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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후기사] 元간섭기 이후의 高麗와 우리 文化에 끼친 영향 평가A+최고예요
    元간섭기 이후의 高麗와 우리 文化에 끼친 영향槪 要Ⅰ. 머리말Ⅱ. 蒙古의 侵入과 高麗의 對應Ⅲ. 蒙古族의 支配方式Ⅳ. 高麗 元의 相互交流Ⅴ. 元간섭기의 助攻貿易Ⅵ. 高麗의 정치적 變化Ⅶ. 地方制度Ⅷ. 元나라와의 交流가 끼친 文化와 경제적 영향Ⅸ. 우리 文化 속에 남아있는 蒙古文化Ⅹ. 맺음말Ⅰ. 머리말高麗를 武臣亂을 境界로 前期, 後期로 나눈다. 그리고 前期는 太祖에서 成宗까지의 完成期와 仁宗에서 毅宗까지의 發電機, 後期는 武臣 執權期와 蒙古 간섭기로 나눌 수 있다. 13세기 초엽에 이르러 동아시아의 政局에 다시 波瀾이 일기 始作하였다. 蒙古族이 새로이 흥기하여 거대한 勢力을 形成했기 때문이다. 蒙古族은 원래 지금의 蒙古平原에 자리잡고 있던 遊牧民族으로, 遼金시대에는 그 支配를 받아 왔으나, 13세기 초두에 테무진이라는 영웅이 나와 周邊의 部族을 正服統一하여 마침내 강대한 세력으로 成長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한 張本人인 테무진이 바로 1206년(고려 熙宗 2년)에 칸(汗) 즉 皇帝의 지위에 올라 蒙古의 太祖가 된 징기즈칸이었다. 당시 中國 大陸의 南部에는 南宋이 자리잡고, 北部 및 滿洲에 걸치는 地域은 女眞族의 金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蒙古의 서쪽에는 티벳족의 일파인 당구트족의 西夏가 있었다. 칭기즈칸은 곧 이들 나라에 대한 正服事業을 展開하지마는, 高麗도 그 波瀾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蒙古’하면 高麗時代 때 30년간 우리나라를 침략해 갖은 苦草를 안겨준 民族이고, 징기스칸의 世界正服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성이 강하면서도 무지막지하다는 뉘앙스를 떨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얼굴색이나 생활 습관이 비슷하다는 점에서는 친밀감마저 줄 때도 있다.우리나라의 蒙古 侵略期는 高麗 高宗 때(13세기 초)부터 恭愍王 때(14세기 중엽)까지 약 150年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蒙古는 日帝治下 100여년 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다. 蒙古의 侵入으로 變化된 高麗社會像과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蒙古의 文化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Ⅱ. 蒙古의 侵入과 高麗의 對러나 蒙古는 高麗의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高麗에 사건의 責任을 엄중히 추궁하고 國交를 斷切하고 말았다. 蒙古의 使臣을 暗殺한 범행이 누구의 소행인지 이 문제를 해명할 도리는 없었고, 사신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蒙古가 高麗와 國交를 斷切한 것은 지금까지의 蒙古의 慣例로 미루어 보아 앞으로 대대적인 出兵을 하겠다는 意思의 表示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蒙古의 침략은 韓半島를 휩쓸게 되었다. 이와 같이 蒙古侵入의 직접적 동기는 蒙古의 사신 著古與의 암살사건과 결부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가령 사신의 암살이라는 不祥事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高麗는 조만간 正服의 野慾에 불타는 蒙古의 侵略을 모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高麗에 대한 蒙古의 出兵은 蒙古가 아시아 制壓의 一環으로 미리 計劃해 둔 軍事행동의 실천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蒙古의 군사적 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아시아의 政局이 高麗에 强要한 하나의 운명적 悲劇이었다.1차 침입과 그로인한 江華島 遷都와 開經還都를 요구한 2차 침입 이후, 高麗의 국보로서 八空山 符印寺에 소장되어 있던 高麗大藏經 舊彫版이 이때 別動隊의 侵略으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지만, 수원의 속읍인 처인성(용인)의 김윤후의 선전으로 蒙古의 적군은 指揮官을 잃고 전의를 상실하고 부장 鐵哥의 인솔하에 곧 北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제2차 침략군이 撤去한 이후 高麗는 약2년간 蒙古의 侵略을 모면하였다. 그러나 蒙古의 제3차 侵入은 高宗 22年으로부터 26年까지 (1235-39)전후 약 5년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이번 侵入軍의 지휘자는 唐古였다. 唐古는 역적 洪福源을 앞장 세워 밀고 내려왔다. 이번 侵入에 있어서는 蒙古軍은 그 戰術을 바꾸었다. 전번과 같이 江華島의 정부에 대하여 交涉을 하는 일은 없이 그저 高麗의 전 國土를 가림 없이 蹂躪하였다. 北은 지금의 平安道와 함경도로부터 南은 지금의 京畿道충청도全羅道慶尙道 등지에 이르기까지 蒙古는 그의 侵入에 抵抗하는 高麗의 병사에 철저한 공격을 가하였다. 抗戰을 결의24-1369)이나 오고타이한(1224-1310)이 그렇고, 또 처음에는 求赤國이라고 불리다가 유럽 원정 후에는 확대되어서 킵챠크한국(1243-1502)이라고 불리게 된 지역들이 모두 이 유형에 속한다.둘째는 蒙古帝國의 領域으로 편입해서 蒙古族이 직접 行政을 맡는 정복지역을 말함이니 直接通治의 유형이다. 女眞族의 金나라의 땅이 그러하였고, 위구르족의 지역이나 콰리즘의 나라가 이 유형 속에 들어간다.셋째는 服屬國을 그대로 독립국으로 두고 그 支配體制도 그대로 인정하면서 蒙古가 派遣한 다루가치들로 하여금 강한 통제를 가하게 하는 유형이다. 蒙古의 太宗이 高麗에 高宗 18年(1231) 侵略軍을 보내어서 다음해 和平條約을 맺었을 적에 高麗에 기대한 것은 이런 유형의 관계였으나, 高麗는 이런 關係를 거부함으로써 戰爭은 13세기의 50년대 끝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 13세기의 50년대 끝 무렵까지에는 이런 셋째 유형에 속하는 관계를 가진 나라는 아직 없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셋째의 유형으로는 高麗王國이 약 1세기 동안의 武臣政權이 高宗 46年(1259)에 무너짐과 더불어서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거의 40年에 걸쳤던 蒙古族의 거듭된 侵入에 대해서 줄기차게 抗爭했던 高麗는 이렇게 世祖의 登場과 때를 같이 하여 蒙古에 복속하게 되고, 일단 복속된 후에는 부분적인 抵抗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가장 복속의 도가 심했던 시기를 이루었다.위에서 보아온 세 가지의 복속유형에 있어서 蒙古族이 얼마만한 통제와 통치를 가했느냐 하는 것은 유형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또 같은 유형 속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경우에 있어서 蒙古族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原則과 方式으로써 복속에 임하였음을 볼 수 있다. 蒙古族의 통제와 통치의 정도가 가장 강력 긴밀했던 것은 물론 直接通治의 유형에서였고, 그 다음이 間接通治의 경우였다. 高麗安南과 같은 복속적인 國家의 경우에 있어서는 主權이 存續有志되었고 國內行政이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蒙古의 통제는 물론 가장 완만하였다. 그런데 통제가더구나 蒙古公主와 高麗人 王妃와의 사이가 항상 긴장을 초래하여 蒙古公主가 질투를 일으킴으로써 大小의 여러 사건이 벌어지게 마련이었고, 여기에 元의 제실이 친정으로서 간섭하는 경우가 많았다.또한 蒙古의 공주들이 高麗로 시집 오므로 인해서 人物과 文物의 교류가 자연 많아지게 되었다. 蒙古公主들이 올 적에는 거창한 일행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蒙古公主의 勢力 아래에서 종종 橫暴를 부렸으며, 蒙古式의 시설과 기물들이 公主 올 적마다 왔었고, 高麗宮中에서 널리 쓰이게 되니 자연 몽고식 生活方式도 퍼지게 되었다.2. 人的 交流우리 역사에서 高麗만큼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없던 나라도 드물었다. 西域人, 中國人, 蒙古人 등이 아무런 신분적 제재도 없이 자유로이 高麗 조정에 入仕해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다. 출신 또한 상인, 귀족 등 다양했다.이들 귀화 외국인들은 왕실측에서 주로 薦擧하거나 뽑아 쓴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王權과 신권의 갈등 속에서 지방 세력을 기반으로 한 貴族들에 대응해 王室측이 상대적으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주 귀화 외국인들을 등용했다. 이들은 특별한 지역 연고도 없을 뿐만 아니라 國際的 감각이 있고 철저히 왕권과 왕실에 附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였다.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주로 蒙古 戰亂 이전의 경우였고,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元나라의 영향 아래서 高麗의 자주성을 제약하는 의미의 귀화 외국인들이 조정에 得勢하게 되었다. 따라서 귀화외국인들의 高麗 조정으로의 진출은 前期와 後期에서, 확연한 차이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高麗에는 元의 征東行省이 設置되어 있어서 여기에 때로는 元의 官吏들이 제법 다수 와 있었다. 평상시에는 高麗人들이 征東行省의 관리로서 충당되어 있었지마는 元이 특별한 경우에 高麗內政에 간여하려 했을 적에는 이른바 增置行省을 했을 적에는 수백 명의 元나라 사람들이 고려에 와 있었고, 가족도 데려오는 수가 있었다.관리 이외에 한때 蒙古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었고, 어느 정도 일정한 시기 동안 주재하고 있은 蒙古측 사람은 다루가치와 그의신[방물을 진상하는 사신은 38회]을 派遣한 데 비해 元과는 109년 동안 총 345회의 사신을 보냈고 그 가운데 137회의 사신은 방물을 진상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면 元간섭기 助攻關係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Ⅵ. 高麗의 정치적 變化강화가 성립된 이후의 高麗와 蒙古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새로운 段階에 들어가게 되었다. 蒙古가 포악하고 야만적인 侵略戰爭을 포기함으로써 일단 平和는 回復되었다. 그러나 高麗蒙古 간의 國交關係는 표면상의 平和처럼 그렇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강화가 성립되자 蒙古는 高麗의 國王을 回遊하여 그를 앞장 세워 高麗에 있어서의 親蒙古勢力을 확대하고 反蒙古勢力을 배제하기에 노력하였다. 한편 高麗의 國王은 蒙古의 皇室과 接近함으로써 王權의 回復과 擴張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政略의 背後에는 蒙古가 日本 정벌의 基地로서 高麗의 人民과 物資를 利用하려는 야심과 또 王室의 對蒙古接近을 경계하여 蒙古에 反抗적 態度를 취하는 高麗 武人들의 불안과 초조가 착잡하게 얽히어 있었으므로 사태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었다. 蒙古에서 世祖가 즉위한 이후 高麗에 대한 그의 政策은 매우 관대한 것이었다. 國王의 親朝로 인하여 兩國의 친선관계는 더욱 긴밀화되고 高麗의 國王 元宗은 蒙古 皇帝 世潮의 두터운 개인적 信任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王權의 회복 확장에 큰 公憲이 되는 동시에 蒙古에 대한 高麗의 附庸化의 길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蒙古에 屈伏치 않은 나라는 동아시아에서 오직 宋과 日本뿐이었다. 蒙古가 日本을 正服하기 위해서는 高麗라는 기지가 꼭 필요하였다. 世祖는 高麗를 日本 정벌의 기지로서 이용하기 위하여 高麗에 寬仁한 態度를 보이고 또 元宗을 우대하였다.蒙古의 日本 정벌에 대한 高麗朝廷내의 분열이 심각했고, 그런 과정에서 林衍이 새로운 權力者로 등장하였고, 얼마 안 가 政府의 실권을 잡고 國王에 對抗하는 큰 勢力을 形成하고, 元宗을 폐하여 왕제 安慶公 을 신왕으로 擁立하였다(元宗 10年 6月). 國王의 廢立은 蒙古의 干涉으로 인하여 失敗하게 되고,
    인문/어학| 2003.12.04| 17페이지| 1,000원| 조회(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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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성장과 현대사회] 아동학대
    1.개념아동학대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에 의한 18세 미만 아동의 건강과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 정서적, 성적 폭력, 가혹행위 및 유기와 방임(적절한 보호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2.아동학대의 분류*신체적 학대-신체적 손상을 입힌 경우와 신체적 손상을 입도록 허용한 경우를 말한다.예)신체적 손상: 구타나 폭력에 의한 멍, 화상, 찢김, 골절, 장기 파열, 기능 손상생후 12개월 이하의 영아에게 가해진 체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학대이다.*정서적 학대-언어적, 정서적 위협, 억제, 감금, 기타 가학적 행위를 포함합니다.예)아동의 인격, 감정이나 기분을 심하게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행위, 좁은 공간에서 장시간 혼자 가두어 놓는 행위*성학대-성인의 성적 충족을 목적으로 아동과 함께 하는 모든 성적 행위예)성적행위에는 성적유희, 성기 및 자위행위 장면의 노출, 관음증, 성기삽입, 성적접촉, 강간 등과 같은 접촉적인 행위, 매춘, 매매 포르노 매체에 배우로 출연, 포르노물 판매 행힝*방임-고의적이며 반복적으로 아동 양육 및 보호를 소홀히 함으로 아동의 건강과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모든 행위예)고의적이며 반복적으로 아동에게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장시간 아동을 위험한 상 태에 방치하는 물리적 방임 및 유기.교육적 방임: 아동의 무단 결석을 허용하는 것 등.의료적 방임: 예방접종을 제때에 하지 않거나 필요한 치료를 소홀히 하는 것 등.정서적 방임: 아동과의 약속에 무신경하거나 아동의 마음에 상처 입히는 등.3.아동학대의 징후(1)신체징후·해명되지 않은 멍과 매 자국이 있다.예)사람이 문 자국, 손가락으로 심하게 누른 작은 멍들, 얼굴이나 뺨의 꼬집힌 자국 등·해명되지 않은 찢어지거나 할퀸 상처와 찰과상, 화상, 골절 등이 있다.·복부상해나, 각 부분의 치유된 정도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 있거나 정상적인 체력의 결핍 등의 영양불량 상태이거나 계절에 맞지 않거나 더러운 옷 등을 입고 있다.·머리와 얼굴의 상처와 함께동하거나, 자주 졸거나, 발작 혹은 졸도를 하거나, 호흡곤란 등을 일으키면 뇌출혈을 의심할 수 있다.(2)행동징후·공격 행동·지나친 애착·대인관계 기피·강박·분노와 퇴행 ·성적행동·두려움 ·우울·기타(귀가 거부, 절도, 구걸..)(3)발달징후·운동발달지체·정서발달지체·언어발달지체·사회성발달지체·인지적발달지체4.발생원인▷부모의 미성숙-나이가 어리고 안정되지 못한 부모들은 아동의 행동이나 욕구를 이해하지 못하여 아동 학대를 쉽게 행하고 건전한 가족관계의 형성에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아동양육에 대한 지식부족-다양한 아동발달에 대한 지식의 부족은 어떻게 아동을 키울 것인가를 잘 모르거나 건전 한 가족관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입니다.▷지나친 기대-부모들은 종종 자신의 자녀가 마치 어른처럼 행동해 주기를 기대하는데, 이처럼 높은 기 대는 아동학대의 가능성을 높이는 원인이 됩니다.▷잦은 가정의 유기-경제적 어려움, 실직, 잦은 병치레, 가정불화 등 잦은 갈등으로 인해 부모들이 자녀를 학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정서적 욕구불만-부모들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동에게 그 불만을 터 뜨립니다.▷사회적 고립-아동양육의 부담을 도와줄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 이웃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경우에 아동학대를 하기도 합니다.▷어릴 때 학대받은 경험-자녀를 학대하는 부모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이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받은 경험이 있 습니다.▷알콜 중독, 약물 중독-알콜 중독이나 약물 중독에 빠진 부모들은 자신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자녀를 학대하기 도 합니다.아동학대의 가해자중 대부분은 바로 부모들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정상적인 사람들이며, 단지 소수의 가해자들만이 성격장애나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부모들은 학대를 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또한 아동학대와 방임이 빈곤하거나 교육수준이 낮은 가정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아동학대는 환경적 스트레스와 부모의 성격특성이 상호에서도 일어날 수 가있다.5.아동학대의 후유증과 영향1신체, 정서학대와 방임의 후유증아동학대의 결과는 단순한 타박상, 골절 등에 그치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정도의 후유증을 가져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중추신경계 장애공격, 파괴적 행동, 과잉 행동, 자학적 행동, 반사회적 행동 및 비행, 자살자신감 결여, 자아기능 손상, 위축, 대인관계기피, 불면증, 급성불안 반응, 심한 공황상태성장 발달 지연, 언어발달의 장애, 집중력 장애, 정신지체2성학대 후유증성추행, 성폭행, 성착취, 가족내 성학대를 지속적으로 경험한 아동에게는 성에 관한 부적절한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금전이나 선물, 관심 등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성에 대한 공포심, 수치심, 혼돈 등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식증과 같은 파괴적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성학대는 시간 경과에 따라 달라진다.학대 초기에는 수면장애, 신경질, 가해자에 대한 공포심 등의 불안 증세가 두드러지며, 나이에 맞지 않는 성적 행동, 관심을 끄는 행동, 지나치게 매달리는 행동, 성에 관한 혼 란된 행동, 성적 방종, 고독, 우울, 슬픔 등 자아개념의 손상과 연관된 행동 변화가 나타 난다.학대받은 아동은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장애, 우울, 자아 존중감 저하 및 자살 행동, 약 물 남용 기타 정신과 질환(경계선 인격장애, 다중인격장애), 성 기능장애, 성범죄 등의 문 제를 갖게 된다.3영향자녀가 부모에게 폭력을 경험한 후의 심리적 반응{반성하는 마음부모님을 이해부당하다는 마음자살이나 가출충동복수하고 싶은 충동기타계61(15.3)269(67.6)23(5.8)27(6.8)8(2.0)10(2.5)398(100)단위: 명(%)이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로부터 신체적 폭력을 당한 후에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에 있어서는 `잠깐동안 화가 나기도 하지만 곧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67.6%(269명)를 차지하였다. 부모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부모가 이것은 폭력이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는 부모의 폭력에서 폭력을 배우게 된다. 학습이나 모방의 효과로 자녀들의 부모님을 이해하게 된다는 응답은 폭력의 필요성을 수용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신 역동적 입장에서는 가정에서 폭행을 당한 아동들은 부모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느끼게 되고, 이 적개심이 억압되어 있다가 다른 대상에게 가해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부정적 심리적 반응은 이후 공격성이나 반사회적 행동으로 진행될 수 있는 매개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6.아동학대의 현황.신영화(1986:26-54)의 가출아동 100명과 일반아동 36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자료.·가출아동 10% 담배 불로 데임. 14% 칼로 위협 당함. 13% 칼에 찔림.·가출아동 17% 일반아동 1% -- 반복적인 성적 모독을 당함.·성적 학대 가해자는 가출아동 경우 父가 15.0%, 일반아동 경우 父·母가 각각 3.0%.선민선, 홍강의, 박정한(1991:103-109) 한 달 동안 매맞은 아동 918명(73.1%)·발로 차는 정도 이상으로 한 달에 2회 이상 맞는 아동 87명(6,7%)·매맞은 결과로 멍이 든 경우(52.7%)·골절(2.5%)·살이 찢어진 경우(1.5%)·의식을 잃고 쓰러진 경우(0.2%).이종복(1990:9-31)-성적 학대 발생률 조사·성적 학대 경험(13%)-[시기] 국민학교(12.3%) 중·고등학교(65.8%).한국성폭력 상담소(1993:42-47)-(1991년 2월~1992년 12월 상담 사례)·성폭력 피해자 1,264명 중 50.8%(630명)가 19세 이하 미성년자,그 중 13세 미만이 57.2%(362명)·피·가해자 관계--아는 사람 69.2%(816명)친족(친부, 양부, 형제, 친척) 26.2%(214명)7.아동학대 예방책1개인적부모 다음으로 아동과 많은 시간을 지내는 사람들의 세심한 관심이 학대로 고통받는 아동을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우선, 아동동학대의 징후를 보이는 아동이 있는지 관심을 갖고 찾아봐야 한다.셋째, 학대받는 아동을 발견하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찾아 기록하여 상담센터나 정부기관 등에 의뢰해야한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동을 성인의 축소판이나 부모 개인의 소유물로 여기지 말고, 아동에게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며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동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의 변화가 우선되어야만, 학대받는 아동에 대한 문제 해결도 가능할 것이다.2사회적그 동안 우리 사회는 아동학대를 가정내의 문제로 간주하여 남의 가정사에 간섭치 않으려 하였고, 사법 경찰마저도 개입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지난 7월 1일부로 가정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이하 가폭처리법) 및 가정폭력방지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이하 가폭방지법)이 시행되므로 가정폭력 문제에 대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대개 구타당하는 아내나 아동들이며 위 법의 시행으로 그 동안 참고 지냈던 아내들이, 심지어는 자녀가 아버지를 신고하여 형사사건으로 처리되고 결국 가정해체에 이르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위 법은 다분히 성인위주이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모르는 학대받는 아동을 보호하기에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가정 밖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는 현행 형법으로 아동의 가족이 대응할 수 있고,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폭력문제에 성인은 스스로 가폭처리법에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호자가 가해자인 가정 내 아동학대의 경우 친척, 주위사람들의 신고에 의하지 않는 한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형법이나 가폭처리법의 좋은 점은 채택하되 아동의 직접적인 진술 없이도 조사가 가능 하는 등 두 법들과 차별화 할 필요가 있다. 아동복지법내의 아동학대 관련조항들은 타인 또는 가족 구성원에 의한 아동학대를 포괄적으로 다루되 간결한 절차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3국가적아동의 권리를 침해하는 아동학대는 국내법과 내법
    사회과학| 2001.12.12| 6페이지| 1,000원| 조회(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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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학개론] 사회학 개론 - 성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언젠가 세계문화사 강의시간에 교수님께서 인구 감소 현상에 관한 설명을 하시다가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다. 중국은 현재 1가정에 한 아이만을 제도적으로 낳을 수 있고, 둘째부터는 벌금이 부과된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여아보다는 남아를 낳기를 원하고, 여아를 유산하거나, 호적에 올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인구 조사에 빠진 여아까지 산출해보면, 중국의 인구는 더욱 올라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여아보다 남아를 선호하는 것은 중국이 유교주의 사상에 아직까지도 젖어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았다.이러한 잘못된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중국뿐만이 아닌 현재 우리 나라까지도 남녀의 성비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면서, 남성들은 1대 1로 공급되지 않는(?)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서 차지하려고 하고, 남성 위주의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남성위주의 사회가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으며, 전근대적인 남녀 차별을 발생시키고, 여성을 남성에게 맞추어 가려고 하는 등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서론남아선호현상은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관습이다. 근대화, 산업화를 거쳐 정보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여전하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떠들지는 않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로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가족계획의 실체가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시위현장이 학교라는 점만은 간과할 수 없을 듯하다. 요즘 학교에 가보면, 학급학생의 ⅔이상이 남아이다. 현재의 성비가 117이라고 하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지난 97년 『초음파 기술이 여성들의 임신 경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썼던 여성학자 서정애씨(36)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아들을 못 낳는다는 것은 여자 스스로 지식과 돈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위」라고 말했다.미국 인구학회지 「데모그라피」는 지난해 『선별 임신기술이 발전하면 한국의 성비는 169까지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남녀성비 파괴는 남아선호 의식과 첨단 의료기술이 힘슬픔을 다시 겪는다.본론남성위주의 사회가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 남성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여성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상들이 사용되고 있다.1.순결 이데올로기와 정절 이데올로기가부장제 사회는 남녀간의 성생활을 한 쌍의 합법적인 부부관계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제한하는 일부일처제를 정착시켰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결합형태를 통해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종속과 성적 종속을 제도화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성은 남자의 상속권과 가문계승의 목적을 위한 출산과 생식의 기능에서 최상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순결과 정절이 여성에게 절대적인 의무로 강요된다. 반면 남성은 매매춘이나 축첩을 통한 이중적인 성생활이 허용된다. 그런데 순결과 정절 이데올로기에 따른 정숙한 여성만이 존재한다면 강한 성적 본능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남성의 성적 방종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해답은 여성을 이분화 한다는 데 있다. 여자들에 대한 남자들의 생각에는 상당한 상호모순이 있다. 한편으로는 여자는 성적 욕구가 없다고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자는 무한한 성적 만족을 요구한다고 본다. 이 상호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자를 ‘정숙한 여자’와 ‘야한 여자’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좋은 여자(정숙한 여자)는 본질적으로 성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남편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며 정절을 지킨다. 저질적인 남성욕구에 응할 필요가 없다. 남편의 욕구를 정열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 줄 수는 있으나, 주된 목적은 출산에 있다. 또 나쁜 여자(야한 여자)는 색골일 정도로 근본적으로 성에 대한 관심이 강하다. 남성을 원하며 성을 즐긴다. 타락한 여자들은 그 밖의 다른 일을 할 의욕이 없고, 게으르다. 이를 변화시키려면 엄격하게 다스리는 수밖에 없다. 성적 에너지와 취향에 관해서는 사실상 남성과 다를 바가 없다 남성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이분화를 통해 여성은 정숙한 집단과 매춘여성으로 대표되는 타락한 여성집단으로 분리된다. 정숙한 여성만의 존재로는 남성의 성 행동을 충족할 수러한 개방된 성의식이 곧바로 실천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그들의 성경험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혼시절의 성경험을 가진 남성 중 44.7%가 매춘여성이나 유흥업소 종사자와 첫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애인이나 친구와의 첫 성경험도 38.1%나 차지한다는 조사보고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 수치는 겉으로 드러나는 엄격한 순결 이데올로기에 대한 수용과 실제 경험상의 차이를 말해준다. 이 경우 혼전 성경험을 한 여성들은 대부분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이처럼 혼전 성경험이 결혼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과 불리한 입장을 초래하는 현실에서, 성의 자유화는 여성에게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구속을 강화시킬 분이다. 실제로 혼전 성경험을 가진 경우는 남자가 여자보다 몇 배 더 많다. 남자 대학생은 대략 세 명중 한 명이, 여학생은 열 명 중 한 명이 성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남성들은 자신의 결혼 상대자는 순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혼 상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여 흠 하나 없는 순결한 여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에 남성들이 여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남성들은 자신들은 성적 경험이 있으면서도 여성에게는 순결을 요구하는 자기 모순에 빠진다. 다음 사례들이 남성들의 의식을 잘 대변해 준다.순결 개념 같은 건 없다.오히려 ‘여자친구랑 잤다’그런 말 재미있게, 자랑스럽게 얘기한다.나는 다른 여자랑 자더라도 내 아내만은 깨끗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그냥 박혀 있다.애인과는 키스밖에 못한다. 책임질 수 있는지가 아직 확실하지 못하므로... 순결을 지켜주고 싶다.술을 마시던 그는 몹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했다. “사실은 어제 그런데(매춘)갔었어.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할 수 없었지만, 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의 순결을 지켜주고 싶어서였어.”◎청소년기에 이루어지는 성의 사회화과정에도 성 역할이데올 수 없고 다만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성폭력에 대한 고정관념 정리.성폭력의 제재를 받는 것; 성기에 의한 폭력2.2%밖에 신고가 되지 않는 이유는 성범죄에 대한 수치심과 여성으로서의 순결을 상실했다는 사회적 통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보수주의 때문에 성범죄율을 증가하고 있고, 그 신고율은 저조하다. 성폭력의 경험에 대한 조사에서는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한 정도가 심할수록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데, 강간의 경우 98%가 신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났다. 그 신고 과정과 재판 과정-상대 검사나, 변호사의 심문과정 등-에서 또 한번 성폭행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성폭행이 일어나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해보라는 둥, 먼저 유혹하지 않았냐는 등 남성에 의한 야만적인 행위를 여성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여성 유발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성폭력이 성에 대한 폭력으로서 인정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 순결을 잃었다는 식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신고하는 것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 과정 중에 다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아 여성들은 피해를 입고도,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고, 가해자는 또 다른 피해자를 야기 시킬 수 있게 된다.◎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편견1강간만이 성폭력이라는 점.범죄 성립에서 ‘성기’만 중시⇒성희롱, 추행 등도 성폭력의 문제에 포함되어야 한다.2성폭력은 낯선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70%는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또한 근친 성폭력 10건 중 4건은 친아버지가 저지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폭력예방치료센터가 지난 95년부터 올 10월까지 상담한 총 92건의 전북지역 근친 성폭력실태를 분석한 결과 40.2%가 친부에 의한 성폭행이었으며 친·인척(32.6%)과 의부·친오빠(10%)등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친부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 대부분이 13세 이하 어린이였으며, 이들 중에는 7년 이상 성폭행이 지속된 사례도 있는 습상의 금기와 터부-“여자가 아침부터 재수 없게”⑩신용상의 성차별-“남편 보증이 필요해요”⑪성 차별적 민원태도-“아줌마, 등본 나왔어요”단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나 기능이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차별이나 남녀불평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중요한 관건은, 한쪽의 성이 다른 성으로부터 결정 및 통제권을 배제 당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활동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다른 한편,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종류의 역할이나 기능을 담당하더라도 그 역할이나 기능이 상호 의존적이며 보완적인 균형상태라면, 달리 말해서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남녀 양성에 대하여 필수적이라면, 그 상태는 평등한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차별이란 한쪽 성이 다른 한쪽 성에 대한 통제권을 얻을 수 있는 활동영역을 독점하거나, 적어도 그것에 더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상황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상황은 남성이 더 많은 가치가 부여된 활동을 독점하거나 아니면 여성에 비해 월등한 선취권을 행사하여 궁극적으로 통제권을 얻고 있다. 곧 남성 지배적 상황이자 여성예속 상황이다.우리가 그 실체를 꿰뚫어 보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떤 형태로든지 지금까지 존재한 성생활체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 다른 이유로는, 성차별구조에 바탕을 두고 누려왔던 기득권과 기대역할 및 이해관계를 서로 달리하면서 그만큼 사실은폐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의 성과 다른 사람들과의 성이 접근하는 관계에 대하여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진지한 대화를 가질 때 비로소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다.4.대중매체에서 제시하는 여성상(대중매체를 주도하는 것은 남성이다.)대중 매체를 통해 바람직한 여성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 또한 남성을 위한 성역할 고정화나 성 상품의 도구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는 성역할 사회화의 중요한 기관이 되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됨에 따라 가족의 많은 기능들이 대중매체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현모양처최근 내훈』)
    사회과학| 2001.12.12| 9페이지| 1,000원| 조회(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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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철학 및 교육사] 열린교육 평가D별로예요
    열린 교육 학과:학번:이름:열린교육이란 하바드 대학의 바쓰(Barth)가 최초로 쓰기 시작한 용어로 Open Education이라고 한다. 열린 교육이란 Open curriculum 교실의 벽을 없앤다, Open space school 열린 공간학교, school without wall 벽없는 학교, school of integrated curriculum 교육과정이 통합되었다, free school, free day school자유로운 교육방법 등 명칭이 다양하며, 이러한 명칭을 통해 열린 공간, 열린 시간, 열린 교육과정, 열린 수업을 지향하는 교육형태를 포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존의 교육은 폐쇄적이고, 닫힌 교육이었으나 `97열린교육 박람회를 통해 열린 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현재는 열린교육을 위한 `열린‘산업이 활개를 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열린교육을 정의하고 있는데, 그중 김은산은 획일적이고, 주입식인 일제 수업은 지양하고, 아동들에게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여 넓고 다양한 아동중심의 환경에서 자신들의 흥미와 각기 다른 발달속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생활하도록 하는 교육이라고 개념을 정리한다. 열린교육의 개념이 함축한 의미는 학교내적으로는 일제식, 주입식, 암기위주인 기존교육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아이들 각자의 개성과 창의력을 키워 주려는 교육이며, 발달속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생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탄력적인 교육과정의 운영과 교육적 분위기 속에서 아동들이 개성과 창의성, 자주적인 태도를 길러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외적으로는 가정, 사회, 직장, 학교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수혜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린교육의 핵심적 원리는 주체적 학습이라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어느 누구에게도 교육이 열려 있는 사회이고, 최근 멀티미디어, 하이퍼미디어, 인터넷, 원거리 의사소통 등의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열린교육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내가 찾은 인터넷 사이트에 열린사이버고등학교라는 것이 있었는데, 수업도 듣고, 과제물을 내는 등 인터넷상에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정보화의 요체인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C&C)은 원격교육, 재택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다가올 21세기 미래형 열린교육의 실현을 앞당기고 있다.열린교육과 대안교육의 차이점은 `열린‘이란 개념이 제도권 내의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념과 방법의 혁신에서 주로 사용된다는 것에 비해, `대안’은 정규학교형을 포함한 비제도권의 다양한 대안적 학교, 교육프로그램, 교육실천운동을 포괄하며, 대안교육은 생명과 질서를 존중하는 지속 가능한 가치의 지향, 지역 사회에 뿌리내린 `작은 학교‘의 지향,교육주체의 원상회복, 생활교육, `나’를 회복하는 교육이다. 내가 찾아본 대안학교에는 고등학교과정에 예전에 전인교육을 한다해서, 관심이 가던 거창고등학교가 있었다. 거창고등학교를 잠시 설명하자면,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율성, 협동성을 기르기 위해 개교기념 예술제, 1박2일의 봄소풍,가을 예술제, 바자회, 동아리 활동, 농장작업, 토끼사냥 등을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계획하고 진행한다.열린교육은 60년대 영국에서 시작되어, 70년대 중반에는 미국, 8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영국에서는 `비형식적 교육‘,`아동중심교육’의 용어를 선호하며, 교육부가 세운 열린 설계학교, 폭넓은 자유, 소규모 학교였으며, 국가가 지원하고 낡은 시설은 활용하며, 통합교과 장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 미국은 열린교육이란 용어를 선호했으며, 팀티칭을 중요시하며 열린공간과 융통성 있는 교육과정을 강조했다. 독일은 열린수업이라는 개념을 가지며, 발도르프 학교(Waldorfschule)라는 예체능 교육을 중심으로 열린교육을 실시했으며, 유급과 성적제도를 거부하고 장기담임제와 조기외국어를 실시했다. 또한 행정적, 재정적으로 독립하며 학생들의 등록금 제도를 실시했다. 일본은 개성화, 개별화교육를 지향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 아래 팀티칭 교사를 확충하고 자기 학습력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열린교육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며 1986년 서울 운현초등학교와 영훈초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96년 통계로 35%정도인 2천여 학교가 실시하고 있으며, 중고교 20여개교 내외이다.열린교육의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 몽테뉴, 루소, 페스탈로찌, 프뢰벨, 듀이, 몬테소리, 니일이 있으며, 이들의 공통적인 관점은 아동을 교육의 주체로 보고 아동의 시각에서 교육을 하는 아동중심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사는 원조자, 협력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교육의 한 방편으로서 놀이를 중요시한다. 구체적인 예로서 니일의 써머힐 학교가 있는데, 대안학교의 비인가교육과정에서 찾은 경남 지리산 부근의 간디청소년학교가 나이, 학년별로 학생을 나누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관심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영국의 써머힐 같은 통합학교 학제를 따른다고 한다. 써머힐 학교는 어린이들을 학교에 맞추는 대신 어린이들에게 맞추며,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스스로 배워가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인데, 교육의 목표는 학생 자신이 느끼는 행복, 성실한 삶의 자세, 조화로운 인간관계와 자유로운 심성 함양이다. 질서있는 공동체로 수준과 흥미에 맞는 반을 골라 들어갈수 있으며, 전교 자치회는 대표적인 교육방법이다.이렇듯 열린교육은 지금까지의 주입식, 일제수업을 지양하고 아동중심환경의 개방적, 허용적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생활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와 학부모 등 국민적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며 열기가 더해가고 있다. 여기에 멀티미디어, 인터넷, 원격교육 등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학교 공교육은 물론 사회교육,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더욱 확대 발전될 전망이다. 그러나 열린교육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비판적 시각이 만만치 않다. 일과성의 시대적 사조로 전락하여 새로운 교육철학, 교육사조에 떠밀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열린교육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 이론적 배경 및 철학적 사유의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개념정립이 안된 상태에서 무분별한 확산은 적지 않은 우려를 낳고 있다. 개념상의 애매모호함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열린교육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분석과 검증이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열린교육에 많은 영향을 준 니일의 서머힐은 성취도가 보잘 것 없었다는 점, 졸업 후 적응문제를 보이고 특별히 창의성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등의 문제가 있다. 둘째, 우리의 교육현실에 열린교육 적용의 적정성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열린 산업, 열린EQ학습, 열린수업, 열린소풍, 열린체육대회 등 우리 주변에 `열린‘이란 용어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교과 제재에 따라 오히려 강의식 수업이 유용할 때도 있고, 때로는 발견적 탐구수업, 토론식 수업이 적절한 때도 있다. 따라서 무조건 열린교육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현장에서는 열린수업이 가능한 제재를 선별 적용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셋째, 교육과정의 열린교육 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우리는 브루너Bruner의 나선형 교육과정 이후 학습량의 과다, 불필요하게 높은 수준의 내용을 강요받고 있는데, 6차 교육과정에서 수업시수를 줄여 학습부담을 경감시킨다고 하였으나, 초등의 경우 영어, 재량시간으로 오히려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이렇듯 형식에 치우친 수직정 상명하달의 틀에서 벗어나 학습자 중심의 열린교육 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히 요청된다. 넷째, 열린교육이 역기능을 극복하고 순기능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열린교육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긍정적 시각에서 호응하던 학부모들이 마구잡이식 열린교육, 가정과 학교에서 학부모의 빈번한 동원으로 `열린’이란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즉,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교육의 적용이 단기적으로 볼 때 학업성취도는 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고 창의성이 길러진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 IMF파동으로 재정적 지원이 어렵긴하나 학급 학생 수를 줄이고 보조교사를 배치하며, 교사들의 열린교육에 관한 부단한 연구, 연수가 이루어져야 열린교육의 역기능이 사라지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주체적 학습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열린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교육학| 2001.12.12| 3페이지| 1,000원| 조회(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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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대사회와 문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색상 평가A+최고예요
    신라본기탈해이사금3년(59) 봄 3월에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검은 구름이 덮개처럼 왕의 머리 위에 떴다가 잠시 후 흩어졌다.9년(65)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나뭇가지에 자그마한 금궤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그대로 보고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도 점잖았다. .......또 그가 금빛 궤 속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내물이사금3년(358) 봄 2월에 왕이 시조 묘에 친히 제사하였다. 보랏빛 구름이 묘당 위에 감돌고 이상한 새가 시조 묘당에 모여들었다.법흥왕7년(520) 봄 정월에 법률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붉은 빛과 자줏빛으로 등급을 표시하는 관리들의 공복을 제정하였다.15년(528)불법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중략)......이윽고 그의 목을 베자 목 벤 자리로부터 피가 솟구치는데, 빛깔이 젖빛과 같았다.진흥왕14년(553) 봄 2월에 왕이 해당 관청을 시켜 월성 동쪽에 새 대궐을 짓게 했는데, 누런 용이 그 터에 나타났다. 왕이 이상히 여겨 대궐을 고쳐 절을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선덕여왕7년(638) ...가을 9월에 노란 꽃 비가 내렸다.8년(639) ...가을 7월에 동해의 물이 붉어지고 또한 뜨거워져서 물고기들이 죽었다.태종무열왕2년(655) ...겨울 10월에 우수주에서 흰 사슴을 바쳤다. 굴불군에서는 흰 돼지를 진상하였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는 둘이요, 발이 여덟이었다.6년(659) ...9월에 하슬라주에서 흰 새를 진상하였다.문무왕.5년(665)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조문해 오고, 겸하여 자줏빛 옷 한벌, 허리띠 한 개, 채색 용직 비단 1백 필, 생초 2백 필을 보내왔다.....(중략)...이때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맹세를 하는데, 먼저 하늘과 땅과 산과 물귀신들에게 제사를 지낸 뒤 흰 말의 피를 입에 머금었다.---굳은 맹세를 할 대 흰 말의 피를 입에 머금거나 바르는 것은 옛날 의례의 하나이다.17년(677)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21년(681) 봄 정월 초하룻날은 온종일 낮이 밤처럼 캄캄하게 어두웠다.신문왕7년(687) ...이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두컴컴하고 우뢰와 번개가 심하였다.11년(691)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경덕왕12년(753)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15년(756) ...아득한 이내 회포 푸른 뭍이 막혔건만..(중략)....송죽 같은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 서리 맞아도 늘 변하지 말지라..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 제일의 관위를 주었다.원성왕원년(785)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6년(790)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9년(793) ...나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10년(794)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고구려본기태조대왕7년(59) 여름 4월에 왕이 고안연에 가서 고기를 구경하다가 날갯죽지가 붉은 흰 물고기를 낚았다.10년(62) 가을 8월에 동쪽 지방에서 사냥으로 흰 사슴을 잡았다.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순행하다가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55년9107) 가을 9월에 왕이 질산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동해곡의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는데 꼬리 길이가 아홉 자였다.56년(108) 봄부터 여름까지 큰 가뭄이 계속되어 땅이 붉게 갈라지고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69년(121)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하여 보냈다고국천왕4년(182)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원을 관통했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미천왕2년(301) 겨울 10월에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장수왕원년(413)에 장사 고익을 진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불고 흰 말을 바치니, 진나라 안제가 왕을 고구려왕낙안군공으로 봉하였다.2년(414) ...겨울 10월에 왕이 사천 벌판에서 사냥을 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보장왕3년(644) 겨울 10월에 평양에 빛깔이 붉은 눈이 내렸다.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과 같았다.백제본기시조 온조왕5년(기원전 14) 겨울 10월에 왕이 북쪽 변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사냥을 하여 신기로운 사슴을 잡았다.10년(기원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신기로운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성왕27년(549)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무왕42년(641)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고 표문을 바치며....의자왕19년(659) 봄 2월에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20년(660) 봄 2월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잡지음악신라의 음악 .........애장왕 8년(807)에 음악을 연주하는 데 처음으로 사내금을 연주했는데, 여기에 무척 네 명은 푸른 옷을 입었고, 금척 한명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가척 다섯 명은 채색 옷에 수놓은 부채를 들고 금을 새겨 넣은 띠를 띠고 있었으며, 다음으로 대금무를 연주했는데 무척은 붉은 옷을 입었으며, 금척은 푸른 옷을 입었다............누런 금빛 탈 쓴 얼굴 그가 바로 사람인데....흩어진 머리 푸른 얼굴 사람 같지 아니 한데고구려 음악은 『통전』에 이르기를 악공들은 자색 비단 모자에 새 깃을 장식하였고, 누런 큰 소매 달린 옷에 자색 비단 띠를 매었으며, 통이 넓은 바지에 붉은 가죽 신을 신었고, 오색물을 들인 줄로 장식하엿다. 춤추는 자는 네 사람으로 메 같은 상투를 뒤에 짰고 ,이마에 붉은색을 발랐으며, 금 구슬로 장식했고, 두 사람은 누런 치마 저고리에 붉고 누런 바지를, 두 사람은 붉고 누런 치마 저고리에 바지를 입었는데, 소매를 매우 길게 하였으며, 검은 가죽 신을 신고서 둘씩 둘씩 나란히 서서 춤을 추었다.백제의 음악은 『통전』에 이르기를 ........춤추는 자가 두 사람이었는데, 큰 소매 달린 붉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장보관을 썼으며, 가죽 신을 신었다.복색신라 초기의 의복 제도는 그 색깔을 상고할 수 없다. 22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6부 사람들의 복색에서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제도를 규정하였는데, 그때까지는 아직 동방 습속에 의거하였다. 진덕왕이 왕위에 있은 지 2년(648)이 되어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당나라 복색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니, 당나라 태종이 조서로써 이를 허가하고 겸하여 의대를 주었다. 김춘추가 돌아와서 이를 실시하여 동방의 의복 제도를 중국의 것으로 바꾸었다. 문무왕이 왕위에 있은 지 4년(664)에 또 부녀들의 의복을 고치니 이후로부터 의관 제도가 중국과 같게 되었다................법흥왕 때의 제도는 태대각간으로부터 대아찬에 이르기까지는 자색 옷을 입었고, 아찬으로부터 급찬까지는 붉은 옷에 상아 홀을 가졌으며, 대나마와 나마는 푸른 옷이요, 대사로부터 선저지까지는 누런 옷이었다. 이찬과 잡찬은 비단 관이요, 파진찬과 대아찬과 금하는 진홍빛 관이요, 상당으로 있는 대나마와 적위로 있는 대사는 땋은 갓끈을 달았다........진골에 속하는 대등은 ....허리띠는 문채 있는 흰 옥을 갈아서 장식하는 것을 금하엿고, 장화는 자색 가죽을 금했으며, 장화 끈은 은은한 문채있는 흰 옥의 장식을 금하였고,...........진골에 속하는 여자는....아홉 색깔에서 자황색을 금하였다.(---아홉 색깔 : 청, 적, 황, 흑, 녹, 자, 홍, 감색 등..)........6두품은 ...띠는 다만 검은 무소 뿔과 놋쇠와 철과 구리로 장식하였고,...장화는 주름진 검은 사슴 가죽과 자색 가죽으로 입히는 것을 금하였고, 장화 끈은 검은 무소 뿔과 놋쇠와 철의 구리고 장식했으며,..........6두품에 속하는 여자는....금박올리는 것을 금하였고, 목도리는 모직과 수놓은 비단나직에 금은박 올리는 것을 금했으며,...무색은 자황색과 자색과 자색 분과 금가루 빛과 붉은빛을 금하였다.........5두품은...장화는 주름 무늬로 된 검은 사슴 가죽과 자색 가죽을 금하였고,...
    인문/어학| 2001.12.12| 4페이지| 1,000원| 조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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