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여성문화-전족》중국에서의 여성은 남성의 학대와 성차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이였다.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의 평등정책 등으로 인해 강제결혼이나 축첩제도가 사라졌다. 중국의 전통사회에서의 여성은 가족으로써의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자면, 첫째딸이 태어났을 경우 굉장히 실망스러워하고, 둘째딸의 탄생은 슬픔을 가져오는 일 이였으며, 셋째딸은 어머니가 비난받게 되는 분명한 비극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때로는 유아 살해가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즉, 딸이란 재산을 축내기만 하는 물건이고, 딸은 자신이 태어난 가족의 지위상승이나 재산의 축적 노부모 공양 등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여자아이가 5세가 되면, 2~3세의 동생들을 하루종일 돌보거나 때로는 그 보다 더 어린아이, 사촌동생을 등에 업고 몇 시간씩 돌보아야 한다. 7세가 되었을 때 남자아이들은 학교에 가지만, 여자아이들은 보통 집에서 남게 된다. 해방 전 중국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자아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이였다. 왜냐하면, 여자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위치 이상을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여자아이가 교육을 받으면 잘난 체해서 말을 너무 많이 하게 되고 또 뜨개질 같은 가정일에 소홀해 지기 때문이다. 여자란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므로 딸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돈을 쓸데없이 없애는 일이고, 배우자가 될 남자 역시 자신보다 교육받은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여성을 시집보낼 때 가족이 마을 내에서 체면을 잃지 않으려면, 딸이 받은 신부대의 대부분을 지참금을 다시 보내야 되는 풍습까지 있어서 딸의 존재는 집에서 환영받지 못 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또, 중국의 고대 여성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전족을 들 수 있다. 전족을 두고, 작은 발 한쪽에 눈물 한 동이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작고 아름다운 발을 만들기 위해서 중국의 여성들은 무려 천여년을 두고 피눈물을 흘려왔다.이러한 전족이 생겨난 시대는 여러 가지 추측들이 있지만, 11세기쯤 생겨서 송 휘종 선화년간에 많이 보급되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송나라 때의 전족은 주로 상류 귀부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북송 때 기녀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으며, 남송에 와서 상류층 부인들의 전족을 보고 기녀들도 이를 모방했다고 한다. 송 시대의 전족은 명?청 때 보다 길어 13~4센티미터에서 17센티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시조인 몽고인도 한족 여자의 전족을 싫어하지 않아 남송에 비해 오히려 더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원 말기에는 여자가 전족을 하지 않으면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가 되었다. 전족이 전성기를 맞은 것은 명 나라 때에 이르러서다. 그 시대에의 전족은 더욱 작아졌고, 모양도 요사스럽게 변해서 도저히 사람의 발이라고는 믿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황국의 여자들은 반드시 전족을 해야 했는데, 이것이 귀족 부인들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명 나라 때는 전족의 길이가 보통 3촌으로 한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꽃나비처럼 작은 발이 최고의 전족으로 찬사를 받았다. 전족은 가능한 짧고, 작고, 마르고, 끝이 뾰족하고, 곡선을 이루고, 부드럽고 향내가 나는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정통 전족으로 간주되었다. 또 이런 전족에는 3귀의 미라고 해서 '비', '연', '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비는 지방이 있어서 윤기가 흐를 것, 연은 부드러워서 살집이 좋을 것, 수는 모양이 아름다울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여자의 발이 좁고 작다는 것은 고귀하다는 상징이며, 발이 작다는 것은 성기도 멋지다는 특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전족을 만드는 방법은 발을 깨끗이 씻어 길이 2미터 넓이10센티미터의 헝겊으로 발바닥 중심에서 발등을 향해 발을 꽁꽁 묶는다. 발가락 끝 부분을 동여매어 다섯 발가락을 서로 꼭 달라붙게 하여 위쪽으로 2~3센티미터 올라가 다시 한번 헝겊을 꽉 조여 동여맨다. 거기서 또 2~3센티를 올라가 세 번 더 동여매서 발가락은 구부러지지 않고 발뒤꿈치는 동여매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발 모양을 궁형이 되는 것을 막고, 좁고 여위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발 동여매기가 끝나면 30센티미터 이상 되는 높은 베개를 올려놓고, 바닥에 누워 높은 베개 위에 발목을 놓는데, 정상적인 혈액 순환을 방해해서 성장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보통 5,6세 때부터 만드는 전족은 아침?저녁으로 천을 갈아주는데, 저녁에 퉁퉁 부운 다리 때문에 아이들은 잠을 못 자고 소리쳐 울기도 했다고 한다.이런 전족은 규방에서 여자를 인공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쾌락을 한층 더 즐기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신비의 몽당발인 전족은 예전 중국에서 신비로움을 상징했으며, 여성들은 헝겊을 꽁꽁 조여 자신의 발을 은밀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남편이나 애인말고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전족 위에 신은 신발이나 동여맨 헝겊, 그리고 무릎을 가리는 속바지는 깊숙이 감춰두고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아 신비성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족은 중국의 석학 호적에서 팔고문, 아편과 함께 중국역사상 세 가지 큰 병폐라고 했을 만큼 문제가 많은 부분 이였다. 이런 전족은 규방에서 여자를 인공적으로 고쳐 만들어서 쾌락을 한층 더 즐기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는데, 여자의 발이 좁고 작다는 것은 고귀하다는 상징이며, 발이 작다는 것은 성기도 멋지다는 특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보행에 보통 이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허리 부분이 단련되고 힘을 주고, 기형적인 몸매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전족은 여성의 발에 족쇄를 끼워 노예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하는 여성 억압의 상지이며, 자기비하, 자기학대, 그리고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걸은 하나 변변히 떼어놓을 수 없는 여자의 철저한 의뢰심이 전족 속에 응축되어 있다. 이 전족 이야말로 노예 같은 여성의 운명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며, 여성은 남성을 위해 정조를 지켜야 하고,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체의 일부마저 오그라뜨려야 했던 노예의 운명을 보여주는 예였다.또한, 중국의 여성들은 부인이든, 처녀든 여자들은 집에 많이 남아있는 것이 좋다고 간주되어, 마을길에서 너무 자주 보이는 여자들은 행실이 좋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어 이웃들에게조차도 낯선 소녀만이 미덕으로 간주되었다.하지만, 오늘날의 중국 여성들은 과거의 여성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여성들의 사회적 가정적인 변화는 19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부터였으며, 여성들의 높은 경제 활동의 참여로 인해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보장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 은 여성들을 봉건적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획기적인 것 이였다. 이 법은 본인의 동의 없이 부모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강제혼인과 남존여비 사상에 기초한 모든 봉건적 관습과 제도를 법적으로 금지시켰으며, 혼인과 이혼의 자유를 선포하고 일부일처제, 남녀평등과 여성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했다. 이로써 수 천년 동안 지속 되어온 여성의 기본권이 법적으로 보장 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1980년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혼인법 수정안을 발표했다. 또, 1992년 발표된 부녀 권익 보장법은 여성의 권리를 한층 더 보완했다. 이로써 중국 여성들은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인과 이혼의 자주권을 행사하고, 강제혼인, 매매혼인, 축첩제도에서 해방되었다. 또, 여성관련 법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을 보장한다. 1991년 중국사회 과학원이 실시한 부녀의 지위에 관한 조사를 보면 40,50대 문맹 여성 5%만이 부모가 주선하는 혼인을 했다고 했다. 20,30대 여성은 거의 대부분 혼인을 주선하고 결정한다. 이것은 농촌까지도 봉건의 잔재를 대부분 청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봉건시대의 여성의 지위에 비하면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이러한 변화로 인해 최근 조사에 따르면, 가정에서 여성의 법적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거나 오히려 남성보다 높다고 응답한 사람이 85.15%이고, 이 가운데, 남자가 74%, 여자가86.3%로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지위에 대해 더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정부의 제도적인 변화로 인해 예전에 남성의 존속물에 불과했던 여성들은 오늘날 남성과 동등한 재산 소유권, 사용권과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또, 오늘날의 여성은 남성과 같이 가족 경제의 책임자며 소비자다. 봉건 시대에서처럼 더 이상 시집의 대를 잇기 위해 애 낳는 도구가 되어 주고 가사노동을 제공하는 안사람의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여성들의 지위향상의 이면에는 적지 않는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여성의 저학력에 따른 취업분포상의 취약점, 남녀 임금 격차와 가사노동의 부부 분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중노동을 짊어져야 하는 맞벌이 여성의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중국은 남자는 사회 여자는 가정이라는 전통적인 성별 역할 분담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고 보편적으로 가사노동을 상호 분담한다. 부부가 가족 경제를 공동으로 책임지는 대신, 가사노동도 공동으로 분담한다는 의미이다. 가족경제를 함께 책임져야 하는 동시에, 그에 따른 권리도 동등하게 행사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전의 남녀관계는 남성은 의무가 많은 대신 이에 상응하는 권리도 컸다. 그러나 여성은 의무는 많으면서 권리는 작았다. 그래서, 여성들은 가정에서 힘들 수밖에 없었고, 남편의 구속을 받고 살아야만 했다.
* 한국의 씨름과 일본의 스모 *씨름이란?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친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잡고 힘과 재주를 부려,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한국 고유의 운동이다. 씨름은 순수한 한국어이며, 이 밖에 각저·각저·각력·각희·상박 등의 한자어 별칭이 있다. 씨름은 원래, 원시사회에 있어서 는 맹수나 타 종족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살 수 있 었으므로 생활수단으로서 투기 또는 자기를 보호 하는 무술로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차차 인간이 지적·정서적·사회적 발달에 따라 무예로 발전하였다.씨름은 농경사회의 제례행사의 여흥의 하나로서, 음력 5월 5일 단오절이 되면 남자들은 자기 마을 과 이웃 마을 사람들과 힘을 자랑하는 내기로서 넓은 모래사장이나 잔디밭에 모여 씨름경기를 하 였다. 음력 7월 보름이 되면 백중이라 하여, 각 지방에서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수백 명의 관중 앞에서 힘을 겨루는 씨름을 하여 천하장사를 가려내기도 하였다.뿐만 아니라 음력 8월 한가위, 즉 추석 명절이 되면 경향 각처에서 힘이 세고 거대한 체구의 장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기 고장과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승을 쟁취하기 위해 씨름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장사들은 맞붙은 상대를 이기기 위하여 서로 부둥켜 잡고는 당기고, 들고, 밀고, 허리를 돌리고, 다리를 걸고, 감고 또 되치기를 하며 자기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최대의 힘을 다하는 것이다.이렇게 하여 마지막으로 이긴 자에게는 부상으로 황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우승자에게 황소를 주는 풍습은, 옛날에는 씨름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는 점과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지대본으로 숭상하는 농업국이므로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뜻에서 황소를 부상으로 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스모란?두 사람이 서로 맞잡고 넘어뜨리거나, 지름 4.6m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거나하며 힘과 기술을 겨루는 씨름이며, 개인경기이다. 일본사람들은 이 스모를 한자로 표기할 때 상박이라고 쓰며, 이 스모를 하는 씨름꾼을 리키시라 하고, 스모를 겨루는 소정의 장소를 도효라고 하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리키시는 경기순번의 두 차례 전에 도효 밑에 와서 대기하다가 호출담당의호명에 따라 동· 서 양쪽에서 도효에 오른다. 두 리키시는 자기 쪽 코너에서 시코라는 독특한 동작으로 좌우 양 다리를 교호로 옆으로 올렸다가 힘껏 내리 딛는 다. 이어 정한수로 입을 가시고, 화장지로 몸을 닦은 다음 부정을 없애는 뜻으로 소금을 도효 위에 뿌린다. 도효에 올라와서부터 이 절차까지 는 겨루기 전까지의 스모의식[의 하나로서 치른 다. 그리고는 중앙에서 상대방과 마주하여 다시 시코를 한 다음 준비자세에 들어간다. 이때 주 심을 교지라고 하며, 교지는 두 리키시의 호흡 이 맞았다고 보았을 때 겨루기 명령을 내린다.스모는 체중·체급별로 겨루는 것이 아니라 기 술과 힘의 유효한 구사로 승률이 높아지고 그 높은 승률을 꾸준히 유지할 때 스모계급이 차차 올라간다. 이 계급 호칭은 예로부터 정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명칭이다. 최고위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주요 계급은 ① 요코즈나, ② 오오제키], ③ 세키와케, ④ 고무스비, ⑤ 마에가시라와 같다. 마에가사라는 주요 계급 중 하위에 속하며, 그 중에서 제1위를 마에가시라 힛토 라고 칭하고, 그 다음부터는 몇 마이메(몇 번째 또는 몇 장 째라는 일본말)라는 칭호가 붙지만 대개는 생략된다.씨름의 역사고대 그리스의 벽화에도 씨름하는 그림이 있고, 석가는 왕자 때 그 사촌인 제바달다와 씨름겨루기를 했다는 기록이 불전에 나와 있다. 예기의 월령편이나 장평자의 서경부를 보면 중국에서도 한무제 때에 씨름이 가장 성행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각저라고 불렀다는 것이 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국의 씨름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행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루부족장 때 시합이 있었는데, 이 시합종목이 각저 ·궁사 ·승마 ·수박이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의 문헌에는 우리의 씨름은 고려기 또는 요교라고 했을 정도로 중국의 각저희나 일본의 스모와는 그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였다.한국에서 씨름에 관한 가장 오래 된 사료는 1905년에 발견된 유물, 즉 옛 고구려 도읍지였던 환도성자리 각저총의 현실에 있는 벽화인데, 여기에는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고려사에서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충혜왕은 용사들에게 싸움을 하도록 하며 구경을 하였고, 또 고용보와 거리를 행차하다가 씨름경기를 보고 용사들에게 많은 포목을 상품으로 하사하였다고 하였으니 충혜왕은 용사들이 씨름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인 세종실록에는, 세종 원년인 1419년 6월 15일에 상왕과 왕은 저자도에 거둥하여 물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종친과 더불어 주안을 베풀고 강변에서 군사들이 씨름하는 광경을 보며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송경지의 실록에 의하면 5월 5일 단오절에 명절놀이로서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여아들은 추천놀이를, 남자는 각저의 희, 즉 씨름경기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시대 정조때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씨름하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스모의 역사일본 스모는 본래 일본 천황의 유흥을 위해 시작되었다. 물론, 스모라는 운동 자체의 유래를 따지고 들어가면 일본 고대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나 역사적 고증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현재와 같은 경기방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본 헤이안시대인 734년, 793년, 1174년에 각각 쇼오부, 간무, 다까꾸라 천황이 지켜보는 앞에서(이것을 일본에서는 덴란스모라고 함) 당대의 내노라 하는 리끼시들이 승부를 겨룬 것이 그 효시이나, 현재와 같은 경기방식으로 정기적으로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된 것은 에도시대인 1757년부터이다. 그러니까 약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그러나, 그나마도 그때 당시에는 경기방식, 경기규칙, 리끼시에 대한 처우 등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했고, 현재의 시스템이 도입된 시기는 메이지시대인 1890년부터이다. 이때에 일본 최초의 요꼬즈나인 니시노우미가 탄생하였고, 1909년에 료오고꾸 국기관이 스모 전용 체육관으로 개관하였고, 1925년에 재단법인 일본스모협회가 발족함으로써 그 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현재 스모경기에 사용되는 료오고꾸 국기관은 대대적인 리모델링 끝에 1985년 재개관한 것이다.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의 차이씨름 선수가 되는데, 특별히 정해진 규정이 없는 반면에 일본의 국기종목인 스모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스모 선수가 되기 위한 조건은 우선 신체적으로 키가 173cm, 체중이 75kg를 넘어야 하며, 23세 미만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이 15~17세 정도에 스모에 입문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이러한 신체적 기준 뿐만 아니라 일본스모협회에 등록된 해야(일본말로 방을 뜻하는 단어,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스모 도장)에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출세식을 거쳐 첫 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된다. 본래 일본 국적을 가진 자만이 스모에 입문할 수 있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서 외국인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했으며, 다까미야마라는 첫 미국인 스모 선수를 효시로 하여 1980년대 들어 외국인 선수들의 입문이 잇따랐으며 고니시끼가 첫 오오제끼, 아케보노가 첫 요꼬즈나에 등극한 이후로 외국인 선수들은 일본 스모계를 사실상 이끌어가기에 이르렀다. 현재 2명의 요꼬즈나 모두가 외국인 출신이다. 아사쇼오류는 몽고 출신이고, 무사시마루는 하와이 출신이다. 최근 들어 한국인 최초의 마꾸우찌( 일종의 메이저리그) 선수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경기 규칙의 차이씨름의 승패의 결정은 원형의 모래판위에 양선수가 앉은 자세에서 서로의 샅바를 잡고 일어선 후 주심의 신호에 따라 경기를 시작한다. 씨름의 승패는 무릎이상의 부분이 모래판에먼저 닿는 선수가 지게 되며,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무효가 된다. 단 기술을 거는 선수의 발이 경기장 안에 있고 상대방이 기술에 걸린 상태에서 경기장 밖으로 넘어지면 유효하다. 한판의 경기시간은 2분이며 휴식시간은 1분으로 한다. 경기방법은 단판제, 3판양승제, 5판다승제가 있다. 무승부일 때는 경고나 주의를 받은 선수가 패자가 되며 경고나 주의가 없으면 체중이 가벼운 쪽이 승리 한다. 스모의 승부의 판정은 도효 안에서 리키시의 발바닥 이외의 신체 일부가 먼저 바닥에 닿은 쪽이 패자가 되며, 도효 밖으로 밀려나가도 패자가 된다. 승부가 끝나면 서로 목례를 하고 물러서는데, 승자에게는 이겼다는 표시로 교지가 승자의 고유 호칭을 불러 준다. 승부의 판정에는 교지가 주심이 된다. 두 리키시가 동시에 넘어졌을 때에는 기술을 먼저 건 공격측에 승리가 선언된다. 교지의 판정에 의문이 있는 경우 승부검사역이 이의를 표명하여 협의를 거쳐 다수결로 결정하고, 동수의 경우는 심판위원장이 재경기를 지시한다. 이때 교지는 표결에 참가 할 수 없다.
「아랍이슬람 음식문화」《 아랍이슬람 음식문화 》전통 아랍 음식의 원류는 유목민과 농부들의 음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풀과 물을 따라다니며 옮겨 살던 유목민 베드윈 부족들이 사용하였던 밀을 빻기 위한 돌절구의 발견은 일찍이 고대 아랍의 베드윈들이 빵을 일상의 음식으로 먹었음을 증명해준다.아랍 속담 중에 군대는 맞서 싸워도 음식에는 못 맞선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랍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다. 아랍은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만나는 길목이기 때문에 여러 문화권의 양념과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주변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 레바논이나 튀니지 같은 나라의 음식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엄격하게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때,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가 정해주는 여러 가지 규정을 지킨다. 이러한 규정에는 먹고 마시기 전에 ″비스밀라 히르라흐마 니르라힘″(자비롭고 자애로운 알라의 이름으로)라고 말해야 하며, 또한, 식사가 끝나면 ″알함두릴라″(알라에게 감사를)라고 말한다.식사를 할 때는 온 식구들이 손을 걷어 부치고 밥그릇 주위로 둘러앉는다. 보통 식사는 하나의 큰 밥그릇에 담아 내어온다. 오른손을 사용하며, 왼손을 가능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왼손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포크를 이용한다고 한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든 다음 식사를 해야 하는 식의 예절은 없다. 또, 우리는 식사 중에 말을 하면 복이 나간다고 하여 대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만, 아랍인들은 식사 중에 가족들끼리 여러 가지 화제를 이야기하며 장시간 식사를 한다.그들의 아침식사는 차(샤이), 빵(훕즈)과′풀′이라고 하는 삶은 콩(대개는 집에서 삶지 않고 가게에서 사온다.), 삷은 계란 등을 주로 먹는다. 점심은 주로 닭고기나 양고기, 샐러드 서서 먹거나 마시지 말며 오른쪽으로 또는 반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먹고 마시라는 규정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식사 후에 그들이 일반적으로 먹는 후식은 우유와 밀 알갱이, 쌀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각종 양념, 장미수(향료가 발달한 아랍문화에서 아랍인들은 장미꽃잎에서 장미수를 직접 추출하여 집안에서 요리의 향신료나 향수로 사용한다) 오렌지 꽃물 등으로 향미를 낸 것들이 주종이다. 원래 팔레스타인 요리로 알려진 쿠나파 역시 유명한 후식이다. 아주 가는 당면으로 한 입 크기의 덩어리를 만들어 버터나 크림 치즈로 튀긴 후 설탕이나 꿀을 뿌린 것으로 한 입 베어 물면 입 속에서 한순간에 녹아버리면서 강렬한 고소함과 달콤함이 오랫동안 잔향으로 남게된다. 아랍에는 전통적인 요쿠르트의 종류가 많듯이 치즈의 종류도 다양한데, 그 중 집나바이다(아랍어로 흰 치즈)는 두부 모양과 크기를 하고있다. 한국에 온 아랍인과 아랍세계에 간 한국인이 똑같이 실수를 하는 일이 바로 이 치즈 때문이다. 물론 한국인은 치즈를 두부로 생각하고 아랍인은 두부를 치즈로 여긴다는 차이가 있지만. 이 치즈는 모든 아랍국가에서 인기가 있는 대중적인 것으로 도미아티 치즈라고도 불린다. 기원전 332년 이집트 삼각주의 북동부 지역인 도미에타에서 그 기원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암소, 물소, 염소, 양의 젖으로 만들어지는 집나바이다는 부드러운 연 치즈이다.이런 먹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몸과 마음의 정결함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교리 특성상 음식에 관한 금기가 유독 많다. 코란 에는 음식금기 사항이 17가지나 나온다. 무슬림 들은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 하람과 먹어도 되는 하랄로 구분하여 음식을 먹는다. 즉, 아랍 세계의 음식 종류는 너무도 다양하지만 하람인 돼지고기 요리는 먹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는 꾸란 구절은 제2장 168절, 제5장 4절, 제6장 116절 및 146절에 나타나 있다. 이는 구약성경(레위기 11장 7~8절)에서 금했던 것처럼 꾸란 2장 173절에서도 "알라는 너희에게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금했노라"고 금했기 때문이다. 돼지는 음식 찌꺼기를 먹거나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엇이던 먹기 때문에 대체로 지저분한 음식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충 박테리아와 상당수의 병균을 가지고 있어 질병의 원인이 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목 졸려 죽은 고기 등은 먹지 않는다. 돼지에서 뽑은 젤라틴이 든 음식과 알코올을 넣어만든 사탕이나, 날 것을 사냥해 먹는 야생동물(호랑이, 이리 등), 뱀, 개구리 등 이슬람에서 금지한 짐승과 이슬람식으로 잡지 않은 짐승을 먹는 것을 금한다. 그리고, 알코올은 이집트를 제외하고는 이슬람에서 금지되는 음식이다. 그래서 술을 가지고는 중동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인들은 남달리 음료수에 대해서 애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그들이 금기시 하는 음식은 이슬람식으로 도살의례를 거치지 않는 고기,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먹지만, 일반적인 관습상으로 비늘이 없는 해산물(뱀장어, 게, 전복, 조개)등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아랍 음식에는 설탕이나 인공조미료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기름기가 많기는 하지만 맛은 아주 부드럽다. 아랍 음식에 많이 사용되는 향신료에는 보통 걸죽하게 숙성된 요구르트(labanah), 샤프란, 후추, 커민(cumin)등이 사용되는데, 지중해 지역 요리에는 이러한 천연 양념 이외에도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올리브와 레몬 같은 재료가 음식에 많이 사용된다. 이렇게 기름기가 많으면서 부드러운 음식을 많이 먹는 아랍인들은 이런 음식의 소화를 돕기 위해서 후식으로 아주 단 과자를 먹고 차를 많이 마신다. 이것은 그들이 비단 사막기후에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대다수가 무슬림으로써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슬람의 계율에 따르기 때문에 그 대용으로 다양한 차를 즐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또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랍의 커피, 특히 아랍인들은 에스프레소 잔 정도의 크기에 진한 아랍 커피와 천연당도가 탁월한 대추야자를 함께 즐긴다. 커피는 13세기경 예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16세기경부터 이집트, 아나톨리아, 이란 등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아열대에서 주로 재배되는 카르카데의 잎을 물에 우려 시원하게 즐기는 카르카데 주스는 여름의 갈증을 풀어주는 아랍인의 기호식품이다. 카르카데는 높은 산성도와 저 칼로리의 당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혈압 강하, 이뇨, 장의 연동 운동에 탁월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다른 청량 음료보다 훨씬 선호된다. 이렇게 종교적인 이유로 많은 음식을 금기시 하고 있는 무슬림 들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 음식과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된 음식을 알아보자.아랍인들은 우리보다는 적게 먹는 편이지만 빵과 더불어 안남미라고 부르는 길다란 모양의 쌀도 즐겨 먹는다. 물론 이 쌀은 우리하고 조리법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솥에 넣고 쪄서 먹는 우리의 쌀과 달리 안남미는 올리브 기름을 넣거나 소금을 약간 넣어서 밥을 해서 독립국가를 형성하듯 쌀들이 분리되어 있다. 또한 볶음밥 같은 경우 밥에 재료를 넣어서 조리하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밥을 할 당시부터 재료를 섞어서 요리한다.아랍의 음식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음식은 첼로 케밥으로 가장 대표적인 중동의 음식이다. 첼로 케밥에서 첼로 는 밥이고, 케밥 은 숯불에 구운 고기를 뜻한다. 즉 숯불에 구운 고기를 밥과 함께 먹는 음식이다. 케밥에는 사용되는 고기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양고기를 사용하는 첼로 카법, 닭고기를 사용하는 주제 케밥(Juje Kabab), 생선을 사용하는 머히 케밥(mahi Kabab)이 있다. 첼로 케밥에는 넓적한 고기를 베어 구운 바르그(Barg)와 양고기를 다져 특유의 양념과 함께 구운 쿠비데(Kubideh)가 있다. 이란의 밥은 한국의 밥과 달리 질지 않기 때문에 첼로 케밥을 먹을 때에는 흔히 버터, 날계란 및 구운 토마토를 넣어 비벼서 먹는다.또, 가장 전통적인 음식은 업구쉬트이다. 업구쉬트는 물과 고기 라는 의미이다. 업구쉬트는 푹 삶은 감자와 콩, 익힌 고기를 조그만 단지에 넣고 쇠 절구로 으깨어 먹는 요리다. 말린 신 레몬가루를 향신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신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음식은 디지(Dizi)라는 단지를 사용하는데 약한 불에 얼마나 끓였는냐 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이 음식은 야채와 빵과 함께 먹는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들어와서 가장 오래된 아랍음식인 무화과 요리도 빼 놓을 수 없는 음식 중에 하나이다.《 꾸란 속의 음식 》제2장(바까라)- 사람들이여 지상에 있는 허용된 좋은 것을 먹되 사탄의 발자국을 따르지 말라 그는 실로 너의 들의 반역자라.(168절)-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아니한 고기도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 했거늘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173절)제3장(이므란)- 구약아 계시되기 이전에는 모든 음식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허락되어 있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가 금기한 것이 있었노라 만일 너희의 주장이 사실이거늘 구약을 내게 가져와 읽어보라고 말하여라.(93절)
「붉은 수수밭」을 통해 본 중국의 문화영화를 보기 전 베를린 영화제에 대상을 받은 작품이기에 굉장히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중국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도 궁금했지만, 붉은 수수밭이라는 제목이 나오게 된 경위도 굉장히 궁금한 부분 이였다.이 영화는 중국인들의 다양한 생활 모습을 담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딸을 팔아버리는 쥬얼의 아버지에 의해서 나병 환자에게 팔려 가는 가마 안에서 가마꾼들이 신부를 놀리는 모습은 중국의 결혼 풍습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모습이다. 또, 딸을 천하게 여기고 팔아버리는 모습에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여자를 천하게 여겼던 중남경녀를 보여주는 장면 이였다. 또한, 가마에 실려 가는 쥬얼이 손에 가위를 들고 가슴에 품는 모습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옛 여인들이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은장도를 가지고 다녔던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양조장 주인의 의문의 죽음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은 양조장을 떠나려고 하지만, 쥬얼은 사람들에게 양조장을 지켜 달라고 하며, 류어한 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게 된다. 양조장을 새롭게 일으키려는 쥬얼에게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위잔아오가 찾아와 그들의 사이를 폭로하고, 쥬얼이 인정하지 않자 위잔아오는 고량주를 담고있는 술병에 오줌을 싸게 된다. 하지만, 오줌이 누룩의 역할을 하게 되어 술맛이 더 좋아지게 된다. 여기서 술이 완성될 때 술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9월9일에 만든 그지없이 좋은 술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양의 기운이 가장 강한 9월 9일에 즉, 홀수가 겹치는 중량절을 중요시 여기는 중국의 문화를 엿 볼 수 있는 장면 이였다.위잔아오와 살림을 차린 쥬얼을 류어한은 떠나게 되고, 9년 후에 중일전쟁 때 항일세력으로 일본군에게 잡혀와서 중국인들 앞에서 본보기로 몸의 껍질을 벗기는 죽음을 당한다. 쥬얼은 위잔아오에게 류어한의 복수를 위해서 일본군의 차를 폭파해 달라고 하고, 양조장 사람들과 함께 차 폭파를 도모하게 된다. 쥬얼은 그들에게 밥을 주기 위해 가게 되고, 그때 마침 일본군이 오면서 쥬얼은 일본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된다. 뒤늦게 터진 폭탄은 고량주와 함께 붉은 수수밭을 다 태워버리고 쥬얼의 아들과 위잔아오만이 살아 남는다.가난한 중국의 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든 세월을 헤쳐나간 한 여인의 기구한 삶과, 인간의 성욕과 생명력을 붉게 물들인 붉은색이 선명했던 화면이 굉장히 인상깊은 영화였다. 또한, 영화의 배경에 깔리는 음악이나 수수밭에서 수수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나는 소리 또한 대륙의 성격을 잘 반영한 작품이고, 산동성 근처의 붉은 수수밭에서 촬영되었다는 영화는 중국인들이 상서롭고 이롭게 생각하는 붉은색에 많은 의미를 영화에 담아 내고 있다. 또한, 9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홀수를 좋아하고 홀수가 겹치는 중량절 특히, 양의 기운이 쎈 9월9일을 굉장히 중시 여기는 장면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류어한이 9년 만에 나타나는 것이나, 酒의 한자말인 지우가 숫자九와 동일한 음이 난다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설정이 아닌가 싶었다.
♣ 목 차 ♣T-Tube 삽입의 목적 해부명칭 T-tube를 삽입한 환자관리 간호 관리 과정 및 환자 간호 T-Tube 관리를 위한 환자교육♣ T-Tube 삽입의 목적 ♣담도계 수술 후 총담관의 개방성을 유지 (담낭관을 떼어내고 T-tube를 총담관으로 삽입하여 배액을 돕고, 수술 후 담도조영술이나 잔류 담석이나 다른 병소를 간과하였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정이나 처치를 하기 위함이다.)적응증 : 괄약근 협착증, 다발성총담관결석, 간내결석, 배액처치 금기 : 출혈성 성향, 다량의 복수, 다발성간내전이, 심부담관폐쇄 합병증 : 담즙누출, 재폐색, 복막염, 튜브의 폐쇄 혹은 이탈♣ T-Tube cholangiography ♣ (T관 담관조영술)T관 담관조영술은 수술 후 7∼10일 무렵에 총담관의 개존을 사정하고 남아있는 결석을 찾기 위해 실시한다. 이 검사를 위해 요오드 조영제를 직접 T관으로 주입한 후 X-ray 검사와 형광투시 검사를 한다. 검사결과 담즙이 십이지장으로 자유로이 흐르면 T-Tube를 제거하되 결석이 의심되면 Y관을 그대로 두었다가 3주 후에 반복 검사한다.♣ 해부명칭 ♣T-tube 촬영사진결석 제거 및 T-tube 유치술♣T-tube를 삽입한 환자관리 ♣1)T-tube 삽입 후 ① 활력징후 측정 ② 상처부위 관찰 ③ 튜브의 꼬임과 막힘을 확인, 테이프로 고정 ④ T-tube 배액 시스템을 복부 높이에 위치 (수술 후 처음 24시간 동안) ⑤ 배액주머니는 항상 상처 부위보다 낮게 유지♣T-tube를 삽입한 환자관리 ♣⑥ 환자는 반좌위, 운동시에는 배액주머니를 대퇴부에 고정 ⑦ 매일 튜브주위의 피부를 소독하고 건조하게 유지, 출혈이나 담즙이 스며 나오는지 관찰 ⑧ 답즙의 양과 색깔을 관찰, 주머니를 비워주며 매일 배액량을 측정 ⑨ 환자와 보호자에게 교육 ⑩ 담즙의 양과 색깔, 피부상태, 교육내용, 환자의 반응을 사정하여 기록♣T-tube를 삽입한 환자관리 ♣2) 답즙주머니를 비울 때 ① 환자의 Privacy 유지를 위해 스크린을 친다. ② 환자에게 간호절차에 대해 설명한다. ③ 손을 씻는다. ④ 비닐장갑을 낀 후 담즙주머니의 뚜껑주위를 알콜솜으로 닦은 후 뚜껑을 열고 빈 통을 비우고 다시 알콜솜으로 닦은 후 닫는다. ⑤ 담즙의 양상, 색, 양을 기록한다.♣ 간호 관리 ♣수술당일은 적어도 2시간 마다 배액 양상 점검(색과 양), 처음에는 담즙이 전부 튜브를 통해 배액되지만 10일 이내 십이지장으로 흐름. t-tube 기능유지 : 복부보다 배액병을 밑에 두어 중력에 따른 배액. 수술직후 튜브 꼬이거나 잠기거나 당겨지지 않도록 주의, 제대로 배액되지 않으면 간이나 혈류로 역류 -- 황달유발 피부통합성 유지 : T-tube 절개부위 드레싱 자주 교환. 튜브 주위 피부 깨끗이 씻어 담즙제거(담즙 피부에 닿으면 피부손상) 영양증진 : 저지방식이, 영양균형 유지♣ 과정 및 환자 간호 ♣1. 환자에게 수술검사동의서를 받으며 튜브 삽입의 목적과 방법을 설명한다. 2. 수술 후, 최소 4시간마다 그 다음에는 8시간마다 배액량, 색깔, 내용물, 냄새 등을 관찰한다. 수술 직후에는 혈액이 배액될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액색은 초록색 내지 갈색으로 변화된다. 담즙 배액량이 하루1000mL가 넘으면 보고한다. 3. 정상적으로 배액량이 감소된 뒤, 수술 후 9~10일 전후로 갑자기 배액량이 증가할 경우에는 보고한다. 4. 나쁜 냄새나 농이 배액 되는지 관찰하고 의사에게 배액의 변화를 보고한다. 5. T튜브를 삽입한 피부 주위에 발적, 홍반같은 염증 증상은 없는지 주변으로 담즙이 새는지 관찰한다.♣ 과정 및 환자 간호♣6. 배액관은 담낭보다 아래에 위치시키며 대상자는 반좌위를 유지하도록 한다. 7. 의사의 지시 없이 세척, 흡인하거나 잠그지 않도록 한다. 8. 배액관이 잡아당겨지거나, 꼬이고 얽혔는지 관찰한다. 특히 대상자가 오른쪽으로 돌아 누울 때 조심하도록한다. 보행을 하도록 돕는다. 9. 수술 후 7일경 의사의 지시에 따라 T관 담도조영검사를 실시한다. 10. 담관 조영검사 후 의사의 지시에 따라 튜브를 잠근다. 환자가 복통 오한 발열반응을 보이는지 관찰한다. 11. 수술 후 7~10일경 대변이 갈색으로 돌아오는지 확인한다.♣ T-Tube 관리를 위한 환자교육 ♣1. T-tube를 계속 열어두거나 간헐적으로 열거나 혹은 계속 잠가두어야 하는지에 따라 환자를 교육한다. 1)계속 열어둘 경우 : 환자는 배액주머니 비우는 방법과 주머니를 삽입위치보다 아래로 두어야 하는 중요성을 이해해야 하며 배액상태에서 이동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2)간헐적으로 열어둘 경우 : 환자는 tube 여는 방법, 배액주머니 부착법, 다시 잠그는 방법, 얼마나 배액 해야 하는지, 그리고 배액량 측정방법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3)계속 잠가둘 경우 : tube와 삽입부위는 건조한 무균드레싱으로 가려져 있어야 한다.♣ T-Tube 관리를 위한 환자교육 ♣2. 환자는 tube삽입부위 청결방법에 대해 교육받는다. 보통 매일 샤워를 함으로써 청결상태를 유지하고 건조한 무균드레싱을 매일 교환해 주어야 한다. 3. 환자는 필수적인 자가 감시법을 익혀야 한다. - 감염사정 (삽입부위의 발적, 온기, 부종, 발열, 화농성 배액) 폐쇄사정 (우상복부의 통증재발, T-tube주위로 담즙액 누출, 오심과 구토 재발, 점토색(회백색)변, 짙은 갈색 소변, 황달) T-tube 이탈사정(갑작스런 배액량 감소, T-tube 위치변경) 4. 환자는 합병증의 증상 및 징후를 바로 알릴 수 있도록 교육 받는다.{nameOfApplication=Sh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