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아야내 친구 중에 신용불량자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뉴스에서, 신문에서, 각종 언론에서 신용불량자에 대한 내용을 접할 때마다 참 가슴이 아프다. 신용불량이라는 말은 한 사람에게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게 할만큼 무섭고 위협적이다. 나는 지금 그 사례를 적어보려고 한다.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을 두둔하거나, 자신의 소비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용불량자를 우리 사회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우리 나라에 신용카드 제도가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 친구(여기서는 '갑' 이라는 가명을 쓰겠다.)는 96년인가, 97년에 모 대기업 컴퓨터는 한 대 샀다. 당시에 목돈이 없었던 터라 2년 할부로 해서 구입했다. 한 1년 정도 할부금을 부었더니 모 대기업 계통의 카드회사에서 할부금을 꾸준히 잘 입금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준다는 편지가 한 통 왔다고 했다. 물론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당시 대학 입학금이 필요했고, 집에서는 목돈을 마련할 여력이 없어서 부모님과 상의하여 카드를 만들었다. 그전까지는 카드에 대한 말만 들었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몰랐었다. 할부로 물건을 구매하고 후불 결재하는 편리함도 있고, 은행보다는 이자가 높지만 급히 돈이 필요할 때, 현금서비스나 대출서비스를 이용했다. 모 대기업 카드사의 카드를 이용한 지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나자 한도가 마구 올라가고, 다른 대기업 카드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종류의 카드를 만들어주겠다고 연락이 와서 몇 개 더 만들게 되었다. 꼭 카드를 쓰려고 만든 게 아니라, 혹시라도 필요할 때가 있을 지 몰라서 만들었다. 그 때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유용했었다. 하지만 97년 IMF가 터지고 집안 경제는 혼란의 도가니로 접어들었다. 부모님의 경제력 약화로 인한 수입의 감소는 후불제로 대금을 결제하던 생활패턴에 압박으로 다가왔다. 당장 월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체가 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께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지병을 앓게되고, 동생은 뇌종양 수술까지 하게되었다. 대금 연체는 일정 금액씩 갚아나갈 수 있었지만, 수술비까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모든 카드에서 현금서비스를 받고, 대출서비스를 받아 수술비로 썼다. 그리고 자신은 현재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카드사의 빛 독촉 협박에 죽을 것 같다고 소리치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도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동생을 살리기 위해 카드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갑은 그 사실을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모와 죽을지도 모르는 동생을 위해 한 일이고,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자신이 잘못 사용한 카드 빚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했다. 갑은 현재 신용회복지원 프로그램에 서류를 넣어 매달 일정액씩 빚을 갚는 것으로 조처 받았다. 하지만 매월 입금해야하는 액수도 만만치 않아서 힘들지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받는 데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한겨레신문에 나온 독자기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신용불량자가 소비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도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원금을 탕감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것을 배아파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빚을 갚으려 하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쓰는 건데" 하는 식으로 신용불량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나는 한 신용불량자가 빚 독촉에 못 이겨 죽기 직전까지 갔던 모습을 봤었다. 빚을 갚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이해된다. 솔직히 일부러 쓰고 갚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빚 독촉이 너무나도 경우 없고, 무례하며, 궁지에만 몰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악해지는 것이다. 일부러 화를 내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갚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경제 형편에 맞게 조절해 준다면, 누구라도 신용불량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떼려고 애쓸 것이다. 그래 '낙인' 신용불량은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낙인' 이다. 갑과 함께 서울 명동에 있는 신용회복지원위원회에 갔었다. 정말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기 위해 상담 자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소리치면서 갚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절박했고, 더 이상 이 사회에서 갈 곳이 없었다. 한 번의 잘못에 대한 대가는 그들의 인생을 파괴시키고 있었다. 연령층도 너무나도 천차만별이었다. 온 가족이 모두 신용불량인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필요했다. 그들의 경제 여건에 맞는 단 한번의 기회를 얻어, 지긋지긋한 빚 독촉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 그때가 올해 초 1월이었는데, 신용회복지원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당시 그나마 서류라도 접수하게끔 허락 받은 2000여명 중에 50명도 채 그 기회를 받지 못했던 때였다. 하루에만도 2000여명이 넘게 상담하러 오고, 기다리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만도 그 정도 수가되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안타까워서 감히 얼굴을 들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에 와 있었다. 무조건적으로 신용불량자에게 원금을 탕감해주는 게 아니다. 빚을 갚으려는 의지! 보통 의지가 없으면 서류조차도 넣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직업이 있어야 하고, 정규직장에 다녀야 한다. 소비생활도 다시 조정해서 서류에 첨부하고, 그 동안의 카드사용, 대출 이용 건에 대한, 즉 그 사람의 경제생활 모든 기록들을 다시 재검토하는 과정이 있고, 확인한 다음에야 그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일부 무례하고 막가는 식의 신용불량자들의 모습을 모든 신용불량자의 모습인 양, 비판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래본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음지에서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양지로 끄집어내는 것을, 내가 피해 받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한 순간의 잘못으로 이 사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혹시라도 그들로 인해 내가 피해 받는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잘못을 우리 사회 모두가 조금씩 나눠 갖는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신용불량자들의 사회, 내 사회, 이렇게 나눠진 사회가 아니지 않는가?......
토요상설 국악 공연우리 나라에 국립 국악원이라는 곳이 있는지 몰랐다. 세종 문화 회관 옆에 있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국악원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 전부였다. 국악 공연을 한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내가 국악원을 뗘 올릴 때, 세종 문화 회관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길을 따라 오면서 화려하게 단장된 세종 문화 회관을 보았다. 여기 저긴 걸린 공연 포스터와 한 눈에 들어올 수 있게 꾸며진 프로그램 일정들, 건물 외관부터 어딘지 모르게 웅장해 보였다. 이곳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내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거기서 얼마 더 가지 않아 국립 국악원에 도착했다. 외관이 특별하게 꾸며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국악원 계단을 올라가서 마당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을 때, 난 세종 문화 회관에서 보지 못한 멋진 모습을 보았다. 사람이 일부러 꾸며놓은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돗자리를 깔고 장구를 치는 가족들, 널뛰기에 신이 난 여학생들, 옛날 팽이를 돌리며 즐거워하는 아이들. 제기를 차는 사람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 전통 놀이를 즐기면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국악원에 처음이지만 이곳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부러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만들어 놓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쉬었다 갈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다. 허허...... 우리 국악과 어찌 그리 비슷한 냄새가 나든지, 또 국악 박물관은 어떤가......태어나서 처음 보는 악기가 한 둘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 전통 악기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악기 하나의 소리라도 익히려고 듣고 또 들었다. 혹시라도 들은 소리와 악기가 잘못 연관 될까봐서 조마조마 했다. 말로만 듣던 정간보와 악학궤범등의 많은 자료들을 눈으로 보았고, 시간이 없어 다 돌아보지 못했지만 짧은 시간 내에 다 보고 들어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이미 공연이 시작된 이후여서 30여분 이상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외국인들이나 나이든 어른들도 많았지만, 특히 중 고등학생과 대학생 또래의 사람들도 많았다.처음에는 제례악 위주의 연주가 많았다. 연주자들이 움직이지도 않고 악기만 연주했기 때문에 지루했던 게 사실이다. 거의 움직임이 없고 특별한 음의 변화도 없어서 흥미를 갖지 못했다. 유일하게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건, 공연을 보기 전에 박물관에서 본 악기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음악과 음악의 용도는 잘 몰라도 전통 음악을 들으면서, 거기에 무슨 악기가 함께 쓰이는지 구별할 줄 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가끔 울리는 편종과 편경, '짝짝' 소리를 내며 궁중 음악과 무용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박등을 알아보았다, 가야금과 거문고 소리를 대충 구별해 낸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도 정말 기뻤다. 검무라는 것도 말로만 듣다가 직접 눈으로 보니 춤이 절도 있고 일정한 형식이 있었다. 박물관에서 난 '무고' 가 북을 한가운데 놓고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북 주변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북을 치며 추는 춤이라는 것을 읽었지만, '무고'가 북을 지칭하는 줄은 몰랐었다. 다른 소리는 몰라도 북을 두드리는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여창이 부른 '모란은' 은 시조시를 관현악 반주에 맞춰 부른 것이라는데, 모란, 국화, 박꽃 등을 사람에 비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가사인지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살풀이' 도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하는 것을 보지 못했었다. 뭐랄까......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모든 프로그램 중에 가장 즐겁고 인상깊었던 순서는 사물놀이였다. 살아 움직이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앉아서 듣는 것만으로도 절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외국인들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나라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깊은 정서일까, 풍물은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기교로 본다면 상쇠가 단연 최고였다. 다른 악기들과의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상쇠 다음으로 끌리는 역할은 장구를 치는 사람이었다. 느렸다가 빨라지는 독특한 장단은 음악의 지루함을 없애줄 뿐 아니라. 현란한 기술을 통해 뻗어 나오는 장구소리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쳐보고 싶은 악기였다. 사물놀이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다 싶었을 때 공연이 끝났다. 풍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장단을 가르쳐 주실 때, '몸이 가는 데로 자연스럽게 흥을 느낀다' 의 의미를 배웠다. 사실 일정한 장단이 있으면서도 '흥'이 주는 느낌에 몸을 맡기다 보면 자연스레 자기만의 장단이 생기는 것이다.
(삼보일배 현장 체험기- 제출 : 2003/5/28)오늘은 또 어디를 걷고 있을까?처음에 마냥 생소하기만 했던 '삼보일배' 라는 말이 어느새 익숙해져 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아니었다. 큰 걸음으로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면서 서울까지 올라온다는 사실부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보면 무모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현재 60여일 째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점점 '새만금' 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새 만금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고, 정부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신념 하나만 가지고 고행을 실천하는 종교인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얼마나 말이 통하지 않았으면 자기 몸을 버리는 것으로 뜻을 전달하려고 할까...... 안타까움을 말로 표현하기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말해도 들을 귀가 열려있지 않기에 시작한 일이 아닌가 싶다. 한 마디의 말보다 몸소 실천하는 행위가 더 큰 영향력이 있는 것, 당연한 이치다. 순간 우리 나라에서 대화의 통로가 얼마나 막혀 있는가를 생각하니 답답해졌다. 누가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고 대책을 찾아라 아우성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손수 그들을 땡볕 도로위로 밀어 넣었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느닷없이 떠오른 문제도 아니고, 새금만의 문제도 아니다.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과 눈앞의 이익에 치우친 정책 결정, 행정 책임자들, 환경에 무관심한 채 별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공범자다. 지난 3월 28일 전북 부안 해창 갯벌에서 시작한 문규현 신부님, 수경스님, 김경일 교무님, 이희운 목사님의 '삼보일배'를 우리는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수요일에 '삼보일배' 일행이 수원 병점에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가 금요일 현재 정확한 위치와 다음날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홈페이지에 있는 관계자 한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그곳의 현재 위치를 알려달라는 말을 하고서, 한동안 당황했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을 다시 물어봤단다. 정말 다 죽어 가는 허스키한 목소리여서, 잘 알아듣지 못해서 다시 물어보기가 미안했다고 했다. 결국 성 빈센트 병원 뒤에 위치한 어느 성당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대강 추측해서 알아낸 것이기 때문에 병점에 도착해서 확인해야 했다. 지난 5월 17일, 토요일은 아침부터 무더웠다. 수원까지 거리를 시간으로 계산하고, '삼보일배' 현장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시간을 고려하여 아침 일찍 학교에서 출발했다. 전화 상으로는 당일 아침 8시에 성당에서 출발한다고 들었다. 정작 '삼보일배' 하기 시작하면 서로 대화하기도 힘들뿐더러, 가까이 가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에 그들이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수원역에 도착했을 때가 7시 30분, 몇 마디 말이라도 나눌 수 있겠다는 다행스러움에 버스에 올랐다.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아서, 또 초행길이라 두리번대면서 느끼는 답답함은 이른 아침의 찌는 듯한 무더위와 더불어 나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게다가 수원 시내 버스의 안내 방송은 상태가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았다. '성 빈센트 병원'이라는 방송을 듣고 내린 곳은 '이춘택 병원' 정류소였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눈앞에 덩그러니 보이는 '이춘택 병원'을 확인했다. '성 빈센트 병원'이 '이춘택 병원'으로 들리다니...... 짜증에 짜증이 겹쳐왔다. 하지만 버스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된다고 해서 걷기 시작했는데 정거장과 정거장 사이의 거리가 다른 곳보다 멀었고, 시민들이 길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뻔한 곳을 오르락내리락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8시 30분에 지동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은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찾는 데 쉽지 않았음은 굳이 말로 하지 않겠다. 성당 앞에는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주교인들이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8시에 이미 출발했다는 말에 서울 가는 도로로 곧장 뒤쫓아갔다. 눈에 띄는 노란색 천을 가슴에 달고 전단 지를 돌리며 무리를 뒤따르는 한 남자를 만났다, '삼보일배' 일행을 찾았다는 기쁨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젊었다. 20대 초반 정도, 휴학생인 듯 보였다. 그들과 보름 정도 함께 생활하면서 따라왔다고 했다. 드디어 '삼보일배' 현장을 발견하고서 가슴에 '새만금을 살려내라' 천을 걸고 무리 속에 섞였다. 수원천 고가의 아스팔트에 접어들기 전에 네 명의 성직자들이 누워서 쉬는 모습을 보았다. 말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히 다가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삼보일배' 당사자들과 거리를 두고 수녀님, 스님,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다양한 무리들이 그들을 뒤따랐다.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절하는 성직자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들을 찾아오느라고 아침 내내 짜증스러웠던 마음은 이내 안타까움으로 변해버렸다. 다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새만금도, 환경 문제도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써의 연민밖에 없었다. 그들이 왜 저렇게 결단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야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50여 일의 여정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오로지 '신념' 이 있기에 지금도 여정을 계속하게끔 만들꺼야""현장에서 사진이라도 찍을까" 하고 떠올렸던 속말을 누가 듣기라도 한 듯, 얼른 삼켜버렸다. 그 분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니 손이 부끄러웠다. 그분들은 온 몸을 내던져서 신념을 다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배경으로 나를 드러내려던 생각이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사진을 찍어서 도대체 뭘 하려고 카메라를 가져갔는지......나도 정계의 장관들처럼 얼굴 한 번 비치고 사진 촬영하고 가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어이없었다. 신념을 바치는 사람들을 단지 사진 속 배경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 내 이기심에 혀를 내둘렀다. 그럼 나는 여기에 왜 와있는 것일까? 수업이 아니었으면 과연 오기는 했을까? 아마도 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아직은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새 만금 생명 살리기 운동과 같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관심을 보이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게 만병통치약은 될 수 없지만, 학교에서 다양한 선생님들로부터 각종 사회 문제에 다양한 각도로 접하는 법을 배우고, 각자의 신념을 키워갈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실재로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뒤로하고 '삼보일배' 에 동참하는 어른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해서 무관심한 태도로 주변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태도는 너무나 잔인한 것이었다. 차라리 두 손발 다 들고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나쁘면 나쁘지, 조금도 낫지 않다. 다음은 '삼보일배' 홈페이지에 올라온 게시판 글이다. 내가 당시에 느꼈던 마음과 비슷해서 적어본다. 아이디'surisann'를 쓰시는 분이 5월 27일에 올린 글이며, 인용한 글이라 어법이나 표현을 그대로 실었다.하늘이여, 땅이여들어주소서, 이 간절한 기도를,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있을까.지난 3월 문규현 신부님으로부터 삼보일배 이야기를 들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결심하신 것이 분명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창 갯벌에서 시작된 고행은 그 이후 하루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가끔 남쪽만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짬만 나면 어디계신가 전화하고 달려가게 된다. 문정현 신부님이 말리시면서 다비식을 치러 주려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 달이 넘는 동안 수 백리 길을 어떻게 갈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처음 군산 근처에 가서 그렇게 느꼈었다. 차마 수경 스님 등 성직자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이를 악물며 참았지만, 돌아오는 차안에서 자꾸 시야가 흐려졌다. 그 후 가족과 친지와 함께 찾아가고는 했으나 그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실무진에게 얇은 봉투를 건네거나 필요한 물을 보내기도 했으나 부끄럽기만 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91년 5월 시위 중 사망한 성대 후배 김귀정 열사 추모식에 참석한 후, 서둘러 여의도 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국회 앞까지 삼보일배를 해보리라 덤볐다. 그것도 양복차림으로...... 그런데 불과 서너 번 절을 하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 후 한번 휴식, 두 번 째 휴식을 끝내고 삼보일배를 하는데 왜 이렇게 휴식이라는 소리가 안 들릴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내딛는 다리가 마치 굳은 것처럼 뻣뻣하기만 했다. 그리고 내리막길에선 허벅지가 아파 바로 걷지 못하고 옆으로 게처럼 걸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불과 30분 3보1배를 하고 이 꼴이라니.... 한심스러웠다. 장애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 여의 공원에서 열심히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자전거를 타며 즐기는 사람들을 보자, 막상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분들이 고행을 하는데 이렇게도 무심할 수 있나!" 화가 나더니 나중에는 눈물이 났다. 이 무심한 세상이여.세계 5대 갯벌 중 하나인 새만금, 철새들의 도래지, 어민들에겐 생활의 터전, 양식을 주는 곳.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이 생명의 갯벌을 파괴할 수 없다. 농지확장, 식량안보, 산업 단지화, 소외된 전라도 주민들에게 돌아갈 돈. 그 어떤 명목으로도 생명 파괴를 정당화시킬 수 없다. 더 이상 돈이나 표를 가지고 생명을 농락하지 말자.성직자들이 생명 살리기 순회를 하는 내내 일정표를 보았다. 그리고 3,4일 만이라도 휴가를 내서 삼보일배를 하자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내게 일을 맡긴 사람들에게 모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단 3일만이라도 동참하기 위해 머리를 짜본다. 도저히 안될까?
영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아주 오랜만에 대전 엑스포를 관람하러 내려갔다. 시험도 끝나고 나름대로의 문화활동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한 학기 동안 관심을 가졌던 중국, 이 거대한 나라의 다채로운 행사들은 관람하지 못하고 올라와야 했다. 6월 15일까지 볼만한 공연은 다 끝나버리고, 지금은 다른 나라의 예술 공연이 한창이었다. 열흘 전만 하더라도 야외 전시장에서는 각양각색의 등 전시(천하제일 중국 등 축제)와 함께 중국풍물천하행사를 열었고, 서커스 공연, 변검 공연, 중국음식요리전 등 다양한 공연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진시황제의 묘, 병마용갱을 재현 전시하는 "진시황 병마용전"도 열려, 1974년 중국 여산 에서 발견된 사병, 기마병, 마차, 전차 등 130여 점이 선보여지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기도 했었다. 일찍 알고 내려갔더라면, 한 곳에서 동시에 관람하기 어려운 중국의 다양한 문화 예술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시간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올라와야 했다. 그곳에서 공연되었던 중국의 문화예술공연 중, 가장 생소하게 다가온 것은 '변검' 이라는 두 글자였다. 얼굴 가면을 바꾸는 공연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본 경험이 없어서, 당시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아주 우연히 변검에 관한 작품을 발견했다. 어학 실에서 오천명 감독의 중국 영화 '변검' DVD를 발견하자마자 꺼내어 보게 된 것이다. 아주 우연히......순식간에 얼굴 가면을 바꾸는 독특한 기술을 가진 변검왕,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불리는 '양대가', 그리고 노예처럼 이리 저리 팔려 다니던 '구와'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아주 볼만한 영화다. 한 학기 동안 중국에 대해 배워서, 새로운 눈으로 중국을 보게되었다. 영화 초반에 폭죽과 등, 춤이 어우러진 축제만 보더라도 중국의 화려한 축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변검왕과 양대가는 가지고 있는 변장 기술이 다르고, 공연하는 무대가 다르고, 관객의 계층과 공연 분위기가 다르다. 하지만 작품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신분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둘도 자신들의 재주를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기며, 천민들이나 하는 광대노릇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거리의 광대' 라고 하면 적절한 어휘를 쓴 걸까? 이 영화의 갈등구조는 변검왕의 기술이 사내아이에게만 전수되어야 한다는 데서 시작한다. 동전 두 냥이 어느 정도의 가치인지 알 수 없으나, 구와가 감기에 걸렸을 때 약값이 엄청났던 것으로 보아 당시 두 냥은 별 가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검왕이 사내아이를 구하러 빈민촌에 들렀을 때, 어린 아이, 그것도 사내아이의 몸값이 두 냥, 다섯 냥이었다. 계집아이는 누가 사지도 않고, 거저 데려가 밥만 먹여줘도 고마워하며 건네주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 작품 전체에는 남존여비사상이 짖게 깔려있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변검왕과 양대가의 대화에서도 여자 분장을 하는 양대가는 감히 변검왕과 나란히 견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피붙이보다 더 구와를 아끼다가도, 아이가 여자임을 알게되자 돈주고 얻은 하인으로 취급해버리는 변검왕의 모습, 할아버지라 호칭하다가 일순간 사장님으로 불러야 하는 구와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작품이 진행되는 구석구석에, 또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사회 지배적인 남존여비 풍조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감독은 곳곳에 베여있는 남존여비의 사상을 일순 해소시켜버린다. 유괴혐의로 죽음을 맞은 변검왕과, 그를 살리려는 구와의 희생을 통해, 변검의 기술이 여자인 구와에게 전수된다. 여기서 남, 여의 구분, 차별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의식적으로 의례 몸에 베인 남존여비사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전통계승과 답습에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간간이, 천민의 신분이지만 예술가로써의 떳떳한 자부심을 지닌 변검왕과 양대가의 모습도 비춰진다. 당시에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인식되던 천한 광대의 슬픔도 읽어낼 수 있다. 등장인물간의 관계 속에서 신분적인 제약이 많이 무너진 중국의 근, 현대의 과도기적 혼란도 엿보인다. 게다가 당시의 문명 개화기 속에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중국인들의 생각과 삶에 대한 변화도 잘 그려져 있다. 중국 전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변화의 용트림을 읽어낼 수 있는가?지난 번 '홍등'을 볼 때와는 중국을 보는 눈이 또 달라진 것 같다. 작품을 크게, 때로는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중국을 보게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 손녀로 삼은 구와 에게 '변검'을 전수하고, 함께 연습하는 모습은 오히려 말로 표현하기 아까운 장면이다. 실로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남존여비사상, 계층과 계급 문제, 직업에 대한 인식, 중국의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를 그 한 컷에 함축해 내고있다. 영화 '변검'을 보면서 우리 나라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 이 생각났다. 조선의 격변기에 천재화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오원 장승업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가 뭘까? 우리 나라에는 중국의 감독들처럼 자신들 나라의 무비판적인 전통문화를 소재로, 현대화 작업을 하는 감독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 문화를 현대로 끌어와 오늘날 잔잔한 감동과 함께 비판의식을 심어주는 작품이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런 작업보다는 상업주의 조폭 영화, 사랑 영화로 흥행 경쟁에 빠진 우리 감독들의 의식에 있다. 꾸준하게 전통의 현대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중국에 비해, 우리 나라에는 그런 작업이 아직 한참 부족하다. 우리의 문화는 대체 그 뿌리가 어디인가? 서양의 문화를 흉내내어 뿌리 없는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실로 당황스럽다. 우리의 옛 것을 그 시대의 눈으로 다시 되돌아보는 작업도 필요하지만, 현재로 끄집어내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작정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진보와 발전은 아니다. 뒤를 되돌아보며 돌아갈 줄도 아는 것이 진정한 진보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되돌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의 근 현대사에서 이런 활동이 부족했다는 점은 우리의 근대 의식이 서구 열강에 휘둘렸다는 점을 의미한다. 가장 아쉽고 씁쓸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모택동,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알았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지도자를 가진 중국이 부럽다. 중국의 근, 현대사를 거울 삼아, 우리의 근, 현대사에서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이리 저리 휘둘리며 백의민족임을 자랑삼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 꼴이다. 한 번도 침략해보지 않은 나라라고 자부심 느낄 필요도 없다. 과거를 비추어 현재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어떤 모습으로 미래 속의 한국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러시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 사회사상으로서 볼 때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사회주의로 대치함으로써 사회를 개조하려는 사상 또는 운동.사회주의란 말의 기원에 대하여는 이설이 많다. 1826년 영국에서 R.오언의 제자들을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불렀고(브리태니커백과사전), 사회주의란 말은 1927년 런던의 어떤 조합 기관지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사회주의'라는 개념이다. 막연히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나조차도 사회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수용·통치하는 국가.1917년 러시아혁명에 의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국가인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USSR)이 창설되었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떠듬떠듬 알고 있는 게 고작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개념이 떠오르는 걸 보니, 러시아에 대해 가졌던 편견이 적지 않은가 보다. 역사책에서나 잠깐 접해 본 경험이 러시아에 대한 지식의 전부인 사람들은 내 경우와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는 러시아를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언제까지나 나를 대신할 수 없기에,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얼마나 부족한 지 반성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러시아에 대해 알아보려 애썼다. 처음에는 러시아 음악에 대해 들어보고 음악의 특징을 알아보려 했지만, 음악에 대한 부분은 역사와 문화에 익숙해 진 다음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의 기교나 표현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러시아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느낌을 바로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아니라 느낌을 바로 잡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음악은 영화를 보고 나서 들어보면 더 생생하게 다가오겠지......이 번 기회에 러시아라는 나라에 폭 빠져봤으면 좋겠다.글을 쓰는 지금은 영화를 본 지 꽤 지나서, 큼지막한 부분들만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영화 곳곳에 은은하게 깔려있는 배경음악은 잘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콧노래로 계속 흥얼거리는 나, 아직 남아 있는 여운을 조금 더 간직하려는 것일까? 영화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마치 7,80년대 흑백 TV를 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전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스크바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세 여성들의 삶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 자체일 뿐이다. 우습게도 내가 처음에 영화제목을 보고 생각했던 것은 이랬다. 영화에서 추구하는 바는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그려내는 것이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안타까운 여운과 함께 표현하는 것이라는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여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사상이 투철한 당원도 아니고, 정치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시피 살아간다. 오히려 자신의 삶과 행복에 대한 욕구가 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카테리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주경야독하는 여공이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 상류 사회로의 진출을 꿈꾸는 친구 류드밀라와 순박하고 전형적인 삶의 안정을 바라는 안토니나, 이 세 여성의 삶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짐작하게 해 준다. 영화만 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들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다.그렇다면 영화의 제목은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책을 읽거나, 책 속의 글을 읽을 때도 책제목이나 글 제목을 항상 떠올리며 읽는 습관이 있어서, 이번에도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해했다. 당시의 러시아 사회가 영화에서처럼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격언은) 이반 4세 [ Ivan IV ] : 러시아의 황제(재위:1533∼1584).이반뇌제(雷帝)라고도 한다. 모스크바 대공(大公)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1533년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대귀족들의 전횡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것 때문에 1547년 차르라고 칭하며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나서는, 자기가 신뢰하는 사람들로 선발회의를 구성하여 정치를 하였다. 또한 전국회의의 소집과 봉토(封土)의 하사 등으로 지방 귀족층의 지지를 굳혀, 1550년대에는 행정 ·사법 ·군제 ·교회제도 등의 면에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이 시기에 카잔한국(汗國) ·아스트라한한국을 정복하고 볼가강의 전체 수로를 제압하여, 북빙양(北永洋)의 내해인 백해(白海)에도 개항장(開港場)을 설치함으로써, 러시아의 경제적 발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발트해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선발회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리보니아전쟁은 실패하였다.그러나 T.에르마크가 서시베리아를 정복함으로써 동방진출이 시작되었다. 귀족의 세력을 타파할 것을 기도하였던 그는 1565년 극단적인 공포정치체제를 시행하여 뇌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공포정치는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귀족 세력 타도에는 성과를 얻었지만, 이것의 피해는 농민과 시민에게도 파급되었다. 행정의 혼란과 경제의 쇠퇴를 초래하여, 농민이 새 농토를 찾아 이동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므로, 그의 만년에는 농민의 이동을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군주권의 신적(神的) 기원을 확신하였고, 크루프스키공(公)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 등에서 그 사상을 전개하였지만, 좀 광신적인 면도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의심하는 버릇이 강해졌다. 이런 까닭에 만년에 자기 장남을 말다툼 끝에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이반뇌제와 보리스 고두노프이후의 무서운 공포정치를 배경으로 가혹한 현실을 빗대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속담과 격언은 러시아인의 삶과 역사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지만, 러시아의 변화를 그려내기에는 여성보다 더 적합한 대상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나중에 카테리나와 사랑하게 되는 고샤의 대사에는 남성 우월적인 부분이 상당히 들어있다. 류드밀라가 능력 있는 남성을 만나 신분의 상승을 꽤하려는 모습을 보더라도 당시의 사회가 남성이 기득권을 쥐고 여성을 내려다보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안토니나의 경우는 다르지만, 여주인공의 모습이 그렇게 그려졌다는 점에서 짐작은 해 볼 수 있겠다. 여성으로써 살아야 했던 삶이 눈물의 삶이 아니었을까,,,,,,그래서 과거의 공포정치에 여성들의 억압을 빗대어 억울함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세워나가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러시아 사회 속에서 보여지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자본주의의 일례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에 가서는 그러한 기대감은 허탈하게 사라져버린다. 이전의 보수적인 사회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여 주인공 카테리나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성취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우뚝 선 성공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가정에서는 고샤가 없으면 생활이 무너져버리는 나약한 여성으로 그려졌다. 남성이 싫어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카테리나의 모습은 영화 초반에 보여준 당찬 여성의 삶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자신을 거부하는 카메라맨 루돌프를 잊고 아이들 낳아 키우는 모습에서, 삶에 도전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작품 후반부에서 더 발전된 모습으로 그려질 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만 독립적인 여성으로 그려졌을 뿐, 실제 생활에서는 남성 중심의 구조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다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사실 영화를 보다가 맥이 빠져버렸다. 변화하는 러시아의 모습을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얼마나 보수적이었을까? 여기서 서양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평등하다고 여기는 내 편견도 무너뜨려야 한다. 의례 서양 사람들에 대해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