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자본주의이매뉴엘 월러스틴1. 이 책을 선택한 동기에 대해 쓰고, 책의 주요 사건과 저술된 사회 역사적 상황, 저자 등에 대해 쓰세요이 책을 선택하게된 동기는 우리가 어떤 학문을 배우던지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 문명 아래에 살고 있기 떄문에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서 이 책을 교양독서로 선택하였습니다.이매뉴엘 월러스틴은 1930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사, 석사, 박사 등 모든 학위를 컬럼비아대학에서 받았다. 학위 취득 후에도 그는 사회학과 교수로 10여 년 동안 이 대학에 재직했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은 [매카시즘과 보수주의자](McCarthyism and Conservative)(1954)였으나,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약 15년 동안의 그의 주요 연구분야는 아프리카였다. 그는 [독립의 길: 가나와 아이보리 코스트](The Road to Independence: Ghana and Ivory Cost) 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1년에 [아프리카: 독립의 정치학](Africa: the Politics of Independence), 1967년에 [아프리카: 통합의 정치학](Africa: the Politics of Unity)을 출간하였다.그가 컬럼비아 대학을 떠나게 된 것은 1968년 이 대학에서 일어나 학생운동에 적극 동조하고 참여함으로써 보수적인 동료 교수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기 떄문이다. 그는 1970년에 스탠포드대학의 행동과학연구소로 잠시 옮겼다가, 이듬해에 몬트리올의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후 1976년에는 빙엄튼의 뉴욕주립대학(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inghamton)에서 사회학과 교수직을 얻게 되었으며, 그 후 오늘날까지 약 25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이 대학의 ‘경제, 역사적 체제, 문명의 연구를 위한 페르낭 브로델 센터(Fernand Braudel Center for the study of Economies, Historical System, and Civilization) 의 소장직도 아울러 맡고 있는데, 이 연구소를 통하여, 그리고 이곳에서 발간하는 [리뷰](review)지를 통하여 세계체제론을 정립하고 실증하는 일을 꾸준히 수행해오고 있다. 1974년에 그의[근대세계체제] 제1권이 나왔고, 1980년과 1988년에 2권, 3권이 각각 출간되었다.그 중에서도 1983년에 출간된 [역사적 자본주의](Historical Capitalism)는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견해를 집약적으로 나타낸 것으로서 이를 전후한 그의 많은 저작은 모두 이를 위한 실증작업이요, 이를 부연설명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2.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쓰고 어떤 면이 인상적이었는지 쓰세요그의 사회인식 중 국가에 대한 인식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그 이전의 사람들과 달리 국가는 세계체제의 창조물이긴 하되 그 역할과 기능이 있는 매우 중요한 제도적 구조라고 인식햇습니다. 그는 국가 구조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자본주의가 이루어낸 중요한 제도적 성취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보았습니다. 국가에 역사적 자본주위에 끼친 몇 가지 영향은 국가가 그 영토적 관할권 내의 사회적 생산관계를 지배하는 규칙들을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대의 국가구조들은 일련의 전통적인 생산관계를 폐지하거나 수정할 수 있는 이런 권리를 사취(詐取)했다. 역사적 자본주의하에서 국가는 노동자들이 한 직종에서 다른 직종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는 여러가지 전통적인 제약들을 폐지함으로써 노동력의 상품화를 증대시키는 법률을 제정해왔다. 또한 국가는 생산관계를 통제해왔다. 국가는 처음에는 특정형태의 강제노동(노예노동, 공적 노역 의무, 계약제, 강제 노역(indenter)등을 합법화했으며 또 나중에는 이를 불법화했다. 또한 상호간의 최소의무와 최대의무를 규정하는 등 임금노동 계약에 관한 규정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징세의 성격도 변화하였다. 세금은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고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역사적으로 발전해옴에 따라 꾸준히 팽창해온 현상이였다. 이는 국가가 통제한 자원의 양이라는 관점에서 볼 떄 국가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져왔음을 의미했다. 국가는 재분배의 힘도 가졌는데 이제까지 평등의 잠재력이란 측면에서만 논의되었었다. 하지만 월러스틴은 오히려 분배를 양극화하는 매커니즘이라 주장했다. 정부는 이제껏 먼저 징세과정을 통해서 거액의 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공적인 보조금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이미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들에게 재분배해왔다. 정부는 이윤은 개인이 차지하지만 위험부담은 사회가 진다는 원칙을 이용함으로써 부유한 층에게 유리하도록 재분배해왔던 것이다. 자본주위체제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위험부담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래서 손실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부가 개입하여 파산을 막아주고, 심지어는 오직 재정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만으로 그런 손실을 보상해주기까지 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도 열심히 마련했는데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사회간접자본의 혜택을 어느정도 입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혜택을 입어온 것은 아니었다. 이익은 이미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지나칠 정도로 더 많이 돌아갔는데, 이런 이득에 대한 대가는 훨씬 평등한 징세제도를 통해서 누구나 똑같이 치렀던 것이다. 따라서 간접자본의 형성은 자본의 축적과 자본의 집중을 촉진하는 데 기여해왔던 것이다.국가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3. 책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평하세요(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구체적 이유를 들어 쓰세요)위에 나열된 국가에 대한 저자의 인식들을 동의합니다. 전에 대우사태등을 볼 떄 국가는 사회간접자본으로 부를 많이 차지한 개인에게 도와준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규모가 큰 기업은 쓰러지지 않는 다는 말도 사회전반에 팽배해있었습니다.(대우나 한보가 쓰러진 뒤 이러한 인식은 마니 바꿨지만) 월러슈타인은 성차별주의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그는 성차별주의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남성우위의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여성의 지위를 가사노동과 같은 비 생산적인 노동의 영역으로 떨어뜨림과 동시에, 임금을 받는 생산적 노동만을 특권화하고 여성의 노동을 비하시킴으로써 여성을 이중으로 모욕한다고 표현했는데 이 부분 역시 동의 할 수 있는 부분이였습니다.4. 이 책으로부터 얻은 유익, 혹은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세요월러스타인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고 이것이 꼭 정답이진 않겠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세계체재론적 해석과 설명은 절대주의와 중상주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위 운동등 근대사연구의 새로운 시각과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본질과 그 이해득실을 파악하고 그 현재와 미래를 올바르게 내다보는 데 그의 자본주의 해석은 중요하고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1. 이 책을 선택한 동기와 책이 저술된 상황에 대해 쓰세요학창 시절 누구나 배우는 서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이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점수를 위한 암기 공부가 아닌 그의 철학에 대해서 이해하고 싶어서 이 책을 교양독서로 선택하였습니다.2.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을 쓰고 어떤 면이 인상적이었는지 쓰세요소크라테스가 유죄판결을 받고 마지막으로 아테네 시민들에게 애기하면서 “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서 비열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변명한 것을 후회하지 않소. 오히려 남들이 하는 방법으로 해서 살아 있느니 지금의 방법으로 변명하고 죽게 되더라도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오 나 또는 어떤 사람이든 전쟁에 있어서 또는 법률에 있어서 모든 책략을 동원해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기 떄문이오.흔히 있는 일이지만 분명히 싸움터에서 무기를 버리고 추격자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소. 그리고 다른 위험에 직면했을 떄에도 무슨 말이든 또 무슨 짓이든 다 하기만 한다면,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소.여러분! 그러나 죽음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를 피하는 것이 훨씬 어렵소. 왜냐하면 그 편이 죽음보다도 걸음이 빠르기 떄문이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이를 먹고 걸음이 느려서 느린 편의 죽음에 붙잡혔지만, 나를 고발한 사람들은 예리하고 민첩한 인물들이니, 걸음이 빠른 불의에 붙잡히고 만 것이오.”이 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를 피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말한 부분이 가장 감명 깊었습니다. 대 철학자의 꿋꿋한 면모를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3. 책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평하세요(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구체적 이유를 들어 쓰세요)이 책은 플라톤의 저서이긴 하지만 그의 생각을 표현한다기 보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에게 초점을 맞춘다(소크라테스는 실제 그의 저서를 남기지 않았기 떄문에 우리는 다름 사람의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을 알아볼 수 밖에 없다.)실제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플라톤을 철학사상 최대의 철학자로 만들 만큼 극적인 것이었다. 60세의 플라톤과 20세 전후의 플라톤 사이에 오고간 정신의 불꽃은 그 후의 철학사를 양분할 만한 플라토니즘 성립의 순간이라고 할 수있다. 그로부터 8년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소크라테스의 만년을 직접보고 들었다.애초에 정치에 뜻을 두었던 플라톤을 철학으로 전향시킨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사형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철학에 대한 경종(警鐘)과 여명(黎明)을 동시에 알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청년 플라톤의 심중에는 소크라테스가 생명과 바꾼 것이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실현하려 하였는가? 하는 갈등과 모순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의 헤어짐은 이 두 사람의 운명을 암시하는 기로라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의해 사상과 철학이 기록으로 남게 되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모든 운명이 좌우되었기 떄문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죽었으나 그의 전인(全人)은 플라톤 속에서 맹렬한 힘으로 소생하게 된것이다.여기까지 저자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질문에 따르면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에 생각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설명해야지만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주장을 하거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변호와 재판의 과정 결론을 보여줌으로서 소크라테스의 신념과 사상을 알게 해주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의견에 동의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 같고 밑에 4번 질문의 얻은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사상의 주요한 부분인 문답법에 대해 알게 되고 얻은 감상을 쓰기로 하겠다.동의나 반대를 반드시 표현해야 한다면 저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찬성하고 그의 삶에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보았으며 문답법에 찬성합니다.4. 이 책으로부터 얻은 점, 받은 영향 혹은 감상을 쓰세요.이 책을 통해서 학교 다닐떄 막연히 알고 있었던 문답법에 고민하게 되었고 여러가지 참고 자료들로 문답법에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답법에 대해 제가 이해하게 된 것들을 4번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겠습니다.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질문과 응답의 형식을 통해 개념을 규정해나가는 학습 방법으로서, 이 방법을 사용할 떄는 상대방의 질문에 대해서 솔직하고 간결하게 대답할 것 ,또 질문한 사항에만 대답함으로써 논점을 흐리지 않을 것 등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대답과 모순되는 사례(事例)를 질문자가 다시금 제시함으로써 그 모순 사례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고차(高次)의 규정을 구하는 식으로 문답은 진행된다.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방법인 문답법은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 측면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무지(無知)의 자각(自覺)을 일꺠우는 소크라테스적 방어(反語)로서의 소극적 측면과 새로운 사상을 낳도록 돕는 기술 즉 산파술로서의 적극적 측면을 말한다. 문답법의 소극적 측면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은 대화 속에서 물음(즉, 反語的 물음)을 통해 상대자를 아포리아에로 유도함으로써 상대자 자신이 스스로 무지(無知)함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아포리아(aporia)란 대화법을 통하여 문제를 탐구하는 도중에 부딪치게 되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말하는데,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나 관점에서 새로이 탐구하는 출발점이 된다. 문답법의 적극적 측면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상대방이 제시한 주장이나 논설에 대해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개념 규정을 음미하고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 이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도록 돕고 또 그 지혜의 진위(眞僞)를 스스로 식별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활동을 어머니의 직업인 산파에 비유하여, 스스로 산파술이라고 불렀다.여기까지가 문답법에 대한 요약적인 설명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문답법을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학문적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철학의 길이란 사람들이 대화 속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근원적인 무지를 폭로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이 부분이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입니다.
드레퓌스(Dreyfus)사건과슈피겔(Spiegel)사건1. 발단과 원인1)드레퓌스(Dreyfus)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A.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 의해 종신유형의 판결을 받았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는데도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再審)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 석방하였다.2)슈피겔(Spiegel)1962년 10월 8일. 여느 때처럼 월요일에 발간된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에는 서독 군(軍) 방어 태세의 문제점을 지적한 22쪽 분량의 기사가 실렸다.2. 전개과정1)드레퓌스(Dreyfus)재판결과가 발표된 직후 소설가인 E.졸라가 공개한 ‘나는 탄핵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은 재연되었다.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자 《오롤》지에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또는 재심파(再審派)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反)드레퓌스파 또는 반재심파로 분열되었다. 1898년 여름 군부는 어떤 새로운 증거서류에 의거하여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언하였으나, 그것이 날조로 판명되고, 체포된 증거서류 제출자는 자살함으로써 반(反)드레퓌스파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정부도 재심을 결정했으며, 또 이때 반드레퓌스파에 대항하면서 공화정 옹호를 내세운 발데크 루소내각이 성립되어, 사태는 재심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2)슈피겔(Spiegel)잡지가 나온 지 18일째인 26일 밤 슈피겔 편집국에 수십 명의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창간인이자 발행인인 루돌프 아우크슈타인 씨를 국가기밀 누설죄를 적용하여 체포하고 수천 건의 서류를 압수했다. 위대한 저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아우크슈타인 씨가 투옥되자 수천 명의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나라 밖에서도 언론 탄압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3. 결말과 파급력1)드레퓌스(Dreyfus)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무죄 확인을 위한 법정 투쟁을 계속한 끝에 그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후 승진도 하였다. 자유주의적 재심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고, 좌파 세력의 결속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2)슈피겔(Spiegel)아우크슈타인 씨는 투옥된 지 103일 만에 풀려났다. 오히려 사건을 주도했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임기 2년을 남긴 채 사퇴했고 프란츠 슈트라우스 국방장관도 물러났다.4. 두 사건을 통한 교훈 의미두 사건은 다른 시대에 일어났고 드레퓌스 사건이 국가권력과 개인의 관계라면 슈피겔 사건은 국가권력과 언론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하지만 두 사건은 모두 부당한 국가구력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진실이 승리한 사건이다. 부당한 권력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 개인이 부당한 권력에 의해 피해를 당한 수 많은 사건 중에 하나인 뒤레퓌스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에밀졸라의 글을 보며 부당한 권력에 대한 피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PAGE PAGE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