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의 / 書評루소가 도덕과 종교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나아가 정치제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든 사물이 결국 정치에 의해 좌우되고, 또 국민으로서의 사람들은 그 정부의 성질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된 것 이외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라고 한다.) 루소, 장성환 역, , p. 337에서 인용그의 정치제도에 대한 관심이 결실을 맺은 첫 저작이 바로 이다.1. 이 글에서 루소는 자유롭고 평등한 고립인의 세계로서 '자연상태'를 구상하고, 그 자연상태가 완전히 또 영구적으로 부정된 상태로서 자연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에서 사회에로의 이행 또는 전환을 가져온 것은 결국에는 재산의 '불평등'이고 사유재산이라고 보는 것이다.그는 1부에서 자연상태에 있는 미개인, 즉 평등하고 행복한 '자연인'의 속성에 대하여 길게 고찰하면서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고찰해가고 있다. 자연인에 있어서는 연령과 건강과 체력의 차이 및 정신과 영혼의 차이로 형성되는 자연적, 육체적 불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사회적 불평등은 일어나지 않으며, 자연인은 완전한 자유와 평등과 독립을 누리게 된다.사실 원시상태에 대해서는 무질서와 투쟁이 난무하는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명의 발달과 제도의 성숙을 통해 사회가 더욱 발전하고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일반적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홉스는 자연상태를 적대관계로서 사실적으로 파악한 결과로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절대권력을 끌어내고 있다.하지만, 루소의 사상의 출발점은 다르다. 그와 같은 사고를 해묵은 오류로 보고, 타파해야 할 뿌리 깊은 편견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히려 자연상태에는 불평등이 거의 무이고, 그 불평등은 우리의 능력의 발달과 인간정신의 진보에 의해 증대해온 것이며, 소유권과 법률의 제정에 의해 안정되고 정당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1부에서 고찰된 자연인의 개념, 즉 자연인의 선성, 미덕, 인간애, 또는 자유, 평등의 관념들은 2부에서 그 대립개념인 사회적 불평등과 대치되어 적극적인 의의를 띠게 된다.그는 2부 첫머리에서 "어떤 토지에 담장을 둘러치고 '이것은 내것이다' 하고 선언하는 일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그대로 믿을 민큼 단순한 사람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 정치사회(국가)의 진정한 창립자였다"라는 비유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단적으로 사유제에서 찾고 있다. 토지소유권, 사유재산, 그리고 부의 확립과 그러한 관념의 발생이 인간의 자연상태를 종결시켰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온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목가적 자연상태의 평화는 완전히 파괴되고, 전제정체와 인위적 인간의 이기심의 극치인 주인과 노예가 생기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이 루소가 에서 하고자 하는 논지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루소는 인류의 실낙원과 타락한 이성의 역사를 시사하고 있다. 문명사회의 인간은 고도의 학문과 세련된 예절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반문하려 하지 않고 미덕이 없는 명예, 지혜가 없는 이성, 행복이 없는 쾌락만을 가진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즉, 다시한번 단순하지만 자기에 충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미개인과 달리 문명사회의 인간은 타인의 판단과 의견에 의해 자기존재의 감정을 남에게서 빌어오고 있는 말하자면, 자기 실체를 잃은 허수아비일 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루소가 이 글을 통해서 니체류 또는 후기구조주의류의 탈이성 또는 반이성주의의 맥락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단지 자연인은 건강하고 행복한 동물, 문명인처럼 사색에 의해 복잡한 욕구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악덕이나 결함으로 괴로워하는 일이 없는 존재였지만, 이성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과의 대상으로 그 원초적 행복을 잃었다는 것은, 즉 자연인으로서의 퇴화 또는 타락을 뜻하고 있는데 머무르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즉, 그의 테마는 문명의 진보가 갖는 모순 또는 인간의 역사에 내재된 일종의 역설을 지적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가 이성의 타락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성에 대한 '괄호침(에포케)'까지 나아가고 있지 않은 것은 에서 제시된 '일반의지'론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2. 나름의 이유로 세상을 등지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지만, 사람은 역시 함께 모여 살수밖에 없는 것 같다. 즉 사람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가족이라는 사회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더 나아가 지구촌이라는 사회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가족이라는 사회 단위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본 인간, 즉 남녀가 만나 2세를 낳아 기르는 가장 기본적, 원초적인 삶의 자리에서 비롯되는 사회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사회, 즉 '한국 사회'니, '신문의 사회면'이니,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에 등장하는 사회는 사뭇 다르다. .이 사회는 혈연 관계가 아닌 타인들과 더불어 형성한 공동체가 되는 셈인데, 바로 여기에서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 나온다. 도대체 인간은 사회를 왜, 어떻게 형성한 것일까? 인간은 왜 하필 지배자가 있고 피지배자가 있는 사회를 이루었던 것일까? 국가라는 사회는 왜 필요한 것일까? 차라리 국가가 없는 상태가 인간이 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루소는 '사회계약론'(1762) 첫 부분에서 이렇게 답한다."사회적 질서는 신성한 권리로서 다른 모든 것의 기초를 이룬다. 그런데 이 권리는 자연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계약에 기초를 둔다."사회적 질서 속에서 산다는 것이 속박이 아니라 인간만의 신성한 권리임을 강조한 뒤에, 그러한 권리, 즉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여 그 속에서 살 수 있는 권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계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셈이다. 물론 루소 이전에도 이미 홉스가 사회 질서가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주장한 바 있다. 홉스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른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속에 놓여져 있으며, 인간은 개인적인 자연권을 포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계약에 따라 질서, 법률, 관습, 도덕 등을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사회 또는 국가라고 한다. 이로서 비로소 인간은 타인과의 끝없는 투쟁 상태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그러나 루소의 입장은 계약에 의한 사회 질서 또는 국가의 형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홉스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홉스의 입장에서는 사회 계약이 투쟁 상태를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비하여 루소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 즉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계약의 결과가 국가라고 보았다.또한 홉스의 입장에서는 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리적 개인이다. 이 때문에 각 개인은 각자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서, 부득이 하게 서로 계약을 맺고 사회 질서를 형성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대로 가다가는 너도나도 모두 죽거나 다칠 것 같으니, 이쯤에서 다투는 것을 멈추고 계약을 맺기로 하자'는데 모든 인간이 동의한 셈이다.이에 비하여 루소는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사회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이른바 일반 의지의 지상명령에 따라 사회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쉽게 말하면, "너 또는 나의 개인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라는 보다 일반적이고 큰 범위의 공동체의 이익 또는 선을 위해서 계약을 맺지 않을 수 없다"는 정도가 되는 셈이다.요컨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인간 각자의 의도를 뛰어넘어, 공공선의 실현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의도 또는 목적을 설정하는 셈이다. 때문에 홉스가 개인주의적 입장에 기울어져 있다면 루소는 보다 공동체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홉스가 도덕적인 차원을 돌보지 않는데 비해서, 루소는 공공선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형성한 공동체, 즉 사회 또는 국가를 도덕적인 차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물론 이러한 사회계약론의 입장에 대해서 생기는 의문으로는 우선, 과연 실제로 그런 계약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알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태고적의 지구 어느 한 구석에 원시인들이 모여 앉아 계약을 맺는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차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사회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이미 형성되어 있는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