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WLQWL(Quality of Working Life)인간다운 노동생활을 뜻하는 용어.노동생활의 질, 노동의 인간화라고도 해석하고 있다. 근래 산업발전에 따라 인간성상실, 인간소외의 현상이 현존화 하는 것과 함께, 종래의 인간을 업무에 맞춘다는 management의 반성으로, 인간성이나 자기실현의 욕구를 중시 한 management의 방식이 주목을 받아 왔다. 이러한 문제의 대응으로서, QWL이 주장되어졌다. 즉, 참여의 기회를 늘여, 모티베이션을 높임으로 자기실현이나 인간성회복을 중시한 조직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며, 동시에 생산성과 보다 고차원적인 과제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반되는 요건을 동시에 달성 해가고자 하는 방책이 QWL이다.1960년대 말 {미국의 L.E.데이비스가 처음 사용하였다. QWL의 대상은 매우 광범위하지만, 목표는 노동의 인간화, 즉 {노동자가 인간다운 노동생활을 하도록 직무를 설계하고 편성해 가는 데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여러 면에서 경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기본요건이 된다. 1973년 국제 QWL 위원회가 발족하여, QWL에 대한 관심이 국제적으로 고조되었다. 그 이유로는 현대산업사회가 작업의 단순화와 표준화가 지나치게 진행되었다는 것, {노동자의 의식이나 욕구가 고도화함으로써 예전처럼 높은 {임금이나 노동시간 단축 등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복사기로 유명한 제록스(Xerox)는 올해 포천지 선정 5백대 기업중 87위에 오른초대형 다국적 기업이다.99년에 1백92억3천만달러의 매출과 14억2천만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쾌적한 작업환경과 우수한 사내복지에 힘입어 지난해 머니 매가진에 의해 1백대 기업중 종업원에게 혜택을 가장 많이 주는 3번째 회사로 뽑히기도 했다.제록스는 지난59년 모델 914 복사기를 만들어 출시한 뒤 경쟁자 없이 독주해왔었다.그러나 저가의 일제 소형복사기에 밀리기 시작했다.지난70년만해도 96%였던 시장점유율이 80년대 초에는 40%까지 하락하는 위기를맞았다.지난77년 IBM에서 스카웃된 데이빗 컨즈(D.Kearns)대표는 근로자 참여경영 제도를 도입했다.81년 제록스와 이 회사 노조는 공동으로 QWL(QUality of Working Life)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컨즈 대표가 금요일 오후에 마련한 노사간 비공식적인 간담회 자리에서 노조 간부와 경영진들은 회사의 경쟁력을 점검하고 미래의 투자계획,고용전략을 의논했다.그뒤 제록스는 후지제록스로부터 일본식 TQM(Total Quality Management)과 조직혁신방안을 받아들였다.결국 일본을 눌렀다는 의미에서 미국의 사무라이(American Samurai)라는 별명을 얻었다.그렇지만 최근 경영이 다시 어려움을 처하면서 종업원의 50%를 감축하고 이만큼의 일감을 하청회사나 멕시코로 옮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경영혁신의 필수요소는 고용안정이다.정리해고와 경영혁신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노조가 있는 기업이라면 작업장 혁신과 관련해 해당 노조의 리더쉽을 얻어내야만 원하는 성과를 거둘수 있다.QWL이란 말은 생소하다.지금 노도처럼 일고 있는 노사분규 현장에서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다는 목소리가 커가는 것도 바로 우리 노동현장에서 QWL이 부재했다는 증거랄 수 가 있다. 노동의 인간화는 전세계적인 추세다. 그 QWL의 첫 도시는 컨베이어에 실려오는 부속을 기계적으로 조립하는 단순반복의 타율적 작업에서 어느 단위공정을 도맡아 하는 자율적 직업으로의 전환이었다.이 QWL에 성공한 기업으로 스웨덴의 최대 자동차메이커인 볼보사를 든다.볼보사는 단순반복생산체제 아래에서는 노동자의 이동률이 40%나 되었고,결근율이 19%에 이르는 별볼일 없는 회사였다.그런데 그 작업체제를 철폐하고 벌집처럼 육각형의 돌방을 만들어 8 10명 단위로 20 25개 작업과정을 맡게 하여 반제품을 만들도록 시켰다. 이 육각방마다 화장실, 휴게실, 냉장고를 두어 휴식과 사생활을 자율화했고 시간을 자유롭게 쓰게 하며 서로 인간적 유대와 합심과 성취욕구와 제품에 대한 긍지를 유발하였다. 이 새 시설을 위해 10%의 투자가 늘었지만 노동이동은 40%에서 14%로, 결근율은 19%에서 5%로 격감하고 있다. 그만큼 노동의 인간화가 진행된 셈이다.QWL의 또 다른 시도는 한 사람이 하는 일의 한계 , 곧 작업의 영역을 기계적으로 딱 잘라 서로 불가침하도록 한 종전의 방식에서 인간적으로 유동성있게 재량을 주는 방식으로의 개선이었다. 영국의 ICI가 이 QWL을 성공시키고 있는데 창의력이 왕성해지고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갖게 되어 파업일수를 75%나 격감시키고 있다.
백범일지김구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호는 백범이다. 8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 혁명이 일어난 해에는 해주 동학군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만주로 피신하였다. 1896년 귀국하여 명성 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복수하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체포되었다. 그 후에도 일제에 항거하여 투쟁을 계속하다가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하였다.3·1운동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이봉창·윤봉길 등의 항일 의거를 지휘했으며, 장 제스의국민 정부와 긴밀한 유대를 맺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정치 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민족양심에 호소하며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애쓰던 중,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였다. 저서에는 가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어릴 때의 김구는 그의 조상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김구의 조상은 살기 위해 상놈행세를 하다가 상놈이 된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서 창암을 가르치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자기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셨다. 그 결과 창암은 과거를 볼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낙방하였다. 그 때 당시 과거에서는 대신 글을 써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잣집 사람들은 글을 잘 쓰는 사람한테 돈을 주고 그 글을 사서 과거에 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돈 많은 사람만 과거에 합격하고 가난한 사람은 낙방할 수밖에 없었다.이것은 조선시대가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도 이런 부정부패에 원인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창암은 어릴 때, 남의 집에서 맞고 화구하고 아버지는 반신불수가 된다. 부모님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 무전여행을 떠난다. 그러는 중에 병환이 나아져 돌아오고 창암은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창암은 많은 공부를 하고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하고 풍수나 관상공부를 하나 자신의 관상에 실망을 느끼게 되고 동학을 알게된다.그 후 동학에 입교하고 이름을 창수라고 개명했다그 때 일본인에 의해 우리 나라의 국모인 민비(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창암은 변장한 일본인을 보고 민비를 시해한 놈들이라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그 일본인을 죽이게 되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의 어머니까지 죽이며 마음껏 우리 나라를 짓밟고 있던 일본에 대한 창수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힘으로 우리민족을 누른 일본에 대한 통쾌한 복수였다고 생각이 된다.그래서 창수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감옥에서의 창수는 백성들은 글을 몰라서 나라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 나라가 잘 살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죄수들은 가르치는 것이었다. 감옥이 죄수들의 학교로 변한 것이다. 김구는 '나의 소원'이란 글 중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가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있는데, 그 문화는 바로 교육에서 나온다고 보고 있다. 그 뒤 김구는 '봉양 학교' '서명의숙 ''양산학교' 등에서 교육 활동을 통해 우리 민족을 일깨운다. 사상과 행동을 같이 하는 모습이 위대해 보인다.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 많은데 이렇게 자기의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 뒤 창수는 고종 황제에 의해 사형을 면하고, 김주경이란 사람의 도움으로 탈옥을 하게 된다. 그 뒤 전라도의 목포, 광주, 함평, 담양 등을 돌아다니셨는데, 내가 함평에서 슬쩍 보았던 그 집에서도 머무르셨다. 다음에 함평에 가게 되면 좀 더 자세히 그 집을 보면서 역사의 현장을 확인해보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목포에도 들리셨다고 했는데, 백범일지해서는 막연히 귀동냥으로 들었던 것으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가면서 열성적이었던 독립운동가이었고 , 효심 또한 지극한 사람이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을 뿐, 좀더 자세히는 알고있지 못했다. 그러나 백범일지란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면서 김구 선생의 화려한 활동을 알게 되었고, 김구 선생의 생활을 알 수 있게 되었다.백범일지는 우리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많이 담겨있다.백범은 우리 독립 운동사에 있어 독보적인 인물이다. 백범은 20살 무렵에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인을 죽인다. 그리고 포고문에 자기의 이름을 분명히 밝혀 길가에 붙인다. 그리고 피신도 하지 않고 집에 있다가 체포된다. 나라를 위한 정정당당한 일이니 비겁하게 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를 유린하고 국모마저 시해하는 일본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백범은 왜인을 죽이는 것으로 그 수치를 씻으려 했던 것이다.그런 정신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이어져 윤봉길, 이봉창 의사들과 함께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의거들을 일으킨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으로 하여금 일본 천황 저격을 시도하게 하였고,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하여 일본인 다수를 즉사하게 하거나 중상을 입힌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의거는 우리 민족의 자존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인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을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수많은 만행들을 생각할 때 백범의 이런 저항은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되어 희생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꽃다운 나이의 처녀들이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되었던가? 일제의 강권과 탄압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육신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우리 민족을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다고 볼 때, 백범의 저항은 우리 민족의 의기를 보여준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저항은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희망을 주었다.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우리가 일본에게 . 그런데도 이봉창은 동경에서 일본 천황을 저격하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 윤봉길 역시 일본군을 향해 폭탄을 던진다. 그들이 이런 의거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이 작용했겠지만 평소 백범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이봉창은 백범과 마지막 밤을 둘이 함께 자면서 백범이 자신에게 돈뭉치를 줄 때 눈물이 났다면서 어떻게 나를 믿고 거액의 돈을 주었느냐고 말한다. 그리고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다고 하며 백범에게 '영웅의 도량'을 가졌다고 말한다. 윤봉길 역시 일본군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배후를 말하라고 해도 끝내 묵비권을 행사한다. 이와 같은 행동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백범이 그들을 신의를 가지고 대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든다. 인간이 인간을 믿어줄 때 거기에는 또 다른 커다란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엄청난 힘을...광복 후 백범은 그들의 유가족들을 만나고, 일본에서 처형된 그들의 유해를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여 성대한 봉도 식을 거행하고, 효창공원에 안장한다. 란 책을 보면 이 때 백범은 그들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할 때 맨 처음 와서 대성통곡을 했고, 이 행사를 선두 지휘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백범의 인격을 알 수 있게 한다.당시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 그 눈물은 더없이 인간적이란 생각이 든다. 민족을 위해 죽음을 택한 인간을 위해 흘리는 진정한 눈물은 만인의 가슴을 흥건하게 적셨으리라. 그런 인간적인 면이 백범을 더욱 존경스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이런 일면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백범이 탈옥 후 방랑길에 올랐을 때 함평의 이진사의 육모정이란 곳에 들린 적이 있는데 그 때가 1898년경이다. 광복 후 백범이 삼남 지방을 순회한 것이 1946년경이니까 약 48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그러나 백범은 그것을 기억하고 이 진사 집을 묻는는 것이 덕목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은 그 어떤 것보다도 높고 강하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백범에게서 강하게 풍겨오는 것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의지다. 어떻게 보면 백범의 인생은 투옥과 방랑, 비참하고 숨막히는 피신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범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독립시키려는 의지는 더욱 굳건해져만 갔다.백범의 의지와 불타는 애국심을 윤봉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늙을수록 더욱 씩씩"했던 백범의 모습에서 애국충정의 불타는 투지를 엿볼 수 있다.대개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젊음의 기백이 사라지고 안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제 시대의 수많은 변절자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어야 할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다. 한때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이광수가 그렇고, 최남선, 서정주 역시 민족을 배신해 버렸다.그러나 백범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나라 사랑 정신으로 무장되어, 해방의 복음을 전한 윤봉길 의사조차 꿈에도 잊지 못할 존재가 된 것이다. 백범의 이런 굽힐 줄 모르는 투지와 의기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길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또한 백범의 교육에 대한 철학과 의지는 교편을 잡고 있는 나로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백범은 에서 우리 나라가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문화는 자신의 행복과 남의 행복을 가져 다 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문화는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런 의견은 백범의 정치 철학과 젊은 시절의 교육활동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백범은 왜인을 죽인 후 감옥에 갇혀있을 때 , 등의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여 사고의 폭을 넓힌다. 그리고 그 곳 감옥을 학교로 바꾸어 버린다. 상권에 보면 '우리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저마다 배우고 사람마다 가르치는 것'임을 깨닫고, 무지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