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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속 과학-아마겟돈
    영화영화를 보는 내내 딴 생각을 못하고 오직 스크린만을 바라보게 하는 영화. 주인공의 위기, 사랑, 영웅적 사건처리에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연신 가슴을 졸이게 하는 영화. 현란한 그래픽, 실재와 같은 액션. 일어날 수 있을것같은 스토리에 엄청난 스케일을 볼 수 있는 영화. 이런 영화가 헐리우드의 영화이다. 볼거리가 가득한 헐리우드 영화는 관객들을 쉽게 영화관으로 끌어들이다.영화 도 앞서 말한 요소들을 가득 안고 우리들에게 다가왔고 그들의 나라에서건 우리나라에서건 큰 흥행을 거두었다.영화는 NASA가 미 항공 우주국은 텍사스주 크기의 행성이 시속 2만 2천마일의 강속으로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 최대의 위기를 막을 수 있는 시간은 단 18일. NASA 국장인 댄 트루먼은 고심 끝에 유일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그건 바로 사람을 직접 행성에 보내 소행성을 폭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행성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핵폭탄을 장착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은 금세기 최고의 굴착 전문가인 해리, 그를 비롯한 8명의 외인부대는 우주비행을 위한 훈련을 받고, 두 대의 우주왕복선에 나눠 탄 채 소행성을 향해 떠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해리가 자신을 인류의 평화, 지구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며 임무를 완성하고 영화는 끝이 난다.이 영화는 우주, 소행성, 핵폭탄, 등의 과학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 소재들의 쓰임이 실제 같다는 점에서 우리는 놀라고 영화에 더욱 빠져든다. 하지만 에는 실제와 많이 어긋나는 현상들이 담겨져있다. 우선 영화에서 지구로 충돌해 오는 행성을 18일전에 발견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만 가능한일. 실제론 세계 각국에서 많은 수의 천체 관측하는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있고 현재까지의 과학기술수준으로 볼 때늦어도 2달 전에는 발견이 가능하다. 소행성의 크기가 작고 어두운 특성이 소행성 발견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지만, 또 궤도가 태양 방향에서 온다면 태양 빛에 가려서 안보이기 때문에 발견이 힘들긴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발견이 늦을 수는 없다고 한다.두 번째로 소행성을 반으로 쪼개기 위해 구멍을 내고 그 안에 핵탄두를 사용하는 부분. 실제 1Mton급의 핵탄두는 지름 750m의 구를 부술 수 있으며, 부피(길이의3승)에 따라 탄두의 크기가 변하기 때문에 7Km를 부수기 위해서는 1000Mton의 핵탄두가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인류가 개발한 단일 탄두 중 가장 큰 것은 구소련이 61년 개발한 58Mton급이며, 그 후에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대략 1Mton급의 탄두개발에 주력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한 58Mton급이면 텍사스 크기(지름 약900Km)의 소행성을 부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다.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한 소행성은 지구상의 모든 핵탄두를 써도 부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계산하여 본다면 소행성을 부수기 위해서는 지금의 탄두의 1000배는 있어야 한다. 혹 어느 나라에서 비밀리에 다량의 거대한 핵탄두를 개발하고 저장해 놓았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변이 없는 한 영화속 소행성은 지구상의 모든 핵탄두를 써도 부수기 어렵다. 또 큰 크기의 행성은 태양계 내에서는 세레스(지름910Km)라는 행성밖에 없는데, 이것도 목성 인력권에 붙어 있어서 궤도를 이탈하여 지구로 올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http://www.ddanzi.com 딴지 일보 '영화속의 구라들'세 번째는 만약 소행성을 반으로 쪼개는데 성공하였더라도 영화에서의 계산처럼 두 개로 나뉘어진 소행성을 지구를 정확히 빗겨가기가 어렵다. 날아오는 소행성이 둘로 쪼개져도 무게 중심은 변함 없다. 정확하게 자로 잰 듯이 둘로 쪼개지면 다른 쪽 파편도 지구로부터 400마일 벗어나게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질량의 차이가 있다면 하난 지구로 떨어지게 된다. 절반에서 5% 이상 벗어나면 하나가 지구에 충돌한다는 이야기가 된다.네 번째는 중력에 관련된 이야기. 영화의 소련 우주선(우주 정거장). 우주선이 선체를 회전시키면서 중력이 발생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우주선이 적당한 회전수로 회전을 한다면 가능한 이야기다. 즉, 구심가속도를 공식(rω2)을 사용해서 영화 속의 가속도를 추정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는 작업을 편하게 하기 위해 중력을 만든다고 하는데, 현재 소련 우주인도 그리고, 임무를 띤 우주인들도 모두 무중력 상태에 적응한 상태이기에 갑자기 중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쉽게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소련 우주인의 경우 갑자기 중력이 생기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문제점을 더 지적하면 회전을 하게 되면 도킹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영화 제작상 무중력 상태 보다 그냥 걸어 다는 장면이 촬영하기 쉽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http://my.dreamwiz.com/leoseo/movie/m_980712.htm 영화를 통한 과학수업이외에도 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다. 정거장이 폭팔한후 떨어진다 것이나. 소행성에선 산소가 없음에도 불꽃이 나는 부분, 소행성에서는 바람이 없음에도 돌이 날아가는 장명 등 과학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은 많다.
    자연과학| 2002.06.15| 2페이지| 1,500원| 조회(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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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감상문] 만세전을 읽고
    염상섭을 읽고나서...사람은 태어나고 죽는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기쁜 일이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런 고정관념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면 응당 나오는 것이 주인공에 대한 비난일 것이다. 아내가 죽는다는데 서둘러 가지 않고 오히려 귀찮아한다. 중간중간 딴 여자들이 등장하고 그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페미니스트는 아닐지라도 이점에 대해서는 나도 여자의 입장에 서서 주인공에게 비난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굳이 윤리·도덕 수호자가 아닐지라도 사람이 죽어가는것에 지극히 냉정한 주인공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주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주인공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아내의 죽음을 향해 가는 도중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유쾌하지 않은 것들이다. 또한 보아지는 것들 또한 불유쾌 그 자체이다. 그런 일들에 주인공은 즉각 즉각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일어나는 일들에 바른 생각을 보이고, 보여지는 광경에 분노하기는 하지만 그저 속으로 삭일뿐이다. 그것이 그 시대에 주인공뿐만 아닌 모든 사람들의 일반된 모습일 것이다. 잘못된 것을 알고도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 잘못한 것 없지만 헌병이란 존재에 움츠려야 하는 - 참으로 인정하기 싫은 시대의 흐름인 것이다.시대를 떠나 주인공의 인간애(人間愛)적인 면을 보고자한다. 주인공은 한인간으로 한인간의 죽음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 죽음은 주인공에게 그리 슬픈 것이 아니다. 부부란 인연으로 묶여 있기는 하지만 애정, 사랑이 없는 그저 말로만 부인, 아내인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자체가 가진 이미지 때문에 슬픈 것이다. 막상 내가 아는 이의 죽음이 닥치더라도 그리 친분이 두텁지 않다면, 슬픈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안타깝다, 저런....'하고 죽음이란 단어에 반응 할 뿐 맘속 깊은 슬픔은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인공은 그런 맥락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고 있다. 살을 부대끼고 살지 않은 명목상의 부부이기에 슬픔이 없다.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면은 간간이 보여지고 있다.기차안 목욕탕에서의 상인들의 대화에서 주인공은 분노를 느낀다. 인간이 인간을 속여 자신의 이윤을 얻는것에서 우리도 분노를 느낀다. 쉽게 여기면 사람을 팔아서 자신이 돈을 버는 것이다. 그때의 시대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존재한다. 당연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비난한다.포승줄에 묶인 여인네. 그 여인내의 등에서 우는 아이를 보는 주인공은 그 옆에 있는 헌병을 미워한다. 배고파 울 아이에게, 추위에 울 아이에게, 따뜻이 어르고 달래주어야할 엄마의 사랑행위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후감/창작| 2003.04.28| 1페이지| 1,000원| 조회(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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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역사] 자연과학
    1. 서론17세기를 전후로 급격한 과학의 발달과 그에 따른 18세기의 기술 발달은 급속히 서양세계를 선진 세계로 이끌었다.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일까?과학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 지식. 광의로는 학과 같은 뜻이고, 협의로는 철학 외의 학문의 총칭 또는 자연 과학을 일컬음.'이다.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가 지금 '과학'이라 지칭하는 '자연 현상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극히 최근에서야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른 극히 최근의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실제로 '과학'이란 단어는 아주 최근에서야 새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에 대한 단서는 박성래 교수의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박성래 著)교보 문고"우리말로 '과학'이란 말은 지금으로부터 1세기쯤 전 일본인들의 말을 빌려 오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중국이나 월남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발음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본인들이 만든 '과학'이란 말이 이들 한자 문화권내에 고루 전파되어 퍼졌다. 물론 일본인들이 처음 '과학'이란 말을 만들게 된 것은 서양말 'science'를 번역하면서였다. 그런데 서양에서조차 이 과학이라는 단어는 19세기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운 용어로 정착하기 시작된 것이었다. 그만큼 과학이란 인류 역사상 아주 근래의 개념이다."이렇게 과학은 서양에서 먼저 크게 떨쳐 일어난 학문이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흔히 서양과학의 갑작스런 발달을 '과학 혁명'이라 한다. 17세기를 전후해서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 달 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인류문명도 과학의 힘에 힘입어 발전을 거듭해서 우주에 인공위성을 뛰우고 글로벌화 라는 현대의 과학 기술문명을 이룩했다.자연과학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일반적으로 과학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자연현상이 재현가능하다는 특성에 따라, 자연과학은 실험이 가능하고, 정밀한 수리적 방법으로 현상들 사이에 함수관계를 확정할 수 있는 등 방법면에서도 특징이 있었력으로 등장했다는 것과. 또 경제 생활의 중심이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하고 도시가 서서히 이루어진 점, 또 다른 한편 산업 혁명의 선두주자 영국은 막강한 공업력을 무기로 하여 세계경제 시장을 석권하여 경제 활동의 무대를 과거와는 달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시켰다. 산업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근본적 변화의 중심 축에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점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혁명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산업혁명을 보는 견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산업혁명은 물론 지금까지 이행되어 오는 사건일지 모른다. 토인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산업혁명은 격변하고 격렬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계속적인 기술적 혁신, 변혁을 수반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현시대의 관점의 지배적이다.그러나 확실히 산업혁명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산업혁명을 보는 관점에는 낙관론적 입장과 비관론적 입장이 생성된 것이다. 이러한 전혀 상반된 두 가지 견해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이고 계속적인 즉 지금도 이행되고 있는 산업혁명(자본주의로 보아도 타당할 꺼 같다고 생각한다)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비관론적 입장) - 토인비는 산업혁명을 기술혁신과 그 결과물로서 경제적 발전과정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사회구조적 변혁을 가져온 역사적 사건 즉 사회혁명으로 인식하고 있다. 즉 토인비는 19세기 산업사회의 특징인 경쟁 , 공장제 , 부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을 1760년-1830년에 이르는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혁에 의해 나타난 결과로 인식하고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산업혁명으로 보고 있다. 토인비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혁을 통한 경제구조변화 즉 기존의 인간적 유대관계에 기초를 둔 가내공장제도에서의 고용관계에서 금전적 관계를 목적으로 하는 공장제로 있었다는 점이다.셋째로는 영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안정된 상황(영국혁명)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18세기의 영국은 현시대의 경제적 상황과 같이 민주적, 자율적이지 는 못했지만 유럽의 어떠한 나라들보다 훨씬 경제적 자유가 안정 되었다것은 사실이다.또한 영국은 민간기업의 효율성을 보장하는 경제적 제도 , 합리주의와 자연을 지배하려는 사상 , 지리적 요인 등을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2)농업혁명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은 전혀 상반되어 보이는 농업혁명이다. 이러한 영국의 농업혁명은 제도적, 기술적 변혁을 동시에 발생시켰다. 이러한 농업혁명이 근대적 경제사회의 전제가 되었으며 인구증가로 인한 도시화의 진전을 뒷받침함으로써 산업혁명의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농업혁명이 산업혁명과 선행, 병행됨의로서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이다.농업혁명을 통해서 농업생산성이 증대하여서 급증하는 인구를 부양할 만큼의 식량공급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으며(식량의 자급자족만이 아니라 수출여력까지 발생하여서 산업혁명 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농업부문에서의 잉여노동력(토지를 상실한 농민의 도시이주)이 발생하여 산업 노동자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농업혁명을 통해서 영국 은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즉 농업부분에서 축적된 자본은 산업혁명기의 철공업 , 광업, 및 교통수단의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농가가 부담함으로써 상공업부분에서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이러한 농업혁명과정을 통해서 산업혁명에서 요구되어지는 사회구조적 토대를 마련해 놓을 수 있었다.영국농업의 제도적 변혁의 시작은 16세기의 인클로우저 운동에서 부터이며, 근대적 토지제도를 최종적으로 확립시킨 것은 18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초에 수행된 인클로우저 운동이었다. 인클로우저 운동은 경지확대와 경지의 효율적 이용을 목적으로 지주와 농업자에 의해서 수행된 사건이었다. 또한 인클로우저 운동은 토지있었다.두 번째로 면직물공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업이라는 사실이다 . 영국은 이미 농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구성장을 통하여 면직물공업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회구조적 토대를 마련해두었던 것이다.셋째로 면직물공업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중소비제란 사실 또한 기술적 변혁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하였다는 사실 , 또한 이러한 면직물공업이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지면서 규모의 경제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기술혁신과정에서도 유리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영국의 산업혁명과정에서 면직물공업의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물론 한정되어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직물공업은 가장먼저 기술적 변혁을 통해서 산업혁명에서 선도적 역할을 했었다는 점은 사실일 것이다.**면공업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을 간단히 설명한다면**①신공업이므로 기술혁신이 순조로움(기존의 제도적 제약을 받지 않는다)②가내공업적 기반에서 소규모 운영이 가능하였다③노동집약적인 산업이어서 노동력 확보(산업혁명기의 인구증가)가 쉬웠다④대중소비재로 국내시장 존재(식민지를 통한 수출요인)(자본재 생산부분 - 철공업, 기계공업, 석탄산업)6)철공업산업혁명을 통해서 영국은 세계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영국 산업혁명기에 면직물 분야에서의 기계화의 진전은 모든 산업분야에서의 기계화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산업분야의 기계화 과정을 통해서 철에 대한 수요를 확대시켰으며, 1830년대 이후 철도시대의 개막에 따라 철도건설을 통해서 철 수요는 더욱더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으로 철공업은 눈부신 발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철공업은 면공업과는 달리 철광석 및 석탄자재 등을 전적으로 국내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커다란 후방연관효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업의 기초자재를 공급하는 공업인 만큼 광범한 전방연관효과를 가지고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철공업의 발전은 영국의 공업화와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영국 공업의 근대적발전이 면공업에 의해서 선도되었지만 공업의 근대적 발전을내시장을 확대시켰다. 운하는 또한 토목기술의 발달시켜서 철도건설의 기술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제 3국면은 철도건설이었다. 영국의 경우 산업혁명기에 운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그러나 운하는 근대 생산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써의 자격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운하의 단점으로는 자연적 조건에 인해 건설과 상품의 운송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수송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효율성을 최대한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운하가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근대적 교통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 철도 였으며 철도는 기술적인 변혁 즉 증기력의 혁신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었으며 ,철도건설에 의해서 산업용 물자의 신속. 저렴한 대량수송이 가능해짐으로써 무엇보다도 생산요소의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용이 가능해지고 국내시장이 완전히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영국은 1850년대에는 철도의 주요간선망 완성하였고 철도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은 주식회사형태에 의한 민간자본으로 충당하였다.철도건설에 의해서 산업용 물자의 신속, 저렴한 대량수송이 가능해짐으로써 무엇보다도 생산요소의 보다 완전하고 효율적인 이용이 이루어지고, 국내시장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제산업에 많은 파급효과를 낳았으며 그 결과 철공업, 기계공업, 건설업 등의 관련산업 역시 발전할 수 있었다.11)화폐금융제도의 발달산업혁명기 영국의 경우 자본공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 저축률 유럽의 어떠한 국가보다 상당히 높은 상태였으며 이러한 자금이 산업자본으로 효율적으로 전화되어서 높은 산업이윤율을 올릴 수 있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영국의 발달된 금융제도로 순조로운 자본의 전환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영국의 화폐제도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원래 영국정부는 금은복본위제를 채용하였다.18세기중엽 은화의 유출로 실질적으로 금본위제는 1770년 법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금본위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은행권(잉글랜드은행, 지방은행에서 태환지폐 발행)역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화폐였다.그러
    인문/어학| 2003.04.28| 17페이지| 1,000원| 조회(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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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역사] 십자군원정과 종교개혁
    1. 십자군원정의 배경과 원인배경중세 서유럽 사회에서는 그리스도교 보급에 따라 수도원 문화가 번영하였고, 로마네스크 양식에 의한 교회예술의 완성을 보았다. 성유물의 숭경이나 성소 참예는 그 보편적 습속의 전형이었으며, 순례는 속죄행위로서 신도들 간에 전통이 되어 유행하였다. 예루살렘은 성도로서 순례의 최고 목표지였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계가 있는 곳인 성묘에 참예하는 것은 신도의 평생 소원이기도 했다.한편 11세기 중엽에 지중해 세계를 구성하는 서유럽, 비잔틴제국, 이슬람권의 3대 정치세력 사이에 균형에 변화가 생겨, 그때까지 닫혀 있던 서유럽이 이슬람세력의 포위망을 밀어 제치는 형세로 갔으며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1095년 피아첸차교회회의에 사절을 보내, 동방에 있어서의 이슬람 화를 과대선전하고 그리스도교신도, 교회, 순례가 입은 피해를 호소하였다. 이 요청을 받고 교황 우르반 2세는 동서교회의 재결합, 동방에 교회국가 창설, 서유럽 여러 국민의 대량 이민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구원군과 파견계획을 구상하고 11월 클레르몽공의회 개최 중에 제 1차 십자군 원정을 선언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 여러 국민은 종교적 사명감에 불탔으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야심을 채울 기회로 보고 성지해방을 대의명분으로 하는 무장 순례단을 대이슬람 원정군으로 파견하게 되었다.십자군 원정이 대규모로 전개된 요인에는 십자군 원정을 법적으로 서약한 원정 참가자들은 모든 부채와 의무 조항으로부터 해방되거나 일정 기간 자유로워졌다. 그 자신과 가족들은 더 이상 세속 법정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대신에 교회 법정에 귀속되었다. 십자군 원정을 그리스도교 본래의 소유지인 성지 예루살렘과 이와 인접한 모든 지역을 이교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인구 증가와 상업의 발달로 인한 도시와 상업의 부흥과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여 그리스도로 개종함에 따라 게르만 특유의 전투정신이 교회로의 유입을 들 수 있다. 또, 서유럽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재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 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려 했던 것이다.2. 십자군원정의 전개제1차 십자군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했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騎士)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隱者)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 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대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슬람의 점령지로 인정하고 다만 그리스도교의 순례를 허용한다는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제4차 십자군13세기에는 교황권은 절정에 달하였다.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십자군이 결성(이슬람군의 거점인 이집트의 팔레스티나로 목표가 결정)되었지만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내란중인 신성로마제국의 불참으로 프랑스 기사들이 주로 이 원정을 담당하였다. 이슬람 세력 타도를 목표로 기사 4천 5백, 보병 2만을 베네치아에 집결시키기로 계획되었었지만 집결한 병력은 절반도 안 되었고 수송비도 조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에 수송을 담당하였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헝가리가 점령하고 있던 해안의 도시 자라지방을 점령해 줄 경우 계약 위반을 따지지 않겠다고 제의하여 십자군은 이에 응하고 방향을 돌렸다. 이때 제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한 비잔틴 제국의 아이삭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는 이 십자군에게 한 제의를 하였다. 만약 비잔틴 제국의 황제 자리를 되 찾아줄 경우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아주고, 이집트 원정을 후원하며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황청에 귀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에 십자군은 수락하고 비잔틴제국으로 가서 그들에게 제위를 되찾아 주었다. 그러나 궁정내부의 반란으로 그들이 살해되자 십자군으로서는 약속했던 바를 무력으로 뺏는 것을 택하였다.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많은 성유물과 보물을 약탈하였으며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고 나머지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1212년에는 어린이 십자군과 같은 무모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의 방돔 근처의 마을의 한 양치기 소년은 가난한 순례자 모습을 한 신으로부터 성지탈환에 대해 쓴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을 신의 계시로 여긴 소년을 그 사실을 널리 알렸고 소년, 소녀들이 모여들어 남쪽으로 길을 재촉하여 마르세유 지방까지 도착하여 배를 탔지만 대부분 난파당해 죽거나 선주들의 농간으로 노예로 팔려갔다. 두 번째 어린이 십자군은 퀼른 출신의 소년이 모은 2만 여명의 십자 데에 큰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공이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신 기적으로 보았으며, 이후 계속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줄 것이라고 끝까지 기대하였던 것이다.둘째, 상이한 목표의식이다. 교황은 이번 기회를 통해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교황청으로 귀속시키는 것이었고, 기사들은 새로운 영지를 획득하려는 야망에 의해서 가담하였고, 상인들은 무역의 전진기지를 마련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며,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 의해서 참여했던 것이다.셋째, 지도력 결핍이다.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을 보면 유럽 몇 개 나라의 국왕에서 농민까지 각계각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였고, 군인으로서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훈련도 받지 않았고 군기도 엉망이었다고 한다. 또한 보급망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현지 조달(약탈을 통하여)해야만 했다.4. 십자군원정의 역사적의의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약화와, 국왕 권력의 강화 및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이 있다. 교황에 의해 제창된 원정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전사에 의해 단절된 귀족의 소유영지는 왕령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내고, 다량의 무기와 식량을 모으는 것을 통해 도시와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유럽보다 더 우월한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접하고 배웠으며 특히 1453년에 비잔틴제국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무너질 무렵 비잔틴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후에 르네상스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십자군의 영향은 전성기의 유럽세계의 힘의 팽창을 표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계속 됨에 따라 중세 유럽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가장 많은 희생을 바쳤던 기사계급의 몰락을 촉진하여 봉건제 붕괴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서 유럽인들은 그들보다 우월한 이슬람 문화와 비잔틴 문화와의 접촉이 늘어남으로써 큰 영향과 자극을 받았고, 먹기 위해 포로로 잡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에 저지른 만행도 마라 학살에 못지 않았다. 6주간의 전투 중에 십자군은 노약자나 부녀자등 민간인들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십자군에 종군한 한 프랑스 성직자가 남긴 기록을 보면거기에는 감탄할 만한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 예루살렘의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 병사나 기사들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 신전이나 회랑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의 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즉, 십자군들의 학살과 약탈 행위들이 모두 신의 영광으로 돌렸던 것이다.6. 종교개혁이 운동을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 ·콘스탄츠 ·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았다.
    인문/어학| 2003.04.28| 11페이지| 1,000원| 조회(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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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 염상섭론 평가B괜찮아요
    Ⅰ.머릿말횡보 염상섭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생을 마친 작가였다. 그는 서울 중산층의 풍속과 의식, 토박이 서울 말씨를 창작의 텃밭으로 삼은 작가였다.당대 대표 작가인 김동인 , 현진건의 , 육당 등과 함께 한국 근대 소설의 개척자로 꼽히기도 한다.염상섭은 40여년 간의 작품 활동으로 소설 180여편, 평론 100여편, 수필 50여편, 시 1편, 그 외 잡문 등을 남겼다.현대 문학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남긴 방대한 작품 수 외에도 그의 문학에서 보여지는 여러 특징들 때문이다.서구의 근대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를 자기 문학의 받아들인 횡보는 출발에서부터 자기 문학의 사명감과 한계점을 확실히 했다. 나의 문학은 한국 문학의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는 이념 아래서 생성된 그의 문학은 분명 우리 문학의 밑돌이 되어준다.본 연구에서는 염상섭의 생애와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자연주의, 사실주의와 그의 문체적 특징을 작품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Ⅱ.본문1. 작가의 생애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8남매 중 4째로 태어났다. 15세에 보성중학에 입학, 그 다음해 9월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1917년 21세에 동경여자 미술학교를 다니던 나해석을 만나게 되고 23세에 초고를 작성하고 三光의 동인이 된다. 24세 [폐허]를 창간, 25세에 그의 처녀작 를 탈고하고, 26세엔 을 [신생활]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33세에 결혼, 35세에 三代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36세엔 김동인의 로 인해 논쟁이 벌어졌고 을 [東光]에 보냈으나 실리지 않자 조선일보에 를 발표한다. 이때 중증과 머리 뒤의 발찌로 고생한다. 40세 만주국의 편집국장으로 가면서 창작생활은 중단한다. 만주로 건너 간 그 다음해 귀국해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간다. 42세에 모친상을, 43세에 부친상을 당한다. 49세인 1945년 8·15해방 당일 염상섭 대신 야경을 돌던 일본인 교사가 살해를 당한다. 10월 신의주로 돌아온다. 6·25 발발 후 해군에 입대, 1953년 57세에 원 참의였던 인식을 조부로 전주·의성·가평 등지에서 군수로 지낸 부친 규환과 모친 김경주의 6넌 2녀 중 3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이다.1902년 조부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움.1907년 대한제국 관립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1910년 보성중학교 입학.1911년 보성중학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 동경 마포중학교 편입.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오사카 천왕사 공원에서 재일 동포들을 규합,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가 검거, 투옥됨으로써 학업중단, 오사카 감옥에 있을 때 담당검사의 호의로 문학 서적을 차압받을 수 있어 문학학습에 도움이 되었다 함.1920년 《동아일보》창간과 더불어 정치부 기자로 입사. 귀국하여 근무함,7월 김억, 김찬영, 민태영,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 동인지《페허》를 창간함.1921년 처녀작 단편 발표.1931년 장편 (조선일보 연재 1.1∼9.17) 이어서 후속편인 (매일신보연재 11.13∼1932.11.12)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함.1963년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2.염상섭의 문학적 특징횡보 염상섭은 등의 작가로 장편, 단편, 수필 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일생 동안을 문학과 정론 직필을 했다.염상섭이 이룩한 문학사적인 공로는 사실주의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데 있다. 염상섭이 종생토록 이고 다녔던 화두는 주체의 정립과 리얼리즘의 정신이었다.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과 진리를 찾으려는 열정을 그는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고, 이 열정이 그를 리얼리즘 작가로 만들었다. 자유롭고자 하는 주체,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을 찾으려는 자만이 엄정한 객관적인 방법에 기초해 현실을 개념적으로 재배열하고, 변화하기 마련인 현실과의 소통을 통해 개념을 재구성해 나가는 방법이다.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시달린 암울했던 시대의 고독을 술로 달래며 살아온 산문 정신의 주도자인 염상섭은 술만 마시면 갈지(之)자로 걷는다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횡1)자연주의 문학의 수립유럽에서 시작된 자연주의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려는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작가의 태도도 자연 과학자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자연현상으로 본 인간은 당연히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강력하게 지배된 것으로 그려진다. 이 사조의 창시자는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12)이다. 졸라의 작품 중 는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작품인데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졸라 뿐 아니라 자연주의 문학은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 두산 세계 대 백과염상섭의 가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첫째는 자연주의 문학이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문예사조의 경향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 작품에는 청개구리 해부라는 자연과학 공부시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연주의 문학은 사실주의 문학에서 한 걸음 더 진전하여 인간의 표면아닌 내면까지 탐구한다는 입장에서 주로 인간의 추악하고 암울한 측면이 강조된 것이고, 는 그처럼 어두운 내면 세계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는 유럽의 온갖 문예사조가 일시에 맹목적으로 도입되고 모방적인 경향을 드러냈으며, 특히 당시의 문단 신입생들이 이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만세전·표본실의 청개구리 외, 하서출판사, 1997, p299작품속에서는 유명한 개구리 해부장면의 회상이 나온다. 중학시절 박물선생이 개구리를 해부하던 그 시퍼런 칼(매스)이 금방이라도 나를 찌르는 듯한 환각 속에 괴로워하고 있다.{) 김윤식, 염상섭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사, 1987, p143새파란 메쓰, 닭이똥만한 옴을옴을하는 심장과 폐, 바늘 끝, 조고만 전율······ 차례차례로 생각날 때마다 머리끝이 쭈빗쭈빗하고 전신에 냉수를 끼언지는 것 같았다. 남향한 유리창 밑에서 번쩍 쳐드는 메쓰의 강렬한 반 사광이 안공을 찌르는 것 같아서 컴컴한 방 속에 들어누웠어도의 어원사실주의의 원 어인 realism은 실물을 뜻하는 라틴어 realis'에서 유래하였다. 관념과 상상에 대립되는 이 말은 원래 철학적인 용어로 실재론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자연의 원상인 이데아 를 말한 것이 실재론의 기원이며 이 개념과 문학상의 리얼리즘은 상반되는 뜻을 갖는다. 이 같이 원래의 말뜻과 문학적 리얼리즘의 의미가 달라지게 된 것은 그 개념이 보편 논쟁 등을 통해 의미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란,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술이 문학에서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A콩트가 주장한 실증주의의 영향과 함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예술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문학에서의 사실주의는 사회를 관찰하고 쓴 사실과 소설이 발달하였다.한국에서의 자연주의는 풍자적·사실적 성격을 띤 연암 박지원의 등 고대 소설에서도 연원을 찾을 수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 최남선의 계몽문학에 이어 일본을 거친 사실주의·자연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부터이다. 특히 1919년의 3·1운동으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시대상황 은 사실주의 문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같은 해 창간된 잡지 《창조》에는 김동인의 , 전영택의 가 게재되어 처음으로 사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또한 염상섭·현진건의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모두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작품도 사실주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5년 이후의 신경향파 문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특징지어지며, 30년대에는 김유정의 토착적 사실주의와 이상의 심리적 리얼리즘이 대두하였다.{) 두산 세계 대 백과초기 자연주의 경향을 띠던 그의 문학은 차츰 사실주의적 경향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1924), (1949), (1949) 이 그러하고 (1931), (1955) 등 그의 대다수 작품들이 사실주의 경향을 띤다.몇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족 제도 등을 신랄한 묘사로 표현하고 있다.은 광복직후 당시 사회가 겪는 물질적, 정신적 가치관의 혼류를 잘 보여주는 소설로 정례모친의 물질적 파산과, 옥임의 정신파산을 그린 그리하여 두 가지 파산을 잘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는 중산층 계층이 전화라는 신 문물을 가지게되며 그것을 팔기까지의 과정과 인물들의 심리를 잘 그리고 있다.는 1930년 전후하여 조덕기家의 삼대를 통해 대가족제도의 유습, 번성하는 근대적 소비, 기독교집단의 타락 등을 그리고 있다.배에서 끌어내린 층층다리가 선창 위에 걸리니까, 앞장을 서서 올라오는 것은 흰 테를 두른 벙거지를 쓰고 외투를 입은 순사보와 육혈포줄을 어깨에 늘인 일본 순사하고, ............... 그제야 일·이등 승객이 하나 둘씩 풀리기 시작 하였다. 교통 차단을 당한 우리들 삼등객은 배 속에 갇힌 포로 모양으로 매우 부러운 듯이 모든 광경을 바라만 보고 섰었다.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추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웃음이나..........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정례모친은 남편을 졸라 집문서를 은행에 넣고 천신만고하여 삼십만 원을 얻어가지고, 부비쓰고 당장급한 것 가리고 한 나머지 이십이삼만원을 들고 이가게를 벌였던 것이었다.얼떨결에 나온다는 말이 젊은 서방을 둔 떠세냐 무어냐고 한 것은 구석없는 말이었고, 지금 생각하니 우스웠다. 그러나 자기보다도 훨씬 늙어 보이고 살림에 찌든 정례모친에게는 과분한 남편이라고.......... 남편은 편둥편둥 놀며 마누라가 조리차를 하는 용돈이나 받아쓰고, 자동차로 땅뙈기는 까불렸을망정 ...그건 고사하고, 첫째 대문 밖에 발을 내놓려구, 뀔게 있어야지...........옷만 해두 백원이 넘겠지 게다가 비나 가락지 뒷꼬지까지 싹싹 쓸어 내갔으니........저까진 나무통하고 쇠방울 두 개가 무엇으루 삼
    인문/어학| 2003.04.23| 6페이지| 1,000원| 조회(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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