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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 지방자치 용어정리
    (가)◎가예산제도: 신회계 연도 개시까지 예산안 통과가 불가능할 때, 연도 개시후 일정 기간 동안의 집행을 위해 편성하는 잠정적인 예산 제도, 잠정 예산 제도.◎간접참정권: 대의제 정치에서 주권자에게 집단적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주어지는 권리를 말한다.◎갈등: 지방자치단체간에 일어나는 갈등은 정책 지향에 대한 차이점, 관할권에 대한 경쟁(투쟁) 목표의 비양립성, 한정된 자원경쟁, 상호의존성, 기능(권한) 배분상태 등이 그 원천이 된다. 지방자치단체간에 일어나는 갈등은 그 특징으로서 치열한 이해경쟁, 비일관성과 갈등 진폭의 변화, 불확실성과 집단화경향을 지적할 수 있다.◎갈등관리:지방 정부의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민 운동이 그들의요구의 관철이나 문제 해결을 지향 한다는 것은 곧 지방 정부로 하여금 그들의요구의 수용을 구하는 것◎갈채선거: 갈채선거란 투표자의 후보자간. 정당간 경쟁도 없고 선택도 불가능한 선거를 말한다.◎감축관리: 감축관리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자원 소비와 조직활동의 수준을낮추는 방향으로 조직변동을 관리하는 것인데, 감축 대상을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것과 축소에 의해 초래할 수도 있는 사기의 유지, 우수 인력의 유치와 알선,지지의 유도와 확보, 창의적 노력의 촉진, 실책의 방지, 공간 축소에 대한 적응, 조직의 합리적 청산활동 등이 그 과제이다.◎갑오개혁: 1895년개화파에 의하여 8도제를 23부제로 바꾸고 지방행정 구역을339군으로 정비하면서 지방의 인사, 재정에 대한 중앙통제를 강화하여 근대적중앙 집권 체제로 만듬◎강시민 모형: 적극적 시민상을 말하는데, 공공 의사결정을 위한 토론에 참여하고, 공익에 대한 관심에 의하여 활성화된 사람으로 정의한다. 적극적 시민상은 정치적 의제를 형성하고, 정부 프로그램이 얼마나 잘 운용되는가를 평가할뿐만 아니라 정부가 추구해야 할 목표에 관해서도 토론한다.◎강시장-의회형:대도시에서 지방 정부가 할 일도 늘어나고 또 강력하고 적극적인 정치 행정력이 요구 되면서 1880년대 이후 등장한 것으로 가장 중요하는 물자의관리, 조정, 감사 등으로 이루어짐◎구역: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준에 따라 국토 공간을 구분하여 놓은 일정한 지리상의 한계, 일정한 공공기관 또는 단체의 관활권이 미치는 지리적 또는 지역적 범위◎구역개편: 갈라 놓은 지역이나 범위를 다시 편성하는 것◎구입권제도: 물건을 사들이는 제도◎구입증서제도: 물건을 샀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발급하는 제도◎국가 일선기관: 지방자치단체 대표자, 최고집행기관, 지역 정치지도자,◎국권설: 지방자치권이란 지방이 통일된 국가의 일부인 이상 원래 국가의 권리◎국민공회: 프랑스 공화국은 하나이며 분할될 수 없다는 결의를 하면서 연방제를 거부◎국민투표제: 선거 이외에 국정상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 국민이 하는 투표제◎국제친선도시연맹: 자방자치 단체들이 자매도시를 만들어 국경을 뛰어넘는교류를 추진◎군 자치제: 군 지방자치제◎군분리형: 농촌군을 시가 양쪽으로 갈라놓는 형◎군소멸형: 한 농촌에 다수의 시가 생겨서 군이 없어지는 형◎군현승강법: 지방 자치 단체들 간의 오르고 내리는 법률◎군현제: 중앙 집권적 성격을 띤 지방 행정 제도◎권력분산: 공인된 권리와 힘을 흩어지게 함◎권력집중: 공인된 권리와 힘을 한곳에 쏠리게 함◎권리 요구형: 시민사회의 의식은 강하나 지역사회 의식은 약한 유형으로서외부 유입 시민◎권위주의 정치 문화: 어떤 일을 권위에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사회 활동◎규모의 경제: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거나 벌어지는 범위나 양적인 크기 내에서의 활동◎규모축소: 작은 정부를 지향하여 자원 소비와 조직 활동의 수준을 낮추는 방향으로 조직 변동을 관리 하는 것◎균등할: 주민세는 지방 자치회비와 같은 성격의 지방세로서 모든 개인과 법인에게 부과◎글로컬리제이션: 지방화와 세계화의 합성어◎급부금: 지방재정법 등에 보조금을 지칭하는 용어◎기관대립형: 지방 차치 단체의 정부 조직에 있어서 의결기능과 집행기능을각각 다른기관에 분담시켜 상호 견제 군형을 통하여 지방자치를 운영화는 유형◎기관통합형: 의결기능과 집행기능을관심하고 공공서비스 소비자로서 해야할 책무를타인에게 맡겨 버리는 것◎무참여: 공적이거나 사적인 일에 관계하여 도움이 되는 일에 관심이 없는 행동◎무학산청샘물: 경남 산청군의 환경행정 개혁의 한 사례◎문제중심적 협상 방법: 원칙협상은 문제와 사람을 분리하고, 상호 이해 관계에 초점을 맞추며, 공동이익을 가져올 대안을 개발하며, 협상의 결과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단계를 밟는 다는 것◎문화적가치: 지역사회의 가치나 규범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는 지방자치는지역에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여 한 나라의 문화를 다원화시키거나 풍부하게 만드는 결과◎문화적 통합: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독특한 지역문화에대한 애착과 관심을 경감시키는 동질성 지향의 강력한 사회적 조류 형성◎미군정: 미군의 행정◎민간자금채: 인수선에 따라 시장공모체, 은행체, 왜화체등◎민법상 주소: 주된 사무소의 소재지를 주소로 보는 입장◎민본효과: 주민을 위로하는 나타나는 현상◎민영화: 민간인이 경영◎민주성: 한 민족의 특유한 기질◎민주시민형: 문제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 하여 정책대안을 제시하여 행정기관을 비판적으로 견인한다.◎민주주의3인자: 의사의 자율성, 행위의 자기 결정성, 행위결과에 대한 자기책임성이다.◎민주주의의 훈련장: 국민의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정치 형태를 실형 시키위한 준비기간◎민주항쟁: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알리기위해 불위한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민활법: 활발한 법집행(가)◎반대급부: 어떠한 일에 대응하는 이익◎발췌개한안: 개헌하고자 하는 사항을 조합의 형식으로 초안한 문서 중에 핵심 적인 것을 뽑아 취하는 것◎배분성: 몫으로 나누는 성질◎법령 유보의 원칙: 주민의 권리 제한 또는 의무 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정할때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법률적 실체: 사회 생화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통치자나 국가가 정하여국민을 강제하는 규범·법·율법을 위한 본체를 삼는 것◎법인: 자연인이 아니고 법률상으로 인격을 인정 받아 권리 능력의존할 수 밖에 없다◎새로운 시민상: 공공의사 결정을 위한 토론에 참여 하고 공익에 대한 관심에의하여 활성화된 사람◎생산성 요인: 지방자치 행정의 문제 진단과 성과 측정과 평가, 주민 만족도조사를 통하여 고객의 기대 수준 또는 요구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정책을 합리화◎생산적 공채: 자본재시설 투자를 목적으로 발행되는 것◎선거 공영제: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가 선거 운동의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운동에 일정한 제한을 가함을 동시에 각종의 편의를 주어 그 비용을 부담하는제도◎선거 참여: 투표와 선거 운동 포함◎선거행동: 투표와 선거 운동◎선결처분권: 자방자치법 100조◎선취권: 선취득권◎선택선거: 1당제 국가에서 집권당만이 선거에 참여 하여 후보자간 경쟁만 가능◎성과측정: 일이 이루어진 결과에 관한 사실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활동◎성과측정지표: 민주성을 설정하고 민주성의 하위지표로는 합법성, 대응성,형평성을 설정◎성과평가: 지방정부가 수행한 활동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려는 체계적인 활동을 의미.◎세계화: 국제적 또는 세계적 관련을 맺는 것◎세원의 배분: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의 구조를 결정하는 요인, 지방자치 단체들의 재정적 능력을 제한 하는 결과◎소득과세: 개인의 소득에 대하여 부과되는 국세◎소비자: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소비자모형: 수동적 시민상과 관련◎소선거구: 정수 1명의 지역선거구◎소속행정기관: 지방자치 단체장의 지휘, 감독아래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지고 자치단체의 사무를 지역별 또는 기능별로 분담 처리하는 기관◎소의회제도: 택한 이윤는 파트타임 지방 공직자들도 있고 무보수도 있지만대개 보수를 지급하면서 유급직 소수의 의원들에게 분며하게 책임지는 공직 수행을 기대 하기 때문◎소청: 청한는 바, 청하는 일◎소청심사위원회: 시 도에 공무원의 임명, 휴직, 면직과 징계를 행하는 권한◎소득탄력성: 세원 배분상의 특징◎수권조항: 일정한 자격, 권리, 권한 등을 특정인 에게 부여◎수동적 시민상: 공공서비스가 생산되는 정부에 참여하는 적국 최초로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유향소; 고려말에 생긴 수령의 자문 기관인 지방 자치 기관◎응익성 : 비용 부담의 주체와 편익이 수혜 주체가 일치◎의사 규칙 : 회합에 의한 심의 또는 심의할 사항에 대한 규칙◎의사 정족수의 원칙 : 회의 결과에 적법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칙◎의론 재원 : 중앙 정부 또는 상급 지방 자치단체의 결정에 의존하여 그 금액과 내용, 구체적 기준에서 이론성이 강한 지방 교부세·지방양여금 및 국고 보조금 관계◎의존적 중첩형 : 양 극단적 가정을 버린 절충적 입장으로서 연방 - 주지방 정부의 관계◎의회 - 매니저형 : 의회 정치를 교섭하는 유형◎의념적 이유 : 확대된 정부는 시민적 자유를 축소시키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므로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월금 : 세출예산 중 그 해에 지출하지 못하고 다음 해로 넘겨서 처리할 수있는 바. 이때 이월되는 예산 액을 지칭◎이기 단체 행동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이루기 위하여 시민들 집단이나 조직을 통하여 참여하는 형태로서 개인이 다른 시민들과 결합하여 정부활동에 영향을 미치려는 활동이다◎인사 위원회 : 독립된 상설 의걸 및 집행기관으로 지방 공무원의 임용 및 승진 시험을 실시하고 임용권자의 요구에 의하여 공무원에 대한 인사나 징계를 결정◎인지단계 : 현실 수준이 기대 수준에 미달하는 차질을 발견하고 개혁의 필요를 확인하며 그에 관한 합의를 협상하는 단계◎일몰 방식 : 해가 지는 단위에 처리하는 방식◎일반 관리 기능 : 지방 자치단체 전체를 활동을 지원 관리하고 대내적으로 이루어지며, 전문 기능을 가지고 봉사라는 지원하는 기능◎일반법 : 사람·장소·사항 등에 대한 특별한 제한이 없이 적용되는 법률◎일반보상의 원리 :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보상 원리◎일반보조금; 국고 보조금의 한 종류◎일반선택 헌장; 분류된 헌장 방식에다 정부 형태를 달리 하여 선택하게 하는방식◎일반채; 도로, 하천, 재해 복구등 일반회계의 재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발행한 것◎일반헌장; 주의회가 제정한 법류로서 헌장을 통해 그 주의 모든 지방자 것
    사회과학| 2002.10.15| 21페이지| 1,000원| 조회(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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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10월1일 대구사건에대해서 평가A좋아요
    Ⅰ. 문제제기1946년 10월 1일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대되어간 이른바 '10월 항쟁'에 대해서는 이미 선행된 연구들이 상당히 자세한 내용들을 밝혀 놓았다.먼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10월 항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및 관련 집단들에 대한 미군정 1년 동안의 조직적인 탄압이 봉기의 씨앗을 뿌렸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봉기를 기본적으로 지방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농민반란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이 봉기는 공산당 지도하의 체계적인 혁명 대신 비체계적이고 경험에 의존한 자연발생적인 개개 농민반란의 집합을 이룬 것에 불과하였다고 보았다.반면, 정해구는 {10월 인민항쟁연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은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존의 지배구조를 유지시키고 변혁적 지향을 거부했던 미군정에 대한 저항"이었다고 보았다. 즉 10월 인민항쟁은 기본적으로 "미군정의 반동화정책 및 식량정책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10월 인민항쟁은 일제하에서부터 이어지는 민족해방투쟁사적 맥락과 사회변혁운동사적 맥락 속에 위치한다"고 강조했다.한편 신기욱은 10월 농민봉기를 역사적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일제하에서 농민들은 소작쟁의와 적색농민조합운동, 그리고 일제 말기의 일상적인 저항 등을 통해 저항운동의 경험을 조직을 축적해왔으며, 이것이 10월 봉기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소작쟁의의 경험을 강조하였다. 그는 1946년의 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래 가장 대규모적이고 중요한 저항운동이었으며, 이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개혁, 특히 토지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음을 보여주었다고 분석하였다이 레포트를 통해서 10월 항쟁의 시대적 배경과 진행과정 그리고 여러 가지 고찰점등과 나름대로의 의의를 짚어보려 한다. 그리고 10월 봉기의 성격을 자연발생적인 농민반란'이었는가 아니면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항쟁이었는가, 토지문제를 바탕에 깐 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인장은 "6개월 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말했으며, 같은 날 서울 철도쟁의본부단에서는 교섭이 결렬되었으니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맹세와 격려문을 보내왔다. 한편 당시의 군정 장관도 이번 파업이 "정당한 절차나 사전의 교섭도 없이 일어난 불법적인 파업"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당국으로부터 파업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기는 커녕, 오히려 이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자 사태는 수습이 될 리 없었다. 게다가 철도원들과 비슷한 조건을 내걸고 동정 파업에 들어가는 사업장들이 늘어나 30일에는 대구의 거의 모든 산업체가 쟁의에 휘말리게 되었다. 파업업체가 늘어나자 조선노동조합저국평의회(조평) 에서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시투) 를 결성하고, 각 파업단체는 조평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사태가 이렇게 확산되자 제5관구 경찰청에서는 시투 에 회견을 요청했다. 이 회견에서 경찰청은 이 쟁의가 시위와 선동이 아닌 옥내에서의 합법적 투쟁이 되기를 부탁했고, 시투 는 경찰청의 요구를 수락하는 한편 파업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래서 시투 에서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악질적인 모략대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방화나 약탈에 대비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위문단을 구성해 시투 를 방문하고 위문품을 보내 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을 담당했던 군정청이 어떤 해결책을 강구했는지는 모르지만 파업은 시작된 지 1주일이나 계속되어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3) 10월 1일시투 와 경찰청은 시투 의 간판을 떼느냐 않느냐의 문제로 오후 6시경까지 실랑이를 벌이다 경찰이 일단 돌아갔다. 돌아갔던 경찰은 조금 지나 무장경관을 대동하고 시투 의 간판을 떼려다 노동자들과 다툼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오후 7시경 경찰이 발포하여 수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10.1폭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은 무장경관과 기마경관이 역전에서부터 금정로 노평회관 까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어 더 이상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4) 10월 2일 대구지구 계엄령 포고역전 일대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교통이 금지되어 있었다. 귀국동포들의 유입은 상대적으로 경상도에 집중되었었고, 이러한 현상은 이 지역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 대구·경북지역에는 나날이 증가하는 귀국동포들을 수용할 만한 마땅한 시설이 부족했었기에 이들 대부분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해방 직후 많은 공장이 가동을 중지한 상황이었기에 그만큼 실업자들이 늘어났고 노동자들의 생활도 그만큼 어려워졌다. 게다가 대구·경북지방의 2월 쌀 수집 실적이 저조하자, 군정 관리와 경찰이 동원되어 강제적인 하곡수집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구·경북지방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아사자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게다가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콜레라의 전염을 막기 위해 교통마저 차단하여 외부의 쌀 반입이 끊겼다. 또한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었다.이처럼 대구·경북지방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과 강력한 좌익세력으로 인해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고, 일단 이 지역에서 항쟁이 시작되자 이러한 항쟁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퍼졌다.4. 영향 및 의의1) 국가건설 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국가건설시기에는 여러 가지 이념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그리고 일면 자율적으로 표출되고 정치사회에 다양하게 투영될 수 있다. 이것은 신생국으로서 누릴 수 있는 내재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재적 조건이 "교통정리"되고 그 결과물로서 수립되는 정부가 출현하면서부터 수립 전과 수립 후의 이념적 지형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해방된 한국의 경우는 그러한 극단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10.1사건은 일단 그것이 직접적 폭력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의 결과 역시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성공이란 사건을 조직화하고 선도한 세력이 의도한 체제의 건설이고, 실패는 그 반대 세력에게 명분과 실리를 안겨주는 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무수한 시나리오는 백지화될 것이 뻔하였으므로 10.1사건 의식에서 미국과 이승만에 의한 단정노선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2) 민주주주의의 왜곡과 인권의 종속반공이념과 자유민주주의 본질간의 괴리는 해방 이후 줄곧 한국사회의 민주화에서 해결과제로 제시되어 왔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외치면서 반공을 앞세워 독재, 혹은 권위주의를 강압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시에,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억압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위배하고 유보하는 정치사의 아이러니가 빚어진 근원은 해방정국, 그 중에서도 10ㆍ1사건에서 찾아질 수 있다.군정이 가질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적 보수성과 한국외적 상황이 군정을 통해 한국국내정치에 여과 없이 반영되던 구조적 한계상황 속에서 한국의 국가를 건설해야 되었으므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원초적으로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전략가들에게 자의적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사례에서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극좌와 극우의 대립 속에 합작운동이 실패하고, 정치지도자들간의 정치ㆍ비정치적 반목과 갈등은 테러와 암살로까지 이어지는 파국을 초래하였다. 여운형과 김구, 김규식 등의 정치지도자들로 상징되는 여러 갈래의 중도 및 좌파 노선이 배제된 후, 제도권의 이념적 스펙트럼의 폭이 극도로 축소됨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들어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체제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비교적 최근까지 헌정사 왜곡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쳐왔다.진덕규 교수는 미군정의 반민주, 반민족적인 정치사적 역할과 당시 친일파, 보수적 기회주의자, 모리배들의 책동이 맞물려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이 구조적으로 정착되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 양키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의의와 가치가 왜곡, 훼손되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건국과정에 녹아들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이런 결과를 전적으로 양키 데모크라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좌우의 극단적 정치세력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쟁의 비합법투쟁을 결합하는 투쟁노선을 견지해나갔다. 그리고 조직활동도 1947년에 들어서는 그 전기간을 통해 지방당의 조직력 강화, 농촌에서의 지하조직 확보, 비합법 노동자조직의 결성 등 미합법체계 위주로 그 대중적 기반을 재조직해나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남로당 지지를 표명하여 10월항쟁 이후 합법적 활동을 계속해온 전농도 1947년 2월 21일 제 2 차 확대집행위원회를 열어 제 1 차 확대집행위에서 결정된 이래의 토지개혁안, 즉 무상몰수무상분배안을 남로당의 강령에 준하여 보다 구체화한 「남조선토지개혁안에 대한 법령초안」을 채택 공식화하였다. 이 안은 토지개혁에만 그치지 않고 5 정보 이상의 지주의 가축, 농구, 주택 등 일체의 생산수단을 몰수한다고 규정하여 지주 대 빈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과의 계급적 대항관계를 더욱 명료히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단계에 이르면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내걸고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과 조직적인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인민정권의 계급적 기초로서 노농동맹을 일층 강화해나가게 되었던 것이다.이러한 전농의 운동노선은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거쳐 전평 주도로 전개된 3,22총파업에의 조직적 참여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격증하는 미군정의 탄압과 극우단체의 테러에 대항하는 한편 공위재개를 촉진하기 위해 조직된 3,22총파업은 전평산하의 철도 체신기관, 공장의 노동자 50여만 명이 참여하여 전평 간부의 석방, 1일 4홉의 쌀배급, 박헌병 체포령의 취소 등을 요구하며 시작되어 3월말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본격화된 조직적인 총파업이 민전, 전농산하의 17만 명의 농민, 8만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면서 전국적인 민중항거로 확산되는 가운데 ‘삼상회의 결정을 즉각 실시할 것’‘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을 내세우며 미군정에 대한 정치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 등이 경찰, 관공서를 직접 공격하는 등 그 투쟁형태도 조직적 무장이른다.
    인문/어학| 2002.10.15| 11페이지| 1,000원| 조회(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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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미치는 영향
    일본대중문화개방에 따른 한국대중문화의 영향Ⅰ. 서 론들어가기 앞서 일본대중문화개방 문제가 최근들어서 찬·반 양론에 맞서있다고 자주 접하고 있다. 일본대중문화개방 문제를 두고 이토록 찬·반 양론에 맞물러 서로 주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사해봤고 나름대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계획안을 발표했다. 굳게 닫혀 있던 일본 대중문화가 빼곡히 문을 연 것이다. 개방하냐 안하냐에 대한 논의가 약 14년간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개방으로 판가름이 난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문제는 한국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하거나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가져가는 '선물보따리'처럼 다뤄져왔는데 그 때마다 번번히 '국민정서’등을 이유로 보따리는 빈보따리가 되고, 개방문제는 계속 다음 정권에 숙제로 미루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일본 정부는 왜 번번이 속아가면서도 지치지 않고 일본문화의 개방을 요구하는 것일까. 문화침략론에서 신식민주의론까지 무시무시한 음모론도 있고 미국 통상대표단처럼 자국기업 대행 세일즈를 한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국민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을 없애고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더 큰 의의를 두고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일본여론은 한국 역대 정권의 문호개방 시도에 장애요소가 되었던 한국인의 반일적인‘국민정서를 한국언론에 의해서 선동된,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수상쩍은 것으로 보는 것 같다. , 등 일본 패션 잡지가 한국 젊은 세대의 패션교과서가 된 지 수십년이 되고, 곳곳의 노래방에서는 일본노래가 자주 불리며, 위성방송을 시청하는 세대가 수백만을 넘어서는 현실을 보면 때가 되면 튀어나오는 반일감정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한국인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오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 일본의 대중문화를 '짠바라(사무라이 시대극)와 포르노'뿐인 저질문화라고 치부하는 문화적 우월감, 역사적으로 문화를 전수한 입장이었던 민족적 자존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먼저 들여오고 비디오와 방송은 나중에 개방하는 순서를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요시장은 일본가수의 국내공연을 우선 허용하고 음반판매와 가요방송 순으로 개방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순서로 개방이 추진돼 두나라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될 것으로 점쳐진다. 대중문화 개방이 단행되면 한.일간 합작사업 적극 추진될 전망이다. 이미 음반 영상 등 여러 분야에서 합작을 위한 물밑작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태다. 일본 대중문화유입은 단기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 등에 큰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최근 부산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일본 영화들이 높은 관심을 끌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대중문화가 일단 호기심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년층에서는 문화향수를, 젊은층에서는 문화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켜 우리 문화에 폐해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우리 문화산업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고 문화를 살찌우는데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이라는게 문화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삼성경제연구소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개방을 분석, 최근 발표한 "일본대중문화개방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 분석"보고서에서 2002년까지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의 30∼35%, 영화 음반비디오 등은 10∼15%를 일본 상품이 점령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연구소는 2002년에 국내 영화음반 비디오및 애니메이션 시장규모는 1조원을 넘을 것이나 이중 국내생산물은 절반에도 못미치는 약 4천2백33억원에 불과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국내문화산업계가 일본 문화 수입으로 입는 매출 감소액은 2백억∼2백50억원정도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감소액은 2백억∼2백50억 원정도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반면 방송시장은 최대한 개방을 늦춰 2001년말~2002년 초가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은 초기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대처하기에 따라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스상품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럽국가들의 주장이다. 93년 9월 카리뇽 당시 프랑스 문화상을 비롯한 4천명의 문화계 인사들은 에 미국의 '문화덤핑'에 반대하는 성명의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테랑 당시 대통령 역시“문화적 창조물은 단순한 상품과는 다르다”며 “(미국식) 획일문화의 보편화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이러한 프랑스와 미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차이를 한국과 일본의 시각차이와 비슷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즉 프랑스형 문화는 지식인들만 들고 이끌어가며 대중에 보급하는데 반해, 미국식 문화는 대중차원에서 형성되어 살아남는 것이 위쪽으로 퍼져 올라간다는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는 일찌감치 미국형으로 발전한 데 비해, 아직 한국은 지식인이 주도하는 프랑스형에 가깝기에 문화개방에 대한 관점이 상이한 것 같다고 의 논설은 지적하고 있다.한편 개방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듯한 일본의 대중문화 관련업체들은 정작 한국시장이 열리는 것에 대해 당장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같다. 보수적이고 신중한 일본기업 풍토에 더하여,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시장이 생긴다는 것에는 아직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빠른 시장개방을 절실히 바라는 쪽은 한국의 관련기업 들인 것 같다. 대형 음반사, 영화사, TV프로덕션 등과 독점 공급계약이나 합작계약을 체결해 기왕에 들어올 소프트를 아예 '아도를 치면'큰돈을 만질 수 있을거라는 얘기를 한국쪽에서 여러차례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기업들은 장기적으로는 한국시장의 가능성에 대해서 낙관하는 것 같다. 조용필과 계은숙의 정서가 쉽게 일본에 받아들여지는 만큼 일본 가수들의 정서가 한국인에 쉽게 밀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성공한 사례들을 볼 때,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언어적으로도 근사한 한국에서는 더욱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며, 개방도 되기전에 의 판권이 팔리고, 등이 소개되는 것도 한국이 일본문화를 받아 들이는 데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늦게 출즈가 최소한 비디오로 소개될 것이다. 시리즈로 기네스북에 오른 야마다 요지 감독의 등이 시리즈와 함께 소개되어 TV와 CATV에서 많은 호평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극장흥행을 좌우하는 것은 젊은 스타들이 출연하는영화가 될 것이다. 미야자와 리에의 누드 사진집이 한국에서 소동을 빚었듯, 일본의 젊은 스타들의 영화가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일본의 젊은 우상들이 나가부치쯔요시, 튜브, 드림컴 트루, TRF, 구 보타 도시노부, SMAP 등의 톱가수들과 함께 한국 오빠부대의 시선을 현해탄 건너로 옮겨 놓을지도 모른다. 이쯔와마유미, 다니무라신지 등 가창력있는 가수들과 미야코 하루미, 요시이쿠조 등 우리 트로트계열에 가까운 가수들이 디너쇼와 함께 음반을 풀어놓을 것이고 젊은가수들은 올림픽 체조경기장이나 잠실 등에서 초기에는 채산성을 무시한 콘서트를 가졌다. 어린이들의 학용품이나 의상 따위도 만만찮다. 그동안 에만족하던 어린이들은 국제성을 인정받은 그리고 최근 어린이 시청자들의 집단발작으로 문제가 된 를 포함하여 , , 등 특수촬영 SF시리즈까지 마음껏 즐기게 될 것이다. 그것도 TV, 비디오, 극장용 특별판, 양말에서 책받침까지의 캐릭터 상품, 봉제인형까지 두고두고 울궈가며 즐길 수가 있게 된다. 이 모든 얘기들이 다 현실이 된다고해도, 전체적인 금액은 대일무역 역조 전체금액에 비교할 때 별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액면 규모만을 가지고 보면 헐리우드도 별게 아니다. 미국 영화계의 연간 총매출액은 80억달러에 불과하다. 97년 할리우드 메이져 가운데 매출액 최고인 소니컬럼비아가 23억 달러였으니, 나머지 메이저들과 독립영화사들까지 합해도 그 수준을 넘지는 않는다. 요새 환율로 계산해도 14조원이 채 안되는 돈이다. 매출액으로 보면 삼성, 현대의 5분의 1도 안 되고 10 대 재벌에 겨우낄 만한 금액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할리우드가 현대, 삼성의 5분의 1 규모라는 얘기가 나올까?박찬호가 작년들은 자연스레 대만에서도 스타가 되었다. 중계유선이 정식 CATV로 인가를 받으며 현재는 일본의 프로야구도 중계한다. 일본기업은 자신의 물건을 팔기 전에 상대방의 '상품'을 사주는 예의도 잊지 않는다. 상호주의의 명분을 미리 만드는 것이다. 테레사텡에서 비비안 수에 이르기까지 이 덕에 일본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연예인수가 적지 않다. 또한 팬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작년에는 도에이영화사가 대만서도 인기높은 도요카와 에츠시와 스즈키 호나미가 주연한 라는 영화를 일본에 앞서 대만서 먼저 개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홍콩의 경우 활발한 자국영화와 음악의 시장이 있으면서도 일본 대중문화는 꾸준하게 뿌리를 내려왔다. 영화의 경우 일본의 '소프트 포르노' 영화 전문 상영관 체인은 수십년째 영화의 경우 일본의 '소프트 포르노' 영화 전문 상영관 체인은 수십년째 자리를 잡아왔고, TV의경우 위성방송이 생기면서 많은 프로그램 공백을 일본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들이 메우고 있다. 특히 가요부문에서는 몇몇 일본의 인기가수들은 고정팬을 확보하여 홍콩 공연시 입장권이 매진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보다 주목할 것은 홍콩의 인기가수들이 일본곡을 많이 커버하는 경향이 있어 홍콩가요계의 트렌드가 일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알란 탐에서 앤디 라우(유덕화), 재키쵱(장학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톱스타들이 일본의 나가부치 츠요시, 사잔 올스타즈, 기스기 다카오, 안젠지다이 등의 히트곡을 커버하여, 멜로디에 익숙해진 팬들이 '오리지널'을 찾아지널'을 찾아지널'을 찾아가는 데 디딤돌 이 되어주었다.앞서 잠깐 밝혔지만 일본에서 대접을 받게 된 아시아의 연예인이 나중에 자연스럽게 일본문화를 소개하는 '전도사'가 된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하다. 중국에서 덩사오핑보다 유명했다는 덩리쥔이 대만에서 일본으로 와 히트시킨 일본노래는 거의 전곡이 중국어로 녹음돼 전파되었고 지금도 중국, 대만, 홍콩등지에서 인기곡으로 애창되고 있다. 홍콩출신의 아그네스 찬, 대만의 비비안 수, 싱가폴의 딕 리 등 많은 가수들이 .
    인문/어학| 2002.10.15| 7페이지| 1,000원| 조회(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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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왕안석 평가B괜찮아요
    제목: 송시대와 왕안석의개혁정책학 과 : 인문학부학 번 : 2000010043이 름 : 홍 현 수교 과 목: 동양사학입문제 출 일: 2000년 12월1일담당교수: 강길중 교수님★목차★Ⅰ서론Ⅱ본론♠송대의 사상♠보수파와 개혁파♠왕안석의 정치·경제 사상♠왕안석의 이념Ⅲ결론서론왕안석은 송(宋)국의 신종시대의 인물이다. 송시대(960년-1279년)는 1125년 정강의 변 이후를 정점으로 북송시대, 남송시대로 구분한다. 송시대는 당대의 귀족사회와 달리 문신관료체제의 나라이다. 이 중심에는 유학을 중심으로한 사대부가 중심이었다. 즉 학문과 정치가 완전히 일치를 이루는 사회였고, 자유, 평등, 경쟁의 원칙이 보장되는 사회였다. 하지만 너무 학문위주로 나아갔고, 쓸데없이 관료가 지나치게 많았다. 그리하여 송시대는 대북방유목 민족과의 관계에서 군신관계로 우위를 차지하다가 점차 대등관계, 예속관계로 나아갔다. 처음 북방민족(서하, 요, 금)은 송과의 관계에서 지배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제욕구 충족의 대상으로써 송을 압박해갔다. 하지만 원나라 성립이후 송은 원나라의 밑으로 들어가 제일 낮은 계급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항상 서구의 세력에게 우위를 차지한 중국은 밀리기 시작하여 청나라 말기로 가서는 서구의 세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송시대의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면, 정치적인 면에서 송시대는 황제가 관료의 선발, 선임, 임용을 장악하였고, 관리등용법이 정형화를 이룬 시기였다. 당(唐)시대에 나타났던 관리등용에서의 폐단을 막기 위해) 이름이나 3대위의 관직을 가죽으로 싸 시험관이 알아 볼 수 없게 하는 법호명법,) 따로 다른 사람이 응시자의 답을 필사하여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법등록법,) 시험관을 시험칠때까지 가두어 둠쇄원제도,) 고관자제를 따로 시험을 치게하는 제도별두시제도를 실시하여 개인적인 은원관계를 폐지하여 시험성적의 우열로만 관료를 등용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관료의 품행을 알 수 없어 또 다른 부패가 생기게 되었다. 관료정치조직도 송은 당이 몇 사람에 의해서 권력을 장악한 것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법은 거대한 변화에 직면한 이 시대의 중국인들에게 시사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및 여러 서구의 유럽에까지 농업잉여문제 등에 관련된 정책에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안석은 세계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역사상의 수많은 인물들이 그러하였듯이 왕안석도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오해받은 경우도 적지 않다. 왕안석은 정말 급진적인 개혁자였을까? 아니면 유교적 전통의 폭넓은 유산 속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보다 나는 왕안석이 어떤 중상모략과 반대에 부딪쳐도 자신의 개혁을 펼치는 용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본론에서 왕안석이 개혁과 사상을 면밀히 살펴보겠다.본론왕안석이 국정을 장악하여 개혁을 실시하면서 당면한 큰 문제는 대다수 관료들의 비협조적 태도였다. 개혁에 반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명신(名臣)들로서 한기(1008-1075), 부필(1004-1083)등은 경력연간의 개혁을 주도한 명망 있는 관료들이었고, 구양수(1007-1072), 여공저(1018-1089)는 처음 왕안석을 지지한 자들이었고, 사마광(1019-1086)은 북방출신 보수세력의 영수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 외에도 사천출신의 대표적 관료인 소식(1036-1101), 소철(1039-1112)형제도 그러했다. 1071년 왕안석은 재상의 자리인 동중서문화평장사를 배수 받으면서 조정 내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차례로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당시 북 중국을 휩쓴 기근으로 개혁 정책 하에 있던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었고, 반대파에 기근 지역의 참상을 그린 는 신종황제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역법과 면행전법은 수도인 개봉부에 많은 물의를 야기했다. 이를 기화로 신인태후와 환관들은 왕안석을 퇴진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여, 왕안석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로 인해 사임을 하게되었다. 그리하여 신종은 이를 계기로 개혁에 대하여 처음으로 동요의 빛을 보이게 되었고, 일부 물의를 빚은 시책치가인 동시에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는 다양한 학설이 제출된 사상적 태동의 시기에 살았으며, 그 역시 시대적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시 송대의 유학은 한·당을 넘어서서 유교적 전통의 최전성기였다. 그들은 유교적 유산의 넓은 틀을 벗어나지 않은 상대적 차원에서 새로운 깊이, 내용, 형식, 사상의 국면을 열었다. 이른바 송학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사상이 있으면, 그것을 둘러싼 해석의 차이로 여러 학파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당시 그들 모두는 국가의 최종목표가 도덕적 사회의 실현에 있으며,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안석은 정통의 지위를 얻은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신학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은 개혁의 실패, 당파적 공격, 정치적 반감 그리고 이념보다는 명목상의 계승에 그친 추종자들의 보잘것없는 행동에 남송대 이르러서는 유교에서 이탈한 이단으로 매도되어 그 기반을 상실하였다. 여기서 왕안석의 사상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북송계의 사상의 다양성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북송대의 사상은 다양한 흐름, 발전적 진화과정, 즉 정치이론의 발달과 상이한 학파들의 출현, 사상 면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행동을 통해 나타난 대립·충돌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당시의 사상계에는 세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첫째, 소공권이 지적한 공리주의적 이념을 둘 수 있다. 당시 국가재정의 고갈, 상업의 발달, 군사력의 약화, 상황대처능력을 상실한 관료기구의 무능력에서 나왔다. 둘째, 개인의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공리주의 적 이념처럼 현실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경솔하고 사려 없는 시책을 피하고 정상적인 해결책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도덕적 지도력과 청렴한 관료들의 영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세 번째는 도덕성의 형이상학적 기반을 발전시켜 도덕적 가치가 공리주의적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경향이다. 즉 현실보다 도덕적 인간들의 면모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송학의 정통성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의 송학은 다이의 충돌은 주로 정치이념의 차이였다. 이 두 세력의 정치이념의 차이는 중심인가, 아니면 중심인가 하는 문제이다. 주례이념의 중시는 도덕적 사회의 수립을 목표로 하여 민의 일상사를 통제하는 다양한 제도의 수립을 지향하는 간섭적인 국가사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근대의 용어로 풀이하자면, 민의 행동양식을 규제하여 일정한 틀에 집어넣게 위한 수단으로서 관료들과 국가주도 시책을 적절히 통제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왕안석은 강제의 의해 통제가 수신이나 자기제어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윤리적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도덕적 사회에 대한 유교적 이상을 궁극목표로 설정했으면서 실제로는 정치제도의 개혁을 일차적 과제물서 추진한 것은 유교적 전통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제도개혁가이다. 반면 보수파는 기존의 정치제도에 대해 대체로 만족, 부분적인 개선만을 주장, 기존의 정치제도를 더욱 잘 운영하는데 주안을 두었으며, 그들은 국가의 도덕적 지도력, 모범, 영향 등이 국가의 지도원리가 되어야 이상적인 도덕사회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왕안석은 또한 불교에 관심이 무척 컸는데, 그는 세상사를 대하면서 반야사상의 특징인 초연하면서도 따뜻한 눈으로 몰아 적인 용기와 인내심을 갖고 도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상대하였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정치·사회적인 배경에서도 차이점을 보였는데, 송 중기로 가면서 과거 합격자 및 고관의 수에서 남방출신자가 북방출신자를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남방출신이며 최근에야 정치무대에 등장한 개혁파는 권력의 확대와 이의 행사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즉 관료기구에 새로 공급된 신선한 피와 같은 역할을 한 반면, 보수파는 인척, 붕우관계 등으로 서로 얽혀 있었으며, 기존의 관료기구 방식에 안주하였다. 경제적 배경에서도 개혁파는 신흥의 중소 지주층으로서 수입은 봉록에 의존하였다. 하지만 보수파는 대 지주층으로서 대토지 소유자와 이해관계를 같이하였다. 화폐경제의 발달과 관련하여, 보수파는 화폐경제에 대하여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교사상에 배치되는 利의 추구행위라 43-BC80)과 유안(715-780)등을 들 수 있는데, 송대에도 범중엄등이 관심을 가졌다. 왕안석은 전통적 경제시책 말고 국가 전체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민의 재력을 안정시키는 여러 시책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왕안석은 세입 증대가 아닌 생산력 증대를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방법을 통하여 세입의 증가를 도모하였다. 즉 그는 국가의 재정지원 범위와 규모를 확대하여 국가는 증가된 생산력과 일반적인 번영 속에서 항구적인 세입 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왕안석은 "정사란 이재(理財)이며 이재는 의로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망광이 이에 "개혁정책이 너무 의에 위반한다"고 비난하였지만 왕안석은 "천하를 위해 이재하는 것은 이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유가의 경제관에서 보면 국가지출을 줄이는 것은 조세부담이 경감되어 일반 민은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안석은 국가 지출을 늘려 생산력이 증가되므로 민은 더욱 부유해진다는 것이다. 경제를 동적이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다. 일곱 번째는, 왕안석은 여타 유가와 마찬가지로 관개와 농업 생산의 증대를 강조 농민보다는 상인에게 조세를 무겁게 해야한다고 주장한 중농사상가였지만 일반 유가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그는 사회 경제적 배경의 영향아래 대토지 소유와 고리업자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가 청묘법의 실시로 고리대업자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려한 것으로 보아 하층민을 먼저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상업에 대한 국가의 적극개입을 주장한 일종의 중상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왕안석은 균수법의 실시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지로부터 비지역으로 운반하는데 따르는 문제점을 시정하려하였다. 이에 국가는 일정지역에서 수요가 공급보다 많으면 이를 직접판매하고, 공급이 수요보다 많으면 이를 사들인다는 것이다. 또한 시역법을 실시하여 직접 관료를 통해 중소상인들로부터 물자를 구입하였다. 균수법과 시역법은 국가재정의 확보와 시장가격의 안정을 목적으로 하여 실 있다.
    인문/어학| 2002.05.29| 11페이지| 1,000원| 조회(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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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학] 아편전쟁의 원인과 영향 평가A좋아요
    아편전쟁의 원인과 영향Ⅰ. 머리말아편전쟁은 지금까지의 전통적 체제를 고집해왔던 중화세계와 자본주의적 발전도상에 있음과 동시에 그 내부적 발전 때문에 바깥 세계로 그 범위를 넓혀 가려했던 서양 세계와의 격돌이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남경조약을 체결하고 광주·상해 등 5개항을 개항하고 공행제도의 폐지를 약속하였다. 여기서부터 중화세계는 한 걸음씩 해체의 길을 밟기 시작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이 촉진되었고 더불어 그것과 표리의 관계에서 열강에 의한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면 중국 사회의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아편전쟁에 대해서 알아보자.Ⅱ. 본문1. 아편전쟁의 배경1) 광동무역체제(廣東貿易體制)- 중국적 근세와 서양적 근대의 충돌아편전쟁 이전에는 중국과 여러 외국사이에는 대등한 외교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입장에서의 외국과의 관계는 외교도 무역도 아닌 대체로 조공관계(朝貢關係)) 전근대사회에서 제후나 속국이 사신을 통해 종주국에게 정기적으로 공물을 받치는 행위. 본래 제후가 방물을 가지고 직접 천자를 알현하여 신화로써 예를 다하고 군신과의 의리를 밝히는 정치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중국 한족사이에 전개되던 이런 현상이 점차 주변 이민족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조공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사회 국제정치의 한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국은 한 대 이후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근거하여 주변 국가들을 제후국으로 간주하고 천자에 대한 정례적인 조빙사대(朝聘事大)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주변국은 중국에 대해 조공을 받치고 중국은 주변국에 대한 답례로 하사품을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 주는 책봉정책을 통해서 상호간의 정치적 관계를 유지 시켜 나갔다.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장기간에 걸쳐 중국지배 계층의 의식 속에는 중국 문명을 사모하여 항해해온 만이(蠻夷)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중화사상 혹은 천하적 세계관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사상이 뿌리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광동 무역체제란 이러한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 적자였고 그 차액은 은으로 결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영국 입장에서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차 무역에서 동인도회사로 인해 배제 당한 지방무역상인 및 본국 산업자본가가 동인도 회사의 중국 무역독점권 폐지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요구로 1792년(乾隆57년) 매카트니(G.Macartney 1737∼1857)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이 광동무역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보내졌다. 체제의 개선이라고 하지만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바 는 청국과의 대등한 조약을 통한 통상의 보장, 즉 조약체제로의 전환이었다. 그러나 건륭제는 매카트니의 내한을 종래의 조공으로 이해하고 영국 측의 제안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1816년(가경21년)년 암허스트(W.P.Anherst 1773∼1857)의 파견은 본국으로부터의 비판을 완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동인도회사가 솔선해서 희망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삼궤구고(三 九叩)) 중국 청나라때 시행한 황제에 대한 경례법, 궤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고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 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하나의 단위로 세 번 되풀이하였다. 고두의 예는 청나라를 이전부터 있었으나 청대에 들어와서 1궤3고, 2궤6고, 3궤9고 등으로 제도화하고 외국 사절에게도 강요하였다.의 문제로 청국측과 타협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알현조차 실현되지 않은 채 퇴거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차례에 걸친 실패 후 영국은 1834년(道光14년)년 초대 청국 주재 수석감독관이라는 자격으로 네피어(W.J.Napier1786∼1834)를 보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형식을 무시하고 입항 허가 없이 광동에 상륙하여 양광(兩廣)총독을 상대로 교섭에 들어가려 했지만 조공사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소득 없이 그는 마카오로 퇴거한 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망 소식은 영국에서 '비극적 죽음' 이라고 선전되어 중국에 대한 무력행사를 위한 캠페인으로 이용되었다.3) 아편문제중국과 동인도회사의 8년) 홍내시경 黃爵滋(1793∼1853)의 보고서에는 1823(도광 3년)이전은 매년 수백만냥, 1823년에서 1831년 까지 매년 천칠백만냥 내지 천팔백만냥, 1834년까지는 매년 이천만냥, 1834년 이후에는 매년 삼천만냥 이라고 하고 있다. 당시 국고에 들어오는 正稅 액수가 약 삼천만냥 남짓 이었음을 가만하더라도 시 숫자가 갖는 의미는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은의 대량 유출은 은(銀)·전(錢)의 비가(比價)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이른바 '은귀전천(銀貴錢賤)'의 경제위기를 출현케 했다.) 은전비가(銀錢比價)는 통상 은 1兩에 대해 동전 1,000文 안팎이었지만 하북성의 한 통계에 의하면 1,800년에는 은 1兩이 1,070.4文이었던 것이 1836년에는 1,487.3文, 1838년에는 1,572.2, 1842년에는 1,637.8文, 1846년에는 마침내 2,208.4文에 이르렀다. 이것은 북방의 경우이며 아편전쟁을 전후한 남방의 은가상승률은 이것보다 훨씬 심했다고 추정된다.아편유입이 증가하고 은가의 등귀현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아편금지령의 목적도 크게 변화하였다.) 1729년에 시작된 초기 금령은 당시의 밀수량이 수백 상자 정도였었기 때문에 국민의 건강·위생·도덕을 정면에 내세웠던 것이지만, 道光 연간에 들어오면 은의 유출을 방지하려는 관점을 첨가한 금령이 되면, 특히 1830년대가 되면, 그 중심은 아편유입에 수반된 은의 유출, 은가 양등에 대한 대책으로 되어 완전히 경제문제로 옮아갔다. 요컨대 은가 등귀가 가져온 사회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도 은의 유출을 억제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로 되어왔던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려는 열쇠는 아편문제를 어떻게 해결한 것인가에 있었다.당시 아편대책을 둘러싸고, 청조 내부에서는 이금론(弛禁論), 엄금론(嚴禁論)의 의견이 있었다.) 이금론을 주장한 관리는 許乃濟이고 엄금론의 대표자는 黃爵滋이다. 太常寺 少卿인 허내제는 아편의 해독은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 하급관리와 무뢰한이 결탁하고 있어 밀매의 금지가 불가능하며 禁令이중요시한 서약서) 그 내용은 "이후에 내항한 선박은 영원히 아편을 가지 오지 않으며, 만일 가져올 경우 한번 색출되면 하물은 모두 官이 몰수하고 사람은 곧 正法(처형)한다"는 것이다.에 대해서는 응하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저항하였다.영국 측의 아편제출은 거주지의 봉쇄라고 하는 비상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조치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당시 상인들의 총 대변자인 무역 감독관으로 파견된 엘리어트는 임칙서라는 강경파 관료에게 일시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나 본국의 외무장관 팔머스톤(H.J.Palmerston 1875∼1865) 에게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는 한편 중국에 대한 함포정책의 실시를 진언하였다. 엘리어트의 보고를 받은 팔머스톤은 광동무역체제의 타파를 대위명분으로 군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의회에 파병을 위한 특별 재정지출 의안을 제출하였다. 다음해 4월에 의안은 하원에서 9표 차이로 가결되었고 상원에서도 통과하여 20척의 함선 4천 여명의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승인하였다.1840년 6월 광동에 도착한 영국군은 광동만을 봉쇄하고 계속 북상하여 8월에는 천진 (天津)에 가까운 백하(白河)하구에 도착하여 직예총독 기선(琦善)에게 팔머스톤이 보낸 영국측의 요구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서한에서의 요구사항에는 몰수된 아편에 대한 배상, 중·영 양국의 대등한 교섭, 해도 (海島)의 할양, 공행제도의 폐지 등의 항목과 임칙서에 대한 해임요구였다. 영국의 원정함대의 위세에 놀란 청국조정은 임칙서를 파면, 유배하고 기선으로 하여금 흠차대신의 직을 이어받도록 했다. 광동에 파견된 기선은 영국과 타협 노선을 취하여, 광주만에 설치했던 포대시설을 철거하고 임칙서가 조직했던 민간의 용병인 수병(水兵)을 해산시키고 군대를 삭감하는 등 양보를 거듭했다. 그러나 홍콩할양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영국이 홍콩 섬을 무력으로 점령하게 되자 청국조정은 그 책임을 기선에게 물어 파면과 함께 재산을 몰수하고 영국에 대한 강경한 자세로 할수없이 배상금 지불과 영국군의 광주주둔을 승인하는 광주화약(廣州和約)을 맺었 개방되어 연안의 산지에 근접한 적당한 지점에 새로이 4개의 상항(商港)이 개방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얘기했던 영국제품은 1844년 비해 75만 파운드 가까이 감소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미첼보고서는 극히 구체적이며 또 비관적인 것으로, 중국무역의 전도(前途)에 장밋빛 꿈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의 문서였다.. 대 중국 수출량의 비약적인 증대를 기대했던 영국 측에게 현실은 그것을 배신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최대의 원인은 약탈적 무역인 아편수출로 인한 구매력의 고갈이었다. 열강으로서는 남경 조약 이후에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만큼 무역효과를 얻어내지 못하자 중앙조정과 직접교섭을 통하여 유리한 조약으로의 개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 측에서는 마침 태평천국) 아편전쟁의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 청조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 결국 태평천국운동으로 폭발하였다.(1850) 태평천국은 정복왕조라는 청조에 의한 전통적인 봉건지배체제와 함께 지주제와 조세의 은납화라는 사회경제체제 하에서 고통을 받아오던 민중들에 의해 이러한 질곡에서 해방될 새로운 사회로의 탈출욕구가 분출된 것이다. 그 새로운 사회란 고대로부터 중국의 이상적인 사회 즉, 태평사회(대동사회)에 기독교적인 평등사상을 접목시킨 태평천국이었다.의 출현으로 전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서서 청국과의 교섭에 임할 수 있었다. 남경조약 체결 후 12년째인 1854년 영국공사 보우링(J.Bowring 1792-1872)은 프랑스와 미국의 공사와 제휴하여 양광총독 섭명침(葉名琛 1807-1895)을 통하여 남경조약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영국 측이 의도했던 개정의 골자는, 통상활동을 위한 내지 여행권 또는 장강의 자유 항해권, 아편무역의 합법화, 중국 노동자 해외이주를 위한 법률재정, 외국상품의 내지 관세 및 이금부과 면제 외국공사의 북경주재승인 등이었다. 그러나 섭명침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영국은 다시 강노순무에게 태평천국 진압에 대한 원조를 대가로 교섭하려 하였으나 실패에 그치고 있다.
    인문/어학| 2002.05.29| 8페이지| 1,000원| 조회(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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