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노르베르트 볼츠’는‘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란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도서문화의 종말’을 고한다. 즉 볼츠는 구텐베르크(서양인쇄술의 기원지)로 대변된‘활자 미디어 세계’에서‘인터넷과 뉴미디어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미디어 세계의 변화를 냉정히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도서문화의 종말’이라는 표현처럼, 어찌 보면 그의 주장이 꽤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러한 주장들을 과거 철학적? 미학적 사상들을 통해 통시적으로 고찰해 냄으로써 나름대로 탄탄한 논리적 구조를 쌓고 있다.그가‘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라는 책을 통해 밝힌 논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커뮤니케이션 관계의 구조 변화에 관한 역사적?이론적 고찰’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도서 문화의 종말과 함께 인터넷 문화로 대변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이 어떤 것인지’를 분석하고 있는 부분이다.2. 본 문(上) - 커뮤니케이션 관계의 구조 변화에 관한 역사적?이론적 고찰그럼 먼저, 첫 번째 논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볼츠는 우선 제1장에서 뉴 미디어의 복잡한 철학적? 미학적 계보를 되짚어 본다. 즉 그는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와 같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은 라이프니츠로부터 칸트, 낭만주의자 슐레겔과 노발리스를 거쳐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로 이르는 근대 철학의‘비주류’들의 흐름 속에 담겨 있었다고 말한다.특히 볼츠는, 자신의 연구는 현재 가장 진보된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사회(철)학자‘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체계 이론(Systemtheorie)'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참고로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기본 테제를 살펴보면, “인간은 커뮤니케이션 할 수 없다. 단지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로 결론지을 수 있다. 즉 루만의 커뮤니케이션 개념은, 인간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의 주변 환경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고, 또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커뮤니케이션을 재생산하므로 사회는 모든 커뮤니케이션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따라서 볼츠는 이러한 루만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사회와 인간과 커뮤니케이션간의 관계의 구조를,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비록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의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들로는 환원될 수 없는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 기계임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략) 따라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들의 코드들과 인터페이스들을 인간 상호간의 의미 전달을 위한 보조 도구 정도로만 해석하는 견해는 너무나도 낭만적인 오해일는지도 모른다.”)즉 볼츠는 인식 작용과 커뮤니케이션에서 종래의 휴머니즘이 가정했던 영적 인간 존재와 인간 사이의 의미 전달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휴머니즘적 편견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볼츠는 우리의 휴머니즘적 문화가 표방하는 인간이라는 고전적인 척도는 더 이상 포스트모던적인 사회의 카오스적 복잡성과 커뮤니케이션적 상황에 전혀 부합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휴머니즘적 인간성을 벗어 던져버릴 때에만 비로소 자유롭고 다채로운 개인주의가 보장되고 인간의 유적 본질이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이렇듯 ‘니클라스 루만’의‘체계 이론’과의 관련 속에서 하나의 통합된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기본 전제 개념들(즉, 사회-인간-커뮤니케이션과의 관계 구조)을 밝히고 있는 볼츠는, 제2장에서 이러한 논지들을 바탕으로‘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비판한다. 즉 볼츠는 “하버마스는 이성적이고 의사 소통에 지향된 커뮤니케이션을 특권화시킴으로써, 다른 모든 커뮤니케이션 형식들에 대해서는 평가 절하하고 있다.”) 고 비판하면서, 언어를 변용의 메커니즘으로만 받아들이는 루만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사회를 계몽시키려고 하였던‘하버마스’의 주장을 비판하고, 사회로부터 배우려 하였던 ‘루만’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즉 볼츠는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의 힘으로 사회에 대한 개선 가능한 요구를 해야한다”는 하버마스의 주장보다는,“사회속에 내재해 있으며 다양하게 변주되는 언어 자체를 통해 거꾸로 사회를 분석해야한다.”는 루만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제3장에서 볼츠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진화과정을 현대 전쟁사 속에서 고찰하는, 아주 독특한 발상을 보여주고 있다.) 볼츠는 나폴레옹 시대의 광학적 텔레그래프에서부터 현대 군수 및 우주 산업의 테크놀러지적인 첨단 제품들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전쟁사를 통해 등장한 무기들을‘커뮤니케이션의 기적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츠는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각을 특징짓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3. 본 문(下) - 도서 문화의 종말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도래제4장과 5장부터 볼츠는 앞서 살펴본 새로운 의사전달 체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구텐베르크-은하계와의 이별을 이야기 하고 있다.볼츠는 오늘날의 미디어 세계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오늘날 분명히 그 어떤 공통의 미디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가치 체계가 다양한 미디어들에 의해 서비스 된다. (중략) 따라서 부르주아적 여론이 미디어 공동체라는 가상적 실재 속에서 해체되고 있다.”)위와 같은 볼츠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2가지의 논제를 찾을 수 있다.하나는 “미디어 체계의 변화”)이고, 하나는 그러한 변화 속에서 감지되는 “사회적 위계서열의 테두리 속에 내재된, 통일적 네트워크 문화의 해체”가능성이다.먼저 미디어 체계의 변화에 대한 볼츠의 주장을 살펴보자. 볼츠는 세계 커뮤니케이션은 오늘날 더 이상 광역 송출 Broadasting(방송) 이라는 전통적인 도식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 다고 보고 있다. (물론 아직 성급한 감은 없지 않지만, 세계 인터넷 보급률이 꾸준히 커져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그리 논리적인 비약은 아닌 것 같다.) 즉 다채널화되고 세분화된 매스미디어들 즉 소위 말하는 국지 송출 Narrowcasting에 직면하여, 소비자 대중들은 틈새 독자나 틈새 시청자 집단으로 변환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볼츠는 미래의 커뮤니케이션적 상황에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도처에 편재하는 컴퓨팅’을 들고 있다. 이것은 컴퓨터가 도처에 편재함으로써 컴퓨터가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다시말해 진보적인 사용자의 편리성을 위해 결국 컴퓨터를 눈에 보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수많은 가치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삶의 단편들의 집합 즉, 우리 생애 전체의 총체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치 추구나 목적이 없는 삶의 영위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삶을 가리켜 누구도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있고, 그러한 것들을 통해 삶을 완성해 나간다. 또 그 추구하는 대상은 사람마다 누구나 다르다. 즉,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명예나 권력을 위해 자기 삶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목사님이나 스님처럼 종교적 가치에 삶의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다르더라도 우리는 한가지 공통점을 도출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나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즉 삶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며,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한 그림을 개괄적으로나마 그릴 수 있다고 본다. 삶을 이루는 요소들의 고찰은 그만큼 우리 삶을 더욱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고 또한 보편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에 대한 고찰 역시 그러한 삶의 바탕을 이루는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분석과 함께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의 이정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먼저 우리는 인간의 삶의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한 개인의 존재만으로 삶을 형성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목적들은 남과의 관계 속에서, 즉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가족이라는 울타리와 그 외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자아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키워나가며, 그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감정과 사고의 교환이나 공유가 우리의 삶을 이루는 중심 축이라고 생각한다. 삶이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일생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삶이란 것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삶을 이루는 요소 중에서도 가족과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공유되는 감정들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요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러한 요소들(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형성해 나가는 타인과 가족과의 관계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러한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형성해 나가야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숨을 거둘 때까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해간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관계가 바로 "가족"이랄 수 있다. 가족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관계와의 기본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즉 사람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 사람의 "딸"이나 "아들"로서 살아감과 동시에 일정 나이에 이르면 결혼을 하여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이 되고,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부모"로써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태어날 때 고아가 아닌 이상, 그리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부모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가족사이에서 주어진 "부모"나 "자식", 그리고 "형제"의 관계는 타인과의 다른 관계와는 달리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태어나면서부터 이루어지는 천부적인 관계이다. 물론 '이혼'이란 제도로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부부사이의 관계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가족사이의 관계는,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맞게 책임과 의무를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사람마다 행하는 정도가 다르고 또 그러한 가치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시 여기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을 타인과의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결정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그리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하면서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해 가는데, 최초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친구"와의 관계일 것이다. 친구사이의 관계 속에서는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들과는 다른 또 다른 가치들을 얻을 수 있다. 즉 가족과는 말못할 개인적인 고민이나 도움들도 친구를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자신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러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친구를 성장기의 학창시절에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러한 친구들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게되고, 비슷한 과정의 성장기를 거쳐가면서 고민을 서로 공유하고 기쁨을 서로 나누어 간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우정"이라는 친구사이의 정신적 토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친구와의 관계는 가족과는 달리 선별적으로 그 관계를 맺어나가고 지속해나가고 끊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그리고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차적인 인간관계를 맺어나간다. 즉 학창시절을 통해서는 선생님과 제자사이의 사제관계를 맺어나가고, 직장에 가서는 직장 선후배와 동료사이의 또다른 인간관계를 맺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또다른 가족관계나 친구관계의 형성이 가능하다. 즉 직장에서의 이성과 교제를 하고 결혼을 하게되면 자신의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고, 또 직장에서 자신과 정신적 감정적 공유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친구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어나간다. 심지어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슈퍼마켓 주인 아줌마나 비디오 가게의 주인아저씨와도 친분관계를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이런 인간관계는 사람의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창조되고 소멸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관계를 이루는 토대는 무엇일까? 우선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애' 일 것이다. 이는 어떤 인간 관계에서 보다도 가장 그 유대가 끈끈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가족은 자신과 타인과의 경계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가족애는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가족애는 현대사회에서 과거보다 그 가치가 좀더 퇴색된 경향이 있다. 아마 다른 여러 물질적 가치들에 가려져 가족이라는 개념이 전해주는 의미가 전통사회에 비해 많이 약해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가사만사성'의 말처럼 가족애는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가 된다. 비교적 부모의 사랑을 풍족하게 받고 자란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주변사람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듯이 가족애는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GE에서의 젝 웰치의 업적현대기업의 이해 (E조)목 차------------■ 하드웨어의 개혁 (사업부분의 통합)- 3-CIRCLE 전략■ 소프트웨어의 개혁 (경영풍토의 개혁)- 관료주의 대수술- 워크아웃(WORK-OUT)의 시행■ 타 기 업 과 의 거 래- 과소평가된 우량기업, RCA의 인수- 소형가전부문의 매각 (톰슨과의 거래)■ 기 타- 제 2의 경영혁신 운동 (CAP, 6시그마 운동)- 언론에서의 평가■ 하드웨어의 개혁 (사업부분의 통합)웰치 회장은 전임자 존스 회장의 후임으로 1980년 12월19일 취임한 직후부터 GE의 개혁에 착수했다. 첫단계의 개혁은 당시 GE의 170여개 사업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세계 경쟁기준으로 1위나 2위에 해당되는 사업을 선별하고 나머지 모든 사업들을 처분하는 것이었다. 또한 새로운 GE에 적합한 사업들을 인수함으로써 GE의 사업구조를 철저한 경쟁력 기준에 의해 재편성하는 한편 경영조직을 단순화하고 조직계층을 축소시키는 등 기업의 하드웨어 부분을 재구축하는 것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GE는 전체 사업중 110개의 사업을 처분하였으며 80여개의 신규사업을 인수하였다. 불필요한 기구와 인원이 감축되고 사업이 재정비되는 과정에서 웰치회장은 중성자탄 이라는 별명을 얻게된다. 웰치의 선정기준에 미달된 여러 전통적 GE사업의 처분과 정리과정, 동시에 많은 미래지향적인 21세기 사업을 인수하는 과정은 한편의 흥미있는 드라마 같이 보인다.그러면 그의 구체적인 개혁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웰치회장의 부임 전후의 시기에 GE는 태평성세를 누리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웰치는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시기를 놓치면서까지 감지하지 못했던 사실, 즉 GE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대폭적인 기업재편성(RESTRUCTURING)을 단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기업재편성은 생소한 개념일 뿐 아니라 그 단어 자체가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지 않았다.리스트럭처링은 관료조직을 아주 조금 감량하거나 사업 몇 개를 줄이는 것이 아니 경영층, 600개의 손익단위를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페어필드의 기획부에 실무자가 30명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웰치의 목표는 GE의 전사업이 각각의 시장을 지배하는 데 있었다. 현실은 43개의 전략적 사업단위로 뭉쳐진 350개의 사업체를 총괄하여 관할해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이만큼 규모가 방대하고 다양한 사업분야를 거느린 기업은 드물거니와, 설령 있다해도 전체적인 면모에서 그 위력이 GE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웰치는 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업에만 승부를 걸자 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사내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미국 기업의 지도자들은 위험에 처하지도 않은 회사를 축소한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개혁을 단행하면 웰치가 고립될 것은 명약관화했다. 감원정책은 이미 심각한 적자에 허덕이는 회사에서나 취할 법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인식이 그때까지 통용되던 경영철학이었다.또 회사의 재정이 최악의 상태라든가 혹은 사회적으로 책임회피하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사업축소는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다.그러나 웰치는 노동자들을 늘 동일한 장소에 배치하는 것이 전략 실패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제 GE의 주요 경쟁상대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고도의 생산성을 이룩하고 있는 해외기업이었다. 그 생산성을 따라가든가 능가하기 위해서 GE는 설비의 고도화나 인원감축을 단행해서 사업합리화를 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웰치는 새로운 경영원칙을 만들어 나갔다. 회사는 내부지향적인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가야 했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비생산적인 사업이나 간부 및 사원의 쇄신을 의미했다. 생산성 있는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고 생산적인 간부나 종업원을 채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업재구축의 본질이었다. 과감하고 참신한 전략, GE는 이전에도 사업을 쇄신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목적이 달랐다. 회사 전체를 재구축하기 위한 쇄신이었다.1982년초 웰치는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짐 보먼에게 세 개의 원을 그려 보였다. 웰치대형 변압기 부문이 있었다.이 3원개념 은 80년대초 항해키를 손수쥐고 있을 당시의 젝웰치의 나침반이었다. 웰치는 조직을 명료하게 규정해야 할 때 기본 골자로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소프트웨어의 개혁 (경영풍토의 개혁)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업구조부분의 재편성이 상당히 진척된 위에서 다음 단계로서 착수한 것이 기업의 소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경영풍토의 개혁이었다. 웰치 회장은 GE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관료적이고 장벽이 없는 조직으로 만듦으로써 GE의 조직을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기업조직으로 만드는 것 을 기업문화 재구축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모든 GE인들에게 선언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내부의 어려움이 있었다. 관료주의와 조직의 장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또한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서 이러한 개혁과정에서 실패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칫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 이를 추진해온 GE의 경영자와 임원들이 겪었던 어려움, 개혁의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뒤따라 오는 변화에 대한 저항 등 갖가지 개혁의 고비를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기업을 재구축할 수 있게 된 데에는 GE 특유의 방법이 있었다. 워크아웃(WORK-OUT)이 바로 그것이다. 독특한 명칭의 이 개혁운동이 전사적으로 추진되면서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GE의 오랜 기업풍토를 일소하고 비관료적이고 장벽이 제거된 모든 GE인들이 자유스럽게 각자와 조직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열린 기업풍토로의 일대 전환이 성공할 수 있었다. 웰치 회장에게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신념이 부족했었다면 GE의 재구축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일관성있게 개혁의 비전을 모든 GE인들에게 전파하고 설득해 나갔다. 이러한 수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드디어 모든 조직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풍토의 열린 기업문화 를 구축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웰치의 하드웨어의 개혁은 GE의 순이익 확대에 기여했으나, 사원들 사이에 동요를 확산시켰다. 그들은 잇따른 문가 25명을 초빙하여 40일간 컨설팅을 받았다. 같은 달, GE의 간부 120명을 대상으로 워크아웃에 관한 설명회를 개최한데 이어, 89년 1월에는 상급 관리직 500명에게 설명회를 가졌다. 그리고 2개월후인 89년 3월, 워크아웃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88년말이 되자 생산성 개선방법을 사내에서 점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사의 사례를 학습하는 것도 워크아웃의 일환으로 되었다. GE사원은 생산성 개선에 착수한 기업의 그 사례를 익혀, GE업무에 활용하였다. 이 대처방안은 워크아웃의 일환으로 최고의 사례(BEST PRATICE)'라고 하였다. 이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최초의 워크아웃 시행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다. 초기의 타운 미팅 과정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이 워크아웃을 고발대회 라 격하하기도 하였다. 즉 게으른 자나 상사를 헐뜯는 자를 끌어내는 장으로 전락할 위기를 처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착오를 거치면서 GE내의 전사원들은 경영자의 목표가 태만한 자가 아니라 업무상의 악습관을 배제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워크 아웃이 점차 실효성을 거둬나감에 있어서 웰치는 또하나의 구상을 하게 된다. 즉 사원에게서뿐만 아니라, 고객들로부터도 생산성 개선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웰치를 스쳐지나갔다. 웰치의 이런 구상은 몇 년 후 GE가 어느기업보다도 고객의 소리에 가장 귀를 귀울이는 기업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워크아웃 프로그램은 모두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졌으며, 또 자신이나 동료에 대한 사원들의 의식변화도 촉진시켰다. 노사관계에서도 해빙기를 맞은 사례가 여러 개 보였다. 현장직에게는 자존심이나 일에 대한 자부심등 새로운 의식이 싹텄다. 관리층에는 새로운 시련이 부과되었지만, 근로자와의 대화에 진지하게 임했다. 이뿐아니라 워크아웃을 통해 생각지도 않은 성과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관리층과 사원들이 솔직한 대화를 통해서 업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워크아가운데 최고의 지명도를 자랑하는 두 브랜드를 하나의 기업체로 합병하는 것이었다. 사실 GE는 1919년 RCA의 창립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7년 뒤 새로 설립된 NBC라디오 네트워크에도 일부 자본을 참가한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휴관계는 연방재판소가 GE에게 RCA에 대한 권익을 포기하라는 판결을 내린 1933년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몇 년만에 두 회사는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는 제품들을 선보여 대중 사이에 지명도가 높은 업체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80년대 후반들어 이 양대 기업이 합병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GE는 산하에 30만명의 사원을 두고 279억 5천만 달러의 매출액을 자랑하는 전미 9위의 민간기업. 그런가 하면 RCA는 종업원수 10만 6천명, 매출액 101억 1천만 달러, 서비스 기업으로서는 미국전체에서 제 2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만약 이 두 기업이 합명하면 전미 7위의 대기업으로 도약한다. 수익면에서는 GE가 RCA를 훨씬 능가하여, GE의 수익은 1984년 현재 22억 8천만 달러인 데 비해 RCA는 3억 4,100만 달러이다. 그러나 웰치의 관심을 끈 다른 이유는, 만약 합병이 이루어지면 RCA의 국방관계 전자사업과 GE 군수산업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속에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NBC역시 매우 매력덩어리였다. NBC는 전미국 최대의 네트워크로 성장중에 있었으며, 해외와의 경쟁과는 무관한 달러박스였다.드디어 12월11일 수요일, 월가에 이 두 기업의 합병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다. RCA주는 단숨에 10.375달러가 급상승했다. 종가는 63.50달러로 하루 거래량이 무려 510만주에 이르렀다. 이날 저녁, 양사의 이사회가 열리고 합병에 동의했다. 마침내 잭 웰치의 대비약은 실현된 것이다.. 소형가전사업의 매각1987년 전년대비 17%의 이익상승을 보이며 웰치의 개혁의 성과가 가속을 밟기 시작했을 즈음 웰치는 또 하나의 사업강화를 구상하였다. 바로 GE 의료시스템사업의 강화였다. 의득했다.
동명왕편(東明王篇)은 고려 시대의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26세 때(1193)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왕의 사적을 구삼국사(舊三國史)에 의거하여 5언 고시(古詩)로 엮었다. 동명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대개 내용이 축약되고 단편적이다. 이에 비해 [동명왕편]은 한 편의 일관된 줄거리를 갖추고 있는 서사시이며, [구삼국사]에서 인용한 주(註)와 더불어 현존 기록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의 가치보다는 당시의 시대상과 연관지어 이 작품속에 드러난 작가와 당시 지식인의 역사의식을 확인하는데 주력하였다.먼저 작자 이규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그는 무신란(1170)이 일어나기 두 해 전에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고려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를 겪던 시기에 걸쳐 있다. 그의 인물됨에 대해서 출세에 집착하여 최씨 무신정권에 아부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신정권기 자체에 대해서 이미 외세에 대한 주체적 저항,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의한 문화적 역량 제고 등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또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방대한 작품 세계가 담고 있는 합리적, 진보적, 민족적 작가 의식 및 문학적 성취도 등을 통해 볼 때, 그가 당대의 으뜸가는 지식인, 문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동명왕편]은, 작품과 작가 의식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보아도,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가장 왕성하였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 치열한 탐구의 과정에 있었던 그의 26세 청년기에 이룩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작품인 것이다.이런 [동명왕편]이 발간되었을 때의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자. [동명왕편]의 작가 이규보가 살던 당시 무인집권시는 유학이 퇴조하고 유·불·선의 삼교가 절충하는 사상풍조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는 지식인의 사상경향이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으로 흐르게 된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역사의식도 변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집권층과 지식인의 역사의식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동명왕편]이라 하겠다. 이 책은 민간에 떠도는 동명왕의 건국설화를 5언 시체로 재구성한 것으로 내용이 풍부하지 않고 증거 자료와 인용이 있지 않다. 사서로는 미흡하지만 동명왕설화를 구환의 세계에서 성신의 세계로 끌어올리고 우리나라가 성인의 나라임을 자부한 것은 당시 고려에 대하여 군신관계를 강요해오던 금에 대한 자존심의 선언인데 이는 고구려전통을 낮게 평가한 [삼국사기]에 대한 반발이고 고려의 자존심을 훼손한 금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무인집권시대의 역사의식은 대외관계에서 유연한 사대외교를 강조하기보다는 금이나 몽고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자존의식을 높이고 저하요심을 복돋아주었다는 점에서 몽고의 간섭기에 민족의식이 한층 더 심화할 수 있었다.
을 처음 읽고 나는 무척이나 황당한 글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은 무척이나 쉽고 또 평이한 소재로 쓰여진 글이지만 작가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지, 또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는 쉽게 감을 잡을 수 없는 글이었기 떠문이다. 하지만 이 글을 한번 두번 반복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삶을 철저히 그리고 완벽하게 통찰한 듯한 작가의 철학적 깊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글은 열가지 이야기가 서로 상관됨이 없이 단편식으로 나열된 글로 모두 꿈을 얘기하고 있다. 즉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인간의 욕구가 꿈을 통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은 여자가 죽은 후 무덤가에서 100년을 기다려 여자를 다시 만나는 남자 이야기다. 이 글에서 남자는 죽은 여자를 땅에 묻고 백 년 후에 만나러 오겠다는 여자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 그러한 기다림 끝에 결국 남자는 무덤속에 피하난 백합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향기"를 맡는다. 그 향기는 바로 현실이란 한계를 뛰어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결정체인 것이다. 이 작품은 현대의 인스턴트 사랑에 대한 반성을 일깨워주는 글로 남자와 여자의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은 참선을 통해 '무(無)'에 도달하려는 무사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무사는 '무(無)'에 도달하기까지는 다 완전히 막혀 버려 마치 출구가 없는 듯한 고통이 수반된다. 무사는 이런 상태를 딛고 드디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작가는 현실속의 번뇌와 갈등을 극복하고 문학적 통찰을 이루고 싶으나 현실의 고통속에서 완전히 분리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이 두번째 꿈을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며 결코 떨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고뇌와 원죄를 꿈을 통해 보여준다. 자식을 등에 업고 어디론가 가는 아버지. 자식은 살아 있는 동안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로 보여진다. 은 어떤 삶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채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 준다. 노인은 수건이 뱀이 될 것을 확신하며 강속에 빠져들고, 소년은 그 약속을 믿고 노인을 기다리지만, 결국 노인은 강속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여기서 수건을 뱀이되게 한다는 것은 성취가 불가능한 삶의 목표다. 노인의 죽음과 그 죽음을 지켜보는 소년. 성취가 불가능한 삶의 목표에 매달리는 인간의 운명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희망에 찬 인간이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서 좌절하는 모습이다. 포로가 된 나를 보기위해, 첫닭이 울기전까지 사랑하는 여자가 백마를 타고 달려오지만 결국 마녀의 농간에 빠져 바위 밑 골짜기로 떨어져 죽고 만다. 이러듯 사랑하는 남자를 잠깐이라도 만나 보고 싶다는 여자의 희망은 마녀의 잔꾀에 의해 좌절된다. 결코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는 작가의 인생관을 보는 듯 하다. 은 작가의 예술적 완성의 의지를 담은 글 같다. 예술적 완성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조각가 운케이는 구경꾼의 평판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열심히 인왕을 조각하는 일에 열중하고 그런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는 구경을 그만 두고 자신도 조각에 열중하지만 인왕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나'는 바로 작가 자신이다. 예술적 완성을 꿈꾸는 작가의 모습을 표현한 글이라 하겠다. 은 인생의 허무함과 불안감을 다루고 있다. 따분하고 외로운 배 안의 생활을 참지 못하는 나는 죽기로 결심하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지만 바로 후회하고 만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배가 바로 우리의 인생일지라도 중간에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작가의 메세지를 엿볼 수 있다. 은 인간의 내면 욕망이 거울을 통해 환상으로 보인다. 나는 이발소로 들어간다. 이발하면서 나는 거울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열심히 돈을 세는 여자와 자신이 파는 금붕어만 보고 다른 것에는 무관심한 금붕어 장수... 여기서 열심히 돈을 세는 여자가 치열한 현실세계를 반영한 것이라면, 금붕어 장수는 삶을 관조하는 여유있는 작가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은 삶의 허망함을 보여 준다. 전쟁에 나간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정성껏 비는 어머니. 그러나 아버지는 예전에 떠돌이 무사에 의해 죽고 없었다. 이처럼 삶에서 희망은 때로 허무한 것이다. 은 어쩌면 인생은 헛된 짓의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허무주의적 색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지팡이로 돼지의 콧등을 쳐서 벼랑 아래도 떨어뜨려야 하는 쇼타로. 왜 이런 일을 하는지도 왜 사는 지도 모르는 채 죽어야 하는 운명. 그것이 우리 삶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