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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시카고 건축(Chicago Architecture)
    시카고 건축(Chicago Architecture)
    시카고 건축(Chicago Architecture)- 목 차 -Ⅰ. 시카고 건축의 역사와 특징Ⅱ.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Ⅲ. 조사후기※ 참고문헌Ⅰ. 시카고 건축의 역사와 특징시카고는 중서부의 개척, 철도체계와 수로의 확장, 국가의 광산물의 활용 등으로 인하여 있는 미국 중서부 최대의 상업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1871년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그것은 화재 정도가 아니라 도시 하나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린 대 참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시카고는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나 현대 건축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시카고가 재건되는 동안 시카고 학파가 출현했고, 1883~1893년 사이에 크게 발전을 하였다. 이 학파는 미국의 마천루인 고층건물의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카고만의 특수한 건설 요구사항과 결합하여 철제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고층의 구조물 특유의 건축양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시카고는 단기간에 새로운 도시의 재건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불에 탈 수 없는 구조와 재료를 바탕으로 제한된 대지에 최대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구조물은 내력벽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강철 골조에 의해서 지지되는 커튼 월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바닥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시카고의 건물은 당시 엘리베이터의 실용화와 고층화 및 방화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William Le Barron Jenney의 구조공법에 의해 두 가지 특징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구조물을 지지하는 철골구조와 건물구조 형태면에서 기능성과 정적인 성격으로 표현된다. 철재나 강재 프레임 위에 테라코타를 입힌 내화 구조나 전기력에 의한 엘리베이터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은 마천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시카고는 비교적 좁은 가로에 가능한 높이 건물을 지어야 하는 상황 때문에 각각의 건물은 채광이 상당히 불리하였다. 그래서 시카고 창(Chicago Window)이 나타나게 되었다. 시카고 창(chicago window)은 하나의 베이(Bay)를 세 부분으로 분할하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중앙에 위치한 넓은 판유리는 고정되어 있으며, 양측에 위치한 부분은 보통 폭이 좁고 위아래로 밀어서 열고 닫는 창문이다. 시카고 창은 강구조의 건물을 표현하는 창내기 방법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특히, 서쪽으로 대평원이 이어지고 동쪽으로 미시간 호수가 보이는 시카고 풍경의 황량함이나 광활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끝으로 시카고 건축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대표적인 특징으로, 대부분은 양식주의적(樣式主義的)인 건축과는 달리 철제 프레임 구조, 시카고 창은 19세기말에 획득한 기술과 미국의 기계문명의 결론인 기능주의의 형태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처음으로 구조와 건축, 기술자와 건축가 사이에 생긴 간격을 없앤 의의도 있다. 또한 섬세한 장식을 배제하고 mass와 proportion, 수직과 수평 등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확한 논리적 해결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카고는 근대 건축의 발상지로 불리게 되었다.Ⅱ.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루이스 설리반, 아들러, 다니엘 번함, 존 루트, 제니, 윌리엄 홀라버드, 마틴 로시 등 이들은 시카고의 건축가이다. 그들은 마천루의 강철 프레임의 발전과 관련되어 있는 양식적 인간결함이나 기능주의, 시카고 학파 건축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 르 바론 제니(William Le Baron Jenny;1832-1907)시카고 학파의 창립자이며 현대식 철골조 마천루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건축가이다. 그는 건물디자인, 젊은 건축가의 훈련 등을 통하여 시카고 건축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루이스 헨리 설리반(Louis Henry Sullivan;1856-1924)설리반은 외국의 건축에 대한 빈약한 접근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철학을 개발하였고, 마천루의 구조와 기능적인 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 기술과 기능적인 해결을 하나의 의미 있는 형태로 통합하려고 시도해 왔었다. 그는 건축과 자연 속의 사물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모든 형태를 지닌 것은 기능을 따른다고 하였다. 설리반은 고층사무소의 기능을 연구한 결과 건물은 그 중요기능에 따라 수직적으로 구분된 세 부분, 즉 저층부인 base, 몸체부분인 shaft, 주두인 capital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다니엘 번함(Daniel Hudson Burnham;1846-1912)존 웰본 루트(John Wellborn Root;1850-1891)번함과 그의 협력자인 루트는 소위 시카고파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상업용 건물을 디자인하였다. 이들이 설계한 시카고의 상업용 건물들 중 3개의 건물은 1962년에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루커리 빌딩, 릴라이언스 빌딩, 그리고 모나드녹 빌딩이다. 그는 자신의 파트너인 존 웰본 루트와 함께 강철프레임을 강조하는 시카고 상업용 건축의 발전에서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루트의 작품들은 초창기에 마천루의 기능과 높이를 미학적으로 완숙한 경지에서 표현하려고 시도한 예로서 평가되고 있다.- 윌리엄 홀라버드(William Holabird;1854-1923)마틴 로시(Martin Roche;1853-1927)홀라버드와 로시는 시카고 창(Chicago Window)과 같은 시카고파의 특색을 이루는 수많은 혁신을 고안해 냈다. 타코마 빌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창 덕택에 외관은 거의 전적으로 유리로만 만들어 질 수 있게 되었다. 1910년경부터 홀라버드와 로시는 새로운 방향을 지향하게 된다. 상업적 양식의 엄격성에서 벗어나서 형태의 풍부함이나 역사적 디테일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 출발점이 된 건물은 라자르호텔 (1908-1909)이었다. 이들이 설계한 건물이 설리반이나 루트의 건물이 지닌 예술상의 기교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시카고파를 영속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공학/기술| 2023.02.27| 5페이지| 1,000원| 조회(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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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과 성장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과 성장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전래과 성장- 목 차 -Ⅰ. 머리말Ⅱ. 기독교의 수용 -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Ⅲ. 기독교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Ⅳ.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적 의미V. 한국의 교회 성장과 그 요인VI. 맺는말※ 참고문헌Ⅰ. 머리말기독교는 19세기 말엽 서세동점의 역사와 더불어서 한국에 전파되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100여 년이 된 지금 시점에서 한국의 복음전도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고 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한국 선교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유례없는 성장' 이라고 지적해 왔다. 이러한 기독교가 특히 다른 지방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적극적이었고 또 단시일 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관서 지방에서의 기독교 수용과 그 전래에 따른 한국사회의 개화, 기독교의 민족사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 성장의 요인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기독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기독교의 수용 - 관서 지방을 중심으로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자가 있었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알렌으로 그는 1884년 9월에 이 땅에 들어왔고, 다음해인 1885년 4월에 장로교회의 언더우드 목사, 또 그해 5월에는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목사가 들어왔다. 이들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장사하러 만주에 갔던 의주 청년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익세 5명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목사 맥킨타이어를 만나 알렌이 한국에 들어오기 8년 전인 1876년에 세례를 받았고, 또 의주 청년 서상윤도 1879년에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목사 로스를 만나 세례를 받았다.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던 이수정도 1883년 4월 동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신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가장 열렬하고 적극적이었던 곳은 관서 지방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목사가 관서지방을 몇 차례 답사를 하고 본격적인 선교 사업을 벌인 것은 1892방)에는 자립적인 중산층이 우세하기 때문에 희망에 넘쳐 있다." 라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자립적인 중산층은 대체로 중소지주, 자작농 혹은 상인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서지방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무역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는데, 중국에는 주로 인삼을 수출하였다. 또한 17세기 후반기부터는 영농 기술의 향상에 따른 생산고의 증대, 상업적 농업생산의 확대, 금속 화폐의 유통, 시장의 형성 등으로 국내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서지방의 상인들은 송상들과 더불어 전국에 손을 뻗쳤다. 그들은 특히 개항 후에는 어느 지방의 상인들보다 앞질러 근대적인 상회를 만들었다.한편 앞에서 인용한 베어드 목사의 북한 여행기를 보면 '북한에는 양반이라고는 없다'는 그의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견해이다. 선비나 사대부가 과거에 합격하여도 벼슬하지 못하면 지방의 토반(土班)이 될 수 있을지언정 양반이 될 수 없었다. 벼슬을 하려면 과거에 합격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누구나가 다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중앙정계에 있는 누군가가 추천해 주고 밀어 줘야만 벼슬을 할 수 있었다. 평안도 사람들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 것이었다. 평안도인들은 많은 숫자가 과거에 합격하고도 중앙 정계에서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양반이 될 수 없었다. 평안도에는 이러한 독서(讀書)계급 선비가 많았는데, 그들은 서원이나 서당을 차리고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했다. 그들의 지도와 교육으로 관서 지방에는 교육이 보급되어 문맹이 적었다. 문맹이 적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일 때 속도가 빠르고 또 효과가 컸던 것이다. 관서 지방의 독서 계급들이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자 중앙 정부나 집권층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고 또 비판적이 됨은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정치 질서, 새로운 논리를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막연하게나마 전통적인 조선 양반사회에 대한 하나의 수정 내지 변혁을 꿈꾸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홍경래 난이하는 학문, 즉 유익한 학문을 가르쳐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배움을 바라는 마음이 있도록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장들에 따라 세워진 기독교계 학교로서는 서울의 배재·이화·성신·정신·배화 등을 비롯하여 평양의 숭실숭의·송도의 한영서원·호수돈여학교 등 각 지방에도 있었다. 기독교는 한국의 개화를 위하여 학교를 세우는 한편, 그 교육 목적을 정립하는 데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었다. 물론 종교 교육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초기의 선교 사업은 위에서 열거한 병원 설립 · 학교 건립과 함께 고아원 사업과 신문발간이었다. 신문은 교회 학교와 더불어 개화의 중요한 도구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배재학교의 협성회 회원들도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한국의 개명함을 선도하기 위하여 신문(협성희회보)을 간행하였고, 또한 독립신문이 발간된 그 이듬해에 기독교계에서는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감리교계에서 아펜젤러의 주관하에 발간한 《조션 크리스도인》 회보와 장로교의 언더우드 중심의 《그리스도신문》이 그것이다. 협성회회보는 그 이듬해 1898년 1월 1일부터 발행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신문발간의 효시가 기독교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기독교계 신문들은 종교적인 성격이 강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계몽과 자주성의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초기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변동에 미친 영향 가운데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삶의 양식 혹은 사회적 성격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사상의 가장 중요한 파급효과는 특정 종교를 받아들인 사람이 보여주는 사회심리적 태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인의 사회 심리적 태도 변화는 일상적 삶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먼저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는 조선사회의 가장 견고한 벽이라고 할 수 있는 신분제도의 타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양반과 하층상민이 같이 예배를 드리고 심지어는 최하층이었던 백정들이 신도로 들어왔을 때도 논란과 갈등이 있기는 하였지만 것이었고 교회 내에서도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3·1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소될 정도의 선각자적인 여성 피고인의 대다수는 기독교인 여성이었다.기독교회는 조혼 폐지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조혼은 여성의 신체적·지적·정서적 발달을 해치고 여성을 노동의 도구로만 취급하는 악습이었다. 1914년 장로교 총회에서는 최저 혼인연령을 남자 만 17세, 여자 만 15세로 의결하였고 기독교회 내에서는 실질적으로 조혼의 관습이 상당히 사라졌다. 기독교회는 축첩제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고 신도들에게 실질적인 제제를 가했다. 이외에도 한국 교회는 금주, 금연 등을 신도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요구들이 인간 행동에 대한 억압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한 훈련이 생활의 무절제를 개선하고 개인적인 도덕심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며, 금주나 금연의 경우 경제적인 면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 사회에서 나타나는바 노동을 천시하고 기술보다는 인문학적 교양을 강조하는 가치관에서 건전한 노동윤리를 형성하는 데 기독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기독교회는 한국 문화 발전에도 기여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 현저한 것을 두 가지만 든다면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의 연구 혹은 소개를 통해 국한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성경 번역과 유포를 통해 한글의 가치가 인정되어 민족 언어가 널리 보급되고 발전될 수 있었다.Ⅳ.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적 의미기독교는 한말 격동기에 안으로는 사회적 개혁이 요청되고 밖으로는 국가의 자주성 유지가 문제시되던 시기에 전래되었다. 기독교가 전래되자, 일반 서민들은 자기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기 위하여 입교하였고, 관료들 중에는 개화와 독립을 위하여 입교하였다. 이렇게 입교할 당시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대략 세 가지의 사회의식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반봉건의식 · 자주의식 하여 나타나기도 하였고 1890년대 후반기에 있어서는 정치의식의 고양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였다.자기 전통의 재발견은 충효사상의 비판적·개혁적 계승과 민족 문자로서의 한글의 재인식과 그 보급·활동 및 한국사에의 깊은 관심을 들 수 있다. 정치의식의 심화를 통한 자주 의식의 고양은 이 시기에 대체로 국기 게양, 국왕 탄신일 등의 애국충군적 집회활동, 사회단체의 결성 및 그 참여도에서 확인된다고 하겠다.1896년에서 1900년 사이 열강의 한국에서의 세력 균형이 이뤄지고 있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주의식의 고취 및 그 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당시의 봉건정부와 일제의 교묘한 농간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그 후 기독교회는 정부로부터 감시받게 되었고, 1900년이 되면서 중국에서의 의화단 사건의 영향도 있고 하여 아마도 기독교회를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선교사들로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비정치화를 규정한 결의안이 1901년 9월에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1901년부터 1905년까지의 한국 기독교는 그 사회의식이 크게 내면화되었다. 이 내면화의 결과는 1907년의 대부흥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기독교의 수적인 증가 면에서 보더라도 가장 침체기였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사회문제에 대하여 문을 닫은 데서 온 결과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에 의해 주로 추진된 교회의 비정치화 운동도,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앞에서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를 통하여 각성된 반봉건·반외세의 민족의식이 일제 침략의 노골적인 단계에서마저도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905년 이후 일제의 한국 병합 작업이 본격화되는 동안 기독교인들도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들의 항일 운동은, 첫째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며, 둘째 경제적 측면에서 부정 세금 불납운동 및 살시(撒市)운동을 통하여 반식민 · 반수탈 투쟁에 나서며, 셋째 YMCAㆍ
    인문/어학| 2023.02.27| 9페이지| 1,500원| 조회(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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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
    철종 임술년의 응지삼정소와 그 농업론(哲宗 壬戌年의 應旨三政疏와 그 農業論)- 목 차 -Ⅰ. 서언(序言)II. 삼정책문(三政策問)과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Ⅲ. 삼정소(三政疏)에 보이는 농업론(農業論)1. 삼정문란과 농민반란에 대한 이해2. 삼정개선·삼정개혁론IV. 이 정책(整策)에 반영된 농업론(農業論)V. 결어(結語)※ 참고문헌Ⅰ. 서언(序言)17·18세기 이래로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농업개혁에 관한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은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단순한 농업 기술상의 개선에 관한 것에서 부터 전정(田政)의 운영(運營) 관한 것, 그리고 지주(地主)·전호(佃戶) 관계를 주축(主軸)으로 하는 생산(生産) 체계(關係)를 개선하기 위한 토지재분배(土地再分配)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에 따라서는 그 개혁의 방법에 여러 가지 특이한 각자의 방안을 지니고 있었다.17세기 이래로 시대를 따라 심화되고 체계화되어 19세기 전반기에는 마침내 체제개혁적인 의미를 지닌 개혁론으로서 완성을 보게 되거니와, 이는 단순한 관념 형태의 아니라 농업현실의 모순(矛盾)의 심화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농촌사회는 신분제의 해체(解體)위에서 새로운 사회계층·농민계급으로서 재편성되고 있었으며 이들은 그 사회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심각한 계급적 대립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특히 지주층(地主層)과 무전농민(無田農民) 즉 지주· 전호간의 대립은 항조투쟁으로 집약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서는 농민반란·농민항쟁으로까지 연결되고 있었다.19세기 전반기 다산(茶山)이나 풍석(楓石)의 농업개혁론은 바로 이와 같은 경제적·사회적 모순을 미연에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민경제의 파탄(破綻)과 계급간의 대립이 수습되지 못하고, 마침내는 19세기 중엽 이후 있게 되는 전국적인 농민반란과 농민전쟁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 중엽 이후 즉 봉건적인 지배체제를 위협하는 농민반란이 있게 되면서부 내리게까지 한 이 때의 중대 사태는 피지배층으로서의 농민 대중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일이었다.이때의 민란은 지방에 따라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였지만 요컨대 초군(樵軍)을 자처하여 봉두난발(蓬頭亂髮), 두착백건(頭着白巾)을 하고 봉장(捧杖)과 죽창(竹槍)으로 무장(武裝)한 수십 수백명의 농민들이 읍성(邑城)을 습격하고 동헌(東軒)을 점령하며 관장(官長)을 축출하고 인부(印符)와 향권(鄕權)을 탈취하며, 파옥방수(破獄放囚)하고, 군전(軍田)을 소거하며, 조관사부(朝官士夫)를 포정하고 간향진서(奸鄕縉?)를 박살하며, 당핵도현(當核都縣)에서 볼 수 있는 어떠한 고질적인 폐단(弊端)은 이를 교혁(矯革)토록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민란이 일어나자 각 지방의 지방관들은 심상치 않은 사태의 발생을 보고 하였고, 정부에서는 그 진상과 원인을 파악하여 대책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관리들의 보고만으로는 민란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다. 여러 보고를 토대로 정부는 민란이 환곡(還穀)을 중심으로 한 농민수탈과 탐관오리의 농민탐학(農民貪虐)에 있는 것으로 보고 이의 시정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데서 각 지방에서는 민란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근본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로 그러한 방안을 제언(提言)한 것은 안핵사(按?使)로서 지방 실정을 관제(觀祭)하고 난민(亂民)의 동태를 목도(目賭) 할 수 있었던 박규수(朴珪壽)였다.그는 삼남민란(三南民亂)의 기본원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에 노력하였고, 마침내는 그것을 삼정문란으로서 집약할 수가 있었다. 삼정문란 가운데서도 환곡의 문란이 가장 심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밀란 발생에 대한 정부의 그 후의 공론은 삼정문란으로 집약되고 귀결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 대책도 그러한 차원에서 마련케 되어졌다.민란의 발생이 삼정문란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 박규수는 그 수습책을 삼정의 이정에서 찾으려 하였다. 따라서 환곡이 중심적인 문제로서 다루어져야 (農業論)1. 삼정문란과 농민반란에 대한 이해응지삼정소의 논자들이 삼정소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 것은 농민반란으로 폭발된 농민경제의 파탄을 수습함으로써 난민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정·군정·환곡 등의 삼정과의 관련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민란은 삼정의 문란으로서 야기된 것으로 파악되고 또 그러한 각도에서 삼정책문은 내려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민란의 수습방안은 삼정문란과 농민반란과의 관계를 어느 만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로 견해차가 생기므로 그들의 제 방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그것을 제기하게 한 그들의 삼정문란과 농민반란에 대한 이해의 심도를 살피는 것이 선행 되어야한다.(1) 삼정문란 - 제도해이·운영문란론정소자(呈疏者)들이 일반적으로 공통된 현상으로 삼정문란에 관하여 지적하는 것은 삼정의 제도가 해이해지고 그 운영이 문란해져서 제반폐단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전정·군정·환곡 등에 있어서의 그와 같은 폐단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민란의 배경으로 제시하고 있었다.전정의 폐단은 양전(量田)을 법대로 시행하지 않은데서 일어나는 현상, 이서층의 전정 운영 즉 평년의 징세과정과 흉재(凶災)시 급재(給災)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군정이나 환곡의 운영에서 저지른 부포(負浦)를 전결(田結)에다 전가(轉嫁)하는데서 일어나는 현상 등으로서 요약되고 있었다. 양전을 법대로(20년 1개량)하지 않는데 따라서 두 가지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다. 하나는 양전이 오랫동안 중단되고 있는데서 경계는 부정해지고 경계가 부정해지는데서 호부(豪富)의 겸병(兼倂)은 일어나고 있었으며, 또한 호부의 겸병으로 인해서 경계가 더욱 문란하고 부정해진다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농지에 대한 세(稅)의 적과(賊課)는 지번(地番)을 기준으로 적과되는 것인데, 그러한 기준에서의 경계의 혼동은 세의 혼동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하나는 전답의 등급과 진기(陳紀)의 파악이 불명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품(田品)과 진기는 자연조건에 따라 으로 대체하는데 따르는 폐단, 신구전(新舊錢)을 교체하는데 따른 폐단 등으로 요약될수 있다.(2) 삼정문란 - 증세(增稅)·적세불균론(賊稅不均論)다음으로 정소자들이 삼정문란에 관하여 좀더 핵심을 지적한 것은 그것을 제도해이나 운영문란으로 보고 또 그것을 스스로 논 하면서도 더 나아가 그것을 중세현상으로서 파악하고 그로 인해서는 농민부담이 가중하고 있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 점이었다.그리고 이 경우 이 증세는 단순한 세의 증가인 것이 아니라 신분계층간의 차이, 빈부간의차이, 권력의 유무에 따르는 차이 등을 내포하는 이른바 적세불균의 현상이 따르는 증세라는 것이었다. 이는 삼정문란을 단지 제도해이나 운영 문란으로 보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데까지 한걸음 들어간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도 이를 전정 · 군정 · 환곡 등에 관하여 제시하고 그것을 농민반란의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었다.전정에 있어서의 증세현상을 논할 경우, 그것이 전항(前項)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폐단을 바탕으로 하는 것 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은혜(隱鞋)·여결(餘結)·도결(都結)·가결(加結)·궁결(官結) 등이 모두 전결(田結)에 적과됨으로써 결세는 늘어나고 있었다. 결세의 증가가 얼마나 되는지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고 또 지방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지만 대체로 2·30량(兩) 또는 3·40량(兩)을 중심으로 그것을 내뢰하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었다. 증세는 원래 세액의 3-4배나 되었다. 그런데 증세는 단순한 세액의 증가나 세율의 증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삼정문란을 사회적인 모순으로서 관찰하고 있는 논자들은 이러한 증세현상에는 빈부·권력·신분계층간의 차이에 따라 세가 불균등하게 적과되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즉 불균등한 세의 적과로 인해 무세유곤(無勢有困)한 농민일수록 부당하게도 과중한 세를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군정에 있어서의 증세는 전정의 경우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군정에 있어서는 군현 단위로 군액, 즉 수포의 수가 일정하였으므로 전항에서 기술한 지집적이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자작농민층이 분화되어 영세토지소유자나 소작전호층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나아가서는 소작전호층의 농지차경에서도 경영 확대는 전개되어 부용한 자경농민층과 무전책노동층(無田策勞動層)에로의 분화가 일어났다. 정소자들은 이 시기의 이와 같은 농민층 분화의 상황을 전쟁에서의 토지 소유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모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소자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농민층의 이러한 분화과정과 몰락과정에 전정·군정·환곡의 삼정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삼정문란을 구체적으로 증세다 적세불균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삼정의 운영은 신분의 귀천과 부유의 차이에 따라 세의 적과에 불균이 있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분화과정에서 있었던 농민층 그리고 몰락과정에 있었던 가난한 농민층이 더욱 더 곤경에 놓이게 된다는 논리인 것이었다. 삼정문란으로 인한 농민경의 파탄과 몰락은 중농층과 부농층에서도 있었지만, 그 중심은 빈농층이었다. 적세는 빈부에 따라 불균하고 빈농층은 편수기고(偏受其苦)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4) 민란의 성격 - 계급대립론삼정문란에 대한 정소자들의 견해는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을 삼정의 측면에서 제시한 것으로서, 그들은 그것을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삼정을 통한 농민수탈은 농민을 사경으로 몰고 국가를 위경으로 몰아넣었으며, 농민경제를 파탄으로 몬 결과는 농민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게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란의 배경을 단순히 탐관오리의 탐학으로 보는 견해와 적세불균을 내포한 농민 부담의 가중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두 견해는 민란의 발생이나 그 성격을 그 시대의 경제체제와 관련해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농민층 분화 과정에서의 삼정수탈을 통한 몰락농민의 증대가 민란을 발생케 했다는 것이다. 농민층이 분화하여 다다르게 되는 마지막 단계는 무전무전(無田無佃) 임노동층(賃勞動層)이지만, 농민수탈이 가중하여 그 몰락이 촉진되는데 따
    인문/어학| 2023.02.26| 12페이지| 2,500원| 조회(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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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무개혁 논쟁
    광무개혁 논쟁- 목 차 -Ⅰ. 들어가며Ⅱ.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에 대한 서평Ⅲ. 김용섭, 『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에 대한 서평Ⅳ. 그 밖의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Ⅴ. 나오며※ 참고문헌Ⅰ. 들어가며대한제국 시기 정부의 정책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광무개혁' 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고, 그와 달리 이를 전면 부인하는 학자도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광무개혁논쟁' 이라고 한다. 광무개혁 논쟁의 쟁점은 근대변혁운동의 선상에서 광무년간의 개혁운동의 주류를 광무정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등의 운동세력으로 볼 것인가에 있다.전자는 대한제국의 정책들을 묶어서 광무개혁이라는 용어로 그 '개혁' 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는 견해로서, 김용섭 교수가 양전 · 지계사업을 통해 최초로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반면에 후자는 대한제국의 정책들은 시대착오적인 전제왕권 강화 추구정책으로서 근대국가 발전의 전진적 개혁은 등한시하다가 국권까지 피탈 당했으므로 '개혁' 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이와 같은 대한제국기 개혁의 주체와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1976년 제기된 이래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는 대립되는 양측의 견해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그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각각의 입장을 살펴보고, 어떠한 평가가 보다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Ⅱ. 신용하, 『독립협회 연구』에 대한 서평19세기는 개혁의 시대였다. 초엽의 실학파의 개혁방안, 중엽 철조조의 삼정이정청을 중심한 개혁방안과 대원군의 개혁정치, 말엽의 개화파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진보적 농촌지식인과 농민층의 농민전쟁을 중심한 개혁방안, 그리고 신구사상을 절충하는 가운데 종래의 개혁방안을 조정하여 근대화 작업을 제도적으로 마무리한 지배층 중심의 광무개혁 등은 그러한 여러 단계의 개혁과정이었다. 그러한 개혁과정은 크게 피지배층이나 농민층을 위주로 하는 개혁방안과 지배층을 위주로 하는 개혁방안으로 구분될 수 있다.19세기 우리나라 역사는 이 같은 사회적 모순의 개혁과 아울러 대외적으로 그러한 개혁운동의 제도적 마무리가 19세기 최말기~20세기 초에 걸치면서 수행된 지배층중심의 이른바 '광무개혁'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광무개혁기에 수구세력과는 달리 사회개혁과 민족운동에 관한 진보적 여론을 주도하였던 것이 독립협회였다.독립협회는 초기개화파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서구식 근대화를 위한 정치사상과 외세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정치단체였다. 그 사상의 성격은 부르주아 변혁사상이었으며, 3.1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었다.이러한 독립협회에 대한 연구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나, 신용하 교수의 연구를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풍부한 자료를 통해 체계적으로 해명하여 연구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독립협회의 사상과 활동에 관련된 모든 현상을 실증적으로 구명(究明)했을 뿐 아니라 독립협회의 성격을 역사적 입장이 아닌 사회학적 현실분석의 방법으로서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마지막에서 다시 사회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의와 성격을 유출해냈다.그의 독립협회에 대한 이해 및 그 사상은 '당시 새로운 생산력을 가지고 급속히 성장하던 신흥사회세력의 사상'이며, 이는 신지식층이 '특권적 수구세력에 대항하면서 성장하는 모든 신흥사회세력의 이익과 의식을 포괄적으로 대변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체계화한 것이었다'. 그것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자주독립사상(민족주의)이며, 국민개개인이 자립부강하고 민중의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자유민권사상(민주주의)이며, 이 양자를 달성하기 위한 자기개혁사상이었다. 본서(本書)에서는 이를 '자주민자강사상'이라 하였고, 따라서 독립협회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 사회단체였다고 보는 것이다.말하자면 신교수는 사회이론을 통해서 독립협회의 사상이나 활동의 근대성을 입증하려는 것이고, 이것은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우선 독립협회의 사상을 시민사회성립을 위한 체제변혁사상이라 할 때, '어떠한 체제를 변혁하려는 것인가'와 '어떠한 사회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의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독립신문이나 독립협회 등의 단체가 성립케 되는 사회적 배경이나 계기좀 더 크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 셋째로 독립협회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 회원의 사상을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따라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 따라야 하겠다는 점, 마지막으로 독립협회의 민족주의에는 불투명한 점이 있으며 따라서 단서가 붙어야하지 않나 하는 점이다.Ⅲ. 김용섭, 『한국 근대 농업사 연구』에 대한 서평김 교수의 저서에서 가장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광무개혁」과 그 증명으로서의 양전지계사업에 대한논문들은 큰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우선 김 교수의 이른바 ‘광무개혁’은 역사적 개념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으며, 특히 본격적 개혁시기라고 본 광무 3년은 개혁은커녕 구강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임을 지적한다. 아관파천 이후 일단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이번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다수의 열강에게 침탈당하고 양여(讓與)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세워 갑오개혁 속에 포함된 일부 긍정적 요소까지도 부정하고 전제 군주권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였던 내각제도 의정부제로 복구시키어 다시 전제권을 강화하면서 수구정권으로 되돌아갔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필요한 것은 밑으로부터의 국민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자주독립의 실(實)을 만들어 독립을 굳게 지킬 '개혁’의 단행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개혁은 단행되지 못하였다. 개혁 이전에 주권수호문제를 둘러싸고 친러수구파 정부와 개혁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무 2년 초엽, 개혁파들은 만민공동회를 조직하여 국민을 동원, 러시아 침략과 열강의 요구를 규탄하고 저지하는데 일단 성공하였으며 러시아를 후퇴시키게 된다. 이후 그들은 외세에 야합하는 친수구파를 규탄하면서 독립을 지킬 수 있는 개혁의 단행을 요구하였다. 친수구파정부는 개혁파의 요구 중 극히 일부를 반영하고, 다른 개혁요구는 실시하겠다는 약속만 해 두었다가, 러시아, 일본 · 수구파정협회, 만민공동회 등 개혁파단체들을 해산시켜 버렸다. 수구파정부는 개혁파를 탄압하는데 성공하자, 개혁은커녕 본질적으로 수구강화의 시대역행적인 정책을 집행하는 데 급급하였다. 국권수호를 위한 자주적 민족방어력을 형성하는 정책도 하지 않고, 러시아 및 열강에게 다시 이권을 양여하여 그들의 '독립을 존중하겠다'는 공약과 바꾸는 친러·친외세 정책에 의해 그들의 호의에 나라의 독립을 맡기는 극히 위태로운 정책을 실시하였다. 밑으로부터 거세게 올라오는 개혁운동에 대해서는 겨우 근대적 외형을 갖추는 몇 가지 정책과 함께 학교의 설립을 허가하는 관제반포로서 대응하고,〈구본신참(舊本新參)〉을 내걸어 개혁운동을 탄압하면서 수구고식책이 집행되었다.친러수구파들은 국제세력균형이 형성되었던 1898∼1903년의 시기에 대대적 구국개혁은 단행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요구를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맡긴 채, 몇 가지 근대적 외형을 갖추는 조치와 함께 전제군주권 강화, 私庫충족, 고식적 현상유지책, 국민수탈에만 급급하다가, 그 시기를 놓쳐버리고 일본에 의해 국권을 잃게 된다. 이후 친일적 광무정권이 대두하였으나 실제로 정책은 일제통감부에서 집행하였다. 광무 11년 동안 지배층은 개혁다운 개혁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우리역사에서 반성하고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부분인 것이다.그러나 구국개혁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재야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던 세력에 의해 학교설립과 신교육운동이 전개되었고, 일부에서는 상무사(商務社)의 독점특권의 억압을 헤치면서 근대회사 설립을 통한 신산업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권상실 이후에는 국민과 함께 국권회복의 기초로서 대대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여기서 광무년간의 개혁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김교수와 같이 치러수구파 지배층 → 친일파 지배층의 정책』을 개혁운동의 주류로 볼 것인가, 또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운동신교육 · 산업운동 애국계몽운동』을 개혁운동의 주류로 볼 것인가의 문제지배층 중심의 광무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라고 격찬하고 있다. 또한 친러수구파가 열강 특히 러시아에 지배당한 외세의존의정부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친러수구파 정부가 고식책의 명분으로 내세운「구본신참(舊本新參)」을 글자풀이에 집착하여 주체적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또한 광무개혁의 증거로서 양전지계사업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개혁의 의미보다 조세증가정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친러수구파들은 당장의 수입이 생기지 않는 개혁안들은 미뤄둔 채 은결을 찾아내어 조세수입을 증가시키고 지주의 사적 소유권을 지계로서 재법인하기 위해서 이 사업 본격적으로 집행하다가 도중에 중단하였던 것이다. 국가존망을 건 화급한 구국개혁의 실천은 뒤로한 채 조세증가정책으로 실시된 양전지계사업 정도를 실증적 지표로 지배층의 광무개혁의 역사적 개념을 설정한 것은 취약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독립협회의 운동이 광무정부의 광무개혁에 반영된 부분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독립협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철저하게 수구파지배층의 정책중심으로 이 시기의 민족운동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립협회의 운동을 지배층중심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김교수는 친러수구파 지배층의 수구고식책을 광무개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같은 시기의 재야개혁운동인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운동을 많이 오해하고 있으며, 저서에 대한 논평도 초점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 광무 11년 동안의 기간을 통하여 광무정권은 시대가 절실히 요청하는 구국할 수 있는 개혁다운 개혁을 한 번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였으며, 구국할 수 있는 개혁운동은 개혁파들이 집권하지 못한 채 재야구국개혁운동으로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광무년간의 개혁운동은 단체로서는 독립협회 개혁당 보안회 헌정연구회 → 대한자강회 신민회』로 이어지고 있으며, 운동으로는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운동 신교육 · 산업운동→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교수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광무개혁이라는 역사적 개념까지 정립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근대사 해다.
    인문/어학| 2023.02.26| 7페이지| 2,000원| 조회(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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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학 이란?
    박물관학 이란?- 목 차 -Ⅰ. 박물관학 이란Ⅱ. 박물관 기술학 (Museography)Ⅲ. 박물관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Ⅳ. 박물관학과 미술사학Ⅰ. 박물관학 이란박물관학이란 박물관의 역사와 기능과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여 박물관의 위상이 설정되고, 박물관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한 정책 결정을 위해 여론적인 바탕을 확립하는 것이 박물관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박물관학에서는 Museum Policy를 과학적으로 정립하고, 박물관의 역사를 이해·분석함으로써 다시 새로운 박물관으로서의 정책을 비교하고 그에 대한 실천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박물관학이다. 따라서 박물관학이란 일반적으로 박물관을 위한 논리, 즉 Museum에 대한 logic과 Museum에 대한 technology의 두 계열로 크게 분류할 수가 있다. 즉 Museology와 Museography라는 큰 두 개의 이론과 실제에 관한 학문으로 나누어 말할 수가 있다. 근래 유네스코에서 주창하는 인간의 평생교육의 장소로서 박물관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그에 따라 박물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 박물관의 기능을 「과거 인류가 남긴 문화유산을 수집, 보간, 전시하는 곳」이라 하던 초기 세계박물관협의회에서의 정의가 이제는 「인간과 인간환경의 물질적인 유형의 증거를 보유하고 연구하여 전시라는 수단을 통해 일반 공중에게 공개하여 교육적인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모든 항구적인 시설」을 뜻하게 되었다. 박물관 활동의 기본이 되는 수집과 보존을 바탕으로 박물관이 이룩해야 하는 조사, 연구의 성과는 먼저 전시실을 통하여 전개되어야 하고, 그것이 교육적인 성과를 거둘 때 박물관은 기본적인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여러 계층을 위한 박물관 학교 운영을 통한 교육적인 역할, 박물관 관계 도서의 간행, 강연회나 실습 등 각종의 행사, 일반 공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집회, 영화나 TV의 활용, 박물관 매점까지도 박물관의 기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박물관학은 소속 박물관의 성격과 역사에 맞는 관계 학문뿐만 아니라 종교와 신앙, 역사나 관광 휴양지 등의 지역사회에서의 역할, 관계 산업과의 긴밀한 유대를 요구하고 있다.Ⅱ. 박물관 기술학 (Museography)세계박물관협의회의 주도하에 정립된 박물관학의 발달은 괄목할 만한 일들로서 이론적인 박물관학, 즉 Museology와 그에 대한 실제적인 기술로서 Museography가 구체적으로 구분되고 이에 대한 연구와 의견교환이 지속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박물관 기술학은 박물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기 위한 수집, 채집방법과 정리방법 등 실제적인 일들과, 과학적인 보관을 위하여 보존과학적인 기법이 활용되었다. 박물관학은 다른 많은 학문과의 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박물관학과 고고학, 박물관학과 역사학, 박물관학과 자연과학, 박물관학과 미술사학 등등 박물관의 성격에 따라 상호보완 관계를 지닌다. 그 밖에도 박물관 운영의 전반적인 문제나 기술적인 문제를 다루는 이른바 Museography에서 응용해야 하는 학문 분야가 많이 있다. 박물관 자료의 보존관리를 위한 물리학, 화학, 이공학, 생물학 등이 관계를 많으며, 특히 이 분야에서 성립된 보존과학 분야는 괄목할 만한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박물관 자료의 전시분야에서는 교육학이나 시청각교육, 심리학, 광학, 색채학 등을 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Ⅲ. 박물관학과 다른 학문과의 관계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어 왕이 알렉산드리아에서 그의 궁전 일부에 각종 수집품, 즉 철학자의 조상, 진귀한 동물, 기타 미술품, 서적 등을 모아 그곳을 「Museion」이라 부르게 하고 문예, 미술, 철학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Museion을 설립, 운영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이 Museion을 일반적으로는 박물관, 도서관의 시작으로 해석하고 있다.로마시대에는 가정용 박물관의 형태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진열품은 조각이나 그림 등 미술품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진기한 동식물, 전리품까지도 포함되어 그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동물원이나 식물원의 초기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마나 부근 많은 유적의 대대적인 발굴로 인하여 많은 유물이 궁전이나 저택에 넘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수집품들은 많은 학자에 의하여 연구, 정리하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고고학박물관, 문화사박물관의 토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화폐나 메달의 수집과 연구는 경제학의 발전을 가져왔고, Cardinal Bembo 박물관에서는 명문이 있는 청동판금의 조사로 법률, 언어학이 싹틀 수 있었다.중세 유럽사회는 역사적 유물에 대한 관심보다는 종교적인 미술품 쪽으로 기울어 이러한 사회현상은 오히려 역사적인 유물, 유적에 대하여 안전하였다고 역설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대륙 발견과 식민정책을 통하여 많은 유물들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고 수집범위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역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민족학박물관, 과학박물관 등으로 분류되어 본격적인 박물관 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한 수집열은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수집품이 폭주하여 박물관, 미술관들은 작은 건물에 무질서하게 수집, 나열된 채 단순한 호기심에만 편승하는 폐단을 초래하기에 이른다. 전혀 교육적인 배려를 하지 않고 단순하고 때로는 지나친 흥미본위의 전시 사례가 너무나 많았으므로 그 수집이나 진열에는 황당무계한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계획성이 없는 것이었지만 일반에게 공개하여 흥미를 끌기 위한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오늘날 박물관이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획을 하는 일이나 Curator에게 흥행사적 기질을 요구하는 점과 상통하고 있다.19세기에 이르러 박물관 활동의 가장 혁신적인 변천은 전문화된 박물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잡다하고 광범위한 수집과 전시를 하던 종합박물관의 성격에서 과학의 진보에 따라 지금까지의 막대한 수집품을 계통적으로 정리하여 각 분야별로 전문적 박물관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전문적인 박물관으로서는 1799년의 파리 이공학 박물관, 1807년 덴마크의 고고학자 Thomsem의 고고학박물관 등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획기적인 사실은 지금까지의 도시 미관용 박물관, 일부 소수학자의 전용이던 박물관이 드디어 일반 대중의 지식을 개발하고 시민의 교육기관이라는 위치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일이다. 박물관이 학생교육, 일반 대중의 지식개발, 전문가의 연구 등 교육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의 발달, 인류의 기원에 관한 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등의 연구가 성해지자 그에 호응하여 박물관도 급진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현대의 박물관을 운영하거나 관리한다는 말은 Museum Management로 운영관리를 위해서는 행정학, 재정학, 도서관학, 법률 등의 보조적인 역할이 함께 해야 한다. 또한 박물관의 정보화를 지향하는 오늘날에는 정보공학, 특히 컴퓨터를 이용한 자료의 정리와 보급에 이바지하여야 한다.Ⅳ. 박물관학과 미술사학20세기에 들어오면서 박물관이 커다란 전환점을 불러 온 것은 첫째 지금까지의 잡다하고 형식적이며 흥미위주의 진열에서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과 일부 박물관이 미술박물관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해진 점이라 할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미술관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박물관학적으로 볼 때 박물관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인문계박물관으로서의 구실을 하는 경우와 단순히 미술품만을 전시하는 경우로 구분할 수가 있다. 여기서 전자는 미술박물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Asia House Gallery, IBM Gallery 등과 같이 자체의 소장품이나 상주하는 Curator가 없더라도 그때그때 박물관학적인 관점에서 박물관의 기능을 한다고 인정될 때를 들 수가 있다. 따라서 화랑이나 화관을 주로 하는 시설에서조차 미술관이란 말을 남용하는 데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이해하는데 문제의 소지가 있다. 세계각지의 박물관 가운데는 미술관이 가장 먼저 체계적인 전시방법을 강구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유수한 박물관, 미술관은 대체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지금까지 가득 차게 「진열」하던 것들이 감상을 본위로 하는 미술관이 박물관의 기틀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박물관, 미술관의 전시행위는 아무리 미적인 점을 강조한다 하여도 그 바닥에는 미술품의 연구 성과로써 주제가 구성되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화상의 진열장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유능한 Museum Curator의 출현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박물관이란 수집, 보관하여 조사, 연구된 것을 전시라는 행위로서 일반에게 공개하여 교육적인 성과를 거두는 곳이라고 설명할 때 박물관은 보는 곳, 보여주어야 하는 특수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즉 박물관에서 본다는 것은 모든 시청각기재의 경우와 같이 일방적인 움직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의사에 따라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박물관에서 보여 주는 것, 즉 박물관 전시는 되도록 박물관 전시품 앞에서 오래 머무르도록 시간을 끌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러기 위해 첫째 보기 좋은 전시방법이 갖추어져야 하고, 다음이 쾌적한 전시공간이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면 전시할 내용에 대해 특히 미적인 요소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와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어야 한다. 또한 무의미한 진열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이건 교육적인 배려를 하여 전시하는 것이 박물관의 기본적인 자세이다. 박물관은 교육적 역할을 비롯하여 궁극적으로는 보여 주기 위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하고 박물관 자료를 통하여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 사업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획을 바탕으로 효과적인 전시, 조명, 설명판, 기타의 보조적인 역할을 위한 작업이 모두 포함된다.
    인문/어학| 2023.02.26| 6페이지| 1,000원| 조회(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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