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미술 >이 수업의 전반기에는 한국 고미술의 특징과 그것들의 함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우리 나라의 뛰어난 문화유적을 몇 가지 예로 살펴보았다. 모두다 불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써, 이 세 가지 것들에 대해서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고자 한다.불국사는 당시 신라인들의 불국토에 대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불국사는 기존의 여타 사찰들과는 구별이 되어지는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는, 불국토를 구현하기 위한 최고의 노력들이 함축되어 있다.불국사에 들어가면 우선 거대한 석단을 볼 수 있다. 이 석단에 많은 학자들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석단의 위는 부처의 세계인 “불국토” 이고, 석단의 밑은 일반 대중들의 세계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불국토의 세계로 도달하기 위해서 대중들은 청운교와 백운교를 거쳐가야만 한다. 그 청운교와 백운교를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높이의 다리를 단 몇 개의 장대석이 기초를 잡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석공 기술과 또한 불국사에 대한 신라인들의 열정이 묻어 나오는 부분이다. 또한 그 계단의 개수가 33개씩으로, 불교의 33천의 숫자와도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그 옆의 석축을 보면 불국사의 건축기술의 최절정 - ( 아름다움, 섬세함과 웅장함이 공존하는 느낌 ) - 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저렇게 커다란 장대석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안정감 있고, 질서 정연하게 구성을 했는지 새삼 놀라움과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자연석들 위에 놓여진 인공적인 장대석과의 조화는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것들은 불국토에 이르는 길 혹은 관문이라는 상징을 함축함과 동시에 자연과 인공의 미를 조화시킨 건축의 지혜를 엿 볼 수 있게 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 아래에는 아름다운 연못을 만들어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또한 그 곳에 무지개를 피어 오르게 하기 위해 물을 끌여 들였다가 내뿜는 것들도 연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모습이 사라지고 없지만 실로 상상하기만 해도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이 그지 없을 듯 하다.대웅전으로 이르기 위해 자하문을 지나면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볼 수 있으며, 대웅전의 뒤쪽에 일렬로 스님들이 수양했다던 강당이 있다. 이러한 배치법은 당시에 많이 사용되는 가람배치라고는 하지만, 그것들의 배치가 수학적으로 상당히 비례를 맞추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섬세한 부분까지 감안하고 건축을 했기 때문에, 불국사가 다른 여타의 사찰과는 다르게 평가받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청운교,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을 통해 대웅전에 이르고, 또 하나의 다리인 연화교, 칠보교를 지나면 극락전이라는 곳에 이른다. 이 곳은 임진왜란 때 불에도 타고, 일제시대에도 훼손을 많이 당해 그 모습이 지금은 많이 변형되고 초라하다고 한다.석굴암은 불국사도 그러하지만 매우 정교하게 지어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인도나 중국에도 석굴이 많이 있었고, 경주의 석굴암이 그 시기도 꽤 늦은 시기의 작품이지만, 그것이 지대한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세계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인공석굴이라는 점이다. 천장을 돔형식으로 구성했는데, 이는 정말 정교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술적인 면이 매우 필요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불국사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당시 신라인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고 느껴진다. 그 전에 유례도 없는 인공석굴을 어찌 감히 지으려고 했는지, 이는 신라인들의 불국토에 대한 염원이 정말 지극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석굴암에 들어가면 가운데의 부처님의 모습과 좌우에 또 다른 부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정밀하게 좌우 비례를 맞추었다고 한다. 이는 단지 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석굴암 내부와 그 구성들 모두가 좌우 비례가 고려되어 지어졌다고 한다. 또한 본존불 역시 그 인체의 구성에 있어서 매우 정확한 비례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앞서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라인들이 당시 매우 정확한 측량기술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평면적인 부분과 입체적인 부분이 매우 잘 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본존불의 모습에서 그들의 건축기술이 그들의 마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의 얼굴 모습은 정말 인자하고 아름답다. 그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부처의 모습을 120% 아니 그 이상 표현한 듯 싶다. 부처의 얼굴과 자세 그 어느 곳에서도 빈틈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조금만 지켜보더라도 평안한 마음을 느끼게 될 수 있다고 한다. 어찌보면 참 소박하지만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매우 알차고 아름다운 부분이 드러나는 것이 큰 특징이 아닌가 싶다.하지만, 석굴암 내부에 습기와 이끼가 끼기 시작하여, 내부적으로 훼손이 가하기 시작해졌다. 그리하여 훗날 석굴암과 겉의 지면 사이에 일정한 공간사이에 환풍기를 달고 보일러도 가동하여 인위적으로 이를 제거하고 있다고 한다.
< 베버의 근대사회의 사회계층 >▶▷ 베버의 헤르샤프트(herrschaft) = 지배체계(domination) / 권위체계(authority)◈ 필수요소① 정당성에 대한 믿음 ② 행정적 기구◈ 3가지 유형① 카리스마적 지배정당성의 토대 : 지도자(상위자)의 비범한 통찰과 성취를 입증하는 것과 추종자(하위자)들이 지도자(상위자)를 받아들이는 것행정적 기구 : 지도자(상위자)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를 즉시 실천하는 충실 한 사도들로 구성용어의 원론적인 성격에 해당하는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현실적으로 접근하여 개 인적인 측면으로 간주즉, 베버는 카리스마를 '보통인과는 구별될 수 있는 특정한 개성적 자질로서 초자 연(supernatural), 초인간적(superhuman), 혹은 적어도 예외적인 힘과 권력'을지 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정치, 군사 분야의 지도자와 같이 많은 추종자들이 이끄는 사람들에게서 전형적 인 예를 찾을 수 있다.ex) 정치가, 군인, 예술가 ......카리스마 지배는 혁명적이다 = 항상 사회의 위기 시대에 출현하기 때문이다.따라서, 대중은 지도자의 영감에 기초한 새로운 방향에 찬성함으로써, 과거를 거 부한다.② 전통적 지배정당성의 토대 : 하위자들이 상위자들의 명령에 대해서 '그것은 전통적으로 그러 했다'는 근거에서 정당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즉, 과거로부터 그렇게 했기 때문에 현재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 게 된 것이다.이러한 권위는 권위의 소유자와 그 권위에 종속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개인 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베버의 전통적인 권위 유형 두 가지 : 가부장제 , 가산제가부장제(patriarchalism)적 형태에서 행정기구 : 지도자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는 사적인 가신집단가산제(partimonialism) 의 특성*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한 충성과 관습에 기초하여 지위를 획득한다.* 관료들은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에게 복종한다.* 개인적 용무와 공적 업무가 결합되어 있다.* 권위의 계통이 모호하다.* 업무의 전문화가 극히 적다.이러한 맥락에서, 의사결정은 자신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이며, 또 지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관료들의 관점에 토대를 둔다.베버는 관료들이 너무 폭넓은 개인적 임의성을 지니고 있음을 이유로 들면서, 전 통적 지배가 자본주의 발달을 저해했다고 주장한다.③ 합법적 지배정당성의 토대 : 법과 절차에 토대를 둔 것으로, 법이 적절한 방식으로 정의된 바 에 따라 창조되고 집행될 때 정당하다고 믿는 것행정적 기구 : 관료제법은 인간들의 이성적인 힘이 반영된 행위규범이다. 선례나 개인적인 명령 또는 카리스마적 자질에서 비롯되는 잔인성, 자의성, 차별을 극복하고 권한과 책임의 명백한 한계를 정 해주는 것이 바로 법이다.법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시에 지켜야 할 행위준칙을 결정해 줄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사람의 권력행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법을 지키는 경우에 한해서) 법은 인간에 의해 약 속된 사회유지의 규범이기 때문에 사회의 존속을 필요로 하는 한 법적 권위는 존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근대국가의 관료 제는 합리적인 준칙인 법이 부여해준 권위에 근거하여 운영되고 있다.☞ 베버의 “관료제“ 에 대해서베버의 “관료제“베버는 개인의 동기나 인간관계를 배제하고 공식의 조직구조를 대상으로 관료제 의 원칙을 찾으려 하였다.이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소한의 인적 물적 자원을 들여서 조직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 는 조직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베버는 관료제를 전체 사회이론의 한 부분 으로 보았으며, 정부, 산업, 종교, 과학 등에서 볼 수 있 는 조직의 형태라 하였다.베버가 체계화시키기 시작한 관료제 연구의 기본개념에는 관료제 안에서 이루어 지는 분 업, 권위구조, 개별 구성원들의 지위와 역할, 구성원들의 관계를 규 정하는 규칙의 유형 등 이 포함된다. 관료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특성은 상 당히 발전된 분업과 업무의 전문화 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직무에 따라 의 무와 책임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규정해 놓음으로 써 이루어진다. 특정한 직무 에는 행정규칙의 하나인 관할권 원칙에 따라 한정된 일만이 맡겨진다. 관료 제 조직은 상하급 관계라는 합리적이고 비인격적인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 특징인데 전통적 지배유형(봉건세습제)에서 상하급 관계는 인격적이었으며, 권 위가 정당성을 얻는 데는 전통은 신성한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충분했다. 반면 관료제에서는 올 바른 절차를 통해 행정규칙을 시행하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권위가 정당화되며, 관료는 명 령을 내리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명령, 높은 지위에 대해 충성한다.베버는 위의 합리적-합법적 권위를 바탕으로 이상형 관료제의 특징을 다양하게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직의 목적에 필요한 정규 활동은 일정한 방식에 의해 공식상의 직무로서 배 분된다.㉡ 직무의 조직은 계서제(상관역할과 부하역할)의 원리에 따른다.㉢ 직원은 직무수행에서 엄격하고도 체계적인 규칙에 의해 통제를 받으며, 그 적용은 일률적이고 비개인적이다.㉣ 직원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냄이 없이, 형식주의적이고 비개인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직무를 수행한다.㉤ 직원은 전문적인 기술자격에 의하여 선발, 임명되며 선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자격은 시험이나 자격증 혹은 양자에 의하여 증명된다.㉥ 고용당국은 규정된 조건에서만 직원을 해직시킬 수 있는 반면, 모든 직원은 언제나 사임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직원의 보수는 계서제의 직위에 따라 책정되고 지급되며, 그의 승진은 상위자 의 판단에 의하되 선임순서나 실적 혹은 양자에 의해서 결정된다.베버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관료제는 현실적으로 없다고 생각했다. 경험적인 작업은 어떤 관료제가 이념형에 부합되는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법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이며, 관료제에 대한 통제를 통해 관리하는 사람은 누구 인가?정치적 파당은 지배를 위해 싸울 목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는 자신이 대변하는 집 단의 경제적 이익이나 가치를 고양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법적 규제의 후원화에 의해 이 루어 지는데, 따라서 투쟁의 핵심은 법률의 제정을 통해 관 료제를 감독하는 것이다.▶▷ 베버의 사회적 층 : 계급과 신분◈ Weber의 계급이론 : 공동체 내의 권력배분 → 불평등① 계급경제적 자원 ( 재산 & 구매력 수준 비슷) → 삶의 기회 비슷 (비슷한 수준(소득) 의 삶 )소득과 이익을 추구하는 법적 규제를 받는 금융시장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 장. 사람들의 계급적 소속감은, 재화와 서비스를 처분할 수 있는 자신들의 힘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것은 객관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계급상황은 곧 시장상황이다” 라고 할 수 있다.맑스처럼, 베버도 재산의 소유와 결여를 계급상황의 기본적인 범주로 생각했다.소득을 산출하는 재산의 소유와 비소유가 근본적으로 다른 생활양식을 가능하게 해주고, 또한 생활양식의 차이가 근대사회에서는 신분적 차이의 핵심이기 때문이 다.베버의 용어에서 금리생활자는 주로 투자나 신용기금으로부터 나오는 고정된 소 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하여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유지만 되면 그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생계유지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기업가란 재산을 활용하여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는 사람들 이다.즉, 두 부류는 가치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금리생활자는 원래 부가 축 적된 상태의 부류로써, 기업가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을 비난하 곤 한다.베버는 따라서, 계급지향적(경제지향적) 행위가 개인주의적이고 또 도구합리적인 행위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가치합리적 행동이 또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재산이 없는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할 때 베버가 사용한 주된 기준은 그들이 지닌 서비스의 가치와 기술의 수준이다.중간계급 = 화이트 칼라특권없는 무산계급 = 블루칼라계급들을 구분 짓는 핵심적인 요인들은 재산소유자들이 취하는 재산의 용도와 무 산자들이 제공하는 기술과 서비스의 가치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시장에서 결합되 어 동일함을 입증할 수 있는 집합체나 계급을 낳는데, 이들은 지위를 획득하고 재화를 구매하며 그것들을 적절한 생활양식을 통해 향유할 수 있는 유사한 능 력을 갖는다.
1. 중국선사문화의 특징중국의 고대는 대체로 선사시대부터 후한제국이 몰락하는 기원후 3세기초까지의 기간으로, 이 시대는 중국문화 전통의 원형들이 확립되었던 시기이다.중국에서 인류가 생존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선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신중국 성립이후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북경 주구점에서 발견된 북경원인을 필두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그 편년도 100만년 이전부터 1만년 전 까지 다양하다.중국의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6,7천년경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황하일대의 앙소文化와 용산文化 뿐만 아니라 양자강유역, 남중국의 주강유역에서도 황하유역과는 다른 독자적인 형태의 신석기문화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강남일대의 신석기문화의 발견은 중국의 선사시대의 문화가 각지에서 다양한 기원과 계통을 가지면서 확대 발전했다는 신석기문화의 다원성을 시사하고 있다.2. 상왕조의 국가성격중국 고대의 왕조인 상왕조는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상왕조는 상족을 중심으로 결속된 수많은 연맹부족(도시국가 연맹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왕실은 신정정치(신권정치)를 통해 이들 연맹부족을 다스렸다.연맹부족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단 여러 도시국가가 연맹을 조직하고 유력한 도시국가가 맹주가 되었다. 또한 정치 군사 행동은 각 씨족의 대표가 모여 협의하여 결정하였으며, 상왕은 직할지를 가지고 있었고 지방에는 도시국가를 관할하는 伯 또는 方伯이 통치하여 상왕조는 다수의 도시국가 가운데 중앙정부의 성격을 띠었다. 또한 읍제국가는 상에 대하여 부역과 병역의 의무를 지고 상왕조는 청동무기를 하사하여 외침에서 보호를 하였다.또한 상왕조는 靑銅을 제련하여 靑銅文化를 창달하였으며, 甲骨文을 통해 조상의 祭祀 農事의 吉凶 등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 갑골문의 해독은 상왕조를 역사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근본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상의 청동제련술과 갑골문을 포함한 文字의 창달은 중국의 고대문화 형성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東아시아 諸民族 가운데서 가장 먼저 선진적 문화를 창조하였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3. 주나라의 봉건제/종법제商을 멸하고 周王朝를 건국한 周王室은 정치적 지배체제로서 혈연적(宗法的)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들 諸侯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宗親간의 上下분별과 친소유별을 규제하는 宗法制度를 창안하여 王(天子)에서 諸侯 경대부에 이르는 신분적인 階序化 수립하여 周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一家의 天下를 형성하였다.봉건제의 주요목적은, 새로 정복한 영토에 왕실의 일족과 믿을 수 있는 공신을 제후로 분봉하여 왕실의 울타리로 삼음으로서 은주 교체기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또한 종래 은에 복속되어 있던 유력자를 주의 지배하여 재복속시키게 된다.종법제도는①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결합의 원리인 혈연적 유대관념을 제도화 한 것이다.②혈연관계가 아닌 공신이 경우에도 이러한 관념하에 종법제도가 성립하였다.③부계씨족제와 적장자상속제를 바탕으로 종가와 분가의 신분질서를 형성하고 이후 동양사회의 가족질서의 기반으로 발전하게 된다.4. 춘추전국시대란? 제후들의 생산방법 모색? 전국시대의 도시 특징은?주(周)나라 제13대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동주시대라 하고 동주시대를 다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나눈다. 春秋戰國時代는 西周時代의 諸侯國이 宗法的 封建制度의 구속을 벗어나 영토국가에로 변모 발전하고 상호 대립 항쟁하였던 시대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專制君主權의 강화, 郡縣制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성립, 경제적으로는 牛耕의 발명, 철제농기구의 보편적인 사용, 치수 관개 수리사업의 확대 등의 생산기술의 진보와 혁신으로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이 농업상의 발전은 수공업과 상업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또 경제상의 이 같은 비약적인 발전은 씨족공동체의 분해와 해체를 촉진하여 家를 중심으로 한 자립 소농민층, 농업에서 분리 발전된 수공업 상업발전으로 인한 상공인계층의 형성, 혈연 비혈연을 가리지 않고 채용했던 각국 군주의 인재등용은 士人階層의 형성을 가져왔는데 이것이 후대 중국 사회계층을 이루었던 士農工商의 四民形成이었다. 전국시대의 도시는 정치, 군사의 중심이 되는 거점이었다.☞ 즉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5. 제자백가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중국사상이 다양하고 활발했다. 각각의 사상가들이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문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했고, 당시의 난세를 바로잡는데 열중했다 공자?맹자?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6. 진의황제권진시황제의 통일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은 법가이고 특히 한비자의 사상이 절대적이었다. 통일 후 법가 주의자를 중용하여 황제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법가사상의 주요내용은①군주권의 절대화 주장-황제권은 하늘로부터 위임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제약할수 없다.1.통일 정책의 기본방향: 법가주의를 기반으로 한 중앙집권적 황제지배체제의 완성2.황제존호의 제정(1)황제란 존호를 제정하고 자신을 시황제라 칭함(2)군주 전용어인 짐 제 소등을 제정3.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1)중앙에 3공9어의 행정조직 구축(2)지방조직으로 군현제를 채택①전국시대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잇던 군현제를 전국으로 확대②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그아래 현을 설치하고 부수 현령중앙에서 파견하여 통치 하였다.③지방관의 임명권은 황제가 장악(3)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조직 구축으로 황제의 명령이 법령으로 지방 말단까지 시달(4)만리장성의 구축1) 통일후 장군 몽염을 시켜 흉노를 북으로 몰아 내고 전국시대의 장성을 개축 연결하여 만리장성구축하였다. (6700Km로 1만 5천리)2) 만리장성은 이후 역대 왕조가 북방 민족의 남침을 저지하는 보루(6)아방궁과 여산릉 건설: 신제국과 황제의 위엄을 과시할 목적으로 건립(7)사민정책-구귀족세력과 부호 12만호를 군이나 함양으로 이주시켜 세력 약화(8)경제적 통일: 도량형 화폐 차궤통일(9)문자통일-이사의 건의로 각국의 문자를 폐지하고 진이 사용하던 소예체를 전국에 통용(10)분서갱유 정책☞ 진(秦)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중국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이룩한 진의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승상 이사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의 대공사를 감독토록 하였다. 시황제는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하였고, 아방궁의 건설과 여산릉의 공사 등으로 3백만명의 무상 노동 동원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과중한 조세 부담과, 가혹한 법과 형벌로 온 천하는 마치 감옥과 같았다.7. 통치이데올로기로써의 유교와 정절1.새로운 통치 이념의 필요성1)당시 사회에 황로사상이 팽배하여 사회기풍이 무기력2)수공업과 상업의 발달로 인해 사치와 방종이 유행3)방대한 관료계층의 형성은 새로운 정치 이념을 요구4)백성을 교화하는 사회 지도 이념으로서 새로운 사상이 필요5)한의 통치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역설해 줄 새로운 사상이 필요2.유학이 관학으로 채택 된 이유?①주대의 전통문화와 사상을 계승하고 삼강오륜에 의해 존비고하의 차등적 사회질서를 윤리적으로 지지②군주를 정점으로한 사회 질서를 옹호하고 충효를역설하여 군주를 천명을 받은 통치자로 부각시킴3.유학의 확산과 유교사회의 기틀 형성①건원 5년 장안에 오경박사를 두고 유학을 전문으로 교육- 교육생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낭중으로 발탁하였다.②B.C124년 오경박사 아래에 50명의 관거 학생을 배치하여 국립대학격인 태학을 설립③태학의 우수한 자를 관료로 기용하였기 때문에 유학교육을 받은 관료가 점점 많아짐 -유가 출신 관료들이 법가 출신 관료들을 대체하기 시작④한 황실에서 유교의 의식과 관습을 사용하고 사회적으로 유학의 윤리. 도덕 관습이 사회에 침투 확산 되었다.⑤전한말 내지 오아망시대에는 위로는 유교정치가 실시되고 아래로는 유학의 도덕이 사회의 공덕으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1. 1) 블루머의 상징적 상호작용의 이론적 가정을 알아보고 상호작용이 발생하 는 구체적 상황을 설정하여 설명하며 그 적합성을 논의해 보아라.블루머의 견해는 인간이 타인의 행위에 단순히 반작용한다기보다는 타인의 행위를 해석하며 규정하는 등 행위에 따르는 의미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은 다른 사람의 의미를 해석하고 상황을 정의하고 그에 따라 대응할 줄 아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아를 가진 유기체로 강조되고 있다.블루머는 사회를 상호작용을 통해서 사회적 상황을 끊임없이 재 정의하는 작품이라고 보았다. 블루머에 의하면 행위자로서 인간은 그가 행위를 지향하는 사물 또는 대상을 스스로에게 지적해 준다. 이 때 지적하는 일 그 자체는 행위자 스스로가 자신 속에서 자신과 상호작용 하는 내재화된 사회과정이라는 것이다.블루머의 가정은 인간은 사물이 갖는 의미에 기초하여 사물을 향해 행동한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사회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이며, 이러한 의미는 각 개인이 접하는 신호를 다루는데 있어서 각 개인이 사용하는 해석절차에 따라 수정되고 조정된다는 것이다.인간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사회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블루머에게 있어 사회란 개인들이 서로 행동을 꿰어 맞추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과정 그 자체로 해석된다.사고능력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블루머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둘로 구분하고 있는데, 첫째로 비상징적 상호작용은 사고를 포함하지 않고, 두 번째의 상징적 상호작용은 정신적 사고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인간의 집단생활 혹은 조직생활은 전술한 대로 규정과정을 통해 자기행위를 타인에게 맞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블루머는 여기서 공동행위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의사와 환자 >의사가 질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각 환자 개개인의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하여 가장 생산적이고 만족스러운 건강상태를 이루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할 때 치료행위자의 역할과 기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하겠다.상호작용은 인간 상호간에 일어나는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인 교통과 접촉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의사와 환자의 연계에 있어서 한가지 중요한 관점은 상호작용을 다룬다는 점이다. 전문직업인으로서 의사는 환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환자의 성장 발달, 자아실현을 돕고 당면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상황에 대한 보다 나은 적응을 촉진하게 된다.치료하는 행위를 아픈 환자를 도와주려는 평범한 목표를 가진 둘 이상의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포함하는 상호관계로 보아 치료적인 인간관계과정이다. 치료적인 인간관계는 의사와 치료대상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환자로 하여금 실존적 경험, 자아탐색, 문제 해결 및 자아 실현을 이루도록 도움으로서 신속하게 회복되도록 돕는 과정이며 이런 대인관계과정은 환자와 의사 모두를 성숙시키는 힘임과 동시에 교육적인 수단이 된다.상징적 상호작용은 사회단위로서의 의사와 환자가 자신의 상황을 각자 규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의사란 직업에 대해 사회가 부여하고 있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이 잘 유지되어야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원만해진다. 의사에 대한 기대가 달라지면 사회적 관계도 변화한다. 의사의 지위는 의사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상을 잘 유지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위해서 서로 신뢰하는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이 기본이다.2.2) 리오타르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탈현대적 입장을 언어놀이와 미소설화개념 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그 적합성을 판단해 보아라.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로써 기존의 궁극적인 근원과 틀에 박혀 교과서처럼 내려져 오던 기존의 지식과 문화들을 거부하고, 즉 이러한 하나의 거대설화라고 부를 수 있는 기존의 지식과 문화체계를 거부하고, 각 영역마다 대입할 수 있는 지식과 문화는 천차만별이라는 일종의 미소설화를 강조하고 중요시했다.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이란 19세기 말부터 과학, 문학, 예술의 게임 규칙에 영향을 준 변형이후의 문화상황 , 의식상태 혹은 삶의 형식 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던적 사회는 바로 이런 상태, 상황, 형식이 지배하는 사회, 이질성과 다양성이 강조되고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 영웅이 사라지고 구체적인 나와 너 가 모두 존중되는 사회, 국가 기관의 통제력이 감소되고 개별적인 시민 단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회이다. 이를 좀 더 쉽게 표현하면, 포스트모던적 사회는 헤겔의 변증법, 하이데거 의미의 해석학, 계몽주의적인 사유, 노동하는 주체의 해방, 자본주의적인 부의 축척과 같은 거대이야기 가 효력을 상실한 사회이다.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 지식의 위상을 검토하기 위해 리오타르는 언어 게임 이론, 언어의 화용론을 토대로 사회를 유기적 전체로 파악하는 파슨스적 기능주의, 계급투쟁의 원리에 따라 사회를 양분된 것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론을 모던적 사회 유대 이론으로 간주하고 거부한다. 리오타르의 포스트 모던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의 유대는 상이한 담론의 주체가 수행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상호 투기적인 언어 활동 혹은 언어 게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사회적 유대에 관한 물음은 하나의 언어 게임, 즉 질문하는 자, 질문을 받는 자, 그리고 사회적 유대라는 질문의 대상을 즉각적으로 위치시키는 질문의 게임이며, 따라서 이 질문의 게임에 의해서 사회적 유대는 이미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포스트모던적 지식은 참과 거짓에 관계되는 지시적 진술들뿐만 아니라, 효율성, 정의, 아름다움에 관계되는 기술적·규정적·미학적 진술들을 적합하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 사회에서의 지식은 단지 과학적 지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행할 줄 앎, 생활할 줄 앎, 경청할 줄 앎 등을 망라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리오타르는 이런 지식을 과학적 지식과 이야기적 지식으로 세분한다. 전자는 지시적 언어 게임만을 수행하면서 다른 언어게임을 배제하며, 포스트모던적 사회유대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지식과 사회 혹은 지식과 과학적 기관간의 관계문제를 노출시킨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은 항상 검증과 반증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며, 이 지식의 수용은 전문가 집단의 담론 규칙에 따른다. 또한 과학적 게임은 기억과 기획이라는 통시적 시간성을 함축한다. 그 반면에 이야기적 지식은 이야기에 의해 사회의 기준과 다름아닌 능력의 기준을 규정하며 사회에서 행해지는 수행성들을 평가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양한 언어 게임을 허용한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화용론적 규칙 집단이 전달된다. 다시 말해 이야기는 이야기를 하는 자, 이것을 듣는 자 그리고 이야기의 대상을 동시에 규정하며, 그 이야기는 항상 현재의 형태로 존재한다. 더 나아가 이야기적 지식은 검증이나 반증의 대상이 아니며, 그것은 문화 속에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리오타르는 이렇게 이야기적 지식을 과학적 지식과 구별하고, 이야기적 지식을 원시적·비발전적·야만적 지식으로 간주하면서 이것을 계몽, 발전시키려는 서구의 태도를 문화적 제국주의라고 혹평한다. 그에 따르면, 이야기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사이에는 언어 게임이 그렇듯이 불가공약성이 현존하며, 따라서 어떤 것의 관점에서 다른 것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화 버드(BIRD) 를 감상하고........찰리파커미국의 재즈 알토색소폰 연주자, 작곡가.국적 : 미국활동분야 : 예술출생지 : 미국 캔자스시티주요작품 : 《나우 더 타임》《빌리즈 바운스》( 네이버 인물백과사전 에서 발췌)재즈의 역사 수업시간 2회에 걸쳐서 감상한 영화 버드 는, 재즈 역사상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가장 저명했다는 평가를 받는 재즈 연주자 중 한 명인, 찰스 크리스토퍼 파커 주니어(이하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먼저 영화가 시작되면서 소개되는 여러 사람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두 이름,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포레스트 휘태커의 이름을 보면서, 재즈와 찰리 파커 그리고 예술을 주제로 한 영화라는 세 가지의 부분 중 어느 하나와도 일치될 것 같지 않는 그 두 영화인들이 만들어내는 재즈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였다.영화 제목 버드는 찰리 파커의 별명이자 애칭이다. 말 그대로 한 마리 새처럼 날고 싶어했던, 자신의 꿈에 날개를 달고 마음껏 펼치고 싶어했던 이 연주자는 아쉽게도 3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 버드는 찰리 파커의 음악사적인 일대기를 그렸다기보다는 오히려 찰리 파커가 살면서 겪었던 암울한 사생활들 즉, 괴로움, 고통 그리고 번뇌와 허무에 대해서 냉정하게 그려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찰리 파커의 생애 중 요절하기 3~4년 전 동안의 말기 인생을 중점으로 하여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찰리 파커의 모습은 실로 비참하기 짝이 없다. 재즈를 빼면 그의 삶엔 오로지 마약과 술 밖에 없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약물에 중독이 되어 있었고, 난잡한 섹스를 즐기는 성편력의 소유자로써, 딸이 폐렴으로 죽었을 때 요오드를 마시면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는 등 찰리 파커의 삶에서 가장 우울했던 부분들을 담아 내고 있다.영화 내용 자체가 찰리 파커라는 재즈 연주자의 음악적 코드와 그의 음악 성향에 대한 주제가 아닌, 찰리 파커의 전반적이 삶의 모습에 대한 고찰의 성격을 지닌 만큼, 음악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초반에 느닷없이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장면에서 영화의 스토리전개와 함께 찰리 파커의 인생역정에 대한 밑그림을 어느 정도 예견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어느 정도 음악적으로 재능을 인정받고 촉망받고 있으면서도, 약물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 점차 성격적으로 나약함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이렇게 자살 시도라는 무책임한 행동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결과라는 것을 과거의 그의 모습을 나타내 주는 후반부의 장면들에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지막 장면에 나온, 찰리 파커가 죽고 나서 시신을 훑어 본 한 검시관 같은 이의 말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34세의 남자를 65세로 착각할 정도로 찰리 파커의 몸은 이미 상당히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빈민 흑인사회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또래의 동년배들이 그러하였듯 어렸을 때 자연스레 그리고 멋모르고 마약에 손을 댔다고는 하나, 그가 음악에 있어서 눈을 뜨고 여기저기서 여럿 칭송을 받아왔을 때에도 끊임없이 약에 심취하고 의존했다 것은, 그리고 그것이 그를 요절케 만들었다는 것이 솔직히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다는 생각도 들었다.물론, 나는 음악을 하는 음악가도 아니고, 음악이라는 장르 근처에서 고뇌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청중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음악에 한계를 느낀다거나 그것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으니 이해해달라 혹은 잠자코나 있어라라고 한다면 솔직히 할 말이 많지는 않다. 우리나라도 가수들이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언론의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그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변명과 같은 말들이 바로 자신만의 음악성에 대한 한계와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 등등의 것 때문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들에게 할 말은 많지 않지만, 딱 한 가지만큼은 이야기 해주고 싶은 의견이 있다. 한 음악가가 환각 상태 즉, 약을 기운을 빌어서 자신도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의 음악성을 끌어낸다 한들 그것이 진정 뛰어나고 놀랄만한 것이라고 칭송 받는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정 그가 창조한 그만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찰리 파커의 천재성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순간순간의 고뇌와 스트레스에 너무 쉽게 패배하고 말았던 그리고 극복의 수단으로써 최악의 방법을 선택하여 생명을 스스로 단축한 찰리 파커의 의지력부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할만한 천재 음악가의 요절에 대한 개인적인 진한 아쉬움의 쓴 소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찰리 파커는 영화 도중 한 동료 연주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마저 약을 할 줄은 몰랐다. 찰리 파커처럼 되고 싶어서 약을 한다면 상당히 잘못된 것이다. 약을 한다고 음악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제발 약을 하지 말아라. 사실 약이 나를 점점 더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식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하는 어조와 함께 동료 신출 연주자를 걱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의 대사를 진정 생전의 찰리 파커가 했다면, 그 역시 스스로 상당히 후회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잠시 찰리 파커의 음악적인 업적과 그의 음악성에 대한 찬사에 대하여 몇몇 알아보겠다. 1920년 생인 찰리 파커는 1939년에 캔자스를 떠나 뉴욕으로 가서, 향후 1년 동안 '먼로스 업타운 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했다. 보다 안정적인 계약을 맺고 본격 뉴욕 생활에 들어간 1941년에 파커는 다시 캔자스의 밴드에 입단했다. 여기서 그는 디지 길레스피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소편성 그룹을 결성, 함께 호흡하는 긴밀한 사이로 발전한다. 찰리 파커는 똑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그의 변주는 매번 달랐다. 그는 인용하는 선율을 공연 때마다 번번이 바꾸었다. 또한 기존의 화성 구조와 즉흥 연주 방식에서 탈피한 찰리 파커의 솔로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몹시 변칙적이고 공격적인 소리로 들렸다. 이것을 두고 당시의 사람들이 찰리 파커의 음악성에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찰리 파커는 깊이 상처받았다. 그는 자기의 옛 악습에 훨씬 깊숙이, 거의 자기 파괴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1946년, 병원에서 장기간의 투병 생활을 치른 그는 일류급 재즈 뮤지션들의 세션 그룹 'JATP'와 한차례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참으로 의미 깊었던 것은 다이얼(Dial), 사보이(Savoy) 음반사에서 만든 소편성 캄보 음반들이었다. 그 일련의 음반들은 비밥이란 새 음악에 대해 무분별하게 가했던 편파적 판정을 번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결정타였다는 점에서 이전에 길레스피와 함께 활동했던 그룹보다 더 공로가 컸다. 그 이후 건강의 악화로 지지부진하다가 1952년 클레프 사가 주선한 빅 밴드 취입에서 솔로를 담당했을 때, 왕년의 찰리 파커가 부활하는 듯했다. 당시 'Just Friends' 에서는 현악 반주가 시도되기도 했다. 당시 찰리 파커 최고의 작품은 재즈 쿼텟과 퀸텟으로 만든 작품들이었다. 1953년 그와 길레스피, 파웰, 로치 그리고 찰스 밍거스 등 대가들로만 이루어진 세션 그룹 'Quintet of the Year' 이 발표한 작품이 그것이다. 그 앨범은 파커 최고의 명반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안간힘으로 그 같은 걸작을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1940년대 후반의 재즈 발달사에서 찰리 파커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실로 무의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생이 짧았음과 함께 약에 너무 심취한 찰리 파커의 모습이 더더욱 아쉽게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