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REPORT]- Fashion History-Art Deco 시대에 관한 연구1. 아르데코의 개관아르데코란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 장식 미술 ? 산업 미술 국제전?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파리 중심의 1920~30년대 장식 미술. 아르 데코라티프( art decoratif : 장식미술 )의 약칭이며, ?1925년 양식?이라고도 한다. 흐르는 듯한 곡선을 즐겨 썼던 아르 누보(art nouveau)와는 대조적이며 기본형태의 반복, 동심원(同心圓), 지그재그 등 기하학적인 것에 대한 취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기계시대로 들어선 신생활과의 관련을 당연히 지적하게 되며, 기하학 형태는 꼭 합리적 또는 기계적인 해결에 의해서만 처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우아한 취미에 뒷받침되어 있다. 아르 데코 원천의 하나가 이국정서에 넘친 러시아발레단에 있었던 사실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때는 화려한 색채의 기하학적 형태가 펼쳐졌다. 이러한 뜻에서 같은 1925년 전에 르 코르뷔지에가 순정(純正)한 기하학에 의거하여 출품, 전시하였던 ?에스프리 누보관[新精神館]?은 뛰어난 합리적 정신에서 아르 데코와는 전혀 다른 경향을 나타냈다. 아르 데코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는 공예의 폴로, 브란트, 르그랑과 포스터의 카상드르 등이 있다. 패션계에서는 폴 포와레와 샤넬이 아르 데코의 취미를 받아들였다. J.호프만이 주재하였던 빈공방(Wien 工房)의 작품은 그 고아한 취미성에 의하여 아르 데코와 근접한다. 그리고 30년 전후의 뉴욕의 건축장식에도 흥미 있는 아르 데코 양식이 나타났다.20세기초는 아직까지 아르누보가 국제적인 예술 양식으로 예술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예술사조가 합리성과 단순성, 그리고 구조적 기능성을 요구하게 되면서 아르데코가 태동하게 되었다. 아르누보가 '수공예적인 것에 의해 나타나는 연속적인 곡의 선율을 강조'하여 공업과의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반면에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 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고 고전적인 직선미카소, 브라크), 현실의 대상을 재현시키는데 써온 조형 요소들, 즉 점, 선, 면, 색, 형으로만 표현한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추상주의(Abstract), 일체의 대상을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환원하고 모든 대칭은 배제하면서 색채는 삼원색과 무채색을 사용한 기하학적인 구성으로서 주관적인 관계를 초월한 몬드리안으로 대표되는 신조형주의(Neo-Modernism)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순수하고 장식 없는 선의 진지한 근대주의 이론은 아르데코 디자이너들을 제어하지 않았다. 노골적인 색채, 역동적인 기하학의 나열, 반짝거리고 반사되는 표면은 당시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적극적인 행동, 속도, 양식과 조화를 이루었다. 삶에 긍정적이던 그들의 작품은 햇살, 폭포, 구름, 꽃, 동물 및 자연의 힘을 기하학적 패턴으로 추상화시킨 것이 많다. 총체적인 디자인의 실험인 아르데코는 무늬목, 옻칠, 새그린(상어가죽), 청동, 연한 유리등의 이국적인 재료를 크롬이나 플라스틱에 섞어 거대한 건축에 극적인 느낌을 주었고, 가재도구와 패션은 매력적이었다.§ 건축다른 예술의 발전과정과 마찬가지로 아르데코 건축의 합리주의(Rationalism) 및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특성은 아르누보 건축가들에 의해 이미 준비되었다. 데 스틸 그룹은 1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에 Mondrian의 원리에 따른 엄격한 기하학적 디자인을 추구함으로써 유럽 건축에 서 가장 선두에 서고, 이들의 영향은 독일의 바우하우스 그룹에 의해 수용되었고 입체파와 함께 아르데코 건축에 미학적 근거를 제공한다.아르데코 양식의 건축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가는 건축의 순수주의(Purism)를 이끌었던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 6~1965)이다. 그는 건축과 기계 문명과의 결합을 시도하였으며 자신이 지은 주택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의 건축은 기능성이 결여된 장식을 배제하려는 합리주의 및 기능주의의 결과이다.아르데코 양식은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며 단순성 추구와 직선적이고 구hn Mead Howells), 조오지 하우(Georrge Howe), 윌리엄 레스케이즈(William E. Lescaz e), 펠릭스 드 마를르(Felix de Marle) 등이 있다.대표적 초고층 건축물로는 조닝법에 의한 셋백(Set-back), 구성 대칭적 형태, 장식 배제 구조미의 승화와 slickTech를 사용하여 저층부 활용한 것이 특징적인 크라이슬러 빌딩(1930), 록펠러센터(1934)와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있다.▲ Empire State Building◀City Bank Farmers Trust BuildingChrysler Building▶§ 조각 / 회화 / 공예- 아르데코 시기의 조각은 '형태와 태도와 표현들이 현저하게 양식화되어 추상화 경향으로 가고 조각 재료면 에서 보다 더 다 양한 소재들이 사용되었다. 즉 아르누보가 자연의 원초적 힘을 표출하기 위하여 유동적 형태를 선호한 반면, 아르데코에서는 본 질적 요소들의 기하학적 축소를 시도하여 단순하면서 추상적인 기하학적 형상을 추구하였다. 아르누보에서는 조각이 별다른 중요성을 부여받지 못했지만 아르데코에서는 조각이 추상적, 기하학적 표현의 중요한 분야로 인정되었다. 아르데코 조각 역시 다른 예술분야와의 교류가 폭넓게 이루어져 건물 외벽을 저 부조로 장식한다던가 실제 크기보다 커다란 크기의 조각들이 주랑(peristle)안에 세어지기도 하였고, 커다란 분수에 군상(multiples sculpture)으로 형상화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꽁그땅뗑 브랑뀌(Constantin Brancusi)로부터 시작하여 미래파의 움베르토 봇치오니(Umberto Boccio ni), 쟌 마르텔과 조엘 마르텔 형제(Jan & Joel Martel),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앙또안느 페브스너(An toine Pevsner) 등이 있다.- 아르데코 회화를 형성시킨 가장 중요한 실험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죠르쥬 브라끄(Georg 외제느 뿌죵(R obert Eugene Poughoen), 쟝 데쀠졸 (Jean Despujols), 르네 뷔또(Rene Buthaud), 앙드레 로뜨(Andre Lhote), 따 마라 드 랑삑까(Tamara de Lempicka) 등이 있다. 이들은 Neo-Classic Style을 각각의 방법으로 발전시켰고, 인간 형상을 체 적 측정의 방법 (Volumetric Method)에서 다루었으며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장식적인 디테일, 풍자적이고 비유적인 프레스코 화를 선호하였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와 그의 부인 쏘냐 들로네(Sonia Delaunay)는 아르데코 이미지 창조에 기여한 바가 크다. 로 베르 들로네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입체주의와 추상적 회화의 영향을 결합시켰고, 동시에 발생하는 대조 효과를 얻기 위해 형태와 공간 그리고 색채 효과를 실험하였고, 쏘냐 들로네는 자신의 실험을 직물과 자수에 적용시켰다 . 이외 회화적 기법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응용 예술에는 일러스트레이션과 포스터, 책표지화를 들 수 있다.아르데코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종전의 윤곽선이 흐린 아르누보 스타일과는 달리 야수주의의 영향으로 '뽀솨르 기법(pochoir method)'를 사용하여 윤곽선이 뚜렷하며 대담한 선의 처리가 특징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상 디자이너이자 illustrator인 Iribe에 의해서이며 Iribe는 Paul Poiret의 Empire Tunic Style을 특징으로 하는 디자인들을 '단순한 선과 화려한 색조'로 그린 '뽈 쁘와레의 의상들 (Les Robes de Paul Poiret)'이라는 illustration집을 발표하였다.- 아르누보와 마찬가지로 아르데코에서도 그 양식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쟝르는 공예이다. 특히 공예의 어떤 부분보다도 가구는 유행과 스타일에서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였다. 가구 디자인의 혁신주의자들은 가구를 하나의 실내건축요소로 보며 이에 따라 선션계는 침체되었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여성복의 본격적인 현대화가 이루어져 치마 길이는 짧아지고 실질적이면서 기능적으로 변하였다.(1) 형태아르데코 양식은 Cubism에서 이끌어낸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진 특징으로 꽃이나 동물 및 인간의 형체를 모티브로 한 기하학적 형태를 갖는다. 형상(shape)은 더욱 뚜렷해지고 더욱 단순해져서 주제들도 이러한 경향에 잘 어울리는 것들이 부각되고 추상적 경향을 띄었다. 또한 아르데코는 기하학적 특성을 주 특성으로 하지만 미래파와 같이 기계의 완벽성을 인정하여 미술에 받아 들였으며 현대를 특성 짓는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유선의 법칙에 따라 공기의 저항을 덜 받아 속도를 더 많이 낼 수 있는 유선형의 매끄러운 선(sleek line)을 특성으로 갖는다.◎ 여성복식1910년경 Poiret는 앞에서 언급한 직선형 실루엣의 시도로써 밑단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hobble skirt를 등장시켜 현대 복식의 막을 열었다. 페그 톱 스커트, 스트레이트 스커트, 호블 스커트라 불리운 이 도련 폭이 극단적으로 좁은 스커트는 이후 보행을 위하여 슬릿이나 플리츠가 들어가게 되고, 스커트 길이도 신발이 보일 정도로 조금 짧아지게 된다. 1914년에는 전쟁의 시작으로 경제성과 단순성이 의복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제1차 대전(1914~1918)에 돌입하자 군수물자생산을 위해 어쩔 수없이 많은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어 복장도 활동적인 테일러드 수트가 보급되었다. 스커트 길이는 전쟁이 한창일 때 20cm정도 짧아졌고 급속하게 보급되어갔다. 1917년에는 돌먼 슬리브에 칼라와 소매 끝을 털로 장식한, 몸통과 허리가 둥글고 위?아래가 날씬한 통(barrel)형 스타일의 코트가 유행하였다.◀『뽈 쁘와레의 작품들(Les Chases de Paul Poiret/1911)』- 조르쥬 르파프의 작품으로 패션과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에 혁신을 가져옴.◎ 남성복식남성복식은 빅토리아 시대의 규범의 약화와 스포츠의 영향으로 격식이 완화되어 패드를 넣은 각진 .
[6주차 사례분석 : 기업가 이야기]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경영자 모리타 아키오오늘날 소니란 이름은 2차대전 후 일본의 성공과 같은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전후 라디오 조립기업으로 출발한 소니(Sony Corp.)는 연간 매출고의 9%를 연구개발비에 투입하면서 기술혁신과 빈틈없는 마케팅 그리고 품질향상을 통해 오늘날 연간 매출고 109억 3천만 달러(1990)에 7억 2천만 달러의 이익을 거둬들이는 세계 51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이러한 초대기업 소니의 회장 모리타 아키오. 1999년 10월 3일 타계한 그는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고경영자였으며 “일본 경제를 끌고 간 엔진” 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이렇게 모리타 아키오가 동양인으로써 세계 어디에서나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경영자로 꼽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1) 모리타 아키오는 왜 훌륭한 경영자인가?부유한 모리타 일가에서 태어난 아키오는 열유도시스템을 연구하는 대형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했다가 이 곳에서 전자공학자 이부카 마사루를 만나게 되어, 전쟁후 자본금 500달러의 도쿄통신공업사를 차린다. 1949년 이 회사는 자기녹음테이프를 개발했고, 1950년에는 일본 최초의 녹음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1957년에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라디오를 만들어냈고, 이듬해에는 회사이름을 소니로 개명했다. 그리고 1960년에는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TV를 만들어냈다.이후 소니는 점차 세계 시장을 석권해 나갔다. 첨단기술 개발로 제품의 소형화를 계속 추구해 나가다 보니 소니에 대적할 만한 회사는 없었다. 1961년에는 미국 소니사가 일본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고, 1989년에는 미국의 컬럼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다. 그에 따라 1991년에는 13만 5천명의 소니사 종업 중 내국인보다 외국인 수가 더 많아졌다.모리타와 소니의 성장사는 공업대국으로 변신한 일본의 성장사와 궤도를 같이 한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모리타가 얼마나 일본의 경제 역사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인물인지 가늠할 수 만큼 다른 기업의 뒤를 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소니는 발전은 통해 세계에 봉사하고자 한다. 소니는 언제나 미지의 영역을 추구할 것이다... 소니는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고 북돋는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개인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항상 노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소니의 활력이다.” 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소니는 새로운 제품을 계속 내놓고 새로운 innovation을 추구하는 기업이었다.소니의 세계적인 제품들로는 세계 최초의 손에 들고 찍을 수 있는 비디오 카메라, 홈 비디오 리코더, 플로피 디스크 등 다양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제품은 모리타의 아이디어였던 워크맨이다. 워크맨이야말로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소니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제품이다. 모리타는 젊은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이 제품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는 “시장조사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한들 이 제품의 성공 가능성을 뒷받침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고 지적하면서, “일반 소비자는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계획은 소비자에게 어떤 제품을 갖고 싶냐고 묻기보다는 신제품으로 소비자를 인도하는 것이다.” 라고 자랑하기도 했다.모리타의 탁월한 마케팅 솜씨는 결코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모리타는 비즈니스 분야에서 뛰어난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는 분석력과 높은 수준의 교육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이 추구하는 방식이 항상 최선이라고 확신하면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의 온갖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사람이 기계와 더불어 일을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으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만큼 논리가 통하지 않고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소니가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모리타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훌륭한 최고경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더욱더 범세계적인 기업이 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는 일본리자들은 종업원들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미국이 스스로 제조에서 손을 떼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진정한 사업은 물건에 지식을 추가하여 가치를 더하게 만드는 것인데, 미국은 이런 사실을 잊고 유동하는 돈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데 즐거움을 얻고 있다” 고 걱정했다고 한다.또한, 일찍이 그는 브랜드에 관련하여서도 선각자와 같은 존재였다. 모리타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브랜드는 기업의 생명과 같은 것이고 상표나 회사명은 단순하게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기업의 책임감이 깃들여 있다″ 고 말한 바 있다. 이에 관계된 유명한 일화로, 1955년 소니가 생산하는 트랜지스터라디오 10만 개를 스위스의 유명 시계업체인 불로바의 이름으로 납품하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당시 이 주문량은 소니 총자본의 몇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리타 혼자만의 고집으로 끝끝내 거절했던 일이 있었다. 즉, 그는 단기간의 이익에 급급해 하지 않고 긴 안목으로 소니의 상표자산을 지켜낸 통찰력 있는 경영자였던 것이다.이와 같이, 소니의 전회장 모리타 아키오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낼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기업 경영에 관한 자신만의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을 갖추었으며, 종업원들을 회사의 참여자로써 존중하고, 범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브랜드 자산의 가치를 지킬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타계한 지금, 일본 경제를 끌고 갔던 인물이었다는 인정을 받는 것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2) 모리타 아키오라는 인물의 부정적인 측면결과 면에서 평가했을 때,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 자국은 물론 세계의 가전 제품계를 한 차원 높인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 방법 면에서 평가한다면 다소 독재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경영의 특징은 ‘합의에 의한 의사 결정’, 즉 민주적인 방식이 강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리타는 완전히 그러한 경향에 반하는 인물이라 할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시장 조사는 필요 없이 모리타 자신이 제시하는 대로 시장이 따라올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결과는 모리타의 예상대로 되었고,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점에서 볼 때 정말로 세기의 경영자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지만, 시장 조사를 무시한다는 관점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모리타가 워크맨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에 ‘젊은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잠재적인 시장의 요구이고 그 사실에 착안하여 워크맨을 개발해 낸 것은 결국 시장의 요구에 대한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소비자들은 단지 그 요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을 뿐, 무조건 자신이 제시하는 대로 이끌려 올 것이라는 모리타의 자신감은 지나친 과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매일 엄청난 정보를 제공받고 있는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해야할 현재의 기업들은 그만큼 소비자들의 수준을 높게 인식하고 소비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 조사 자체의 가치를 낮춰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시장 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의 잠재적인 요구를 catch하여 혁신적인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후예 기업들이 소니에게서 본받아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3) 모리타 회장이 부재하는 현재의 소니와 앞으로의 소니지난 8일 일본의 한 집회에서 소니사의 사장 이데이 노부유키는 미국이 지난 80년대 일본으로부터 배워 자국 경제를 개혁했지만 이제는 일본이 미국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찰스 슈왑과 아마존. 컴 같은 비전있는 미국 기업들을 찬양하고 일본도 그들의 규제타파적인 방식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지금 세기에서는 소유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 세기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활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될 것” 이라고 말했다.일본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활용도는 매우 낮다. 약 사람들을 채용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이라고 말했다.그런 점에선 소니도 응분의 몫을 하고 있다. 전자제품에서 시작해 영화 음반 산업에까지 진출한 소니의 지난해 경영 수입은 34%나 감소했다. 한때 핵심사업이었던 제조업 분야의 수익 악화가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자 지난 3월 소니는 미국식 구조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그 방안에는 주로 공장 합병과 종업원의 자연 감소를 통해 2003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5개 공장을 폐쇄하고 1만7천 명의 종업원을 감축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소니는 보고 계통과 조직 체계도 단순화시켰다. 더욱이 소니는 ‘디지털 혁명’에도 참여했다. 이데이 사장은 인터넷을 도입해 소니의 전자제품들을 음악 영와 게임 소프트웨어 금융 서비스 등과 연계시키는 포괄적인 청사진을 마련했다. 그런 전자제품에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2(PS2)와 바이오 계열의 컴퓨터 및 디지털 TV도 포함된다. 이데이 사장의 전략은 주식 시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지난 1월 이후 소니사의 주가는 배로 뛰었다. 영국 런던의 슈로더스 투자은행의 분석가 앨런 벨은 “인터넷 사업과 관련해 소니는 일본 하드웨어 관련 기업들 중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고 말했다.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소니는 전에도 일본 경제 회복을 선도한 적이 있다. 지난 50년대 소니 제품들은 ‘made in Japan’은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제품이라는 인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20년 후 모리타의 최대 창안품인 워크맨은 휴대용 전자제품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니는 정보를 생산해내는 전자 장비들 못지않게 정보 자체가 곧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라는 초기 징후들을 간과하면서 휘청거렸다. 과거의 강점이 이제 약점으로 변한 상황에서 소니는 ‘content’ 사업을 확장하고 전자제품 부문을 축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20년 전 소니는 업계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제품 업체로서 세계 시장에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