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I. 부르크하르트는 누구인가?1. 부르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한 고찰2. 19세기 유럽3. 그가 바라 본 유럽II.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적 르네상스관 고찰1.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관2.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1) 고전?고대의 부활(2) 인간적 개성의 발견(3) 현세성의 발전(4) 근대국가의 기원(5) 중세관3. 계승과 발전III. 부르크하르트의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1. 부르크하르트의 한계(1) 주제와 내용의 한계, 부르크하르트의 사상과 이념의 한계(2) 부르크하르트의 예술사학의 한계(3) 특정영역의 선호가 가져오는 부작용2.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한계와 비판(1) 부르크하르트 적 르네상스관의 형성(2) 부르크하르트 적 르네상스관에 대한 비판3. 부르크하르트 관의 재 반격I. 부르크하르트는 누구인가?부르크하르트(Jacob Christoph Burckhardt)는 19세기 스위스에서 태어난 독일의 역사가로서, 소위 랑케의 실증사학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독일의 주류 정치사 중심의 역사를 탈피하여 본격적인 문화사 체계를 정립한 문화사가이다.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부르크하르트 문화사관의 특징과 배경, 문화사적 르네상스 개념에 관하여 고찰하기 전에 그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19세기 유럽 그리고 그가 바라본 19세기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1. 부르크하르트의 생애에 대한 고찰한 인간의 사상은 그의 인생의 역사적 환경에 대한 고뇌와 사고의 산물이다. 부르크하르트의 사상의 형성 또한 그 예외는 아니어서, 이는 그자신의 학문적 동기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배경, 그리고 유럽의 시대적 배경에 기인된 것이기도 하다.부르크하르트는 1818년 스위스의 국제적 문화 도시 바젤(Bazzel)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바젤은 중세 이래의 유럽 인쇄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급진적 사상가들의 도피처인 동시에 이들의 사상이 유럽에 전파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의 유년기는 매우 유복한 것이었으나, 12세 무렵 모친과 사별하고, 가문의 몰락을 경험하였다. 아마도, 부르크하르트 특유의 현두지 못하였고 1839년 벨기에만 독립을 성취하였다. 독일에서는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몇몇 군주, 특히 작센과 하노버의 군주는 한결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별 다른 운동이 없었다.1848년 혁명은 1830년의 혁명과는 달리 산업 혁명의 충격파를 직접 받은 급진적인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먼저 파리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그것은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1848년 2월 말 바리케이드를 쌓은 시민들은 시가전을 벌였고 2일간의 폭동 후 파리시 정부 및 의회를 점령하였다. 2월 24일 공화제 정부가 들어섰고 보통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연말에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월에 이 소식이 오스트리아 수도 민에 전해지자 폭동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프로이센에서도 3월 18일 수도 베를린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국왕은 라인 지방의 상업 부르주아지인 캄프하우젠의 자유주의 내각을 만들고, 헌법 제정과 의회 소집을 약속해야만 하였다. 동시에 독일 민족의 통일 운동도 고조되었으며 5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의호가 성립되고 독일 전국에서 대표가 모여, 다가오는 통일 독일의 헌법 제정에 대하여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구체적인 독일 통일 정책에 대하여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는데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하려는 대(大)독일주의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민족만의 나라를 만들려는 소(小)독일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협의를 거듭한 결과 1849년 3월 의회는 민주적인 독입 헌법을 만들고,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할 것을 의결하여, 의회의 대표가 베를린으로 달려가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독일 황제의 관(冠)을 바쳤다. 그러나 원래 정통주의 사상을 가졌던 왕은 국민의 손으로부터 제왕의 관을 받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 오스트리아의 체면을 생각하여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통일의 시도는 실패하고, 국여기서는 부르크하르트 문화사관의 특징과 배경, 문화사적 르네상스 개념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1. 부르크하르트의 문화사관부르크하르트는 자신이 살던 19세기를 현대의 위기로 인식하였다. 그는, 역사의 원동력을 문화, 종교, 국가권력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19세기의 근대화는 혁명과 산업화 그리고 비대해져 가는 국가권력으로 인한 서구문명의 파괴과정이었다. 그는, 국가권력의 전횡은 지성 교양인이 주도하는 문화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19세기 유럽과 같은 암울한 시대상을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혼란한 상황에서 보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혼란상 속에서도 이탈리아가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던 점을 주목하였고, 이에 시대적 의기의 극복으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권력을 보조하는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술을 배격하였다.)19세기 독일의 역사서술에서 문화사는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문화사가 어느 정도 확산 되었다 해도 전문적인 역사 연구의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사와 견줄 수가 없었다. 부르크하르트는 20세기 문화사 서술의 전형적인 틀을 제시한 최초의 역사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그는, 문명의 비정치적 국면으로 역사 연구 분야를 넓히면서, 자연의 영향, 경제적 요인, 사상과 이념의 변화, 과학과 예술, 종교와 철학, 문학과 법, 생활의 본질적 조건의 변천, 대중의 사고와 행동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역사이해를 추구하였다.)부르크하르트가 제시한 문화사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적 형성물이나 경향의 횡적인 고찰을 통한 당시대의 전형적인 문화적 특성의 파악을 통한 시대정신의 발견에 있었는데, 이는 일련의 병행적 토론에 의한 다양한 시각에서 비롯되는 통찰력과 직관력에 의하여 핵심적 문제의 본질적 성격에 접근하는 주제중심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역사적 사건들은 일련의 연속성이 아닌 정적인 다양한 양상의 종합으로 다루어지며, 추출된 전형적인 문화유형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단위로 간주된다.)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3) 현세성의 발전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적 개성에의 자각은 인문학 연구의 심화?이슬람교의 유입?고대철학의 부활로 인하여, 중세적 종교관을 극복하고, 현재 중심적 사고와 세속적 명예에 대한 강한 집념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중세에도 현세성의 긍정은 추구되었으나, 교회 교리상의 제약으로 인해 소극적 행위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사람들의 현세적 관심의 표출은 더욱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현세적 관심의 발전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 신앙적 무관심으로도 확대되었다.이전의 연구에서, 르네상스 특유의 현세성은 종종 신앙심과 대립되는 요소로 여겨졌고, 휴머니스트들은 무신론자로 오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두 요소간의 대립성을 지양하고 조화적인 모습을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이탈리아에서의 종교와 현세적 주관성의 결합은 생활의 일부였고, 이에 신앙적 무관심에 가까운 합리주의가 확산되었을 뿐이지, 휴머니스트들이 본질적으로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보았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민들에게 있어서 정치, 경제적 변동에의 관심은 신의 문제 보다 사실상 더욱 중요시 되었다.)(4) 근대국가의 기원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발흥의 배경의 일단으로서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독재정부의 불법성과 각 공화국간의 파당적 대립이 새로운 형태의 개인, 즉, 자기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이를 발휘하여 야망을 추구하며, 감상적?전통적 기준에 의하여 제약받지 않는 사람들을 출현시켰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은, 타산성과 냉정함은 군주의 외교?정치적 성향에도 반영되었고, 이에 개인들의 창의적 자유를 고려하지 않는 대중지배에 대한 도구로서 근대국가의 기원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부르크하르트는 이와 같이 군주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인간적 개성과 타산성의 발휘와 이로 인해 형성된 전제적 정치 상황을 하나의 예술품으로서의 국가?근대국가의 출발점으로 보았던 것이다.(5) 중세관부르크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있어서, 중세는 일반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듯하나, 아의 피렌체를 영원한 ‘정신적 교합 장소’로 이상화 하면서 이들 소도시국가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자신의 필생의 업으로 간주했다. 그 심정이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어쨌든 자기 학문 구성의 궁극적인 목표를 과거의 찬란했던 전통에 맞추는 행위는 자칫 복고적 또는 반동적 보수주의라는 협소하고 위험한 정치이념의 틀을 생산해내고 그 안에서 안주할 우려가 있다.(2) 부르크하르트의 예술사학의 한계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사와 문화사를 융합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포기되고 오로지 문화사 서술만이 남아 1860년 책이 출판되게 되었다.(3) 특정영역의 선호가 가져오는 부작용)정치사가나 사회사가 등 특수한 영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사람들에게서 대체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겠으나, 부르크하르트에게서도 문화나 예술이 인간 삶의 다른 그 어떤 영역보다도 상위에 놓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문제는 특정 영역에 대한 과도한 선호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현상으로 인해 자칫 본말이 전도될 수 있는 위험성이다. 즉 문화나 예술은 정치나 경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 또는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영역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무비판적으로 강조될 경우 문화나 예술자체가 마치 인간의 삶 자체인 양 인식되고 취급될 수 있다. 특정영역에 과도한 가중치가 부여됨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이러한 문제점은 그에 대한 예리한 자기반성의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문제점을 적어도 그의 역사 서술 안에서 냉철하게 통찰하거나 반성하고 있다는 인상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절대적 가치 부여에 따른 가치 전도의 위험성은 상존한다.2.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에 대한 한계와 비판(1) 부르크하르트 적 르네상스관의 형성19세기 후반 부르크하르트는 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가 교과서적으로 알고 있는 르네상스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즉 ‘자아의 발견’과 ‘세계의 발견’등 새로.
I. 경제성장의 공과(功過)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에 뒤이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년 동안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몇 십 년, 몇 백 년이 걸렸던 산업화의 과정을 그는 단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달성했기 때문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가 재임 중 달성한 이러한 비약적인 경제성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심지어 최근 과거 우리와 비슷한 경제성장 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에서는 박정희의 인기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대가로 우리가 잃은 것은 없었는가? 또한 경제성장이 남겨 놓은 후유증은 없었는가?먼저 외향적 경제성장을 추구함에 따라 우리가 잃은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전반 박 정권은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일제의 식민 지배라는 과거 역사를 지니고 있는 두 나라 사이의 국교 정상화는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 지배의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과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입장 사이에는 민족적 자존심과 관련된 뿌리 깊은 앙금이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제개발계획에 충당할 자금이 긴급히 필요했던 박 정권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청구권과 경제 협력의 명분으로 무상 3억 달러, 재정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 도합 8억 달러의 돈으로 이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굴욕 외교에 학생들과 야당은 박 정권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식에 처하는 등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했지만 박 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여 이를 억눌러 버렸다. 차관은 나중에 갚는 것이니 실제로는 3억 불을 얻고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을 헐값으로 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경제성장 자금을 위해 1960년대 중후반에 취해진 또 하나의 조치가 한국군의 월남 파병이었다. 대략 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 '월남특수(特需)'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월남 파병 졸속이고 굴욕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다. 월간조선에서조차 80년대 중반에 이를 지적하면서 내부 반대를 생각하지 않고 졸속으로 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독도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것은 단순한 예가 되겠다. 다만 경제문제에만 집중을 해보자. 이 때 박정희는 일본에 5억불 유무상 차관과 함께 국교를 정상화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남한내 반대세력을 적절히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남한내 반대데모와 같은 것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강온책을 사용하면서 국제여론을 조금만 더 이용했으면 더 많은 경제적인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게다가 이 유무상차관 역시 독립축하금이란 이상한 형태로 받게 되며(일본이 식민지강점을 했던 배상금이 안님) 이것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해서 얻었던 그 이득을 또는 그 문제점에 대한 부분조차 조사하지 않고 이것으로 그 이후 밝혀지는 가혹행위에는 더 이상 배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 즉 일제가 강제징용을 했던 사람들이나 위안부들에게 한국은 이 조약에 근거하여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즉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할 수 없게 되면서 그 기회비용을 잃게 되면서 우리가 지불해야하는 대가는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5억불이라는 것도 더 받을 수 있는 것을 일단 한국내 경제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더욱이 취약한 집권기반을 무마하기 위해 졸속으로 처리하게 되면서 치러야 했던 그 비용은 어마어마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5억불은 또 일부 재벌에만 집중이 되면서 경제력이 일부에만 지나치게 집중이 된다.그러면 이 5억불로 박정희는 무엇을 했는가. 박정희는 이 5억불로 경부고속도로를 짓는다.(이 외에도 한 일이 더 있지만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것이 가장 큰 사업이었으므로 이것만 언급한다. 이를 대표원리라고 한다.) 게다가 이 경부고속도로는 실제로는 5억불을 다 집어넣어도 정확히 말하면 건설이 불가능하다.이 증명은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다만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임금 부실공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 경부고속도 그러나 스스로가 외교적으로 비웃음을 받으면서까지 집착했던 경제적인 도움도 사실은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기에 성공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박정희가 한 업적이라고 하는 경제발전은 전면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III. 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1. 들어가며1999년 7월 21일 대우그룹이 마침내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정부와 금융권에 4조원 규모의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 패러다임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통해 거대재벌로 성장한 대우그룹이 결국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끝내 좌초하고 만 것은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제 박정희 시대의 경제관이라는 자체가 완전히 종언을 고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박정희, 케네디를 만나 월남파병을 먼저 제안하여 수만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죽었다.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이른바 고도성장 이라는 신화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유신 시대의 잔영에서 헤어 나오려고 하지는 않고 있다. 거기에 1997년 한국의 금융공황이후로 피폐해진 경제상황, 더욱 넓어진 빈부격차, 실업,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그나마 꿈을 심어주었다 고 느끼는 박정희-유신시대의 경제에 대하여 향수를 느끼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요즘은 다분히 지역감정적인 정서 때문인지 과거, 스스로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참칭하는 사람들마저도 은연중, 경제는 박정희.. 라는 식의 사고를 내비치는 사람들이 많다.게다가, 요즘은 전국 경제인 연합회를 중심으로 21세기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지극히 시대착오적이자 유신시대적 경제관이 버젓이 일간 신문 경제란에 매우 중요한 한국경제의 화두 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2003년 이후 다시 한번 한국의 대형 금융공황 혹은 대 공황의 맹아를 이른바 경제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머리속에 곱게 싹 틔워 나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더군다나 유신시대의 고도성장을 목도하고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의 세례를 받았다고 자 이윤을 남기면서 금융비용을 카버하며 다시 확장된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자본을 차입하는, 간접금융의 레버리지(Leverage) 홍수가 이루어졌다.1960년대 서방 각국의 10년 대 호황은 미국의 베트남전 특수와 모딜리아니 박사의 차입경영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세계적 규모의 대출 붐은 자본주의 경제를 일거에 흐루시초프의 사회주의권 경제를 제압할 수 있었고 엄청난 호황이 60년대를 관통했다.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으로 동 아시아의 변방국 한국에도 본격 소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이미 선언하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계는 이 이론에 주목했다. 이른바 중화학 공업 육성 이 본격 추진되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박대통령은 북한과의 체제경쟁과 점점 불리해져가는 군비경쟁에 한계를 느끼고 대형 중후장대 사업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의 산업전환을 꾀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형 중후장대 사업의 시작에 필요한 자본의 조달과 금융비용의 조달 가능성. 과연 엄청난 자본을 빌려서 과연 앞으로 해당 기업체가 금융비용 조달의 걱정없이 산업을 이끌어가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확신이 없었다. 이미 8.3 사채동결 조치와 같이 당시 한국의 금융시장은 지극히 허약하였고 국내저축으로는 도저히 이러한 중후장대 산업의 자본조달은 꿈도 꿀 수 없었다.그러나 차입경영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모딜리아니 박사의 이론은 이른바 서강학파를 중심으로 한 불균등 발전이론의 이론적 토대가 되며 해외에서 대규모 차관을 특히 일본자본의 대거 유치를 통해 중화학 공업을 육성시킬 수 있다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성공신화, 절대 실패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에 가까운 자신감이 있었다.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을 발표하자 많은 기업들이 앞 다투어 중화학 공업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정부의 각종 지원과 특혜. 정부의 지급보증 (국책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의 지급보증)을 바탕으로 한국의 기업들은 쉽게 해외에서 자본을 조달 할 수 있었다. 당시 업체도 통폐합 정리되어 오늘날의 대우자동차등이 태어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특혜가 주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인수한 회사가 부도날 판이었다.대대적인 부채감면 이자탕감 이자지급 유예등이 행해졌다. 그리고, 이들 중화학 공업을 세우느라 들어간 외채는 정부의 지급보증에 의해 국민의 혈세로 메워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외채는 50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금융비용의 무서움을 간과하고 선진각국으로부터 돈을 빌어다 쓴 결과 엄청난 국민혈세가 외채이자 갚는데 쓰였지만, 외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더욱 늘어나 버렸다.이 당시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책의 후유증으로 1984년 가을 한국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 당시 전두환은 이 때문에 일본을 방문 60억달러 규모의 거액의 융자를 요청할 지경이었다. 이것이 성공하지 않으면 한국은 이른바 80년대 남미 외채위기와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일본은 논란속에 60억달러의 원조를 결정한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박정희의 중화학 공업 육성 당시 많은 일본 기업들이 지금의 대 재벌들의 계열사들의 대 주주였었고 이들이 무리한 투자에 대해 제동을 걸어주는 바람에 대 금융공황의 상황으로는 몰리지 않은 것이었다.그럼에도 일본의 60억달러 융자가 없었다면 한국은 남미와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10년을 똑 같이 당했을 것이다. 일본입장에서도 당시 일본상품의 세번째 수요처였던 한국경제가 무너지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60억달러 원조가 가능했다.경부고속도로의 성공신화가 박정희-유신정권으로 하여금 엄청난 경제위기 상황을 스스로 자초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그것을 망각해버렸다. 박정희 경제의 실패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예전 7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1997년 대 금융공황으로 나타나게 되었다.3. 대 금융공황-박정희 경제의 종언1973년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자 60년대 호황기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조짐을 보이고 잇던 선진 각이다.
홀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는 언제나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인간에 의해 저질러 질 수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차라리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을 정도이다.영화 ‘피아니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와 그 와중에서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이 쓴 회고록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한다.바르샤바가 독일군에 함락될 무렵, 블라디슬라브 스필만은 28세로 고전 음악 연주뿐 아니라 대중음악과 영화 음악의 작곡가로도 각광 받으며 폴란드 라디오국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저항에도 도시는 함락되고, 독일군은 머지않아 게토를 설치하여 유대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을 가두어 넣는다. 스필만 일가를 포함하여 4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만 명도 수용하기 힘든 좁은 구역에 장벽으로 격리 당하여 고난과 공포의 하루하루를 꾸려 간다. 밀반입을 하다 즉결 처분을 당하거나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친위대가 노인과 여자를 포함한 일가를 벌레처럼 몰살해 버리는 일이 이어지고,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인종말살을 위한 대량 학살이 시작된다.그는 자기 예술에 대한 자긍과 집념이 있는 인물이지만 곧 그것은 휴지 조각보다 못한 것으로 바뀐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수용소에 갇힌 그는 수용소 내의 부자들만 출입하는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신세로 바뀐다.스필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한때는 정치적인 입장 차이를 두고 서로 다투기도 했던 그들은 굶주림과 폭력의 공포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게토의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부모님과 동생, 누이들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스필만이었지만 유대인을 문자 그대로 '제거'해버리려 하는 거대한 폭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단란했던 그의 가족은 마침내 모조리 죽음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만다. 오직 스필만 본인만이 유명한 피아니스트임을 아까워한 그의 지인에게 구조를 받아 목숨을 건진다.스필만의 인생은 점점 더 인간 이하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감하는 시련에 부딪친다. 그곳에서 예술은 죽은 말일 뿐이다. 게토의 노동자로 익숙지 않은 노동을 하며 게토 안에서의 유대인 학살의 과정을 목격한 그는 마침내 탈출하여 빈집에 숨어서 목숨을 이어나간다. 독일에 저항하려는 동료들은 도외시한 채 자신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전황이 독일에 불리해지고, 바르샤바 시민들이 폭압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그에 대한 보복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기까지 그의 고된 생존은 이어져 나간다. 사람에게 발견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은신 생활이 계속된다. 절대적인 고독과 굶주림, 폐허에서 독일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도 먹을 것을 찾는 비참한 생존이 이어지던 중, 피폐할 대로 피폐해 버린 스필만은 어는 빈집에 들어간다. 어둠과 추위로 가득한 폐건물 속에서 먹을 거라곤 오래된 통조림 몇 개뿐인 은신생활 중, 스필만은 우연찮게 순찰을 돌던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만다. 한눈에 유태인 도망자임을 눈치챈 독일 장교. 그는 스필만에게 신분을 대라고 요구하고 스필만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말한다. 한동안의 침묵 속에 독일장교는 그에게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한다. 어쩌면 죽기 전의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그 순간, 스필만은 숨죽인 피신생활을 하면서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 독일군 장교의 도움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숨을 부지한다.장교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날 그는 빵과 자신의 제복을 주면서 자기는 부대와 함께 바르샤바를 떠난다며, 소련군이 곧 점령할 테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 준다. 스필만은 그에게 감사를 전하고 그는 스필만의 이름을 묻고 떠난다.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스필만처럼 유대계 폴란드인이며 유년 시절을 나치와 함께 보냈고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었다고 한다.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휴머니즘 넘치는 드라마로 제작된 반면, 이 영화는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으로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도 성공해, 2002년 칸느국제영화제 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감독상(로만 폴란스키), 남우주연상(애드리언 브로디), 각색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여 로만 폴란스키 감독 말년의 대표작중의 하나가 되었다.‘피아니스트’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여타 영화와 다른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담담한 시선이다.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은 오스카 쉰들러처럼 영웅적인 사람도 아니다. 이 영화에는 감동적인 연설도, 가슴을 적시는 희생담도 없이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욕구만이 그려진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인 게토를 떠돌며 숨어살았던 피아니스트 스필만의 삶에서 영화는 인간성이 말살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는 생존에의 욕구를 무정하리만치 집요하게 바라보며 지루할 정도로 담담한 시선으로 따라간다.피아노 연주로 뭇 사람을 감동시켰던 촉망 받는 예술가가 자존심과 명예를 잃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설설 기어 다니며 먹을 것을 갈망하고 구걸하는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연민을 일으키게 하면서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살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처절하며 숭고한 것인지를 별다른 정서적 과장 없이도 보여주는 것이다.스필만에게 예술은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의 예술은 다른 사람을 구제해주지 못한 대신 단 한 사람, 자신의 목숨을 구제하는데 쓰여졌다. 도피 생활 말기에 나치 장교에 발각된 그는 직업이 뭐냐는 장교의 질문에 우물거리며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한다. 장교의 명령으로 피아노 건반을 잡은 스필만이 연주를 시작하자 그 나치 장교는 무언가 감동을 받는다.멀리서 도시를 폭격하는 전쟁터의 소음이 들리는 가운데 이뤄진 이 기이한 연주, 연주자와 청중이 한 명뿐인 연주회는 무언가 잔인한 느낌을 준다. 마침내 살아남은 스필만이 전쟁이 끝나고 소원대로 바르샤바의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감동을 받기 힘든 것은 왜일까? 그의 고귀했던 예술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다. 오히려 그가 독일군 제복을 입어서 독일군으로 오해를 받고 총격을 받는 장면은 바보스럽기까지 하다.바로 그것이 ‘피아니스트’를 흥미롭게 만들고 다른 홀로코스트 영화와 다른 점이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쉰들러’가 아니라 ‘스필만’일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아무 것도 과장하지 않으며 세상이 전쟁의 잿더미가 됐을 때 홀로 남은 자의 고독과 비루함과 생존 욕망을 잔인하리만치 고요히 응시하고 있다. 잔악한 나치와 불쌍한 폴란드 유대인의 대립 축이 선명했던 초중반의 드라마의 긴장감은 서서히 무력감으로 바뀌고 관객은 비참하게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스필만의 삶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다. 후반부의 한 대목에서 스필만을 도왔던 여자는 수용소에서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항거한 유대인들을 칭송하며 그들의 항거에 동조하지 않는 스필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은 자기 명예를 지킨 거예요." 스필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피아니스트’는 한 유대계 폴란드인 예술가의 생존 일지에서 어떤 영웅적 자취도 굳이 뽑아내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생존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질긴 것인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담담하게 바라본다. 과장하지 않고 끝까지 한 인간의 삶의 자취를 담아낸다는 것은, 로만 폴란스키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극은 감상적인 문체가 아니라 냉정한 시선으로 서술될 때 더 비극적이 된다.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 극대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며 오열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감동을 강요하는 듯한 작위적인 연출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피아니스트’에서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다루면서도 처연한 피아노의 선율이 영화 전편에 흐른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장면은 주인공이 도피처에서 소리 없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이 작은 소음하나 낼 수 없는 도피처에서 소리 없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어떠한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예술정신, 혹은 자유정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듯 하다.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관객에게 주인공 스필만보다 더 연민이 가는 사람은 스필만을 구해준 그 이름 모를 독일군 장교일 지도 모른다. 스필만을 도와준 빌름 호젠펠트 대위는 직업이 교사였으며 1차대전 때는 중위로 참전한 전력이 있다고 한다. 아마 2차대전 때는 나이가 많아서 바르샤바 체육 시설의 책임자로 있었던 게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호젠펠트는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열차에서 용케 탈출한 젊은이에게 신분증을 만들어 주고 관할하는 스포츠 센터에 일자리를 주었다. 저항 그룹이 독일군을 사살했다고 해서 현장 주변의 주민을 모두 검거하여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트럭에서 사람이 필요하다며 한 명을 구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스필만을 도와준 것이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을 아닌 것 같다. 종전 직전에 소련군 포로가 된 그는 1952년 스탈린그라드의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한다.종전 후에 스필만은 호젠펠트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생전의 스필만은 호젠펠트 대위의 구명에 실패한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전한다.PAGE PAGE 2
고등학교 때인가 소설과 영화로 접하고 감명을 받았던 ‘닥터 지바고’를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그 때에는 주인공 유리 지바고와 라라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보았었는데 지금은 얕으나마 그 시대와 역사의 배경 지식을 알고 나서 보니 새로운 감동을 얻게 되는 것 같다.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었으나 모스크바의 상류 지식인의 집에서 자라 별 어려움 없이 성장한다. 어느 날 그는 모스크바 거리에서 시위하던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의학을 공부해 사람들을 돕고자 꿈꾼다. 또한 예리한 지성과 따뜻한 감성을 지닌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인정이 넘치는 의사이면서도 감수성이 예민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시인으로서의 지바고가 자신과 역사를 보는 관점은 원작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각이 투영된 것이라 생각되며 이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자신을 키워준 그로메코가의 딸 토냐와 장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의학실습에 몰두하는 지바고는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마주친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에게 정조를 빼앗기자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상을 입힌다.지바고는 이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혁명가 파샤라는 연인이 있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지바고는 우연히 종군간호사로 변신한 라라와 해후한다. 지바고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아내 토냐에게 숨길만한 일은 하지 못한다. 지바고는 전쟁이 끝나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러시아 전역에 열풍처럼 퍼져 가는 혁명의 분위기에 당혹감을 느끼고 회의와 불안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러시아 혁명 이후, 부유하던 장인의 집은 인민들의 공동소유가 되었으며 지바고는 그의 시집이 문제가 되어 감시를 당한다. 1917년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유리와 같은 자유주의적 지식인은 감시의 대상이었다. 혁명에 회의를 품은 지바고는 가족들을 데리고 우랄 지방으로 도피적인 이사를 감행한다. 그는 우랄 산맥의 오지 바리키노로 숨어든다.지바고는 여기서 가족들과 함께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 생활을 보내게 된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유리아틴 시내에 가보라는 아내의 권유에 유리아틴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그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라라는 남편을 찾고 있었다. 지바고와 라라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지바고는 라라와 토냐 사이를 오가면서 밀회를 계속한다.아내가 둘째를 임신하자 지바고는 라라에게 이별을 통고한다. 돌아오는 길에 빨치산에게 붙잡혀 강제 종군을 하게 된 지바고는 천신만고 끝에 2년 만에 탈출하여 꿈에 그리던 라라와 다시 만난다.위급하고 불안한 도피 생활을 하던 그와 라라에게 코마로프스키가 찾아온다. 탈영병인 자신의 처지와 남편으로 인해 총살을 당하게 된 라라를 도피시키려는 코마로프스키의 권유대로 지바고는 라라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그녀를 떠나 보내게 된다. 라라가 떠나갈 때에 지바고는 창문을 깨뜨리고 사랑하는 라라가 탄 마차가 지평선 위로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본다.8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지바고는 중환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온다. 모스크바의 어느 거리에서 지나가는 라라를 전철에서 보고 황급히 뛰어가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 후 라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어느 노동자 수용소에서 죽었을 것이다.이 영화는 아름답고도 황량한 러시아의 자연(이 영화는 스페인과 핀란드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음악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닥터 지바고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영화이다. 지바고 가족이 우랄지방으로 달아날 때가 겨울이어서 기차가 하얀 눈을 양쪽으로 날리며 러시아 눈밭을 지나간다. 또 그 고통스러운 열차 속에서도 젊은 여자가 춤추고 둘레에서는 박수를 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에서 한 가닥 남은 희망을 읽는다. 시골에 도착한 지바고 가족이 농촌생활을 하는 장면도 아름답고 지바고와 라라가 오랜만에 만나 낙엽이 날리는 곳에 앉아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아름답다. 또한 영화 전편에 걸쳐 흐르는 발라라이카 음악도 아름답다.마지막 장면인 댐에서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걸린 무지개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 앞에서 개인의 삶과 사랑의 덧없음을 나타낸 것일까? 그러나 구약성서 창세기에도 등장하듯이 무지개는 희망을 가리키는 것이다.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시대와 개인, 역사와 개인, 이념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지바고. 그는 혁명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정신과 순수함을 지키려 한다. 지바고를 휘감아 버린 전쟁과 혁명을 하나의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도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다. 전쟁이나 혁명도 그의 정신의 내부까지는 파고 들지 못한다. 그는 그것들에 대하여 강한 이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생활을 사랑 하면서 진실하게 살아간다. 이런 점은 지바고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영화속에서의 지바고는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혼돈 속에서 인생의 실패만을 거듭하다가 허무와 실의속에 비참한 일생을 마치고 만다.이 작품은 주인공인 지바고에게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양심을 대변시키고, 여주인공 라라에게 러시아의 유린당한 국토와 민중을 상징시키고 있다. 닥터 지바고는 상징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의 이야기인 동시에 순수한 지식인과 러시아의 민중이 공산주의 혁명과 전체주의적인 횡포에 의해서 무참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한 현대의 비극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폭력에 의한 러시아혁명의 배신과 인간부정에 대한 지식인의 무력한 항의로 빚어진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러시아 혁명은 인류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긴 것일까? 나는 역사학 전공자도 아니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러시아 혁명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 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70여년의 실험 끝에, 혁명으로 이룩한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인간’을 위해 일으킨 혁명이 결국엔 인간성을 말살하고 전체주의는 ‘개인’을 배제해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 앞에 피를 흘리며 스러져갔나?혁명은 일견 낭만적이지만 혁명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는 ‘인민’의 이름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언젠가 소련이 붕괴되던 즈음에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 앞에서 긴 줄을 서던 모스크바 시민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혁명적 낭만의 쓸쓸함을 본다.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이라는 전제군주를 불렀고, 4.19 혁명은 5.16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를 가져왔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짙은 허무함을 느낀다.내가 어린 시절에 텔레비전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시민들이 레닌의 동상을 넘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때 그것이 얼마나 큰 역사적 사건인지를 몰랐다. 그 때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아마도 심한 무력감과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인간의 이성으로 이상향을 이룩해 보려던 사회주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나는 유리 지바고의 실의와 좌절을 보면서 인간의 휴머니즘과 박애주의도 결국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곧 인간의 한계, 인간의 유한성일 것이다.극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코마로프스키가 라라에게, 지바고는 떠나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하자 라라가 하는 말 “지바고가 러시아를 떠날 것 같아요?” 이다.그렇다. 지바고가 마지막까지 사랑한 것은 바로 조국 러시아이다. 혁명이 배신하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라라를 잃으면서도, 조국을 떠나지 못한 것은 조국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이념이 가고 사랑이 가도 조국과 민족은 남는다.언젠가 작곡가 윤이상이 한 말이 생각난다.“이념은 저 나뭇잎처럼 푸르렀다가 탈색되고 낙엽지지만 민족은 저 창공처럼 영원하다.”PAGE PAGE 1
차 례제1부 서론발전과 위기의 정치경제학: 한국의 ‘IMF’ 위기’와 ‘동아시아 모델’ 손호철 3제2부 위기의 동아시아 발전 모델한국 I: 재벌 체제와 좌절된 경제 개혁 정상호 4한국 II: IMF 위기, 한국 모델의 파탄, 그리고 새로운 모색 강명세 5일본: 금융 위기의 원인과 전망-‘지연과 확산’의 위기 구조 김용복 6대만: 위기 속의 발전 김준 7인도네시아: 부패한 정실 관계와 성장 경제의 파산 전제성 8타이: 성장과 위기, 국가-기업 연결 망의 두 얼굴 박은홍 9제3부 PAX of IMF국제 금융 자본과 IMF ‘관리’ 이광일 10동아시아 경제 위기의 정치 동학 박시명 11서론발전과 위기의 정치경제학: 한국의 ‘IMF’ 위기’와 ‘동아시아 모델’ 손호철IMF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eq oac(○,1)자본주의 구조적인 모순과 현단계의 세계 자본주의의 문제점에서 찾는 ‘근본주의적’ 입장, eq oac(○,2)동아시아 모형의 위기로 인식하는 입장, eq oac(○,3)박정희 모델로 불리는 한국 사회 발전 모델의 한계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 eq oac(○,4)김영삼 정권의 실정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으로 나뉘어진다. 이 글에서는 여러 가지 원인을 다양한 분석 수준에 기초에 종합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한국의 IMF 위기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세계 체제적 수준자본의 과잉 축적: 1994년 말 현재 국제적인 투기 자본인 헤지 펀드의 규모는 20~30조 달러이며 하루 거래량도 1조 달러를 넘고 있다. 이 같은 투기 자본으로부터 자국 통화를 방어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뿐이다. 이 같은 자본의 과잉 축적과 이에 따른 투기 자본화가 가장 깊은 윈인이다.지구화와 WTO 체제: WTO 체제 출범에 따라 자본의 이동이 용이해졌다.일국적 수준: 대만 등은 건재한데 한국만 위기가 온 일국적 요인은 무엇인가?지연된 전환: 국가 독점주의 채제로 집약되는 낡은 사회의 발전 모델, 나아가 이것의 전환 실패이다. 이것을 개혁하려는 시체와 온갖 경제난의 근원지라고 비판하면서 ‘전면유보’를 주장하였고 한민족 문화와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의 폐지를 주장하였다.4. 맺는 말재벌 개혁은 시급한 것이지만 재벌의 완강한 저항은 성공적이었다. 김대중 정부도 재벌 개혁 가능성이 다소 비관적이다. 그 이유는 무능한 정부와 재벌의 변함없는 자세와 인식, 그리고 경제 개혁을 좌절시키기 위해 활용하였던 재벌의 전략과 대응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한국 II: IMF 위기, 한국 모델의 파탄, 그리고 새로운 모색 강명세1. 들어가는 말IMF 위기는 국가 자원 배분을 통한 시장 간섭이 한계에 도달 했음을 말해준다. 이 글에서는 IMF위기를 경험적으로 해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모델로서 사회 협약의 실험을 모색하려 한다.2. 한국 모델의 붕괴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이는 한국이나 일본의 위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3. 위기의 해부위기를 부른 요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제화에 따른 자본의 투기적 공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왜곡된 시장 발전 구조이다. 한국의 수출은 1988년까지 호조를 보이다가 악화되었는데 1996년 말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한국의 위기는 외국 자본의 손쉬운 유입으로 인한 과도한 민간 부채 때문이었다. 이는 바로 재벌 중심의 경제에서 비롯된 문제점이다.한국은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 정책으로 재벌이 급성장 하였지만, 이는 재벌로 하여금 도덕적 해이 에 빠지게 하였고 허약한 한국의 경제 구조는 동남아에서 시작된 외부의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 경제규모가 발전함에 따라 금융기관은 재벌을 감독할 능력이 떨어지고 유착함으로써 위기가 오게 되었다. 단기적인 외한 문제는 과다한 외자 차입에서 비롯하였다. 안전장치가 없는 국제 자본의 과다한 차입과 종금사의 난립으로 한국 경제는 금융위기에 극도로 취약하게 되었다. 단기 부채의 비중이 높았던 한국 경제는 1997년 말의 투기 자본이 한꺼번에 다. 첫째, 금융 시스템의 안정화를 도모하는 여러 조치를 실시하고 있다. 최대 30조 엔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법안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금융 개혁은 시장 기능과 자기 책임의 원칙에 입각한 효율적이고 안정된 금융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 정부의 정책 방향이 재정 건전화로부터 경기 부양으로 바뀌었다. 하시모토 수상은 1998년, 1999년에 걸쳐 4조 엔의 소득세를 감세하고 재정구조개혁법의 개정 등을 확실히 천명하는 종합 경제 대책의 골격을 제시하였다.5. 전망: 일본 붕괴인가, 구조 조정인가?현재 일본에는 버블 후유증의 청산, 경제의 구조 개혁, 경기 회복이라는 중요한 3대 과제가 놓여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장래는 일본 국내의 구조 개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 경제의 변화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미형 자본주의로의 수렴을 주장하거나 일본적 특질의 유지를 희망하는 견해들은, 개혁의 필요성에는 모두 동의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버블 후유증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필수적이다. 일본 금융위기와 동아시아 위기와의 연계는 경제 활동의 국경선을 재고하게 만들었으며 일본의 금융 위기는 이미 지역화 혹은 세계화되어 있다. 일본 자본주의의 장래는 국제 금융 시장의 안정성을 회복하는 것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대만: 위기 속의 발전 김준1. 들어가는 말1997년 외환 위기가 도미노 현상처럼 아시아 각국으로 확산되었지만, 대만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에 따라 대만의 저력이 새삼스레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만을 다른 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과 다르게 하였는가? 대만은 현재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경제적 재앙의 파고를 앞으로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에서 나름대로 답을 찾고자 한다.2. 대만의 경제 발전: 과정과 동력●대만의 경제 발전 과정: 대만은 1858년 개항을 계기로 ‘근대’에 접어들었으며 주목할 것은 1870년의 시점에 이미 수출 초과를 달성했다는 점이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경제 성장을 지속 경제 개혁수하르또는 집권한 후 경제를 안정시키고 서방의 원조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또한 1970년대의 국제 석유가 폭등으로 재정이 넉넉해졌지만 ‘삐르따미나 위기’로 대표되는 부패와 부실은 심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석유가 하락 이후로 경제 자유화와 탈규제화로 높은 경제 성장을 하였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수하르또의 지지를 얻어 탈규제화로 민간 부문을 활성화하고, 수출과 외자유치를 늘리는 정책을 마련했다. 금융 개혁으로 많은 은행이 설립되고 저축률도 크게 늘어났다.4. 측근 자본가들과 ‘패밀리 비즈니스’의 성장경제 자유화는 특권적 부패로 집약되었다. 독점 대기업들은 권력자들과 유착하여 확장 일로를 걸었으며 그 부패의 핵심에는 수하르또가 있었다. 금융 자유화로 측근 재벌과 친족 재벌은 거대 민간 은행을 소유하고 그 은행들은 그룹 내 대출로 재벌의 힘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또한 국가 독점하에 있던 많은 사업 분야가 수하르또 친족 재벌들과 몇몇 화인 측근 재벌들에게 넘어갔다. 결국 부패한 인도네시아 경제는 파국을 향하여 치닫게 되었다. 1997년 5월 타이의 바트화를 시작으로 인도네시아의 루삐아화도 국제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막대한 외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1997년 10월 정부는 IMF 구제 금융을 받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구조 조정의 일환으로 16개 부실 은행을 폐쇄하자 금융시장은 경색되었고 부패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수하르또는 IMF의 재정 긴축 요구를 무시하고 확대 예산을 발표하여 루삐아화가 다시한번 폭락했다. 그는 또한 IMF와 미국에 맞서거나 약속하고 뒤집고, 다시 타협하고 딴소리 하는 등 IMF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재협상이 타결되었지만 그에 따른 사회적 여파인한 군중 폭동과 대학생들의 수하르또 하야 요구 시위등으로 결국 1998년 5월 수하르또는 사임하게 되었다.5. 맺는 말인도네시아 사례는 부패가 자본주의 경제 성장과 오래 ‘동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으며 경제적 파국으로 부패의 폐해가 각인되고 지점은 자본의 세계화와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2. 브레튼우즈 체제의 모순과 금융 자본의 팽창두 차례의 대전이후 미국은 국제적 헤게모니를 갖게 되었고 국제 금융 질서의 안정을 위해 브레튼우즈체제를 출범시키고 IMF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체제로 인해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되자 미국 정부는 긴급 경제 조치로 사실상 이 체제를 붕괴시켰고 그 이후 IMF 회원국들은 그 다음 체제의 수립에 실패해 국제적인 부채가 급증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생산 및 실물 자본 형성이 침체되고 금융 자본이 팽창하면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한 초국적 금융 자본이 투기성 자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자본 자유화는 여러 국가로 확산되었다.3. IMF의 위상과 역할: 신자유주의의 ‘집행자’IMF의 위상과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지만 IMF가 출자 지분 비례권에 의해 운영되고 초국적 금융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IMF는 채무 당사국에게 구제 금융의 대가로 일정한 조건을 제시하며 그 프로그램을 통해 그 국가의 정책을 시장 순응적 정책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으로 인하여 관리 대상국의 사회 경제 구조는 초국적 자본 및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제 기구들의 영향력 아래 더욱 긴밀히 포섭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4. IMF관리와 국민 국가, 민주주의IMF가 관리 대상 국가에 요구하는 프로그램은 시장 물신주의가 그 핵심이며 거기에는 민주주의, 인권, 삶의 질의 문제는 배제되고 무한 경쟁의 논리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로운 자금의 흐름과 산업 활동을 규제하는 갖가지 규정의 철폐를 주장한다. 이러한 정책 기조들은 다자간 협상이나 압력 조치, 국제기구들을 통해 발전도상국들에게 관철되었다. IMF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초국적 금융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고 있으며, 이 와중에서 국민 국가의 권위와 자율적 E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