 필요성국제사회는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또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듯 각 나라마다 자국의 이익추구에 혈안이 되어 있는 국제 사회의 모습에서 윤리가 과연 필요할는지, 또 윤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을는지 명확치 않다. 그렇다고 국제 사회에서의 윤리라는 것이 그냥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할 수 있다.국제 사회에서 윤리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국제 사회의 움직임을 예측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윤리라는 것은 하나의 행동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개인이 어떤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행동을 지시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물론 국제 사회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국가라는 것이 한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닌 만큼 국가 내에는 서로 충돌되는 이익집단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둘 또는 그 이상의 국가가 서로 조약을 맺을 경우 각국이 그 조약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그 조약은 맺어지기 힘들 뿐 아니라 설령 성사되더라도 실효성을 발휘하기 어려워진다. 뿐만 아니라 한 국가가 국제사회 내에서의 공식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가지지 못하고 국가 내 다양한 이익집단의 이해에 따라 갈팡질팡 한다면 당국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둘째로 국제 사회 자체가 각 국가들을 그 구성원으로 삼고 있는 하나의 사회라는 점이다. 과거에 국가는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이는 사회의 최고 단위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어느 선까지는 그 사실이 타당하다. 하지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국가간 교류가 늘어나면서 이제 최고의 운명공동체는 국가가 아니라 그 국가들이 구성하고 있는 국제 사회, 즉 인류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즉 각 국가는 자국의 이익추구만으로는 살 수 없고 국가 상호간에 교류와 협력이 필수적이게 된 것이다. 환경문제는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이다.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묶이게 된 인류사회가 파멸을 막고 공존 공영에 이르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윤리, 즉 국제 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미국의 안락사 문제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안락사 문제 관련 미국 판례1) 퀸란 사건2) Saikewicz 사건3) 기타 사건2. 입법 상황3. 현재 상황Ⅲ 결론미국의 안락사 문제Ⅰ 서론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죽을 권리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국가의 생명 보호권이 개인의 죽음 선택의 자유보다 우선하느냐에 관한 문제, 즉 안락사에 관한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 되고 있다. 안락사는 낙태 문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아직까지 낙태에 관해서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미국에서 낙태권이 인정된 이후 미국 내 낙태 수술이 1백만 건을 넘을 정도로 우리는 생명의 단절에 임상적으로 태연한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안락사의 문제 또한 매우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이에 안락사에 대한 미국의 법적인 태도를 살펴보고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을 비교해 보면서 그 대안점을 모색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안락사 문제 관련 미국 판례1) 퀸란 사건이른바 [존엄사] 또는 [환자의 죽을 권리]와 관련된 논란은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를 계기로 일어났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75년 미국 뉴저지주에서 일어난 퀸란 사건이 발단이었다.퀸란(Karen Ann Quinlan)은 21살된 여자로 1975년 4월에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호흡정지가 있은 다음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장착하여 지속적 식물상태(PVS, persistent vegetative state)를 유지하게 되었다. 퀸란의 아버지는 의사로부터 의식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고 인공호흡기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이 의사의 설명은 잘못되었다. 판결 후에 인공호흡기를 떼었는데도 9년이 넘게 생존하였다), 퀸란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겠다고 결심하여 의사에게 생명유지장치를 떼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의사가 이를 거부하자, 퀸란의 후견인으로서 생명유지장치를 뗄 권한을 자기에게 달라는 소송을 법원에을 인정하여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① 후견인과 가족이 같은 의견이고, ② 다른 의사가 퀸란은 현재 혼수상태에서 인식있는 지적 상태로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생명유지장치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③ 입원한 병원의 윤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장치를 제거해도 된다. 는 것이었다.이 판결은 자기결정권(自己決定權)을 존중하여 「개인적 권리(privacy)」를 긍정한 새로운 판결로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생명유지장치는 떼었지만 퀸란은 스스로 호흡을 회복하여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로 9년 남짓 생존하다가, 1985년 6월 11일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2) Saikewicz 사건환자는 67살 남자로 정신연령이 2년 8개월이라 할 정도로 심한 정신장애자이고, 50년 이상 시설에 수용되어 살았다. 이 사람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고, 유일하게 이용할 수 있는 치료방법은 화학요법뿐인데, 과연 이 치료를 시행할지를 다루는 문제에서 이 사람이 수용된 시설의 원장이 검인법원(probate court)에 후견인을 임명해달라고 신청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검인법원은 화학요법을 하지 않도록 명하였으나, 곧 항소법원에 ① 당해 법원에 그런 권한이 있는지 여부와 ② 그 구체적 상황에서 명령의 내용은 정당하였는지 여부의 두 가지 질문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은 두 가지 질문 모두에 대하여 긍정하는 회답을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그 이유에는 -1년 남짓이 지난 다음에, 그것도 환자가 사망한 다음에 발표되었으나- 주목받을 만한 논점이 들어있다.(1) 판결문은 퀸란 사건과 마찬가지로 [설명 받은 동의(informed consent)]의 법리와 헌법상 개인적 권리를 치료를 거부할 권리의 근거로 제시하였고, 특히 결정 능력이 없는(incompetent) 환자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퀸란 사건보다 분명한 판례를 남겼다. 즉, 결정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없는 사람의 실질적 권리는 생명연장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대해서 잠「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관적인 성격」이라고 하면서, 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의 현실적 이익과 선호를 확인하도록 노력하여, 의사 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었다면 내렸을 그런 결정이어야 한다 는 미묘한 표현을 하였다.3) 기타 사건(1) Myers라는 24살의 젊은 남자 죄수가 만성 사구체신염으로 요독증이 되었는데, 투석요법을 받기 거부하므로 이에 대해 교도소 교정국장이 강제로 치료를 받게 하도록 선언적 판결을 신청하였다.이 사건에서 생명의 유지에 대한 직접적인 국가의 이익이 있고 , 그 이익은 가장 중대한 것이며, 환자의 신장병은 심하게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 계속 투석을 하고 약을 투여하면 환자가 다른 면에서는 정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고, 강제적으로 투석을 하더라도 「신체적이나 정서적으로 무거운 부담이 되고, 결국 자연적인 죽음 과정이 조금 불확실하게 지연되는 것일 뿐」이라는 상황과는 다르다 고 하였다.치료거부권과 국가의 이익 사이에 균형을 가늠하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고, 그 하나인 「회복 가능성」이 이 사건에서 크게 작용하여 치료 거부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더욱이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비교형량의 한 요소인 「의료 처치의 침습 정도」에 대해서는 퀸란 사건이나 다른 사건에서 모두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서는 침습 정도가 낮지 않은데도 치료를 계속하도록 결론지은 것은 회복 가능성이 적지 않은데다가 교도소의 질서 유지라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 사건은 치료 거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용 판결 가운데 특이한 것이다.(2) 79세의 노인이 부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합병증으로 신장병에 걸렸고 신장 기능을 거의다 잃었다. 따라서 매주 3번, 한번에 5시간이 걸리는 투석을 받았는데, 투석으로도 치료가능성은 전혀 없고 비가역적인 노인성 치매까지 걸려서 영구적 만성적인 뇌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정신상태는 황폐해져 처자식도 인식하지 못하였다. 환자는 때로 간호사를 걷어차고, 투석을 안 받겠다고 하거나, 주사바늘을 빼는 이다 라는 의견이었다.아들은 법원에 신청하여 잠정후견인으로 임명되었고, 환자의 부인과 함께 연명치료중지를 신청하였다. 먼저 검인법정은 더 이상의 연명치료를 중지하도록 잠정후견인에게 명령하였다가 명령을 실효 시켰으며, 그 대신에 주치의와 처자식이 투석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는 명령을 내렸다.(3) New York에서 생긴 사건으로 한 신부가 다른 수도사의 보좌인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사건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 대리권 행사자가 가족이 아니라는 점, 더욱이 환자 자신이 성직자라는 점, 식물상태가 되기 전까지 환자 자신의 생각이 매우 명료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1981년 3월 31일에 상고심에서 원심 그대로 긍인되었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상고심 판결에서 치료거부권이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인지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은 거부권이 관습법(불문율, common law)에 있는 권리라는 점은 당연하지만, 헌법상의 권리인지 여부는 제일심에서는 헌법상 권리라고 판결하였고, 항소심에서도 역시 헌법상 권리라고 하면서, 그 차이는 단순히 의미론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 하면서, 어찌되었든 결론에는 영향이 없다 고 하여 원심 결론을 긍정하였다. 환자 자신의 의향을 알 수 있는 명백하고 확신적인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가 있으면 이를 인정한다.2. 입법 상황미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안락사에 대한 의학적 관심을 보이다가, 20세기 초에는 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906년 오하이오 주와 아이다호 주에서 안락사 법안이 제출되었고, 1937년에는 네브라스카주에서도 제안되었으며, 1938년에는 미국안락사협회도 설립되었다. 그 뒤에도 여러 주에서 제안되었으나 모두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환자의 권리 운동이 일어났고 안락사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나 치료중지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자연사로써 처리할 수 있는 법 제도가 여러 주(51주 중에 47주)에서 제정되었다. 인공권리) 를 인정한 법안을 주민투표에 붙였다. 이 법안은 6개월 이내에 사망 시기가 임박하였다는 의사의 진단서가 있고, 판단능력이 있는 18세 이상의 성인 환자가 인도적인 이유로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결정을 스스로 하였고, 그 시점에 두 사람의 증인이 입회한 상태에서 스스로 작성한 서류로, 스스로 의사에게 요청하였다는 요건을 충족한다면, 의사의 손으로 죽음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취지였다. 이해 관계자의 개입을 피하기 위하여 증인으로 가족이나 입원한 의료기관의 의사나 직원은 제외하고 어느 때라도 요청을 철회할 수 있는 등, 죽음의 요청이 다른 사람 때문에 왜곡되지 않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1991년 11월에 주민투표 결과 반대가 54%로 더 많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캘리포니아 주에서는 1988년에 안락사 법제화를 위한 주민투표가 세계 최초로 시행되었지만, 불발로 끝났다. 1992년에 다시 주민투표가 있었다. 그 취지는 불치의 병으로 여명이 6개월 이하로 진단된 판단능력이 있는 성인 환자가 글로써 요청하면, 이에 따라 적극적인 안락사를 실시한 의사는 민사상 또는 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는 반대가 53%로 부결되었다. 반대 의견은 카톨릭 단체에서 많았는데, 안락사 그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의료 자문이 의무 조항이 아니고 증인의 존재가 명기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절차적인 규제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찬성하지 않은 의견도 포함되었다.오리건 주에서는 1994년 11월에 「오리건 주 존엄사 법안」에 대한 주민투표가 있었다. 이 법안은 워싱턴 주나 캘리포니아 주의 법안과 달리 성인의 환자 자신이 인도적인 존엄을 갖춘 형태로 생명을 종결할 수 있는 약의 처방을 의사에게 요청할 수 있는 권리(자살 도움)의 법적 승인을 청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국 앞의 두 주에서는 생명을 종결하는 사람이 의사인데 비하여, 오리건 주는 스스로 약을 먹음으로써 결단하는 것이고 실제로 약을 먹을지는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주민투표
‘전태일평전’을 읽고다시 만난 청년 노동자.....전태일내가 전태일이란 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2 때였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를 단체관람하기 전까지 나는 전태일에 대한 어떤 사전지식도 없던 상태였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바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또 그가 목숨을 던지며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거기에 대한 의문은 영화를 통해 풀리지 않았고 끝내 전태일 평전을 읽게 되었다. 그 당시가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그저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불쌍하게 생각하고 악덕 기업주를 비난하는 수준에서, 그리고 목숨을 내던진 전태일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선에서 난 전태일에 대한 관심을 접었던 것 같다.내가 전태일을 다시 접한 건 대학에 들어오고 1년쯤 지나서였다. 대학에서 여러 가지를 보고 들은 후에 만나는 전태일은 고등학교 때 만났던 사람과는 다르게 다소 복잡한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그저 소박한 꿈을 지닌 순수한 청년이었다가도 또 어떤 때는 신념에 불타는 열사로 변신하고 또 어떤 때에는 그 시대의 모순을 한 몸에 안고 죽어간 불쌍한 희생양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학에 와서 만난 전태일은 나에게 혼란과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사람이었다.4학년이 되어서 접하는 전태일은 나에게 착잡함을 심어주었다. 대학생활을 4년 가까이 하고도 고등학교 2학년때 처음 보았던 영화에서의 고민, 그리고 갓 들어와서 그에게서 느낀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청년 노동자 전태일...그는 분명히 그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또래들과 별다르지 않은 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데 평화시장 재단사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도 있었던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죽음이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그의 삶그의 삶은 제대로 먹지 못해 항상 굶주린 허기진 배,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 가난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지 못한 미련, 그리고 사회에 대한 소외감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어린 시절 그는 피복 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인 아버지 밑에서, 그나마 그 아버지가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는 더 어렵게 살았다. 넉넉함이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정환경은 그를 밖으로 내몰았다. 동생들과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었다.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잠시 청옥 공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일년동안의 가출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는 짧지만 배움과 그리고 친구들과의 학교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극히 평범한 학교 생활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시절은 인생에서의 최대의 기쁨이었다. 그는 이 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하지만 행복한 학교생활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전태일의 가정형편에 학교에 보내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움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무작정 상경한다. 서울에서 그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담배꽁초 주워팔기, 우산 장수 등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65년 가을 평화 시장의 다락방 공장(속칭 마찌고바)에 견습공으로 첫발을 디뎠을 때 실밥먼지가 자욱이 떠다니는 그 곳엔 변변한 휴일도 없이 하루 15시간을 넘는 고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허리를 펼 수 없는 좁디 좁은 작업장은 여느 노동자들과 꼭같이 그의 삶 을 끊임없이 소모시켰다. 혹은 폐결핵에 피를 토하고, 혹은 만성기관지염으로 기침을 쉴 새 없이 터뜨리고, 혹은 졸다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 혹은 굶기를 밥먹듯 하다 위장병을 얻고, 혹은 신경통에 관절 마디마디가 시린 월급 3천원짜리 ‘인간 이하’의 생활을 보며 그는 교통비를 모두 털어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거나 잔업, 철야를 줄여주는 소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우연한 말속에서 발견해낸 근로기준법은 전태일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는 ‘노동자’로 바꿔지기 시작한 것이다.“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태에서 나는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일기에 나타나는 그런 각성은 곧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시장 안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화 “삼동 친목회”를 만든 그는 근로조건 실태 조사에 나서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인 사람은 전부 환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조사 결과가 적인 진정서를 들고 노동청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알았으니 가봐”였다. 환풍기를 달아달라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업주들과 노동청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그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 뿐이었다. 평화시장에서 데모가 있던 날, 경찰의 감시와 탄압으로 플랭카드를 다 빼앗기고, 모두가 해산 조치될 시점에서 결국 그는 자신의 육신과 함께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을 가졌다.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자신의 존재와 그 내용은 있되 아무런 구실도 못하는 말뿐인 근로기준법을 함께 불사름으로써, 모두를 각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육신이 타는 고통 속에서도 근로 조건 개선을 외쳤고, 자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그가 살았던 시대'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가 죽음의 길에서 외친 이 한마디는 답답한 세상에 대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60년대는 어떤 의미에서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일시적인 안정기였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그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은 경제성장이었다. 그는 경제성장을 위하여 모든 국력을 여기에 집중시킨다. 산업기반이 부실했던 남한의 중점 성장 분야는 경공업, 노동 집약적인 섬유공업이었다. 박정희는 '수출 만이 살길이다'라는 인식 하에 냉철한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경쟁력을 높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를 위한 한가지 방법인 생산 비용 절감을 조장한다. 당시의 기업주들은 기업가 윤리는 물론이고 경영자로서의 이해도 부족한, 초기 산업화 단계의 자본가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지상과제는 자신들의 치부(致富)였다. 이러한 당시의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이나 생활환경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환경이 더 열악해 지더라도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착취당하며 살아간 사람들조차도 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숨막히게 어렵지만 개인이 거대담론에 파묻혀 있던 시기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희생을 강요당하던 시기였다.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현재의 가난과 억압과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기이기도 했다.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러한 시대에 대하여 그가 느낀 것은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엄연히 존재하는 근로기준법은 그에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다 주었다. 노동자도 인간이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시해 놓은 법의 존재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가 생각했던 세상이 결코 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그에게 좌절도 가져다주었다. 엄연히 법에 나와있는 것을 지키도록 강변할 때에 그에게 남겨진 것은 한없이 작은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대학생 친구는 자신의 왜소함을 극복하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은 그 절망을 딛고 내린 스스로의 답변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았던 대학생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전태일에게 또 현재의 노동자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전태일의 죽음이 가르쳐 준 것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고통받는 사람들은 항상 고통만 받고 있는가?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억압자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수없이 그러한 사례를 목격한다. 가끔 영화 같은 데에서 수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도 품어보게 된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사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일리가 있는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의식을 벗어 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주장하고 싸울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문제일 뿐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다수를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바로 진보가 된다.우리 사회는 민주를 지향하는 사회이며, 그렇기 때문에 봉건시대 이래 잔존해오고 있던 이러한 억압, 피억압의 관계를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노예의식의 찌꺼기, 깨어나지 않는 혼미의 의식이 사라지지 않고 민주화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복왕조 몽고제국1. 들어가며긴 역사동안 중화의 문화를 유지해온 중국, 그 긴 역사 만큼이나 그들의 자부심은 엄청난 것 같다. 근대 서구 문명이 동양에 공세를 퍼붓기 이전만 해도 중국은 동방세계의 중심으로 인식되었고 그만큼 선진적인 문화를 일구어 놓았다. 이러한 중국도 그 맥을 이어나가는 데에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수난을 당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며 지켜낸 문화이기에 그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은 더욱 고양되었을 것이다. 과연 그 문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몽고제국과 원나라, 남송의 존재는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의 해답을 제시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착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한족의 문화와 유목과 약탈에 기반한 북방민족의 문화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2. 몽고제국금이 쇠퇴해갈 무렵 외몽고 지역에서는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고족이 돌연 발흥하여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몽고족은 당대에 흑룡강의 지류인 실카강 부근에서 유목하는 소부족이었는데, 12세기 후반 몽고어로 '최고의 쇠로 만든 인간'이라는 뜻의 테무진이 몽고족 내부를 통일해 이 때에 징기스칸이라 칭해졌다(1187년). 이후 주변의 몽고계와 투루크계 부족을 격파해 1206년에는 전몽고부족에 의해 쿠릴타이에서 다시 칸에 추대되었다.몽고를 통일한 징기스칸은 이후 매년 서하와 금을 공격하여, 물자와 가축 및 인원을 약탈하였고, 1215년에는 금의 수도인 연경을 경략하였지만 곧 하남으로 물러났다. 금은 수도를 변량으로 옮겨 몽고의 압력을 완화하려 했다. 경동방을 거의 제압한 후 몽고족의 공격은 서방으로 향했다. 이미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왕국을 격파한 징기스칸은 1219년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서방원정에 나섰다.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의 강국은 아무르강 유역의 호레즘왕국이었는데, 몽고족은 파죽지세로 호레즘왕국을 무너뜨리고 1225년에는 남으로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까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귀환한 징기스칸은 1227년 서하를 멸망시킨 후 나아가 금의 공략을 꾀하다가 중도에서 사망하였다.징기스칸의 정복사업은 자손에게 이어져 오고타이칸이 결국 1239년에 금조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으며, 원정군은 러시아에서 동유럽까지를 석권하였다. 그는 요 왕실의 후손이었던 야율초재를 등용해 의례의 제정과 지폐의 발행, 세법의 정비 등 정치체제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해 도성을 건설하였다. 이 도성을 중심으로 제국의 전역에는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각 도로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잠치가 설치되어 공용으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숙박과 역마를 제공하였다. 몽케칸 때에는 서아시아의 압바스왕조를 무너뜨려 몽고제국의 영역은 동해에서 남러시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이 대영역은 몽고의 관습에 따라 징기스칸의 자제에게 분할되었다. 몽고의 고지 및 화북은 몽고 황제의 직할령이 되었고, 남러시아의 킵차크한국은 장자 주치의 아들 바투에게, 서아시아의 일한국은 막내 톨루이의 아들 훌레구에게, 서투르키스탄의 차가타이한국은 둘째 차가타이에게, 동투르키스탄의 오고타이한국은 오고타이의 자손에게 계승되어 분할되었다. 이리하여 몽고황제를 종주로 하는 대제국이 출현하였다.3. 원의 성립몽고제국은 금조를 멸망시켜 회수 이북의 화북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소수의 유목민족이 이 광대한 농경지대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에 직면했다. 당시 화북에는 금조 말기의 혼란을 틈타 성장한 한족 출신의 군벌이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고족은 요충지에만 군대를 주둔시켜 다루가치라는 감독관을 파견하면서도 한편으로 현지의 지배는 이들 한인세후에게 위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고타이칸의 말년에 몽고의 서아시아 정복과정에 협력했던 이슬람 상인이 국가와 유목영주의 재정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들 상인은 투르크어로 조합을 의미하는 오르타크라 불리며 개개 유목영주의 봉지로부터의 조세의 징수와 국가의 재정수입도 청부받았다. 또한 고리대를 통해 화북의 농민들에게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여 원성이 자자하게 되었고 따라서 화북의 통치는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오고타이칸의 사망 후 일어난 계승분쟁 후 1251년에 톨루이의 장자 몽케가 즉위해 중국지배의 재건을 꾀했다. 그는 오르타크 상인의 활동을 규제함과 동시에 큰 동생이었던 쿠빌라이를 막남한지대총독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남송의 정복에 착수했다. 유병충과 허형 등 한족 지식인의 보좌를 받은 쿠빌라이는 강한 남송의 저항을 의식해 티베트와 사천을 공격한 후 운남의 대리국을 멸망시켰고 베트남에까지 침공하였다. 1259년 사천에 출정했던 몽케칸이 사망하고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막내 동생 아릭부카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쿠빌라이는 먼저 선수를 쳐 남송과 화의를 맺은 후 1260년 개평부에서 스스로 칸의 지위에 올랐다. 수도를 연경으로 옮겨 대도로 삼았고 1271년에는 대원이라는 국호를 칭했다. 4년만에 아릭부카 등의 내분을 평정한 쿠빌라이칸은 남송에 대한 침공을 재개해 1276년 수도 임안을 공략하였으며, 1279년에는 남송의 잔여세력을 모두 진압하였다. 쿠빌라이칸에 의한 남송의 멸망으로 원의 국가기반이 농경지대인 중국으로 옮겨졌지만, 이 상황은 역으로 징기스칸에 의해 창설된 몽고 유목제국의 분열을 가져왔다. 오고타이한국의 카이두칸이 차가타이칸과 결탁해 쿠빌라이칸의 몽고제국의 종주권에 도전하였다. 이 항쟁은 약 40년간 계속되어 1303년에야 종결되었지만 그 결과 4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고 원제국 내에서도 중국의 비중이 한층 강화되었다.중국 전역을 장악한 원은 전국적인 통일적 지배체제의 구축에 진력하였다. 우선 한인세후에게 위임되었던 화북지역에 대한 민정권과 군정권을 회수해 거주 인민을 직접지배하에 두었다. 이어 대도로 수도를 옮긴 후 중앙에는 민정을 담당하는 중서성과, 군정을 담당하는 추밀원, 감찰기관으로서의 어사대를 두었다. 지방에는 중서성의 출장기관으로서 행중서성을 두었다. 이 행중서성은 약칭하여 행성이라고 하며 원의 멸망까지 11개가 설치되었는데, 현재 중국 지방행정구획으로서의 성(省)의 기원을 이루었다. 행성 아래에 로, 부, 주, 현으로 나누어 관료제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4. 원조의 사회, 문화원대의 사회에서는 몽고인, 색목인, 한인, 남인의 네 계급이 존재하여 민족 차별이 심하였다. 각종 국가기관의 장은 반드시 몽고인이 차지하였고 차관급은 색목인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한인과 남인은 간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여기서 한인이라고 하는 것은 한족도 포함하고 있으나 금나라 치하에 있었던 한족, 거간족, 여진족들을 통틀어서 한인이라 불렀다. 그리고 남인은 남송에 속했던 한족이었다. 남인은 한인보다도 더 최하에 속하였다. 특이한 것은 색목인을 우대하여 몽고인 다음의 신분으로 분류한 것이다. 이는 한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여 강남 지배에 어려움을 겪었던 몽고인들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색목인들은 몽고인들의 지배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몽고인과 한인, 남인의 사이에서의 중간 착취가 심하여 사회 불만 세력을 낳게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