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본고는 燕岩 朴趾源(1737-1805)의 소설을 통해 그가 추구한 인간상을 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實學’이란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등 조선후기에 활약했던 학자들의 학풍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 민족의 사상적 변천과 발전을 검토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거론되고 논의될 수밖에 없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실학자들은 현실개선을 위한 연구를 선비의 중요한 임무라고 봄으로써 修身爲主의 성리학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의 사상계에 있어서 특이한 사상적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생애를 통해서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참다운 선비가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선비는 ‘교육받은 사람’을 의미하며, 그가 추구한 이상적 인간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서 교육은 다름 아닌 선비로서의 특성을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연암은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일 뿐이지 작위를 가진다고 해서 선비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하여 “다스리는 일”과 선비의 일을 구분하였으며, “선비의 실학은 農?工?商의 원리를 포함한다”)고 하여 선비의 일을 ‘실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의미상 종래의 학문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다.연암의 학문적 경향은 ‘實學’이외에도 ‘北學’ 또는 ‘利用後生學’이라고 불린다. ‘북학’이라는 명칭은 연암이 청의 발달된 문물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던 데서 비롯된 것이고, ‘이용후생학’이란 명칭은 단순히 農?工?商의 기술과 문물의 ‘도입’만을 주장하였던 것이 아니라 農?工?商의 기술과 원리들이 바로 ‘학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연암은 선비의 실학이 “ 農?工?商의 원리를 兼包한다” 고 말하였다. 즉 農?工?商의 원리 이외에도 선비의 학문의 대상이 더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릇 孔?孟이나 程?朱의 서적을 읽고 義理에 대해 강론하는 것은 治心과 修身의 방도이므로 이들은 물론 선비의 학문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였다.)연암은 ‘선비는 敬에 근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人本主義를 들 수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고 인간을 그 자체로서 중시하는 생각이며 일반적으로 인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려고 했듯이, 연암도 인간과 우주 만물 속에서 모두 率性의 도가 내재한다고 보고, 이 우주 만물 사이에 귀천의 차이가 없음을 역설하였으며, 이 모든 존재들을 동등한 귀한 삶의 공동체로 받아들였다. )권위주의적이며 차별적인 질서관과 인간관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연암은 인간의 내적 자연을 긍정하고, 빈부, 남녀, 귀천, 적서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하였다.인간은 물론 미물까지도 귀하고 선한 존재로 규정한 연암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존재이므로, 당시 사회에 뿌리박힌 빈부의 차별, 남녀의 차별, 귀천의 차별, 적서의 차별을 모두 철폐할 것을 제안하여 근대 지향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그의 선비관은 合理主義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도 모두 합리적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연암은 다른 사람을 돕는데도 도가 있어서 합리성 있게 도와야 한다고 했다. 성현들의 말과 행동을 익히는 형식의 도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성현들의 말과 행동 뒤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정신을 통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합리주의는 인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요소이다. 이 둘의 관계는 시계의 톱니바퀴와 같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세상의 利法이나 성현의 정신을 바르게 분석, 파악할 수 있는 합리주의가 없이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고려하는 인본주의의 실현이 불가하며 또한 참다운 인도적 입장이 아니고서는 다양하고 상충적인 현상들을 과연 어떻게 파악함이 참다운 이법이며 정신인지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암의 인본주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합리주의의 특성을 내포하고 있다.다음은 實用主義이다. 이 실용주의는 알고 있듯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오늘날 우리 보지 않으려거든 공장이 노릇이든 장사치 노릇이든 하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허생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가“당신은 밤낮으로 글 읽는다는 것이 겨우 ‘어찌할 수 있겠오’만을 배웠오 그려, 그래, 공장이 노릇도 하지 못하고 장사치 노릇도 하지 못한다면 도적질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떻소.”)하고 화를 낸다. 이는 연암이 당시의 전형적인 유학자에 대해 말하고자 한 바를 부인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내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형식적이고 무능한 양반에 대한 도전이며 비판이다. 즉,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력을 일깨워 준 것이다.이러한 아내의 비판으로 인해 허생이 선택한 것이 장사치의 모습니다. 변씨에게 만냥을 빌어 우선 과일을 독점하여 이득을 챙긴다. 여기서 과일이란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양반들이 제사를 지내는데 쓰는 과일이다. 따라서 이 역시 양반들의 허례허식을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제주도에 들어가서 말총을 모두 사들인다. 말총은 망건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망건은 양반들이 의복을 갖추어 입는데 필요한 것이다. 이 또한 양반들의 허례허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허생이 서민과 같이 상업을 하는 것은 당시 유학자들이 도학에만 몰입하여 허식만 차리고 현실의 생활과는 유리된 공론만 일삼으며 도덕군자인체 하는 유학자들에게 경각심을 고취시켜 주고자 하는 연암의 생각이 나타난다.이익을 남긴 것으로 허생은 이상국을 건설하고 흉년으로 굶는 사람들을 도와준다. 이는 선비란 배운 것을 남을 위해 써야 한다는 연암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연암은 허생의 상행위를 통해 당시 시대적 사조인 실학정신을 구체화시킨 것으로 종래 양반계급의 유학자들이 현실의 생활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서민들의 생산력에 빌붙어 먹고 살면서 그들의 위에 군림하려는 양반들의 생활을 비방한 것이다.맹자의 사상과 일치되는 先富後敎의 생각을 볼 수 있다. 도적들을 데리고 무인도에 이상국을 건설하게 되었을 때 허생은 도적떼들에을 잘 참되…… 밥 먹을 때엔……담배를 태울 적엔……”)즉 양반이 해야 할 행동들이 예외 없이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졌을 뿐 다른 사람들 혹은 인간 전체의 삶과는 어떻게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의 관점에서 다루어진 것은 찾아볼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農?工?商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農?工?商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農?工?商의 일을 도와주기는커녕 그들을 지배하고만 있던 당시의 양반들이 연암에게 ‘도적’으로 비쳤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3) 위선적 인간(虎叱)호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범과 북곽 선생, 동리자이다. 북곽선생은 위선적인 유학자의 대표라 할 수 있고 동리자는 거짓으로 수절하는 과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범은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데 범이 하는 말이 연암이 하고 싶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연암은 범과 세 창귀의 입을 빌어 만화적 내용으로 인간심리의 이중성에 대해 비판하였다.“범이 세 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육혼이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살되 그가 평소에 알던 친구들 이름을 자꾸만 불러댄다.”)이같이 간사한 말로 인간사회의 친구를 범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은 큰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해지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친구를 팔기까지 하는 인간을 비판하였다.또한,“저 동문에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의사’라 한답니다. 그는 입에 온갖 풀을 머금이서 살과 고기가 향기롭고, 사문에도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무당’이라 한답니다. 그는 온갖 귀신에게 아양부려 날마다 목욕 재계하여 고기가 깨끗하온즉 이 두 가지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잡수시죠.”)그러나 범의 말에 따르면 의사와 무당은 남의 목숨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끊는 사람으로 그 시대의 의사들은 의술의 잘못으로 인하여 죽은 사람들의 노여움이 뼈 속에 묻혀 있고, 무당은 사람을 속여 푸닥거리로 가난한 자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사람인데 이를 좋은 것처럼 떠들어대는 것은 보통관적 인식관심에 따라 각기 다양한 역사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특히 역사적 격변기에는 더욱 지식인의 역할과 관련해서 이러한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조선후기 문헌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는 “士”문제도 이러한 지식인의 역사적 기능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士”의 기능적 역할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燕巖이었다.燕巖의 士에 대한 생각은 그의 문집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原士?에서 집중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글 첫머리에서 “夫士下列農工, 上友王公, 以位則無等也, 以德則雅事也”라 하여 선비의 위치가 지배계층이나 피지배계층 어느 쪽과도 연대할 수 있음을 밝히면서, “士”가 구체적 역사상황 속에서 자기가 서야 할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자기의 역할과 임무를 다할 때 그 혜택이 골고루 미치고 공덕이 만세에 드리운다고 하였다. 그는 天子도 원래 士이며 그 역할(작위)이 天子일 뿐 그 몸은 士이다)라고 하여, 士의 본분과 역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士의 용례에 대해서,大夫를 士라 하는 것은 대부를 높이기 위해서이며, 君子를 士라 하는 것은 군자를 어질게 여겨서이며, 軍卒을 士라 하는 것은 수가 많고 사람마다 모두 다 士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法을 執行하는 사람을 士라 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天下에 공평함을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라고 설명하면서, 士를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연암은 ?放?閣外傳? 自序에서 선비는 하늘이 준 벼슬이고, 선비의 마음이 곧 “志”가 된다)고 하였고, ?兩班傳?에서는 士?農?工?商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士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士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士의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연암이 그의 한문소설에서 양반사대부계층의 허위와 무능을 풍자하고 있으나 위의 발언으로 볼 때 그는 결코 士大夫계층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士?農?工?商의 신분적 질서를 유지한
1. 서론淵泉 洪奭周는 18세기의 종반과 19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한 학자로서, 문학에 있어서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擬古文體와 小品體의 영향을 비판하면서, 唐宋의 문장을 모범으로 하여, 자기 시대의 영원한 가치를 가지는 고전적인 글을 창출할 것을 노력하였다. 학문과 문학에 대한 이 같은 입장은 곧 유가의 義理를 문학을 통해 실현하고 전파한다는 古文精神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시대의 참된 가치관을 담고서 세상의 교화를 위해 소용되는 바가 있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것은 實事求是의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학문의 실제적 효용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형식에 치우친 공리공담이 아닌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학문을 지향하였다.본고는 연천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 후 鶴岡散筆 의 ?實事求是說?을 위주로 하여 실학적 사유에 바탕한 연천의 학문관을 고찰해보도록 하겠다.2. 생애와 시대적 배경연천의 문학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생애 및 시대적 배경에 대해 알아야 한다. 어느 학문이나 그렇듯이 학문적 인식을 제대로 하려면 여러 가지 주변 요인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이 타고난 지적 능력이나 호기심 등의 기질이 중요하겠지만, 그 기질을 잘 키워 나갈 수 있는 외부환경의 뒷받침이 없다면 그 타고난 능력이나 재질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개인의 기질을 내부적 요인이라 한다면 학문 계통의 문제와 사회적 활동의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연천의 경우 선천적인 학문에 대한 재능과 학문적 배경으로는 京畿學人이라는 성리학적 학통과 家學의 학문적 전통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 또 사회적 활동으로는 규장각에서 抄啓文臣으로서의 근무 등 여러 관직을 단계적으로 역임하면서 얻은 지식, 그리고 두 차례의 燕行 경험에서 그의 학문정신이 형성되었다.가. 생애淵泉 洪奭周의 자는 成伯, 호는 淵泉이며, 시호는 文簡이고, 본관은 경북 안동의 풍산이다. 당시 대대로 벼슬을 한 노론계의 명시문을 구술하시고 항상 고인의 격언과 가행을 가르치셨다.)성장기의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모친은 당시 유교적인 규범이 철저하게 체계화된 전형적인 사대부의 婦女로 생활면이나 교육면에서 연천의 학문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연천은 이런 훌륭한 모친의 영향으로 자연히 독서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생 洪顯周는 연천이 독서하는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매일 책을 읽을 때에 엄격한 계획을 세워서 몇 시에는 어떤 책을 읽고, 몇 시에는 어떤 글을 보는가에서, 세수하고, 밥 먹고, 쉬는 시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켰다.)연천은 닥치는 대로 많이 읽는 방법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계획을 세워서 체계적인 독서가 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이러한 습관을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이 병이 나자 자기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두 동생 또한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이들은 어려서부터 연천의 지도를 받아 성장 후에도 서로 학문으로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따라서 그의 성장기는 家學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습득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任宦期(1795~1836)는 연천의 나이 22세(서기1795년)에 式年試에 급제하여 관리로 선발된 후, 규장각 抄啓文臣으로 발탁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쳐, 병조참판·충청도관찰사·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고 홍문관·규장각 文翰을 비롯해 내외직을 거치고 좌의정에 올랐다가 南膺中의 獄事)에 연루되어 은퇴할 때까지 시기를 말한다. 40여년간의 벼슬생활에서 연천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자신의 경륜을 펼쳤다. 특히 19세기 전반에 각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당시 백성들의 실상을 직접 보고 많은 구제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30세에 사헌부 掌令으로 있을 때, 書狀官의 자격으로 謝恩使에 들어 청나라를 4개월 동안 여행하였고, 58세에 병조판서로 있을 때 正使의 자격으로 10개월 정도 북경에 머물렀다. 이런 힘썼는데, 이 때에 연천의 문학사상을 알 수 있는 鶴岡散筆 등을 저술하였다.나. 시대적 배경조선후기는 明末淸初의 小品體의 영향을 받은 결과 사회의 변화에 대한 관심의 확대를 반영한 다양한 문체들이 나타났다. 특히 奇人이나 藝能人의 삶을 소재로 한 傳이 많이 지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정조는 문체반정이라는 복고적 정책을 통하여 문인들의 문학활동을 관각문학의 질서 속에 편입시키고 규격화하려고 하였다.) 이는 직접적으로 서학 세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正學을 밝히려는 목적이었지만, 좀 더 좁혀서 말하자면 주자학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단을 징계하고자 한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정조의 文體純正策과 관련하여 박지원에게 순정한 고문을 제작하도록 명한 일도 있다.박지원은 당시의 문풍을 크게 ‘法古主義’와 ‘創新主義’로 파악하였다.) 전자는 시대에 유행했던 擬古主義를 배우려는 문학이고, 후자는 明末淸初의 稗官小品의 반전통적 문학이다. 박지원은 이 두 가지 중에도 한 쪽도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法古者는 옛 것에 몰두하는 병폐가 있어 새로움이 없는 것이 단점이고, 創新者는 ‘怪亂淫癖’한 것이 약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둘을 다 통합하는 논리가 필요하게 되어 ‘옛 것을 본받고서 변화를 안다’는 ‘法古而知變’을 주장하게 된다. 연천은 臺山 金邁淳과 함께 박지원과 가까운 후대에까지 살았지만, 정조의 문체반정의 여파와 청대 복고풍의 영향으로 앞 시대의 산문정신이 조금은 위축된 시기에 살았다. 연천과 대산의 활동 시기는 오히려 정체성을 띠어 ‘文道合一’의 載道的인 문학관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천은 당시의 학문적 상황을 잘 파악하고 문학과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려는 절충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대정신과 관련하여 기존의 성리학과 청의 훈고학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이것을 우리나라에 맞게 수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것은 ‘實事’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정신이 연천의 삶을 지배했고 그의 문학이론 특히 산문에 대한 관심도 실사정신의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보겠다.3. 개념 또한 是非의 實(옳음)과 利害의 實(재화,경제성)을 함께 추구하는 것으로 是非의 實 즉 山林(自然)과 利害의 實 즉 廟堂(名敎)이 서로 상보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추구한 실용은 인간의 인식상에서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객관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의 실사구시에 대한 견해는 이학적 의리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 옳음(是)을 구하면 될 뿐이다. 후세의 학문을 하려는 사람들 또한 스스로 그 是를 구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用에 바탕하지 않은 것은 空言이지 實事가 아니다. 財貨와 衣食의 부야에 종사하는 사람도 모두 그 實을 구했다고 하지만 거기서 구한 것은 利害의 實이지 是非의 實은 아니다. 그 일을 함에 반드시 實에 힘쓰게 하고(務實) 實에 힘쓰매 반드시 是를 구하면(求是) 즉 학문을 어찌 이루지 못하며 다스림을 어찌 옛날과 같이 못하겠는가?”)이와 같이 연천이 말하는 실학은 입으로만 말하는 실학이 아니다. 학문하는 이들이 是를 구하려면 반드시 실용에 의거해야 실사가 된다고 했으며, 경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實을 구한다고 한 것은 모두 利害의 實이지 是非의 實이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실질적이면서도 의리에 맞는 務實과 求是할 것을 추구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실학적 방법론으로서의 실사구시는 ‘일에는 반드시 實에 힘쓰고(務實), 實에는 반드시 是를 구하는 것(求是)’ 즉 ‘事必務實 實必求是’로 특징지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특히 그의 실사구시에 대한 이해는 事와 實 그리고 是라는 일련의 현실적인 요소들이 각기 이질적으로 관련 맺을 수 잇음을 견제하면서 유기적 관계 속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학문적 공언이나, 이해득실의 경영에서 利만을 추구하는 것 등에 대한 연천의 비판은 오늘 우리의 학문이나 경제현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여전히 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즉, 연천이 생각하는 實用이란 孝弟忠愼篤敬을 근본으로 하여 크게는 藝樂射御이며 작게는 灑掃應對로서 실생활에 상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응용하여 편의를 도모할 수 있는 성격의 실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성리학은 기존의 원시유학을 철학적 차원에서 근거 지은 학문으로서, 소위 유학에서 하고자 하는 목적은 ‘修己治人’이다. 성리학적 논의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空理空談과 같은 知的論議로 흐를 가능성이 많고, 실제로 조선의 성리학적 상황이 연천 직전 또는 그의 당대까지도 이 소모적인 논의에 집착했다. 아마도 그가 원시유학에 복귀하게 된 원인은 아마도 이에 대한 반성으로 구체적인 행위의 구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하고 잇는 원시유학의 經傳, 즉, 論語, 孟子 등을 실용적인 학문의 모델로서 설정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또한 연천이 지향하는 학문의 구체적인 방법론이 실학자들의 것과 일치하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성리학적인 주요 주제인 理氣心性論의 논의를 비실용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고, 실천적인 성격을 띤 원시유학으로 지향했던 그의 학문의 방법론은 그 근원적인 면에서 실학자들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연천은 실학자들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연천이 여타 실학자들처럼 사회 개혁적인 성격을 띠지 못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그의 學統, 價文, 宦路 등과의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연천은 당시에 권력을 독점한 老論에 속했으며, 그의 조부 孝安公(洪樂性)이 영의정을 지냈으며, 자신도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개혁에 대한 그의 입지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연천은 학문에 있어서 用心을 중히 여겼으며, 고증학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지만 그가 고증학 자체를 부정했다기보다는 그의 방법론에 대한 부정이었으며, 주목할만한 사실은 연천이 문헌에 대한
Ⅰ. 서론고전 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며 이것을 통하여 현대의 삶의 부리인 과거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 현실에서 고전 문학은 학습자들에게 어렵고 지루한 단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흔하다.그것은 학습자들이 과거의 삶에 대한 이해부족 또 고어해석에 대한 어려움으로 고전을 부담스러워하고 그간의 교육 방식 역시 주입식 암기식이어서 고전문학이 나오면 외울 것이 많은 단원이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이러한 고전소설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식을 구성주의 교육이론에서 약간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구성주의 교육이론 그 자체가 고전 문학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처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조금은 제시해 준다.구성주의 학습이론은 지식이 외부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기본 전제를 부정하고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학습자 내부에서 주관적으로 구성된다고 보는 학습이론이다. 구성주의 학습이론은 학습에 있어 개개인의 개인차를 인정하며 같은 내용이라도 학습자마다 다르게 그 의미를 구성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학습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지식을 학습자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주관적인 의미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다.그러므로 구성주의 학습이론에 따르면 실제 상황과 똑같은 학습 상황이 강조되며 다양한 매체를 통한 경험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학습자에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을 강조하게 되고 이것은 협동학습의 강조와 다양한 교수 매체 사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양한 교수매체의 사용은 지금까지의 학습 방법과는 다른 통합적 지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제7차 교육과정은 이러한 구성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고전 소설에서도 이러한 교육과정에 따른 새로운 지도방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먼저 고전 소설 교육의 현황과 대안을 생각해 본 후에 실제 수업 적용에 앞서 구성주의 학습 이론을 살고전 문학 작품의 어휘와 문장을 아는 것은 고전 소설 교육의 둘째, 셋째 목표를 달성 시키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Ⅲ. 고전 소설 교육의 현황과 대안1. 고전 소설 교육의 현황문학 작품은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문학작품이 학습자에게 직접 수용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실현되고, 그 작용이 확인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문학작품을 대하는 독자로서 학습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모든 과정에서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학습자의 능동적인 참여만이 살아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고전소설 교육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내용의 화석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내용자체가 화석화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학습자의 지각이 텍스트를 하나의 지식항목으로 대상화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낯선 언어상의 해독이나 장르적 특징, 내용의 이해와 파악의 곤란 등은 이를 모두 지식화해 암기하게 만든다.특히 문학 교육에 있어서 고전문학은 현대문학과는 달리 생활양식이나 사회구조, 세계관, 가치관, 문학적 관습 등이 현저하게 다른 시대의 산물들이다. 따라서 고전문학의 이해 및 감상을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원전 해독과 주석, 시대 배경 등 많은 지식과 정보를 요구하게 된다.결국 고전 소설 교육내용으로써의 개별 작품에 내포되어 있는 많은 양의 배경지식과 정보에 대한 교육보다는 빠른 시간 내에 학습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어, 학습 내용을 요약하고 단순 암기하여 요점만 학습자의 지식항목으로 굳어져 화석화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이러한 내용적 측면의 문제 이외에도 교육현장에서의 고전 소설 교육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고전 소설 교육이 입시 위주의 교육을 중심으로 행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학교 교육이 보통 교육임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가 입시 학원화 되었으며, 고전 소설 교육도 역시 입시 준비의 일부가 학습을 위한 풍부한 자료와 활동 중심의 교육 과정 구성이 중요시되어야 한다. 즉 교사와 학습자가 학습의 과정에서 흥미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협력적 구조가 이루어지고 교사가 지식의 원천으로서가 아닌, 다양한 정보의 통로를 제공해주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구성주의적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구성주의에서 제안하는 학습 환경은 학습자에게 다양한 시각과 해석의 여지를 제공할 수 있고, 맥락적이며 학습자의 경험에 기초한 활동이 지원될 수 있는 것이다.셋째, 학습자의 구성적 관점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업의 자원으로 활용한다. 이것은 학습자의 학습의 과정을 이해한다는 뜻이다.구성주의에서 중시되는 것은 학습자 개개인의 경험과 그것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성주의에서는 학습자에게 다양한 경험적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교수매체와 학습유형 계발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또한 개인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으므로 협동학습이 강조된다.학습자 중심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매체사용이 필요하다. 구성주의는 학습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장하면서 협동학습과 다양한 교수 매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학습자의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으며 실생활의 맥락에 적용할 수 있는 교수 매체의 힘이 요구된다. 따라서 학습자에게 단순히 시각적 매체만이 아니라 다양한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여러 매체의 사용이 권장된다.현대 사회의 학습자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환경은 방송과 통신이다. 이러한 매체를 교사들이 교육 환경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게 하는데 구성주의 이론은 그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학습자들에게 친숙하고 흥미로우면서도 학습 환경에서 많이 제외되었던 것이 이 방송과 통신 매체이다. 이러한 매체를 교육적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구성주의가 교육에 시사하는 바는 학습자 중심의 교육 환경이다. 실생활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 해결과정이 교육인 것이다. 학습자 개개인의 경험의 차이를 인정하고를 생각하지 못한다. 학습자들의 스키마 속에 있는 가정은 현대식의 핵가족이다.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가 낳은 자식이 있다는 것을 잘 이해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단순히 가부장적 가족제도라고 추상적으로 지도해서는 허균의 혁신적인 사상도 조선시대의 모순된 가족제도도 실감하지 못하고 다만 아동기에 읽었던 홍길동전을 낯선 단어로 다시 배운다는 생각만을 가지게 된다.그러므로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스키마 형성 없이 고전 소설을 지도하는 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사회적 분위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학생들에게 풍부한 영상매체 스키마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수업방안을 개발해야 한다. 예를 들면 고전 소설 작품을 배우고 그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때 ‘이 인물에 어울리는 배우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던가 작품 속 인물의 결정에 대핸 조별 토론을 해보는 등의 다양한 접근법이 필요하다.3) 적극적인 매체 이용구성주의 교육환경에서 교사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안내자요 도우미이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의 특성을 살펴 그들이 어려워하는 점을 안내해주면 된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습자가 소설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자신의 선행지식과 관련해서 재구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문학 교사는 학습자들이 즐겁게 소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 역할이 강조된다. 특히 고전 소설 교육에 있어서는 학습자들이 낯설게 느끼기 쉬운 고전 소설을 재미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문학교사는 심화된 문학의 이론을 가지고 작품의 수용을 매개하며, 작품의 수용과 전달을 위해 문학의 교육 과정 운용에 자발적인 참여를 하며, 문학의 저변 확대라는 노력도 한다. 문학 교사는 문학적 문화의 고양을 위한 투철한 자세가 선행되어야 하고 작품을 수용하고 전달할 수 있는 문학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실천하여 개방적이고 자율적으로 그 교과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교사는 학습자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익숙한 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학습기 보다는 ‘이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다면 어떤 배우가 어울릴 것인가’ 등의 질문은 학습자들에게 자신들이 익숙한 스키마를 자연스럽게 소설 감상으로 이끌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성격 파악과 재창조 경험이 가능하다.스키마의 활성화는 이미 읽기 교육에서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스키마를 효과적으로 활성화하려면 학습자의 스키마를 진단하고 인출하여 활성화시키는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 부족한 스키마를 채워주는 것으로 스키마의 보강 단계를 첨가할 수 있으며 읽기 전 단계에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교사는 학습자의 스키마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적절한 질문 등을 통하여 학습자의 스키마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교사는 적절한 내용의 학습 활동지나 질문지를 제시해 주어야 구성주의 수업을 능동적으로 이끌 수 있다.Ⅳ. 구성주의 학습이론과 실제 수업 적용 방안1. 구성주의 학습이론인지주의는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심리학적인 접근인데 비해 구성주의는 지식이란 무엇이며 지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관심을 갖는 철학적 접근이다. 구성주의에서는 지식이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며 학습은 능동적으로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구성주의에서는 학습자의 의미 구성 과정을 중시하므로 수업에 있어 학습자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게 된다. 외부의 자극을 주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수업 환경이 필요하다.또한 학습은 의미있는 경험이며 경험의 의미는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학습은 실세계의 맥락을 반영해야 하며(Duffy & Jonassen, 1991; Winn, 1993) 맥락은 학습과 관련된 지식 기반에 통합되는 것이며 정보를 실제의 맥락과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학습에 있어서 개개인의 경험을 교류할 수 있는 협동 학습이 강조되며 실생활의 맥락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교사는 학습자가 의미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 촉진자 또는 코치의 역할을 하며 의미를 구성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있다.
以詩爲詩, 以文爲詩1. 唐詩와 宋詩의 비교송시(宋詩)는 흔히 중국시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당대의 시(唐詩)와 많이 비교 한다.당대(唐代) 에는 평화롭고 번영했던 성세를 이루었는데 오래 지속된 풍요로움 안에서 문학, 음악 등 고도의 문화가 발달된다. 그중 당시는 그야말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성당의 시는 당시 발달의 최고 경지로서 많은 이백, 두보, 왕유, 맹호연등 뛰어난 시인들이 나와 많은 시를 남겼다. 당시의 특징을 살펴보자면 첫째, 당시는 웅혼한 맛이 있다. 둘째, 순수한 서정을 중심으로 한다. 셋째, 시로 시를 지은 순수한 시가이다. 넷째, 미문(美文)과 묘문(妙文)을 추구하여 시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유미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당대에 이어 송대(宋代) 역시 시가 문학이 크게 흥행하였다. 송시는 우선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는데, 송대의 뛰어난 시인으로는 소식, 구양수, 왕안석, 황정견등이 있는데 시인들이 시작(詩作)에 게을리 하지 않아 매우 많은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송시는 당시를 잇고 또 새로운 변화를 더하여 당시에 비해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송시는 섬세하다. 둘째,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설리적(說理的), 철리적(哲理的)이며, 산문적 성격이 강하고 시풍이 평담하다. 셋째, 산문으로 시를 지은 산문화된 시로 내용과 형식에서 그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넷째, 작가의 개인 생활과 더욱 밀착된 내용을 담고 있다. 송대 시인들은 특별한 감정이나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상생활을 통해 보고 느끼는 조그만 일들까지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노래했다. 미문이나 묘문을 피하면서 서술적이고 산문적인 문장으로 哲理적인 시를 쓰다 보니 문장이 평담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본 글에서는 당의 대표시인인 이백(李白)의 시와 송의 대표시인인 소식(蘇軾)의 시 비교를 통해 위에서 설명한 당시와 송시의 차이점을 살펴보겠다.2. 이백의 「望廬山瀑布」와 소식의 「題西林壁」이백(701-762)과 소식(1037-1101)은 唐宋 양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각각의 시풍에 대한 비교는 唐宋 시풍의 비교라는 의미에서 의의가 있다. 두 시인의 여러 시중에서 廬山을 주제로 쓴 ?望廬山瀑布?와 ?題西林壁?을 비교분석해봄으로써 唐과 宋의 두 시풍을 분석해보겠다. 먼저 李白의 ?望廬山瀑布?를 살펴보자.望廬山瀑布 - 李白여산폭포를 바라보며 - 이백日照香爐生紫烟햇살 비친 향로봉에 보라 연기 일고遙看瀑布掛長川멀리 폭포는 냇물 걸어놓은 듯.飛流直下三千尺날아 흘러 내려 곧추 삼천척이니疑是銀河落九天하늘에서 은하가 떨어진 것인가.이시는 전체적으로 여산폭포의 仙境을 순수하게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다. 향로봉에서 폭포가 떨어지며 일어난 물보라를 紫煙이라 수식하였으며, 멀리 본 폭포 긴 냇물 같았는데 가까이가보니 三千尺이나 되니 놀라울 뿐이다. 아니, 하늘에 있어야할 은하수가 이 세상에 떨어져 펼쳐지고 있다. 이백은 폭포의 웅혼함을 표현하기 위해 紫煙, 掛長川, 三千尺, 銀河 등과 같은 시어와 ‘疑是銀河落九天’과 같은 美句로 순수한 서정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사이에 哲理가 들어갈 틈 없이 자연의 웅혼함과 서정성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소식의 을 살펴보자.題西林壁 - 蘇軾서림사의 벽에 쓰다 - 소식橫看成嶺側成峰빗겨 보면 고개로 보이고 측면에서 보면 봉우리 되니遠近高低各不同멀리 가까이 높게 낮게 본 시점에 따라 제각기 다르구나.不識廬山眞面目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只緣身在此山中단지 내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일세.이 시 또한 廬山을 소재로 쓴 시이다. 소식은 여산이 보는 시점에 따라 다름을 이야기하면서 廬山의 진면목을 알기 힘든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廬山의 진면목을 자신이 알고 있음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다른 시점으로 보면 廬山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山을 자연 혹은 세상으로 대치시켜보더라도 시점이 연장되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자연의 서정이 아닌 자연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哲理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李白이 앞의 시에서 말한 ‘疑是銀河落九天‘ 등과 같은 화려한 시어보다는 ’只緣身在此山中‘와 같이 산문 문장과 비슷한 평담한 시구를 사용하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다시 유학으로!’-한유의 배불의식 고찰(原道를 중심으로)-1. 들어가며불교는 한말(漢末) 중국에 도입된 이래 유가의 도통사상과 융합하거나 혹은 대립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위진(魏晉) 이후 급속히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제왕(帝王), 중신(重臣)을 위시한 사회상부계층의 불교 신봉은 정통 유가사상에 근거한 통치기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사상적 일대 변혁을 야기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때로 사원경제의 이상비대로 인한 경제적 피폐, 사문(沙門)의 증가로 말미암은 부역, 병역의 인력 감소 그에 따른 극심한 민생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한유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봉건 전제왕조의 권의에 부단히 도전하고 심지어 최고 통치자의 폐해라고 판단한 부분에서조차 과감한 척결을 간언하였다. 그 중에 한유의 사상을 가장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바로 이다. 앞으로 한유의 생애를 살펴본 후 를 주로 하여 한유의 배불의식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韓愈의 생애한유(韓愈)〔768 ~ 824〕는 자가 퇴지(退之)이며, 등주(鄧州) 남양(南陽)〔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수무현(修武縣)〕사람이다. 후에 조상이 창려군(昌黎郡)〔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서수현(徐水縣) 서쪽〕으로 이주해 살았으므로 그래서 스스로 한창려(韓昌黎)라고도 불렀다. 그는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歷) 3년(768)에 장안(長安)에서 태어나 목종(穆宗) 장경(長慶) 4년(824)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유는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어렵게 독학하여 나이 25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했다. 29세에 선무절도사(先武節度使)의 하급관리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후에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 ?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폄적(貶謫)을 당하기도 했다.한유는 일생동안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는 유종원(柳宗元)과 더불어 고문운동을 적극 제창하고, ‘문이재도(文以載道)’ 즉 문장이 선진양한(先秦兩漢)의 산문처럼 내용이 있고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순히 형식만을 추구하고 내용이 없는 육조(六朝)이래의 변문(騈文)의 그늘에서 벗어나 확고한 자리를 확립하게 되었고, 그래서 한유는 유종원과 더불어 후인들에 의해 의 반열에 올라 문단의 추앙을 받았다. 한유의 저서는 모두 《창려선생문집(昌黎先生文集》에 수록되어 있다.3. 에 나타난 배불의식는 한유의 사상을 가장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글이다. 한유는 유가 부흥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일생 동안 그에 힘썼는데, 이 글은 바로 그가 유가 부흥의 기치를 높이 올린 대표작이다.그는 유가의 도가 전승되지 못하고 끊긴 이유를 말하면서 끊어졌던 도를 다시 이어야 할 것을 핵심으로 하는 도통설(道統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도가나 불가의 것과 다르다. 요(堯)는 그것을 순(舜)에게 전했고, 순(舜)은 우(禹)에게 전했으며, 우(禹)는 탕(湯)에게 전하고 탕(湯)은 문(文)?무(武)?주공(周公)에게 전하였고 문(文)?무(武)?주공(周公)은 공자(孔子)에게 전했는데 공자(孔子)가 맹자(孟子)에게 전했다”고 하여 요순(堯舜)에서 맹자(孟子)에 이르는 유가 정통의 맥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맹자(孟子) 이후에 그 도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 뒤 다시 그 도를 복구함으로써 유가의 정통적 입장을 확인하고 실현해야 할 것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것은 배불 의식의 전제가 되는 항목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한유의 배불은 유가의 입장을 다시 강조하고 실현하기 위한 의도에서 진행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다음엔 구체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도의 내용에 대한 문제점을 유가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부분이다. 우선 유가에서 대대로 전승하였던 도의 핵심은 인의를 강조하는 도덕관이다. 이것은 경전에 잘 드러나 있으며 이 논리에 따르면 사회가 질서 있게 운용될 수 있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조정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불교는 미신적 성향이 짙어서 백성들이 일상생활을 무시하고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다고 비판하였다. 사회의 정상적 생활과 생산에 무익한 논리라는 관점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사회분업의 측면에서도 언급되었다.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은 적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은 전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비율로 불어나서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생산과 직접 노동을 경시하는 불교적 의식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한유(韓愈)의 주장이다.또 인륜을 무시하는 불교의 관점은 사람의 관계를 해체한 것이고 이는 사람이 풀어가야 할 현실사회의 문제에 무력한 관점임을 지적하였다. 불교에서는 “군신 관계를 버리고 부자 관계를 제거하며 서로 길러주는 도리를 금지함으로써 청정 적멸의 경지를 구한다”고 하면서 이런 생각이 유행할 수 있었던 것도 요순으로부터 전해진 도가 맹자 이후에 단절 된 것이 그 원인이라 하였다. 그래서 大學 의 팔조목에서 正心과 誠意는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임에 반해 불교에서 마음을 다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천하 국가를 도외시하고 그 인륜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식이 그 부모를 부정하고 신하가 군주를 부정하며 백성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을 초래하도록 하는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교의 입장은 국가 체제의 존립을 흔드는 관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에서는 역대 제왕이 불교를 신봉함으로써 국가의 멸망을 초래했던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위와 같은 배불 의식에 기초하여 한유는 유학의 선양을 주장하고자 했다. 한유가 강조한 유학의 형태는 우선 유학의 기본관점에 대한 문제이다. 그는 유학의 기본 이념은 인의라고 정리하고 그것의 실천은 박애의 실행으로 파악했다. 박애를 실천하는 장은 인간의 일상 안에서임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출세간적 경향과 대비하여 설명하였다.그리고 유가의 실천성을 강조하기 위해 大學 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방법을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높이는 동시에 요순으로부터 맹자에 이르는 도통을 제시하면서 유가 정통사상의 재정립을 의도하였던 것이다.본편은 구성이 크고 잘 정비되었으며, 적당한 문답으로 문장의 단조로움을 피하며 힘찬 기세를 잘 살렸다. 남달리 파격적인 서술도 적지 않게 보인다. 즉, 같은 글자를 한 문장 안에서 여러 차례 중복하여 사용하였는가 하면, 품사를 광범위하게 변화시켜 활용하였고, 여러 곳에서 과감한 생략을 시도하였다. 그의 문장의 괴기(怪奇)한 풍격이 엿보이는 부분이다.본편은 작자가 38세 때인 정원(貞元) 21년(805)에 쓴 것이다. 원(原)은 의론문의 표제에 사용되는데, ‘근원을 탐구하다’의 의미이다. 한유는 같은 시기에 본편 외에 , ,, 등 다섯 편의 원(原)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