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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공교육
    고려 공교육중앙 -국자감, 동?서 학당지방 - 향교32004017 박해경고려시대 최고 학부로 관료 배출에 지대한 역할을 한 국자감은 고려 건국 70여년이 지난 성종때에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자감이 설립되기 30여년전 광종때 이미 과거제가 운영)되고 있었고 이는 관료수급을 위한 교육 전통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태조는 건국 후 유학과 관계된 관부들을 설치하고 유학자들을 수용하여 유학자들을 수용하여 계속 학업을 전업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고, 또 인재를 직접 양성하기도 하였다. 즉 태조는 국초부터 학문적 관부로서 유학이념을 보급하는 원봉성, 지식계급을 등용하여 이후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하는 내의성 등을 설치하여 유학교육을 담당하며 유학적 지식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였다.성종때 이르러 국자감과 같은 교육개혁이 행해지는 것은 정치체제의 정비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성종 이전까지는 지방호족에 대한 강력한 통치가 불가능하였고, 성종에 이르러서야 중앙관제를 제정하여 3성 6부를 설치하고, 이어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서 자치권을 가졌던 호족들은 중앙정부의 통제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즉, 집권적 국가체제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지방호족들에게 위임되었던 교육을 국가의 통치권안으로 흡수하고, 또 중앙관료를 체계적으로 양성배출해야 한다는 당면의 개혁정책이 국자감 설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개혁으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자감◎-국자감의 성립과 예종의 교육개혁-성종 5년(986)을 전후하여 설립된 국자감은 성종 11년(992)에 국자감 시설을 준공함으로써 최고학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당시 국자감 수학생들은 향공(鄕貢)과 연계된 지방호족의 자제였다. 이후 향공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장리(長吏)나 백성의 자제도 입학이 허용되었으며 가세가 어렵고 하찮은 자도 능력에 의하여 입학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현종 이후 국자감의 입학자격에는 변화가 있는데 현종 15년(1024)에는 지금까지 제한이 없었던 향공의 정원이 고정되고, 덕종때는 국자감시(國子監試)으로써 국자감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예종 5년 과거제도 개편의 근본취지는 “제술, 명경 등 여러 과에 새로 추천된 사람들은 국자감에 3년동안 속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개혁론은 당시 국자감의 황폐화를 지양하고 명실상부한 최고학부로서 국자감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 과거 응시에 아무런 제한이 없었던 12도 출신이나 문벌귀족의 자제들도 3년 동안 국자감에서 수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②삼사제도의 운영성종 11년에 창건된 국자감 건물은 선종때에 이르러 퇴락하여 순천관으로 이전하여 교육하였으며, 국자감 복원사업은 예종때에 이르러 겨우 완성을 보게 된다. 아마도 국학을 준공하면서 문 ? 무 양학을 설치하고 또 국자감 기금으로 양현고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 교육에 대한 일대개혁이 단행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이때 준공된 국자감은 송의 ‘삼사제도’에 입각한 설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사제도란 송의 국자감에서 운영되던 교육제도로서, 국자감의 교육체제를 외사(外舍), 내사(內舍),상사(上舍)로 구분하고, 학생들의 교육성과에 따라 상급의 재사(齋舍)로 승보시켜 최후의 상사의 과정을 거쳐 관로와 연결시킨 교육제도였다.고려 국자감 교육시설이 삼사제에 의한 내부설계였으며, 또 이후 삼사제에 의하여 국자감 교육이 운영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당시 국자감 수학생들의 교육경력에서 확인된다.) 조충의 경우처럼, 내사생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이후 교육 성과에 따라 상사생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 이는 당시 국자감의 교육운영이 내사→상사로 연결되는 교육체제로 이것은 송나라 태학의 교육체제와 일치한다.③국학칠재의 운영예종의 교육개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국학 7재의 운영이다. 7齋란 7종의 전문강좌로서 「주역」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이택재로부터 「춘추」를 전문으로 공부하는 양정재까지 유학 6재와 무학(武學)을 전문으로 하는 강예재를 말한다. 그리하여 유학재에 70인, 무학재인 강예재에 8인을 선발하여 소속시킴으로써 7재가 성립된 것이다.武있다. 그러나 인종때 이르러 사회성향이 다시 귀족화되면서 인종11년(1133)에는 문, 무 양학 사이에 불화가 초래된다는 명분 아래 무학재는 폐지되고 유학재만을 운영하게 되었다.-국자감의 학제운영-)① 입학자격성종때는 주로 주,군,현 자제들이 서울에 올라가 배움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종5년(986)에는 상경하여 배움을 익히던 주,현 자제들 중에서 귀향을 원하는 207인을 本鄕으로 돌려보내고, 남아있던 53인으로 새로이 교육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이후 국자감 교육으로 계승되어 발전하는데 당시 이 학생들은 향공과 연계된 지방호족의 자제였다. 성종6년 교서에 각 주,군,현의 장리나 백성으로 하여금 가르칠만한 아들이 있으면 훈계하여 학교에 나아가도록 독려하고 있음을 볼 때 이들 자제에 대한 국자감 입학도 개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려사회가 귀족화되기 이전에는 가세가 빈한한 하찮은 자로써 국자감에 진출하는 자도 있었던 것 같다.또한 고려 중기 이후 사학 12도생들에게도 국자감 입학이 허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종때의 교육개혁으로 12도의 위상이 격하되었고, 또 이들 12도생들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국자감에서 의무적으로 수학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그 의의를 잃어버린 것 같다.②학생정원성종 초기 서울에 머물던 학생들이 귀향한 뒤 남은 53인으로 새로이 교육체제를 정비하였다. 이후 성종은 몇 차례 걸쳐 흥학에 대한 의지를 교서로써 발표하였고, 그의 의도에 따라 학생들은 크게 증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종 때의 국자감은 이후 문종 때를 전후하여 당시 사회의 귀족화 성향과 결부되어 문벌귀족에게 외면되고 귀족들이 12도를 비롯한 사학에 집중되는 과정에서 국자감 교육은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원도 대폭 감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종의 국학 중흥책은 국자감 정원 확충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거지에 보이는 인종 8년 국자감 생도들의 상서에는 에서 나타나는 교육과정의 이수 연한이다.위 원칙에 입각하여 수업연한을 합하면 8년반(상서,공양,곡양의 과정을 1년 반으로 시정시 7년 반)이 나온다. 그러나 학식에 규정된 각 경서의 이수기간은 경서이수를 위한 최장기간으로 설정한 것이지(국자감에서 수학 할 수 있는 최장연한), 모든 학생으로 하여금 이 이수기간 동안에 정해진 경서만을 수업해야 한다는 의무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고려 국자감생은 학업성적이 뛰어난 자는 그 승차과정에 특전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수학능력에 따라 정해진 경서를 이수하고 바로 다음 경서로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준은 국자감 학생의 성적평가인 월서계고(月書季考)에 의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국자감은 사계사시(四季私試)의 평가로서 수업받는 경서를 끝마칠 수 있었을 것이며, 이어 상급의 다른 경서로 옮겨 이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정종2년(1036)의 판문 “생도가 입학하여 만 3년이 되면 바로 감시(監試)를 보도록 허가하였다”에서 보는 것처럼 국자감 재학 3년은 그대로 국자감의 수업 연한과도 연계될 수 있을 것이다.지방의 교육기관향교고려시대의 지방교육을 담당한 관학기관은 향교였다. 향교가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나, 그 연원은 통일신라시기 지방교육의 전통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기에는 유학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잡학교육기관을 설치하였고, 지방에도 관학 교육기간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주치소(州治所)에 조교를 파견하고, 청주지방에 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이 나말여초에 의하여 지배, 운영되어 왔다는 사실로 충분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큰 읍에 설치되었던 학원과 같은 지방학교들은 나말의 중앙집권체제가 이완된 틈을 타서 호족들이 장악하였으나 성종조에 이르러 중앙의 통제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설립과 변천 -고려시대 지방학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조 13년(931)에 설치한 서경학교(西京學校)가 효시이다. 서경에 설치한 학교로서 고려의 정치적 처럼 지방의 학생들에게 교육 받을 기회를 많이 제공해주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향공(鄕貢)의 숫적 증가와 이에 따른 향공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이같은 향공의 숫적 증가에 따른 질적 저하를 막고 지방세력의 중앙진출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고자 계수관시(界首官試)의 엄정한 관리를 통하여 향공의 질적 향상을 꾀하려 하였다.예종,인종:두 왕은 학문을 좋아하는 왕으로 인종의 경우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겪으면서도 학제와 과거제를 재정비하여 문풍을 크게 진작시켜 고려 교육사에 분수령을 이루었다. 이렇게 교육을 강조한 것은 정치적 면목을 일신하여 민심의 안정과 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그 동안 침체되었던 향교 교육을 강화하고자 취해진 조치라 생각된다.무신정권기: 무신정권 이후 약 1세기기간에 문무가 교체되고, 몽고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민생이 도탄에 빠지어 중앙과 지방의 교육이 부진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무신정권기에도 향교는 존속되었고, 무신정권하의 교육과 과거는 무신집권체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문한관(文翰官)을 확보하여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충선왕,충숙왕: 적극적인 흥학책으로 향교교육은 점차 회복 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학교교육을 강조하면서 인재의 등용에 있어 세가의 자제뿐 아니라 유능한 유사를 관할 고을수령이 천거하여 쓰도록 하였다. 이런 조처는 지방 교육의 활력소가 되면서 충선왕 5년부터 충목왕 2년까지 33년간에 9개의 향교가 중수되거나 새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고려 후기의 향교교육이 전국적으로 회복되어 간 것을 말해준다.공민왕: 공민왕은 유능한 인재를 골라 쓰고자 산림향곡(山林鄕曲)에 경명행수(經明行修) 하고 무재고절(茂才高節)한 유사가 있으면 천하여 탁용하도록 하였으며,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이니 퇴폐한 학사를 수리하여 생도를 기르도록 하고 경학에 능통한 자를 보고하도록 하였다.이후 창왕은 주현학(州縣學)에서 공사(貢士)가 정해진 수가 차지 않으면 그 책임을 수령에게 물어 수령의 지방교육에 다.
    인문/어학| 2006.10.23| 7페이지| 2,000원| 조회(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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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양사,인문-사학]중국의 관리등용
    중국의 관리등용1. 은,주 시대【금성】주의 왕은 수도 부근의 직할지만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은 왕족이나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p.35【지학사】왕은 직할시를 직접 다스리고, 동맹세력과 일족을 세습제후로 봉하여 토지를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군사적 봉사와 공납을 받았다. 제후도 영지의 일부만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토지는 가신들에게 분배하고, 관직을 세습하게 하였다. p.28◎ 주대의 향거이선(響擧里選): 향노(響老)가 본토지방의 선비 중에서 현명하고 능력있는 인사를 선발하고 지방장관이 다시 추천하여 중앙에 직접 보내진다. 향리에서는 매 3년에 한 번씩 대비(大比 ))를 거 행하여 향인을 선발하였다. 왕은 추천된 현명한 사인들을 친히 시험을 치루는데 그 내용 은 활쏘기였다.사인의 선발에는 무공이 무척 종요한 것이었으며, 후세에 전적(典籍)위주로 선발되는 문관선발과는 정반대였다. 이것은 상고시대에 있어서 부락국가의 상무정신이 유습된 것 이었다.그러나 주대 이전의 사회문명의 발전은 아직 초보단계였다. 단지 통치집단가족의 구성 원만이 교육을 받아 지식계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식계층만이 국가를 다스릴 수 있 고 통치집단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국가기구의 각 구성부분은 실제로 통치집단 내부구성 원들이 주로 세습하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추천선발 방법은 기본적으로 종법과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어쩌다 최하층 선비계층이 추천되어 선발된다는 것은 세습혈 족관계의 올가미를 초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고위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였다.2. 춘추전국시대【금성】춘추 전국시대에는 각국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수많은 사상가가 나타났다.p.48【지학사】춘추 전국시대에는 … 제후들은 경쟁적으로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여 부국 강병 책을 추진하였는데, 이 때 출생 신분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였다. p.37◎ 춘추 전국시대 관리등용: 주의 천자는 제후국을 통제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게 되었고, 많은 제후들도 경대부를 통제할 수 , 장고(掌故)에 임용되고, 특히 우수한 자는 낭관(郞官)으로 충원되었다. 또 지방의 하급관리로 있다가 태학에서 재교육을 받은 자는 대부분 중앙의 9卿 혹은 지방 郡太守의 속관으로 임용되기도 하였다.◎황제의 특명(정규적인 제도는 아니었다.): 한의 高祖는 현재(賢才)를 구하는 령)을 내렸는데(B.C. 196) 이는 한대의 새로운 인재등 용의 시작이였다. 惠帝 때부터 효제역전(孝梯力田)에 뛰어난 자를 추천하여 요역을 면해주 고 그들로 하여금 鄕人을 통솔토록 하였다. 그 후 文帝때에는 중앙의 고관으로 하여금 현 량방정(賢良方正), 직언극간(直言極諫)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文帝는 다시 인재를 추천할 수 있는 범위를 중앙의 고관이외에 지방의 후왕(侯王), 공경(公卿), 군 수(郡守)에까지 확대하였다.(B.C 165) 또 다시 조서를 내려 중앙의 고관과 지방관으로 하 여금 현량방정(賢良方正),직언극간(直言極諫)의 인재를 천거토록 하였다.◎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 한대의 향거리선제가 정식으로 제도화한 것은 武帝때 동중서의 건의에 의하여) 각 郡國 에 효자(孝子),와 염리(廉吏, 청렴하고 결백한 관리) 각 1인을 추천토록 명을 내렸다. 후 에 양과가 점차 하나로 합해져 한 과가 되어 효렴이라 칭하였다. 추천된 인물이 중앙에서 책문한 결과 적임자가 아니면 추천자를 문책하여 처음에는 추천을 기피하였으나, 무제는 진일보한 규정을 정하여 각 군국지방에 매년 본지의 인구비례에 의해 중앙에 일정한 수의 효렴을 추천토록 하였다.) 이처럼 효렴과는 빠르게 발전하여 한대사인이 관직에 나아가 는데 있어 중요한 경로의 하나가 되었다.또한, 수재과도 찰거의 중요한 과목 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효렴이 덕행을 중시한다면, 수재과는 재능을 중시하였다. 수재과의 시험과목으로는 명법, 치극, 병법, 음양재이 등의 과목이 있었다.이런 효렴과나 수재과는 철거가 이전처럼 황제의 명령에 의해 시행되는 임시적인 것이 아니고 일종의 구체적인 규정과 인원수를 정한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제도가 두어 9품을 정하고 있는데, 등급의 높고 낮음의 그의 뜻에 달려 있어, 임금의 권세와 은혜를 제멋대로 가지고 놀며 천자의 권한을 빼앗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상품(上品)에는 천한 가문 출신이 없으며, 하품(下品)에는 권세가가 없다고 합니다.” -「진서」 p.77◎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이 법은 魏가 건국하는 220년에 尙書인 진군(陳群)의 건의로 실시된, 추천에 의한 관리 선발제도이다. 이 법을 실시한 동기는 후한시대의 관직등용이 외척이나 환관등에 의해 극 도로 문란하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으려는데 있었다.그 내용을 보면 각 州 와 郡 에 현지사정에 밝은 高官을 임명하여 中正官으로 두고 그들 로 하여금 지방의 청년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각 지역의 中正官은 관할지역 내의 여론을 살펴 덕망있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을 9品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鄕品이라 하였다. 지방 에서 추천된 鄕品에 따라 중앙에서는 관리로 임명하는 官品을 주었다.)9品 가운데 제일품에 추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호족은 보통 제2品으로 추천되었으 므로 문지이품(門地二品)이란 말이 유행하게 되었고, 여기에 호족과 官品이 밀착되면서 가문을 중요시하는 문벌귀족이 탄생하였다. )p253참고할것)6. 수【금성】수대 시작된 과거제가 당의 설명부분에 언급되고 있으며(p.82)..수에서 시작된 과거제에 대한 설명은 p.87 세계사 10장면(수~원 시대의 과거제)으로 구성되어 있다.【지학사】수의 문제는 종래의 관리선발제도인 9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선거(과거)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여 귀족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p.79◎선거제도: 수대의 선거제도는 지방의 주,군에서 추천된 人士를 수도에서 과목에 따라 시험을 보았 는데, 秀才, 進士, 明經科 가 있었다. 선거는 당나라에서 과거라고 명칭이 바뀌고 唐 , 宋 을 거쳐 淸末에 폐지될 때(1904)까지 관리 선발시험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유숙의「大唐新語」에 “진사, 명경 두 과를 설치하였다.”라고 되어있어 과거제도가 수 대에 창州에서 일차시험에 합격한 鄕貢 進士와 향공명경이 수도에 와서 시험을 보았다. 중앙에 올라온 자가 대체로 3천여명에 이 르고, 이 중 급제자는 진사 수십명에 명경2,3 백명이었으므로 진사에 합격하는 것이 어려 웠다.◎制科 - 그때그때 황제의 특명에 따라 인재를 선발: 제과의 ‘制 ’의 의미는 詔와 같고 황제의 명령이다. 제과의 응시자는 거의 평민이며, 과 거급제자, 현직관리 혹은 파직된 전직관원도 참가할 수 있었다. 제과시험의 성적은 5등급 으로 구분하였고 내용은 책론 위주로서 文詞의 과목으로 시부잡문을 첨가하였다. 제과는 고시 시기가 고정되지 않았으며, 과목은 황제가 임시로 결정하였다.◎生徒 - 관학 졸업생을 시험하여 관리로 등용: 당의 학교교육과 과거제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학교교육은 관인으로 나아가는 과거 시험 준비 교육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당의 귀족사회를 반영하는 엄격한 신분제한을 통과해 관학으로 들어간 귀족자제들은 국자학, 태학, 유교경전을 공부하였고, 매년 겨울에 시험을 치루어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였다. 졸업 후에 관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국자감에서 행하는 시험인 策試에 합격해야 한다. 책시 후 예부시험에 합격하면 관리가 되는 자격이 주어졌다.◎당대 과거제의 폐단: 현종 때의 조광은 “시험을 보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는 논하지 않고, 오로지 시부의 아름다움만을 취한다. 또한 학습한 것은 실용적인 것이 아니고, 실용적인 것은 학습하지 않는다. 고로 관직을 맡은 사람 가운데서 직분에 맞는 관리가 적었다.” 그리고 일반 사인 들은 대부들에게 연줄을 대서 이끌어 줄 것을 요구하고, 동료를 헐뜯으며 먼저 등용되기 위해 다투었다. 또한 매년 한 차례 고시를 실시하였는데 초가을에 떠나 늦봄에 돌아오니 휴식할 겨를도 없게 되고 가난한 지식인들은 생활의 경비를 감당하지 못하였다.【금성】송은 문치주의를 목표로 학교와 서원의 건립을 장려하고 과거제를 통하여 인재를 선발하 였다. p.84【지학사】송 태조는 절도사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문관을 우대하는 문치주정성을 높였다.◎과거제의 폐혜: 한사람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경제적 부담이 엄청나 일반서민의 과거참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 모두가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노력을 다하면서 학교교육은 과거에 예속되고 과거시험 이외의 학문의 발전이 불가능하였다. 또한 과거지망생에 비해 합격자의 수가 극히 적어 낙제자 중 일부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도 했다.)【금성】중국을 통치하는데 민족차별 정책을 썼다 … 관리를 선발할 때 극심한 차별을 두었으며 화북보다 강남에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p.86-참고자료-원대에 이르면 … 관리선발에 극심한 차별을 두었다. 그 때문에 원은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의 협조는 얻지 못하였다. p.87【지학사】본문에는 관리선발에 대한 언급이 나와있지 않다.-도움자료-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몽고인 제일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에 의해 소수의 몽고 인이 주 요 관직을 독점하고, p.919.원◎원대의 관리선발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일시 중단하고) 원조 특유의 문벌주의를 택하고 있다. 원은 과거제 폐지 대신에 고급관료(正官)는 은음제(恩蔭制), 세습제, 추천제를 택하였고, 하급관료(首領官)은 서리출신제(胥吏出身制) 혹은 이원세공제(吏員歲貢制)를 취하고 있다. 고급관료를 임용하는 은음(恩蔭)이나 세습제는 모두가 가문을 중요시한 인물선발방법이며, 추천제의 경우도 추천하는 사람의 친척이나 제자 등 가까운 門族의 은혜를 입고 관계에 진출하고 있다. 다만 원대의 문벌귀족제는 중국의 전통사회와는 달리 몽골 조정과의 친인척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는데, 이를 몽골어로 근각(根脚)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 근각의 유무에 따라 고급관료에의 진출통로가 결정되었다. 원조가 관리임용의 기준을 이와 같은 근각에 두 것은 바로 몽골유목민족의 주종관계의 풍습을 계속한 것이라 하겠다.【금성】명을 세웠다 … 과거제와 학교제를 부활시키고 … p.152명,청시대의 지배층은 신사로 … 신사는 학교와 과거제를 통하여 형성… p.156【지학사】명을 건국이였다.
    인문/어학| 2006.05.23| 9페이지| 1,000원| 조회(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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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현대사]10월 민중항쟁과 제주 4.3항쟁
    10월 민중항쟁▶ 해방정국(특히 남한)의 일반적 상황◀‘해방’이라는 계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살펴보면, 첫째, 새로운 국가 수립의 문제, 둘째, 친일파 처단 문제, 셋째, 토지개혁의 문제, 넷째, 적산의 처리와 노동자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주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좌익세력과 8.15와 더불어 새로이 개입한 미군정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해방 직후는 일제의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는 대세가 지배적이라 친일, 우익세력이 독자적으로 활동할 시기가 아니었고, 따라서 좌익과 미군정의 대립이었으며, 미군정은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대리세력을 성장시키기 전까지는 직접적으로 좌익세력을 분쇄해야만 했다.앞에서 제기한 주요문제들이 남한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면, 10월 항쟁이 발발되는 시점에서의 해방정국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첫째, 새로운 국가형태의 선택문제를 둘러싼 미군정과 좌익세력의 갈등이다. 해방이 된 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준)이 수립되어 각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38도 이남의 유일한 정부는 미군정임을 주장하며 인민위원회의 치안과 행정을 재탈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일제하의 국가기구와 친일세력을 재등용시켰고, 경찰을 최대한 사용하였으며, 이어 진행된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제거는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진행되었다.둘째, 친일파 문제는 남한에서 전혀 해결되지 못했다.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으로 처벌되기는커녕 그들의 지위가 유지되었을때, 민중들은 분노했다. 10월 항쟁시 대부분의 공격이 경찰과 관리에게 가해진 이유는 이들이 일제하에서도 민중들을 착취 탄압하는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이후 반민특위 활동의 와해가 상징으로 보여주듯 우야무야 끝났고, 이후에도 그들의 기득권은 유지되었다.셋째, 남한에서의 토지문제에 대한 해결은 지지부진했다. 좌익세력은 초기부터 전면적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았고, 민족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회를 설치하여 지방군정청의 협의기관적 성격을 지닌 행정고문회는 도, 부, 군, 읍, 면 등에 설치되었다. 설치과정은 당시 광범위한 대중적 기반위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을 배제시키고 미군정에 보다 우호적인 인사들을 ‘선택’하는 메카니즘을 잘 보여준다.한편, 경북의 경찰력이 재건, 강화되었고 이 조직의 말단은 거의 면 단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 미군정이 효율적인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했고, 이를 통해 경찰력을 군정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최고의 힘으로 사용하였다.다른 한편, 좌익적 성격이 강한 국군준비대가 전국적으로 수립되자 이를 해산시키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국방경비대도 좌익적 성격을 나타내는 곳이 있었는데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대구에서 창설된 제6연대였다. ‘10월 항쟁’때 제6연대 활동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지만, 김천에 출동한 국방경비대가 대전의 제2연대 소속의 1개 중대인 것으로 보아 제6연대는 경찰처럼 적극적으로 좌익탄압에 앞장서지 않은 듯하다.이상과 같이 살펴보았을때 미군정의 기본적인 의도를 알 수 있다. 즉 경북 미군정청은 일제하의 관료, 경찰의 유지와 강화, 우익 중심의 행정고문회 수립 등의 정책을 통하여 친일, 매판 지배세력의 무장력과 근거 기반을 확충해줌으로써 그들을 재등장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이들을 통해 좌익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하였다.우익은 처음부터 강력한 조직은 아니었으나 중앙의 우익활동에 영향을 받아 우익적 인사와 단체가 점차 결집되었다. 이들은 건준 대구지부에 대항하여 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하고 이후에는 좌익의 인민위원회에 대응하여 이승만 노선의 조선독립경북촉진회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대중적 조직이라기 보다는 이익단체들의 연합회적 성격이 강했다.마지막으로 좌익을 살펴보자면, 해방이 되자 건준 대구지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이들은 우익적 성향의 인사들이 만든 경북치안유지회와 절충하여 건국준비경상북도치안유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좌우익 연합단체 건국준비경상북도치안유지회가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자 생하였다.▶경북지역 10월 항쟁의 전개와 성격◀10월 항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9월 총파업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8.15직후 노동운동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와 투쟁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에서 선전술)을 채택한 시기를 전후하여 전평에서는 파업회피지령을 취소하고, 뒤이어 전평기관지에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는 강경노선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9월 14일 서울철도국의 경성공장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① 가족수당 1인당 600원② 물가수당 2,000원③ 일급제 반대④ 식량배급(종업원 4합, 가족 3합)⑤ 해고 절대 반대⑥ 임금인상이런 요구에 대해 성의있는 답변이 없자 9월 23일 부산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선두로 전철도종업원 4만명이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에 25일 출판노조가 식량문제 외 정치문제를 내걸고, 경전도 파업할 기세를 보였다.▶대구지역 총파업 및 10월 항쟁의 전개과정◀9월 23일 하오 3시경부터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천여명이 파업에 돌입하여 대구철도쟁의단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파업성명서를 통해 일급제 반대, 임금인상, 쌀배급반대, 해고반대 등을 요구하였으나 서울의 운수국은 파업이전에 진정이 없었다는 이유로 상담을 거부했다. 철도노조의 파업에 이어 대구우편국의 파업, 섬유공장 및 조선중공업 대구지부, 출판노조도 파업에 들어가 신문발행도 29일부터 중지되었다. 30일 낮까지 알려진 파업업체의 수는 30여 업체에 인원은 5,035명이 참여하였다. 대구의 파업이 부산이나 전주 같은 지역)에 비해서는 조직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주요한 원인이 있었다. 첫째, 대구지역 노동운동이 덜 탄압을 받으며 노동조합대구지역 평의회(노평)이 조직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대구의 파업은 서울의 파업처럼 강력한 경찰이나 우익에 의해서 분쇄되지 않았다. 셋째, 중앙의 갈등이 대구 좌익세력의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이러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10월 1일을 계기로 인민찰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해지자 다른 도의 경찰, 미전술군, 국방경비대(충남)등이 동원되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우선 미군정은 대구에서 10월 2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6일에는 전지역에 야간통행을 금지하는 포고가 발표되었으며, 같은날 계엄사령관과 군정지사의 명의로 ‘개인적 이기적 목적을 가지고 책동하는 과격한 정치, 문화, 기타 단체’의 선동에 응하지 말라는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잇따라 각 지역에서 파견되는 진압세력은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진압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진압과정은 자료부족으로 인해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항쟁이 가장 심했던 영천, 왜관 방면으로 우선 경찰이 파견되고, 나머지 응원대가 다른 지역에 추가로 파견되었다. 미군과 경찰이 소총과 기관총을 사용한데 반해 농민은 죽창, 낫 등을 지녔을 뿐이며 미군-경찰-국방경비대-우익단체로 이어지는 항쟁진압의 무장력은 10월 항쟁 이후에도 그 기본적 형태는 바뀌지 않았으며, 단지 미전술군의 역할을 국방경비대가 대신 맡았을 뿐이었다.10월 항쟁이 진압되자 가장 큰 피해자는 좌익과 민중이었다. 경북도내 좌익세력들은 9월 총파업과 항쟁의 주모자로 검거되었고, 일부는 산으로 도망쳤다. 미군정과 경찰, 우익은 10월 항쟁은 진압함으로써 좌익과 민중의 대중투쟁적 공세를 막아냈던 것이였다. 이는 경찰의 실력과 생존력에 있어 전화점이 되었다. 미군정은 항쟁참여자를 단죄했고, 경찰과 우익은 마음놓고 보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제하에서부터 지배당해왔던 민중은, 또 일제에 저항해왔던 좌익세력은 해방과 더불어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나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이젠 더 이상의 대중적 형태의 항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4.3항쟁▶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사회적 배경◀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었으나 제주도의 일본군이 철수 한 것은 68일이 지난 1945년 10월 23일부터였다. 제주도는 완전한 해방을 맞지 못한 상황이었으나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조직 경험과 방법을 토대로 자치적인 치안조직 및 행정, 동자 검거에 주력하여 대대적인 체포작전이 전개되었다. 3.1절 준비위원회 간부들이 검속되는가 하면 중등학생을 마구 잡아들였다.발포사건에 대해 사과성명은커녕 대대적인 탄압이 들어오자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에서는 ‘ 제주도 3.1사건 대책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3월 10일 정오를 기하여 총파업 단행을 결정, 한국에선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도청 파업에 이어 모든 관공서는 물론 은행, 학교, 통신기관 등 도내 156개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상점은 철시되고 학생들은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심지어는 미군정 통역관과 일부 경찰까지 참여하였다.총파업은 조직적으로 전개되면서 더 효과적인 실효를 거두기위해 연합전선을 펴기로 하고 ‘제주읍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은 모든 업무가 마비되자 성명을 발표하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3월 14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내도하여 진상을 조사함과 동시에 무차별적으로 총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무차별 검거와 탄압으로 총파업은 조병옥이 제주를 떠나던 3월 19일에 이르러 거의 끝났지만 그 여파는 컸다.미군정 당국은 3월말로 총파업이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들자 제주도의 수뇌부를 전면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교체된 인사들은 대부분 강성인물들로 이들의 부임이후 집중적인 우익강화정책이 전개되었다. 총파업에 가담, 주도한 관리들을 가려 사상불온을 이유로 파직시키고, 본토출신으로 채우며 심지어 경찰조차도 제주도 출신이라면 믿지 못하는 인사단행의 단면에는 ‘좌익들의 세상인 붉은 섬’이라는 제주도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었다. 이런 정책은 육지인에게 배타적이던 제주도민들 자극시키고, 연이어 발생한 육지부 경찰대에 의한 고문취조는 도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이후 좌익과 미군정간의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었고, 특히 제주도는 육지부 경찰과 서청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한 탄압과 연쇄적으로 일어난 3건의 고문치사, 식량난과 식량배급을 둘러싼 모리배의 발호로.
    인문/어학| 2006.05.23| 11페이지| 1,500원| 조회(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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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교육철학 요약 평가A+최고예요
    교육철학▶ 철학과 교육① 형이상학(=존재론):교육의 이론과 실제에서 과학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답한다. 인간은 고정된 삶의 목적을 갖는지, 사회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변하는지, 아니면 변하지 않는지에 대한 답에 따라 다른 형태의 교육이론과 실제를 제시한다.사회와 인간은 영구불변의 존재로 이해하는 경우, 교육의 임무는 학생으로 하여금 사회의 제도와 관습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배우고 교육하는데 있으나, 변화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경우, 사회의 제도와 관습은 끊임없이 재검토되고 재평가되어야하므로 필요에 따라 수정하도록 교육해야 한다.②인식론:앎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다루어, 교육의 내용과 방법은 선택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진리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며 이성과 추리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보는 경우, 교육은 절대적 진리를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하고, 이성 훈련과정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는 상대적이고 경험에 의해 알 수 있다고 보는 경우, 교육은 진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요구하지 않고 실험과 검증을 거치도록 하며, 경험에 의해 스스로 체득하게 한다.③가치론:善 과 美 에 대한 가치기준을 제시하여 교육의 방향을 결정한다. 眞善美와 같은 영원불변의 최고의 보편적, 객관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으면, 이러한 가치를 철저히 교육을 통해 체득시켜야 할 것이며, 고정된 가치나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가치는 상대적인것이라고 믿으면, 이성적인 관조보다는 경험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전통적 철학과 교육①이상주의(관념론):인간의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경험적인 세계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정신적인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실재는 보다 근본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영원불변하는 정신적인 존재인 것이다.인간은 소우주이고 우주는 대우주로 보아서, 인산의 대우주가 축소된 형태로서 보편적 존재의 한 부분으로 본다. 인간은 회상에 의해서 그 자신에 내재되어 있는 대우주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직관과 통찰, 내적 자각을 통하여 개인은 얻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한다. 즉, 앎은 감각과 이성적인 작용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다.실재는 이상주의에서와 같이 절대적이며 불변한다. 다만 근거로 고전적 실재주의는 보편적, 이성적 도덕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보며, 종교적 실재주의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도덕 법칙이기 때문이며, 과학적 실재주의에서는 인간성이나 자연성은 변하기 않기 때문이라고 달리 주장 할 뿐이다.이런 철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실재주의 관점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교육의 임무는 조직화된 체계적인 지식을 연구하고 배우도록 하여 이성적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이성교육이 가장 중요하고 개인의 이성을 계발시키는 교양교육이 중심이 된다.-교육내용: 실재의 객관적 질서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되, 그 가치가 증명된 항구적이며 생활에 필수적인 내용으로 한다. 관념을 무시하진 않으나 감각적 경험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이론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와 부합되어야 한다.-교육방법: 교과목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우수한 지도 기술을 갖춘 교사가 강의, 토론, 실험 등 다양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지도하도록 한다. 교육에 있어 학문적 기본 훈련이 중요하며, 교육의 권위와 주도권은 교사가 가지므로, 교육의 내용과 방 법의 선택은 교사의 몫이다. 교사는 가장 가치있는 내용을 선정,체계화하여 가 르친다.▶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실재는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경험의 총체로서, 그 본질은 변화한다. 우주의 실재는 인간의 관념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그 관념에 독립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변 화’를 실재의 본질로 본다. 우주는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는 한도 내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인간은 백지상태로 태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형될 수 있는 생물학적, 사 회적 존재로 보았다.도덕적 가치나 윤리는 문화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므로 상대적이다. 가치는 항상 발생하고 있는 개인의 경험과 문화적 축척과의 전환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진보주의 형성과정을 보면 19세기 말엽 20세기 초엽에 걸쳐서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도시 빈민들의 자녀 교육이 사회문제화 되었다. 진보주의 교육철학은 프래그머티즘, 실증주의 등의 철학적 관점과 뉴턴, 다윈의 자연과학적 관점과 제임스 등의 심리학적 관점 등이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진보주의 원리-① 교육은 장래의 생활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현재의 생활 그 자체여야 한다. 각기 그 연 령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② 학습은 어린이의 흥미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야 한다.③ 교과목을 강요하기 보다는 문제해결 위주의 학습이 더 중요하다. 추상적인 지식에 대한 탐구는 활동적인 교육경험으로 바꿔져야 한다.④ 교사는 감독자가 아니라 안내자여야 한다. 교사는 자신의 탁월한 지식과 경험으로 어린 이를 도와주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⑤ 학교는 경쟁을 시키기보다는 협동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경쟁보다는 사 랑과 협동이 효과적이다.⑥ 인간의 진정한 성장과 인격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촉진하도록 민주주의적인 풍토가 강조되어야 한다. 학생 자치활동, 자유로운 의사소통 등에 모든 사람의 참여를 장려해야 한다.-진보주의 비판-① 어린이에게 자유를 지나치게 부여하여 확고한 교육목적이 결여되어 있다.② 흥미와 자유를 강조하여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지식을 소홀히 하였다.③ 협동을 중요시하여 경쟁의 교육적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소수의 지도성을 반영하지 못 했다.④ 현재 생활 자체를 중요시하여 교육의 미래에 대한 준비성을 간과하였다.⑤ 민주방식을 과신하여 가치의 절대성을 경시하였다.2)본질주의본질주의는 진보주의 교육이 갖는 한계점을 극복하고 전통적인 교육이 갖는 장점을 되살리려는 보수적인 교육이론이다. 본질주의는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계승하게 함으로써 역사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을 길러 내자는 운동인 것이다.본질주의가 형성된 과정을 보면, 우선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진보주의 교육의 문제점들, 특히 객관적, 전통적인 문화를사회과학은 경시하고 있다.②논리적, 체계적인 지식을 교사의 주도하에 지도하므로, 학생의 참여의식이 결여되기 쉽다.③기본적인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는데 몰두하여, 진지한 종교적 차원의 교육을 소홀히 함.④과거의 문화유산을 중시하여, 미래에 대한 전망과 사회혁신의 자세가 미흡하다.3)항존주의항존주의는 진보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절대적이고 영구불변하는 진리와 가치를 반드시 교육해야 한다는 교육이론이다. 영구불변하는 진리의 보편성과 이성적 존재로서의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교육은 시공을 초월해 불변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통해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계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항존주의의 형성과정을 보면, 무엇보다 1930년 확고한 교육목표도 없이 표류하는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하였다. 담으로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과학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경향을 띠는 당시 사회,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항존주의는 반과학주의, 탈세속주의, 정신주의를 통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려 하였다.-항존주의 교육원리-①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교육의 본질도 변하지 않는다. 이에 동일한 교육목적이 모든 연령과 모든 사회에 적용되어야 한다.②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교육을 통해 이성개발에 힘써야 한다. 이성으로 본능적 욕망을 통제하고, 이성이 명령하는대로 살아가도록 교육한다.③교육은 영원불변의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에 적응하는 것이다. 교육은 진리를 교수하는 것이며, 진리는 어디서나 동일하기에 교육은 언제 어느 것에서나 동일해야 한다. 교육의 과업은 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고, 그 진리의 세계에 인간을 적응시키는 것이다.④교육은 현재 생활이 아닌 이상적인 삶에의 준비다. 학교는 학생 스스로 문화적 유사의 가치를 깨닫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위적으로 준비된 교육환경이어야 한다.⑤학생은 기본적인 교과목을 철저히 이수해야 한다. 교육내용은 현실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는 교과목이 아니라 국어, 언어학, 철학 등 교양교육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양교육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며 진리에의 접근이 용이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가치의 혼란과 각종 문화적 위기를 겪으면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교육이 사회적 책임이 크며, 더 나아가서는 교육이 사회 개혁의 직접적인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이에 새로운 형태의 교육이 요구되면서 이전의 교육이념의 장점을 취하면서 단점을 보완한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형태의 교육철학이 필요했다. 이는 멀리는 플라톤, 가까이는 페스탈로치로 이어지면서 교육을 통해 이상국가를 실현하거나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재건주의 기본원리-① 교육은 명확히 짜여진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여야 한다. 미래와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앞으로 달성해야 할 목표를 미리 명확히 설정하고 교육해야 한다.② 새로운 사회는 진정으로 민족적인 사회여야 한다. 사회질서의 목적과 구조, 정책 등은 가능한 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서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최대다수 국민이 지지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③ 어린이, 학교, 교육은 사회적, 문화적인 힘에 의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교육은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이는 사회를 통하여 개인이 그 사회적 본성을 계발하고, 계획된 민주 사회를 조성하는 일에 개인이 적극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④ 교사는 재건주의 사상의 타당성과 긴급성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교사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동시에 그들의 호응도 얻어야 한다.⑤ 교육의 목적과 방법은 행동과학의 원리가 적용되어야한다. 현재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재정비되어야하고 따라서 교육내용은 사회 재건의 관점에서 각 과목이 통합적으로 관련성을 유지해야 한다.-재건주의 문제점-①요청되는 사회질서를 어떤 가치관에 의해 누가 설계할것이며 최대 다수의 합의에 의한다고 해도 모두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기는 어렵고, 합의된다해도 그것이 소수의 의견보다 최선이라고 보장 할 수는 없다.②행동과학이 과연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초학문이 될 수 있는가이다. 행동과학의 경험적 결론은 교육방법면에 부분적으로한다.
    교육학| 2006.04.26| 8페이지| 1,0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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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학] 자연주의 철학
    자연주의 교육 철학역사교육 전공 32004017 박해경1. 자연주의란 무엇인가자연주의(naturalism)는 라틴어 natura'에서 나온 말로서, 이는 원래 타고 나은 것을 존중하자는 것으로, 이러한 자연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있으며, 이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행복한 삶이다라는 생각을 총칭한다.{ natura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birth that which has arisen or been produced by birth, 2 naturral quality of anything, 3 the laws of nature, the order and constitution of the world.이는 철학적으로는 그 이름이 시사하는 대로 자연을 유일한 실재로 여기는 철학이며, 이런 면에서 반자연주의인 이상주의와 대립한다. 자연주의에 의하면, 물질적 우주가 실재의 전부이며, 따라서 정신적인 존재나 영혼적인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연주의는 가장 오래된 철학으로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본 탈레스(Thales)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회체제에 억압된 인간성을 자연에 돌아감으로써 다시 찾자는 루소(Jean- jacques Rousseau), 교육이란 이 지상에서의 행복한 삶에 대비하는 일이라고 주창한 스펜서(Herbert Spencer), 아동의 자발적 발달은 완전한 자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아동은 자유로운 환경과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 속에서 양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아동은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성장한다고 주장하면서 섬머힐 학교를 설립한 닐(A.S Neill)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자연주의 사상가들의 다양한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화섭, 「조화섭 교육학 上」, 서울: 교육마을, 2004, p3871 물질적 자연주의자(Physical Naturalists): 이 분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삶이 전적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자들은 이 법칙들을 알아야할 의무가 있다. 더욱, 이 법칙을 안 뒤에는 그 작용을 간섭하려 들기보다 촉진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발상에 근거해서 모든 아동연구운동이 나타났다. 어린이의 본성은 이 제 규범이 되었다.이처럼 자연주의는 여타의 철학사조처럼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연주의 성격의 다양성과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자연주의는 특히 교육에서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공유한다.1 교육의 목적은 자연질서의 한 부분인 자연과 인간본성에 의존해야 한다.2 자연은 감각기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즉 감각은 실재에 대한 지식의 근본이 된다.3 자연의 과정은 느리고 점진적이며 진화적으로 발전하기에, 교육 또한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자연주의는 초자연적인 것, 초현실적인 것을 거부한다. 프래그머티즘은 바로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주제들을 자연주의로부터 차용하였다. 따라서 진보주의 또한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육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진보주의 교육에서는 교육은 자연적 경험이다 라고 보면서 김재만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김재만, 「경험교육의 원리」 (서울: 재동문화사, 1965), p.136.교사: 학생은 지금 두터운 오버를 입었군. 왜 입었어요?학생: 추워서 입었습니다.교사: 추울 때는 두터운 옷을 입으라고 누가 가르치던가요?학생: 자연이 가르쳐 주었습니다.교사: 자연이 어떻게 가르쳐주었든가요?학생: 추위로써 가르쳐 주었습니다.교사: 추위는 당신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든가요, 아니면 즐거움을 주었든가요?학생: 고통도 주고, 즐거움도 주었습니다.이처럼 자연주의 철학은 프래그머티즘과 진보주의 교육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진보주의 교육에서는 자연이 초기에 성취하는 실행방법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발견해내는 것이 교사의 주요 역할이라고 본다. 모든 원리를 자연에로 돌리는 진보주의 관점은 자연주의자들의 견해와 합치된다.2. 자연주의의 역사자연주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B. C. 600년에 그 중시하는 자연주의 철학으로 발전하였다.자연주의는 가장 행복한 삶은 순박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길을 따라가는데서 얻어지며, 그러기에 자연이 그 길을 걷도록 방해하지 말고 놓아두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루소의 철학이자 교육철학이었다.이제 자연주의적 교육철학을 보기에 앞서 자연주의의 기본적 입장, 즉 형이상학을 크게 다음 다섯으로 요약하여 본다. 첫째, 모든 존재는 인과율의 법칙 아래에 있다. 둘째, 자연 이외에는 어떤 원인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자연에는 아름다운 질서가 있다. 넷째, 인간성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것의 하나로 존중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식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가장 올바르게 얻어진다.3. 루소의 교육이론루소는 「에밀」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신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을 망쳐서 악으로 만들었다. 인간은 한 땅에서 다른 곡식을 거두려 들고, 한 나무에서 다른 과일을 따려고 든다. 인간은 때와 곳과 자연적 조건을 혼돈하고 흐트려 버린다. 또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첫 장을 이렇게 장식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쇠사슬에 얽매이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사람들보다 더 혹독한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에밀」의 선언이 인간의 본연선(本然善 )의 주장이라면 「사회계약설」ml 선언은 인간 자유의 주장이다. 인간(어린이)을 존중하자, 인간(어린이)을 그릇된 사회체제로부터 해방시키자 -- 이 두 생각 위에 루소의 교육론은 짜여져있다. 다음에 우리는 이것을 몇 가지 측면에서 훑어보기로 하자.1) 소극교육론루소의 교육론 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에밀」의 첫부분에 나타나는 소극교육론이다. 이는 어린이밖에서 어린이에게 적극적인 영향을 주어 어린이를 강제적으로 통제하려는 적극교육론의 반대개념이다. 그의 자연으로 돌아가라 는 교육이념은 실은 이 소극교육론으로 짜여진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우리가 태어날 때 갖추지 못했지만 성인이 될이다, 이것은 루소가 사보아 사제의 입을 빌어 자신의 자연주의 철학을 피력한 것이다. 이 신앙고백을 자세히 분석하면 다음 6개 사항으로 짜여져 있으며, 실은 이 하나하나가 기독교 교리와는 어긋나는 것이다.첫째, 자연의 본연선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연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인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연도 타락하여 신음하고 있다고 본다. 둘째, 인간 개개인의 독자적인 존재의 의미부여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개개 인간의 삶을 신의 뜻에 의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본다. 셋째, 양심이라는 내면적 명령에의 순종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양심 을 믿을 바 못된다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도리어 자연은 타락한 모습이기 쉽다고 본다. 다섯째, 인간은 자유의지를 생각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자라 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인간은 죄 에 얽매여 있기에 진정 자유로울 수도 없다 한다. 끝으로, 인간 역사의 무한한 전진(不死 )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를 언젠가, 인간의 죄 때문에 파국을 맞고 종말을 고할 것이라 한다.3) 교육의 기조「에밀」은 전편이 역설로 차 있다. 타락한 사회 때문에 가정도 타락하였기에 어린리 교육을 부모에게 맡길 수 없다든가, 또 오늘날 학교도 타락했기에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고 농촌에서, 자연에서 꽃을 관찰하고 나비를 좇게 해야한다든가, 교사는 아동과 연령차가 많으면 마음이 안 통하기에 아이와 친구 정도로 사귈 수 있게 젊어야 한다든가, 12살때까지는 일체 글자따위, 숫자 따위는 접하지도 못 하게 하라든가가 이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설 속에 현대교육의 이념과 방법의 원리가 숨어있다. 루소가 현대교육의 시적 예언자라 일컬어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원리는 다음 여섯으로 요약된다.1 교육은 성장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어야 한다.2 교육은 아동중심이어야 한다.3 교육은 아동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것이다.4 교육은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5교육은 개성의 계발이다.6 교육은 사하기 등의 학문과 기술의 교육은 바로 이 단계에 비로소 도입되어야 한다. 셋째는 행복이나 완전성 등 가치의 이상을 추구하는 도덕적 성장의 단계다. 신과 자기와 자연과 역사에 대한 전망이 열리고, 윤리나 종교의 세계가 비로소 열리게 된다. 그 다음 단계다 18세 때부터의 사랑의 성장 단계인데, 이것은 위의 제3단계별로 진술하면서, 이 세 가지 능력의 발달에 순차가 있어야 할 것, 또 성인이 되어서는 조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논한 것이다.5) 여성교육론에밀에게는 소피아라는 약혼녀가 있다. 에밀은 소피아하고 결혼하기 전에 2년 동안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자기 고향, 자기 가정, 자기 문화, 그리고 자기 소피아에 대한 사랑을 회상하고 다짐한다. 한편, 소피아는 돌아오는 에밀을 맞기 위해 아내, 어머니, 가정주부로서의 교육을 철저히 받는다. 이것이 「에밀」의 끝부분에 나오는 여성교육론이다. 여기에는 루소가 갖지 못했던 아름다운 가정과 여성에 대한 꿈이 서려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귀한 자연주의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루소의 여성교육론은 여섯 가지 생각으로 짜여져 있다. 첫째는 남녀별학이다. 남성과 여성은 생리가 다르고 직업이 다르다.{ 루소는 소년 에밀을 자율적 인간 및 시민으로 기르고자 시도하고 있는바, 에밀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자율적인 존재이며, 또한 善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여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능성으로 지닌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소피는 유쾌하고 재치있는 성품을 지니고 있으먀,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면서 그녀 자신이 인형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유현옥, 「페미니즘 교육사상」,(서울:학지사, 2004), p.190그러기에 그 교육도 달라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성의 순종의 미덕이다. 여성은 남성에 맞추어져야 하며, 남성이 즐겁도록 귀엽고 유용해야 한단다. 셋째는 자녀교육의 책임인식이다.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책임은 일차적으로 어머니에게 있다.{ 소피에게 자연이 부여한 본성적 능력은 소피로 하여
    교육학| 2005.06.03| 8페이지| 2,000원| 조회(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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