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과 서술자에 대한 고찰 후 채만식의 다시 바라보기1.시점과 서술자에 대한 고찰- 소설에서 화자 분석의 태동이야기가 있는 여러 서사체들 가운데 그 중심이 되는 소설에는 다른 것들과 구분이 되는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이야기를 해주는 주체, 즉 화자의 존재이다. 같은 이야기를 누가 해 주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성질이나 재미 등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염두해 둘 때, 이 화자의 존재 문제는 소설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을 바라볼 때 이 화자 문제를 거론하여 분석함에 있어서 제일 처음 논의해야 할 것은 화자가 어느 시점에 있느냐는 것이다. 화자가 ‘어디서 사건을 보고 이야기하는가?’하는 문제에 따라 소설이 주는 효과가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의 돈을 빼앗고 사는 양아치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이야기를 하는 화자가 ‘당하는 쪽’일 경우와 ‘가하는 쪽’일 경우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관점을 주지해야 할지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일반적 윤리 잣대로 어느 쪽을 보아도 나쁘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하는 쪽’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 부조리와의 연계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면 독자들은 단순히 그를 비판만 할 수 없고 일종의 연민을 통해 ‘가해자’가 아닌 ‘사회’를 탓하게 될 것이다. 단편적인 예일 뿐이었지만 이렇게 화자의 위치에 의해 소설이 독자에게 미치는 의의의 차이가 큼을 알아보았다. 그렇기에 소설을 분석함에 있어서 화자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화자에 대한 분석은 18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시점’이라는 구조 속에서 많은 연구가 되어 왔다. 이것을 ‘브룩스’와 ‘워렌’이 현재의 ‘4시점 체계’로 정립시켰다.하지만 현대 소설의 경우 이런 시점이 혼용되는 것이 보통이고, 또 그로인해 인물과 서술자, 인물과 독자, 서술자와 독자 간의 거리도 혼용되고 있어 하나의 시점으로 소설을 규정짓기에 무리가 따른다.- 시점 분석의 한계의 발생(ㄱ) 석방 포로 이명준(李明俊)은, 오른편의 곧장 갑판으로 통한는 점 등등, 이곳 저곳 숱하게 주워먹은 것은 짐작이 가지만 그의 경력을 똑똑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중략 -그의 장기(長技)는 투전이 일수며, 싸움 잘하고, 트집 잘 잡고 칼부림 잘하고, 색시에게 덤벼들기 잘하는 것이라 한다.(b) 발을 굴렀다. 부르짖었다. 학대받는 인종의 고통을 호소하며 울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의 일로 지주에게 반항하여 제 밥자리까지 떼우기를 꺼림인지, 용감히 앞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여는 의사라는 여의 직업상 송 첨지의 시체를 검시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는 '삵'을 만났다. 키가 작은 '삵'을 여는 내려다 보았다. '삵'은 여를 쳐다보았다."가련한 인생아. 인종의 거머리야, 가치 없는 인생아. 밥버러지야. 기생충아!"여는 '삵'에세 말하였다."송 첨지가 죽은 줄 아나?"여의 말에 아직껏 여를 쳐다보고 있던 '삵'의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여가 발을 떼려는 순간에 얼핏 '삵'의 얼굴에 나타난 비창한 표정을 여는 넘길 수가 없었다.고향을 떠난 만 리 밖에서 학대받는 인종의 가엾음을 생각하고 그 밤은 여도 잠을 못 이루었다. 그 억분함을 호소할 곳도 못가진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고, 여도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김동인의 이다. 이 소설은 ‘나(여)’가 만주를 여행할 때 겪었던 일을 회상하여 적은 액자식 구성의 회상체 소설이다. ‘나(여)’의 관점으로 주동 인물 ‘익호(삵)’을 서술한다는 것으로 브룩스와 워렌의 4시점에 따라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b)에서 보듯이 관찰자에 불과한 화자의 전지적 서술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회상체 소설이기에 가능한 것인데 역시 4시점 체계의 분류로 설명하기 힘들다.-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는 개념의 등장브룩스와 워렌의 분류로 인해 나타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 번째 ≪광장≫에서 보이는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 가운데 시점이 등장인물 내부에 나타나는 경우와 두 번째 에서는 1인칭 시점이면서도 회상체라는 특성 때문에 나타나는 이야기에 대한 전지적 권른 인물, 독자의관계에 따라신빙성 있는 화자/신빙성 없는 화자이를 통해 살펴보면 ‘나’는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극화된 화자’이고, 소설의 첫 부분에서 나타나듯이 자기가 서술하는 입장임을 밝히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의식적 화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관찰자적 입장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외부에서 본 ‘삵’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잇을 뿐이기에 ‘제한적 화자’이며, ‘삵’과 관련된 일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듣기만 하여 오해하고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나’는 처음에는 ‘신빙성이 부족한 화자’였다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어 서술해 ‘신빙성 있는 화자’로 바뀐다.)이제부터는 앞에 서술한 시점과 서술자의 분석으로 채만식의 소설 을 알아보고 시점과 서술자를 통해 일어나는 아이러니에 대해 살펴보겠다.2. 다시 바라보기1> 시점과 서술자 분석- 일반적인 시점으로 분석은 소설 속에 ‘나’로 나타나는 1인칭 서술자로 주동 인물 ‘아저씨’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갖추고 있다. 친일적이며 반 사회주의적인 서술자 ‘나’는 현재의 상황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등으로 쓸데없이 나라에 대항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아저씨’를 맹렬히 비판한다. ‘나’는 일본인 주인의 말을 믿어 사회주의를 나라에서 당연히 못하게 할 만한 나쁜 것으로 믿고 있으며, 조선여자들은 문명을 깨치지 못한 무지한으로 판단하는 등 조선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1인칭 관찰자로의 권한이 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마치 ‘나’가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나타나 전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姑母夫) 그 양반…….뭐, 말도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내 원!신세 간데없지요.자, 십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앞에까지 작중인물 화자의 내적 초점화에 의해서만 서술되어 오던 사건의 모습이 3인칭의 눈으로 더 크게 보여지고 있어 초점대상인 ‘아저씨’가 독자와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독자들은 화자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바라볼 수 있으며, 반대로 화자에 대해서도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한계점에 대한 즈네트의 초점과 화자 분류법, 웨인 부스 분류방식을 통한 분석단순히 을 읽으면 화자‘나’로 인해 서술 대상‘아저씨’에 대해 전달해주고 있는 형식이라 우리는 단순히 말하고 있는 대상을 보고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파악하기 쉽다. 하지만 앞의 두 경우에서 살펴보았듯이 1인칭이긴 하지만 대상을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이 말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화자가 마치 외부에서 인물들을 서술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누가 말하느냐’하는 시점의 개념으로 한계가 나타났으니 앞에 다루었던 즈네트와, 웨인 부스의 개념을 가져와 의 시점과 서술자를 다시 분석해 보자.‘누가 보느냐’하는 초점화 관점으로 보았을 때 에는 두 가지 초점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화자 ‘나’의 눈이 그것이고,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는 3인칭적 눈이 그것이다. 따라서 ‘내적 초점화’와 ‘외적 초점화’라는 두 가지 관점이 소설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에 의해 전지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다분히 주관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관점이라 ‘비초점화(전지적 작가시점, 혹은 회상적 시점)’의 권위를 줄 수 없다. 화자 분류법에 따르면 화자‘나’는 이야기 속에 있는 작중 인물 내적 초점화자이기 때문에 ‘동종 화자’로, 서술의 수준은 자기의 편협된 생각으로 이야기 범위 내에서 서술하고 있기에 ‘이야기 내적 화자’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나’는 ‘동종, 이야기 내적화자’인 것이다. 웨인 부스의 화자 분류로 다시 살펴보면, 작중 화자‘나’는 이야기에 참여하기에 ‘극화된 화자’이며, 작가의 위치로 사건을동시적 관망이 어렵다. 독자가 그 하나의 시점으로 밖에 소설을 바라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적 초점화자를 통해 서술되고 있는 의 전반부에서도 독자들은 작중인물-초점화자인 ‘나’의 시선의 범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나’에 의해 정보가 한정됨으로써, 대상을 독자와 거리를 가깝게 하여 독자의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외적 초점화자’에 비해 고립적이다.) 그래서 독자는 초점 대상과의 거리가 먼 시점에서 한정되고 편협적인 정보만 제공해주는 화자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에서 취하는 이러한 방식은 외적 초점화자가 초점화 대상을 직접 제시하는 것보다, 내적 초점화자 신뢰성을 잃게 만들어 자신이 역으로 초점화되어 비판받는 효과를 노리는데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어 작가는 전략적으로 이런 담론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서 ‘내적 초점’을 가진 ‘동종, 이야기 내적화자’이며 ‘신빙성 없는 화자’로서의 서술자의 역할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빙성 없는 화자의 의의신빙성 없는 화자로 독자들이 인식하여야지만 본래 채만식의 의도대로 독자들이 읽게 되는데, 이렇게 에서 중요한 개념을 차지하는 ‘신빙성 없는 화자’는 그저 극화되어 있고 제한적 관점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 외에 '초점화와 화자의 성격'을 통해 강화되어 만들어진다. 먼저 작가는 앞서 언급했듯이 ‘내적초점, 동종 이야기 내적화자’를 통해 관점의 한계를 보여줌으로써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비판 받을 수 있는 화자의 성격을 통해 독자들이 더욱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작가가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인식시킨 화자의 성격으로는 1)친일적, 2)반사회주의적, 3)무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자세하게 살펴보자.1)친일내 이상과 계획은 이렇거든요.우리집 다이쇼가 나를 자별히 귀애하고 신용를 하니까 인제 한 십 년만 더 있으면 한밑천 들여서 따로 장사를 시켜 줄 그런 눈치거든요.그러거들랑 그것을 언덕삼아 가지고 나는 삼십 년 동안 예순 살 환갑까지만 장사를 해서 꼭 십만 원을 모을 작정이지요. 십만.
정조의 개혁에 대한 일고찰(一考察)Ⅰ. 서론조선왕조 5백여 년 간 제 27대에 걸친 제왕들 가운데 조선시대 전?후기를 통해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업적을 남긴 군주를 꼽으라면 우리는 제 22대 정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정조(正租, 이름은 이 산(李 ?), 1752-1800)는 18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1777-1800)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강화와 왕조의 중흥에 진력하여 그 한 획을 그은 왕이었다. 그는 즉위하면서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폄” 과 “유학을 숭상하고 도학을 중히 함”을 2대 시정지침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문치에 주력하여 여러 가지 문화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를 위한 핵심기관으로서 규장각을 설립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이처럼 보수적인 정조의 시정지침 이면에서는 당시 해체되어가고 있었던 조선왕조의 명분과 질서를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개혁을 통하여 바로 잡음으로써 체제를 강화?유지시켜 보려는 통치자로서의 이해관심이 은밀하고도 유연하게 관철되고 있었다.즉, 그는 우문정치를 표방하면서 탕평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남인과 소론도 일정하게 정권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놓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는 당시 가장 강고한 정치세력이었던 노론벽파의 전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써 강력한 일원적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시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피폐해진 민생의 안정과 문화의 창달을 기해보고자 하는 자신의 통치구상을 조심스럽게 구체화시켜 나갔던 것이다.그러면 지금부터 이러한 정조의 통치?개혁구상을 조건지우고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측면으로 각각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Ⅱ. 개혁의 시대적 배경1. 경제적 배경)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던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크게 황폐화되었으나, 17-8세기에 걸친 복구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정조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면 이미 경제적 조건에 있어서 현저한 변화와 많은 발전을 이루대적 위기상황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세계관의 결함과 오류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불완전한 또는 잘못된 적용에서 연유하였다는 인식틀 속에서 종래의 권위가 실추된 정통성리학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한층 더 교조적으로 강화시키는 가운데, 기존의 국가?지배체제를 부분적으로 개량하는 선에서 현실의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세력은 집권계열로서, 이들은 주희를 오류가 없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념적으로 정주의 성리학을 절대시하는 동시에, 주자도통주의의 기치 하에 정주성리학 이외의 여하한 학설이나 학문도 모조리 사문에 대한 이단사설로 규정하여 단호히 배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절정은 ‘존화대의’를 표방한 승명벌청의 북벌론으로 나타났다.또한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모순에 따른 체제변혁의 압력에 대해서도 이들은 주희의 토지론을 긍정하여 지주제를 기반으로 한 구래 농업체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제도개선(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과 강상윤리?명분론에 입각한 사회통제장치의 강화(향약, 호패법, 오가작통법의 실시)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수습책은 일단 표면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러한 기반 위에서 정착되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조선사회의 변화에 전진적으로 부응하는 시의적절하고 본격적인 제도개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시대적 부조화와 모순을 온존?심화시키는 계기로 전락함으로써 결국은 조선사회가 나름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자생적인 발전적 계기들마저 완전히 소진시키고 말았던 것이다.다른 하나의 방향은 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위기상황을 목도?체험하는 과정을 통하여 정통성리학의 세계관과 통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비판적 감수성을 발전시켜 나갔던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세력은 과 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바, 이들은 정통성리학의 협애한 인식틀을 벗어나 유교일반, 나아가서개혁적 입장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기득권층, 다시 말하면 대토지소유와 특권상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었던 노론세력과의 갈등을 함축?예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그의 개혁이념의 성격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재야 및 하층세력과의 제휴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노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2.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개혁 모습(1) 탕평책(蕩平策)사도 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하였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 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이 중용되었다.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이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또한 규장각을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하였다. 한편,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업과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 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다. 정조는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실시된 후 정조가 죽을 때까지 10차례 실시되었고 총 138인이 배출되었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도를 통하여 뛰어난 인재들을 국왕친위세력으로 포섭하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제도를 시행하였고 이것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탕평지지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한편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의 정책방향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사회가 어지럽고 붕당의 폐해가 심한 것은 정학(正學:주자성리학)이 바로 서지 않아 사대부들이 타락한 것이 원인이라면서 정학의 기풍을 바로 세우겠다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의지가 구현된 것이 바로 초계문신제도로 정조는 이 제도를 통하여 탕평지지세력을 넓힘은 물론이요, 자신의 개혁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이면에는 규장각 설립과 마찬가지로, 정조의 통치구상과 개혁이념의 실천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은밀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정조는 노론벽파의 전횡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강력한 일원적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동시에 급진적 개혁정치를 시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발판의 핵심은 장차 자신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할 친위적 학자군과 실무진의 양성으로 요약된다.)(4) 장용영장용영은 정조가 왕권강화를 위하여 창설한 국왕친위부대로 정조의 정책의 반대하는무리의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한 탕평책의 군사적 기반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변란을 염두하여 창설되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장용영이었기에 장용영창설에 거센 반대가 뒤따랐었다. 반대파(노론벽파)에서 내건 명분은 비용의 문제로 과거 5군영이 창설 될 때 하나의 군영이 늘어날 때마다 백성들의 부담이 커졌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미 5군영이 물 셀 틈없이 방비하고 있는데 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키옵니까"하며 장용영창설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반대파의 주장을 역이용하여 5군영을 축소시키고 남은 비용으로 장용영을 창설하였다. 이 결과로 벽파의 군사적인 기반인 5군영이 약화되었고 국왕친위기구인 장용이 창설됨으로써 호란 후 1세기 반에 걸쳐 내부 결속력을 다지며 정체성 확립에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존의식에 안주하다가는 낙후될 염려가 있다는 집권층 내부의 젊은이들의 반성 위에 제기된 신문명 도입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조(父祖)들이 신봉하던 북벌론을 폐기처분하고 정반대의 논리인 북학론을 제기함으로써 조선사회의 변화를 예고했다.북학론은 박지원의 서얼출신 제자들이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와 서이수(徐理修)등 사검서(四檢書: 네 사람의 검사관)에 의하여 규장각에 수용되기에 이른다. 검서관이란 규장각의 도서 출판 업무의 실무직으로, 정조가 서얼이라는 이들의 신분적 한계성을 고려, 특채하기 위하여 신설한 관직이었다. 정조는 조선 사회의 기존의 가치는 체(體)로써 지키되, 변화에 조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학문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북학을 용(用)으로써 규장각에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아울러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인 서얼통청(庶孼通淸)운동이라는 사회적 요청에도 부응해야했다.외래 문화 수용 논리인 북학사상은 기존 조선중화사상의 시대적 한계에 대한 보완 논리로써 18세기 후반 정조의 규장각을 통하여 체제 내에 수용되었다. 이 북학사상은 19세기의 시대사상으로 기능하면서 중인계층에 확산되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그 수용 통로를 중국에서 일본 및 서양으로 바꾸면서 개화사상으로 변화해 갔다. 그 결과 청나라 대중문화의 범란으로 인한 조선사회의 세속화 현상을 초래했고 진경문화를 해체하는 역작용도 함께 함께 했다.(2)서얼허통정책2세기에 걸쳐 진행된 서얼의 사회적 진출 억제는 영조가 왕위에 올라 탕평책을 표방하면서 사회 문제로 부상했다. 탕평책이 사회 모든 구성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기회균등주의였으므로 서얼들도 이에 편승한 신분상승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더구나 영조가 왕실의 서얼출신이었기에 이들에 대한 영조의 각별한 동정심이 바탕에 깔렸던 것이다.정조는 영조의 뜻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서얼허통을 위한 절목(節目)을 만들
淸朝前中期 經濟에 대한 考察Ⅰ들어가기(序論)청초는 명말청초의 민란)을 거쳐 심각하게 파괴된 중국을 정복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수 만주족으로서 다수의 한인을 지배하기 위해 강경책과 회유책을 고루 쓰면서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기 위한 청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정책 중 당시 중국의 황폐화된 경제 상태를 복구하기 위해 실시했던 경제 정책과 그 효과와 변화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청조는 피폐된 농촌과 불안한 민심을 살리기 위해 조세 경감 및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효과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하였고 재정의 안정화를 위해 농업기술 혁신, 시비법 개발, 황무지 개간사업, 수리시설?둑 정비 등 농촌 경제 발전 및 자영농 육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농업의 발달로 인해 생산성의 향상, 다양화가 이루어졌고 수리시설 건설과 재건설과 맞물려 잉여 생산물을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였고 급격한 인구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의 발달이 청조의 자각 부족으로 인한 미온적 대응으로 인해 주변국과 서양과의 교류 통한 사회문화적 번창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이제부터 청조의 경제 생활부분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겠다.Ⅱ펼치기(本論)1. 징세법개혁명말청초의 동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던 농민들은 대거 몰락하여 이농(離農)했고, 많은 지주들도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정치권력의 공백기와 사회 혼란을 틈타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농민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한 신사(紳士)들도 있었다. 청조는 이와 같이 해이해진 경제질서를 회복하고 국가재정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몇 가지 일련의 세제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즉, 신사에 대한 요역과 부세에 대한 면제혜택을 전면 해제했고 일조편법을 실시했으며 관리들의 부패를 근절하고 모선귀공(耗羨歸公))의 개혁을 단행하여 양렴은(養廉銀))을 책정하였다.1)부세등록제 실시명대의 관료와 향신지주(鄕紳地主)들은 전부(田賦))와 요역)을 면제받는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폐였다. 은괴는 정부에 대한 조세납부뿐만 아니라 고액의 봉급지불과 보통 도매상거래에서 통용되었기 때문에 은가의 변동은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동전은 소매상거래나 노동자의 일당지급에 주로 사용되었던 화폐였다.)청조는 은과 동전의 교환율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은은 은괴의 형태로 유통되었으며 중량과 순도에 따라 평가되었는데 이러한 평가기준은 지역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일지역 안에서도 서로 달랐다. 즉 시장 환율은 유통상황에 따라 매일 변동되었다. 은괴와 동전의 시장환율 변동은 물가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통화남발을 유발했다.또한 청조의 공식환율과 시장환율 사이의 현격한 차이는 군인과 농민들의 고통을 유발했고 사회적 혼란이나 폭동까지 유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조는 은과 동전의 환율변동을 최소화하고 시장환율을 공식환율에 가깝게 유지하려 노력하였다.은괴나 동전의 환율을 고정시키고 동전의 통화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동전을 주조해야만 했다. 운송부담 등으로 국가재정상 도움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청 조정이 주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백성들이 소매거래에서 동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안정된 통화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동전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전을 표준화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청초에는 명대의 화폐들을 수거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위조화폐와 질이 떨어지는 화폐를 수거하여 표준화폐로 재주조(再鑄造)하였다.또한 동전과 은괴의 화폐유통을 원활히 하여 두 유통영역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동전의 가치가 높았을 때 새로 주조된 동전을 공공사업의 임금지불에 사용하거나 일부 군인이나 관리의 봉급으로 지급하고, 반면 동전의 가치가 낮았을 때 동전지급을 완전히 중단하기까지 했다.이러한 모든 통화정책들은 상당수의 책임 있는 관리들이 통화변동의 원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화폐의 수요와 공급의 변화와 영향, 은괴와 동전의 상호관계, 그리고 동전의 유통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3. 농업의 발달과 한계1) 경까지 이루어지자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중국의 인구는 10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주 미세하게 증가 했을 뿐 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서는 50년 사이에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 버렸다.) 인구의 증가는 곧 노동력의 증가와 시장의 규모 확대로 이어진다. 이는 다시 농업의 발달로 이어지고 농업의 발달은 다시 인구의 증가와 시장 규모 확대를 불러온다. 이 반복되는 피드백 과정을 통해 중국의 농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발전은 언제나 쇠퇴를 전제로 하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3) 한계에 다다른 성장청조 시대 경작면적의 확대와 농업 기술의 개선은 인구증가 속도와 보조를 겨우 같이 할 뿐이었지 결코 인구증가를 앞서지는 못했다. 인구가 워낙 빠른 속도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작지에 벼만 심어도 식량이 모자랄 판에 농민들은 수익이 따져 뒤늦게 유행하기 시작한 특용작물이 벼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 해댔다. 그 대표적인 작물이 바로 면화였다. 화북의 기후는 면화를 재배하기에 알맞고 화남의 기후는 면직에 알맞았다. 화북과 화남의 수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대신에 면화에 매달렸다.) 그에 따라 식량생산량이 줄었고 굶어서 아우성치는 사람이 생기는 데 반해 여전히 면화의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제지업, 광산업, 상업 등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영국의 산업혁명 초기와 흡사한 현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조 사회는 더 이상 산업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당시 중국의 단위면적당 농업생산성은 세계 최고였었다. 하지만 발전 한계에 다다른 농업생산성은 점점 떨어져 갔다. 그러자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고 자본의 가치가 높아져 갔다. 그런 시대 상황에다 잘 조성되어 있는 운하와 도로라는 사회간접자본이 맞물리자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상업이 발달하자 농민들은 부족한 것을 개량하거나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대신 타 지역에서 수입해서 쓰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공(工)?상(商) 분야에서 그 이전 시대와는 달리 생산력과 기술, 수량에서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명말?청초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연구 결과, 서양의 자본주의 발달에 비해 중국의 자본주의 발달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린다.농민층이 상품작물을 재배하고 수공업에 종사한 것은 상업의 활성화와 자본주의 기본이 되었지만, 이는 토지 미소유와 봉건지주의 착취를 피해 농민층이 자신들의 생활 방법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지주 수탁에 대한 적응의 한 형태로써 소극적이고 봉건 경제체제를 넘어서지 못했다.) 또한 상업 활동으로 얻은 이익을 다른 상업과 더 넓은 무역에 투자하지 않고 토지(土地)와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 원활한 상업 활동을 위해 관직 매수 등에 집중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상공업 활동을 지휘했던 상인집단(商人集團)의 종족성(宗族性)과 폐쇄성(閉鎖性)도 자본주의맹아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상인들에게서 상업 활동 이득을 세금으로 받았던 청 정부는 봉건전제정책(封建專制政策)을 구사(驅使)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에 통제를 가했다. 억상(抑商)?폐관(閉關)?중세(重稅)?파매정책(派買政策) 등을 통하여 상공업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진휼(賑恤)?세역감면(歲役減免)?치수관개정책(治水灌漑政策) 등을 통하여 소농경제를 자연경제구조 속에 안주케 하였다.)명말?청초 자본주의맹아론 연구에 대해서는 근대서양과 현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춰 과거를 소급(遡及)한다는 비난이 있다. 또한 문명을 이룩하고 줄곧 문화 선두에 서 있던 중국이 19세기 말부터 근대화된 서양보다 뒤쳐졌다는 오명(汚名)을 씻기 위해 자본주의 맹아론을 계속 언급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근대서양과 현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지 않더라도 명말?청초 농?공?상에서 그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물품?화폐 유통, 상인 자본가 등장 등은 그 시대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한계점으로 상업화와 전문화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지만 대부분 전호들의 지고 중국은 은이 귀하게 되어 고통 받게 되었다.이러한 대외무역은 광동의 사회경제에 일정한 변화와 발전을 초래하였다.우선 광동에서 수출되는 상품인 차 엽, 생사, 설탕, 과일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 작물이 차, 뽕나무, 사탕수수, 용안(한약재) 등이었고 누에치기도 활발하였다. 또한 생사(生絲), 견직물, 설탕(雪糖), 도자기, 등과 같은 수공업 제품이 다량 수출됨으로써 이러한 제품을 생산?가공하기 위한 수공업도 일정한 발전을 보였다.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물품이 모여들었다. 특히 주요 수출품인 절강의 생사와 견직물, 복건·안휘·절강의 차 엽, 경덕진의 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수입상품도 광주로부터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면화, 아편, 모직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아편을 제외하고는 그 유통지역이 넓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광동의 상품유통이 활발해져서 상업이 번영하게 되었다.)5)광동무역의 결과광동의 상품 유통이 활발해져 상업이 번영한 결과 광동에서의 상품 유통량의 증대는 광동사회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였다.첫째로, 광동인에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광동의 부유함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광동사회의 경제가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부를 축적한 사람이 많다는 의미도 있었다. 결국 이것은 광동 상업이 번영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나 상업의 원천은 아무래도 대외무역(對外貿易)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둘째, 많은 상인계층의 형성을 가능케 하였다. 상품의 유통량이 많아지면 이를 전문적으로 구입하여 판매하는 상인계층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또한 광동은 대외무역이 발전하고 전국 각 지역과의 상품유통도 성황을 이루었다. 따라서 이를 담당하는 상인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보통 ‘광동상인(廣東商人)’이라 불리는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Ⅲ마무리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왕조는 민심을 얻기 위하여 백성의 최대 근심거리인 부역과 조세에 대한 완화책을 실시 할 수밖에 없다. 청조 역시 여기있었다.
사림의 대두와 사화Ⅰ. 사림(士林)의 등장Ⅱ. 사림의 정계 진출Ⅲ. 사림세력의 활동Ⅳ. 사화의 발생과 영향Ⅴ. 마무리Ⅰ. 사림(士林)의 등장1. 사림의 정의‘사림(士林)’이란 용어는 여말 선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무오 ? 갑자 사화를 체험한 후의 중종 때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원래 초기의 사림은 여말선초의 왕조교체와 그에 따른 변동 속에서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몰두하던 성리학자들을 주축으로 하되, 좀 더 폭 넓게는 약간의 성리학적 소양의 바탕 위에 사장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던 유사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처음에는 독서인층 또는 선비의 무리라는 평범한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사림은 그 일부(김종직 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집단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부터 그 개념상에도 변화를 가져와 오늘날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사림파란 뜻을 지닌 역사적 용어로 정착되었다.)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지배하에 신흥사대부가 성장하였듯이 15세기 사림파는 훈구파의 집권 하에 성장하였다. 15세기의 사림파는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지방의 재지사류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어갔다. 그 계보는 여말의 왕조교체기에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사학파와 15세기 중엽 세조의 등극을 불의로 간주하였던 낙향 및 신진사류가 주축이 되었다.이들은 조선 초기 이래 교육활동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함과 아울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대개 여말의 혼란기에 군현사족에서 품관으로 신분상승한 재지중소지주들로서 독특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던 계층으로 그들의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까지 성장해 왔다.2. 사림의 성장 기반사림파 형성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읍 토성(土性)의 존재실태와 토성이족의 사족화과정 및 사족과 이족의 분화, 재지사족의 혼인 등 재지사족의 존재양상이 밝혀져야 한다. 고려 호족이었던 각 읍의 토성은 왕실과의 결탁에 의해 재경관인과 재지세력으로 분화되었다. 중앙에 비해 세 주도의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해 새로운 법제의 마련 새로운 수취체제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지리지의 편찬, 민중의 지배체제에의 흡수를 위한 시혜적 문화사업 등 여러 가지 노력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후 훈구파의 권귀)화(權貴化)와 척신(戚臣)계의 새로운 등장에 따라 그들의 권귀화, 보수화가 심화되면서 훈구파에 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과 비리가 고조되어 가고 있을 때, 향촌에서 중소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가던 사림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되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를 형성하였다.사림파의 언관직 진출에 의한 훈구파의 견제는 홍문관(弘文館)의 언관화와 새로운 언론 관행의 수립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다. 성종 초반부터 사림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중심으로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나, 당시 양사는 정치구조적으로 볼 때 그 위치가 취약하여 사림파 성장의 거점으로 기능하기에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문관에 참외관(參外官) 4원(員)을 두어 홍문관으로 분립되고 그 기능도 점차 문한(文翰)과 고문(顧問)에서 언관화 되어가자 변화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홍문록(弘文錄)의 선발과정을 통해 왕이나 대신들의 자의적인 인사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으므로 사림파의 언관직 진출이 보다 유리해졌다. 따라서 홍문관원은 경연에 나아가 언론을 행사하였고 국왕의 지지하에 언책(言責)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인정되어 언관화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대간의 언사를 규찰할 수 있는 대간 탄핵권을 확보하였고, 홍문관원들이 양사의 언관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대간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언론 3사는 강력한 언사를 행할 수 있었고, 훈구 재상들의 비리를 들추기 시작하면서 이들과 격렬한 마찰을 빚게 되었다. 훈구파 지배하의 사림파 언관을 중심으로 한 구제도의 개혁과 현실개조의 주창은 곧 앞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와의 갈등과 충돌이 전개될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Ⅲ. 사림세력의 활동1. 도학정치의 추구: 언론과 경연활동을 모은 『오경대전』, 성리학에 대한 학설들을 모은 『성리대전』 등의 도입은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성종대 들어 고려말 온건개혁파로 재야에 남았던 세력들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는 영남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초기의 학문적 경향과 전통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김종직을 위시한 신진사류들은 형정(刑政)보다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며 훈척(勳戚)의 비리와 전횡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였다. 이에 성리학이 훈척 중심의 기존 체제를 공격하는 사상적 무기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기존의 학문 풍토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먼저 수기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으므로 주자성리학 수신서(修身書)인 『소학』이 중시되었다.성리학적 사회윤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은 삼강오륜이었다.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관계를 규정한 5륜은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즉 천리(天理)의 사회적 구현이었으며, 3강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신, 부자, 부부의 관계를 상하 주종관계로 강조한 것이었다. 이 3강5륜은 다섯가지 인간관계만을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처와 첩, 적자와 서자, 주인과 노비, 지주와 전호 등 사회이 모든 인간관계에 확대,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성리학이 조선사회의 지배사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같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문물제도의 정비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흥사대부들은 철학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윤리, 의례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으며 『소학』과 『주자가례』등 성리학적 지배이념에 입각한 사회윤리와 유교의례의 시행에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다. 15세기 『소학』교육은 주로 국가의 주도로 법령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져 형식적, 강제적인 측면이 강하여 보급에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고 『주자가례』 역시 사대부층 내에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16세기 들어을 차례로 국문하였다.김종직은 선동자라 하여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 권오복 ? 이 목· 허 반· 권경유 등은 선왕을 무록한 죄를 씌워 사형에 처하고, 정여창· 강겸· 이수공· 정승조 ? 홍 한 · 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 이종준· 이 주· 박한주· 임희재 ? 강백진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한편 이극돈 ·유순 · 윤효손 · 어세겸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하였다.1-3 영 향무오사화를 주도한 훈구대신들은 사건처리 후에 경제적 보상은 물론 정치적 실권까지 잡았다. 성장일로에 있던 사림파가 이처럼 쉽사리 무너져버린 것은 훈구파와의 갈등과정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언관계통 또는 한직에 묶여 버렸고, 그들 가운데 간혹 정조 계통에 진출한 예가 있었다 하여도 하위직이었으며 정책결정과 그 실행을 주도하는 정조의 상위직은 훈구파가 독점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의 사림파가 수행한 역사적 기능과 역할의 한계를 잘 대변해 준다.2. 갑자사화 - 1504(연산군 10)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이다.2-1. 정세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79년(성종 10) 폐출(廢黜)되었다가 1480년 사사(賜死)되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한편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런 계제에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일이 크게 벌어광조는 그러한 중종의 신임을 믿고 정치에 입문하였던 것이다.조광조는 당시에 무너져 내린 지배층의 도덕성을 바로 잡지 않고서는 나라를 중흥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스리는 사람들이 유교적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였다.그러나 권력 기반이 없이 현실 정치에 개입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더욱이 이미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정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게 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정치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조광조가 맞닥뜨린 현실이 바로 그러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나, 당시 조선왕조가 당면한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정국공신과 같은 기성의 정치세력을 약화시키며, 보다 새로운 생각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등용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과 현량과)의 실시라는 두 가지 개혁안이 중종 14년에 적극 추진되었던 것이다.하지만 정국공신의 개정이 결정되고 이어 현량과가 실시되려 하자 그에 대한 불만이 화살 투서 사건)과 강윤희 고변 사건)으로 연이어 드러났다. 이러한 불만의 누적은 국정을 총괄하는 국왕에게는 점점 더 커다란 부담이 되어 갔으며, 위훈삭제와 같이 반정의 명분에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국왕의 위상에도 손상을 입히는 상황에 직면해서는 조광조와 그 세력에 대한 더 이상의 신임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에 중종의 회의는 결국 기묘사화로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3-3. 사화의 진행과정중종은 밀지(密旨))를 통해 홍경주, 남곤 등과 사화를 모의하였고, 그 초기 계획은 조광조 등을 당일로 격살하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대신들과의 협의를 통해 조광조와 김정 등을 사사(賜死)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정광필과 조종 신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이들을 유배시키는 데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향후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될 경우 미진했던 처벌은 언제든지 재개될 가능성을 남겨 두었다.조광조 등에 대한 처벌이 일단락된 뒤부터는 상하였다.
신라의 사상(불교)신라의 사상(불교)-요약문신라 불교의 전래(상대)5세기 신라 눌지왕 고구려와의 인접지역에서 부터의 민간전래(북조성격)-묵호자, 아도나제 동맹기에 남조와의 접촉으로 전래삼국의 불교의 수용율령제정, 지방제도와 중앙조직 개편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던 4세기 수용-역할 :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신라 - 1세기 가까운 민간전승 후 법흥왕(527) 때 공인, 왕권과 밀착, 승려 의술담당- 업설(왕이 곧 부처, 귀족 특권 인정 ; 골품제 뒷받침), 미륵불 신앙(화랑제, 불국토설, 전륜성왕)신라 불교의 수용 과정토착종교와의 갈등->융화->교대왕실과 귀족의 수용, 공인(법흥왕-진흥왕)원광(사미계, 세속오계), 안홍, 자장불교의 대중화 : 혜숙, 혜공, 대안주체적 사상의 발전(중대)1.원효의 불교-폭넓은 공부, 불교 이해 기준 마련,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일심화쟁(一心和爭)사상 : 모든 것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 다른 종파간 사상적 대립 조화,분파의식 극복(십문화쟁론)-(아)미타신앙 : 극락 세계, 직접 전도 -> 불교대중화2.의상의 불교-화엄일승법계도 : 모든 존재는 사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화엄사상)-관음사상 : 현세 고난 구제(대중화)-당군 축출 후 문무왕의 지원에 의해 부석사 창건, 교단체제 형성 : 교단 내 엄정한 수행자세 강조(통일기 불교계의 내부 정비 및 새로운 기풍 진작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교단정비, 계율강조)->국가체제에 보조-십성 제자와 십찰로 화엄종 교단 중심 신앙 전개 ->사회 전반적 영향(사회안정에 기여)3.혜초 - 왕오천축국불교신앙의 일반화, 대중화1)미타 신앙-내세적, 현세적(미타정토) ; 혜숙-혜공-대안-원효 확립국가의 적극적 관심 ; 국민적 일체감-사회안정-강력한 왕권 강화, 유지2)관음 신앙-현세적 ; 의상3)미륵 신앙-미래적(미륵정토) ; 경흥4)지장 신앙-중생 구제 ; 진표불교의 변화(하대)1)선종의 대두와 교종-성격, 사회 시대적 배경, 조건도의에 의해 남종선 도입. 절대적인 불타에 의존하기 보다는 각자가 가진 불성개발 중시-개인주의적 성향-중앙정부 배제하고픈 지방 호족세력의식과 부합->호족의 비호아래 지방에서 성장-화엄종과 법상종2)선종의 발달과 9산의 성립3)미륵신앙4)유불선의 융합신라의 사상(불교)-발표문신라 불교의 전래(상대)5세기 신라 눌지왕 고구려와의 인접지역에서 부터의 민간전래(북조성격)되었다고 본다. 기록 상으로는 눌지왕(417~458)때 일선부(현 경북 경산) 모예의 집에 와있던 고구려 사람 묵호자가 양나라(502~557) 사신이 가지고 온 향의 용도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도 고쳐주었다는 것이 있어 북조로부터 전래받은 고구려의 불교가 이 시기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와서 포교한 승려로 아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몇몇 시기에 이러한 이름이 여럿 나오는 것으로 보아(아도비,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특정 인물이기보다는 고구려에서 온 신라 전도승을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한다.그리고 신라는 남조 성격의 불교도 나타났는데 나제 동맹기에 백제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조공을 간 기록으로 보아 이때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삼국의 불교 수용삼국은 율령을 제정하고 지방제도와 중앙조직 개편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하였는데 불교는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였다.신라는 1세기 가까운 민간전승 후 법흥왕(527) 때 공인되었다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여기서 민간전승이라는 것은 민중에 의해 먼저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 주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불교는 왕실과 귀족층에 먼저 받아들여졌다. 불교는 선진문물이라는 측면에서 상류층에게 수용에 관심을 가지게 했으며 사상적으로 불교의 업설은 왕이 곧 부처이며 현세의 일은 모두 업에 의해 의한 것으로 골품제에서의 귀족 특권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어서 선호하게 되었다. 그리고 승려가 불법으로 상류층의 병을 낫게 해주는 등 의술을 담당하기도 하면서 왕권과 귀족에 밀착하여 성장하였다. 업설 이외에 미륵불 신앙이 있어 신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사회를 안정화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화랑도, 불국토설, 전륜성왕)*불국토설은 진평왕대 후반부터 대두, 진평왕 및 선덕왕 왕권을 불교적으로 신성화, 합리화한 것, 신라는 먼 과거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는 땅이며, 그래서 도리천, 제석천, 사천왕의 보살핌을 받은 동양의 불국토라는 것.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왕권에 대한 문제(선덕여왕), 밖으로는 삼국이 대치하고 있다는 위기의식. 화랑, 황룡사9층석탑, 불국사 등이 예로됨.신라 불교의 수용 과정불교는 외래 문물이었기에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보다 중국과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낯선 불교는 한반도 한쪽에 치우쳐 있던 신라에 바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당연히 신라의 토착종교와의 갈등이 있었다. 신라는 사상적 통일로 국가를 하나로 안정되게 이끌고 왕실을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불교를 도입했던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토착 신앙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어 사회 안정을 이룩해 가고 있었다. 천신 사상과 조상 숭배, 지신 사상 등의 무속 신앙이 대중화되어 있던 신라에 불교의 전래에 의한 갈등의 대표적인 것으로 이차돈의 순교를 들 수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차돈은 불교의 공인화를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었다. 흥법에 온건적 지지 입장이었던 법흥왕이 사원 건설을 이차돈에게 명했는데 급진적 입장이었던 이차돈은 사원을 아예 토착세력의 중심지였던 천신에 대한 제장이었던 천경림에 지으려고 하자 불교에 대해 부정적이던 토착세력들의 강력한 반발이 일어났고 귀족의 완강한 반발에 왕의 허락도 없이 천경림에 사원을 설립하려 했다는 것을 안 법흥왕도 반발을 무마시키고 왕의 준엄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했다.->융화(불교 : 산신각과 장승, 돌무더기, 가람의 배치, 무속 : 무의, 무구, 무신도, 무속용어, 현세구복적이면 기복적인 불교 형성)->교대(지배층:영토 확장으로 통합위한 새로운 사상 필요, 피지배층: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내세에 희망을 검. 불교의 평등주의 입장으로의 사상의 변화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변화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대라는 의미가 불교가 완전히 토속신앙을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토속의 기반위에 융합된 불교가 도착화되어 이어졌다고 보아야 한다.)왕실과 귀족의 수용, 공인(법흥왕;공인-진흥왕;불국토설, 팔관회, 화랑)원광(사미계, 세속오계), 안홍(불국토설, 황룡사9층 석탑 필요성), 자장(대국통이 되어 승려, 민중 계화, 황룡사 9층 석탑 건의)불교의 대중화 : 혜숙, 혜공, 대안주체적 사상의 발전(중대)1.원효의 불교-폭넓은 공부, 불교 이해 기준 마련,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일심화쟁(一心和爭)사상 : 모든 것은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 다른 종파간 사상적 대립 조화,분파의식 극복(십문화쟁론)-(아)미타신앙 : 극락 세계, 직접 전도 -> 불교대중화2.의상의 불교-화엄일승법계도 : 모든 존재는 사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화엄사상)-관음사상 : 현세 고난 구제(대중화)-당군 축출 후 문무왕의 지원에 의해 부석사 창건, 교단체제 형성 : 교단 내 엄정한 수행자세 강조(통일기 불교계의 내부 정비 및 새로운 기풍 진작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교단정비, 계율강조)->국가체제에 보조-십성 제자와 십찰로 화엄종 교단 중심 신앙 전개 ->사회 전반적 영향(사회안정에 기여)3.혜초 - 왕오천축국불교신앙의 일반화, 대중화1)미타 신앙-내세적, 현세적(미타정토) ; 혜숙(국선 비판, 기층민 의식 반영)-혜공과 대안(기층민과 어울려 지내며 교화, 대중 불교의 기반)-원효 확립원효-나무아비타불만 지성으로 염송하면 극락왕생한다는 내세신앙으로 큰 공덕을 쌓을 수 없었던 기층민에게 인기 있었다. 원효는 범인의 성불 가능성과 평등주의 입각한 극락에서의 왕생가능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신라중대에는 미타신앙이 내세적, 염세적인 극락세계보다 현실에 미타가 내려와 신라땅에서 극락정토를 구현하겠다는 신앙내용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현실긍정적인 미타신앙은 국민적 일체감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켜 왕권의 강화와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국가에서는 적극적 관심을 가졌다.2)관음 신앙-현세적 ; 의상(소원이 있을 때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외면 보살이 즉시 그 소리를 관찰하고 바라는 바를 모두 들어준다는 현세적인 신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국에 부딪히는 각종 어려움으로 q부터 벗어나기 위해 관음 신앙을 가졌다.)3)미륵 신앙-미래적(미륵정토) ; 경흥상생신앙(미륵을 믿어 죽어 그의 정토인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람)과 하생신앙(먼 훗날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하며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 때 참여하기를 바람), 자력적으로 미륵상생신앙을 얻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워 승려와 귀족층에 국한된 계층에게 환영받고 기층민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4)지장 신앙-중생 구제 ; 진표지장보살은 석가가 입멸하고 미륵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세계에 석가의 부촉을 받아 하늘에서 지옥에 이르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이다. 특히 지옥까지 구제한다는 점에서, 망자 구제신앙으로 폭넓은 기반을 이루었다.불교의 변화(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