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츨라브 하벨에 대하여..☞ 바츨라브 하벨(Vaclav Havel)은 1936년 10월 5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의 매우 유복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 하벨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야망을 북돋아 주었다.하벨은 어렸을 때 문학 서클인 "Thirty-sixers"(36년생들)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는 1951년에 의무교육을 마쳤으나 그의 부르주아적 집안 배경 때문에 고등교육을 제한 받았다. 결국 그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4년간 화학 실험실 조수로 일을 하면서 중등학교에 야간 수업을 받아서 1954년 졸업을 했다.하벨은 15살 때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 영화감독이 되는 '밀로쉬 포르만'과 함께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를 만나기도 했다. 비록 카프카의 문학작품이 당국에 의해 거의 묻혀졌지만, 그의 작품들은 하벨에게 깊게 영향을 주었다. 또 하벨은 19살 때 문학과 연극잡지에 그의 글과 기사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이유로(그의 부르주아적 집안 배경 때문에), 그는 인문학을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프라하에 있는 체코 기술대학의 경제 학부에서 1955년부터 1957년까지 2년 간 공부를 했다.1957년부터 1959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서 병역의무를 마치고 나서 하벨은 "Group 42"에 참여했다. 거기서 "Kveten(5월)잡지"에 늙은 작가들에게 도전하고서 하벨은 작가로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또한 하벨은 군 제대 후 "ABC극장"에서 처음 무대 기술자로 일을 했고,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Divadlo na Zabradli"라는 이름의 극장에서 무대 기술자로 일했다. 이곳에서 하벨은 조감독과 극작가 일까지 하게 되었다. 이 극장에서 하벨은 그의 첫 연극 "The Garden Party(가든파티)"를 1963년 발표했는데, 체코 내에서 뿐 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The Garden Party"는 현대의 관료주의의 일과를 풍자하였고, 이는 1960년대의 체코 문화와 사회에서 눈에 띄게 강한 부흥의 취지를 대표하였으며, 이는 1968년의 소위 "프라하의 봄"에서 절정에 이른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하벨은 프라하에 있는 공연예술 아카데미에서 극작법을 공부했다. 1964년에 하벨은 8년 간 사귀었던 올가 스플리할로바(Olga Splichalova)와 결혼하였다. 하벨은 그녀를 1956년에 알게 되었는데, 올가는 노동자 출신으로, 서로 다른 집안배경은 서로를 끌리게 하였다. 올가는 그들의 삶에서 가장 어려웠던 경험들을 함께 했다. 하벨은 그녀를 없어서는 안될 조력자라고 하였다.하벨은 그의 연극에서 상황이나 인물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극적인 테크닉을 썼다. 1965년에 발표한 "The memorandum(비망록)"에서 그는 의사 소통에서 더 큰 정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공적인 언어를 소개했다. 그 부조리한 시도는 인간관계의 완전한 몰락으로 끝이났다. 그러한 테마는 1968년 "The Increased Difficulty of Concentration(증가된 집중의 어려움)"에서 더 깊이 들어가는데, 거기서 하벨은 유행하는 사회학 용어를 공격했다. 하벨은 1960년대에 공산주의자의 관료주의를 풍자하고 "프라하의 봄" 개혁을 지지했다.바츨라브 하벨-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 저항의 대표자프라하의 봄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이끌었던 소련군에 의해 1968년 8월에 진압되었다. 하벨은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개혁의 시기동안에 문화의 민주화와 부흥에 적극적이었고, 그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하벨은 소련군의 침입과 강경 노선의 공산주의자 정책을 적극적으로 저항했는데 소위 공산주의자 "Normalization(정상화)"의 시기에 나타는 정치적 탄압에 반대했다. 그의 작품은 1969년에 출판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금지되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시골로 이사를 하였고 글쓰기에 전념하였으며 한동안 맥주 양조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한 활동을 계속했는데 그의 시골 별장에서 금지된 음악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1970년대 하벨은 단막극 시리즈를 썼는데, 1978년에 "Audience(접견)", "Prevate View(집들이)", "Protest(저항)"을 썼다. 거기서 주인공은 당국과 말썽이 나있는 반체제 극작가이다. 1975년에 하벨은 후사크(Husak)대통령에게 공개 서한을 썼는데, 거기에 정부를 비판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의 비판적인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그것은 공식적인 조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글의 복사본이 널리 퍼졌다.그의 활동들의 절정은 1977년 1월에 세워진 '77선언'이었는데, 하벨은 인권 조직인 77선언의 공동설립자였다. 그것은 운동에 대한 명목을 제공하는 것 뿐 만 아니라, 공산주의 정권과 그 결과로서 생기는 탄압에 조용히 저항해왔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특성을 구체화했다.1979년 4월에 하벨은 77선언의 서명자들에 의해 설립된 "the Defense of the Unjustly Prosecuted(부당하게 기소된 사람들의 변호, VONS)" 의 멤버였다. 그의 활동은 그를 감옥에 3번 투옥시켰고, 감옥에서 거의 5년을 보냈다. (1978년에서 1979년까지 하벨은 가택연금을 당했다.)1978년에는 그의 가장 영향력있는 에세이인 "The Power of the Powerless(약자의 힘)"을 썼는데, 거기서 하벨은 공산주의자의 전체주의적인 탄압의 핵심을 분석했고 그 수단과 공산 정권에 의해 약자를 창출해내는 노력에 쓰여진, 소심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개인들을 구성하는 사회의 매커니즘을 묘사했다. 그 분석의 배경에 대항하여, 그는 도덕적 저항의 힘, 진실 속의 삶의 힘을 설명했다. 그 에세이의 영향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불찬성의 범위 밖에 닿았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의 저항운동에도 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강경 노선의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그 원고들은 사적으로 유포되었고 서유럽에서 출판되었다.하벨의 연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투쟁에 대한 세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 시기를 통해 그는 경찰의 괴롭힘을 당했고 체포되기도 했다. 1979년에 그는 공화국의 파괴죄로 4년 반형을 언도 받았다. 그의 긴 수감 생활은 1979년에서 1983년까지 지속되었다. 1983년에 병으로 석방되었고 하벨은 그의 3개의 주요 연극을 썼는데, "Largo Desolatio(1985)", "Temptation(1986)", "Slum Clearance(1987)"가 그것이다. 공산정권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저항의 부분으로서, 그는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지하 출판 (Samizdat Press)에도 적극적이었다. 1987년과 1989년 하벨은 지하출판 신문 "Lidove Noviny"의 사설 란의 멤버이자 정기적인 기고가였다.하벨의 극적인 예술의 발전의 새로운 시기는 1980년대에 시작한다. 파우스트의 현대적인 재가공(재작업)인 "Temptation(1986)"에서처럼, 그의 연극은 본질의 문제와 철학적, 도덕적 문제를 반영한다. "Largo Desolatio(1985)"에서 영웅이자 작가인 주인공은 그의 적들과 친구들 둘 다에 의해 부과된 짐을 처리하는데 어려움을 발견한다. 영웅은 더 이상 명백하게 반체제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수필가로서 하벨은 민주주의적 전통과 자유사상을 속행했다. 다른 반체제 작가들과는 달리, 하벨은 공산주의의 인간 본성이나 민주화의 가능성에 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서구 사회의 소비자 문명의 이기주의를 비난했다.
18. '유성' 감상문☞ 소설 '유성'을 처음 단 몇 장 읽어 나갈 때쯤 난 매우 당황했다. 보통의 소설과 달리 내용이 난해하다고 해야할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서술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수업 중 카렐 차페크에 대해 체코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라 배웠기에 적지 않은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한 나에겐 너무 실망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점차 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이 특이한 유형의 소설에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소설에 익숙해지자 '유성'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흥미 있는 소설로 나에게 다가왔다.대개의 소설은 시점이 정해져있다. 1인칭시점, 3인칭 시점, 전지적 작가시점... 그러나 '유성'은 딱히 시점을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환자 X에 대한 수녀, 천리안, 시인의 각기 다른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풀어져 나가기 때문이다.또한 대부분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물이 흐르듯 펼쳐지는 느낌을 받는 반면, '유성'은 부드럽게 이어지기 보다 단편적인 영상을 순간순간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나열한 듯한 느낌이었다.따옴표가 없어 어느 것이 생각인지, 어느 것이 대화인지 모호함을 주는 부분은 마치 내가 소설 속 인물의 머릿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듯한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유성'은 굉장한 광풍이 몰아치는 날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중상을 입은채 의식불명이 된 남자 승객이 병원으로 운반되어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신원을 전혀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환자 X라고 등록되어 병원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그중 수녀, 천리안, 그리고 시인, 이 세 사람에 의해 환자 X의 과거에 대한 각자의 추측이 이야기로 펼쳐진다. 세 사람은 각자의 개성과 각기 다른 접근 방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자비로운 수녀는 그녀의 꿈을 통해, 천리안은 환자 X에게 집중함으로써 떠오르는 그의 환상을 통해, 시인은 그의 직업상 특성을 이용해 상상력과 직관력을 발휘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첫 번째는 간호사 수녀의 이야기이다. 환자 X를 보살피는 자비로운 수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꿈속에 나타난 환자 X가 수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꿈에 기인한 만큼 몽환적이고, 신비롭다. 또한 그녀의 자애로운 성격답게 환자 X의 주된 갈등요소는 바로 사랑이다.수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수녀가 꿈꾼 환자 X의 사랑이야기는 금욕적 생활이 강요되는 수녀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꿈으로써 등장시키고 이야기의 마지막에 환자 X가 저주를 퍼부음으로써 스스로를 책망하며 묵주를 다잡았던 것이다.두 번째 이야기는 천리안의 이야기이다. 그는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졌다. 그는 수녀와는 달리 집중을 통해 분석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으로 환자 X의 이야기를 한다.천리안의 이야기 속의 환자 X는 그와 동일한 성격인 것처럼 비춰진다. 직업 역시 화학자로 등장함으로써 매우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인물로 설정된다.세 번째 이야기는 시인의 이야기이다. '유성'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 중에 나는 시인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가장 흥미 있게 읽은 부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시인의 이야기는, 그를 통해 차펙이 직접 환자 X라는 인물에 대한 상상을 써내려간 듯 하다. 꿈이라는 매개를 통한 수녀의 이야기와, 무엇이든 꿰뚫어 볼 수 있는 천리안의 직관에 의한 이야기와는 달리 시인의 무한한 상상력에 기인한 이야기는 어찌보면 가장 허무맹랑하게도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이야기는 마구잡이로 지어낸 것이 아닌, 환자 X에게 남아 있는 아주 작은 흔적을 토대로 발휘된 상상력의 이야기로 가장 문학적인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