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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토벤의 생애 평가C아쉬워요
    『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독일 본에서 출생 -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독일의 작곡가,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의 문을 엶. 아홉 개의 교향곡, 서른 두 곡의 피아노 소나타, 열 여섯 곡의 현악 사중주,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한 곡의 삼중 협주곡, 9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다섯 곡의 첼로 소나타 등을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들은 음악이라는 산맥의 모든 뛰어난 봉우리 가운데서도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다.☞ 본(Bohn) 시대 (1770 - 1792)1770년 12월 17일 독일 남서부의 본에서 세례를 받은 베토벤은 요한 반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과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nee Keverich) 사이에 태어나서 살아남은 아이들 가운데 맏이였다.. 그의 가계는 본래 플랑드르로부터 왔으며, 앤트워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장 처음 본에 정착한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였으며, 그 때 그는 꼴로뉴 선거후의 합창단의 가수가 되었고, 결국 악장이 되었는데, 이는 작곡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문 성취에 속했다. 그의 아들 요한 또한 선거후의 합창단의 가수가 되었으며, 대부분의 18세기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베토벤도 자연스레 같은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그의 가족은 매우 부유하였으나, 그의 할아버지가 1773년에 세상을 뜨고 그의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짐에 따라 점차 궁핍해졌다. 베토벤 이후에 태어난 다섯 아이들 가운데, 단지 카스파르 안톤 카알(Caspar Anton Carl)과 니콜라우스 요한(Nikolaus Johann) 둘만이 살아 남았다. 13살이 되었을 때에는 베토벤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으며, 16세가 되자 그는 집안의 생계를 떠맏게 되었다.그에게서 피아노에 대한 재질의 징후를 발견한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춘기에 이르러서야 . 그래서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1792년 가을에 프랑스 혁명군이 라인란트 지방을 폭풍처럼 진격해 가는 동안 베토벤은 본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가져간 앨범(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보관)을 살펴보면 본에서 그가 사귀던 넓은 교제관계와 친구들을 알아 볼 수 있으며, 거기에 실린 내용 가운데 가장 예언적인 글귀는 다음과 같다 : "모차르트의 정령(예술)은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을 두고 탄식하며 흐느낀다. 지칠 줄 모르는 하이든에게서 잠시 쉬어 갈 자리는 찾았으나, 결코 영원히 머물 자리는 찾지 못하였다. 당신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모차르트의 정령을 하이든의 손으로부터 건네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발트슈타인 백작."본에서 착수된 것은 틀림없으나 비엔나에서 개작되고 완성된 것들을 제외한, 본 시대에 속하는 작품들은 일반적인 음악 애호가들보다는 오히려 베토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가진다. 이들을 보면 그가 극복해야만 했고 그의 초기 교육이 제대로 교정하지 못한 그의 기질에 연유한 어려움들뿐만 아니라, 그의 음악이 그 뿌리를 둔 갖가지 영향들을 알아볼 수 있다. 1783년에 작곡된 3곡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살펴 보면 본은 음악적으로 만하임(Mannheim) 악파의 전초기지였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만하임은 독일의 근대 오케스트라의 요람이며 후일 고전 교향곡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음악적 양식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이미 베토벤이 어릴 적에 만하임 악파는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한 때 유명했던 오케스트라는 1778년에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에 벌어진 "감자 전쟁(Potato War)" 이후에 사실상 해체되고 그 대부분의 단원들은 선거후 영주를 따라 뮌헨으로 떠난 뒤였다. 만하임 양식은 이미 매너리즘으로 전락했는데, 이는 진부하고 종종 부적절한 강약의 대비를 실험하는 형태로서, 심지어는 모차르트가 궁정 악장 카나비히(Christian Cannabich)의 딸을 위해 작곡한 다 장조의 피아노 소나타 K. 309에도 영향이 나타나 있다.과 같다.1792년에 작곡된, 목관을 위한 한 곡의 론디노(rondino)와 한 곡의 8중주; 이는 아마도 선거후의 Harmonie(목관 앙상블)를 위해 작곡된 듯이 보인다.1790년에 작곡된, 플룻과 바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사 장조의 삼중주두 곡의 칸타타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네페의 북돋움 하에서 작곡되었을 가곡들에서는 성악 독창에 대한 특출한 감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아버지와 조부가 모두 가수였음을 생각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일임과 동시에, 그가 작곡활동을 하는 시기 내내 따라다니며 괴롭힌 한계가 되었다. 특히 흥미를 끄는 작품은 Vincenzo Righini의 주제에 의한 24개의 변주곡인데, 이는 베토벤이 1792년에 작곡한 내림 마장조의 삼중주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개작하여 출판했다. 이 변주곡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기교를 요약해서 보여주며, 오랜 시간동안 비엔나의 살롱에서 그의 전투마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빈 : 초기베토벤이 본을 떠나기 전에 그는 북서 독일에서 피아노의 명인으로 매우 괄목할만한 명성을 얻었는데, 특히 즉흥 연주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모차르트 또한 그의 시대 최고의 즉흥 연주가 가운데 하나였으나, 어떤 면을 놓고 보아도 베토벤은 그를 능가했다. 감성과 열광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그는 다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더욱 쉽게 청중 전체를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거의 빈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빈 귀족 사회의 환대를 받았다. 물론 발트슈타인 백작이 그를 모차르트의 후계자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 길을 미리 닦아 놓았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베토벤의 빈 시기의 가장 초창기의 후원자들이 슈비텐(Schwieten) 남작과 리히노프스키 공작(Karl Lichnowsky)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데, 이들은 빈의 귀족 계급 가운데에서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모차르트의 후원자로 남았던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1790년대의 빈에서 음악은 람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들이여, 너희들은 얼마나 크게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는가?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 보이는 데 대한 이유를 모른다. 어릴 적부터 나의 가슴과 머리는 선의를 행하려는 고귀한 생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언제나 위대한 일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6년동안 나는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병을 앓아 왔으며, 무지한 의사들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고, 해마다 더 나아 질 것이라는 희망으로부터 배반당하였으며, 마침내 치료하는 데 수년이 걸리거나 혹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정이 날 지도 모르는 영구적인 병세에 대한 예측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을 지금 생각해다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으려는 충동을 받았다--"그러나 오로지 예술이 그것을 저지했다. 왜냐하면, 아, 내가 작곡하도록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이루기 전에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난 다는 것은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베르테르 같은 어조로 쓰여진 추신도 있다. "마치 가을에 잎새들이 이울고 떨어지듯이, 그렇게 나의 삶 또한 황폐해졌다. 거의 이 세상에 나자마자, 그렇게 나는 지금 간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여름날 나를 고양시켰던 그 드높던 용기마저도 지금은 사라졌다." 아마도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친구 베겔러(F. G. Wegler)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말일 것이다 : "나는 운명의 목을 움켜쥐겠다 . . ." 또 다른 부분에서 그는 "만일 나의 시련(귓병)만 없앨 수 있다면, 나는 온 세상을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그가 바란 조건들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그는 이 두 가지(운명의 목을 움켜쥐고 세상을 껴안는 일)를 모두 다 해 내게 된다.지금부터, 피아노의 명인으로서 남은 날은 손으로 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완전히 귀를 먹게 되어, 그가 입에서 나온 말로 대답을 하는 사이 그의 친구들이 자신의 질문을 적을 필담책이 필요하게 된 것은 1819년이 되어서였지만, 그가 점점 더 듣기가 어려워짐에 따라 그의 1805년의 겨울 시즌을 위해 작곡된 것이다. 이 희곡은 감옥에 갖힌 남편을 구하기 위하여 소년으로 위장하는 여성을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음악화하면서 베토벤은 이와 유사한 "구출"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베토벤 자신이 높이 존경한 음악가인 케루비니(Cherubini)의 영향을 받았다. 피델리오는 처음에는 그리 대단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아우스테를리츠(Austerlitz) 전투 이후로 빈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의 진주로 인해 대부분의 빈 시민들이 극장에 가길 꺼려했기 때문이다. 갖은 어려움 끝에 베토벤은 다음해 봄의 재상연을 위하여 슈테판 폰 브로이닝(Stephan von Breuning)이 수정한 대본에 따라 일부분을 개작하도록 설득된다. 이번에는 이 오페라는 두 번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이 극장측과 다툰 이후에 격노하여 그의 악보를 걷어 가는 일만 없었으면 더 오래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8년이 지나서야 베토벤 자신과 새로운 대본가 트라이츄커(G. F. Treitschke)에 의해 대폭 수정된 피델리오가 다시 빈의 무대에서 공연되었으며, 이로부터 독일 가극장의 고전의 하나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베토벤은 이후에 오페라에 대한 많은 구상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었으나 그 어느 것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입신이 모든 시기동안 베토벤은 모차르트처럼 공직의 혜택 없이 자신을 영위해 나갔는데, 그를 도와 줄 가족이 없었던 점을 고려하면 모차르트보다 훨씬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오스트리아와 외국 모두에서 점차 치솟아 올라갔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음악 저널이었던 라이프찌히의 '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일반 음악 신문)'의 비평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례함을 트집잡는 일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찬사를 보냄으로써, 인세 제도를 뒷받침할 어떤 저작권법도 아직 마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그를 앞서 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슈베르트보다도 훨씬 더 .
    예체능| 2000.10.14| 7페이지| 1,000원| 조회(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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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탑파의 이해 평가B괜찮아요
    탑(塔)의 의미와 변천탑은 탑파(塔婆)를 줄인 말로 원래는 범어(梵語 ; Sanskrit)의 'Stupa' 또는 파리어(巴梨語 ; Pali)의 '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파는 불교가 발생하기 전부터 고대인도에서 '무덤'의 뜻으로, 즉 사람이 죽고나면 화장(火葬)을 한 후 흙과 돌로 돔(Dome)과 원분(圓墳)을 만든 것을 가리켰다. 이러한 탑파는 불교발생과 더불어 교주인 석가모니가 입멸(入滅, 涅槃)하자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당시의 사회 장속(葬俗)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고, 다비 후 그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면서 불교적인 조형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탑파의 의미는 '신골(身骨)을 담고 흙과 돌을 쌓아올린 불신골(佛身骨, 眞身舍利)을 봉안하는 묘(墓)'라는 뜻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8국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제자인 도노나(徒盧那)의 의견에 따라 사리를 똑같이 나누어 각각 탑을 세우니 이를 '분사리(分舍利)' 또는 '사리팔분(舍利八分)'이라 한다. 사리신앙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며, 불탑의 기원 역시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백년이 지나서 대인도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아육왕(阿育王 ; Asoka, 272∼232 B.C.)은 불사리를 봉안한 8개의 탑을 발굴하여 다시 8만 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우고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따라서 불탑의 성격은 처음에는 불신골을 모신 무덤이었으나 점차 불교의 거룩한 가르침을 뚜렷이 표시함으로써 그 믿음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기 위한 기념물로 바뀌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인도의 불탑으로 초기의 것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원전 3세기경의 산치(sanchi)대탑을 보면, 반구형의 복발(覆鉢)을 봉분(峯墳)하듯 흙과 돌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는 제단에 비유되는 판석(板石)단(單層基壇)이고, 옥개석의 폭(幅)은 탑신의 폭에 비하여 현저히 넓고, 옥개석밑은 목조건축의 공포구조(供包構造)를 모방하였고, 옥개석의 추녀 밑은 네 귀가 위로 반전(反轉)되어 목조건축의 형식을 따랐고, 각 부(部)의 구조는 많은 돌을 써서 목조건축의 가구법(架構法)을 따랐다. 특히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은 일면삼칸(一面三間)의 건물형식을 취하였는데 가운데칸(中間間)은 개방되어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고 내부에서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찰주석(擦柱石)이 있어 가장 충실히 목조탑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런 목조탑의 양식을 따른 석조탑의 예로는 백제시대의 익산 미륵사지석탑,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고려시대의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 등이 있다.전조탑파(塼造塔婆)◎ 전탑(塼塔)전탑은 벽돌을 만들어 쌓은 탑으로, 안동 등 일부지역에 남아 있으나 크게 유행하지는 못한 형식이다. 전탑의 특징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을 세우며, 옥개석(屋蓋石) 위아래는 모두 층단(層段)을 이루고, 옥개석의 폭이 현저하게 좁아지며, 옥개석의 추녀 밑이 끝까지 직선이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건탑(建塔)에서 보는 옥개석 위에 기와를 입힌 수법 또한 전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 단층의 기단에 감실(龕室)을 개설함에 있어 그 주변과 감실 자체에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전탑의 예로는 안동 신세동(新世洞) 7층전탑(8세기), 안동 동부동 5층전탑(8세기), 안동 조탑동 5층전탑(8세기),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에 있는 영광탑이라 불리우는 발해시대의 5층전탑, 칠곡 송림사 5층전탑(9세기),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고려) 등이 있다.모전석조탑파(模塼石造塔婆)◎ 모전석탑(模塼石塔)돌을 벽돌과 같이 모각(模刻)하여 만들어 쌓은 모전석탑은 건탑재료로 석재(石材)가 이용되었을뿐, 그 형식은 전탑과 같은 축조과정(築造過程)을 거치기 때문에 그 형태는 전탑과 다를바 없다. 이런 석탑으로는 경주 분황사(芬皇寺) 모전석탑(634년), 영양 봉감 5층모전석탑(고려), 제천 장 등에는 8각의 목탑지가 남아 있는 점으로 볼 때 주로 평면 8각의 탑들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평양 영명사(永明寺) 8각5층석탑, 대동 광법사(廣法寺) 8각5층석탑, 대동 율리사지 8각5층석탑, 평창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김제 금산사(金山寺) 6각다층석탑(이상 고려)이 있으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8각13층석탑, 남양주 수종사(水鍾寺) 8각5층석탑, 여주 신륵사(神勒寺) 다층석탑(이상 조선)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2. 백제의 탑백제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건립되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없고, 부여 군수리사지, 부여 금강사지, 익산 제석사지 등에 탑지만이 남아 있는데, 평면 방형인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백제탑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이 탑을 보완하여 백제식의 석탑양식을 완성한 정림사지석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탑들은 목탑의 각 부재에서의 여러 양식을 목재 대신에 석재로서 충실히 구현한 석탑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기단이 얕은 단층기단이고, 옥개석의 폭은 비교적 얇고 넓으며, 네 귀에서 반전하고, 내림마루를 각출했다. 아울러 각 부의 구조는 목조건축의 가구법(架構法)을 따라 많은 돌을 썼으며, 우주(隅柱)에는 배흘림이 나타난다. 특히,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있어서는 1면 3칸의 건물형식을 취하였는데 중간칸은 개방되어 내부로 통하게 되어 있고, 내부에서 교차되는 중심에는 거대한 찰주석(擦柱石)이 있는 점은 목탑의 형식을 매우 충실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백제탑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부여 무량사 5층석탑, 김제 금산사 5층석탑, 계룡산 남매탑(7층탑), 담양 읍내리 5층석탑, 남원 만복사지 5층석탑, 서울 홍제동 5층석탑(이상 미륵사지계), 서천 비인 5층석탑, 계룡산 남매탑(5층탑), 부여 장하리 3층석탑, 정읍 은선리 3서는 옥신은 2층 이상부터, 옥개석은 3층 이상부터 1석식이다. 경주 구황리 3층석탑(700년 전후)에서는 탑신의 각 면석이 조립식이 아닌 1석으로 만들어 우주를 따로 세우지 않고 양모서리에 각출하였으며, 하층기단의 탱주도 3주에서 2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괴체성(塊體性)의 경향은 다시 기단부터 탑신부를 구분할 필요없이 석탑 전체에 영향을 미치어 앞선 시대의 복잡한 가구양식이 간략화되었으며, 기단과 탑신부의 균형도 높고 큰 기단과 방대한 탑신부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감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원적인 양식에서 변화하여 우리나라 석탑의 가장 일반적인 양식, 즉 전형양식의 전형이 나타난다.2. 전형양식의 완성통일신라시대의 조탑활동은 그 성대(盛代)인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며, 전형양식이 완성되어 정형화(定型化)된 석탑이 나타난다. 이러한 석탑의 형식은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2층기단을 놓고, 그 위에 탑신부, 상륜부 순으로 건조되었다. 기단부는 상·하층이 같은 형식으로 각 면석에는 양쪽에 우주를 표시하고 중간에 2주의 탱주를 모각하였으며, 상층기단갑석에는 부연(副椽)을 마련하고, 탑신부를 받고 있는 괴임대는 각형 2단을 정연하게 각출하였다. 탑신부에서 옥신은 각면에 우주를 표시하고, 옥개석은 하면에 5단의 옥개받침을 마련하였으며,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을 각출하여 그 윗층의 옥신석을 받고 있다. 이상과 같은 형식은 감은사지 3층석탑이나 고선사지 3층석탑과 같은 시원적인 신라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어 정형화한 것으로, 여러 개의 석재가 생략되어 괴체(塊體)의 옥신과 옥개를 이루게 되었고, 하층기단 면석의 탱주가 3주에서 2주로 줄어든 점이 현저하게 눈에 띤다. 이러한 양식의 예로는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 갈항사 동·서3층석탑,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 청도 봉기동 3층석탑(이상 8세기 중엽), 속초 향성사지 3층석탑(9세기) 등이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갈항사 3층석탑은 동탑의 상층기단 면석에 건립연기가 음각지고 있다. 이와 같이 기단부의 탱주가 상층기단에서 1주로 변하고, 옥개받침은 5단(五段)으로 성대(8세기중엽)의 정형을 잘 계승하고 있는 석탑의 예로는 보림사 3층석탑을 비롯하여, 부석사 3층석탑, 울진 청송사지 3층석탑, 단속사지 동·서3층석탑, 합천 청량사 3층석탑 등이 있다.2 더욱 변화된 석탑9세기 후반에 이르러 위에서 본 석탑보다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면에서도 더욱 큰 변화를 보이는 석탑들이 나타난다. 기단부에서는 석재가 줄어들었고, 상·하층 모두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었으며, 탑신부에 있어서는 옥개받침의 수가 5단에서 4단으로 간략화되고 있다. 그리고 탑신괴임의 모각수법이나 옥신괴임 및 낙수면 전각의 치석형식(治石形式)에서 성대의 전형으로부터 변형되어 간략화 또는 부분적으로 생략되었다. 이러한 양식을 갖춘 석탑으로는 실상사 동·서3층석탑, 동화사 금당암 동·서3층석탑 및 비로암 3층석탑, 경주 효현리 3층석탑, 경산 불굴사 3층석탑, 양양 오색리 3층석탑, 홍천 물걸리 3층석탑 등이 있으며, 이 탑들의 건립시기는 거의 같은 시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3 단층기단의 형식신라 하대에 이르면 또 하나의 변형된 형식으로 단층기단이 출현하는데, 기단부의 구조가 2중기단이라는 기본형에서 벗어나 단층기단 위에 바로 탑신부를 받고 있는 형식이다. 이 형태는 형식적으로 낮은 하층기단이 생략되어 지대석 위에 바로 상층기단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단층기단을 가진 석탑에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결구하여 지대석을 마련한 위에 기단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 지대석 대신에 자연암반에 기단면석을 조립한 석탑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석탑으로는 표충사 3층석탑, 봉암사 3층석탑, 문경 내화리 3층석탑, 화엄사 동5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3층석탑(자연암반에 기단면석을 건립) 등이 있다. 이러한 양식의 석탑은 다음 고려시대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기단 양식인 2층기단이 유행하는 한편 단층기단의 석탑도
    인문/어학| 2000.10.08| 8페이지| 1,000원| 조회(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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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상의 이해 평가B괜찮아요
    Ⅰ. 불상의 이해1.불상이란불상이란 불교의 신앙대상으로 창조된 부처의 모습을 말한다. 불상은 부처님 생존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부처님 입멸 후 5~6백년이 지나서야 인도에서 처음 조성되는데, 보통 기원 후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중국에서도 3~4세기초 불교가 전파되면서 불상이 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우리 나라에 맨 처음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경(373)으로 전진에서 고구려에 전래되었는데, 그때 불상과 경전이 들어왔다. 백제는 384년에, 신라는 527년에 불교를 받아들였다.Ⅱ. 불상의 종류불상은 불격에 따라 불타, 보살, 천, 나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불타는 여래라고도 불리는데. 이를 풀이하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승 불교에서는 그 예배대상이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불 뿐이었으나 대승불교에 이르면 불교 교리가 발전하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불의 명칭이 나타난다.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이 그것이다.보살은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수행하는 동시에, 부처의 자비행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노력하는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가리킨다. 미륵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이 있다.천이라 함은 불교를 수호하는 신들로 인도의 고대 신앙에 있던 토착신들이 불교에 흡수된 것이다. 범천, 제석천, 사천왕, 인왕(금강역사), 팔부중, 비천 등이 있다.나한은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와 여러 나라에서 숭앙받던 고승들을 나타내는 것인데, 수행자의 민머리 모습으로 표현된다. 십대제자, 유마거사 등이 있다.1.불상의 종류⊙ 석가여래불(석가모니불)- 대웅보전(대웅전)에 봉안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것으로 인도에서 1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석가불은 입상일 경우에는 시무외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하고, 좌상은 항마촉지인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협시보살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에 위치하나 간혹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나타나기도 한다.⊙ 대일여래불(비로자나불)는 존칭. 비로사나(毘盧舍那), 노사나(盧舍那)라고도 한다. "화엄경"의 주존불로 부처의 광명이 모든 곳에 두루 비치며 그 불신(佛身)은 모든 세계를 포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형상은 보통 지권인의 수인을 취하며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좌우에서 모시고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이후 특히 9세기 중엽경에 유행했다.⊙ 아미타여래불(무량광불, 무량수불)-극락전에 봉안서방 극락세계에서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로 보통 아미타9품인의 손모양을 취하고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나 시대가 지나면서 대세지보살 자리에 지장보살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약사여래불(대의왕불)- 약사전에 봉안질병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 동방유리광 세계에서 살면서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해주는 의왕(醫王)으로 신앙되었던 부처이다. 다른 여래와는 달리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륵불(자씨보살)- 미륵전, 용화전에 봉안석가 다음으로 부처가 된 보살. 현재 도솔천에서 보살로 있으면서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석가여래가 계실 때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이다.2.불상의 재료에 따른 구분1. 석불(石佛)돌로 만든 불상. 불상 제작 초기부터 만들어졌던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불상형태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이 많이 남아 있다.2. 마애불(磨崖佛)커다란 암벽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얕게 새긴 불상.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경주 남산의 마애불상군을 비록하여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다.3. 목조불(木造佛)나무로 만든 불상. 목조불상은 시대나 장소에 관계없이 많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재료상의 취약성 때문에 남아 있는 예는 극히 드물다.4. 금불(金佛)금으로 된 불상. 불상 조성이 규범 중 하나가 부처는 금빛이 나야 한다고 되어 것 같다. 재료가 비싸고 귀해 별로 유행하지는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순금상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대의 금제불좌상과 금제불입상이 남아 있다.5. 금동불(金銅佛)동이나 청동으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 것이다. 금이 귀했기 땜분에 자연히 부식을 방지하고 황금과 같은 효과를 내는 금동불이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에서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남북조 시대부터 많이 만들어 졌다.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개인용의 작은 호신불에서부터 거대한 상에 이르기까지 금동으로 많이 제작되었다.6. 철불(鐵佛)철로 주조한 불상. 우리 나라의 경우는 금동불보다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예는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 광주 철불좌상 등이 있다.7. 소조불(塑造佛)점토로 만든 불상.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이후 많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별로 없다. 현재 부석사 소조불좌상, 성주사지 출토 소조불 등이 유명하다.8. 건칠불(乾漆佛)나무로 간단한 골격을 만들고 종이나 천 같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후 옻칠을 하고 다시 금불을 입힌 것이다. 우리 나라에 알려져 있는 불상으로는 조선 시대의 기림사 건칠보살조상과 불회사 건칠삼존불좌상 등이 있다.Ⅲ. 수인불, 보살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손 모양. 원래 불전도에 나오는 석가의 손 모양에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불의 경우에는 선정인, 항마촉지인, 전법륜인, 시무외인, 여원인의 5가지 수인을 주로 취한다. 대승불교의 여러 부처들도 대개 이를 따랐지만 아미타불은 구품왕생과 연결되어 9등급의 아미타정인과 내영인을 새롭게 만들었다. 아미타정인을 9등분한 것은 중생들의 성품이 모두 다르므로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하여 9등급으로 나누어서 가가 사람에게 알맞게 설법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불상 종류에 따른 수인은 교리적인 뜻을 가지고 표현되기 때문에 불상의 성격과 명칭을 분명하게 해주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1.기본수인1 선정인(禪定印)결가부좌일 때 취하는 수인으로 왼손은 손 바닥을 위로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 바닥을 위로해서 겹쳐놓되 두 엄지 손가락을 서로 맞대는 형식이다. 이 자세는 삼매경에 들게 하는 수인이며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을 때 이 수인을 취했다고 한다.2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선정인을 취하고 수행하는 동안 제6천의 마왕 파순이 자신의 위력감퇴를 걱정하여 갖은 방해를 하다가 통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악마세계의 모든 군세를 동원하여 힘으로 좇아내려 하였다. 마왕은 칼을 석가모니에 대면서 "비구야. 나무아래 앉아 무엇을 구하는가. 빨리 떠나라. 너는 신성한 금강보좌에 앉을 가치가 없는 자이다."라고 외쳤다. 이에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에 이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한사람 뿐이다. 지신(地神)이여. 이를 증명하라."고 하면서 선정인을 취하던 오른손을 풀어 무릎위에 얹고 손가락을 땅에 대었다. 이 때 지신이 홀연히 땅에서 뛰어나와 이를 증명하였는데 이 때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다. 석가모니만이 취하는 특정한 수인이다.3 전법륜인(轉法輪印)부처가 깨달은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와 중생들에게 최초로 설법할 때 취했던 수인이다. 부처의 설법을 전법륜이라고 하는데, 최초로 설법한 이 때의 설법을 초전법륜이라한다.4 시무외인(施無畏印)부처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고 위안을 주는 수인이다. 인도의 초기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손을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세운 채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여원인과 짝을 이루며 이 두 수인을 합하여 통인(通印)이라고 한다.5 여원인(與願印)부처가 중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준다고 하는 의미의 수인이다. 시원인(施願印), 만원인(滿願印)이라고도 한다. 손을 내리고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모양으로 시무외인과는 반대가 된다.6 지권인(智拳印)이(理)와 지(智),는 하나라는 뜻의 수인이다. 보리인(菩提印), 각승인(覺勝印)이라고도 한다. 금강정경(金剛頂經)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집게손가락만 똑바로 세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서 오른손 엄지가 왼손 집게손가락 끝에 서로 맞닿도록 한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만이 취하는 수인이다.7 합장인(合掌印)보통 예배를 드리거나 제자와 문답(問答)할 때 취하는 수인으로, 귀명인(歸命印) 또는 일체절왕인(一切切王印)이라고도 한다. 두 손을 가슴 앞에 올리고 손바닥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2.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선정인에서 약간 변형된 것으로 아미타불의 수인이다. 묘관찰지정인(妙觀察智定印)이라고도 한다. 손바닥을 위로 한 왼손에 오른손을 포개서 배꼽 부근에 놓고 각각 둘째 손가락을 구 부려서 그 끝이 엄지손가락에 닿게 한 모양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하면 중생들은 성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 중, 하 3등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하여 9등급으로 나누어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설법해야만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이 9품에 따라 아미타불의 수인도 각각 다르다.상생인(上生印)은 아미타정인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있다.중생인(中生印)은 두 손을 가슴 앞에까지 올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이다.하생인(下生印)은 오른손을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하여 가슴 위까지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형상이다.상생인, 중생인, 하생인은 손의 위치만 다를 뿐, 손가락 모양은 상, 중, 하생인이 똑같이 되어 있다. 다만 엄지와 맞대고 있는 손가락에 따라 상(上), 중(中), 하품(下品)으로 구분된다. 즉 엄지와 둘째 손가락이 서로 맞대고 있을 때에는 상품이고, 엄지가 셋째 손가락과 맞대고 있을 때에는 중품, 그리고 엄지와 넷째 손가락이 닿아 있을 때에는 하품이 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상품상생인은 좌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반면에 입상에서는 상품하생인이 일반적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미타불이 9품인을 하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며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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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평가A좋아요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을미개혁[을미사변(乙未事變)]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간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 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 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을미개혁(乙未改革)]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직후 성립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운동. 청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 중심의 삼국간섭으로 일시 후퇴하자,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정부가 러시아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뒤, 친일개화파로 새로 김홍집내각을 성립시키고 을미사변으로 일시 중단된 갑오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즉, 을미개혁은 94년 7월에서 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96년 1월 공포, 강제 실시한 단발령은 을미사변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유생들의 반일˙반근대의병의 원인이 되었다. 을미개혁은 일본에 의존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반일분위기가 만연하였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그 결과 양국 사이에는 馬關條約(마관, 하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여 조선에서의 우세를 확실히 하였을 뿐 아니라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음으로써 만주와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까지도 마련하였다.이러한 마관조약의 내용이 밝혀지자 당시 청에 진출하여 있었던 서구열강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요동반도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는 역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경계하고 있었던 독일·프랑스와 함께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가 동양평화에 해롭다는 구실을 붙여 그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 때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한 뒤였으므로 이 요구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요동반도를 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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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이의 교육사상 평가A좋아요
    이 이 (李 珥)1. 생애와 저서 및 사상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아명은 견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이다. 강평공 명신(康平公 明晨)의 5대손으로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아버지 이 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재주가 높아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했다.1558년(명종 13)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이를 전후하여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1564년(명종 19)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진출하여 명나라 서장관 청주목사 황해감사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율곡과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은 경륜으로 서로 교감(交感)하며 서로 인품을 깊이 흠모하는 사이였다. 토정 자신은 벼슬을 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의 꿈을 율곡을 통하여 실현시키려 했다. 이이화(李離和)의 말처럼, 율곡은 그날 늘 마음속으로 그리던 김시습(金時習)의 말한 면을 토정에게서 발견했는지도 모른다.율곡은 퇴계의 이기호발(理氣互發)의 이원론적 경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율곡은 나타나는 기(氣)에는 반드시 이(理)가 탄다는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 곧 이기통일론(理氣統一論) 이통기국설(理統氣局說)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율곡은 기(氣)는 스스로 능히 발할 수 있으나 그 능히 발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이(理) 때문이라고 한다.율곡의 학문적 태도는 선인의 학설을 비판도 없이 묵수 준봉하는 데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데 두었다. 그러므로 율곡은 주자에 대해서까지 이(理)도 발하고 기(氣)도 발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주자의 참뜻이라면 주자도 그릇된 것이요, 주자가 주자답지 못한 것이라 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나의 이 주장은 변할 수 없다. 고까지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 양보독자적 견해를 밝힌 것으로 중국 명나라에까지 알려져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다.율곡은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고 있는데, 특히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하다. 물론 율곡의 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임진의 국란을 당하여 비로소 그의 선경의 밝음에 탄복하게 되었다.율곡은 또 역사의 단계파악을 세 가지 관점으로 보았다. 즉 창업(혁명) 수성(守成,보수적 유지 경장(更張, 혁신)으로 대별하고, 율곡 생전의 당시를 경장의 시대로 파악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매양 훌륭한 경륜을 가지고 혁신 경장할 것을 주장했다.그는 또 인물본위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역설하였으며, 특히 민생에 유의하여 불공평한 처사가 없도록 주의를 환기하였다. 교육의 진흥책을 선조에게 건의하여 구체적인 「학교모범」을 제시하였고, 사회 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여 스스로 서원향약 해주향약 등 향약을 실시하기도 하였다.석담에서 숙지(夙志)를 펴고자 마침내 일가(一家)를 모아 동거계사를 짓고 사당을 세워 조상을 모셨다. 그의 맏형이 일찍 죽고 그 식구들이 회덕에 있으므로 형수 곽씨를 청하여 종가의 신주를 모시고 오도록 하여 제사를 주장하게 하며, 형제자질과 동복(同服)의 무리로서 빈천무의(貧賤無依)한 이들을 모두 모아 함께 살도록 하니 그 식솔(食率)이 1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율곡의 저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가 20세 때에 지은 자경문(自警文)은 그 때에 자기를 환성(喚醒)시키면서, 그의 마음(心)의 자세를 의미한 것이었고, 한편으로 초학자들에게 입지(立志)를 돈독히 정하고 한결같이 이를 힘써 나가도록 한 글이다.20세 때에 강릉 외가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 율곡은 그 해 겨울에 열린 별시과거(別試科擧)에서 「천도책」이라는 글로써 수석으로 합격, 그 글은 당시 고시관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의 우주철학의 체계와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은 이미 천도책에다는 경륜과 포부를 명쾌하게 논술한 것이었다.39세 때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글을 지어 올렸다. 이는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는 국왕(선조)의 교지(敎旨)에 응하여 올린 상소문이다. 만(萬)자에 달한다 하여 만언봉사라 하였는데, 실은 1만 1천 6백 60여자로 된 장편의 시국대책문이다.이 「만언봉사」에는 언로(言路)와 공론(公論)을 행하는 여론 정치, 민본위주의 국민평등론, 무실(務實)과 변법(變法)을 강조한 경장론(更張論)등 그의 진취적인 개혁안이 나타나고 있다.40세 되던 해 9월에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해 올리니, 이는 군왕의 도(道)를 상술한 것이다. 주로 4서 5경에서 수기치인에 관련된 글을 뽑아서 편장(篇章)을 나누어 분류하고 송유(宋儒)들의 글을 인용하여 해석을 가하고 자기의 글을 안어(按語)로서 첨부했다. 안어로서 각 장마다 붙인 말속에는 그의 자득(自得)에 의한 말이 많다.율곡은 40세 되던 해 10월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였고, 또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논하였다. 42세 되던 해 12월에는 저 유명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였다. 그러다가 46세 때에는 경연일기(經筵日記)가 완성되었는데, 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 또는 석담유사(石潭遺事)라고도 불리어지는 것으로, 율곡이 경연(經筵)에서 군신간에는 논란이 되었던 당시의 시사(時事)를 일기체로 기록하여 평론한 글이다. 그리고 46세 때는 또 최충(崔沖)의 문헌공도(文憲公徒)의 학교 규칙을 작성하였다.47세 대에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 등을 지어 올리니, 그것은 모두 왕명을 받들어 한 것이었다. 그의 학교모범(學校模範)은 입지(立志) 검신(檢身) 독서(讀書) 신언(愼言) 존심(存心) 사친(事親) 사사(事師) 택우(擇友) 거가(居家) 접인(接人) 응거(應擧) 수의(守義) 상충(尙忠) 독경(篤敬) 거학(居學) 독법(讀法) 등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잇다. 율곡이 말하는 교수와 학습의 방법은 이 「학교모범」의 16개 어 올린 글이기 때문에, 조선왕조에 있어서는 일종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았던 것이다.율곡은 제자들에 의하여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죽은 후 1682년(숙종 8)에는 문묘에 모셨고, 황해도 백천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 야산 계곡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 역시 율곡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 주변에는 수령이 수백 년을 헤아리는 느티나무와 큰 향나무가 서 있어 이 서원의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 율곡을 가리기 위해 세워져 1650년 효종이 친필 현판까지 내렸으나 대원군에 의해 한때 철폐되기도 했다. 그 뒤 지난 1969년 지방 유림들에 의해 복원이 시작되어 1974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운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기도 교육위원회가 초 중등 교사의 연수를 위해 율곡교육원을 세웠는데, 이 교육원은 1986년 11월에 개원되었다.2. 율곡의 교육사상과 그 현대적 이해율곡의 제자 한 사람이 그에게 뜻(志)를 돈독히 지니면 요 순이 될 수 있다는 교육의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다.율곡의 제자 한 사람이 그에게 뜻(志)을 세우는 데는 어떻게 하여야 되는냐고 물었더니 참(誠)되면 지(志)가 저절로 서는 법이라 고 대답했다. 이는 성실하면 입지(立志)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입지가 확고해지는 길은 나 스스로의 성실을 기르는 길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성자(誠者)아닌 성지자(誠之者)라고 한다. 따라서 입지(立志)와 성(誠)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율곡 자신도 지무성즉불립(志無誠則不立)이라고 한적이 있다.율곡에 있어서 입지(立志)는 교육의 이념과 목표, 학습의 목적관을 포괄하는 개념을 지니고 잇다. 목적 없이 떠나는 길손이 없고, 뜻하는 항구가 없이 항해하는 배가 있을 수 없다. 교육자체도 유목적적(有目的的)인 활동이다. 교육목적은 교육이 계획되고 실시되는 기본적인 방향잡이 입지보다 더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입지란 뜻을 세움이다. 이는 자기 지향적(自己志向的)인 것으로서 자의식(自意識)에서 출발한다. 율곡이 쓰고 있는 말을 빌리면, 그는 진시폐소(陣時弊疏) 중의 일조에서 일심의 가는 바를 뜻(志)이라고 한다(一心之所之謂之志) 고 하고, 또 어록(語錄)(上)에서 뜻(志)이라는 것은 마음이 가는 것(志者心之所之) 이라고 했다.그러니 율곡의 입지는 내 인생과 내 운명과 내 운명에 대한 관(觀)의 정립이기도 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일에 접하게 된다. 이 일들 가운데서 나는 어떠한 일을 맡아서 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결론은 각자가 주체적 결단에 다라서 내려야 하며, 이 결단과 선택에 대한 책임은 각자 스스로가 져야 한다.율곡은 입지하는 방법을 성(誠)에 두었었다. 따라서 모든 것의 참(眞)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의 태도로부터 참(誠)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율곡은 성(誠)은 진실한 것(誠實也) 이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데 있다(毋自欺也) 고 했다. 즉 성(誠)은 언제나 나 자신에 대한 성(誠)이었다. 그것은 진실로 자신에 대하여 충실한 동시에 남에 대하여 정성을 다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니 성(誠)은 자기체현(自己體現)의 전제인 것이요, 그에 의하여 자기 존재의 길을 열 수 있는 개시성(開示性)인 것이다.성(誠)을 떠나서 참다운 인간과 존재와 학문도 이룩할 수 없다. 진 선 미라는 것도 자기 성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인간적 태도란 결국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는 성(誠) 그 자체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일심(一心)이 진실로 참(誠)되면 만사가 다 참(眞)된 것이니, 성(誠)은 사람으로서 사람 구실할 수 있는 인도(人道)이다.율곡은 또 위학(爲學)의 근본으로서 성(誠)을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학문도 성실로부터 시작해서, 또한 성실로서 끝나는 것이었다. 우리가 올바른 학문적 태도와 사고에 젖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될 수 없다. 그래서 율곡은 정자(程子)의 .
    인문/어학| 2000.09.25| 3페이지| 1,000원| 조회(1,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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