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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 근대화론 고찰
    식민지 근대화론 고찰Ⅰ. 서론식민지 근대화론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하에서 조선, 즉 한국이 근대화되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에 대하여 한국인으로서는 많은 반발이 있고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주장이나 이를 주장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와 근거들이 있다. 단지 한국인으로서 식민지배의 역사로 인해 일본이 싫고, 식민지배의 역사가 수치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들은 무엇인가?Ⅱ. 본론1.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과 근거1) 토지조사사업: 봉건적인 농업에서 벗어나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다.일제는 효율적인 조세징수기구를 마련하고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등기제도의 도입과 토지면적의 정확한 실측을 이루는 등의 제도적 정비를 이루었다. 무조건 조선인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할 목적이 아니였음은 1920년대 토지소유현황에서 97.4%가 사유지로 인정되어 조선인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식민지 이전의 조선사회에서 토지소유구조는 전근대적, 중간적 지주제이거나 전근대적 소농사회, 혹은 국가의 수조권적 지배가 강력했지만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토지에서의 사적 소유권이 제도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2) 사유제 확립1912년 일본의 민법이 이식되면서 ‘소유권’이 생겨나고 재산의 양도가 자유로워졌고 특허권과 저작권과 같은 무형의 지적재산권도 나타나게 되었다.3) 신분제 해체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철폐되었다지만 제대로 지켜질 수 없다가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일제에게 있어 조선의 신분 차별제도는 자신들의 동화정책을 가로막는 장애물과도 같았기 때문에 양반의 권위를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작로를 닦는 식의 마을 주민 노력동원에서 양반가 자제들이라고 부역에서 면제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민들은 양반들도 자신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시민평등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물론 4.5%에서 1938년의 18.7%로 증가하였으며 같은 기간 동안 공장수는 110개에서 6590개로 늘어났다. 또 시장거래액은 1930년에 1억7천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40년대에는 5억9천만원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체 노동자 수도 1943년까지 175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1940년대 초에 이르면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30년을 전후한 공황기를 제외하고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경제성장을 보였다.5) 사회 간접 자본 육성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직후부터 식민지화 기초공사로서 교통, 통신, 금융 등에서 사회 간접자본을 확충하였다.식민지 근대화론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장기적 관점과 세계사적 시야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따르면 전근대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본질은 자본주의의 도입과 발전이며 한국은 비록 부분적이고 왜곡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 식민지시기에 이를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식민지 체제를 무조건 ‘수탈과 퇴보’의 시기로 보지 말고, ‘발전과 응전’의 시기로 보아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식민지 체제를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면서 위와 같은 이익을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그저 일본은 조선을 수탈해가고 식민지배의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역사적 사실과 통계 근거자료들을 무조건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일제가 조선을 무조건 수탈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조선의 사회와 경제 수준을 어느 정도까지는 일본과 비슷한 것으로 끌어올리고자 하였고 일본의 물질문명을 조선에 전파하였다. 제국주의적 지배와 수탈을 위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근대적인 제도와 물적 토대가 구축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때문인지 실제적으로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치 때에는 중인들 중에 친일 협력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어 농촌 구석구석까지 일본 총독부가 효율적으로 지배하여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쿠즈네츠가 개념을 정립하였다. 그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1인당 생산이 적어도 30-40년 이상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때 근대적 경제성장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1인당 GDP가 증가하려면 생산이 인구 증가 속도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이 가능하려면 산업혁명이나 근대 농업혁명 같은 획기적인 생산기술의 변화가 따라야 하는데 그런 생산기술의 혁신은 근대가 되어야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쿠즈네츠의 근대적 경제성장이 일제 강점기에 있었는가?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근거로 내세운 일제강점기 조선의 GDP를 살펴보면 이러한 경제적 성장이 관찰되어 쿠즈네츠의 근대적 경제성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GDP가 잘못 추계되었다라고 비판한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근거로 내세운 일제 강점기 조선의 GDP추계가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이 추계 중 1910-17년의 통계가 조선총독부의 통계를 사용하였는데 이 통계에서는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성되기 전 경지면적통계가 부정확해 초기에 경지면적이 낮게 통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당연히 그 경지에서 생산되는 생산물 통계가 올바를 수 없고 각종 농산물 생산량 통계그래프에서 1918년도를 기점으로 그 변화추세가 확연히 다르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농업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던 1910년대의 GDP도 그 때문에 과대평가되어 매우 빠르게 증가하는 것으로 추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일본의 전쟁 패배로 1인당 GDP가 급락하는 일제 말기의 상황이(1941-1945년)이 통계에서 빠져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경제붕괴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자들은 조선의 1인당 GDP그래프를 수정하여 제시하였고 이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동안 1인당 GDP 증가가 문에서는 일본인 자본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1930년대가 되면 조선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감소 경향이 뚜렷했다. 이것은 조선인의 1인당 GDP 증가 속도가 조선 전체의 평균보다는 훨씬 느렸음을 의미한다. 조선인의 1인당 GDP만 생각해본다면, 일제 강점기에 쿠즈네츠적 근대적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주장은 더 더욱 성립하기 어렵다.어느 쪽 주장이 맞건 사실 이런 경제적 지표만으로 근대화를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경제성장만으로 그 사회가 근대화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근대화란 봉건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동하면서 산업화를 토대로 전통사회에서 벗어나는 양적측면도 나타내지만 질적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회적 통념 측면에서 보아도 한 사회가 ‘근대화 되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단순히 그 사회의 경제적 성장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적 측면 외에도 사회 전반적으로 과거 불합리한 모습을 벗어버리고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화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에 동의한다. 근대화는 공업화와 국민소득 증가와 같은 경제적 측면 외에도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도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즉 정치적으로는 인권이 보장되며 대중의 정치참여가 확대되고 사회적으로는 시민적 자유의 확립과 합리주의가 확산되며 개방적 사회구조로의 전환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근대화는 정치, 경제, 사회적의 종합적인 측면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일제 강점기 조선의 경제성장이 없다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으나 온전한 경제성장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의 경제성장이라기 보다는 일본의 경제성장이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한발 양보하여 조선의 경제성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조선사회에서 위에서 언급한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 근대화로의 전환이 있었는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2)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의 고찰일제 강점기 정치 사회적 분위기는 일제의 조선 통치 형태의 변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일제 한국인이 정미과 피혁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또한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여 조선을 무력적으로 억압하였다. 헌병 경찰은 치안업무와 함께, 독립운동가 색출 등 민생 전반에 관여하였는데, 여기에 당시 통치의 억압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제도가 조선 태형령으로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던 태형을 부활시켜 한국인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한국인의 각종 단체가 해산당하였다. 1911년 신민회를 해산시킨 105인 사건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일제는 신문지법, 출판법, 보안법을 통해 한국인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이로 인하여 참다 못한 조선인들이 1919년 3.1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일제는 조선 통치 방법을 바꾸게 되었다.② 문화 통치기 (민족 분열 통치기, 1919-1931년)3.1운동 이후 일제는 강압적 통치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여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전환하여 문화통치를 실시하게 된다. 회사령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제한적으로나마 허가되기 시작하였다. 교육적인 면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근대화의 척도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헌병경찰제도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지만 정작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더 강화되었고 전문적으로 독립운동가 색출을 위한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또 신문에 대한 검열, 삭제, 폐간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민족운동을 방해하였다. 또한 문화통치를 통해 친일 관료들을 키워 한국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의식성장을 오도하며,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초급 학문과 농업 교육만을 갖고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③ 민족 말살 통치기 (1931-1945년)일본은 한반도를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선회하였다. 1937된다.
    인문/어학| 2016.05.07| 6페이지| 5,000원| 조회(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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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선교의 이해 (이현모) 독후감
    필독서 레포트도서명: 현대선교의 이해 저자: 이현모[제 2 장 선교의 성서적 기초]선교는 성경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선교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선교를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라고 정의한다면 선교는 창조 때부터 시작되어진 하나님의 중심적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교적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인간에 대한 모든 역사는 선교적 사건이다. 때문에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활동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선교적 본질을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보편성이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은 모든 민족, 전체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 이방의 민족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나타나 있다.또한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이 구약에 잘 나타나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목적도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선교적 목적이었으며, 모세의 출애굽 때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또한 제사장나라로 부르신 소명이 있고, 이밖에도 선지서 곳곳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들이 나타나 있다. 주로 구약의 선교는 구심적 선교, 즉 이스라엘을 통해 주변의 이방들이 와서 보고 하나님을 발견토록 하는 선교의 방법이였다. 그리고 신약시대 원심적 선교로 옮겨지게 된다.이 신약성경은 선교사 문서라고 할 만큼 새로운 선교의 활동을 보여준다. 복음서에서는 선교에서 전해야 할 핵심내용을, 사도행전은 선교역사의 모델을 제시하고 서신서는 대부분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중 기록한 것이다.신약에서 나타난 선교를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은 선교사로서 오셨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으로 오신 선교사이시다. 물론 예수의 메시아직분은 십자가 복음의 완성이지만 이 복음과 복음의 전파인 선교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즉 현대용어로 선교사 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복음전파의 개념을 넘어서서 사회, 정치적 관심을 강조한 총체적 복음전파에 관심을 돌리고 이 총체적 복음전파에서 복음적인 면을 좀더 강조하여 확대된 복음전파를 제창하기도 하였다.이후 국제선교협의회는 세계선교협의외(WCC)와 합병되어 세계선교와 복음화 분과로 되었다.1952년 국제선교협의회의 빌링겐 대회에서는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가 제안되었다. 이 개념은 이전에도 제시되었던 내용이며 이것은 가나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신학‘으로 발전되었고, 이것은 웁살라 총회에서 WCC의 선교정의에 기본적 골격을 이루게 된다.교회는 단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행하시는 일의 협력자일 뿐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초점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주장으로 선교의 개념을 하나님->세상->교회로 바꾸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샬롬’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이 샬롬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필요에 따라 샬롬의 구체적인 내용이 출애굽, 죄사함, 빵, 치유..등으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교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지향하는 인간화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세속사가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역사이며 그렇다면 하나님->세상->교회의 도식은 타당하지 않다. 하나님->교회->세상의 도식이 타당한 것이지만 WCC측의 신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또한 샬롬의 정의를 내리는 부분에서 잘못되었다. 성경의 샬롬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화목이라는 영적의미로 사용되어졌다.WCC 선교신학은 1972-73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더 어그러졌다. 전통적인 회심과 경건의 개념을 부인하며 예수가 제시한 구원은 2000년전 팔레스타인 지방에 국한된 하나님의 샬롬이며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그것과 다른 무엇인데 그것을 연구하자라고 하였다. 결국 이 대회는 복음주의 진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결국 1974년 로쟌대회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신학을 정립하게 하는 주요 계기가 된다.-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정의복음주의 진영의 선교대회에서는 대화가능한가 이고 넷째, 개방형 결론인가?는 지속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결론이 최종 완결형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타종교의 이해와 대처세계는 급속한 변화와 세속화에 따른 지구촌화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다원주의적, 포괄주의적, 유일주의적 신학적 입장이 제시되었다. 타 종교에 접근 할 때 유일주의를 가진 기독교의 입장에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기독교의 유일주의는 구원의 진리에 대한 배타성이지 사람이나 상대에 대한 배타성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근거하되 타종교인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다.-21세기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방향성복음주의 선교신학의 흐름을 탈제국주의형, 경영적, 사회적책임을 강조하는 선교학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볼 때 성경적 근거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다문화권 상황하에서 성경 해석학의 문제가 대두되어지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제 5 장 선교의 문화적 측면]타문화권 선교가 자국내 교회개척과 가장 다른 차이는 문화가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효과적인 타문화권 선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문화라는 개념을 배워야 한다. 이런 문화학습을 ‘문화인류학’이라 부른다. 이 문화 인류학에 기독교적 전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 선교문화인류학이다.선교문화 인류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는 크게 ①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②타문화권 커뮤니케이션의 영역, ③선교사의 문화적응의 영역으로 나뉠 수 있다.-문화의 이해문화란 우리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영역에 관계된 개념이다. 즉 한 사회가 그 처한 환경 가운데서 올바른 기준이라고 공동으로 인정하는 것들의 집합체가 문화이다. 따라서 문화는 공동체에 따라 달라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도 변한다. 선교문화인류학에서는 문화가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올바르다고 인정되는 기준이므로 상대적인 것이기는 하나 인간의 문화보다 하나님의 계시는 더 상위임을 인정하고 성경이 문화를 향해 판단하고 수정을 요구할 수감, 실패감에 사로잡힘 등이 있다.이것을 극복하는 방안으로는 ①의도적으로 예수의 성육신을 계속 묵상한다. ②현지 문화를 이해하도록 노력한다. ③ 언어를 빨리 익힌다. ④문화충격의 과정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임을 이해한다. ⑤다양한 사회적 접촉을 시도한다. ⑥과거의 한국 생활을 빨리 잊는 것이 좋다.선교사의 문화적응을 돕는 이론중 하나인 본딩이론을 빌리자면 선교사는 선교지에 도착해서 가능한 많이 자신을 새로운 문화요소들에 노출시키면 각인능력이 있어 그 문화에 쉽게 익숙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선교사는 가능한 빠른 시간안에 자문화우월주의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자신의 문화적 기준으로 죄라고 판단하면 안되는 것이다.-문화에 대한 복음주의 그룹의 견해1978년 로쟌위원회의 협의회에서는 상황화의 성서적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예수님 자체가 타문화권 상황화의 모델인 것이다. 또한 성경 본문의 의미와 형식을 구분하였는데 의미가 형식보다 더 중요하며 역동적 등가의 원리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을 발견해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 죄의 보편성, 성자, 구세주되신 예수그리스도, 회심의 필요, 성령의 임재와 변화시키시는 능력, 교회의 교제와 사명,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복음의 핵심 주제임을 발표하였고, 문화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어서 개종했다고해서 이전 문화를 전체적으로 버릴 필요는 없음을 지적하였다.ex)아프리카의 일부다처제: 선교사들은 일부다처제를 문화적 전통의 요소가 더 큰 제도로 볼 경우 선교사는 음란에 연관된 결혼이나 이혼은 단호히 정죄하되 그렇지 않은 관습적 결혼에 대해서는 좀더 온건한 입장을 보일 수 있다.ex)아시아의 조상숭배와 기능적 대체: 이것의 가장 적절한 방법은 조상숭배의 종교적 기능은 철저히 배재하고 금하되 사외적 기능은 오히려 아시아권에서 권장하고 격려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가문내의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가문의 일을 돕는 모임을 형성하도록 적극 권장한다던지, 추도예배를 활성화시키고 교회의 중요한 의식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선교전략의 네가지 종류(데이톤,프레이져)①즉흥적 전략: 실제 무계획에 가까운 전략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간섭을 기대하는 것/ 사역의 지속성과 방향성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쉽다.②초기계획 전략: 시작할 때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세우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나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형/장기적인 면에서는 취약성이 있다.③상황형 전략: 지역별로 서로 다른 특별한 전략이 필요하다라는 전략/전략의 효율성을 평가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치우치게 될 가능성이 있음④표준형 전략: 한가지 계획을 모든 지역과 상황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전략/관리상 용이하고 평가도 용이하지만 현장에서는 무리를 가져오기 쉽니다.이 모든 전략형을 적절히 때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사용함이 필요하다.이 전략을 세울 때는 분명한 목표->대략적 전략->전술->개인적 사역게획 순으로 세워진다. 이 때 팀으로 사역을 할 경우 전략에 따라 사역의 구분이 이루어져서 각기 전술이 세워진다.오늘날 가장 바람직한 선교의 목표는 복음전도를 통해 구원받은자들로 재생산할 수 있는 토착교회의 형성이다. 이 목표에는 개인구원-교회의 설립-재생산 가능한 교회설립의 세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선교의 완성을 위해서는 교회의 재생산의 능력이 꼭 필요한데 이것은 교인들을 제자훈련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으로 이는 처음부터 교회개척을 그 존재사명으로 하도록 목표를 두고 시도해야 도힌다.-효과적 전략의 특성: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중심목표로 삼는다/총체적이어야 한다/성경적(성경적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 내에서)이어야한다/연구조사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결과지향적이어야한다 이런 특성을 기준으로 전략의 각 단계마다 평가하고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선교역사에서 발견되는 선교전략들1. 기독교 공인이전: 교회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의 시기, 아래의 요소를 현대에도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조직적이지 않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선교·무명의 평신도선교사들의 활약·교리보다는 행함과
    독후감/창작| 2012.06.13| 13페이지| 2,500원| 조회(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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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침례교회사 독후감 (허긴) 평가A+최고예요
    독후감 레포트도서명: 한국침례교회사 저자: 허긴내용요약: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를 짚어 올라가다보면 펜윅이라는 선교사가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펜윅 선교사의 사역 아래 한국침례교회의 역사가 이어져 옴을 알 수 있다.펜윅은 정규교육 뿐 아니라 신학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분명하고 확신에 찬 구원의 체험이후 선교의 소명을 받고 1889년 12월에 한국연합선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선교 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어떤 교단적인 특색을 중요하다 여기지 않고 다만 근본주의 신앙에 근거한 주님의 임박한 재림신앙을 가지고 사역하였다. 그는 신앙선교(faith mission)에 입각한 철저한 섭리주의 신앙으로 말과 지혜의 원하는 것으로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하는 사도행전적이며 초대 교회의 성서적 신앙정신과 모본을 지키려하였다.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리라”(롬19:20)의 신념아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오지선교”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신앙정신과 선교철학은 펜윅이 세상을 뜰 때까지 그의 모든 사역에 흐르게 된다.그는 어린 시절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인 매킨토시에게 순수한 신앙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북 침례교의 고든목사와 친분관계를 맺게 되어 1893년 한국을 떠나 잠시 귀국했을 당시 고든 목사가 운영하는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에서 선교훈련을 받으며 다시 임할 한국선교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러면서 고든목사와 피어선 목사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1894년 그는 캐나다에서 자신의 선교사역을 지원해 줄 한국순회선교회라는 하나의 독립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펜윅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1901년에 고든목사와 씽집사가 조직한 엘라 씽 기념선교회를 인수하여 자신의 한국순회선교회와 병합시켜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는 한국의 침례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침례교인”이라는 신앙정신과 교파관념이 전혀 없었던 펜윅이 침례교의 신앙정신을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구현하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의 선교 사업은 바로 이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는 토착적 선교방법을 채택하는 토착적 선교를 실천하게 되었다.1906년 엘라씽 선교회의 사업을 토대로 공주와 강경지방을 근간으로 하여 “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된다. 이즈음 펜윅은 신명균을 만나 그를 사역자로 세워 사업을 분담시켰다. 그는 신명균을 자신이 인수받은 엘라 씽 선교회의 재산과 함께 공주와 강경 지방에 있는 신자들을 관리하게 하기 위해 공주로 파송하였다. 펜윅은 신명균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동양의 문명에도 좋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선교철학과 방법론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후 펜윅은 신명균을 충청지역의 사역책임자로 파송하였는데 이미 침례교의 선교사역으로 뿌리가 내려진 공주, 강경, 칠산의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물려받은 신명균이 충청도의 사역을 조직화하고 확장하므로 펜윅의 한국 선교사업, 즉 대한기독교회의 조직은 은 본격적인 기틀과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엘라씽 선교회의 파송선교사인 스테드맨 선교사와 파울링 선교사 등의 전도사역으로 공주와 강경, 칠산에 교회가 시작되었고 이후 펜윅이 지휘하며 신명균 등의 사역자를 통해 본격적으로 교회의 기틀이 다져졌고 각 교회의 교인들을 자신의 전도사역에 동참시켰다. 펜윅은 공주에 성경학원을 세워 토착인 사역자의 양성과 공급을 활발하게 진행시킴으로 사역을 도모했다. 이 공주성경학원은 초창기 대한기독교회의 사역자들을 배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교단 조직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1906년 펜윅은 46개조의 교단규약을 채택하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성서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장 말씀에 일치 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약성서적인 교회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런 신앙정신 측면에서 침례교단의 특징이 드러난다.이 대한기독교회는 감목아래 직분이 나뉘어져 있었고 모든 직분의 임명권은 오직 감목에게 있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였다. 이 조직은 복음전도를 최대의 과업으로 지향하며 교단의 모든 사업을 추진하여 왔으며 국내 뿐 아니라 교단조직은 아니였다. 목사나 전도자는 “순회사역자”로서 특정 교회에 소속하지 않고 전국을 망라하여 한 구역을 일시적으로 담당하는 순회목사였다. 다른 직분들도 개교회를 보살피는 일보다는 가능한 한 불신자를 상대로 전도하는 일을 제일 과제로 삼고 전도사역에 치중하였다. 즉 대한기독교회의 모든 임원은 철저히 순회사역자이면서 순회선교사의 성격을 띤 복음전도자였지 특정 개교회에 속한 교인은 아니었다. 감목인 펜윅을 제외한 교단의 모든 임원은 전국을 순회하는 전천후의 순회선교사인 “권서순회전도자”들이었다. 펜윅과 그의 사역자들은 투철하게 성서적인 신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신자의 침례를 철저히 행하였고 중생의 체험과 성령을 강조하고 오직 성서를 신앙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았고 복음전도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이러한 신앙은 아주 이상적이였으나 편향적인 신앙도 지녔는데 주님의 임박한 재림신앙은 일체의 세속적 교육을 기피하게 하였고, 성령의 임재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성경연구를 부정하였고 세속교육을 거부하게 하여 교단의 지도자 배출에는 실패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이신득의 신앙을 너무나 과신한 나머지 율법폐기론자가 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에 대한 잘못된 강조는 기도와 경건의 훈련을 등한하게 만들어 주었고 헌금과 청지기 생활의 부실을 초래하였다.펜윅은 대한 기독교회를 철저히 비정치화의 교회와 신앙으로 무장시켰다. 한일 합방의 민족적 비극을 외면했고 오직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직접전도에만 매진하도록 독려했다.이 어려운 시기에 오히려 권서순회전도자들의 전도사역을 통해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고 국내 뿐 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의 빈들과 산골로 파송되어 해외선교사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들은 전도를 그리스도인으로 아주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앙생활의 생명으로 삼았고 성서 보급과 구령전도로 복음사역의 처음과 끝을 맺었다.1914년 펜윅은 감목의 자리를 이종덕 목사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파동으로 인해 몇몇 사람들은 교인들을 선동하여 교적 탄압이 적었던 평안도지역과 만주 간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중점 사역지를 옮겨 전도에 힘썼고 북방지역에서 재기의 바람이 불었다. 그러던 중 첫 순직자를 배출하였고 이것은 대한기독교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촉진제가 되었다.활발한 전도자들의 활약과 펜윅의 신약성서, 복음찬미 출판을 통해 사역에 박차를 가했고 한국의 어느 교단보다도 독경운동을 장려하여 모든 교인들은 성서숙독을 생활화 해왔다.1921년 일제의 강요에 명칭을 동아기독교회로 바꾸었다. 동아기독교회는 동북아시아의 급변하는 국제적 정세 변동과 더불어 수난의 시대를 맞이하였고 순교자들도 발생하였다.1924년 이종덕 감목은 전치규에게 감목직분을 넘겨주었다. 이 때 일제는 군국주의 체제를 한층 강회하기 시작하면서 하장 혹심한 박해와 순교의 피를 흘리던 어려운 고난의 시기였다.1933년 동아기독교회는 당시 펜윅의 교회의 세속화를 한탄하여 교회대신 양무리를 뜻하는 “대”로 바꾸어 교단의 명칭이 동아기독대로 바뀌었다. 이때 일제는 전시체제로 재편하면서 한국에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였다. 그중 하나로 천왕 숭배의 이데올로기를 강제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해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강요하였다. 동아기독대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불복할 것을 각 교회에 당부하였고 많은 교인들은 거부하여 예배당을 폐쇄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교회들은 신앙의 열기가 식어지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1935년 펜윅이 생애를 마친 이후 1940년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대에서 동아기독교로 변경했다. 동아기독교는 원산사건과 더불어 교단의 지도자 32명이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는 교단적 위기를 맞았고 마침내 1944년 일제에 의하여 교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전국의 교회건물은 폐쇄 조치되었고 교회의 대지와 건물은 매각하여 국방헌금에 납입시켰다. 예배 처를 잃은 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타 교단으로 가거나 이집 저집으로 다니며 예배드리게 되었다.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북방에 있던 동아기독교의 교회들은 북한에 귀속됨으로써 일시의 개교회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런 교단의 제도 변화에 반발하고 이전의 체제를 그대로 고수하자는 주장을 펴며 대한 기독교회로 분립하여 나가게 되었다.이후 동아기독교회는 미국 남 침례교단과 연합하여 선교사업을 추진하도록 결의하였다.그리고 1949년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었다. 이후 미국 남 침례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로 함께 협력하였고 6.25 동란 때에 구호사업까지 함으로 열매를 맺고 한국의 개신교 안에서 침례교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미국 남 침례교와의 협력의 과정에서 교세가 확장되어가자 전입 교역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순박한 복음신앙을 가졌던 교단에 다른 접입 교역자들이 들어오면서 정치라는 안 좋은 영향력을 주게 되어 물을 흐리는 비극이 심겨지고 말았다. 교역자 양성기관의 설립의 필요에 의해 1954년 신학교를 설립하였다.미국 남 침례교에서 설립한 한국선교회와 총회가 상호 협조를 이루고 있다가 젊은 선교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1957년 아세아 침례회선교대회에 파송할 한국대표선정문제에서 갈등을 겪으며 총회와 선교회는 파국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총회가 결정한 대표 안대벽을 선교회가 신임하지 않은 것이다.이런 대립갈등은 1959년 초엽에는 이미 평화적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것은 안대벽으로 인해 시발하여 총회와 선교회의 갈등, 교단의 교권쟁패를 둘러싼 파벌형성, 이에 대한 전입교역자들의 역할 등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이에 결국 교단이 선교회가 인정한 대전총회와 선교회가 인정하지 않은 포항총회로 나뉘어졌다.이 교단의 분열은 1968년까지 지속되었다.분열동안 대전총회측은 선교회와 연합사역을 벌였고 포항측은 스완슨 복음전도회와 유대를 맺고 국제기독교연합(ICCC)에 가입하여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사역했다.교단이 분열되었던 10년동안 한국의 침례교단은 분열에 대한 뚜렷한 이유나 명분을 찾지 못한 채 무력함, 문제들, 혼란과 좌절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던 중 통합의 마음이
    독후감/창작| 2012.06.13| 6페이지| 2,000원| 조회(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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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et 양전자방출단층촬영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POSITRON EMISSION TOMOGRAPHY)PET은 최첨단 의료영상 시스템으로서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핵자기공명단층촬영(MRI)처럼 사람의 내부를 영상화하여 주는 장비이다. 그런데 CT나 MRI는 사람의 내부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보여 주는데 비하여 PET는 각종 장기들의 생화학적 혹은 약리학적 기능을 영상화하여 준다.1. 원리양전자(positron)는 전자와 무게가 같으면서 양전하를 가진입자이다. 양전자는 11C나 18F과 같은 핵종에서 방출되며 방출 후 1mm정도도 못가서 주위의 전자를 만나며 이들은 서로 결합하자마자 511Kev의 에너지를 가지고 정반대의(180도) 방향으로 방사되는 2개의 광자(photon)로 변형되면서 사라진다. 이 반응을 소멸방사능(annihilation)이라고 하며, 이때 방출되는 2개의 광자를 한쌍의 검출기를 통해 검출하는 것이 PET의 근본원리이다.즉 소멸방사선과 CT의 원리를 응용하여 인체내에서 붕괴하는 방사성동위원소의 부위별 분포를 컴퓨터로 재형성시켜 단층 촬영된 영상을 얻는 특수기법이다.양전자방출단층촬영기는 연구와 진단 대상이 되는 생체내에 양전자를 방출하는 방사성의 약품을 정맥주사 또는 흡입으로 주입한 후 이 물질의 체내분포를 영상화한다. PET은 여러 가지 생리적, 병리적 기본이 되는 생체 내 생화학적 현상을 비 침습적으로 간단하고 정확하게 영상화하고 정량화 할 수 있는 도구로써 사용된다. PET 영상을 이용하여 혈류량, 기저대사율 및 합성율과 같은 생화학적 현상을 측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경수용체와 전달체농도 그리고 더 나아가 유전자의 영상화도 가능하다. 이러한 생화학적 현상의 영상화로 PET 영상은 기능영상을 제공하며, 이것은 CT나 MRI로 얻어지는 형태학적 영상과 구별된다.보통 생화학적 변화가 해부학적 변화보다 빨리 나타나기 때문에 CT나 MRI보다 PET이 도움을 주는 수가 많다. 예를 들어 암환자에서 암조직은 정상 조직 보다 훨씬 더 왕성한 대사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암조직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2 PET에서 사용되는 방사성 핵종 및 방사성 의약품carbon-11(C-11), fluorine-18(F-18), nitrogen-13(N-13), oxygen-15(O-15)은 반감기가 짧아 높은 방사선량을 투여할 수 있고 고화질의 영상을 얻을 수 있으며 연속 검사를 시행할 수 있다.방사성핵종반감기(분)방사성의약품이용F-18110F18-FDG당대사C-1120.4C11-methionineC11-spiroperidolC11-carfentanilC11-palmitic acid아미노산 대사도파민 수용체아편 수용체지방산대사N-1310N-13H3혈 류O-152.1H2O-15, CO2-15CO-15CO2-15혈류혈액체적산소대사3. 검사 목적 및 적응증PET의 주요 임상응용분야는 표 1-2 와 같다. PET가 개발된 초기에는 PET이용 분야중 신경계분야가 70%로 주된 이용 대상이고 심장스캔이 그 다음이었으나 (약 25%) 앞으로는 종양분야에서 이용이 유용함이 밝혀짐에 따라 제일 많이 이용하는 분야(70%) 가 될 것이다.최근 미국 FDA와 여러 보험회사에서 간질의 국소화, 심근 생존능 평가 및 단순 결절성폐암 확진 및 대장암 재발 감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앞으로 많은 기초연구와 임상연구 결과 더 많은 경우에서 PET가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① 간질 발작을 하는 대상자에서 발작 부위를 규명하기 위해② Alzheimer 질환을 진단하고 이 질환과 치매의 다른 원인을 구별하기 위해③ 뇌혈관 질환이나 동맥류를 확인하기 위해④ 파킨슨씨 질환이나 헌팅턴씨 질환을 진단하기 위해⑤ 수술 전 뇌종양을 평가하기 위해⑥ 정신병과 정신 분열증에서 대뇌의 생리적인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⑦ 약물 치료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⑧ 사용된 방사성 핵종과 그 부위의 농축에 따른 유방종양, 폐의 염증, 만성 폐 부종을 진단하기 위해⑨ 심근 경색증의 범위와 존재, 경색의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⑩ 관상동맥 질환을 확인하기 위해4. 검사 전 간호-대상자 교육대상자 교육 : 대상자에게 다음을 설명한다.① 검사하는 부위에 따라 검사 소요시간은 30∼60분 정도 걸린다는 것② 검사 전 24시간 동안 알코올, 카페인, 담배를 제한해야 한다는 것③ 당뇨병 환자는 검사 3∼4시간 전에 인슐린을 주사하고 식사하도록 하며 다른 약물은 제한한다는 것④ 뇌 검사를 시행할 경우 외적인 청각 및 시각 자극을 최소화하기 위해 귀마개 와 안대를 사용한다는 것-대상자 준비
    의/약학| 2005.05.19| 3페이지| 1,000원| 조회(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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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심정맥압
    중심정맥압 측정 (central venous pressure monitoring) CVP: 목적, 방법, 정상치 및 임상적 의의1. 정의:전신순환으로부터 우심방으로 귀환하는 혈액의 압력 또는 신체를 돌고 귀환하는 모든 혈액이 지나가는 대정맥의압력을 말하며, 중심정맥압 측정은 신체의 수분상태와 우심실 기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즉, 우심방 혹은 신체를 돌고 귀환하는 모든 혈액이 지나가는 대정맥의 압력을 말하며, 중심정맥압 측정(CentralVenous Pressure : CVP) 은 신체의 수분상태와 우심실 기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중심정맥압은 순환과 관계가 깊어 혈액의 양과 증가된 혈액의 양을 견디는 심장의 능력애 대한 정보를 주기 떄문에 수액요법을 위한 귀중한 지침이 된다.중심정맥압 측정을 위한 카테터 삽입은 다음의 부위 중 하나에 삽입한다.* 삽입부위 : 척측피 정맥 (basilica vein) , 상완정맥 (brachial vein) , 요측피 정맥 (cephalic vein) , 경정맥 (jugular vein : internal, eternak) , 쇄골하 정맥 (subclavian vein)2. 목적우심방내 혹은 대정맥내의 압력을 측정하기 위함.울혈성 심부전을 조기에 인지하기 위함.수액 보충의 기준을 얻기 위함.순환 혈액양을 측정하기 위함.중심정맥혈을 채취하기 위해수액 대치를 위한 가이드를 제공말초 정맥 부위가 부적절할때 정맥접근법 사정을 위해수혈 및 총 비경구영양과 말초 공급의 금기된 투약 치료를 위해일시적 심장 박동기를 삽입하기 위해3. 중심정맥압의 결과* CVP의 정상수치: 5~10 cmH2O* 정상보다 낮은 경우 - 출혈이나 기타 원인으로 순환 혈량이 감소 (Hypervolemia) => 간호 : 수액 공급Rt. Ventricular empty (End diastolic volume ↑)* 정상보다 높은 경우 - 과중한 수액주입으로 인한 과혈량, 울혈성 심부전 발생 => 간호 : 이뇨제Rt. Ventricular empty (End diastolic volume ↑)CVP가 올라가는 경우CVP가 내려가는 경우혈액량 증가 심기능 저하 (우심실 경색, 우심실 부전) 심박출량 중가 (심기능 항진) 만성 좌심실 부전 심낭압전 폐고혈압 협착성 심막염혈액량 감소 정맥 확장 (약물로 인한) 평균 수축기압의 감소 (예>shock 상태)4. 방법1) 손을 씻는다.2) 대상자에게 목적과 절차 설명한다.3) 대상자를 앙와위로 눕게 하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 취하게 한 후 측정이 끝날 때까지같은 자세 유지시킴4) 정맥 울혈을 찾는다.(제 4 또는 제 5 늑간과 액와 중앙선이 만나는 곳 찾아 표시)5) 우심방 높이에서 압력계의 눈금 `0`으로 맞춤6) 수액이 압력계의 20~25cm 높이까지 채워지게 한 후 3-way를 돌려 수액 차단7) 압력계에 채워진 수액이 대상자에게 흘러가도록 한다.8) 압력계에 있는 수액높이의 하강 관찰. 수액이 안정되거나 밑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 단 될 때 높이 측정9) 3-way를 원위치로 돌려 압력계를 차단시키고 수액이 대상자에게 들어가도록 한 후 주입 속도맞춤10) 대상자에게 편한 자세 취하게 함11) 손 씻기12) 측정한 중심정맥압과 체위 기록. 만일 대상자가 앙와위가 아닌 다른 체위였다면 함께 적음.5. 주의사항* 대상자의 불안감을 감소시키고 대상자가 협조하게 한다.* 대상자의 체위가 바뀌면 압력계의 수준이 달라지므로 측정기간동안 같은 체위를 유지하는 것이 오차를 줄이고 정확한 자료를 얻게 된다.* 마노메터와 수액세트의 공기는 중심정맥압 측정을 방해하고 혈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의/약학| 2005.05.19| 3페이지| 1,000원| 조회(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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