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후기 St. Augustine의 기독교 사상과 Thomas Aquinas의 신학사상 소개1.서론중세의 학문과 사상 가운데 가장 우월하고 지배적인 것은 신학이었다. 중세 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다. 즉 (1) 교부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10세기에 이르는 교부철학의 시기 (2)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스콜라철학의 완성까지의 시기 등이다.제 1 단계는 초월적인 세계관과 교회의 우월성이 주장된 시기였다. 신국(神國) 즉 내세(來世)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신국론」은 중세 사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거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제 1 단계의 중세신학에서 스콜라철학의 확립에 이르는 기간에 많은 신학자들의 의견이 대립함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신앙과 이성의 대립, 실재론과 명목론)의 대립 등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대립은 이슬람의 주역을 통해 간직되었던 그리스 철학이 크리스트교 사상 속에 들어옴으로써 발단되었다. 그리스 철학의 도입은 크리스트교 이전의 형이상학적 사색의 대립의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논리와 변증에 의해 인도되는 자연이성의 가치가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논리와 철학이 신앙과 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모색되었다.초기의 다수 스콜라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제시되었고 성 안셀름)에 의해 다시 설득된 공식 즉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로서 신앙과 지식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이성의 힘을 부정한 것이 아니며 게시된 진리에 의해 밝혀질 때만이 타당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성과 신앙과의 조화는 아베로에스를 거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완전한 종합을 이루게 되었다.2.성 아우구스티누스(1)생애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으로 이교도인 아버지와 기독교도인 어머니 수 있었으리라는 비난에 대한 반박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연히 로마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과 여러 종교와의 관계 및 그 과정 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졌다. 나머지 다섯 권은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여러 이교신들이 오히려 평강을 보장 해 주리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었으므로 당시 로마의 종교 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신국론」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나머지 12권에서는 그의 역사철학이 피력되었다. 그는 첫 4권에서 ‘신의 나라(신국)’와 ‘지상의 나라(지상국)’의 기원에 관해서, 그리고 그 다음의 4권에서는 그들의 운명에 관해서 서술했다.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신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인간의 시조인 아담이 신의 명을 거역하고 낙원으로부터 추방됨으로써 시작된다. 인간의 죄 많은 역사는 크리스트의 출현으로 구제의 계기가 마련되었으나, 신을 받아들인 ‘신의 나라(civitas Dei)’와 신을 거부한 ‘지상의 나라’(civitas terrena)의 투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고 ‘신의 나라’의 승리로 인류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즉 그는 이 작품에서 세계를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사이에 지속적인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 두 나라는 이미 천지창조 때 아벨과 카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나라의 시민들도 역시 천지창조 때 이미 구분되었는데, ‘신의 시민들’은 그 본래의 고향이 하늘에 있으므로, 지상의 역사에서는 항상 이방인이요 순례자로서 숨겨져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 구원 받는가 하면, ‘악의 시민들’은 이때에 영원히 ‘지상의 나라’로 파문 당한다는 것이다.이 작품에서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개별 인간의, 또 전체 인류의 최고의 목적을 행복으로 보았다는 점이 엿보인다. 그러나 행복이 그에게서는 신의 계율을 지킨 보수로서 얻어질 수 있되, 그것은 오직 피안(彼岸)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 인간의 원죄가 후손에게 상속되었고, 따라서 인간들은 저 목표로부교만에서 비록된 것으로 이 교만에 의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다. 이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먼저 주어진 은혜이다.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주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 안의 일이다. 선택된 자는 하나님의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심에 따라서 이 ‘저주받을 무리’들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하나님의 은혜, 특히 예정으로서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나 그 영역을 넘어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 타락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가능성도 없다. 오직 은혜에 이끌림을 받는 것만 있을 뿐,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정론의 근거가 되었다,은혜는 죄의 제거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창조하는데, 이것은 “사랑의 주입”을 의미한다. 즉, 세상으로 향해 있던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바뀌어 진다.?결과적으로 인간은 전엔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의 예정하심 안에서도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으신다.②삼위일체론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를 성자의 처음이라고 부르며, 성부와 성자를 성령의 처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으며 삼위일체를 관계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세 위격을 연결하는 동시에 세 위격의 본질적 성품이다.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고리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통일성을 이룬다.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삼위 하나님이 구별성을 가지면서도 통일성을 가진다고 보았으며, 성령(사랑)을 그 통일성을 이루는 결합적 기능으로 이해하 형이상학의 수업을 비난하였던 교회 당국은 학생들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저술을 읽기를 고집함을 알아서 만약 그것이 기독교 사상과 조화를 이룬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연구를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아퀴나스와 그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쓸모가 있었고 만약 교회가 지식계급의 신뢰를 상실하지 않으려면 기독교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타협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확신하였다.이렇게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내용과 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기독교 교리체계에 융합시키려는 시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4) 사상1) 이성아퀴나스는 이성의 진리와 신앙의 진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아베로에스) 학파와는 달리 두 종류의 진리는 결코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인간 정신이 감각경험을 反省하여 자연계에 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이론을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더하여 신의 은총으로 계시됨으로써만이 인간이 認知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진리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예컨데, 인간은 이성만으로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그 신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신의 계시만이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슷하게, 하나님이 크리스트로 강림하셨다든지 성체 성사에서 크리스트가 나타나신다는 따위의 사실은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로써만 인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퀴나스에게는 초자연적인 진리가 자연적인 진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보완해주는 것이었다. 그이 가장 특색있는 말은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초자연적 진리와 자연적 진리는 함께 기독교 철학자가 확신있게 탐구할 수 있는 포괄적인 전체를 이루는 것이었다.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거의 그대로 받아 들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교리가 명백히 모순되는 경우에는 “철학자”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 경우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더 높은 권위를 끌어대는 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 이래로, 신학자들은 통상 인간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국가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전제해 왔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군주의 강제적인 권력은 죄에 대한 교정수단이자 형벌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짐을 지우신 것이었다. 반면에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직한 제자로서 국가는 인간의 본성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선을 이룰 수 있는 많은 잠재적인 지적 ? 물리적 ? 도덕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사회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공통된 이해관계가 나타나 그 이해관계를 보호해줄 公認된 권위를 필요로 하게 되므로, 반드시 정부가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국가의 적정한 형태는 인간의 본성과 욕구에 대한 이성적인 고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의 목표가 현세에서의 자연적인 행복한 삶을 꾸리는 것이라면, 국가만으로도 인간의 모든 필요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내세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초자연적인 운명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또 하나의 목적으로 인간을 이끌기 위하여 교회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아퀴나스는 특징적으로 법의 필수적인 토대로서 이성을 강조하였고, 입헌군주제를 옹호하였으나 그밖에는 독자적인 정치이론을 내세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도 그가 그 문제를 상세하게 고찰한 적이 전혀 없었으므로, 모호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인간의 본성에서 기원하였다는 그의 가르침은 뒷날 여러 政 ? 敎 분리론 및 입헌 정부 이론들의 토대가 되었다.4.결론중세는 신앙의 시대로서 모든 학문은 크리스트교 신앙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가치가 인정되었다. 따라서 학문의 주류는 신학이었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였다.그러나 중세의 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중세 사상가들은 크리스트교 사상과 그리스 사상을 종합하였다. 이런 종합적 체계를 최초로 완성한 사상가가 곧 아우구
머리말.중국 역사의 변천을 시대적으로 어떻게 구분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미 오랜 동안 많은 중국인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선 중국학에 대한 관심도의 증가와 함께 일본 및 구미의 학자들에게도 중요한 논제로 제기되어 있다. 시대구분 문제에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 문제가 아직 미해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해결의 원인에는 중국 역사가 갖고 있는 복잡성, 역사가 자신이 처한 시대적 배경의 차이, 역사를 보는 눈의 차이 때문이다.본론.1. 중국사 시대구분론의 세가지 견해장춘수는 중국사의 시대구분은 복잡다양하지만, 그것들은 왕조 주기적 순환, 정체성 및 지속적 변화 재지는 발전의 세 견해 중에서 어느 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앞의 두 견해에 있어서 시대구분이라는 개념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둘러싼 최근의 논쟁은 주로 후자의 입장이 된다.(1) 왕조 또는 주기적 순환전근대 중국 학자들은 역사를 古代 ? 中世 ? 近世의 세 시대로 나눈다든가, 여기에 最近世를 더하여 네 시대로 나눈다는 通時代的 區分法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들은 각 王朝는 興亡盛衰를 겪으면서 交替한다고 생각하고 한 王朝, 한 王朝를 중심한 이른바 “斷代史”적인 구별만을 중시하였다. 왕조 중심적인 사고는 중국인들에게 예로부터 뿌리 깊은, 이른바 “天命思想”에 연유하는 것이니, 황조의 興亡盛衰를 이들은 천명에 의해 설명하고 있다. 한 왕조의 創建은 天命을 얻는 것에 의해 가능한 반면, 그 天命을 잃을 때 왕조는 衰亡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天命을 얻고 잃음이 治者의 有德與否라는 인적 요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천명 자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각 왕조는 천명과의 관계에 의해 되풀이될 뿐, 한 왕조로부터 다른 왕조에로의 교체를 역사적인 변화나 발전의 결과라고 보지 않았다.근대사가들은 왕조 교체의 원인에는 않지만, 그보다 사회 ? 경제 ? 행정 등의 요인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즉 인구의 증가, 호족세력의 확대, 경작 토지의 감소, 빈번한 자연재해나 대내외 전쟁 등등 및 이에 대처해야 할 행정력의 무능을 들고 있다. 패어뱅크와 라이샤워는 이상 두 가지 요인에 의한 왕조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한제국의 흥망성쇠를 분석하였다.왕조순환론과 같은 유형에 속하는 주기적 순환론은 왕조의 흥망성쇠를 초자연적 요인에 의하여 설명한다. 즉, 왕조의 흥망은 “五行”, “氣運”이니 하는 반신비적인 요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일찍이 500년에 한번 훌륭한 임금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7세기 당나라 때의 왕발은 보다 구체적으로 왕조를 오행으로 분류하여, 토덕은 1000년, 금덕은 900년, 수덕은 600년, 목덕은 800년, 화덕은 700년 동안 각각 지속한다고 하였다. 11세기의 인물인 소옹은 인류뿐만 아니라 우주까지도 포괄하는 순환론을 제시하였다.이상과 같은 순환론이 진보에 대한 믿음을 결여하고 있지만, 적어도 변화만은 인정하여 왕조교체라든가 일정한 시기의 주기성이라는 생각에 의해 그 나름대로의 단순, 소박한 시대구분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정체론은 변화마저 부정한 때문에 시대를 구분한다는 일이 거의 불필요 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된다.(2) 정체성아담 스미스는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 사회를 농업생산에 의존한 변화 없는 정체된 사회로 보았다. 독일의 관념철학자인 헤겔은 역사를 絶對精神의 자기발전과정으로 해석할 때, 중국사회는 아직 자기분화과정을 밟지도 못한 채, 오랜 동안 전제주의의 지배하에서 정체된 상태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역사의 발전 단계라는 면에서는, 중국사회는 세계사의 시초단계, 즉 “그리스 ? 로마적” 사회와 “게르만적” 사회의 이전 단계라는 것이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계승되는데 이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란, 봉건제 이전의 아시아에 특유한 전제군주하에서의 농노적 신분계층에 의한 상산단계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위트포겔의 유명한 “수력사회”이론으로 이어진다. 위트포겔은 중국 전통사회를 농업생산을 위해서 대규모의 관개 및 치수조직이 필요했던 “복합수력” 사회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보고, 따라서 시대구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다만 수력작업의 필요성이 생성시킨 정부통치조직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주와 그 이전 시대를 “단순수력” 또는 “반복합수력”사회로 지칭하고 있다.(3) 지속적 변화 ? 발전시대구분 문제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중국사를 계속적인 변화 내지는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자들이다. 진보적 개념에 의해 역사의 단계를 구분하려는 이들 중 기원후 춘추공양학자인 하휴는 쇠난→승평→태평이라는 이른바 “장삼세론”을 제의하였다. 역사는 시대가 내려옴에 때라 진보 ? 상향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진 일반적인 견해는 결코 아니지만, 청나라 말기에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했던 강유위의 대동사상에 끼친 영향은 컸다. 강유위는 중국역사를 거란→승평→태평의 삼세로 구분하여 역사의 점진적 진보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개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이상사회인 대동사회에 도달하게 된다고 하였다.2. 중국사 시대구분(1) 양계초강유위에 제자로서 현대중국사학의 선구자인 양계초에 이르면 중국사의 시대구분법은 고대 ? 중세 ? 근세로 나타나게 된다. 양계초는 1901년 유럽사의 전통적 기대구분법에 따라 중국사를 원고(황제-전국시대), 근고세(진-청 건륭말년, 1795 A.D.), 금대세(건륭말년 이후)의 3시대로 구분하고, 원고는 귀족정치와 중국민족의 자기발전단계, 근고세는 정치적으로 독재정부의 형태를 취하면서 대외적으론 중국민족이 다른 아시아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는 단계, 금대세는 안으로는 근대적 정부를 수립하면서 밖으로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양의 열 나라와도 접촉을 확대시킴과 아울러 경쟁을 하는 시기로, 각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시대구분을 하는 데 정치형태 및 중국민족의 발전과 대외관례를 중시한 것은, 서구열강의 치략화를 주장하던 그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1922년 그는 문화적 요인을 더하여 이전의 자기이 시대구분을 수정, 근고세의 시작을 하의 우왕으로부터 하는 한편, 근고세의 하한을 1911년 신해혁명까지로 하였다.(2) 장금, 전기년양계초에 의해 시작된 중국사의 근대적인 시대구분론은 장금에 이르러 좀 더 구체화되는데 그는 정치와 문화의 발전을 기존으로 중국을 4시대, 즉 고대(사전시대~전국시대말), 중세(진~당), 근대초기(오대~명) 및 근대(청)로 구분하였다. 오대를 당과 구별하여 그 이후를 근대 초기의 시발점으로 한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같은 시기의 전기년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근세가 보다 늦게 송의 멸망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다. 전기년의 시대구분은 한민족의 형성, 발전 및 북방유목민족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상세, 중세, 근세, 현세로 나누었다. 각 시대의 성격에 대하여, 상세는 순수한민족시대, 중세는 유목민족의 침투와 그 영향을 받는 시대, 근세는 이들 이민족에 의한 한민족지배시대로 그는 설명하고 있다. 민족적인 색채가 농후한 이 시대구분법은 근대 중국사회의 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3) 경도학파1) 나이또1922년 나이또는 당대의 귀족정치가 송대에 이르러 군주독재정치로 바뀜과 더불어, 경제적인 면에서는 화폐경제가 발달하고, 노예신분적인 소작인이 해방되어 토지소유가 가능하게 되며, 문화적으로는 서민문화가 융성하는 등 변화를 근세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송 이전의 시대에 대하여는, 오호십육국시대로부터 당 중기까지를 귀족정치가 특징인 중고시대, 그리고 후한의 중엽 이전은 상고시대로 규정하면서 후한의 중엽경부터 서진까지를 중세로의 과도기, 당 말에서 오대까지를 근세로의 과도기로 보았다. 나이또의 학설은 후에 동경대학의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2)미아자끼미아자끼는 중국사를 4단계로 나누어, 하한말까지를 고대제국의 성립기, 위진으로부터 오대까지를 귀족사회, 송의 성립으로부터 아편전쟁까지를 독후를 근대화 진행의 시대로 나누었는데, 이는 나이또의 구분법을 거의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는 송원시대의 경제적 상황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당시 사회에 있어서 상품생산의 발다, 노동의 분화, 생산의 지역적 전문화, 직업선택의 자유, 시장의 보급 등은 모두 근세사회의 시작을 알리는 특징적인 현상들이라고 주장하였다.3) 패어뱅크와 라이샤워미국의 페어뱅크와 라이샤워도 나이또의 시대구분법을 받아들여 당 후기에서 송대에 걸친 시기를 중국 역사에 있어서 고전시대로부터 근세 초기에로의 전환기로 보았다. 그 이유로는 이들은 불교의 쇠퇴와 신유교주의의 성립, 새로운 관료계층의 형성,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서의 양자강하류역의 등장, 도시 및 그 문화의 발달은 서양근세사회에서의 유사한 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4) 경도학파1) 마에다그러나, 나이또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중국사 시대구분법은 동경대학파 동양사학자들의 직접적인 도전을 받았다. 1948년 마에다는 전아시아세계의 중국 ? 일본 ? 한국은 각기 독자적으로 역사를 전개시켜 온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성을 가져 왔으며, 따라서 이 문제가 중국사의 시대구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중세의 시작이 일본과 한국에서는 모두 12,3세기경으로부터 비롯하는데, 나이또계의 설이 중국에서 중세의 시작을 이보다 수세기 앞서 설정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마에다 자신도 당에서 송에 걸친 전환기의 획기적인 변화를 명백히 인정하지만, 그 변화를 근세의 시작이 아니라 중세의 시작이라고 보는 나이또측의 견해와 본질적 차이가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위진남북조시대에 호족이 거느렸던 사병은 노예적 혹은 반노예적인 존재로 호족과 이들 사병 사이에는 봉건적 주종관계가 없었으니, 이는 그 시대가 고대적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한편 송대에 직접생산자의 대부분을 점했던 전화는 농노적 신분의 소작인이었으니, 이 시기는 중세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에다의 제안은 곧 일본의 사회경제사가들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