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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사와 문화사, 역사
    모든 문화는 인간의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며, 역사를 통해 축적된 인간적 경험의 총체가 바로 문화이다. 그런데 모든 문화는 반드시 특정한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일정불변의 문화란 존속할 수 없으며 본래부터 고정된 고유 문화 또한 역사적으로 계속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전통 문화나 민족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숭상은 민족적 자긍심을 넘어 자문화 중심주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특정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라 해도 인류사의 보편적 요소가 내재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 문화가 어떠한 독자성을 내포하든 간에 다른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그 문화 내용이 풍부해지고 다양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일부 국가들은 민족 문화가 폐쇄적으로 보존됨으로써만이 도리어 발전한다고 믿고 국민을 잘못 이끌어 나간다. 이것은 문화의 역사적 본질을 망각한데서 기인하며, 문화적 균형감각을 상실한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 할 수 있으며, 나치 독일의 경우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문화는 결코 폐쇄되어 안에서만 순환하지는 않고 그 교류는 일종의 자연적인 현상이며 고도의 문화는 다른 문화권에까지 자연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외래 문화라 하더라도 일단 수용된 다음에는 자국의 문화와 유기적인 부분을 형성한다. 자민족 중심문화만의 고집은 도리어 역사적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고 문화적 자기 분열증에 걸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현재 지구촌의 인간들이 바라는 국가상은 군사력보다는 경제력 또는 문화력을 갖춘 국가상이다. 왜냐하면 경제력은 국민의 부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자원이며, 문화의 힘은 한 국가의 주체적인 메시지를 국제화 할 수 있는 귀중한 원동력이기 때문인 것이다.문화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의 잠재력을 창조적으로 개발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당연히 교육의 중요성은 강조되지 않을 수 없으며, 현실적으로 문화력을 키우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교육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교육제도와 의식의 기본적인 개혁을 통한 질적 향상 없이는 경제와 문화의 경쟁력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값진 삶은 문화적인 삶이며 경제력은 이 양질의 문화적 삶을 위한 물질적인 자원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힘은 경제력의 기반인 동시에 그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세계화가 진척되면 될수록, 국가·민족간에 문화마찰이 증가되는데, 이것은 국가간에 문제가 아니라 그 상층에는 언어, 종교, 풍속, 관습이 다른 집단 및 개인관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화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학교 교육에서도 이 문화를 인식키 위한 교육을 충실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세계사 교육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예전의 통사적 구성이 아닌 구조사적·사회사적 세계사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사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와같은 방향에서의 세계사 교육의 학습이야 말로 민족문화가 내포한 특성을 깨닫게 하고 보편성을 발전케 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민족 문화와 그 역사는 독자적인 개성을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범세계적 이해를 집중시킬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을 내포할 때 비로소 고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의 고급문화를 체계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의 세계사 교육은 민족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며, 개방 사회의 지구 규모의 역사 시대에 있어서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또, 여러 가지로 시도된 세계사 연구 방법들은 세계사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인류의 경험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은 특수한 것, 보편적인 것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희망이나 새로운 의도에 바탕을 둔 기대였다. 그리고 그 관심 대상도 전형적으로는 국가 ·문명 및 문화였으며, 그것을 여러 가지 유형으로 결합시킨 데 불과하였다. 세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문화의 축적이나 국가나 문명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 경험의 전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던 것이다.
    인문/어학| 2003.12.12| 2페이지| 1,000원| 조회(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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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프뢰벨의 모든 것 평가A+최고예요
    (2)프뢰벨의 유아교육사상*유아교육은 출생시에 천부적으로 지닌 완전성과 선이 발달하는 과정을 조장하는 것 (전성설)*연속발달관, 수동적, 방어적, 보호적인 교육방법- 프뢰벨의 아동중심적인 수동적 교육원리는 유치원 교육의 원칙*어린이의 놀이를 매우 중요시- 은물, 스스로의 창의력함양, 회화 능력부여6. 신인문주의(19세기)□ 계발주의 교육 -19C 독일중심 전개등장배경① 그리스 교육의 재부흥 추구② 역사주의 민족주의 성향고취③ 산업혁명의 영향④ 계몽주의 교육(기계론적 사상)전면부정 (유기론)⑤ 보상교육의 실시, 전통적 형식교육체제 반발.교육의의인간중심 자유방임적 교육교육목적자유시민 양성교육내용초등교육에 치중교육원리자발성등 8대교육원리(합자연성,노작,개별화,직관...)교육방법개별+직관+귀납교수사 상 가페스탈로찌. 프로벨. 헤르바르트교육특성① 인간붕심 자유방임교육. 일체의 지시 통제를 배제② 노작 중심교육 활동. 지덕 조화된 정인교육 전개③ 후조운동(여행,탐사,견학)전개≒ 화랑도 최치원 난링비"심신단련"④ 고전독서이론. 독서 통해 합리적 의식구조. 가치관⑤ 전원학사운동. 의식화 운동⑥ 인간중심 교육실현(11)Fr bel①유치원 창시자(일반유치원 : 중산층 자녀대상, 폐쇄된 유아교육)②교육목적 : 인간의 내재된 神性의 발견(아동의 천부적 잠재능력 발휘 종교교육 강조)③교육원리 : 합자연성의 교육, 통합의 교육, 계속성의 교육, 자기활동의 교육우주만물을 하나로 통일 = 전인양성과 관계④교육방법 : 직관교수, 개별교수⑤유아교육과정 : 자연학(종교교육을 말한다)⑥교육내용 : 자기표현 활동을 위한 유희, 수공, 노래, 언어, 율동, 도화⑦교육저서 : 인간교육, 어머니의 노래와 사랑의 노래⑧귀납적 수업원리*은물(gifts of good)을 통한 유아교육발전장난감 = 감각교육 = 노작교육 cf) Montessori 감각교육은 말했지만 노작교육은 ×33. Frobel(1782~1852)의 교육사상 : 유치원의 창시자, 은물(恩物)에 의한 교육 강조1) 교육목적 : 아동의 선천적 잠재력 계발 (神性의 계발)2) 교육내용 : 노래, 언어, 율동, 표정, 유희 등 자기활동을 강조하였다.3) 교육원리방법(1) 통일의 원리 : 萬有內在神論의 입장에서, 모든 만물은 모순, 분열, 투쟁이 아니고 조화, 통일,융합되었다는 것이다. 신성은 곧 창조성, 활동성으로 자유로운 교육, 자기활동,노자활동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다.(2) 자기활동의 원리(자기표현의 원리) : 신성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타율적, 간섭적인 교육은 거부되어야한다. 자기활동이란, 자기자신의 동기에 의하여 결정 되고, 자기자신의 흥미로부터 생기는것이며,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하여 지지되는 것이다.(3) 놀이 및 작업의 원리 : 작업적 놀이는 은물(아동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여러 가지 형태를 구성하는 탁상놀이이다. 은물을 통해 감각기관을 훈련하고,우주의 이법을 깨닫고 신성을 인식하는 것이다.(4) 연속적인 발달의 원리 : 인간의 성장은 각 단계에 있어서 끈임없는 연속이며 단절이나 비약을 없다는 것이다.(이 교육원리는 Dewey의 교육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5) 프뢰벨(1) 생애와 저서프뢰벨은 1782년 독일 튀링겐의 기독교 목사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성직에만 열심인 아버지와 불친절한 계모 슬하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1797년부터 2년간 삼림원으로 일하게 된다. 숲속에서의 명상은 그를 그의 선천적인 신비주의로 인도했고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자연과 자연법칙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갖게 되었다. 17세에 삼림원을 그만둘 때에 그는 그가 일생을 두고 강조했던 자연의 통합성에 대한 아이디어에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예나 대학에 가서 여러 방면의 공부를 하면서 통합과 연결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던 중 페스탈로치의 영향을 받았던 한 친구의 권유로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고 페스팔로치의 학교를 방문하여 2년간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1811년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대학으로 와서 과학과 광물학을 공부하던 중 독일전쟁에 참여하게 된다.프뢰벨은 1826년 「인간의 교육」을 출판하게 된다. 그후 1830년 뒤늦게 아들을 갖게 되어 이 아기의 성장과정을 세밀히 관찰한 결과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유아에 대한 프뢰벨의 직접적인 연구의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1837년 50세가 되면서 프뢰벨은 은물과 작업에 대한 연구와 구체화를 시도하였고, 1840년 최초로 유치원(Kindergarten)이라는 이름으로 유아를 위한 교육시설을 설립하게 되었다. 1843년에 그의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인 「어머니와 유아를 위한 노래집」을 발간하게 된다. 그 당시 독일이 전반적으로 그러했듯이 프뢰벨도 사회개혁에 열정과 희망을 갖고 있었다. 프뢰벨은 1852년 To Womankind라는 긴 편지를 마지막으로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던 생애를 마쳤다.(2) 교육사상페스탈로치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철학자이며 교육가인 프뢰벨은 유아교육사상 처음으로 “킨더가든(Kindergarten)”이라는 말을 창안하여 사용하였다. 프뢰벨은 또한 놀이감을 특별히 고안하여 이것을 은물(恩物)이라 불렀다. 이것을 통해서 아이들이 우주의 조화, 다양성, 상호관련성 등을 배우게 되었다. 공, 정육면체, 원통에서 찰흙, 종이 오리기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유아교육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최초의 체계적인 교구개발이라 할 수 있겠다.(3) 통일의 원리신과 인간과 자연과의 불가분의 관계는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의 3자에 걸치는 공통된 교육사상이었다. 그러나 루소는 자연성에,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에 그 중심점을 두었는데 반하여 프뢰벨은 신성에 그 중심점을 두고 있었다.프뢰벨은 전일적인 구조로서의 인격을 발전시켜 “신성”을 발현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인간에게 내재한 “신성”을 충분히 전개시키는 것이 프뢰벨이 보는 교육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이 “신성”은 프뢰벨에 의하면 곧 창조성, 활동성인 바 어린이의 성장은 이 창조성, 활동성에 의하여 자라난다. 따라서 어린이의 성장은 결국 신성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신성은 자유스러운 교육, 자발적, 자기활동, 노작활동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4) 자기발달의 원리페스탈로치의 직관의 원리는 프뢰벨에 이르러 자기활동의 원리로 바꾸어졌다. 자기활동이란 자기자신의 흥미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힘에 의해서 기대되는 활동이다. 프뢰벨에 의하면 자기활동에 의해서 개개인이 ①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고, ② 자기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③ 자연과 인간의 양생명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인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프뢰벨은 교육을 창조적 자기발달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발달은 그의 소위 “내적발달”에서 생겨 나오는 것이며, 어린이들의 자발적 자기활동으로 달성된다고 하였다.
    교육학| 2003.11.20| 4페이지| 1,000원| 조회(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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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기] 이광수의 모든 것 평가B괜찮아요
    ■성장과정에서의 영향이광수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그의 집안은 결코 내력이 없는 집안이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의 집안이었다. 이광수의 자서전을 보면 이광수는 그의 부모를 창피하게 여기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광수는 그의 아버지인 이종원 (李鍾元)을 매우 허황되고 사치스러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광수의 아버지는 만인계라는 도박에 빠져 집안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할때에도 집이 작으니 내년에는 더 큰 집으로 이사해야 겠다고 말하는 등 (인용: 그의 자서전) 자기 분수를 몰랐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 어렸을 때 받는 주변의 영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렸을 때 받은 영향은 평생 자신의 사고 방식을 결정한다. 영화 감독, 작곡가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의 바탕 안에서 사고방식을 결정하고 그 범주 안에서 행동하고 자신의 일을 진행한다. 이광수 역시 이 사고방식 안에서 모든 그의 작품을 썼을 것이다. 이광수의 사고 방식이란 바로 그의 부모인 이종원의 허황됨이다. 이는 그의 1차 일본 유학 생활 후의 말들을 보면 잘 알수 있다. "나는 문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학부대신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총리대신이 된다." "나같은 장한 사람이 너희들의 선생으로 오는구나." (인용: 내가 속할 유형)이광수는 부모를 잃은 후 동학에서 서기로 일하게 된다.이광수의 자부심은 동학에서 서기로 일하던 시절에 주로 형성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학은 당시 떳떳한 단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문서를 전할때는 항상 위험이 수반되었다. 이에 어린 이광수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에게는 그리 큰 감시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이광수는 기밀편지들을 전해주는 일들을 하면서 무언가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남들은 못하는 일들을 하며 동학교도들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며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손병희의 영향동학에서 이광수는 동학의 교주인 손병희의 '삼전론'을 배우게 된다.손병희의 삼전론은 외세의 힘과 실력은 문명개화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문명개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광수는 손병희의 이 삼전론 주의에 의해 나중에 동학에서 갈라져 나오는 일진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손병희는 당시 정세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손병희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1노서아는 지리관계로 분명희 불리하다.2노서아의 개전 목적은 수 천리 밖에서 단지 부동항을 얻는 데 있으므로 전쟁에 대한 정신적 동기가 극히 박약하다. 일본으로 말하면 생명을 내기하는 싸움이니 정신적 동기가 강하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승패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3군략과 병기의 문제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청전쟁 당시의 일본과 다르다. 왜냐하면 일본은 독일의 군략과 무기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경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은 노서아에 선전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무상의 책(策)이다. (인용: 삼전론)이러한 손병희의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은 일본을 돕게 된다. 이러한 손병희의 사상은 상당히 예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상이 잘못전달 되고 내부의 분열로 인해 동학이 천도교와 일진회로 분열되는 등 혼란을 겪게 된다. 이광수는 동학에서 이러한 손병희의 사상을 접하고 이 사상을 그의 일생의 진리로 여기게 되었을것이라 예상한다.■안창호의 영향이광수는 그의 자서전에서 정신적 지주라고 밝힌 안창호를 만나게 된다.이광수는 안창호를 매우 좋아했으며 그를 존경했다. 이광수가 안창호를 존경할 수 있었던 배경은 도산의 홍사단 사상이 이광수의 사상과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광수는 본래 독립 운동을 정해진 범위내에서 합법적으로 하기를 원했다. 안창호의 사상이 이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광수의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고 볼수 있다. 나중에 이광수는 안창호에게서 준비론을 배우게 된다. 안창호의 준비론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금 당장은 힘이 없어 독립을 할 수 없으니 인격을 도야하고 무실역행으로 힘을 기르자!!"이다.■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광수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받아온 영향들이 반영된 새로운 민족운동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민족개조론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2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3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되는 신의 있는 자가 되게.4고식, 준순 등의 겁나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어든 만난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게.5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게.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하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 게.근검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게.가옥, 의식, 도로 등의 청결 등 위생의 법칙에 합치하는 생활과 일정한 운동으로 건강한 체격을 소유한 자가 되게, 함이니 이곳을 다시 줄여 말하면 덕·체·지의 3육과 부의 축적 , 사회 봉사 심의 함양이라 할 수 있읍니다. 조선 민족 중에 이러한 사람이 많게 하여 마침내는 조선민족으 로 하여금 참되고, 부지런하고, 신의있고, 용기 있고, 사회적 단결력 있고, 평균하게 부유한 민족 이 되게 하자 함이다. (인용: 민족개조론)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은 우리 민족을 개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내용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민족 개조론은 민족의 열등함을 드러내고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반민특위의 기소이광수는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에 기소당하게 된다.기소 내용은 다음과 같다.「매일신보」「경성일보」「삼천리」등 각 신문 급 잡지에 발표한 논문급 담화와 각 강연회에서 토로한 괴변이 매거(枚擧)키 고난(固難)할 만큼 다수하였으나 그 일부만을 소개하면 여좌(如左)하다.1. 1940년 2월 16일 「매신」에 '국민문학의 의의'라는 제하에 민족문학을 말살시킬 것을 강조.1. 동년 7월 1일 「매신」에 논문을 발표하여 조선문학의 황민화를 주장.1. 1941년 1월 21일 「경일」에 논문 '중대한 결심'을 발표.1. 동년 3월11일 「매신」에 논문 '문인의 웅소'를 발표.1. 동년7월 6일 「매신」에 '인고의 총후문화'라는 제하에 붓은 총이니 붓으로써 일본을 지키자고 괴변.1. 동년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임전국단 주최로 개최된 미·영타도대강 연회에서 '사상도 미·영 격멸' 이라는 연제하에 괴변을 토로하고,1. 1942년 1월 12일 「생활의 일본화」를 발표.1. 동년 5월 12일 「경일」귀빈실에서 조병상, 이숫종등과 왜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하였고,1. 1943년 7월 28일 「매신」에 '징병제의 감격과 용이' 라는 제하에 논문을 발표하여 징병재로 반드시 참다운 황국시민이 되자고 역설.1. 1944뇬 1월 1일 「매신」에 시 '새해'를 발표하여 새해를 맞이 함으로써 참다운 황국시민이 되자고 역설.1. 동년 8월 13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적국항복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라는 연재하에 문학도 결전이라고 대사자후하였고,1. 1945년 1월 17일 부민관에서 개체된 처우개선감사대회에서 '내 모든 것을 드림' 이라는 광태적 인 시를 발표.1. 동년 8월 7일 '아세아의 운명' 이라는 제하에 비통한 결의를 표시한 논문을 「매신」에 발표하 였다.■결론이광수는 사람들에게서 돈키호테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그의 허황된 생각들과 남들은 하기 어려운 괴상한 행동 때문이다. 이광수의 행동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친일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민특위에서도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자신은 친일행위를 한적이 없다고 외쳤다. 이광수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해온 이광수를 형성한 세가지 사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인문/어학| 2003.11.20| 4페이지| 1,000원| 조회(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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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감문] 경복궁을 다녀와서
    추운 일요일 아침, 한국사 수업을 경복궁에서 하기로 돼있어서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 역으로 향했다. 고향이 지방이다 보니 경복궁에 와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 대게 마니 설레고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도착해보니 이미 많은 친구들이 먼저 와 있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앞에서 만나기로 돼어있어서 박물관도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박물관은 보지 못했다.먼저, 광화문부터 답사를 시작하였다. 광화문은 경복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조선시대의 관료들은 육조거리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며 걸어와서 광화문을 지나서 궁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육조거리는 세종로로 바뀌었고 그 세종로를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만이 광화문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 걸어가는 사람들은 관화문에 접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세종로와 광화문 앞을 지나가는 도로 때문에 적당한 거리에서 광화문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광화문에 다가가면 이제는 너무 가까와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원래는 저만큼 정부 종합청사 정문 앞 정도 앞으로 나가 있었다고 하는 해태가 광화문 바로 옆으로 옮겨와 있었다. 해태는 시비를 잘 가리는 성질이 있어서 옳은 사람 편을 들고 그른 사람은 공격한다고 한다. 그 해태는 조선시대 저만큼 있던 사헌부, 바로 관리들을 규찰하는 관서인 사헌부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태의 실질적인 기능은 바로 여기서부터는 궁궐의 영향권이니 말을 내리라는 표지라고 한다. 그런 해태가 광화문 바로 앞으로 밀려와 버렸으니 현대판 말인 자동차들이 바로 궁궐 정문 앞을 정신없이 지나 다니는 것인가 보다. 광화문은 현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과거속에 묻힌 유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리감은 조선시대와 현대사회의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이제는 해체된 박물관 아니 총독부 건물의 뒤편, 근정문 앞은 옛날에 금천이라하여 궁궐 정문을 들어서서 다시 문하나를 더 들어서면 건너게 되어 있는 개울이 흐르던 곳으로서 그 개울에 걸쳐 있는 영제교라고 하는 금천교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영제교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조금 지나 근정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왼쪽으로 꺾이는 곳에 있었다. 근정전으로 들어 섰을 때 근정전은 상당히 위엄있고, 장대한 모습을 하고 거기 앉아 있었다.근정전은 공사중이라서 그 내부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남쪽 정면 계단과 그리로 향하는 길은 삼등분이 되어 있었다. 가운데는 왕만이 다니는 곳이라 한다. 계단 중앙에는 봉황 두 마리를 조각한 돌이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왕은 가운데로 다녔다면 돌을 밟고 올라갔나? 그게 아니라 가마를 타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로 간 결과가 된다고 한다. 근정전은 밖에서 본 위용과는 달리 내부는 용상이 있고, 일월오봉병이 있고 그랬지만 썰렁했다. 근정전 양 옆에는 구리로 만든 향로 같은 것이 놓여 있었는데 정(鼎)이라 하는 솥으로서 왕권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안에는 모래가 담겨있고, 우유 팩과 담배 꽁초가 담겨 있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이지만 궁궐 여기저기 놓여있는 쓰레기통이 그 정을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정까지도 쓰레기통인지 알고 거기다 그걸 버렸나 보다. 무죄가 죄가 되는 장면이었다. 쓰레기통의 모양을 하필이면 솥, 그것도 왕권의 상징인 정 모양으로 만들었나. 그 아이디어가 기발하기는 하지만, 참 무식의 소치라는 생각은 어쩔수 없었다.계단을 내려 와 서쪽으로 나가는 문을 나서니 오른편으로 낯익은 경회루가 보였고, 경회루 앞에 있는 건물은 수정전이었다. 원래는 집현전이 있던 자리인데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수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것이다. 아, 집현전. 세종대왕때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등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긴 곳이 바로 여기구나. 수정전 동편이 왕이 거하는 공간이고, 서편 지금 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곳이 궁궐에 들어가 있는 관아 건물들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그 중간지점, 왕과 신하들이 만나기 편한 여기에다 집현전을 세운 의도를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그 건물 실제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의미상으로는 정면 10간, 측면 10간으로서 40간이나 되는 것이라고 한다. 기단이 높아 지면에서 높이 띄어져 있고, 옆으로 가 보니 아궁이가 있고 뒷편에는 굴뚝이 두 개나 있었다. 말하자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특별히 배려해 지은 집이다. 고종 때 이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집현전을 우대하던 그 뜻을 살린 것일까. 그전에 경복궁에 오면 저 뒤의 경회루만 관심을 갖고 보았는데 이제는 그보다는 이 건물에 어린 역사의 자취가 훨씬 더 큰 게 아닌가 해서 새삼 다시 보였다.만원짜리 지폐에도 나오는 경회루는 정면 7간, 측면 5간으로 35간에 다포식 팔작 지붕 집이다. 밑의 돌기둥을 보면 바깥기둥은 네모난데 비해 안의 기둥들은 둥글다. 돌기둥 위에 누마루 형태로 지어진 집으로 누마루는 맨 가운데 세 간이 제일 높고 그 세 간을 사방으로 둘러싼 12간이 그보다 한 15cm 정도 낮고, 다시 그것을 둘러싼 20간이 더 낮은 식으로 층이 지어져 있었다. 제일 높은 맨 가운데 세 간은 당연히 왕을 위한 자리였다. 경회루는 밖에서 구경하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연회를 하며 밖을 구경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따라서 그에 알맞는 치장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기둥과 평방에는 낙양각을 달아서 기둥과 평방의 직선으로 바깥 풍경이 끊기는 것을 자연적인 곡선으로 보이도록 처리하였다. 경회루 연못 속에는 다른 연못들과는 달리 네모난 섬이 두 개가 있었다. 이는 연못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흘러드는 어느 부분에 고여 썩지 않고 골고루 퍼져 흐르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연꽃도 가득 차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리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우주와 자연을 존중하는 동양적 과학 원리에 따라 만든 것이고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다시 뒤 편으로 찾아 간 곳은 자경전이었다. 자경전 담을 들어서니 무언가 소란스러운 밖의 분위기 하고는 달리 사뭇 아늑하고 고요했다. 단지 작은 담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다르다니 우리나라 건물의 특성을 새롭게 느꼈다. 자경전은 고종대 처음에는 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곳이라 한다. 대왕대비란 왕비 위에 대비, 대비위에 왕대비, 왕대비 위에 대왕대비 식으로 왕의 할머니 혹은 증조 할머니를 가리키는 말로서 고종대에는 흔히 조대비라고 불리던 신정왕후 조씨,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따님을 말한다. 신정왕후 조씨는 사후에 익종으로 추존 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부인이다. 그 사람은 고종을 왕으로 지명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아들로 삼은 장본인으로서 처음에는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어 막강한 권세를 행사하였다. 그런 사람을 위해 지은 것인 만큼 그에 걸맞는 규모와 치장을 하고 있었다. 주위 담들은 무늬를 넣은 꽃담이었고, 특히 뒷 편의 굴뚝은 십장생을 비롯해 문양이 다채롭게 새겨져 있었다. 굴뚝 위에 있는 조금한 집 모양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면 참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관리가 허술해서 그냥 대충 담에 시멘트로 얹어 놓았다. 저렇게 해 놓고도 문화재라고 지정해 놓은 것이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세심하게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자칫 단조롭기만하고 답답할 담과 시커먼이 흉물스러울 굴뚝을 거꾸로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은 그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여성의 집을 이렇게 아늑하고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기술은 오늘날 아파트를 겉도 속도 천편일률적으로 만들기만 하는 건축가들이 배워야 할 미학이다.
    인문/어학| 2003.11.20| 3페이지| 1,000원| 조회(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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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 술과 건강에 대하여
    술과 건강에 관하여--------------------------【술의 정의】주정(酒精)과 알코올분 1%이상의 음료를 통칭해 술이라 한다. 술은 알코올이외에도 당분, 흰자질, 무기질 등이 포함되어 있다.【술의 인체에의 영향】▶ 단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알코올은 중추신경계의 활동을 저하시킵니다. 약간의 알코올을 섭취하여도 뇌의 일부기능이 저하되어 자제감을 잃게 됩니다. 그 결과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의 다행감, 친근감, 평소보다 말이 많아짐, 또는 공격적이고 난폭해지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의 알코올이 신체에 섭취되면 그로 인해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혈관확장, 약간의 혈압하강이 있을 수 있고 식욕을 증대시킨다든지, 위액분비를 자극하고 소변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알코올의 만성효과는 내성과 의존성입니다. 내성은 소위 " 술이 는다"는 것으로 술을 마신 후에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효과를 계속 얻으려면 알코올의 양이 늘어나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잔이면 취하던 사람이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는 똑같은 정도로 취하려면 두 잔을 마셔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식으로 알코올에 대한 내성이 강화되다보면 결국은 알코올에 의존하게 됩니다. 알코올에 대한 의존을 흔히 알코올중독이라고 합니다. 알코올 의존은 갑자기 알코올을 끊을 경우 금단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금단증상이란 신체에 어느 정도의 알코올이 남아 있지 않으면 '손을 떨거나', '진땀을 흘리거나', '헛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증상을 겪는 것을 말합니다.【술의 사회적 영향】▶ 음주로 인한 경제·사회적 비용은?술이 사회에 끼치는 경제적 손실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술 때문에 지출된 전체 경제적 비용은 1995년에 약 9조 5,670억원( GNP의 약2.75%)으로 추정됩니다. 술로 인해 생기는 질병 치료에 드는 직·간접 치료비와 생산성 감고, 술로 인해 제명까지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에 대한 비용, 술 때문에 생긴 사고 등에 의한 재산피해액, 이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한 행정업무비용과 술값을 포함하면 그 비용은 약 13조 6,230억원(GNP의 약3.9%)이 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음주가 가정생활에 미치는 영향술이 지나치게 되면 자신의 신체와 정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의 정서와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실제로 알코올중독자의 배우자들은 불안, 우울, 강박, 적대감을 보이며 부부간의 친밀도도 낮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알코올중독자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정서적인 피해로는,㉮ 아이들이 감정표현을 억제하며 의존적인 성향을 가직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에게 해로운 방법으로 두려움이나 분노를 표현한다.㉰ 사람들을 기만한고 조정하는 것을 배운다.㉱ 아버지의 술버릇을 자신의 행동과 연결하여 죄책감에 빠질 수 있다.【음주와 폭력 및 범죄】술을 마시면 자신에 대한 자제력을 잃기 쉽고 공격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즉흥적인 판단을 쉽게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폭력이나 범죄에 관련될 위험이 높습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살인범 중 72.5%가 살인 당시 술을 마신 상태이었으며 남자 살인범의 42.3%, 여자 살인범은 12.6%가 기억을 못할 정도로 취한 상태였습니다. 술 때문에 살인, 절도, 폭력을 저지르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범죄를 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술 마신 사람들이 범죄를 많이 저지르고 또한 술 마신 사람 중에 그 피해자도 많다는 점에서 술이 범죄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적당한 음주량】하루평균 알코올 40g (소주 반병, 맥주1ℓ) → 보약하루평균 알코올 80g (소주 1병, 맥주 2ℓ) → 무해무득하루평균 알코올 150g 이상 (소주2병, 맥주 4ℓ) → 독약【술먹는 사람이 알아야 할 술 다스리는 법 】①소주 한 병 이하는 매일 마셔도 건강인의 간을 손상시키지 않는다.②적당한 술은 HDL을 증가시켜 심근경색에 의한 사망률을 50%나 감소시킨다. 그 효과는 포도주뿐만 아니라 소주나 맥주도 마찬가지다.③스크레이트는 삼가라. 도수가 높은 술은 위점막을 손상시킨다.④안주를 아무리 먹어도 과음으로 간을 손상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영양장애를 막고 위를 보 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안주를 먹어야 한다.
    인문/어학| 2003.11.20| 2페이지| 1,000원| 조회(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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