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종교적 인간종교적 인간은 세계 안에서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 양식을 취한다. 이 독특한 양식은 역사적 종교적 형태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인식할 수 있다. 종교적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성화하고 또 그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스러운 것, 절대적 실재가 있다고 항상 믿는다. 그는 생명이 성스러운 것에 기원을 가지며, 인간 존재는 종교적인 정도에 따라, 즉 실재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그 모든 가능성을 실현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신들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했고, 문화 영웅들이 그 창조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신적 및 반신적 작업의 역사는 신화 가운데 보존되어 있다. 인간은 성스러운 역사를 재현함으로써, 신들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신들 곁으로, 즉 실재적이고 의미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2)이성적 인간첫째, 이성적 인간은 비인격적이다. 그것은 이성의 개념이 인격의 개념과는 조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대개 '책임을 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인간'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임의 개념 속에는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의 요소가 있고, 책임을 요구하는 도덕적 권위를 또한 전제한다. 따라서 인격은 아무의 외적 힘에 의해서 제약받지 않는 자유와 자율의 존재인 동시에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다. 이에 반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올바른 진리에 대해 인식하고 그에 따라 순응하는 것이 선이다. 따라서 선과 악은 유식과 무식에 직결되며, 인격적이고 자유로운 결정은 큰 의의를 가지지 못한다.둘째, 이성적 인간은 개인주의적 · 평등주의적이다. 개인주의적이라 함은 물론 이기주의적 개인주의는 아니지만, 개인 하나 하나의 사회와의 관계는 실제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회란 이성을 가진 단자들의 모임일 뿐, 서로 서로의 영향이라든가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동시에 매우 평등적 인간관과 조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모두 이성을 타고났고, 그 이성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들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원칙적으로 동등하고 평등한 것이다.셋째, 이성적 인간은 자연정복적이다. 즉, 인간의 물체성과 정신성에서 유추하여 자연을 바라보게 되고, 이성에 의해 감정이 억제되듯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은 통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희랍의 자연정복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에 머물렀다. 그러나 기독교에 의해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권이 규정되면서 정신적인 자연정복은 실질적인 자연정복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자연철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넷째, 이성적 인간은 비판적이다. 즉, 인간은 객관적인 진리를 내재하는 이성으로 터득할 수 있으나,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은 여러 가지 외부의 영향 밑에 있어서 그 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이라는 작업이 필요하고, 또한 불가결한 것이다.(3)자연주의적 인간현대인을 지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이념은 자연주의적·실증주의적·실용주의적 이론인 '호모 파베르'(工作人)이다. 이 이념은 무엇보다도 인간 일반의 특수한 어떤 이성능력을 부인한다. 여기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아무런 본질적 구별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정도 상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다만 특별한 종류의 동물의 일종에 불과하다. 소위 사유하는 '정신', 즉 외견 상 충동하는 다른 중심적 의욕과 목적설정의 능력, 가치파악과 가치평가, 정신적 사랑은 인간 이하의 동물계에서도 작용하고 있는 동인들의 추가적 수반현상이며 무활동적인 의식의 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일차적인 위치는 이성에 있지 않고 충동(衝動)에 있다. 즉 인간은 '충동적 존재'(Triebwesen)이다. 인간의 사상, 의욕, 고차적인 정서작용도 다만 일종의 '인간 상호간의 충동적 감정의 기호'에 불과하다. 정신이나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독립해 있는 별개의 형이상학적 기원을 지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존재의 법칙 그 자체에 일치하는 기초적인 자율적 법칙성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가 이미 유인원(類人猿)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심리적 능력의 발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식이라고 일컫는 것은 자극과 유기체의 반응 사이에 점점 더 풍부하게 끼어 들어가는 형상의 계열, 혹은 사물이 스스로 만든 기호 내지는 기호의 습관적인 결합에 불과하다.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 인간은 기호(언어)를 가진 동물이며, 인간은 도구를 가진 동물이며, 인간은 뇌수(腦髓)를가진 존재이다. 다만 인간은 동물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뇌수, 특히 그 피질(皮質)의 기능을 위해 소비하는 존재이다.(4)생물학적 인간인간의 동물적 특성으로는 생존의 욕구(종족유지), 자기 중심적 생활, 생명의 유한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생물학적 특징의 차이점으로는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미완성인 상태이다. 다른 동물들은 초식, 육식에 따라 신체 구조가 다르며 또 환경에 맞게 보호색이나 털이 알맞게 나 있지만 인간은 그런 것이 없다. 또 성장리듬에 있어서도 인간은 동물보다 길며 직립보행을 하며 나면서 죽을때까지 배우고 생각하는 학습의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환경이 개방되어 있어 자기의 삶에 맞게 환경을 개척하고 바꾸어 나간다. 그러나 동물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 존재이다.(5)문화적 인간문화적 상대주의 어떤 문화적 가치관이나 관행이라도 그 가치를 평가하려면 반드시 그 특정 사회와 특수한 역사적 시대의 맥락 속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뜻한다. 인간 집단에서는 사회마다 공통된 문화 유형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타당한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란 사회적 소산이며,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양한 부분 문화가 용납되어 다른 문화 유형과 공존하며 서로 순응하는 경우를 일컬어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한다. 다원적인 문화는 미국과 같이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도 갖가지 종교적, 경제적 신념과 행동 유형을 관대하게 포용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문화의 통합을 이룩하려는 자세는 매우 긴요한 것이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와 구체적인 삶은 그 사회의 문화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문화적 존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문화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6)유희적 인간인간을 특징 지워주는 고유한 속성은 '사유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이징가는 이 둘의 개념을 포괄하는 더 큰 개념 틀을 제시한다. 그것은 '놀이'이다.호이징가는 우리가 오랫동안 문화에 있어서 놀이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고 말한다. 사실, '놀 수 있다'는 것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첫째로, 놀이는 현실적인 다른 목표를 의도하지 않고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하여 행해지는 활동이다. 두번째로, 놀이는 일상과 분리된 특정한 시간, 공간 하에서만 행해진다. 놀이의 세 번째 특성은 '엄격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특성으로 보았을 때, '경합', 경쟁도 놀이에 포함된다. 이처럼 문화는 곧 놀이일 뿐만 아니라, 놀이는 문화를 창조한다. 호이징가는 모든 문화 현상의 기원을 철저하게 놀이 안에서 찾는다.종교적 인간관 [유교]공자의 인간관과 자연관인간은, 공자에 의하면, 우월한 인간인 군자와 열등한 인간인 소인의 두 종류가 있다. 군자란 도덕적 의미의 덕을 지닌 사람을, 소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지칭한다. 군자는 이리하여 공자 이후 유가의 이상적 인간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도덕성이 그 결정적 요소가 된다. 공자는 혈통 대신에 도덕성으로 그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새로운 판단 기준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공자는 유교적 인본주의의 길을 닦아 놓았다.이제 유교에서의 이상적 인간은 도덕적 인간이다. 인간의 도덕성을 알고 가꾸어 군자가 되는 것은 이렇게 공자 이후 유교의 중심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모든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가치가 인에 속하는 것이다. 인은 인간다움이다. 인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 모든 인간행위에 관철하여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라는 의미의 ‘충서지도’ 안에 인의 본질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인이라는 개념의 구조는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충서지도의 본질, 즉 인의 본질을 ‘사랑’이라 규정한다.결론적으로 유교에서의 이상적 인간인 군자는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덕이 있는 사람이며 천명을 모르는 자는 군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소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소인에서 벗어나 군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공자 그리고 유교의 인간관이다.중용에서의 자연과 인간중용에 의하면, 인간의 덕이란 바로 인간의 본성과 다를 바 없으며, 인간의 본성은 자연(천)으로부터 부여받은(명) 것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천명이란 곧 천부적인 인간 본성에 다름 아니다. 즉, 중용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이처럼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성실 그 자체는 하늘의 도이고, 성실해지려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했다. 성실해지기 위해 따라야 할 ‘사람의 도’가 곧 중과 화인 것이다. 이 중과 화는 자연의 성실성을 타고난 인간에게 내재된, 그러나 소인들은 실현하기 힘든 선이다. 따라서 이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맹자의 인간과 자연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이란 본래 선한 것이다. 선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이고 악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이나 학문은 이 선천적으로 선한 인간 본성을 갈고 닦는 데 그 목표를 둔다. 천성적으로 인간은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며 이런 차원의 마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네 가지 범주의 마음이 발견되는 바, 그것은 측은해 하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시비를 가리는 마음, 즉 사단지설이다. 맹자는, 천명이란 하늘이 부여한 인간 본성에 다름 아니며, 그 특성은 인의예지의 사덕인 바 이것이 곧 선이며, 그 실현을 위해 사단을 성실하게 확충하라고 권한다.
< 비계덩어리 >개인이 희생하여 집단의 안정돠 목적 달성을 이루는 경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모파상의 ‘비계덩어리’도 그러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프러시아 군의 점령 아래 있는 루앙 시의 유력자 몇 명이 은밀히 르아브르에의 탈출을 기도하여 이동 허가증을 입수했다. 승객은 포도주 장사로 한 밑천 모은 로아조 부부, 도의원으로 면업계의 거물은 칼레마동 부부, 노르망디 굴지의 명문 우베르 드 프레빌 백작 부부 - 이 부르주아 사회의 축소판 같은 일행에 민주주의의 두목 코르뉴데와 수녀 두 사람, 그리고 한 젊은 창녀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불 드 쉬프 (비계덩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려지는 뚱뚱한 몸매의 이 창녀는 미끄러운 살결과 검고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일행은 토트 시에 잠깐 머물게 됐으나. 이 젊은 창녀에게 눈독을 들인 프러시아 장교가 그와 하룻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면 일행의 통행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프러시아 군이 주둔하고 있는 루앙 시에는 더 있을 수가 없어 탈출한 애국자였기 때문에 어떤 이유가 있어도 그 용청에 응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몇날 며칠을 여관방에 갇혀 지내던 일행은 불 드 쉬프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작전을 세우고, 식탁에서의 화제도 자기 몸을 버려 나라를 지킨 여자들의 이야기, 또는 그 의도하는 바 일이 순수한 경우 비록 행위가 추악했어도 그것을 훌륭하게 보상한 성인의 행적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틀 뒤 그녀는 프러시아 장교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허락했다. 일행은 다음날 일찌감치 여장을 갖추고 기다렸지만, 비참해진 것은 불 드 쉬프였다. 일행은 누구하나 그녀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말을 걸려고 하지도 않았다. 서둘러 출발하느라고 도시락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던 그녀에게 며칠 전의 답례로 도시락을 나누어 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꾐 때문에 애국자의 절개를 굽힌 자기 자신이 짜증스럽고 눈물이 흘렀다. 해가 지고 이미 캄캄해진 마차 안에서는 코루뉴데가 흥얼거리며 혁명가를 계속해서 부르는 소리에 섞여, 젊은 창녀의 흐느껴 우는 소리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다.이 소설은 집단의 안정과 이익을 위하여 개인이 희생하는 ‘희생양’의 모습을 보여 준다. 집단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할 경우 자발성이 있어야만 정당한 것이 된다. 하지만 불 드 쉬프의 경우 자발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을 칼을 들지 않은 강도에 비유하고 싶다. 자발성에 의하지 않고, 개인의 희생을 공공연하게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인권과 권리가 무시될 가능성이 많다. 사회의 통합을 위해 일부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시키는 것도 더 큰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나아가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할 경우 사회나 국가는 획일화, 전체주의화되어 건전한 발전을 이룩할 수 없게 된다.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단보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우선시하는 가치관 정립이 필요하다.
햄릿의 여성들인 거트루트와 오필리어는 주인공이 아닐 뿐 아니라 흔히 드라마에서 인물의 비중과 비례하는 대사의 양에서도 조연도 못된다.햄릿이 이 극의 주인공이자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햄릿이 햄릿다울 수 있는 것은 덴마크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며 특히 햄릿의 두 여성 거트루트와 오필리어가 주인공 햄릿에게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이들 두 여성은 대사의 양에 있어서는 조연급도 될 수 없고 덴마크의 정치 현실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거나 강력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햄릿에게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고, 따라서 햄릿의 의견과 생각이 가장 중요한 이 극에서도 현실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들이다.먼저 거투르트를 보자. 거투르트의 비평가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극중에 실제로 나타난 거트루트의 모습과 햄릿이 생각하는 거투르트의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 극 속에 나타난 거투르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는 첫 번째는 그녀가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아들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생각은 온통 햄릿뿐이다. 또한 거투루트가 햄릿아버지의 독살에 얼마나 공모했는지, 선왕이 죽기 전에 이미 클로디어스와 간음을 했는지, 아니면 적어도 클로디어스의 독살을 알고 있기는 했는지의 여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거투루트는 햄릿아버지의 생전에 이미 클로디어스와 간음을 한 것이고 클로디어스의 형제 살인은 왕권에 대한 욕망 못지않게 거투루트와의 간음을 숨기기 위한 것이 그 동기였다. 반면에 햄릿에서는 거투르트가 햄릿의 광기에 대해 자신의 지나치게 성급했던 결혼이 책임이 있을 것이라는 자책은 보이지만 실제로 거투루트가 구체적인 죄를 범했다는 증거는 없다.그녀의 유명한 성욕에 있어서도 그녀의 실제 모습과 햄릿의 인식은 차이를 보인다. 햄릿이 유령을 만나기 전에 이미 첫 등장에서 염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거투루트의 성급한 재혼과 이 재혼이 의미하는 그녀의 성욕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물론 성급한 재혼이라는 상황 자체가 햄릿이 가진 그녀의 성에 대한 혐오를 어느 정도 정당화시켜주기는 하지만, 실제로 극 중에서 거투루트와 클로디어스가 함께 나오는 장면에서 그녀의 모습은 성욕이 넘치는 여성이라기 보다는 클로디어스가 나가라면 나가고 들어오라면 들어오며 대답하는 복종하는 아내의 모습이도, 클로디어스와 햄릿 사이에 끼어서 양쪽의 비위를 다 맞추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혹시 그녀가 클로디어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왕의 근위병들조차 막지 못했던 용맹한 사람으로부터 왕을 보호하기 위해 그사람을 몸소 붙잡을 때로 이는 그녀의 성욕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단지 남편을 위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극 중에 실제로 나타나는 거투르트의 모습은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면서도 서로 사이가 나쁜 아들과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 약한 여성이다.그런데 햄릿이 인식하는 거투르트는 이와 다르다. 처음 등장할 때 햄릿은 자살 충동을 피력하며 자신은 자살까지 생각하도록 하는 이 세상에 대해 이 같은 막연한 혐오를 토로한다. 그리고 훌륭했던 선왕이 죽은지 두 달도 안된 시점에서의 거투르트의 성급한 재혼으로, 여기에서 햄릿이 느끼는 염세의 원인이 바로 거투르트의 재혼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전체가 쇠락해가는 원인도, 이 세상을 비천한 것들이 차지하고 있어 햄릿의 자리가 없는 것도, 그래서 햄릿이 자살을 생각하게 하는 이유도 모두 거투르트의 재혼인 것이다.이후 햄릿이 오필리어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극중 극의 장면인데 여기서 그는 더 이상 흥분하거나 예민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분히 냉소적인 태도로 그녀에게 노골적인 성적인 농담만을 한다. 오필리어는 극중 극의 여왕처럼 못 믿을 여성의 일원으로만 대접받는 것이다. 그러나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으로, 이 장면 이후 그녀의 장례식까지 그녀는 그의 복수가 진행되는 과정에 까맣게 잊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