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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사회) 고교평준화에서 신자유주의 논쟁까지
    ::: 교육사회학 :::고교평준화, 대안학교학교선택권, 신자유주의 논쟁과목 : 교육사회학교수 : _______교수님제출 : 09. 06. 04. 목요일::: 목차 :::1. 고교평준화 ---------------------------- 3.2. 학교유형의 새로운 시도 ------------------ 5.3. 우리나라 대안교육 ---------------------- 5.4. 학교의 다양화, 학교선택제, 책무성 ---------- 6.5. 시장경쟁주의 도입과 신자유주의 논쟁 -------- 7.6. 토론주제 ------------------------------ 8.7. 참고자료 ------------------------------ 8.1. 고교평준화1) 탄생배경중학교 유신정부의 고교입시의 고교평준화무시험제 ▶ 탄생 ▶ 과열 ▶ 시행(1974년)고교평준화의 탄생배경은 35년 전 중학교시험제로 몸살을 앓고 있던 박정희 정부에서부터 시작된다. 중학교시험제로 인한 치열한 중학교 입시문제와 전인교육의 저해는 당시 사회의 큰 골칫거리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중학교 무시험입학제를 시행하지만 이는 오히려 팽창한 중등교육과 더불어 고교입시경쟁의 과열로 더욱 심각한 교육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 독재정치의 한계를 느낀 박정희정부는 1972년 유신정부)를 탄생시키고 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졸속행정으로 고교평준화를 시행하게 된다. (유신정부 탄생 2주만에 고교평준화가 논의되고 실행은 3개월만에 이루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당시 고교입시문제가 얼마나 심각했기에 박정희정부는 이리도 급하게 불을 끄려했던 것일까? 고교평준화 정책 시행 후의 일련의 사건들을 당시 신문기사를 보며 심각성을 살펴보자.[자료-2] 1980년 8월 20일자 동아일보[자료-1] 1980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자료1,2에서 보듯이 정부에서 신문광고를 통해 전면적으로 과외활동이나 학원 등의 학교이외의 학습을 금지시켰으나, 일주일 뒤 버젓이 과외활동을 하다 적발된 경우가 적지 않음을 당시고등교육의 입시경쟁, 지나친 과열의 문제는 35년 뒤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남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2) 정책의 목표와 성과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정책의 목표를 살펴보고 이후 성과를 보면서 문제점을 하나씩 확인해 보도록 하자.정책의 목표성과1.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2. 학교 간 격차해서3. 과학 및 실업교육 진흥4. 지역 간 교육의 균형발전5. 교육비 부담의 경감6. 학생인구의 대도시집중억제1. 고등학교 진학기회의 확대2. 입시부담완화3. 서열화된 고등학교 체제 개편4. 추첨배정 - 영세사학의 학생유치문제1.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침해2. 학습지도의 곤란3. 하향평준화4. 교육의 획일화 경향 - 사학위축정책의 목표는 당시대가 가지고 있던 교육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즉각적이고 표면적인 해결은 이루어 졌으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60년대부터 이루어진 수출위주의 산업성장은 고도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국민들의 지적수준역시 크게 향상시켜 나갔고, 기본적으로 자원이 빈약한 한국의 경제는 인적자원의 절대적인 필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인재를 키워내고 경제적부를 창출하기 위한 교육의 투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았고 그러한 배경에서 한국의 교육은 더욱 팽창되었으나 획일적인 제도아래 35년간 눌려져있던 공교육이 드디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3) 고교평준화를 둘러싼 쟁점현재 나타나고 있는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한 쟁점을 살펴보면 찬성과 반대 크게 두 의견으로 나뉘는데 각자 주장하는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유지주장해지주장1. 평등한 교육받을 권리2. 학교제도 운영의 공정성 실현3. 입시경쟁 문제해결4. 중등교육의 정상화5. 시험에 구속된 삶 극복, 전인교육1. 학교교육의 다양화2. 학교선택의 자유권 침해3. 경쟁을 통한 교육의 질 향상4. 운영체제의 효율성5. 공교육의 위기 극복두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으나 최근 해지주장에 더욱 힘을 얻으면서 대안교육에 자가 스스로 선택함)개방학교학습자는 학습내용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교사는 안내자의 역할을 함.지역사회통제학교지방분권적 지역사회 통제학교교육에 대한 정치적 재구조화를 지향함홈스쿨링부모의 교육권을 우선적으로 인정하여 가정에서 교과과정내용을 가르치고 학교의 허가를 받아 시행함.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불법.위 표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학교유형들은 외국의 경우임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안교육 제도와 기타 다른 대안들에 대해 살펴보자.3. 우리나라 대안교육1) 등장배경앞서와 같이 살펴본 교육에 대한 불만으로 대안교육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대안교육은 전통교육이 강조하는 규율에 순응하고, 전체의 가치를 강조하는 억압적구조를 벗어나길 바란다. 전체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자유를 누리면서도 전체와의 조화를, 지식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배움. 즉 배움이 놀이가 되는 교육을 강조한다. 하지만 전통교육이 처음부터 강압적인 순응구조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1945년 막 해방되고 나서 대한민국의 급격한 근대화는 짧은 시간을 투자하여 주입식 교육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데 주력하였음으로 좁은 강의실에 많은 학생들을 집어넣고 한명의 교사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하는 상황으로 짜여진 학교의 환경은 자연스럽게 위계적이고, 교사위주의 일방적인 수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식, 정보화 시대로 거듭 발전하면서 시대적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교육의 옷을 지금껏 한국사회는 입고 있었던 것이다.2) 대안교육의 유형현재 우리나라의 대안교육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주말계절학교 : 주말, 계절학교는 말 그대로 주말이나 방학시간을 이용하여 학교에서배우지 않는 다양한 내용을 다양한 커리큘럼을 통해 배우는 과정이다.◎ 방과 후 학교 : 학원근절(사교육)을 목표로 학교의 정규과정이 모두 끝난 뒤 학교에남아 보충교육을 받는 형태이다. 공부방이 체계화 된 경우이다.◎ 정규 학교형 : 현재는 초등학교에서만 시행하고 있으며, 비인가전일제이다.그러나 이러한 대안교육의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졸업증명문서가 발급되지 않음으로써 학력을 증명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대안교육이 재정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탄탄하여 공교육에 실망한 학생들을 보둠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대안학교 자체의 역량문제가 떠올랐다. 결국 대안학교의 한계는 역시나 문제의 원인인 공교육의 변화를 강조하게 되었다.4. 학교의 다양화, 학교선택제, 책무성그렇다면 공교육은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해야 할 것인가. 먼저 고교평준화의 가장 큰 단점이였던 학교선택의 자율성을 회복하여, 학생과 학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학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럴려면 당연히 학교가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화 되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일방적인 교육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학생을 제대로 가르쳤는지, 그 책임과 의무를 다 하였는지 검증받는 평가제도가 실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현재 다방면으로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공교육이 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제대로 시행될 경우를 예를 들어 이해해 보자. 현재의 고등학교의 경우 단편적으로 인문계/ 실업계의 이분법적인 분류가 고작이지만 앞으로는 각 지역의 특수성에 맞는 특징적인 학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국제영상고등학교, 디자인고등학교, 관광고등학교, 경제금융학교, 자동차고등학교, 과학기술고등학교등 (사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학교들이지만 사람들의 인식속에는 여전히 인문계와 외국어 고등학교, 특수목적고등학교 이외에는 모두 실업계로 치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인식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다양한 학교들이 마련되어 나는 부산의 지역적 특색을 살린 국제 영화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럼 학교에서는 정규 커리큘럼외에 그 학교가 특징적으로 내세우는 영화와 관련한 교과를 나에게 가르치고, 교육과정이 끝난뒤에는 학교의 평가를 받는다. 학교의 책무성을 검증받는 것이다. 결과 학생이 일정수준의 학업성취가 인정이 되면 그 학교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더욱 학교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경쟁으로 교육의 질이 향상되어 공교육의 불신이 가져왔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학생의 적성과 자율에 따른 학교선택이 자유권을 보장하고 학업성취를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문계/ 실업계가 아닌 다양한 학교들의 공존을 통해 다양한 가치가 함께 공존 할 수 있음을 학생과 학부모 나아가 사회전반적인 인식의 변화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자료-3] 현재 우리나라의 학교선택제 (예정)5. 시장경쟁주의 도입과 신 자유주의) 논쟁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 가운데 현제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우리나라에도 들이 닥친다.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면 교육도 보호무역처럼 우물속에 가두어놓고 키울 것이 아니라 세계시장에서의 경쟁과 자본의 논리로 효율성과 수익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효율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나라가 국내총생산(GDP)의 7%를 교육에 투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효과)가 나오지 못하고 있으므로 지나치게 교육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정부의 일방적인 교육정책시행 때문이라 비판하며 국민교육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운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하나, 교육에서의 경쟁은 필수적이고 두울,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서로 경쟁하여 우수한 교육자를 배출해 내어야 한다는 것 세엣, 교육서비스를 정부가 아닌 민간에서도 제공할 수 있도록 하여 다양한 교육을 실천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하는 쪽의 입장은 다르다. 신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 하듯이 현재의 교육은 단순한 복지차원의 교육이 아닌, 앞으로 국가경쟁력을 주도할 산업으로서의 비중과 역할이 크다. 하지만 교육이란 어디까지나 국민의 세금으로 정부가 공공재를 생산하듯, 국민의 복지에 힘쓰듯, 수익과 이윤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며 만일 경쟁체제로 시행했을 경우 세 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것이라 예고하고 있다. 첫째는 학습성과와 효율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된 나머지 교육자의권위가 하락할 것이며, 두 번째는 지나.
    교육학| 2011.01.08| 8페이지| 1,000원| 조회(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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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1910년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따른한국사회경제의 변화와근대적 쟁점{:: 목차 ::1. 서론2. 토지조사사업의 배경과 목적3. 토지조사사업의 과정과 내용1) 통감부의 기초사업2)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3) 지주권 인정과 소유권 분쟁(토지조사사업의 모순)4. 한국사회경제의 변화(토지조사사업의 결과)5. 토지조사사업의 쟁점1. 서론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8년까지 일제가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소유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시행한 대규모의 조사사업이다. 이를 통해 일제는 식민지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러한 결과로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 경제구조 창출의 핵심으로 평가되고 있다.조선의 역사와 경제 나아가 한국의 역사와 경제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일제강점기의 핵심적인 침략적 사업인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배경과 목적을 살핌으로써 사업의 내용과 과정을 알아보고 그에 따른 결과로 사업이 한국의 역사와 경제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그리고 근대적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수탈론(식민지 근대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논의도 살펴 토지조사사업이 오늘날의 역사에 어떠한 의미로 부각되고 있는지 밝히고자 한다.2. 토지조사사업의 배경과 목적토지제도는 호구제도와 함께 국가통치의 근간을 형성한다. 근대국가의 성립과 같은 국가형태의 전환과정에 있어서는 토지와 인민의 장악 여하가 통치의 성패를 좌우한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지다.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후 근대국가를 수립하고 영토확장을 꾀한다. 북쪽으로는 아이누 소수종족이 거주하는 북해도(北海道)의 개척에 나서고, 남쪽으로는 1879년 류우큐우왕국을 영토로 편입하여 거기에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 청일전쟁의 결과 대만을 식민지로 삼고, 러일전쟁의 결과 관동주와 남 사할린을 차지하고 1906년 조선을 보호국화 한 뒤 1910년 식민지로 삼았으며, 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태평양의 독일령을 점령한 뒤 이를 남양군도(南洋群島)로 묶어 통치하였다. 여기까지 일차적으로 일본제국은 형성되었다. {앞서야 할 필수조건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을 목표로 대한제국 광무 9년(1905) 통감부정치(統監府政治)의 출현과 더불어 그 기초사업에 착수하게된다.하지만 토지조사사업의 구체적인 시행은 일제에 의해서 최초로 시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한말에 이미 우리 정부도 근대적 측량법에 의한 양전(量田)을 계획하였고, 그 계획을 시행한 바 있었다.{) 조기준, 『한국자본주의 성립사론』, 1973즉, 당시 정부가 기도한 토지측량 및 양전사업은 고종 31년(1894)에 실시한 역둔토(驛屯土) 정리가 그 첫 시도였고, 그때 정부는 행정부서의 일부 개편을 단행하고 각영(營), 각아문(衙門)을 폐하면서 그 소속의 역둔전을 도지부에 이관한 것이며, 이것은 재정정리의 일환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정변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제 2차 양전사업은 광무 2년(1898)에 계획 실시되었는데 이때의 양전사업은 보다 실효성 있는 계획하에 착수되었다. 정부는 우선 측량을 관장하는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미국으로부터 근대적 측량기사를 초빙하여 양전기술을 습득시키는 한편 일부지역의 양전에 착수하였으며, 광무 5년(1901)에는 지계아문(地契衙門)으로 토지등기작업을 시행했던 것이다. 이 양전사업은 당시 국내정세가 불안정하여 사업의 진전이 지지부진하였으나 측량이 완료된 지역에 대해서는 양안(量案)이 작성되고 지계(地契)가 발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도 러·일 전쟁이 심해지자 일본의 내정간섭이 가중됨으로써 광무 7년에 사업이 일단 중단되고 양전을 관장하던 지계아문도 폐지되고 말았다.3. 토지조사사업의 과정과 내용1) 통감부의 기초사업근대적 토지소유권의 확립을 목표로 한 토지조사사업은 광무 9년 통감부정치의 출현과 더불어 착수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정부에 요구하여 일본으로부터 측량기사를 초빙케 하고 한국인 약간 명을 모집하여, 양전기술을 강습시키는 한편 전주, 대구, 평양 등지에 양지과출장소(量地課出張所)를 설치하여 기술원을 양성토명료하게 나타내는 일이었다.위의 토지조사사업 내용 가운데서 일제가 가장 중점을 두었고, 또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토지소유권 조사였다. 일제에 의한 토지소유권 조사의 요점은 토지에 일사유권자를 확정하여 배타적인 자본주의적 사유권을 법인하고 그 개별 사유권이 행사되는 토지의 범위와 속성을 명백히 규정하여, 등기제도를 설정함으로써 이를 법률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토지조사령에 규정한 토지조사의 방법은 1 토지 소유자는 총독부가 정한 기일내에 주소, 성명, 소유지의 명칭, 소재지의 지목, 번호, 목표, 등급, 지적, 결수를 토지조사국에 신고하게 하고, 2 이에 따라 면, 동, 이장의 입회하에 토지를 답사, 요소에 푯말을 세워 약도를 그리고 각 지방의 토지제도, 관습 기타의 모든 상황을 조사하여 소유권 사정의 자료를 삼는다. 3 이와 같은 예비조사가 끝나면 지주, 지주대표, 동장, 이장의 입회하에 각 토지의 경계, 니목, 지주를 조사, 개황도를 만들어 세부측도의 준비를 하고 토지의 품질을 정한다. 4 개황도에 의하여 기술자를 동원, 토지의 형상, 면적을 측정하여 지적도를 만들고 다시 저적도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 학술적인 방법으로 삼각측량, 도근측량을 실시한다. 5 임시조사국장은 지방의 유지들로 구성된 지방 토지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가 끝난 지방의 적부를 심사한 후 토지대장을 만들어 토지의 소재, 지목, 번호, 면적, 지주 등을 등록하게 한다. 6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장부를 정리한 다음 지권을 발행, 지주에게 주고 토지소유권의 증명을 삼는다. 7 지주는 지권에 따라 소유지의 4방에 푯말을 세워 경계선을 명백히 한 다는 것 등이 중요한 골자이다.3) 지주권 인정과 소유권 분쟁토지조사사업의 소유권 재정은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켰다. 종래 토지에 대해서는 토지를 선조 대대로 경작하고 있는 농민층과 국가에 대해서 지세를 납부하면서 농민으로부터 병작료를 징수하는 지주층의 두 개의 계층이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두 개의 계층은 항상 토지와 결부되어 분리되지 있었던 농민지는 국유지와 구별하기 매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소유권 재정에서 심한 분쟁을 일으킨 토지들은 민유지내에서의 지주 상호간의 분쟁보다도 농민지를 국유지로 재정하는 데서 일어난 분쟁이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이처럼 토지조사사업에서는 형식이 치중하고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농민소유가 부당하게 국유지로 넘어간 것이 많아 여기서 소유상실이라는 억울한 손실을 당하게 된 계층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소유권 분쟁은 일제의 헌병통치하에서 실시되어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할 수 없었고, 설령 항거한다 하더라도 형식주의를 표방한 이 조사에서 반증할 만한 문증을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관습경작민은 증거의 자료를 제시할 수 없었으므로 백성에게 불리하게 해결되었다.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근대적 소유권을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토지의 소유자가 국가인지 관료인지 또는 경작자 자신인지를 구별하지 못하였고, 2 당시의 농민은 근대적인 법령과 그 절차에 관하여 경험이 없었을뿐더러 신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였고, 거기에 민족적인 감정이 섞여 신고를 이행하지 않았으며, 또 세부측량을 담당한 기술자나 통역관에게 속입을 당하는 조건이 되었다. 3 정한 기일내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불가능하여, 이로 인해 자기가 경작하고 있던 민전까지 탈취당하였다. 4 토지를 정직하게 신고하면 과중한 세금을 붙여 토지를 빼앗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당시의 일본에 대하여 극도의 의혹을 품고 있던 농민은 고의로 신고에 응하지 않았다. 5 이 법령의 시행에는 일본 헌병이 동원되어 귀족, 관리들의 토지소유를 무조건 응원하였다. 이러한 정세였으므로 오랫동안 목가적인 생활을 해오던 무지한 농민들은 당연히 그의 소유가 되어야할 민전마저 빼앗기고 종래의 종족고유, 촌락공유의 토지는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으며, 민유지이면서도 조선말의 가혹한 납세와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궁원전 또는 공원전에 편입시켜은 우리나라 역사적인 토지관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대 왕조에서 과전, 공신전은 처음에는 왕의 거주지인 경기지방에서 지급되었으나 뒤에 와서는 충청 이남의 지방에서도 지급했고 그밖에 별양전등 관료계층에게 준 토지는 주로 삼남지방에서 지급했으므로 경기 이남의 토지는 거의 모두가 왕실 및 권문세가들을 수조지로 되어 있어 농민의 토지는 극히 적었다. 그러나 경기 이북은 이와 같은 양반계급이 적었고 토지는 역둔토 이외에는 별로 수조권자가 사이에 끼는 일이 적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지조사사업에서 지주를 편성함에 수조권 개재지에서는 수조권자에게 소유권을 주었고, 수조권자가 개재하지 않은 토지에서는 경작자로 하여금 토지소유자로 인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후 토지사유자 구성에서 지역적 편차가 생긴 것은 이런 역사과정에 연유한 것이다. 여섯째, 농지경영에 있어 영세소작경영이 일반화되었다. 세 번째 항목에서 말한 영세소작농들은 소작이 아니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었고, 당시 정부는 이들 인구를 흡수할 만한 근대공업도 발달하지 못하여 농가경제는 더욱 궁핍해 졌다. 자작농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도정을 밟았고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를 법적으로 확립시켰으나 토지의 경영관계는 전혀 근대적이라 할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상과 같이 일본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은 일면으로는 이 땅의 토지관계에 근대적 형식을 신현한 것이라 하나 반면은 침략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원시적인 자본축적의 기반으로서 처음부터 반봉건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고율의 소작료제도에 의해서만 그들은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반봉건적 체제에 의한 농민의 빈궁화는 노동력을 도시나 광산에 집중시켜 싼 임금으로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또 소작료가 많고 봉건적 관계가 유지되는 후진국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이자율이 높아서 일본인의 고리대 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게 극히 유리하였던 것이다.5. 토지조사사업의 쟁점해방 이후 한국사의 큰 과제 중의 하나는 식민사관 극복이었고, 이러한 역사학계의 노력
    인문/어학| 2011.01.08| 10페이지| 1,000원| 조회(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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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청시대 신사에 대하여
    명 청 시대 신사층에 대하여 - 시대별 신사의 형성과 변화 - 역사교육학과 정주석 200526027 역사교육학과 고봉주 200726036차례1. 신사 ( 紳士 ) 란 ? 중국 명 ( 明 )· 청 ( 淸 ) 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영향을 행사한 계층 . 紳 ( 신 - 관직경력자 ) + 士 ( 사 - 학위소지자 ) 紳 : 관직경력자 , 진사 ( 進士 ) 士 : 거인 ( 擧人 ), 공생 ( 貢生 ), 감생 ( 監生 ) 생원 ( 生員 ) 등1-1. 신사의 학위 신 / 사 상 / 하 학위 의미 신 紳 상 층 신 사 유관자 ( 有官者 ) 현직 관료 , 퇴직관료 진사 ( 進士 ) 과거 시험 중 회시 , 진시 합격자 사 士 거인 ( 擧人 ) 과거 시험 중 향시 합격자 감생 ( 監生 ) 생원 중에서 선발된 국자감 학생 ( 예감생 , 은감생 , 음감생 , 우감생 ) 하 층 신 사 생원 ( 生員 ) 부 ․ 주 ․ 현학의 유교 시험인 동시 ( 童試 ) 에 학교하여 중등학교인 유학 ( 儒學 ) 에 입학한 학생 공생 ( 貢生 ) 지방에서 선발된 태학 입학생 ( 세공생 , 은공생 , 발공생 , 우공생 , 부공생 ) 음생 ( 陰生 ) 조상의 음덕으로 국자감에 입학한 학생 . 극소수 ( 관음생 / 난음생 ) 기타 번역생원 / 봉사생 * 상층 / 하층 신사의 구분 출처 『 중국의 신사 』 장중례 , 신서원 . 1993 / 학자마다 의견 다름 .2. 신사의 형성배경과 특권 과거제와 학교제의 결합 사인 ( 士人 ) 층의 특권화 신 ( 紳 ) 과 사 ( 士 ) 의 동류의식 형성 송대 사대부의 변화 신사 ( 紳士 ) 의 특권2-1. 과거제와 학교제의 결합 유학 ( 儒學 ) 입학자 * 흰색으로 표시한 것 – 과거시험 ( 동시제외 ) 동시 시험 준비학생 필 수 조 건2-2. 사인 ( 士人 ) 층이 특권층으로 승격 2. 1 개 현 당 인구수 변화 1. 명 청대 인구 증가 정도 1. 현에 파견되는 관리 – 지현 신사 紳士2-2. 사료 – 생원의 사회적 지위 내가 젊어서 고향에지위가 현저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 신 ’ 과 ‘ 사 ’ 가 ‘ 신사 ’ 라는 하나의 계층으로 인식될 수 있었나 ? 2-3. 신 ( 紳 ) 과 사 ( 士 ) 의 동류의식 형성2-4. 송 대 사대부의 변화 Q. 명 청 시대 사회의 지배층을 ‘ 신사 ’ 로 부른 것은 명 중엽부터였다 . 명 초에는 신사로 불러야 할 존재를 여전히 ‘ 사대부 ’ 라 불렀다 . 그렇다면 명 중엽부터 사대부 를 신사 로 부르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 사인 ( 士人 ) 수의 증가 다양한 사회변화 2. 생원 경쟁률 증가 추이2-5. 신사 ( 紳士 ) 층의 특권 요역우면 ( 徭役優免 - 인두세와 실역 면제 , 지세와 재산세는 내야함 . ) 지방관과 동등한 지위 ( 지방관의 제재 받지 않음 ) 법률적으로 지위 보호 구품관과 같은 대우 면책특권 세금감면 , 특사 향시에 응시할 자격 부여 노비소유3-1. 신사의 변화 – 신상 ( 紳商 ) 신상 ( 紳商 ) 이란 ? : 태평천국운동 19 세기 이후 ‘ 신사 ’ 와 함께 ‘ 신상 ’ 용례 처음 등장 . * 처음에는 ‘ 신사 ’ 와 ‘ 상인 ’ 의 연칭으로 사용 . * 19 세기말 ‘ 신사로서 상업을 경영 ’ 하거나 * ‘ 상인이 연납을 통하여 공납이나 직함을 얻은 사람 ’ * 한 사람이 신사와 상인의 신분을 겸하는 존재로 사용 청말 사회 지배층 구성3-2. 신상 ( 紳商 ) 형성의 배경4. 신사 ( 紳士 ) 의 변화과정 정리 송 원 명 초기 명중기 청 19 세기후반 960 년 ~ 1279 년 ~ 1368 년 ~ 15 세기중엽 1644 년 ~ 1911 년 사대부 신상 신사 홍무제의 건국세력 탄압으로 생긴 관직의 공백을 채우는 정도의 계층 . 큰세력권을 형성하지는 않으나 9 품관의 지위및 여러 특권 누리기 시작하는 시기 . 인구증가 , 빈부격차 , 이갑제의 붕괴 , 북로남왜 전국적인 인구이동 등 .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중앙권력의 통제력 약화 . 이에 신사층이 향촌지배 질서정립에 기여하며 특권층 유지하게됨 . 청조가 중국을 점령하긴 했으나 일괄적 통치가회조직 ( 농회 , 공회 , 상회 , 교육회등 ) 의 지도자 청조멸망직전에 자의국과 자정원을 지배하며 자신들의 이익대변 신해혁명에 참여 – 지방의 주현정부 지배 반청혁명주도5-3. 사료 – 고염무의 신사비판 국가가 생원제 (= 학교제 ) 를 제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천하의 우수한 자제를 모아 학교에서 교육해서 인격을 갖추고 능력을 신장시키고 선왕의 도를 체득하고 시사의 중요한 문제를 깊이 깨닫게 해서 , 출사하여 공경대부가 되어 천자의 정치를 분담케 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 천하의 생원 전체의 수는 현마다 300 명으로 계산하면 50 만명은 될 것이다 . … 경서에 통하고 고금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 , 가히 천자를 보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수천 명 중에 한 명도 없다 . …. 일단 생원의 자격을 얻으면 서민이 부담해야 하는 요역을 면제받고 서리의 행패를 피할 수 있고 신사의 자격으로 관료를 면회할 수 있고 , 태형의 모욕을 받지 않는다 . 그러므로 오늘날 생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공명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단지 ‘ 보신가 ( 保身家 )’ 를 위함일 뿐이다 . 7/10 로 계산하면 보신가적 생원은 거의 35 만이나 된다 . 천하에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셋이 있으니 , 향환 , 생원 , 서리이다 . 이들은 모두 법적으로 요역 부담을 면제 받는다 . 그러므로 요역부담은 모두 소민에게 전가된다 . - 고염무의 생원론6. 정리 및 결론 국가통치 보좌 신사공의 ( 紳士公儀 ) 향론의 대변자 특권을 이용한 경제적 사리사욕 보신가적 성향참고문헌 * 참고문헌 * 『 동양사 개론 』. 신채식 . 삼영사 . 1993. 『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 오금성외 . 이산 . 2007 『 중국의 신사 』. 장중례 . 신서원 . 1993 『 강좌중국사 』- 명 , 청대의 국가권력과 신사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 1998 『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4』 신서원 . 1997한글파일 대체입니다 . - 보충설명 1. 신사 ( 紳士 ) 란 ? ①고 유학의 학생인 생원에게만 과거응시 자격을 주었다 . 따라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학에 입학하여 생원이 되어야 했다 . • 과거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과정 : 생원 → 거인 ( 향시 ) → 진사 ( 회시 , 진시 ) → 관료 • 생원 : 동시 ( 童試 ) 에 합격한 학생으로 성적에 따라 국자감에 진학할 수도 있고 , 향시에 응할 수 있는 학위 소지자 • 거인 : 향시에 합격한 자로서 명대에 그 자격만으로도 관직에 임명되는 것이 가능하였고 , 회시의 합격을 위해 국자감에서의 학업도 허가되었다 . • 학교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과정 : 생원 → 감생 ( 국자감 입학생 ) → 진사 → 관료 • 감생 : 국자감의 학생으로 생원으로부터 선발된 학위소지자로서 , 감생이라는 자격만 가지고도 입사가 가능하여 명대의 중 , 하급관료의 과반수가 감생출신 .한글파일 대체 - 보충설명 2-2. 신사의 형성배경 - 사인 ( 士人 ) 층의 특권화 : 사인들은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지방에 파견된 지현을 도와 향촌의 질서유지에 기여한바 , 명 , 청 정부는 이들에게 종신토록 9 품관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게 되었다 . • 인구증가 : 1 개 현 당 인구수가 명중엽 10 만명 정도에서 청말에 30 여만명으로 증가 . • 지현의 향촌통치 : 혼자서 30 여만명으로 늘어난 향민을 통치하기 어려움 . • 회피제 : 관리를 임명할 때 , 공평성을 잃을 염려가 있는 지위를 피해서 임명하던 제도 . • 관리의 승진문제 : 지방관이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근무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근무했던 지방의 향론에 의해 결정 . 향론을 결정하는 자가 바로 신사 .보충설명 – 명청 초기시대 신사특징 * 명 초기 홍무제는 학위소지자들에게 9 품관에 준하는 특권을 주었다 . 초기에 생원의 수는 중기에 비해 1/5 ~ 1/10 정도로 적었고 , 홍무제의 정치적 탄압으로 ( 개국공신 - 지주계층 ) 관직의 결원이 많아 감생이 관직에 나갈 확률이 높았다 . * 명 초기 관직경력자는 2 만 5 천명 내외 , 로 청조는 재정부족위기 . 재정부족을 탈피하기위해 청조는 1872 년 ~1908 년까지 약 30 년간 광범위하게 연납제를 허용하게됨 . ( 상인이 대거 신사로 상승하는 결정적 계기 ) ② 경제 :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공업 및 도시가 발달하면서 청조는 중상주의로 정책을 변경함 . 상업의 중요성 부각됨 . ③ 사회 : 사 - 농 - 공 - 상의 엄격한 신분관념이 완화되기 시작함 . 사회적 위기와 ( 열강의 침략 )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 . ④ 상인층의 노력 : 상인들 스스로의 의식수준도 높아지면서 상업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들의 위상에 대한 자각도 커짐 . 더불어 상업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관 ( 官 ) 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 공공사업 ( 각종 수리시설 , 도로 , 교량의 신축과 보수 . 하천준설 , 재해구제 등 ) 에 참여하거나 적극적으로 기부금을 냄 .보충설명 5-1. 신사의 역할 - 긍정적 측면 ① 정치 : 이갑제 해체에 따른 공공부분의 업무 대신 맡아 처리함 . 향촌의 질서유지역할 - 향약 , 보갑제의 운영 , 향촌방어 , 향촌내의 대소분규 에 대한 조정 등 . 국가권력과 향촌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함 . 중앙정부의 명령을 향촌에 전달 , 시행하도록 하기도하고 , 반대로 향촌의 여론 을 중앙정부에 대변하기도 함 . ② 경제 : 관 ( 官 ) 과 함께 공공사업 추진함 ( 도로 , 교량 , 토목사업 , 수리개발 등 ) 조세징수시 중앙정부에서 신사에게 세금 통제권을 주어 징수하기도 함 . ③ 문화 : 편찬사업 - 원대부터 행해졌던 편찬들이 이루어져 『 사서대전 』, 『 오경대전 』 등이 편찬되었다 . 학술발전 - 양명학의 발달에기여 향촌교화 - 향약 , 서원등의 강학 , 서적의 간행통해 향촌의 교화를 담당함 . 인쇄술 - 명 중기 강소 남부 무석 출신인 화수와 그 후손들은 움직이기 쉬운 동활자를 활용하여 인쇄기술을 향상시켰다 . 예술분야 - 『 서유기 』, 『 유림외사 』, 『 홍루몽 』 등이 신사들의 작품이다 .보충w}
    인문/어학| 2011.01.08| 28페이지| 1,000원| 조회(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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