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사★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 두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특별히 지옷토와 단테의 출생지였던 부유한 상업도시 피렌체에선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흐름이 강하게 나타났다. 피렌테는 새로운 아테네로 부상될 만큼 시민예술의 야심찬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예술가를 엘리트 집단으로 인정하는 등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로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들 수 있으며 그는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자기식대로 결합, 표현하였으며 원근법, 소실점들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뒤이어 알베르티가 건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 데, 그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권장한 고전형식을 절충하여 개인 주택에 적용하는 건축기술을 보여 주었다.15세기 최고의 조각가 도나텔로는 로마의 유적을 제계적으로 연구한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다. 나 모두 고전 예술에 있어서의 균형 잡힌 움직임의 의미가 회복되었으며 고대 로마 조각을 재현, 새로운 도상으로 재창조하였다. 플랑드르 화가들의 나체상이 '발가벗겨져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 반해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나체상은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추구하여 인간의 상체를 구조체로 다루었으며, 옷은 신체를 감싸는 듯하게 표현되었다. 경쾌한 아치 대열과 고린트식의 기둥이 잘 표현된 천국의 문,의 기베르티는 선명하고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을 구사하였으며,테라코타에 전념한 롭비아와 로마조각보다 더 개성적인 대리석 조각가 롯셀리노도 유명하다.다빈치의 스승인 베록키오는 사방으로 뻗쳐 있으나 우아하고 연모습과 정체불명의 상징들로 가득 찬 환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쾌락의 동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그림은 여러 가지 상징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것들의 하나하나의 의미를 심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봇슈는 엄격한 모럴리스트로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는 눈으로 알려주는 일종의 교훈으로 보인다. 즉 쾌락의 동산에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바는 일종의 작품 감상용이 아닌 훈계이자 경고인 것이다.'재생'이라는 개념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였다. 서구에서 16세기 초엽은 서구 역사상 가장 혼란하고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에 앞선 시대, 즉 14,5세기의 발견들의 꼬리를 물고 인간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사상을 들춰내기 시작했고 아메리카의 발견은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게 했고, 이로 인한 식민지와 해상 무역을 위하여 힘의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전쟁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잇따르게 되었다. 알프스 이북의 나라들에서 루터와 칼빈의 위대한 종교 개혁자들이 나왔으며 대성당의 건축을 위하여 면죄부를 팔던 교황의 힘에 정면으로 맞섬으로서 교황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하기에 이른다.그리고 사상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노선을 가게 된 알프스 북부의 나라들은 르네상스의 양식이 더 늦게 수용된다. 이 지역 대표적 화가로는 뒤러와 홀바인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로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태동한 피렌체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나타내엇으므로 르네상스로 같이 분류하지는 않는다.초기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특히 가장 중요한 임무를 떠 맡았던 건축가들을 고민스럽게 했던 것은 대성당의 건립이었다. 당시 시대를 움직였던 가장 기초 단위의 힘이 종교였으므로 성당건축은 가장 중요한 미술의 한 영역이었다. 원근법, 소실점, 원주와 벽기둥, 아치를 결합하는 데 성공한 전시대의 브루넬리스키, 그 뒤를 이은 알베르티에 이어 1는 거의 원근법의 발명에 맞먹는 새로운 영격을 향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이제부터 회화는 소묘에 채색을 더한 것 이상이 되었다.티치아노 Tiziano (1477 - 1576)벨리니, 지오르지오네의 뒤를 잇는 베네치아의 대가.색채를 다루는 데 뛰어났으며 초상화 작가로 유명했다. 세계를 빛과 색채의 구성이라고 보는 회화양식이 근대 회화의 중심적 사고 방식이 되기도 했다.1528 : 색채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와 파격적인 구성 15401520성향의 알프스 북쪽의 미술가들은 1500년대를 전후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선다. 이태리 르네상스의 전사조와 후기고딕의 만남으로 그 경향은 매우 다양했으며 남부와 다른 북부지방 특유의 성격이 드러난다. 대체적인 경향은 다소 우울해 보이는 차분하고 냉정한 빛깔, 공간미를 배제한 꽉 찬 구성, 상징이나 알레고리로 가득찬 신비감, 판화의 대중적 성공과 전파도구로서의 보급과 발전등을 들 수 있겠다. 그 대표적인 주도 세력국으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를 들 수 있다.독일독일은 뒤러(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 1500년작, 에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주요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름이 된다.즉, 바로크는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밧지오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둘째,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가 있었고,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고딕 이후로 예술양식은 점점 더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갔다. 이런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들은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를 기점으로 이런 분류방식은 의미를 잃게 된다. 즉 예술에 있어서 통일적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며 고전적일 수 있었고 분석적이며 통일적일 수 있게 되었다.미술가들이 대행했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은 갈릴레오나 뉴우턴 같은 과학자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앞다투어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에 뒤졌다. 반종교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권위를 되찾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수가 증가하고 절대주의의 승리는 궁전의 건축을 재촉하였다.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모여든 수많은 미술가, 건축가 등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문화를 창출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카라밧치오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전시대의 예술을 이끌었던 전통을 거부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던 카라밧지오는 1573년 이탈리아의 카라밧지오에서 출생했다. 11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성인이 된 후 그가 태어난 지명이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이를 카라밧지오의 "자연주의"라 부른다. 그의 자연주의적 회화관은 당시 반종교개혁 운동에 부수되어 가톨릭의 새로운 신앙과 맞물렸다. 생활을 유쾌하고 소박하게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완성작품 :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 (Jan vermeer van Delft, 1623 ~ 1975)유머러스한 도해적 설명이 있는 풍속화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들어 있는 정물화라고도 할 만한 시간이 없는 세계의 표현. 질감, 색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등, 부드러움과 정확성의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조화로 걸작이 됨.작품:,로코코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 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반면 같은 시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파리의 로코코 양식과는 대조적인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와토 ( Antoine Watteau 1684 ~ 1721)18세기 초 화가들의 우상 숭배 인물은 빛, 색채, 움직임, 환희 등 아카데미가 싫어했던 모든 것을 갖춘 루벤스였다. 흐르는 듯한 필법과 화려한 색채대비등을 루벤스에게서 물려받은 와토의 그림은 반아카데미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카데미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와토의 그림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페트 갈랑트, 즉 우아한 축제라느 새로운 범주가 와토에 의해 창안되었는 데, 이것은 공원풍의 배경에서 희극 배우와 재미있한다.
서양 현대 미술 과제물전시명칭 : London Underground전시기간 : 2001년 9월 19일(수) - 11월 18일(일)전시장소 : 성곡미술관본관전시내용 : 평면, 입체, 비디오, 설치제출자: 미술사학과 99012019 배현미담당교수 : 김수경 교수님제출기한: 2001 10 18 목런던 언더그라운드런던 및 국제 메트로폴리스를 대표할 수 있는 도시들이 대표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라면, 지하철의 대중교통으로의 시스템화이다. 런던 언더그라운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아무런 차별 없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장소, 회사의 사장에서부터 하루하루 국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생활보호 대상자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제한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인 것이다. 또한 런던 지하철의 시각적인 모습은 정말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하이 컬춰의 대표급인 로얄 오페라의 광고가 모두 차별없이 섞여 있는 문화적 하이브리드(혼합체)이다. 즉, 하이 컬춰와 대중문화가 아무 차별 없이 만나는 장소가 런던의 언더그라운드의 시각적인 모습의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하이 컬춰와 대중문화가 만나는 문화의 교차선상에 있는 런던 언더그라운드의 모습은 모던이즘 이후시대의 현대미술 발생의 특징과 그 유사성을 통해 서로 은유적인 연결고리를 갖으며, 이러한 이유로 런던 언더그라운드라는 매체가 이번 전시의 주 제목이 된 이유이다.이번 전시는 최근 영국 현대미술을 마치 대표하는 듯한 젊은 작가들만의 전시가 아니며, 한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도 아니다. 아니, 한도시의 현재 미술적 흐름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 다양함은 어떤 전시적 형태로 일반화 될 수는 없다.그러므로 이 전시는 2001년 런던 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냅 샷과도 같은 전시이며, YBA세대의 작가에서부터, 지금 중년작가에 이르는 다양한 나이, 다양한 국적으로 런던에서 교육받고 작업하는 13인의 작가들을 포함한다. 특히 그들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개념적 회화 성격의 작품이 주로 되는 전시이다.개념적 회화(Conceptual Painterly)런던의 현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주요하게 나타나는 주제는 물질 문화(Material Culture)이며, 서로 다른 민족들과 문화들이 상호 교류되어지고, 복합되어진 메트로폴리스인 런던의 작품경향은 위트와 아이러니를 담은 다양한 시각문화를 낳지만, 그 중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개념적 회화(Conceptual Painterly)로 나타나는 흐름이다. 이는 또한 단지 런던의 특징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국제적 작품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터너와 콘스타블에 이은 풍경화의 강한 전통이 암암리에 크게 자리 잡고있는 영국의 현대 미술은, 더욱 미니멀적으로 개념화(Conceptual) 되고, 회화적(Picturesque)으로 되어 가는 경향은 영국현대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다. 새로운 테크놀러지의 발달과 더불어 여러 새로운 미디움의 발전은 새로운 창조의 창구를 작가들에게 열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인적인 내러티브를 담은 개념적 회화가 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은, 아마도 인간 본연이 갖는 예술의 본연은 회화를 통해 나타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데이비드 맥/David Mach 로얄 아카데미 교수『garden party』,『bringing the gap』로얄 아카데미안으로 88년 테이트 전시 및 4-5톤의 신문이나 잡지작업으로 알려진 작가이다. 본 전시에서는 최근 들어 새로 시도하고 있는 그의 콜라지 작업을 소개한다.
THE ART LOVING -Erich Fromm-에리히 프롬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사회학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베를린 정신분석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29∼1932년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강사로 있다가 나치스의 대두로 1933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였다. 이 후 컬럼비아대학 ·베닌튼대학 ·멕시코 국립대학 ·예일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S.프로이트와 K.마르크스의 영향하에서 출발한 프롬은, 파시즘의 선풍에 대중이 말려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체험을 통해 ‘근대인에게서의 자유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에 그의 사색활동의 전부를 바쳤다. 현대에 와서 일반화되어 가는 신경증상이나 정신적 불안은 개인적인 정신분석 요법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에 프로이트 이론을 도입하여 사회경제적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그 나름의 사회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이 3자의 역학에 의해 사회나 문화의 변동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제기하였는데, 그것이 즉 ‘인간주의적 정신분석’이다. 저서에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인간의 자유》(1947) 《건전한 사회》(1955) 《선(禪)과 정신분석》(1960) 《인간의 승리를 찾아서》(1961) 《의혹과 행동》(1962) 《혁명적 인간》(1963) 등이 있다.*정신분석 [ 精神分析, psychoanalysis ]: S.프로이트에 의한 신경증의 치료법과 그 심리학적 이론체계. (발달 심리학)*파시즘: 1919년 이탈리아 B.무솔리니가 주장·조직한 국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반공적 인 정치적 주의 ·운동.파시즘이란 이탈리아어인 파쇼(fascio)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이 말은 묶음[束]이라는 뜻이었으나, 결속 ·단결의 뜻으로 전용(轉用)되었다. 파시즘이 대두하게 되는 일반적이고도 보다 광범위한 배경은 18세기 말부터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안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만성적 공황 및 전승국 ·패전국을 막론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각종의 혁명적 기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대 사회의 위기적 양상은 모두 파시즘의 배경이 된다.즉,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는 배경은 ① 국제적 대립과 전쟁위기의 격화 ② 대량적 실업과 공황 ③ 국내정치의 불안정 ④ 기존 정당 ·의회 및 정부의 부패 ·무능 ·비능률 등 병리현상(病理現象)의 만연 ⑤ 각종 사회조직의 강화에서 오는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⑥ 정치적 ·사회적 집단 간의 충돌의 격화 등을 들 수 있다.이와 같은 위기요인의 격화에 의해 정치체제의 안정과 균형이 파괴되고, 게다가 기존 정치세력이 사태를 효과적으로 수습할 능력을 상실할 경우, 무정부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하여 파시즘이 등장한다.프로이드(Sigmund Freud)1865년 5월 6일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생. 생의 대부분을 비엔나에서 보냈으며 2차 대전시 나찌를 피해 영국의 런던으로 옮겨 살다가 1933년 사망. 신경계통을 연구한 의사로서 히스테리 환자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생각이나 욕망을 자유연상과 꿈의 해석, 아동기 때의 경험 가족관계 분석이라는 기법을 개발, 치료해 나갔다. 이보다 앞서 J.브로이어는 히스테리환자에게 최면술을 걸어 잊혀져 가는 마음의 상처(심적 외상)를 상기시키면 히스테리가 치유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공동으로 그 치유의 방법을 연구, 1893년 카타르시스(Katharsis:淨化)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치유법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최면술 대신 자유연상법을 사용하여 히스테리를 치료하고, 1896년 이 치료법에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말은 후에 그가 수립한 심리학의 체계까지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마르크스의 소외론소외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부터 낯설게 되는 현상사유재산과 자본가의 착취로 인해 발생함1사람은 생산품과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2사람은 사적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가 지니는 경쟁적 성격 때문에 남으로부터 소외 된다. 즉 사람으로부터의 소외이다.3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4사람은 집단적 힘의 표현으로서의 사회로부터 소외된다.토론주제1,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개념에 대한 이해2,현대 사회의 특성과 사랑의 의미3,사랑의 실천에 관한 방법론 모색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_발표자 생각_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작은 부분부터 바꾸어 나갈 때에 현대와 같은 상막한 사회 속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것의 기쁨을 느끼고 함께 나누는 끈끈한 정이 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참고: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사랑의 기술』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문제 사랑의 실천 방법사이버 시대라고 불리는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많은 정보를신속하고 정확하게 획득하며,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서 많은 일들을처리하고 있다. 컴퓨터로 인터넷만 연결이 되면 사람들을 직접 대하지 않고도우리는 시간을 절약해서 많은 정보 속에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의 접속만으로도 대부분의 일을 쉽게 처리 할 수 있게 되자, 현대인들의 기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사람과의 관계는 줄어들게 되었다. 기계로 인한 편리함 속에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면서 인간을 기계의 일부로 보고, 생각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여러 가지 문제 중 여기서는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인간소외 문제를 살펴보고, 사랑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에리히 프롬은 현대 사회가 인간의 성격을 병들게 하고 있으며 미래에는인간이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감정도 없는 기계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는 사회가 산업혁명을 거쳐 20세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최대의 효율성과 최대의 생산"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라는 집단에서는 원만하게협동하고 취미가 표준화되어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으며 권위·원칙·양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명령에 잘 따르고 자기에게 기대되는 일을 수행하고 마찰 없이사회 기구에 적응하는 인간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간은 동질화 조직화되어가며기계의 한 부속품과 같이 전락했으며 기계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대의 효율성과 최대의 생산이라는 경제 원리에 의해 개성의 최소화 오락의 규격화가 이루어져 각 개인 여가 시간의 활용은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영향에따라가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 사회는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인간은 이런 사회의 순응을 강요받으면서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자발성을 잃어버리고 피동적으로 되어가고 있다. 역시 우리도 하나의 좋은상품이 되어 사회에 나아가기 위해 만들어져 가고 있다. 이도 자아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인간소외 문제다.인간 소외 현상이라는 문제가 일어나는 사회를 벗어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을 불안해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이 소외되는 사회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런사회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점점 더 능동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사회는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과는 관계없이 유지와 관리를 위해 비인간화된 관리체제를 가진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관료제도이다. 관료제도 밑에서 개인은 자아의고유성과 특이성을 잃어버리고 단지 하나의 사물로써 다루어지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빼앗기고 있다. 그리고 방대한 사회나 조직을 이끄는 관료들도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조직 전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소외되어 있다.예를 들어, 학교에서 흔히 불량학생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은 학교라는 사회안에서 학교가 정한 일정한 관리체제 안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생긴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다른 학생들에게 본보기로 두면서 불량학생으로 소외되어 가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소외감을 없애고자 불량학생들끼리 모이게 되고, 사회에 반발심으로 여러 가지 유해한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있다.그리고 인간소외 문제에는 자아 상실문제가 있다. 각 개인들은 사회 요구에 맞도록 기계적 피동적인 사고를 하면서 타인과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낄뿐만이 아니라 자아 상실로 인해 자신으로부터도 소외감을 느낀다. 현재 우리를보아도 대학이라는 곳에서 지적 능력을 함양·배양하여 자기 자신을 인간적으로완성하려 하기보다는 사회에 나가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최고의 이익과 자기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이려 하고 있다.이렇게 인간 소외 문제는 인간이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각자 자신이 맡은일을 정신없이 하게 됨으로 인해 타인과의 관계가 약해지면서, 대신 대중매체,인터넷 등에 의존도가 커지며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기계에 더욱 의존하며 빠져들면서 가상세계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그래서 현실과 가상세계의 구분을 혼동하게 되고, 인간을 인간이기보다는 기계·가상적인 것으로 보게 되고, 인간 사이의 관계가 메말라가고 일회성으로 변해가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현대인의 인간소외 문제는 자아 상실 피동적인 행동 기계적 사고임을 볼수 있었다. 현대 사회는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비인간화 시대이다. 이런 시대의인간소외 문제를 어떻게 우리는 극복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사랑의 실천 방법을 살펴보자.『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은 기술이다. 이런기술을 얻기 위해서는 훈련이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훈련에 있어서 '정신집중'은 기술 습득의 필수조건이다. 또한 정신집중은 복잡하고 거대한 현대 사회에서 많은 부담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정신집중을 향상시키는 것은 독서를 하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
문학세미나( 카프카 변신)이름 : 배현미인문학부 99012019★그레고르가 잡충으로 변한까닭을 생각해보자 ★우선 스스로가 자신이 벌레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벌레는 아직도 게오르그 잠자의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마음이 아직 벌레로 바뀌지는 않았다.그는 가족도 알아보고 싫고 좋음도 표현할 줄 알며,음악도 좋아한다.그의 마음이 "잠자"라는 옛인격 그대로이기에,그가 당하는 모든 것들은,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충격들이다. 그는 심각한 자기소외를 경험한다.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벌레로 변신한 몸과,아직 변신하지 않은 마음과 인격 사이의 심각한 갭을 처음엔 어리둥절해한다."너무 일찍 일어나서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 거야.사람은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안되는데."라고 엉뚱한 이유로 현재의 충격을 설명해본다든가,"자아,지금은 일어나야만 돼.기차는 5시에 출발하니까."하는 식으로 아직도 자기 몸에 일어난 심각한 사태에 대한 자각이 없다.그저 외판원으로서의 어제까지 해왔던 생활의 관성만을 되뇌일 뿐이다.카프카의의 마음 속엔 순수자아의 의지와 달리 외부세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일상의 자아는 껍데기에 불과한 벌레 같은 존재라는 자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 속에서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킨게 아닐까?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변신의 이유를 모른다. 다만, 육체(이미 벌레로 변해버린 상태이므로)와 달리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는 그레고르의 사고를 통해 전반적인 삶의 환경이 드러나는 가운데 어렴풋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고 또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불만이 있음이 밝혀진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낯선 상황의 발생에 대해 여러가지로 원인분석을 해보는데, 그의 일상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그리고 그레고르는 어쪄면 벌레라도 되어서 가족으로부터 잊혀져버렸으면…… 벌레만큼만이라도 자유로워졌으면,하는 간절한 바램이 이루어 진 것 같다.그레고르는 늘 반기지도 않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세일즈맨이다.나는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직업을 택했을까?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다녀야 한다. 본점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업무상의 긴장감이 훨씬 심하다. 그 밖에도 여행의 괴로움, 열차시간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조잡한 식사, 항상 바뀌어 결코 지속되지도 못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다.
1Oedipus the King1. 극중에 나타난 Irony.첫째 에피소드는 살인자들에 대한 저주와 그 처벌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대한 저주를 내리고 있는 첫번째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극의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아이러니가 곳곳에 내재함을 알 수 있다. 눈을 뜨고도 자신의 운명을 보지 못하는 오이디푸스, 맹인임에도 신탁의 예언이 옳음을 알고 있는 테레시아스의 대조적 모습 또한 아이러니컬하다. 셋째 에피소드에서 이오카스타는 Corinth에서 온 사자에게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로 알려진 폴리부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소식에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예언이 빗나갔음을 기뻐하지만 결국 이는 다음에 일어날 비극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가해진 수수께끼를 결국 풀지 못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극중의 아이러니가 결국 표현해내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생의 마지막 선을 넘을 때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2. Aristotle이 시학에서 밝힌 인물, 정서, 카타르시스, 주제.Aristotle은 평범한 인간이 몰락하는 것보다는 훌륭한 가문의 일원이 몰락하는 광경이 관객에게 더욱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의 운명은 행복에서 불행으로의 변화라야 하고, 그 원인은 어떤 타락이나 부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인공 자신의 큰 과오에 있어야 한다.시학에서 비극의 '정서와 카타르시스'를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면, 연민과 공포감을 비극의 주된 정서로 다루고 있다. 비극은 가치있고 적절한 자극으로써 그 정서감을 잠재상태로부터 활동적으로 일으키게 한다. 비극은 올바른 양상으로 그런 정서감을 유도함으로써 조절하며, 선한 사람의 정서가 작용하는 것과 같이 작품의 테두리 안에서 정서감을 작용토록 한다. 연극이 끝난 다음 정서감이 다시 잠재성으로 가라앉을 때에는 그전보다는 더욱 '훈련된'잠재성으로 간직된다. 공포의 뿌리는 자기 2) 자기 자신과 갈등을 빚고 있는 개인 3) 외부적 힘이나 사회, 초자연적 요인과 갈등을 빚고 있는 개인 등이다.대략적인 희랍 비극의 구성 단계를 살펴보면, 우선 Prologue로부터 시작된다. 한 인물이 개요를 알리고, 코러스가 입장하는 Parodos 단계가 이어진다. 코러스는 노래는 물론 춤을 추며 사건의 해설자로서, 그리고 사건을 보는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역할도 한다. 그 다음에는 Episode가 따른다. 배우가 대사를 하고 행동을 하는 과정이다. Stasimon은 극중 주인공과 코러스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이렇게 에피소드와 스타시먼이 교착되어 사건이 끝나면 Exodos라는 종막으로 옮겨진다. 사건이 끝나고 코러스가 퇴장한다.과거가 노출되면서 오이디푸스가 현재 그의 운명에 조금씩 다가감에 따라서 시간은 작품 속 3에서전진과 후퇴를 동시에 하는데 그 이면에는 플롯의 구성법칙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이디푸스 왕작가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B.C.)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중 한 사람.아테나이에서 출생. 현존하는 작품은 7편뿐이며, 보수주의자였던 그의 작품에는 조화와 질서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아이아스」, 「안티고네」, 「엘렉트라」, 「트라키스의 아가씨들」등의 작품이 있다.줄거리그리스의 테바이에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백성들의 탄원이 계속된다.오이디푸스 왕은 아폴론의 신탁을 가지고 돌아온 사촌 크레온에 의해 선왕인 라이오스가 도둑의 손에 살해되었고, 그 하수인을 처벌하지 않는 한 전염병은 계속된다는 얘기는 듣는다. 범인을 처벌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고, 장님인 예언자 테일레시아스가 불길한 말을 한다.오이디푸스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운명이라는 내용의 예언을 생각해 내고 라이오스 왕의 살해 당시의 목격자를 찾으려 한다.그때 국왕의 고향인 코린토스에서 부왕이 승하했으니, 왕위를 계승하라는 전갈이 온다. 오이디푸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오디이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는 '아들이 엄마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갖는 성적인 연모'를 말한다. 스핑크스는 테베에 오는 모든 이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면 죽였다.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문제를 물자, 스핑크스는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가 낸 문제를 풀고 있다.5안티고네 Antigone1.테베 왕 오이디푸스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도한 이오카스테(에피카스테)의 딸. 소포클레스의 와 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현존하지 않는 비극을 비롯하여 그녀에 대한 작품이 몇가지 있다. 다음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따른 이야기이다.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안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죽었다. 오이디푸스는 집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려 했으나, 섭정의 지위에 있던 이오카스테의 형제인 크레온에게 잠시동안 테베에 머물러 달라는 설득을 받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왕좌를 다투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아들에게 추방당했다. 이때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의 방랑에 지팡이가 되어 준것이 그의 딸 안티고네였다.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막내아들 하이몬과 결혼하기로 약속했었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았다. 여러나라를 거쳐 콜로노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역 -그곳은 오이디푸스가 최후를 맞기로 운명지워진 땅이었다- 에 정착하려고 했을 때, 안티고네의 동생인 이스메네가 찾아와 크레온으로부터 전갈을 전했다. 그것은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형제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졌는데,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 편에 섰으나 오이디푸스가 편을 든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을 중시하여, 오이디푸스의 테베 귀환을 간곡히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성역에 머물면서 그와 같은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크레온이 병사를 데리고 도착하여, 오이디푸스의 테베 귀환을 강요하기 위해 이스메네와 안티고네 자매를 체포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부른 아테네의 군주 이 밖에도 안티고네와 이스메네가 에테오클레스의 라오다마스의 제물이 되었다는 이상의 작품보다 좀더 오래된 이야기도 있다. 라오다마스는 두 사람을 헤라의 신전에서 화장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들 안티고네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오이디푸스 Oedipus'부어오른 다리'라는 뜻.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호메로스는 에피가스테라고 불렀다) 의 아들.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관한 호메로스의 설은, 테베를 무대로 한 소포클레스의 3부작인 , , , 아이스킬로스의 , 에우리피데스의 등의 희곡에 사용된 후대의 설과는 다르다.피사에 있는 펠롭스의 궁전에 망명해 있던 라이오스는 펠롭스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유괴했다. 많은 사람들은 라이오스 왕가의 저주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테베로 돌아온 라이오스는 메노이케우스의 딸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 그런데 이오카스테가 낳은 아이가 라이오스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이에 그는 아내가 아들을 낳자 굵은 못으로 아기의 발꿈치를 뚫어 키타이론 산에 버리게 했다. (아마도 빨리 죽도록 하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죽은 뒤 그 망령이 걷지 못하게 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테베의 양치기는 왕명을 어기고 그 아기를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넘겼다. 이에 그들은 아기를 코린토스 왕인 폴리보스한테 데려갔다. 아들이 없던 왕은 이 아기를 양자로 삼고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오이디푸스가 어른이 되어 어느 연회에 참석했을 때, 그는 자기가 폴리보스의 친아들이 아니라 사생아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진실을 알기 위해 델포이의 신탁을 물으러 갔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대답이 내렸다. 신관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델포이에서 추방했다. 아직도 폴리보스 왕과 메로페 왕비를 친부모로 믿고 있는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보이오티아로 통하는 길을 택했다. 어느 십자로에서 그는 마차를 타고 있는 낯선 사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은 이오카스테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목매어 죽고,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오카스테의 오빠 크레온이 섭정이 되고, 오이디푸스는 국외로 추방당했다.안티고네 Antigone1.테베 왕 오이디푸스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아내이기도한 이오카스테(에피카스테)의 딸. 소포클레스의 와 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현존하지 않는 비극을 비롯하여 그녀에 대한 작품이 몇가지 있다. 다음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따른 이야기이다.어머니인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안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어 죽었다. 오이디푸스는 집을 버리고 나라를 떠나려 했으나, 섭정의 지위에 있던 이오카스테의 형제인 크레온에게 잠시동안 테베에 머물러 달라는 설득을 받고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왕좌를 다투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두 아들에게 추방당했다. 이때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의 방랑에 지팡이가 되어 준것이 그의 딸 안티고네였다.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막내아들 하이몬과 결혼하기로 약속했었으나 이에 집착하지 않았다. 여러나라를 거쳐 콜로노스에 있는 포세이돈 신역 -그곳은 오이디푸스가 최후를 맞기로 운명지워진 땅이었다- 에 정착하려고 했을 때, 안티고네의 동생인 이스메네가 찾아와 크레온으로부터 전갈을 전했다. 그것은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형제의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졌는데,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 편에 섰으나 오이디푸스가 편을 든 쪽이 승리할 것이라는 신탁을 중시하여, 오이디푸스의 테베 귀환을 간곡히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성역에 머물면서 그와 같은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크레온이 병사를 데리고 도착하여, 오이디푸스의 테베 귀환을 강요하기 위해 이스메네와 안티고네 자매를 체포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부른 아테네의 군주 테세우스가 등장하여 자매를 구해주었다. 그후 폴리네이케스가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협력을 얻기 위해 찾아왔다.이번에도 오이디푸스는 그를 저주하며 제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