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세서리 … . 현대생활 뿐만 아니라 고대생활에서도 장신구를 빼놓고는 “ 의 ” ( 衣 ) 를 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 최근 모방송사에서 5 부작으로 제작해서 큰 인기를 모았던 “ 아마존의 눈물 ” 이란 프로그램에서도 보았듯 문명사회와의 고립된 부족들조차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남녀노소 구분치 않고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 비록 인간생활의 3 대요소인 의 ( 衣 ), 식 ( 食 ), 주 ( 住 ) 에 포함되진 않지만 , 미 ( 美 ) 를 추구하고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가진 인간 앞에선 필요한 부분이란 생각을 가지며 , 기계 자동화에 따른 첨단산업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세대에서 의문을 품을만한 업종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1 년 , 10 년 100 년 후라도 인간의 신체 일부엔 장신구 하나씩은 걸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생산부서에 필요한 3 심 ( 心 ) 지심 ( 知心 ):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업종이니만큼 항상 알고자 하 는 마음 가짐 필요 관심 ( 關心 ): 사소한 물건 조차도 관찰력을 통한 관심을 가지는 마음 가짐 필요 세심 ( 細心 ): 첫 단추 부터 마지막 단추를 채울 때 까지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마무리 짓는 마음가짐 필요아름다움 그리고 배려 …… - 인사는 내가 먼저 - 상대를 바라보며 - 밝은 인사말로 - 밝은 미소로 - + α 의 인사말을 우리 모두 안녕 하세요 ~~~트레이닝 신입사원 입사시 교육이 왜 필요한가 트레이닝의 중요성 1) 오더 수주 부터 선적까지의 경로를 정확히 인식 할수 있도록 각 담당 자들의 지식 분담 하여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에대해 빠른 시일내에 적응 할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2) 전문 지식이 없는 사람은 처음접하는 업무에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반듯이 누군가가 코치를 해주면 빠른 시간내에 적응해 나갈 것이다 업무진행 . 1) 각 부서간의 정보교환 2) 각 buyer 별 오더의 흐름도 3) 각 buyer 별 품질기준 4) 부족분품이고 이후 Final Inspection 에서 검사의 기준이된다 Final Inspection : 마지막 단계의 검사로 이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회사에 막대한 손실이 올수 있다 1 회 Reject 시 약 1 주일 자동 딜레이가 되므로 이는 Sea Air 또는 Air 로 선적하게 될수도 있다 이때 선적에 대한 비용은 Vender 가 책임지게된다 다음은 Final Inspection Sample 에 대한 발송수량 및 당락 여부에 관한 기준이다 오더 수량 검사수량 합격 불합격 지사검사 자체검사 지사검사 자체검사 지사검사 자체검사 500~1200 20 80 3 5 4 6 1201~3200 32 125 4 7 5 8 3201~10000 50 200 6 10 7 11 10001~35000 80 315 8 14 9 15 35001~15000 125 500 12 21 13 22 150001~50000 200 800 18 21 19 22 50000~ 315 1250 26 21 27 22액세서리 의 분류 ☆ 자재 의 종류 캐스팅 체인 JUMPRING 장식 기타등등 . ☆ 임가공 의 종류 도금 에폭시 본드 코팅 행킹 용접 쓰지 마스킹 기탕등등- NECKLACE : 비드 목걸이 , 체인 목걸이 , 팬던트 목걸이 등등 - BRACELET : 스트레치 팔찌 , 체인팔찌 , 뱅글등등 - EARRINGS : 포스트 이어링 , 리버백 이어링 , 피쉬훅 이어링등등 - KEY RING : 키홀더등등 - BROOCH - RING : 사이즈에 따라 - TOE RING ( 발가락지 ) - PIERCING : 배꼽지 , 아이 피어싱 , 노즈 피어싱 . 립피어싱등등 - HAIR PIN(HAIR BAND ) : 헤어띠 , 집게헤어핀 , 헤어밴드 등등 .. - ETC.. : 핸드폰고리 , 와이셔츠 핀 , 훈장 , 슈즈클립등등 실질적인 액세서리 일부 용어에 대해 기본적 인것들을 알아보자 용어Casting( 캐스팅 ) ♤종류 아연 , 다이 , 주석 (35%, 95%, 고순도 ), 신주 A, 아연 캐스팅 ※T 못견딤 ) - 구분방법 : 자석으로 확인 , 고리마다 땜이 되어 있는지로 확인 ♠ CP 체인 : CP 로 표시되며 , COPPER PLATED 체인의 약어로 철체인에 동을 도금하였다 의미로 철체인의 단점을 보강 하였고 신주 체인즤 장점을 이용하여 개발된 체인 - 장점 : 가격 보통 , 강질 , 단동이나 신주체인 대체 체인으로서 용이 - 단점 : 체인 용접 일률적이지 못해 불량율 발생할 여지있슴 . ♠ 단동체인 : 92% 정도의 순수한 동과 기타 금속의 합금 - 장점 : 링크마다 용접이 되어 있어 인장력 탁월 , 얇은 체인 작업용이 - 단점 : 가격비쌈 ♠ 신주체인 : 65% 정도의 순수한 동과 아연 , 주석등 기타 금속의 합금으로 이루어진 체인 . - 장점 : 특수한 체인에 많이 사용 - MESH, 군번줄등 - 단점 : 가격비쌈 ♠ 알루미늄체인 : 무게 중량이 적게 나가므로 가격 경쟁력 바탕으로 차후 중요한 자재로 부각될 수 있는 체인 - 장점 : 철보다 조금 비쌈 , 가벼움으로 인한 가격 저렴 . - 단점 : 작업 용이치 않음 , 보편화 되지 않음 . 도금및 코팅등의 표면처리가 매끄럽지 못함일반적 사용되는 장식 종류 ♠ LCC(LOBSTER CLAW CLASP 의 약어 ) 일명 “ 계집게 ” 모양 닮았다고 하여 게고리 장식으로 부름 . 구분 “ 5” 로 시작되는 경우 : 501 장식 , 502 장식 , 503 장식등 ( 무납 , 납 , 아연등 ) “7” 로 시작되는 경우 : 701 장식 , 702 장식 , 703 장식등 ( 무납 , 납 , 아연등 ) “9” 로 시작되는 경우 : 901 장식 , 902 장식 , 903 장식등 ( 신주로된 장식 ) 참고 - 끝자리의 숫자 1, 2, 3 등은 사이즈를 말하여 숫자가 클수록 그 형태는 비례 고리 모양에 따라 옆고리 장식도 있다 현재 철제품의 장식까지 개발돼어있다 ♠ SR(SPRING RING) JR(JUMPRING RING) 장식 구분 SR 장식은 오링이 열려져 있는것을 일반적으로 말함 JR 장식은 오링이 용접되 은보다 많을때 적금이 된다 . 적금이라고도 하며 , 18K 적금 때 붉은색을 잘 띤다 . 그린골드 ( 청금 :GREEN GOLD: G,G): 금 - 은의 2 원합금을 하거나 , 또는 보통 금 - 은 - 구리 3 원의 합금으로 했을 때 구리보다 은의 함량이 많을 때를 그린 골드라 한다 . 일명 청금이라고도 하며 K18 일 때 푸른색을 띤다 . 고품스러운 감각의 보석 장식에 흔히 사용된다 . 오금 ( 烏金 ): 금 - 구리계의 금합금 중에서 적금을 녹청과 유산동 용액속에 넣고 끓여 착색하면 지튼 흑색으로 변하므로 , 그 색이 까마귀 같이 검게 되어 오금이라 부르며 공예 용재로 흔히 사용된다 .( 금 , 은 , 구리 , 철 , 주석의 다섯가지 금속 )!!TIP-2 * 백금 화이트골드 백금 ( 白金 , PLATINUM): 장신구에 쓰이는 금속 중에서 가장 좋은 금속이며 금보다 더 비싸다 . 백금의 변색되지 않는 회백색은 무색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하는 데 가장 적합하며 내구성이 뛰어나 작업을 쉽게 해준다 . 백금 계통의 귀금속을 보면 백극 (PT), 팔라듐 (PD), 이리듐 (IR), 오스뮴 (OS), 로듐 (RH) 및 루테늄 (RU) 등 6 개의 금속이다 . 이들 금속에 금과 은을 포함시켜 귀금속이라 하며 이들 금속은 모두 희소성이 높은 금속으로 극히 한정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 화이트골드 ( 백금 , WHITE GOLD, W.G): 금에 팔라듐을 합금하면 금의 색이 급격히 변하게 된다 .10% 정도만 들어가도 흰색이되며 15% 가 들어가면 완전히 백색이 된다 . 또한 이것에 백금을 소량 함유한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가격이 너무 비싸 보석용 장신구에 그다지 많이 이용되지 못했다 . 그런데 근래에 와서 금과 은 , 팔라듐으로 된 합금이 등장하여 장신구에 많이 쓰이게 되엇다 이것은 은이 70%, 팔라듐이 25%, 금이 5% 정도로 백색으로 연연하여 가공성이 좋고 융점은 순금보다 약간 높지만 용해도 쉽고 공기 속에서도 변색하지 않고 화학약품에도 강하고 가격도 싸다 . 나이트 ( Morganite ) 6. 고셰나이트 ( Goshenite ) 7. 골든 베릴 (Golden Beryl) 8. 캐츠아이 에메랄드 (Cat's eye Emerald) 9. 캐츠아이 아콰마린 (Cat's eye Aquamarine) 10. 스타 모거나이트 (Star Morganite ) 11. 합성 에메랄드 (Syn. Emerald) 12. 칼사이트 (Calcite : 방해석 ) 13. 사드 ( Sard : 자마노 ) 14. 크리소프레이스 ( Chrysoprase ) 15. 크리소콜라 ( Chrysocolla ) 16. 아게이트 (Agate) 17. 블러드스톤 (Bloodstone : 혈석 ) 18. 재스퍼 (Jasper : 벽옥 ) 19. 모스 아게이트 (Moss Agate) 20. 오닉스 (Onyx) 21. 사도닉스 (Sardonyx) 22. 덴드리틱 아게이트 ( Dendritic Agate) 23. 아이리스 아게이트 (Iris Agate) 24. 염색 칼세도니 (dyed. Chalcedony) 25. 알렉산드라이트 (Alexandrite) 26. 캐츠아이 (Cat's eye) 27. 알렉산드라이트 캐츠아이 (Alexandrite Cat's eye) 28. 크리소베릴 ( Chrysoberyl : 위 3 종 이외의 것 ) 29. 코럴 (Coral : 산호 ) 30. 루비 (Ruby : 홍옥 ) 31. 사파이어 (Sapphire: 청옥 ) 32. 스타루비 (Star Ruby) 33. 스타 사파이어 (Star Sapphire) 34. 알렉산드라이트라이크 사파이어 (Alexandrite-like Sapphire) 35. 합성 사파이어 (Syn. Sapphire) 36. 합성루비 (Syn. Ruby) 37. 합성 스타루비 (Syn. Star Ruby) 38. 합성 알렉산드라이트라이크 사파이어 (Syn. Alexandrite-like Sapphire 39. 스타 다이옵사이드 (Star Diopside ) 40. 캐츠아이 다이옵사이드 (Cat's eye Diophow}
2004학년도 文學史 學位論文갑오개혁에 관한 연구大學校文 學 士 學 位 論 文갑오개혁에 관한 연구指導敎授 :이 論文을 文學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2004年 12月 日大學校 史學科의 文學士 學位論文을 認准함.2004年 12月 日심사위원 (인)심사위원 (인)목 차Ⅰ. 머리말 ...............11. 갑오개혁에 대한 시각 .....12. 갑오개혁의 연구 현황 .....11) 자율론적 관점 ........12) 타율론적 관점 ........13) 절충론적 관점 ........23. 갑오개혁에 관한 연구방향 ...............2Ⅱ. 본론 ............도에 의해 진행되었던 개혁이었으나 조선인의 무능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적인 입장에서 제시되어진 것은 자율론 인데 이는 조선역사의 내재적 발전과 합법칙적 발전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된다.일반적으로 1894~1895년간의 개혁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시기의 1차 개혁과 박영효 등장 이후의 2차 개혁으로 나눈다. 어떤 경우에는 전자를 갑오개혁, 후자를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부르기도 한다.갑오개혁이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은 대체로 합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평가하는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봉건적(封建的) 지배계급 출신이라는 한계를 냉정하게 지적하면서 변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변혁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라는 것이다.2. 갑오개혁의 연구 현황1) 자율론적 관점이 논의의 전제에는 이미 갑오개혁의 추진에 대한 단계적 파악이라는 방법론적 모색과 함께 갑오개혁이 이 시기 농민전쟁에서의 폐정개혁(弊政改革)요구)를 어떠한 형태로든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2) 타율론적 관점이 관점은 정권의 성립 과정에서의 타율성을 강조하여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 개혁이 일본세력 하에 일어난 점에 주목하여 김홍집 정권은 일본에 의한 정권이며 개화파의 주체적인 형성과정으로 볼 때 조산(早産)이고 타율적인 것으로 보았다.3) 절충론적 관점절충론적 관점은 1894년의 내정개혁이란 조선봉건지배의 최후 위기 단계에 있어 조선 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했던 광범위한 근대적 요구의 시도이며 일본의 내정개혁안이 아니라 1884년이래 개화파가 구상한 지도원리였으며 사실상 부르주아 계몽사상가(啓蒙思想家)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 하였다. 또한 부르주아 계몽사상의 본질에 의해 민중적?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할 수 없었다는 점, 청(淸)의 군사적인 압력과 비교하여 일본군의 침략적 의도에 대해 과소평가 하는 정세인식의 오류를 가진 점에 의해 갑오정권이 일제국 위원에 의해 조선내정개혁을 실시하고 개혁성과를 볼 때까지 양국 군대를 주둔시킬 것을 제안하게 된다. 이때 일본이 전쟁을 예상하고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즉 조약개정교섭(條約改定交涉)중에 있던 영국이 청일간의 조정을 시도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 열강의 간섭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은 화남(華南)지역의 상권을 확보하고 있던 상황에서 청일간의 전쟁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영국은 청일 회담을 주선하였으나 일본이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영국을 러시아의 견제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영국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시 일본이 영국에 군함을 발주할 것 등을 기대하면서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英日通商航海條約)을 조인하였다.다음날 일본은 전쟁지도체제를 갖추었고 23일 아산만에서 청일전쟁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25일 영국선박 고승호가 일본군에 의해 격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영국국내에서 대일비난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 의한 전쟁 도발을 묵인한 영국은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일본군의 행동이 국제법상 합법적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8월 1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한편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서울과 수원의 조선 군대를 무장 해제시켰다. 같은 날 대원군이 경복궁에 입궐함으로써 친청정권에 대신하여 새로운 친일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런 속에서 개혁을 담당할 기관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던 것이다.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천진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양국이 주도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의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써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일본을 선망하였고 영국을 극찬했다. 그는 청을 지극히 섬기고 러시아와는 신중하지만 화목하게, 미국에 의탁하고 일본과는 친교를 맺으며 영?불?독과는 맺어져야 한다는 피상적 외교관을 갖고 있었다.4)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이들은 갑오개혁 이전에 왕실이 미국과 러시아에 접근하여 청을 견제하려 했던 노력에 실무적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집단이다. 여기에는 주미 외교사절 출신이었던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등이 속해있다. 하나의 정치세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정치적 입장을 공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정동(貞洞)의 손택호텔(Sontag Hotel)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한 외교사절과 선교사들의 모임에 출입하면서 왕권과 미국을 매개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 중 박정양이 초기부터 군국기무처에 참가하기는 하나 정치세력으로 집단적인 참여를 한 것이 아니다.이후 이노우에(井上馨) 공사 부임후 미?러 공사관측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며 활발하게 진출하였고 김홍집 내각을 박영효의 주도로 붕괴시킨 후 박정양이 총리대신에 취임하면서 집단화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나중에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하게 된다. 이들의 정치사상적 기반을 윤치호를 통해서 살펴보면 그는 청의 조선에 대한 억압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가졌고 반면에 구미국가를 모델로 한 근대화를 구상하였다. 나아가 청의 지배하에 있느니 다른 문명국 지배하에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그는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나갈 길을 기독교를 통한 서양문명의 수용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청의 압제 하에 있는 조선을 구원하는 길은 정치변혁이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문명국 지배하의 개혁을 상정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와 개혁정권 수립에 적극 찬성하게 된 것이다5) 근왕파 관료이들은 왕실 친청체제 아래서 내무부, 외아문(外衙門)을 비롯한 각종 신설기구에서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며 주로 갑오개혁 직후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삼국간섭) 친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친일 정부수립 후 일본인 고문관과 고문 보좌관을 두어 소위 日人고문관 시대를 열었다.또 청일전쟁의 승리를 앞둔 무렵 대원군이 동학군과 청과의 접촉사실을 들어 정계에서 은퇴시킨 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사면 복권)하게 하여 제 2차 내각에 불러들였다. 박영효의 발탁은 당시의 일본 공사 관원들로부터도 우려의 소리가 높았으나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일 세력이었던 이유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내각의 발족과 함께 이노우에(井上馨)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범14조(洪範14條))를 발표하였다.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총 213건에 달하는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로 변경하였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종래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와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재정제도에 있어서는 전국에 9개의 소의 관세사와 220개소의 지세소를 설치하여 조세 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그러나 2차 개혁의 개혁 방향에 있어서 많은 혼선이 있었다. 즉 일본은 일본군의 계속적 주둔, 경인선부설권, 목포의 개항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한조약(日韓條約)(가칭)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조약과 아울러 일본은 조선에 500만원의 재정 차관의 제공을 제의하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의 호의를 사기 위한 일본의 당근 정책이었다. 정부는 당시 퇴직 관리와 군인의 퇴직금 지급과 새 군대와 경찰의 창설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일본의 이러한 차관 제의는 중앙과 지방의 재정권을 잠식하고 장악하기 위한 일본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이에 박영효, 유길준 등은 일본의 차관 조건에 반발하여 오히려 일본과 갈등이 심하였다. 그리고 개혁과 자주성을 강조한 박영효는 일본의 압력에 미온적인 김홍집, 조희연을 밀어내고 친미적인 박정양과 제휴하여 단기간의 박영효 내각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민비의 태였다.
고구려 건국설화고구려건국설화를 이야기하자면 부여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부여의 임금 해부루라는 임금은 태평시대를 누렸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임금이 탄 말이 돌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임금이 돌을 치우라 하여 신하중 한사람이 돌을 치웠더니 금빛피부의 개구리모양을 한 아기가 누워 있다가 해부루 임금 일행을 보고서는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은 그 아기를 데리고 와 이름을 금와 라 짓고 자식으로 삼고 태자로 삼았다. 해부루는 그리고 송화강 유역의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명을 동부여라 했다. 해부루가 동부여로 떠난 후 부여의 옛 땅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자기를 해모수라 밝히고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라 했다 그리하여 부여는 둘로 갈라졌다. 시간이 흘러 해부루 임금이 죽고 금와가 왕을 이었다. 그리고 금와왕은 매우 사냥을 즐겼다 틈만 나면 사냥을 하러 떠나곤 했다. 금와왕이 사냥을 갔다가 우발수라는 강가를 지나게 되었다. 금와왕이 경치에 반해 감탄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이 혼자서 있었다. 금와왕이 의심이 가서 조용히 다가가 까닭을 묻자, 여자는 웅심산골짜기에 살고 있는 하백의 딸 버들꽃 이라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웅심산은 백두산의 한 봉우리며 하백은 송화강을 지키는 신이다. 금와왕은 버들꽃 유화를 데리고 왕궁으로 데려왔는데 유화는 알을 낳았다. 금와왕은 꺼림칙하여 그 알을 여러모로 깨뜨리거나 짐승의 밥이 되게 했는데 깨지기는커녕 금 하나도 안 갔고 짐승들은 오히려 알을 품으려고 하였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시간이 흘러 유화가 품은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린 나이에도 활을 매우 잘 쏘며 무럭무럭 자랐다. 바로 그 사람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누구하나 주몽의 활쏘기, 칼싸움, 말달리기 등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몽을 시샘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맏아들 대소는 주몽을 마구간을 돌보도록 했다. 주몽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부탁 때문에 꾹 참고 지냈다. 그의 나이 20세 예씨라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래도 대소는 주몽을 해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몽의 오이, 마리, 협부 라는 세 심복부하가 있어서 철저히 보호하는 까닭에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유화부인이 주몽에게 가장 빠르고 힘이 센말의 혓바닥에 가시를 꽃아 두라고 했다. 그 말이 먹이를 못 먹어 야위어 가고 있을 때 금와왕이 일곱 아들에게 말한 마리씩을 주었는데 주몽은 금와왕이 아무생각 없이 준 야윈 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야윈 말은 본디 종자가 좋은 말이었기 때문에 혓바닥에 꽂은 가시를 빼자마자 엄청나게 먹어대고 몸에 기름기가 흐르고 털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마가 천하의 주인을 만난 것이다. 추수가 끝난 뒤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했는데 그 사냥대회에서 주몽은 역시 1등을 차지했다. 더욱 비위가 상한 대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주몽을 해치우려고 하자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요청으로 동부여를 떠나라고 하자 주몽은 마음을 굳히고 예씨부인과 유화부인을 두고 남쪽으로 떠나게 되는데 예씨부인은 마침 임신을 한 상태였다. 후에 자신의아들을 알아보려고 소나무 아래 일곱 모난 돌에 부자의 증표를 넣어두었다. 끝까지 쫓는 대소를 따돌리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제사, 무골, 묵거라는 사람을 만나 기름진 곳으로 안내를 받으며 동가강 유역의 졸본 땅에 도읍을 정하니 여러 부족이 모여들어 고구려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여러 훌륭한 신하의 도움으로 고구려는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며 군사훈련과 나라를 잘 다스려 나갔다.해 모 수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아버지이다. 천제(天帝)의 아들인 그는 천제의 명령에 따라 서기전 58년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천왕랑(天王郎)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웅심산(熊心山) 부근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하백(河伯)의 맏딸 유화(柳花)를 발견하고 유인하여 관계를 맺었고, 이어 하백을 찾아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임을 입증함으로써 정식으로 유화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딸을 버릴까 두려워한 나머지 옳지 못한 행동을 한 하백의 처사에 분개하여 유화를 버리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뒤 유화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천제로서 직접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으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으며 부루(扶婁)를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광개토왕릉비나 《위서 魏書》에는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원래 북부여의 시조로 전승되어 오던 것을, 5세기경에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한 뒤 부여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결합,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이 밖에 건국설화주몽의 건국 설화고구려 시조 주몽에 관한 설화로 현재 세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첫째, 삼국유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河伯女)로 북부여 왕이 그를 방 안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쳐 뒤에 알을 한 개 낳았다. 그 알을 깨뜨리고 태어난 사람이 곧 주몽(부여 말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몽은 북부여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의 골성(骨城)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이다.
세계 최초로 봉건제를 만들어 낸 주나라세계 최초의 봉건제도는 기원전 1122년에 은왕조를 멸망시키고 새워진 주나라는 은으로부터 획득한 광대한 영토는 험준한 산맥과 높은 산, 끝없는 늪지, 그리고 수시로 범람하는 강과 깊은 삼림으로 덮여 있었다. 또 곳곳에는 신석기 시대이래로 거주하여 오던 원시 토착민들이 주나라를 적대시하였으나 이를 진압하기 위한 도로나 통신 시설은 갖추어 지지 못했다. 또, 문화적으로 우수한 은나라의 유민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며, 주나라의 통일을 도와준 동맹부족들은 주왕실의 포상을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주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한 것이 봉건제도였다. 주나라의 봉건제도에 대해 알아보자1.봉건제의 성립과 완성봉이란 지배영역의 경계를 정한 것이고 건이란 그 영역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봉건제의 실시 과정은 주나라의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첫 조치로 주왕의 아들 무경녹부를 은지에 두어 그의 조상제사를 받들게 하고 한편으로 은왕실의 직할지를 통치게 하였다. 그리고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반란에 대비해 동생인 관숙·채숙·곽숙을 위·채·곽의 제후로 봉하여 무경 및 은의 잔여 세력을 감시케 하였는데 이것이 삼감의 설치였다.그러나 이후 무왕이 2년후 갑자기 사망하고 나이 어린 아들 송이 성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이것은 아직 개국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 주왕조 에게는 그야말로 정치·군사적인 일대의 위기였다. 그러므로 주공이 섭정으로 성왕을 보좌하여 정치를 대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공의 섭정으로는 정치의 관여는 삼감의 일원이였던 관숙과 채숙의 시기와 반감을 초래하였다. 또 나라가 망한 후 부흥의 기회를 노리던 은의 유민들에게는 무왕의 사망과 나이 어린 성왕의 등극, 그리고 삼감의 주왕실에 대한 불만은 은왕조를 회복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하여 무경은 은유민을 규합하고 관숙·채숙과 연합하여 주왕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놀란 주공은 주족 및 동맹부족으로 구성된 토벌군을 구성하고 그 자신이 동방원정을 떠난다. 이 결과 은대의 인방 즉 동제의 세력이 완전 궤멸되어 주세력하에 들게 되었다. 여기에서 주는 은의 전 영토를 완전히 점령하고 이 정복지를 주왕실의 자제·일족 및 동맹부족들은 제후로 분봉하고 이 지역에 배치하여 은유민의 감시와 주변의 다른 민족을 침입과 반란을 철저히 대비케 했다.이 때 분봉된 제후국 가운데 가장 중요시했던 제후국은 노·위·진·제였다. 이같이 중요한 지역에는 자신의 아들이나 정말 신뢰할 수 잇는 제후를 정치·군사적 요충지에 분봉·배치함으로써 은의 유민과 주변민족들의 침입과 반란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주의 봉건제였다. 주왕실은 이같이 수많은 제후들을 동방지역에 분봉하여 은유민과 다른 민족의 침입과 반란을 대비하게 하고 제후들을 지원하고 감시하기 위해 낙읍을 건설하였다. 이 낙읍은 동방·남방을 지배할 수 있는 정치·군사적 요충지였다. 이곳이 완성되자 주공 자신이 여기에 살면서 동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서 낙읍은 서주시대를 통하여 정치·군사·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는데 주나라 시대에는 이 낙읍을 성주라 하였고 주왕실의 종조가 있던 호경은 종주라 하였다.2. 종법제도와 제후통제책주왕조는 관료제도에 의해 통치체제만으로 만족치 않고 혈연제도에 기반한 종법제도를 봉건제 내에 도입하여 주왕실과 제후간의 관계를 본가와 분가의 일가를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주시대의 종법제도였다. 주대의 사회는 종족제도로 구성되었는데 주대의 이 종족제도는 조상의 종묘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일혈족의 제사조직이었다.‘종’은 그 내부에 다수의‘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혈통에 따라 대종과 소종으로 구분되었다. 다시 말하면 종족내에서 장자 출신의 족이 대종이 되어 종가를 형성하고 이 종가의 가장이 종주가 되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종묘를 모셨으며, 또한 다른 족인들을 통괄하였다.또, 종주는 종족을 대표하고 종인 가운데 범법자나 종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람은 축출 또는 처형할 수 있었으며, 전쟁시에는 족인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였다. 한편 대종을 제외한 다른 족인은 소종이 되어 종주이 권위와 지시에 복종했으며, 조상제일에는 종주에게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전쟁시에는 종주의 통솔 아래 출전하였다. 이것이 서주시대의 종법제도의 기본이었다.
3월 28일 저는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날씨가 우리의 새 학년도 첫 답사를 질투라도 하듯 좋지 않았지만 오히려 마음은 더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번 답사는 사랑하는 후배들과 가지는 첫 답사 이였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인원을 점검하고 전 날 준비하였던 답사물품을 차에 옮기고 버스에 올랐다. 날씨는 정말로 최악에 상황 이였지만 모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였습니다. 물론 몇 명은 걱정하는 얼굴 이였지만 대체로 표정이 좋았다. 빨리빨리 준비를 하고 학교를 8시 40분 정도에 떠났습니다. 새내기들은 발표가 걱정이 되었는지 버스 안에서도 발표연습에 열중 이였다. 모두들 열심히 하는 모습에 나도 내심 걱정이 되어서 제가 발표할 국립박물관에 대해서 읽고 또, 읽었다. 학교를 떠난 지 1시간 20분 정도에 휴게소에서 15분 가량 쉰 후 다시 버스에 승차하였다. 아침에 빨리 나오느냐고 밥을 먹지 못해서 출출하던 참에 나누어준 백설기를 먹었다. 정말 꿀맛 이였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서 상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날이 많이 개인 것 같아서 안도에 한숨을 놓았다. 그리고 밖에 풍경은 고속도로와는 달리 너무나 평온하고 한적해 보였다. 경북 문경을 지난 첫 답사지 인 영주시 순흥면에 자리 잡고 있는 소수서원에 도착하였다. 소수서원은 많은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써 고려시대의 명신이며, 학자인 회헌 안향을 제향하는 서원이라고 한다. 원래는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소수서원에는 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었다. 국보는 회헌영정이고, 보물은 당간지주, 주세붕영정, 대성지성문서왕전좌도 이다. 소수서원에 대해 발표를 하는 조는 처음이라 떨렸지만 자신이 공부한 것들을 굉장히 설명을 잘해주었다. 건물에 양식, 현판의 뜻, 개관 등 정말로 지난 2000년 답사와는 틀린 점이 많아 보였다.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속으 틀림이 없었다. 부석사에 있는 모든 것들이 국보이며, 보물이었다. 당간지주, 고려각판, 무량수전, 석등, 삼층석탑, 좌상, 조사당, 조사당 벽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이 부석사는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라고 한다. 화엄종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종파라 한다. 그리고 이곳 부석사에는 의상과 선묘에 애틋한 사랑의 설화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정말 짧은 시간에는 다 둘러볼 수 없는 큰 사찰이었다. 그리고 많은 국보 때문에 일본 등 우리 나라의 문화재를 탐내는 오랑캐들에 의해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이라고 들었다. 다시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고 앞으로 우리 것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된다는 생각이 가슴에 차 올랐다. 시간이 늦어 부석사에 아쉬움을 남겨두고 안동으로 떠났다. 안동에는 대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세운 도산서원이 있다. 이황이라고 하면 이이와 함께 조선시대에 유학에 양대 산맥이라고 배웠던 분이다. 그 곳에서 선생이 직접 제자들을 가르친 선생에 얼이 있는 그 곳을 빨리 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곳을 우스개 소리로 천원 짜리 지폐의 배경이라고도 한다.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선생의 유품이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선생의 유품들은 잘 보존되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과 선생이 사군자를 기르시던 곳, 전교당 등 도산서원에 이곳저곳을 돌아 다녔다. 정말로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 민족에 대 학자 이황 선생에 교육에 대한 생각이 정말로 존경하며, 현재 무너진 선생님과 제자에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좋은 계기였다. 이제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그래서 빨리 버스에 올라탄 후 숙소를 향해 출발하였다. 많이 뛰어다보니 힘이 들어서 그냥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경주에 도착하였다. 가까운 식당에서 석식을 하고 숙소로 돌아가 씻고 선배님, 후배들과 잠깐 얘기를 나눈 후 피곤한 몸을 잠자리로 가져갔다. 피곤해서 인지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둘째 날 아침 6시에 정확히 기상을 하였다. 전 날에 쥐여져 있었다. 나는 추위를 잠시 잊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석굴암을 향하여 뛰어 갔다. 춥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정말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셨다. 가슴에 들어오는 공기에 정말로 잠시나마 모든 걸 잊어버렸다. 석굴암에서 물 한잔을 마신 후 본존불을 보러 올라갔다. 국보 제 24호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부처에 형상을 표현한 본존불을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올라오는 길에 힘이 들었던 것을 한순간에 싹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우리 선조에 지혜와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본존불만 소중하고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십일면 관음보살상 역시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불 바로 뒤에 배치 되어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많은 조각이 있었다. 훌륭하고 뛰어난 조각품들이 이렇게 서로에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보지는 못했지만 삼층석탑이 있다고 했다. 나는 석굴 안에 조각들을 캠코더로 담고 싶었지만 촬영금지라는 표시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버스로 들어가서 불국사로 향하였다. 예전에 수학여행으로 경주를 3번 정도 온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너무나도 소감이 달랐다. 사학도가 되어관심 있게 바라봐서 일까? 모든 것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불국사로 향하는 길도 기대로 부풀었다. 불국사 입구에 도착하자 세계문화 유산이라는 글씨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우리의 문화재가 세계에서도 손꼽힌다는 점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그 글씨를 뒤로 한 채 불국사 입구로 들어갔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과 넓은 입구, 아름답게 핀 개나리, 대나무 등 많은 것들이 불국사로 향하는 길에 있었다. 그리고 다리, 시냇물도 있었다. 불국사는 사찰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공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지나친 뒤 사천왕문에 다 달았다. 많이 보았던 사천왕 이였지만 너무나도 크고 무서워 보였다. 사천왕문을 나섰다. 불국사 앞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연화교, 칠보교, 청운교, 백운교를사면으로 계단을 놓은 사각의 육중한 기단 위에 날개를 편 듯 힘찬 추녀가 가로 뻗친 사각 기와집 형식이며 그 위에 연꽃잎 모양으로 창문을 낸 팔각정이 세워진 3층 양식의 화려한 탑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10원 짜리 동전 모델로 활동중이다. 화려한 다보탑에 비해 조금 더 온화해 보이는 석가탑은 국보 제 21호로써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큰 손상 없이 원형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 석탑에 보수공사 중 사리 장구업과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 할 수 있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 이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이 탑을 만들 때에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웅전은 불국사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말 큰 사찰답게 대웅전에 크기도 어마어마하였다. 그리고 대웅전의 내부 전면에는 수미단이 있고, 그 위에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미륵보살과 갈라보살, 마한가섭과 아난의 두 제자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리고 극락전, 관음전, 나한전, 등을 차례차례 보았다. 정말 크기도 크고 보물도 많고 역시 세계의 문화 유산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였다. 이밖에도 사리탑, 2개의 좌상등 많은 국보가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곳저곳을 뛰어 다니다 보니 무지 힘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좋은 곳을 봐서 그런지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다시 숙소로 와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밥이 이토록 맛이 있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밥을 먹고 방으로 잠깐 올라와서 따뜻한 물로 씻은 후 다음 답사지로 출발하였다. 원래는 포석정을 갈 예정 이였으나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감은사지로 향하였다. 감은사지는 말 그대로 절터만 남아있는 곳인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하지 못하고 죽자 신문왕이 부왕의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써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감은사지에는 국보 제 112호인 감은사 삼층석탑이 있었다. 이것은 석가탑과 고선사 삼층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유언에 따라 화장된 뒤 동해에 묻히게 되었다. 그의 릉은 사적 제 158호로써 바다에 있기에 직접 가지는 못하였다. 한 20미터쯤 거리를 두고 봐야만 했다. 죽어서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정말로 존경 스러웠다. 그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지금 나, 그리고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배워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포석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포석정은 사적 제 1호이며, 신라 춤이 생겨난 곳이다. 그리고 젊은 화랑들이 맑은 물과 바람을 즐기고 남자다운 기상을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돌로 된 물길은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곳이라고 한다. 유상곡연수란 옛 중국의 명필 왕희지가 절강성 회계산에서 벗들과 모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시간동안 시를 지어 읊었으며 시를 못 지으면 벌주를 3잔 마시는 것을 말하는 고사이다. 포석정은 단지 술을 먹고 즐기는 곳이 아니라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그리고 돌을 조각한 솜씨도 훌륭하였다. 포석정을 둘러보고 둘째 날 최고의 시간과 체력이 소비되는 남산으로 향하였다. 이곳 남산은 바위가 많고 지천에 문화재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되어지는 곳이다. 드디어 남산에 도착하였다. 올라 갈려고 하니 막상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러나 우리 후배들이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힘이 솟았다. 남산을 올라 가다보니 정말로 돌도 많고 굉장히 험했다. 그러나 진짜로 많은 조각품들을 많이 보았다. 이곳은 산이 아니라 마치 박물관 같았다. 남산을 올라갔다 내려 올 때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정말 최악에 상황 이였다. 춥고 힘들고 바람에 눈까지...그러나 서로 서로 돕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친 몸으로 남산에서 내려왔다. 배가 너무 고파서 힘들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학회장을 도와 답사물품을 옮기고 방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석식을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씻고 좀 누워 있다가 내일 발표준비를 하였다. 선배님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