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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바른 성윤리의 확립 평가A좋아요
    Ⅰ. 서 론성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성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는 모두 윤리적인 측면에서 생각될 수 있습니다.물론 성욕구는 호르몬의 작용에 의해 본능적으로 생기는 것이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그러한 성욕구를 발산하고 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본능적 욕구에만 얽매이게 되면 미혼모나 인공임신중절, 성폭력문제, 또 여러 성도착증들과 같은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이러한 여러 문제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또 현재 우리사회의 그릇된 성문화와 성윤리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올바른 성윤리의 정립이 필요한 것입니다.이에,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성윤리와,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성윤리, 또 현대사회의 그릇된 성윤리를 조사해보고 올바른 성윤리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았습니다.Ⅱ. 본 론1. 종교적 측면에서의 성윤리1)불교에서의 성윤리- 애욕의 끝은 언제나 절망이며 나와 남을 함께 죽이는 죄악대·소승의 모든 계율은 음행(淫行)이 스스로의 본성을 더럽힐 뿐 아니라 다른 이의 마음자리(心地)까지 더럽힌다는 이유로 철저히 금지하고 있습니다불교의 근본 5계 중 세 번째인 불사음계(不邪淫戒)는 남녀의 순결과 삶의 청정성을 강조한 계율이며, 또한 비구 2백50계의 절반 가량은 남녀관계에 관한 것이고, 비구니 3백48계는 남녀 관계에 관한 규정이 더 많습니다.애욕은 격렬한 욕망으로서 삶에 대한 집착이 근본이 되며,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를 탐내게 되고 때로는 죽음을 원한 정도의 극단적 욕망으로 변한다.”는 의 구절이나 “애욕은 번뇌의 왕”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에서는 음욕을 조장하는 모든 행위는 나와 남을 함께 죽이는 죄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음욕은 온갖 고통의 원인또한 유행경의“네가 정도를 걷고 싶으면 애욕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청춘과 미색은 잠시 후에 사라지고 곧 노병과 노쇠와 고뇌가 뒤따름을 명심해라.”는 구절이나 “애욕은 사람의 정서에 빨대를 꽂아 넣고 양식을 빨아내서 지성을 말라 죽인다”는 의 구절 등에서 보여지듯이 불교에서는 또한 음욕을 온갖 고통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외형보다는 얼마나 내면 속에 진실한 사랑을 담고 있는가가 중요최근의 한 불교지 칼럼에 나오는 말입니다.여기에서는 에스키모인이 귀한 손님에게 자기의 부인을 하룻밤 빌려주는 풍습과 우리의 열녀문화를 비교하면서 성윤리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외형적인 억압은 왜곡된 성문화를 낳을 뿐이며, 성윤리의 문제도 외형에 초점을 두어서 억압하는 것을 강조하지 말고, 얼마나 내면 속에 진실한 사랑을 담고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 성서에서의 성윤리- 구약 성서에서의 성윤리 : 성은 신성한 것구약에서는 간음(신명 22,23-29), 간통(신명 5,18), 근친상간(신명 21,1), 동성애(창세 18,20), 수간(출애 22,1)등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매음이 초래하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잠언 23,27; 집회 9,34; 19,2). 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구약에는 성윤리에 관한 수많은 규정들이 있는데, 이것은 性을 단죄하려는 의도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성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던 결과라고 합니다. 이러한 규정들은 하느님 백성의 생리, 위생을 건전하게 유지시키려는 율법의 교육적 측면과 이방 세계의 비뚤어진 성윤리에 물들지 않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다는군요..- 신약성서에서의 성윤리 - 성은 거룩한 것이며 본래 선한 것신약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보고도 책망하지 않았고, 또한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오히려 창녀들이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더 쉽게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마태 21,31-31)하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얘기한 구약의 규정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분명한 것은, 性은 점차로 신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에 대한 성서적 사상은 성과 생식 능력은 본래 선한 것으로 혼인 영역에 있어서, 성은 부부상호간의 관계를 위해서 봉사하며 부부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구성 능력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2. 역사적 측면에서의 성윤리1) 성(性)의 어원성(性) = 마음(心) + 생기다(生)라틴어 - sacare영 어 - seco→ 원래 한 몸이었던 남녀를 신이 둘로 절단했다는 신화에서 sex라는 말이 생김성(性)이란 마음(心)과 생기다(生)라는 글자가 합해져 만들어 졌다. 따라서 성이란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마음과 몸의 관계, 인간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영어의 SEX라는 말도 어원을 찾아보면 라틴어의 sacare나 영어의 seco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의미는 원래 공모양의 몸에 4개의 손발과 귀, 두 개의 성기와 얼굴을 가졌으며 등과 뒤통수가 한테 붙어 있던 인간의 조상을 신이 남녀로 절단했다고 하는 신화에서 SEX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지난날처럼 하나가 되려고 서로의 반쪽을 추구(行爲로서의 성)을 하게 되었답니다.2) 선사시대의 성윤리- 구석기 시대→ 생존과 풍요, 다산을 기원하는 성기숭배신앙ex) 유라시아 전역에서 출토되는 남성과 여성의 석제 조각품이나 남녀 성기를 결합한 조각품- 신석기 시대→ 난혼의 존재가 의문시되며 느슨하게나마 특정 배우자와의 1:1의 관계 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임.구석기 시대에는 성 만 존재하고 성윤리 가 존재하는 사회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석기로 들어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족외혼이 시작되고 느슨하게나마 배우자와의 1:1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보여집니다.3) 고대국가 시기의 성윤리고조선, 부여 등의 법률을 볼 때신석기 시대부터 족외혼이 일반적이나 근친혼도 도덕적으로 부정되지 않음여성의 정절이 사회적 귀감(삼국유사 - 백제의 도미의 아내, 신라 - 도화녀)4) 신라시대의 성윤리 - 성 개방속에서 남녀평등- 성기의 크기와 체격의 정도가 곧바로 힘과 세력을 상징ex) 삼국유사 - 지증왕의 성기가 한자 다섯치(45cm)나 되어 마땅한 배필이 없으므로 사자를 파션하여 배필감을 찾아 키가 일곱자 다섯치(2m 25cm)나 되는 모량부 상공의 딸을 배필로 삼음- 신라 왕족의 난잡한 성윤리ex) 안압지 출토 목제 조각과 토기(성기 노출의 교접모습)화랑세기의 지소태후, 미실-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가계상속권과 재산상속권 인정→ 이혼시 재산을 가지고 나감 (조선전기까지 이어짐)5) 고려시대의 성윤리- 남녀의 성적 평등고려시대는 여성의 위치가 남성부럽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높았습니다.단적인 예로 고려시대의 재산상속은 아들. 딸 차별없이 균분상속이었고 이와 함께 부모봉양이나 제사의 의무도 균등했습니다. 여성이라도 상속받은 재산에 대해서는 인정되고 보호되었으며 재산권행사가 독립적으로 보장되었습니다. 또한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고려사회는 남녀가 성적으로 평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6) 조선시대의 성윤리- 초기 : 여가중심의 혼인제도, 동등한 재산상속권- 후기 : 칠거지악, 삼종지도 등 여성에게 일방적인 성윤리 적용후기 이중적 성윤리의 단적인 예로 이혼문제의 경우에 여자는 칠거지악(七去之惡 : 부모에게 불순함, 자식 없음, 음행, 질투, 악질, 말이 많음, 도둑질)에 해당하면 이혼을 당할 수 있었으나 여자가 남자를 버릴 수 있는 이혼사유는 첫째, 남편이 의절했을 경우와 남편이 집을 떠나 3년이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될 때였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남편이 의절을 범했다 함은 처의 조부모, 부모를 때리거나, 처의 외조부, 백숙부모, 형제등을 죽였거나 장모와 간통하는 등의 행위입니다)둘째, 아내가 남편에게 매를 맞아 뼈가 부러져야 이혼을 허락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처가 남편을 구타했을 때는 상처가 나지 않아도 원하기만 하면 이혼할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또한 여자는 남편 몰래 도망하게 되면 곤장 100대를 맞았으며, 남편 몰래 도망하여 재혼하게 되면 교수형에 처했답니다.3. 현대사회의 그릇된 성윤리1) 성의 상품화여성의 68%가 경험이 있다. 여성의 99%가 관심이 있다.' 수영복을 입은 여자의 전신사진 옆에 새겨진 이 문안이 무엇은 얘기하는지 여러분은 짐작이 가십니까? 이것은 변비치료와 다이어트에 좋다는 음료수를 선전하는 광고 문구입니다.
    사회과학| 2001.11.17| 7페이지| 1,000원| 조회(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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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합적 건축으로서의 병산서원 평가A좋아요
    병산서원에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적 건물은 없다. 단지 전체 경역이 사적260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서원의 중요한 건물인 강당은 1921년, 사당은 1937년에 중창 중수된, 매우 평범한 법식의 건물일 뿐이다. 병산서원의 건축적 가치는 건물의 구조나 형태에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감동적인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대한 탁월한 대응, 범상한 건물들이 모여 이루는 공간의 긴장과 흐름, 그리고 단순한 구성이 엮어내는 다양한 장면들에서 건축적 가치를 찾아야한다.1)시대적 배경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1542 - 1607)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이는 서원의 대성전(사당)에 모신 위패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생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 전한다. 원래 병산서원의 전신은 지금의 자리에 있지 않고, 그 주위에 위치하고 있는 풍악서당(豊岳書堂)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곳은 원래 고려 공민왕이 안동 일대로 피난왔을 때 왕의 후원으로 성장한 곳이라 한다. 그 후 하회마을에 근거한 류씨 가문은 가문의 인재배출을 위한 장소로써 풍악서당을 사용하다가 1572년 서애가 인근의 지방관을 역임하던 시절에 이건(移建)하였다고 한다.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써 조선 선조때의 정치가였다. 류성룡이 이처럼 중앙의 관료로써 많이 활약했기 때문에 직접 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지는 못하였던 같은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은 지방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고 한다. 같은 퇴계파의 학문적인 배경을 가진 두 스승은 각각 서애파와 학봉파로 나누어져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중심으로 학문의 정통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병산서원의 학문적 입지를 설명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문헌상으로 병산서원은 1850년경에 사액이 된 반면에, 학봉파의 호계서원은 1676년에 사액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서애 이후에 퇴계학파의 정통성은 물론 정치적인 주도권을 학봉파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곧 구한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47개의 보존대상에 병산서원이 포함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즉, 정계로 많이 진출한 학봉파의 호계서원은 당쟁에 의해서 결국 철폐되게 되고, 지방에 은거한 병산서원은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그렇다고, 지금의 모습이 조선시대의 서원 원형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고, 강당은 1921년에 고쳐지어졌으며, 사당은 1937년에 다시 지어졌다. 1979년 사적으로 지적된 후 담장과 기단등의 보수공사가 시행되어 현재에 이른다고 전한다.2)위치와 입지경북 안동군 풍천면 병산동에 위치한 병산서원은 풍수적으로 연화부수의 형국이다. 안동 일대의 조산인 학가산에서 시작한 지맥은 서원 뒤 화산에서 끝을 맺는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앞의 병산은 일월산계로 두 큰 지맥이 만나는 곳에 입지를 정했다. 학가산 일대가 뿌리에 해당한다면, 풍천면 일대의 줄기부를 지나 화산에서 꽃을 피우고, 꽃의 수술에 해당하는 정혈이 바로 서원이 된다.▲화산자락의 등성이에 앉아있는 병산서원서원 동쪽의 너들대벽은 서쪽의 산세에 비해 높고 강렬하다.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입수한 물은 동쪽의 강한 산세가 급히 떠미는 이른바 '밀개형'의 형국을 이룬다. 때문에 강물이 실어오는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어서 이곳은 양반지주들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다. 또한 서원 앞의 명당터가 좁아서 경작지로서도 부적당하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병산마을에는 타성받이들이 거주했고, 그들 대부분은 서원을 관리하고 서원토지를 소작하는 일에 종사했었다.▲병산서원의 외관그러나 밀개형의 형국은 서원의 입지로는 최상으로 꼽힌다. 한적한 분위기는 교육환경에 적합함은 물론이고, 행정권으로부터 격리를 꾀할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밀개형의 형국은 유급하지 않고 빨리 졸업해야 하는 학생들의 희망에 맞는 최선의 지리적 이점이기도 했다.한국건축의 터잡기와 터닦기는 이미 건축의 절반에 해당하는 중요한 작업이다. 좋은 장소에 터를 정하고, 그 장소에 합당한 건축의 구성을 위해 터를 닦기 위해서 등장한 이론이 풍수지리인 것이다.공립학교인 향교가 읍성 주위에 배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사립학교인 서원은 향교와는 또다른 학문적인 입지(보다 좋은 스승을 가지고 있으며, 그 스승에 스승의 학문적인 정통을 이어간다는 서원의 장점)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서원이라는 배움의 공간은 초기에는 가문의 인재배출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지방 유림의 근거지화가 되어감에 따라서 그 지방의 대소사(大小事)를 논의하는 장소로써 가문에 한정되지 않고 지방유림이 하나의 파(派)를 조성하는 곳이 되어졌다. 병산서원 또한 풍수적 명당에 위치하고 있다.3)배치와 외부공간병산서원은 형태상으로는 대칭적이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서원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는 각 영역속에서 부분적으로 대칭적으로 배치되어져 있기 때문이다.그 체계라 함은 강당영역 - 사당영역 - 서비스영역의 3영역이 집합된 구성을 뜻하는 것이다.병산서원의 배치형식은 경상도권의 서원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직선 축선상의 전학후묘형이다. 즉, 전면은 동재와 서재, 그리고 명륜당이 존재하며 후면에 사당군을 배치한 것이 그것이다. 이 사당은 평면적으로는 기존영역 사이의 중심이 되고, 단면적으로는 가장 높은 위치인 현재의 지점에 위치한다.그리고 강당과 사당은 서로 다른 축선을 가지며 구성된다. 이는 서로 다른 축선 상에서 기능적으로 다른 성격의 건물군 조성을 가능케 하고, 이러한 독립된 건물군은 하나의 영역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기 다른 독립된 영역은 서원이라는 전체의 틀 속에서 유기적인 구성을 취하게 되는데,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마당과 틈, 그리고 담이라는 요소에 의해서이다.4)공간구성-강당군주 강의장인 입교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좌우에 있고 그 앞으로 기다란 만대루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만대루는 7x2칸의 거대한 규모로써 벽으로 막힌 면없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만대루는 기능만으로 생각한다면 별다른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만대루는 병산의 경관을 병풍처럼 분절하여 서원전체에 하나의 그림을 형성한다. 만대루는 외부경관에 대한 시각적 틀(picture frame)이다. 이것은 마당을 강하게 한정지으면서도 무한히 확장시킨다.▲만대루 얼굴-2▲만대루 얼굴-1▲만대루와 입교당의 관계(위층에서)▲만대루와 입교당의 관계(아래층에서)명륜당인 입교당은 서원의 중심건물인 강당으로써 5x2칸 중 중앙 3칸 대청이며 양쪽이 방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동쪽방 명성재(明誠齋)는 서원의 원장실에 해당하고, 서쪽방 경의재(敬義齋)는 부원장 이하 교무실에 해당한다. 강회가 열리는 공간이 바로 강당의 대청이고, 서원건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 된다. 원장은 대청의 가운데 앉고, 동재생들은 대청 동쪽에, 서재생들은 서쪽에 앉는다.동재에는 상급학생들이, 서재에는 하급학생들이 기숙하며 자습을 하고, 보름에 한 번 정도 열리는 강회때에는 강당의 대청에 모인다고 한다.평면상에서 나타나는 입교당의 특징은 동쪽방인 명성재는 뒤쪽으로 물러나 있고 서쪽방인 경의재는 서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바짝 붙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서재는 동재와 달리 전면의 툇마루 끝이 열려있다. 또한 강당과 서재는 직각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재는 안으로 벌어진 채 놓여졌다. 이는 진입부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당영역의 끝임을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시각적으로 서비스 영역을 막고 강당의 동쪽인 사당 앞마당으로 동선을 유인하기 위한 장치들로 해석되어진다. 즉, 강당군과 사당군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시각적인 연속성을 이루게 하여 동선을 사당 앞의 마당으로 연속적으로 맺어지게 하는 것이다.또한, 입교당(명륜당)의 계단부는 기존의 다른 서원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동재와 서재의 학생들의 각기 다른 계단을 통해 강회에 참석하도록 양쪽으로 나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강당과 동재의 어긋남▲어긋남은 다음 공간에 대한 암시다-서비스군서비스군을 구성하는 채는 전사청과 주소(住所)이다.▲전사청 편문과거▲주소 안마당과 대청병산서원의 주 출입은 만대루앞의 외삼문을 통해서 이루졌지만 현재에 주출입은 주소(住所)옆에 있는 중문을 통해서이다. 이는 진입하는 사람을 주(主)라고 생각했을 때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게 한다. 즉, 과거의 출입문을 통해서 진입하였을 때는 주소는 담 너머에 있는 다른 집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는 ㅁ자형의 뜰집형태인 주소(住所)의 진입부가 중문방향이 아닌 병산으로 향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뜰집의 형태는 폐쇄성을 의미한다. 주변의 여건들에게서 벗어나 내부의 독립적인 마당을 구성함은 서원 전체의 구성에서 보이는 개방성에 대응하는 형태이며, 신분적으로 제약을 받는 사람들의 공간이기에 펼쳐지기보다는 움츠려지는 형상이라고 하겠다. 거주인의 낮은 신분 때문에 서원의 담밖에 내놓은 배열이지만, 마을쪽에서 보면 서원과 대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학/기술| 2001.05.14| 10페이지| 1,000원| 조회(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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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석사의 배치및 공간,영역 분석 평가A+최고예요
    1) 시대적 배경■부석사에 관한 전설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사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普리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 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되어 드리겠다."는 원을 세웠고 의상은 종남산에 있는 지엄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했던 법복과 집기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선묘가 변한 용은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후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으므로,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부석사의 무량수전 뒤에 부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화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 아래에서 생겨난 것이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이 이 절에서 출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대석단은 불국사, 원원사, 망해사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하대 이후에 세워진 사찰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국보 제 17호인 석등이 경문왕때(861∼874)에 만들어진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 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고려 이후의 부석사고려 시기에는 원융대덕(964∼1053)이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 했다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정종 7년(1041)에 부석사에 들어가 화엄종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 부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 했다.-근대 이후일제 시대인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 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번와 불사를 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 절전역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천왕문, 숭당 등을 신축하였다.2) 위치와 입지■풍수적 의미부석사는 소백산맥의 줄기에 위치하여 있고 그 소백산맥이란 것이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죽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문수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吉地)에 속한다.■시대.사회적 상황부석사가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소백 연봉의 장관을 바라볼 수 있는 경승지이거나 조용한 수도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석사가 위치한 옛 순흥 도호부는 신라의 실질적인 북방경계지역이며, 죽령은 예로부터 지리적·군사적 요충지였다. 죽령은 신라 변경의 관문에 해당되는데 이곳을 넘으면 곧바로 백제와 고구려 땅으로 통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봉황산 옆의 마아령을 넘으면 충청도 영춘 땅에 이를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 절의 창건에는 죽령을 경영하려는 의도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 의상은 소백산 일대에 부석사를 포함하여 여러 장소에 사찰을 창건하여 화엄교학의 전파지로 삼는 동시에 국경수비의 근거지로 삼았다.므로 결(結)이라 할 수 있다.부석사의 배치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석축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 개의 축이다.■부석사의 석축부석사의 석축을 보는 관점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부석사의 석단을 9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그 이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그것은 사찰건축에서 이루어진 기단을 어떻게 불교적 교리에 끼워 맞출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 일 것이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석사의 석축이 주는 건축적 느낌이다. 부석사의 석축이 주는 느낌이란 것은 곧 공간의 위계성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것이고 그것이 공간의 신성성을 부여 해주는 요소일 것이다. 부석사의 석축은 그 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강한 위압감을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절정에 있는 석축에 올라섰을 때는 내가 외 여기까지 올라 왔던가 하는 답을 명확하게 제시해준다.-정토신앙 근거론 3-3-3의 구성은 [무량수경]에서 말하는 삼배구품설의 구조와 대응된다. 9품 왕생의 최고단계인 상품상생의 경우는 무량수전의 내부를 뜻하면, 내부에 들어가면 곧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여래를 만나게 되어 진정한 극락왕생의 염원을 이루게되는 구조이다..■두 개의 축부석사의 배치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두 개의 축이다. 부석사의 기본적 축과 무량수전이 가지는 축이다. 그 두 개의 축은 30도 가량 틀어져 있는데 이것은 사찰건축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예이라 할 수 있다.하나의 이유만으로 무량수전의 축이 틀어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일단 첫 번째로는 시각적 효과라고 보여진다. 시각적 효과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시각적 중첩을 노린 것 일수도 있으나 그보다 건축공간으로서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을 한번에 내어주기 싫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부석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한번에 보여준다면 그 얼마나 재미없는 일 일 것인가. 상하로 긴 범종각은 그 길이 만큼이나 많은 기대를 줄 것이고 꺾인 무량수전의 축은 다시 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 사실은 현상일 뿐 왜 하필 두 개의 안대를 가져야 하는가는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박사는 교리적인 차원으로 해석한다. 무량수전과 안산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는 미타정토를 상징하며, 나머지 축과 도솔봉과의 관계는 미륵정토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 이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 중대에 벌어졌던 미타-미륵정토 논쟁을 원용하고 있다.■공간의 변화부석사에서 또 하나 감동적인 것은 진입축에 따른 공간의 변화이다. 공간의 수축과 팽창 으름 압축.. 부석사의 공간은 너무도 변화무상 하다.너무나 멀어보여 다가 서기 어렵게 하다가도 어느새인가 끌어들이고 또 꽉 조였다가 너무도 넓은 시야를 내어주고 부석사 안에서는 사람이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부석사가 주는 공간의 변화를 가슴으로 느끼고 그 명령에 따라 갈 수밖에..-계단의 유형학부석사의기본 틀은 석단들의 나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석단들은 계단들에 의해 연결된다. 따라서 계단들은 부석사 전체의 흐름을 유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계단의 유형학(1) 천왕문을 지나 작은 계단과 돌이 깔린 길로 흐름을 끌어들인다.▲계단의 유형학(4)안양루 밑. 석단에 부가된 계단이 안양루를 향한다.◀계단의 유형학(2) 회전문터 앞의 계단, 중간에 게단참을 두었고 위로 갈수록 좁게 만들어 투시도적인 연속성을 얻는다.-비껴선 석등◀흐름의 유도를 위한 교묘한 위치 설정▲계단의 유형학(3)범종각 밑. 어두움과 밝음의 대조된 면들이 강한 방향성을 가진다.참배자의 동선을 동쪽으로 유도·예배공간의방향성과 맞아떨어진다.-비틀린 석탑과 산 속의 포장로무량수전까지 올라와 일단 정지한 흐름을 산 속의 보이지 않는 조사당까지 끌고 가기 위해 또 하나의 유인요소가 필요해져서 눈에 잘 드러나는 언덕 위에 석탑을 세웠고 그 각도까지 조사당 진입로와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포장도로로 중요한 대상으로 향하는 길임을 암시했다.4) 특징적인 건물들■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이다.
    인문/어학| 2001.05.14| 12페이지| 1,000원| 조회(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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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도사의 배치와 수법 평가A좋아요
    1. 시대적 배경영축산이란 지명의 기원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었다. 이 산에서 석가모니는 '묘법연화경'을 설파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게 되고, 그 산상설법의 광경은 '영산회상'이라 하여 불교 최고의 감동적인 장면으로 추앙받는다. 영산회상의 장면을 재현한 불전이 바로 '영산전'이고, 그것을 그린 그림이 '영산회상도', 이를 위한 음악이 '영산회상'이다.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신라를 부처의 나라 즉 불국토로 재편하기를 염원하여 각지에 불교적 이름을 붙여 주었다. 통도사라는 이름 역시도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築山)"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을 굳이 영산회상의 장소로 인식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이다.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3년)에 창건되었다. 창건주 자장은 본격적인 계율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인물이다.삼국시대 세나라가 앞다투어 불교를 수입한 이유는 부족연합국의 상태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고대국가의 핵심 조건은 왕권의 강화와 율령의 정비였고, 불교는 이를 위한 유용한 사상과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권이 필요로 했던 것은 강력한 질서와 사회적 율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계율학 계통의 불교였다. 자장 이전에도 이미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라는 사회적 계율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사상적 교리적 체계를 제공한 것은 자장에 와서이다.계율승 자장이 경주가 아닌 변방 양산에 불보사찰 통도사를 개창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산지방에는 이미 중앙 정부에 다음가는 무시 못할 세력집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상한 연못에 사는 나쁜 용이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기 위해 통도사 금강계단을 설치했다는 설화는 양산 지방에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정치집단이 있었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통도사를 개창했다는 정치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 역시 불교와 중앙왕권의 제휴를 입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 자장은 통도사 창건을 통하여 신라 불교계를 정화하고 장악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진신사리의 정통성 때문에, 정치적으로 왕권의 강력한 후원 때문에 이러한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2. 배치통도사는 646년 (선덕여왕15년)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 동안 경역 (境域)의 확충, 건물들의 보수, 중수, 증축, 개수 등 수없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따라서 현존 건물들의 배치가 신라시대의 원형 그대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불당 배치에 있어 주축에 직교하는 부축의 중요 건물인 대웅전, 대광명전, 영산전 등을 보면 조선시대에 중건한 건물들이지만 초창된 것은 신라시대로 올라갈 수 있어 배치의 기본틀은 이미 창건 당시에 잡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와 많은 전각들이 추보(追補)되므로 배치의 세부가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사역이 확충됨으로서 오늘날과 같은 포치(布置)가 되었다.현재의 통도사는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주축 위에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잇는 부축, 대광명전과 용화전, 관음전을 잇는 부축, 영산전과 만세루가 이어지는 부축 등이 전체 가람의 골격이 되어 이른바 직교형 배치 형식을 하고 있다. 따라서 부축에 의해 나누어지는 외적 공간은 서쪽으로부터 일주문 쪽의 동쪽 방향으로 상, 중, 하의 위계가 설정되어 상로전 ( 상로殿) 지역, 중로전 (중로殿) 지역, 하로전 (下爐殿)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이러한 동서의 주축에 남북의 부축 3개가 골격을 이루는 배치 형식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상로전 지역에는 금강계단이 중심이 되어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산령각 등이 주된 건물이며 종속 (從屬)의 건물들이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 중로전 일곽은 대광명전을 비롯하여 용화전, 관음전, 해장보각 등과 종속 건물들이 있다.상, 중로전은 입구인 불이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으며 이 불이문은 상, 중로전과 하로전의 경계를 짓고 있다. 하로전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앞쪽에 만세루가 있고 서쪽에 약사전, 동쪽에 극락보전이 있고 가람각이 천왕문 남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하로전은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며 동으로부터 일주문을 통과하여 천왕문과 불이문을 거쳐 상로전의 정점인 금강계단에 이르도록 하였는데 상, 중, 하로전의 구역과 구역 사이에는 적당한 크기의 구역 중정 (中庭)을 두어 외부 공간과 건물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스님들의 거처인 요사는 지형 조건에 맞추어 남쪽과 북쪽에 두어 주동선(主動線)이나 부동선 (副動線)에 걸리지 않도록 자리잡고 있다.3. 건물군의 집합적 이론과 구성■ 하로전 : 정토신앙과 영역성하로전은 천왕문과 불이문 사이의 영역을 일컫는다.사찰의 신앙적 영역은 불이문 부터이며 일주문은 사찰의 물리적 경계를 표시할 뿐이다. 천왕문 남쪽 귀퉁이에 가람각이 서있다. 가람신은 불교의 전통적인 신은 아니나 명색이 신이라 담장 안에 포함하되 위치적으로는 천왕문 바깥에 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으려는 절묘한 배열을 나타낸다.-배 치 : 영산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극락보전, 서쪽에 약사전, 남쪽에 만세루의 4견물이 하나의 마당을 형성하면서 튼 ㅁ자형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마당을 에워싼 4동의건물 배치 방법을 4동 중정형(일반적으로 후면-주불전, 동서-승방, 전면-루각)이 라 한다. 통도사의 경우 동서에 승방 대신 중요한 불전을 위치한 것이 특이하며 가운데 석탑은 원래 영산전 쪽에 있었던 것을 최근에 변경하여서 이 영역의 중심 구조물이라 할 수 없다. 만세루(현재 기념물 판매소)는 비록 단층이지만 옆의 중 층 범종각이 서서 누각의 분위기를 자아낸다.-연 대 : 영산전의 창건연대는 불확실하나 고려 초 (고려척 사용) 이전으로 추정, 극락보전 과 약사전은 400년 뒤인 1369년에 창건되었다. 영산전은 영산회상을 재현한 불전 으로 석가모니의 불국토로 인식되며 그 주인은 석가모니와 나한(癩漢:석가의 10 대 제자 혹은 16대 제자)들이다. 하로전의 경우처럼 영산전이 상위 계열인 극락 보전(아미타불)과 약사전(약사불)을 부불전으로 거느리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영산회상을 재현하기 이한 통도사의 창건목적으로 볼 때 이러 한 집합구성을 이해할 수 있다.-신앙적 : 북쪽-영산전은 석가모니의 불국을 상징성격 동쪽-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의 국토인 서방정토를 상징서쪽-약사전은 약사불의 동방 정유리정토를 상징극락보전과 약사전의 방위가 바뀌어져 배치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러한 배치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세불전 모두 불국토를 상징하는 정토신앙의 전각들이라는 점이다. 정토란 구체적인 부처인 세계이며, 물리적인 경계를 갖는 영토의 개념으로 건축적으로는 '영역성(마당)의 확보'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정토계 사찰은 고리적 원리를 가장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4동 중정형의 구성형식을 채택해왔다.▲하로전 일곽. 앞이 극락보전 ▲천왕문 귀퉁이의 가람각.뒤가 약사전, 그 사이가 영산전 사찰 안쪽에 편입되었지만,외부적 전각이다■ 중로전 : 미륵신앙과 중축성중로전은 불이문부터 세존비각까지의 영역을 일컫는다.-배 치 : 중심은 대광명전-용화전-관음전으로 이어지는 건물군으로, 중축전을 기준으로 앞 으로 확장된 '축성의 구현'의 방법을 사용했다. 관음전은 동쪽으로 원통방 앞의 마당과 서쪽 개산조당 앞마당의 중간에 놓여있다. 각 건물의 전진배치로 인해 기 존 뒷건물이 가려지므로 이러한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 앞으로 갈수록 건물의 넓 이와 높이를 낮추어 뒤의 기존건물과 중첩되어 보이도록 시각적 고려를 한 것으 로 보인다. 이러한 건물의 축소로 인해 마지막에 창건된 관음전은 정방형 평면을 가지게 되었고 대단히 넓은 빈터의 한 가운데 위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3면 이 노출되는 중심형 평면을 가지게 되었다.-연 대 : 대광명전은 통도사 개창 당시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용화전은 1369년에, 관음전은 한참 뒤인 1725년에, 세존비각은 1706년에,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은 1727 년에 창건되었다. 현재 중로전의 배치구성은 관음전이 창건된 조선후기에 조성되 었다.-신앙적 : 대광명전은 모든 부처와 보살 가운데 최고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전각이 성격 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따져볼 때 원래부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계율학의 신종자인 자장이 삼국시대 계율신앙인 미륵신앙에 근거하여 미 륵전으로 사용하다 추대에 화엄신앙을 수용할 필요가 있어 앞쪽에 용화전을 지어 미륵불을 옮기고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것이 아닐가 추론하고 있다. 대광명전이 교리상 위계가 높다고 하지만, 중로전의 중심불전은 용화전이라고 할 수 있다.※미륵불과 미륵신앙미륵불은오늘도 도솔천에서 미래에는 지상에 하강하여 중생들을 구제할 명상에 잠겨있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미래불이다.(→'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주인공) 미륵불은 지상에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남은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도록 예정되어 있는데 이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하며 '용화전'의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옛날 석가가 수제자 가섭에게 "너는 열반에 들지 말고 기다리다가…중략- …용화세계에 그가 오면 내옷과 밥그릇을 전해드려라" 했는데 용화전 앞에 있는 밥그릇과 같이 생긴 희한한 석조물이 있는데, 일명 '봉발탑(奉鉢塔)'이라 부른다.(미륵신앙 사찰의 유사품-금산사 미륵전 앞 돌그릇, 법주사 미륵불 앞에 있었던 희견보살상이 머리에 인 밥그릇들) 미륵신앙 사찰은 강력한 중축성을 구성의 질서(하나의 축을 기준으로 불전-탑-석등 등의 구조물의 일렬배치)로 삼고 있다.▲중로전 일곽.관음전-용화전- ▲개산조당과 해장보각
    공학/기술| 2001.05.13| 11페이지| 1,000원| 조회(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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