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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사]발해사 평가C아쉬워요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말해사와 고구려사가 사학계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단 사학계의 문제만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국민의 관심을 받는 건 잠시뿐 이였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인 발해사의 연구가 연구 분야 중 가장 부진하다는 점이다. 특히 문헌자료의 부족이 한몫을 한 것이다. 이것으로 발해사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기본적인 문헌자료의 검증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한국사에 발해사를 삽입하여야 한다는 한국의 당위성론은 발해사의 연구조차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장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당위성론만을 내세운다면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학문세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이러한 취지에서 보고서는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해야하는 한국의 입장과 시각을 살펴보고자 한다.1.대조영의 출신과 건국집단-대조영의 출신-발해의 건국집단(발해사 논쟁의 핵심적인 이슈가 되어왔던 대조영의 출신문제와 시각을 넓혀 발해의 건국집단과 구성원까지살펴본다.)2.발해의 문화적 성격(사실상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국가의 구성과 문화의 성격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3.신라와의 관계(다음으로 발해가 신라와 200여년간 상호 대치하면서 항상 대립관계만 유지하여왔을 것이라는 통설에 반 론을 제기하고 양국간의 관계는 다른 어는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역학관계내지 내부사정에 따 라 친선과 대립을 교차적으로 행하였음을 밝히고자한다.)4.남북국 시대론의 제시(당위성을 강조하면서도 사학계 내에서조차 그에 합당한 대응이 없다는 점은 큰 약점이다. 그 당시를 규정하는시대구분의 명칭에서도 이에 걸맞게 "남북국시대"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근래에 문제로 대두되어지고 있는 독도분쟁과 동북공정은 치열한 '역사전쟁'이다. 이 같은 민족과 관련한 역사의 사실 확인은 인접국가간의 긴장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 확인이라는 학문의과정은 결코 이러다. 이를테면 중국의 여러 기록들은 만주지역의 종족이 진 이전에는 숙신이었다가 ,한대에는 읍루로, 그리고 후위대에는 물길로, 수당대에는 말갈로 그 이름을 바꾸어왔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족종이였으며 이민족의 교체가 아니 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종족명을 바꾸어 부르게 된 원인은 기록자의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단지 중국인들의 인식이 넓어지면서 그 인식이 변하였고 그에 따라 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원주의적 기록은 사기의 조선전을 보아도 자명하다.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나라의 역사를 영광되게 하였던 주변의 조선국이 어떠한 나라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만을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중화주의를 극복하고 국수적인 민족주의의 성향을 제거 하는 일이야 말로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역사를 연구해 나가는 중국, 일본에 몇 발 앞서 나아가 맞설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보고서로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나 하나부터라도 제대로 지식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1.대조영과 건국집단1)대조영의 출신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해명은 바로 발해국의 귀속 문제를 확정짓는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활발히 논의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갈계통의 인물이냐 아니면 고구려계통의 인물이냐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 원인들은 중국의 주요문헌들이 각기 다른 내용을 담고 있거나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대조영이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 기록하여 고구려인이라고 서술하는 듯하면서도 '별종'이란 말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어 있던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 문화권 안에 있었던 속말 말갈인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오대회요(五代會要)에는 '고구려사람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을 대별해보면 물론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가 고구려 왕실과 직접 혈연과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고구려인이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또 대씨는 원래 고구려왕실의 고씨와 같이 크고 높다는 말의 대음으로써 사실상 고씨와 동일한 것이라는 설들도 있다"고 하였다).더불어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서도 대조영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에 발견된 정혜공주 무덤은 무덤길과 연도, 현실로 구성되어 있고 현실의 천정은 고구려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말각천정을 하고 있어 고구려의 석실고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 정혜공주의 묘비내용을 보면 정혜공주가 죽은지 삼년만에 장례를 치르는 3년장이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혜공주 무덤은 고구려계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다른 문화적 요소와는 달리 무덤구조나 장례제도는 쉽게 변경되기 어려운 강한 전통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정혜공주가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면서 그가 죽은 뒤 고구려적인 것을 채택했을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대조영이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 하는 문제는 이제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해결이 어려운 상태로 접어든 느낌이다. 이제는 이러한 규명보다 대조영이 어느 인종에 속하건 간에 그가 지니고 있던 문화적 배경이 무엇인가가 발해사를 이해하는데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2)건국집단과 지배계층발해의 건국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해온 집단들이 주축이 되면서 여기에 원래부터 만주지역에 살고있던 말갈족, 고구려 유민들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발해가 건국된 뒤 지배계층으로 편입되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바로 대조영과 함께 영주에서 이동해온 무리들이었다.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大)씨를 비롯하여 고씨(高氏),장씨(張氏), 오씨(烏氏),양씨(楊氏),두씨 (杜氏), 이씨(李 氏)등 귀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고구려 인이였으며 그 밑의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였다. 말갈인들 중에는 걸사비우처럼 대조영의 건국에 협력하여 지배층으로 상승한 부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곡민 이거나 평민의 지위에 있었다. 비장 당문화 요소, 말갈문화 요소 또는 토착적 문화요소, 발해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문화요소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발해문명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에 남아있는 상경의 유적과 유물이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모델로 하여 직사각형의 외성과 내성을 2중으로 쌓고 내성안에 궁전을 중심으로 바둑판모양의 도로를 갖춘 시가지를 형성했다. 도로중에서 남북을 관통하는 중앙도로인 주작대로는 그 너비가 110미터나 되고 주작대로 좌우로 길을 내어 조(條)와 방(坊)을 나누었다. 이는 상경이 평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상궁에 세워진 궁궐은 지금은 없지만 그터에는 돌로 만든 사자상과 6미터가 넘는 석등, 그리고 온돌 장치가 남아있다. 또 도시 가운데에 사찰터가 아홉군데나 남아있어서 불교문화의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부재하여 구체적으로 어떤 종파가 성행하고, 어떤 승려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 사찰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불상과 석등,기와는 그 양식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어 힘차고 아름답다.발해의 무덤은 발해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그 대표적인 것은 1949년에 첫 수도인 돈화부근에서 발견된 문왕의 딸 정혜공주의 무덤(780년)과 1980년대에 발견된 정효공주의 무덤이다. 1949년 돈화 육정산 발해 옛 무덤떼의 제1무덤구역 제2호무덤 정혜공주(발해 제3대 왕 대흠무의 둘째 딸)무덤에서 아주 진귀한 묘비를 발굴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이 묘비는 무덤안길에서 나왔다. 묘비는 '규형(圭形)'으로서 높이가 9Ocm, 너비가 49cm, 두께가 2Ocm이며,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음각되어 있고 비문의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앞면에는 비문을 음각으로 새겼는데 글씨체는 해서체의 한자이다. 비문은 모두 21행으로 서(序)가 13행, 명(銘)이 6행이고 마지막 행은 비석을 세운 연, 월, 일, 시간이 새겨져 있다. 글자는 모두725자인데 그 가운데 234자는 파멸되어 알아볼 무덤은 횡혈식 돌방무덤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천정구조는 고구려의 것과 똑같이 말각조정천정(모줄임 천장)을 하고 있다. 또한 돌로 만든 사자상이 발해의 높은 문화수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신라. 고려와의 관계현재까지 일반적으로 발해와 신라는 항상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임에 틀림없다. 고대사회에서나 현재사회에서나 마찬가지로 각국의 외교관계는 국제적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고 상호 대립하기도 하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발해와 신라가 대립관계만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님을 [신당서]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라로 가는 길이다. 이를 보면 발해는 당. 거란. 일본과 함께 주요 교류대상국으로 신라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양국의 외교관계를 5단계로 나누어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하여 보겠다.1기는 발해 대조영 시기로서 발해는 건국 직후 이제 막 건국의 터전을 마련하던 시기이다. 이때 신라는 당과 통일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동쪽으로 도망 나와 나라를 세웠던 대조영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지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2기는 발해 제2대왕 대무예 시기이다. 대무예 시기에는 정복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서쪽으로 부여의 옛 땅을,동쪽으로 솔빈의 옛 땅을,동남쪽으로예맥의 옛 땅을,남쪽으로 옥저의 옛땅을 통제하였다. 이러한 대외정복은 신라에게 발해에 대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였으니 양국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3기는 제3대왕 대흠무 시기이후이다. 이때 발해는 영토의 확장과 함께 내치에도 힘을 썼다. 그리하여 대조영이래 실질적으로 국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형식상 독립된 국가의 국왕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때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신라 사이에 상설교통로가 개설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4기는 제10대왕 대인수 시기이다. 대인수는 현재의 흥개호(興凱湖)북쪽의 여러 부락을 정복하여 커다란 영토보인다.
    인문/어학| 2006.06.19| 6페이지| 1,000원| 조회(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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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한국의 미륵신앙
    미륵신앙이란, 불교에서 파생된 신앙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종교로서의 개념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미륵은 부처가 아닌 성인이며 56억7천만년 뒤 제2의 석가모니가 된다고 하며 아직 속세에 오지 않았다고 여겨진다.미륵신앙은 이 미륵에게 인간들이 각종 염원을 빌면서 점차 한반도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특히나 민중들에게 미륵은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다. 어째서 미륵은 그들에게 희망이며 염원일까?우리나라에 각종 미륵의 불상들은 대부분 산이나 들 같은 노천에 자리하고 있으며 불상은 금속이 아닌 돌로 만들어졌다. 어떤 것 들은 마을에 가까이 위치하고 또 다른 것 들은 야산에 외로이 서있기도 하다. 너무나도 소박하다 못해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미륵신앙이 대중 민중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민중들은 삶에 지쳐 종교 같은 실생활이 아닌 신앙생활에 많은 것을 해 놓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미륵불상은 돌로 만든 투박하고 험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왜 하필 미륵일까.. 미륵의 변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격 때문에 민중들을 미륵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 세상에 오지 않았으며 약56억년 뒤에 부처가 되어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줄 것이라는 그들의 기대가 미륵을 너무나도 편안하고 친근하게 만든 이유였다. 그들은 투박한 모습을 통해 미륵이 무지막지한 힘 발휘하길 원했고 남근상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종교적인 것과는 무관하다. 민중에게 흘러들어온 미륵은 그들에게 희망 이였다. 이러한 미륵불은 대부분 하체의 1/3 정도를 땅에 묻어둔 하체 매몰불 형태를 하고 있다. 하체매몰불은 미륵신앙의 전형적인 형태로서 미륵불의 하체가 땅위로 솟아나면 민중에게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민중들의 염원이다. 특이한 점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난다는 부활의 형태이다. 그들에게 미륵은 정교하지도 않으며 종교적이지도 않으며 간혹은 미륵을 탓하기도 한다. 거기다 그들의 미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부활이 아닌 땅에서 솟아나는 투박하고 무지막지한 것이다. 투박한 모습은 힘을 내서 땅에서 부활해달라는 염원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이러한 미륵신앙은 단지 민간대중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 은 아니였다. 나라를 통치하고 민중을 따르게 하고 싶었던 궁예나 견훤 같은 통치자들에게도 미륵신앙은 중요한 도구이자 무기였다. 궁예는 인간의 이름을 가진 유일한 미륵이다. 그는 난세에 백성들이 구세주 갈망한 것을 알았으며 자긴을 미륵이라 칭하라 하였다. 경기도 안성 기술리에 자리한 궁예미륵 불상은 궁예가 죽은 뒤 염원을 기도하는 자들이 그의 이름을 따 세운 미륵상이다. 하체 매몰상을 하고 있는 불상은 백성들이 궁예의 환생을 기원하며 세운 것이 분명하다. 즉, 민중은 그를 구세주로 섬긴 것이란 얘기다. 그리고 백성의 구제는 궁예에게도 염원이며 바람 이였을 것 이다. 미륵을 자칭한 또 한사람의 인물은 견훤 이였다. 그들은 민중신앙을 통해 새시대를 기원하는 민중의 염원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것 이다. 불교신앙을 기초로 한 미륵신앙은 전국적이며 긴 역사를 가진다. 그러한 신앙을 통해 민심을 다스리길 바랬을 것 이다. 특히 견훤은 전란속 에서도 금산사를 보수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공을 들인다. 금산사가 그의 흥망성쇠를 같이 한 곳이기 때문일까? 그는 왜 그렇게 그곳에 정성을 쏟았으며 구백제의 터에 나라를 세운 것 일까? 이 시초는 백제 무왕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쓰러져 가고 있는 백제를 일으키기를 원했다. 미륵사는 그런 의도에서 엄청난 규모로 세워진다.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자 한 전초기지였으며 그 덕분에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백제 유목민들은 백제를 살리고자 하는 정신을 230년 동안 지속한다. 이 정신력의 배경을 견훤은 읽어냈고 미륵을 자처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한 것은 그것이야 말로 신라에 맞설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 이였다. 특히 궁예, 견훤이 미륵을 자청하던 시기는 민심이 흉악했으며 이 시기를 구하기 위해서 미륵이 내려 올수 없다고 믿을 정도로 강력한 수탈의 시대였다. 그들은 간절히 미륵을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미륵은 오지 않았으며 궁예와 견훤은 민중의 염원인 미륵이 될 수 없었다. 민중의 중심에 서있는 미륵은 운주사를 통해 또 한번 확인된다. 운주사의 천 여개의 불상들은 모양과 형식이 제각각이다. 도교의 천군상이 절 곳곳에서 모이며 국가적이지도 않고 귀적 적이지도 못한 소박하다 못해 너무나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천불 천탑은 귀족이나 국가상의 부처모습이 아닌 낮은 곳에서 민생의 구원을 듣는 모습의 불교 상인데 이곳 운주사에서 볼 수 있다. 누워있는 불상인 와불상 또 한 이곳에서 볼 수 있은데 훗날 이 불상이 일어나 새 세상이 올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운주사의 천여 개가 넘는 불상과 불탑은 형식은 제각각이며 기원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이 자신의 염원을 빌며 세운 것이기 때문이며 크고 투박한 것 또한 기술보단 노동력이 많은 자신들의 바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운주사는 규모로 보아 옛 서적이나 불교의 흔적에서 조차 빠져있다. 불교가 아닌 형식의 운주사를 불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주사의 하체 매몰형식의 투박하고 서민적인 미륵들은 미륵이 아니지만 미륵이다. 민중들이 간절히 바라여 염원하는 무엇보다 강한 민중 신앙인 것이다. 그들에게 운주사의 미륵은 무엇보다 강력한 그들의 희망이다. 그들은 아마도 미륵의 존재를 미처 몰랐을 것이다. 미륵은 국가의 군주였던 견훤도 아니며 궁예도 아니다.
    인문/어학| 2005.10.24| 3페이지| 1,000원| 조회(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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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해사 콜롬버스]비운의 탐험가 콜롬버스
    콜롬버스는 무역의 제국인 제노바출신 이였다. 그는 초라한 출신이였지만 뛰어난 선원이였다. 이슬람세력이 중국으로 가는 육로를 장악하면서 제노바는 중국으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콜롬버스는 그 지름길이 대서양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대서양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버스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의 우주관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는 중국이 생각보다 가까우며 당시의 지구 측정크기의 20%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서양이야 말로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다. 설마 그 가운데에 커다란 대륙이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생각과 사업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는 그곳에서 일년반 만에 페르난도국왕과 이자벨라 여왕을 만나게 된다. 그의 사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려 7년간 왕실에 간청하고 졸라대고서야 비로소 기회가 오게 된다.(왕실에서는 그를 질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무어족 즉, 이슬람세력이 스페인 측에 굴복했고 이러한 상황은 콜롬버스에게 기회로 다가온 것이다. 드디어 콜롬버스는 해군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9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가지고 항해를 시작했다. 사실 이 배는 작은 규모의 배였으며 ‘정찰’정도로 생각하였다.-콜롬버스는 종교전파를 이자벨라 여왕에게 명 받는다. 종교전파의 목적은 에스파냐, 국가의 정치적인 이유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산타페 조약으로 연결된다.출발한 뒤 항해 시간이 흐를수록 선원들은 콜롬버스에게 회항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회항은 없을 것 이라고 못 박으며 하루만 참아달라는 말을 입에달고 살았다고 한다. 선원들은 콜롬버스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몰랐으니 사실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리라... 그렇게 항해를 하던 중 1493년 9월 드디어 지금의 카리브해안으로 도착하게 되었다. 콜롬버스와 일행들은 그곳이 중국이나 아시아쯤 되는줄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을 초 자연적인, 신적인 존재로 여겼으며 초기에 유럽인들은 이런 원주민과 우호적인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콜롬버스와 유럽일행들은 원주민의 금 목걸이를 가르치며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물었으며 원주민과 콜롬버스 일행은 금을 얻으러 가는길에 죽을뻔한 고비를 당했는데 이때 원주민들이 그들을 구해줬다고 한다.원주민들은 금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유럽인들이 금에 집착하는것을 이해 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주민들의 물음에 콜롬버스는 "우리 유럽인들은 병에 걸렸는데 금만이 우리를 낫게 할수 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방적인 그들의 관계는 스페인들의 착각을 가져오게 했다. 원주민들도 유럽인들이 뭔가 해주길 기대했지만 콜롬버스일행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콜롬버스는 몇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데리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2천명의 인원과 11척의 배를 이끌고 다시 항해하여 에스파눌라로 도착했다. 그러나 다시 도착한 그곳에선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스페인과 원주민간의 마찰이 커지면서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을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콜롬버스는 구시대의 사상을 가지고 유럽의 노예제도처럼 원주민을 노예화 하기 시작했다.14살이상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은 갖지도 못하고 원하지도 않는 금을 캐기위해 힘들게 일해야만했다.그러나 유럽인들의 이러한 욕망때문인지 그들은 그곳에서 매독과 천연두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신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그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폭동까지 일어났다.그리고 콜롬버스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콜롬버스는 또다른 2번째 항해를 원했으나 선원을 모으기도 힘들었고 결국 10명의 죄수까지 포함하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신대륙으로 돌아갔지만 또 다시 폭동이 일어났고 콜롬버스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콜롬버스는 분명 뛰어난 항해사이였지만 좋은 지도자는 아니였다.이주민들은 노예 원주민과 금을 놓고 부패,다툼이 빈번했다. 이에 국왕이 개입하기까지 이르렀고 콜롬버스는 감금당하고 만다. 감금당한 콜롬버스는 병들고 쇠약해졌다. 콜롬버스는 이자벨라 여왕의 도움을 받아 석방될 수 있었다. 풀려난 콜롬버스는 수도사들과 지냈다고한다.그러나 그는 또 다시 항해를 원했다. 유럽인들은 이번 항해가 그에게 마지막일것이라고 생각했고 다 부서진 4척의 배만이 허락 되었다. 항해중 그는 허리케인과 폭풍우를 만났지만 뛰어난 감각으로 재해를 피했다. 그는 중앙아메리카와 자메이카에까지 다달았다. -그곳에서 배는 거의 산산조각났다. 에스파눌라의 이주민들은 그의 도움요청을 거절했다.이것이 그의 마지막 항해였다. 그는 늙고 병들었으며 이자벨라 여왕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는 55세의 나이로 자신의 업적은 모른체 초라하게 숨졌다.그는 자신이 신의 임무를 받았다고 어렸을떄부터 여겼고 마지막순간에도 순교자로 숨을 거두고 싶어했다.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곳을 중국으로 알고 있었다니..하지만 그 당시로는 그가 미지의 땅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신비하고 흥미진진했을까.. 하지만 콜롬버스는 단지 순수한 탐험가의 모험심으로만 항해하고자 한 것 아니였다. 자신의 명예와 재력도 아마 원했을 것 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 아닌가? 일반 사람도 욕망을 가지고 있고 콜롬버스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용기를 냈고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콜롬버스가 그 당시와 다르게 현재에 위인으로 평가되는 이유이다. 그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향했고 그의 뛰어난 항해술과 항해로는 후세로도 계속 그 의미가 크다. 그의 항해로 또 다른 모험가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없앨 수 있었을 것이다.그가 만약 순수한 탐험정신으로만 항해했다면 지금의 아메리카는 다른 이름이였을까?! 그는 자신의 업적은 모른 채 초라하게 숨졌다. 정작 그의 업적은 아메리고를 통해 밝혀졌고 타의에 의해서 아메리카로 불려지게 된다.(사실 아메리고 본인도 싫지 않았으리라..) 한번 정해지고 지나간 역사는 바꿔질 수 없다. 그것이 잘못 평가 되어졌어도 그 사실은 그대로 ‘역사’로 남겨져야 한다. 당시에 잘못된 평가라고 해도 그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고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상황이나 조건에 놓여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도 우리는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나 상황은 지금의 콜롬버스를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침략자로 만들기도 한다.중남미의 입장에서 그는 죄인이며 아픈 식민지,노예 역사로 각인되어 있겠지만 반면 이탈리아, 스페인의 입장에서는 그는 영웅이며 위인인 것이다. 모든 사물이나 사실에는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역사에서 이러한 양면성은 강렬히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중남미의 만성적인 가난은 이때부터 시작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특히 콜롬버스가 유럽의 문명을 신 대륙에 전파했고 그곳에 지속적인 관계 유지한 것은 유럽이 제국주의로 흐르는 밑 바탕이 되었고 시발점이 되었다. 이러한 정복자와 수탈자의 발생은 콜롬버스 이후로 점점 뚜렷하게 발생하고 되며 점차 세계를 제국주의로 몰아가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콜롬버스 이전의 시대는 사실상 동양의 사회가 서양의 사회보다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전세가 역전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아메리카 대륙 또한 콜롬버스가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바이킹족과 중국의 선단 정화가 아메리카 대륙에 온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중국의 선단“정화”는 유럽에 무려 7차례나 왕복 항해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내가 동양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수탈하고 약탈했으며 자신들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였다. 왜 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사실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속국이나 침략이 아닌 꾸준한 교류라도 해왔다면 좋았을 것을… ) 이러한 사실이 동양의 문화가 서양의 것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증명 해준다. 중국인들은 신대륙을 수탈하고 식민지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 이였다. 유럽을 외교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5.10.24| 3페이지| 1,000원| 조회(2,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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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운동사]일제 식민지하 (1920~30년대) 노동운동 평가B괜찮아요
    사학과 20035204 서 연희1920년~30의 노동운동1.산업노동의 형태- 산업 노동이라 하면 원래 자본 주의의 공업화를 전제로 하여 야기될수 있는 노동 형태이다.즉 노동력이 상품화되고 그 상품에 대한 대가로 임금이 지불됨 으로서 비로소 노동력은 생산과정에 참여 되어지는 것이며,그에 따른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는 형태가 근대적인 산업 노동이라 할 수 있겠다.2.우리나라 산업 노동의 발생(외국 자본의유입에 따른 광산업의 변화)우리나라에서 산업 노동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18세기의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19세기 후반기에는 근대적인 산업 노동이 명백히 형성되고 있었다. 19세기로 넘어오면서 금,은에 대한 수요증대에 따라 종래의 광업 정책에도 불구하고 비밀채굴이 빈번하였으며,외국의 공업제품의 유입됨에 더불어금은의 국외 수출,특히 일본으로의 유출이 성행되였다.그에 따라 광산개발은 막을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리하여 외국자본의 국내 광업개발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광업 발전에 따라 형성된 광산 노동자들은 이당시에 약 2만명도 넘었을 것으로 추산 되어진다.(수공업보다 광업에서 활발했던 임금노동)이러한 광업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되었고, 비로소 임금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조선 봉건 사회에 있어서 임금노동의 발생은 각종 수공업분야로 부터 발전되기 시작하나 조선말기에 있어서 그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수공업분야 보다 광업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부두.운반 노동자들의 발생)개항이래 1919년까지의 기간에 있어서 일본 자본주의의침투에 따르는 산업노동 의 발생은 두가지 측면으로 나눌수 있다. 첫째로 각 개항장의 물량증대에 따르는 부두 노동자나 운반 노동자의 발생이였으며, 둘째는 상품및 원료 시장으로써의 식민지에 있어서 이에 필요한 가공업의 발달에 따른 공장 노동자의 발생과정이다. ▶부두 노동자는 대다수가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토지)을 완전히 상실한 농민로서 임금에 의해서만 자기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이상의 공장에서만의 조사이므로 노동임금의 실제는 이보다 훨씬 낮은 수치라는 추정이다. →독립운동총서대중운동편 p.1062.민족적 차별에 따른 열악한 노동 환경- 임금의 저렴함과 실질임금의 저하는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식민지의 보다 많은 이윤의 획득을 위한 것이 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립과 경쟁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의 차별대우는 소규모 영세공장에서 더 심하였다.노동 시간도 12~16시간이라는 살인적인 것이였다.특히 소규모의 공장에서는 노동시간이 길어 최소한의 수면도 보장 받을수 없는 형편이였다. 일본인 노동자와의 차별대우가 심하였던 것도 마찬가지였다.보통 조선인은 시간적으로 일본인의1.2~1.5배에 해당하는 노동을 해야 했는데 그에비해 임금은 절반도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공휴일이 전혀 없는곳이 공업 공장수의 35.2% ,광산수의 44%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평균 한달에 하루도 못 쉬는, 연간 휴일이 10일 이하인 공장노동자및 광산 노동자의 수가 67.2%정도였다고 한다.▶이러한 식민지적 노동 착취는 공장법과 같은 최소한의 법률적 제제 조차 없었던 식민지 상황에서 자본에 주어진 권한은 전제 군주와 같은 절대적인 것이 였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본가는 노동시간은 무한하게 연장하는것이 가능함과 동시에 반대로노동임금은 무한하게 인하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노동 임금이 거의 성과급제에의존하였던 것도 이러한 절대적 권능의 표현이였다.노동자의 생산량은 분명한데 도 불구하고 성과급이라는 명목하에 임금은 그 성과에 의한것이 아니라 자본가의 자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노동자는 얼마의 성과에 얼마가 지불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3.1920년대 여성,소년 노동자 고용의 증대-이 시기는 특히 부인 노동자와 소년 노동자의 비중이 전반적으로 증대되었다.자본가들은 부인,소년노동자에게 남성 노동자의 절반 이하의 임금을 주고 같은 분량의 일을 시켜 남성 노동력을 대치하고자 하였다. 부인,여성 은 임금의 수취 방식이나 노동조건의 설정 등에서 불리한 위치를감수할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명분 없는 보증금 징수, 강제저축, 3~5년간의 의무고용,계약기간이전 퇴직자에대한 다액의 위약금 부과 또는 강제저축의 불반환등 가혹한 노동 조건들이 일반적으로 행해졌다. 계약서의 내용은 '고용 기간의 일방적 연장','노동조합의 가입 금지',다른 공장으로의 전거나 전근의제한'등 피용 계약서라기 보다 거의 인신구속증서였다. 이에 대항하여 여성 노동자들의 도주나 탈주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그것은 환경에 대처하고자 하는 소극적 저항 방식이였다.4.식민지하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민족적 차별과 천대속에 구타와 감봉,해고가 자행되었다.또한 공장 설비의 불충분으로 하루에도 몇 명씩의 사상자와 중독 환자가 발생하였다.특히 탄산계,유산계, 유안계의 설비는 불 완전한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예컨데 탄산계의 경우 한참 일하고 나면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먼지투성이가 될 정도로 비 위생적 이였기 때문에 늑막염환자가 속출하는 형편 이였으며 유산계의 상황도 다음과 같이 비슷하였다.☞공장에서 나오는 독한 유독 가스는 지붕의 슬레이트를 모두 삭혀 떨어지게 하였다 하니 그로써 모든 것 을 추상할 수 있으리라는 바 그 공장안에 있는 수 백명 직공들은 거진 독한 냄세에 중독 되어 얼굴빛이 변하고 기침을 하는 중이라 하는데 회사에서는 가루 같은 약을 상용하라 말한다 하나...(이하 생략)-조선일보 1930년 7월1일자☜☞당시의 신문자료(동아일보1936년 8월 1일자)에 따르면 조선 질소 홍남 비료 공장에서 과로와 위생시설 불 비로 병에 걸린 노동자 수가 8100여명이며 1년간 사상자수가 1300여명에 달하는 놀라운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홍남 제련소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1300도의 고열 앞에서 맨발과 벗은 몸으로 일하였으며,납중독,추락 감정등의 사고로 불구자,사망자가 생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16세 미만의 소년 노동자가 40kg의 벽돌을 지고 1km에 이르는 거리를 종일 오가며 운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노동자의 비인간적인 혹사를 위한 예속관계가 일반화 되어있어 공장에서의 차별과 모멸 등은 일상적인 것이 였다.이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인격의 존중과 노동의 생존을 내세우며 지속적으로 항의하였다.☞1923년 서울고무 여공파업(고무공장의 여공이 파업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중상에 이를 정도의 심한 구타를 당했고 이를 목격한 인근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가담한 사건)-동아일보1923년 7월9일자,조선일보 7월4일자☜< 대 공황과 전시 체제하의 노동자들>1.불경기에 따른 고용과 일자리의 불안정(일본 자의에 따른 해고와 임금인하)-열악하고 억압적인 조건을 더욱 가중시켰던 것은 고용의 불안과 불 규칙성 이였다. 이는 당시 생산조건에서 일반화 되다시피 한 조건 이였지만 특히 노동쟁의에서 해고나 실직을 당할 경우, 혹은 불경기와 공황의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1920년 4월 발발한 이 공황의 영향으로 인한 물가하락과 생산정체는 공장 폐쇄와 조업 단축을 가져 왔으며, 이에 따라 임금의 하락과 노동시간의 단축 등이 야기되었다.이 결과 경기도에서만도 1920년 6월에서 9월까지 4개월 동안에 해고를 행한 공장 수 154개소, 이에 따라 발생한 실업 노동자수 2272명,기타 급여의 절감을 행한 공장 수는 109개소나 되었다.또한 서울의 부랑자와 걸인이 엄청나게 증가했었다. ☞이들은 어느 곳에 쉴 집도 없고 먹을 쌀도 없었으며 남루한 포대기 조각을 몸에 두르고 시내 이곳 저곳을 방황하는 참상 이였다. –조선사전,1921년1월 하반호: 이를 배경으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들에서 임금인하 반대,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2. 전시체제에 따른 노동자 상태-비상시라는 이름하의 전시체제에서 노동은 ‘국가’에 대한 봉사로서 강압되었다. 즉, 노동자는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점에 입각하여 국가의 생산력을 확충해야만 하는 조건이 였던 것이다. 당시의 한 지하 신문은 이를 “ ‘비상시’라는 구실은 노동자를 무임으로 사역하고 전쟁부담을 전가할 노동조합은 일반적으로 노동운동 발전이 그러하듯, 선각적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지역내의 전체 노동자들을 망라하여 위로부터 조직되었다. 조직의 주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민족해방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의 본래 임무와 속성은 처음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지역합동 노조는 노동자와 농민의 구분 없이 ‘일하는 사람들’ 전반을 노동자로 파악했던 ‘20년대 노동운동이 발전하는 초기의 형태’로 출현하였던 것이다.▶지역 합동 노조는 이후 사화주의 사상의 영향 등으로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분화와 아울러 직업별 분화를 거치면서 20년대 중반에 특징인 직업별 노조 형태로 발전 하였다.◀(직업별 노조에서 산업별 노조로의 발전)위의 지역합동노조는 일시적인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이러한 점에서 노동 조합의 기본적인 발전 방향은 지역별→직업별 노조라기보다 직업별→산업별노조로의 이행이라는 측면으로 더 주목 되야 한다고 지적되어지고 있다. 산업별 노조로 시행해감에 따라 노동운동의 전략과 조직방침이 변화하면서 각 노조들의 이전의 추상적이고 일반적이 구호보다는 한층 실제적이고 현장에 맞는 목적들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2.사회주의 이데올로기(사상)(민족개량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두)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 진영에서 노동운동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일정과 관심은 곧 민족개량주의가 대두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급진화 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존립할 이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민족주의가 민족개량주의로 전락 함으로서 식민지에서 민중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농민의 내의에 헌신하고자 했던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남아있었던 유효한 이념은 당시로서는 당시 보급되기 시작했던 사회주의 이념밖에 없었다.(노동운동 속의 사회주의 사상)위와 같은 배경에서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사상의 전반적인 영향하에서 전국 각 지역의 이름없는 수많은 지역 운동가와 노동대중이 노동조합에 헌신하였다. 특히 1920년대 중반의 노동운동에서 당 조직과의 직접적 관련이나 사상
    인문/어학| 2005.10.24| 8페이지| 1,5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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