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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인] 자연과 디자인 평가B괜찮아요
    자연과 디자인강지현자연의 구조와 디자인나무구조를 이용한 디자인동물의 몸을 이용한 디자인수정궁애벌레 구조를 이용한 의자유기적 구조를 이용한 전시장코끼리 코를 이용한 스탠드존슨 왁스 빌딩자연의 형상과 디자인자연의 재료와 디자인{nameOfApplication=Show}
    예체능| 2005.05.31| 18페이지| 2,000원| 조회(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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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자인] 자연과 디자인
    자연과 디자인{자연과 디자인인간은 자연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고, 인간이 이 자연이라는 울타리를 떠나서 생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즉,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간이 살고 있는 터전인 자연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과 함께 인간이 만든 모든 기물 역시 자연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존재하게 된다. 디자인을 기물을 만들기 위한 계획과정이라고 본다면 디자인이 인간의 활동 중에 한가지이기 때문에 이도 역시 자연과 밀접하게 관계되어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인간이 만드는 기물은 자연 안에서 존재하게 되기 때문에, 자연현상들 예를 들면, 비, 바람, 눈 등과 접촉하면서 금방 상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가와 같은 것을 고려해야만 하게 된다. 제품을 만들 때,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만든다면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자연은 디자인에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은 또한 디자인에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보고이다. 많은 디자인이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지금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디자인들에 관한 것이다.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디자인은 그 경향에 따라 세 가지 정도로 분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디자인 하고자 하는 기물의 구조를 자연에서 따오는 경우이다. 첫 번째 분류에 속하는 디자인은 대부분 그 기물의 기능이나, 그 기물의 형태를 유지시켜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게 하기 위해서 자연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구조는 실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시스템만큼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시스템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시스템을 모방하여 인간의 새로운 시스템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은 건축물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구조는 무거운 하중을 견디는 데 뛰어나거나, 주어진 공간을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구조 등이 있다. 동물의 몸 구조는 다리 같은 구조물을 만들 때 유용하게 쓰이는데, 척추와 그 무게중심을 이용한다. 나뭇가지 구조나, 동물의 뼈 속 구조 등은 무거운 하중을 받칠 때 유용하다. 이런 자연의 구조를 이용한 디자인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나뭇가지 모양의 구조를 이용하여, 건축물의 천장을 지지하는데 응용한 예로서 고딕식 건축물의 실내를 보면 이러한 구조의 기둥을 많이 접할 수 있다.{여러 가지 동물의 몸의 구조를 이용하여 다리와 크레인을 설계한 것이다. 동물 각각의 무게중심을 응용하여, 안정적으로 설계했다.{{{이것은 1850년, 런던에서 있었던 세계만국 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수정궁 이라는 건물로서, 수초의 주름진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오른쪽과 같이 만들었다.{이것은 2000년 Creative디자인 공모전에 출품되었던 의자 디자인으로 애벌레의 몸의 구조를 이용한 디자인이다. 애벌레의 몸이 주름으로 되어 있어 꿈틀꿈틀 하면서 몸 전체가 줄었다가 길어지기도 하는 것을 그대로 적용하였다.{이것은 2000년 하노버 엑스포의 한 전시장이다. 곤충의 날개나, 식물의 잎맥의 구조를 이용하여 유기적인 구성을 하였다.{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상 스탠드의 하나이다. 구부러지는 목을 가진 스탠드는 사실 처음에 코끼리의 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보이는 건물은 존슨&왁스빌딩의 내부 모습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1939년 작품으로서 기존 빌딩들의 상자형식에서 탈피하여 원통형으로 디자인 되었다. 내부구조를 보면 숲의 모양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무가 반복적으로 서있는 모양을 이용하여 설계되었다.두 번째는 자연의 형상을 이용하여 디자인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 자연의 형태는 디자인하고자 하는 기물의 심미적 목적에 사용된다. 위에서 본 디자인과 다른 점은 자연의 구조의 특징이나 특성이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위에서 본 하노버엑스포 전시장이나, 애벌레의자와 같은 디자인은 모티브로 삼은 자연의 구조를 이용하려다 보니까 그 모양을 닮게 된 것이지만, 이 분류에 속하는 디자인들은, 자연의 구조에 별 상관 없이, 모양만을 중심적으로 사용한다.{이 두 디자인은 1983년 포르미카라는 회사가 새로운 조명 제품 라인 개발을 위해 몇몇 디자이너들에게 그들만의 독창적인 제품 디자인을 의뢰 했을 때, 프랭크 게리라는 디자이너가 디자인 한 제품이다. 여기서 뱀 모양이나, 물고기 모양은 조명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은 아니다.{{{{자연의 형상을 이용해 제작한 재미있는 병들을 소개한다.물고기 병과 돼지모양 병은 볼스사의 술병이다. 물고기 병에 담긴 것은 탱자나 귤 종류에 속하는 만다린이라는 과일로 만든 과실주이고, 돼지 병에 담긴 것은 체리브랜디로 체리맛에 아몬드 맛을 첨가하여 고소하고 달콤하다고 한다. 예쁜 모양의 미니어쳐 병에 담겨있어, 아기자기하고 독특해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원숭이 모양의 병은 일본의 산토리사의 로얄 이라는 술로 전통이라는 컨셉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원숭이 모양의 병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위스키는 학 과 같이 동양적인 술병을 디자인하거나 일본 무사인 쇼군을 형상화한 제품도 있다.
    예체능| 2005.05.31| 6페이지| 1,000원| 조회(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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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소의 연인들
    피카소와그의 연인들과목명 : 현대미술의 이해교수명 : 신 현 덕학 과 : 미술교육과학 번 : 20014021이 름 : 강 지 현피카소에겐 모두 7명의 여인이 있었다. 첫 번째 여인은 20살 동갑내기였던 페르낭드 올리비에. 두 번째 여인은 친구의 애인이었던 에바 구엘. 세 번째 여인은 발레리나였던 올가 코클로바. 네 번째 연인은 마흔 살에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17살 소녀 마리 테레즈 발티. 다섯 번째 여인은 마리와의 결혼 생활 중에 만나왔던 도라 마알. 여섯 번째 여인은 미술학도였던 프랑스와즈 질로. 일곱 번째 여인은 그의 나이 여든에 만난 자클린 로크다.피카소의 연인들은 그의 그림에도 많은 영향들을 미쳤다. 많은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녀들은 그런 피카소에게 자신의 순정을 바치고, 그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다고 한다.이 연인들 중 65세의 피카소와 만나 10년간 동거생활을 했던 질로는 피카소와의 생활을 회고한 회상록을 발간하기도 했다.피카소는 한 여인과 결혼이나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다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었고, 이러한 그의 고질화된 습벽은 그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인들에게 괴로움을 주었다.피카소 주변에는 그의 명성에 현혹된 여인들이 언제나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는 그러한 여인들과의 일시적인 사랑을 자제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한 피카소의 사랑을 진실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는 책을 저술한 존 버거의 말대로, 그러한 피카소의 여자관계는 여인에 대한 끝없는 욕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여인관계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자세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다. 여인들은 그의 욕정, 고독, 공허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즐거움을 건네주지 못하고 시들한 모습을 보이거나 고뇌를 드러내고 인간적인 위안을 요구하는 여인에게 그는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다."나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노력도 했다. 그러나 파블로에게서는 인간적인 따뜻함은 얻을 수 없다는 것, 그와 그의 일에 나 자신을 바침으로서 얻어지는 기쁨이외의 것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인간이란 불행할 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법인데 난 아무런 위안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비난만 받을 것이다."질로는 이런 말을 하였다.피카소는 자신이 불행할 때는 여인에게서 위안을 구했지만 여인이 불행해졌을 때 따뜻하고 깊은 위안을 건네줄 수는 없었다. 지로의 말처럼 오히려 그렇게 나약해진 모습에 짜증을 내거나 비난을 퍼부었다. 불행해진 여인에게 인간적인 위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인격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토록 쉽게 여인을 만나고 헤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그에게 사랑이란 욕정과 소유와 쾌락의 의미였지, 희생이나 헌신의 의미는 아니었다. 동시대에 피카소와 함께 세인들의 우상이 되었던 찰리 채플린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피카소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이 전해주는 삶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대립적인 것이었다.그는 채플린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가 채플린을 좋아한 이유는 가치관의 일치 때문이 아니라 대중에게서 명성을 얻고 있다는 재능의 공감대 때문이었다. 그는 표면적으로 채플린의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에 공감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주었지만 본질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하는 채플린식의 영화들을 혐오하였다. 채플린의 영화를 감상하고 돌아와서 그는 질로에게 경멸하듯이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을 위해 사는 것 따위는 어리석은 거야. 그저 천하고 진부한 로맨티시즘일 뿐이야."인간의 이기적인 속성 때문에 피어나는 갈등을 외면하는 채플린식의 영화에 리얼리티의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피카소의 철저한 자기중심적 자세 역시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피카소에게서 따뜻한 인간미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그가 유혹하고 소유하고 사랑하고 싶은 여인은 행복한 여인이었지 불행한 여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피카소의 자기중심적인 성격과 가치관 때문에 여인과의 사랑에서 어떤 아기자기함이나 인간적인 감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명성의 베일 밑에서 스며 나오는 욕정, 변덕스러운 충동, 메마름과 공허 따위가 느껴져 올뿐이다.피카소의 여인들은 질로처럼 인간적인 따뜻함을 구할 수 없어 스스로 피카소 곁을 떠나거나 버림을 받게 되었지만 그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올가나 마리 테레즈는 헤어지고 난 뒤에도 피카소의 주변을 맴돌았다. 질로 역시 그의 회상록에서 "파블로에게 끝없이 감사하고 있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피카소의 여인들은 그와의 생활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맛볼 수 없는 명성을 그와 함께 향유하였고 물질적인 보상을 받았다. 범용한 남자에게서는 체험할 수 없는 피카소의 창조적 열정과 성격을 통해 그녀들의 생애에 의미를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에 피카소를 증오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페르낭드 올리비에피카소와 동갑이었던 그녀는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자였는데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피카소는 페르낭드를 만나면서 청색시대를 마감하고 장밋빛시대로 접어든다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해 피카소가 고양이를 안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페르낭드 올리비에 집이었다.그녀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그는 작고 까맣고 후줄근했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정열로 가득 차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사랑과 함께 우울한 청색시대를 이별하고 분홍의 시대로 넘어 간다 .1905년의 마들렌느를 그렸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과 색채로 스페인 특유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드러나고 있다. 올리비에와의 동거 후부터 청색 조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밝고 경쾌한 핑크 빛 주황색 노랑색으로 물든다. 일명 장미빛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 과 등의 작품을 그리는 등 분석적 큐비즘을 확립시켰다.그는 장미빛 시대에도 맹인, 거지, 창녀, 곡예사 등의 하급 계층을 그렸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소재의 그림은 부유층에게 더 많이 팔려 나갔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유명해졌고,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에바 구엘페르낭드와 사귀고 있었던 피카소는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애인 '에바'에게 반하여 열열한 구애를 하게된다. 이 시기의 작품 밑에는 항상 에바에 대한 사랑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화가 난 마르쿠스는 피카소를 만화로 풍자하여 분풀이를 했으나 그의 애인은 이미 피카소의 여자가 되었다.피카소는 9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에바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결핵으로 죽는다.그녀를 주제로 한 작품은 가 있다.이때가 분석적 큐비즘의 시기로써 사물의 외면적인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무엇을 그린 것인지 사람들은 분간하기 어려웠다.또한 피카소는 이 당시에 캔버스에 물감과 관계없는 물건들을 사용함으로써 최초의 콜라주작품을 탄생시킨다. 철물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헝겊, 함석, 밧줄은 물론이고 물감에다가 모래와 톱밥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박한 주제와 일상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콜라주는 고상한 가치만이 예술이라고 여기던 부르주아 예술관에 맞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이런 작품들이 보험에 가입된 채 고상함을 찬양하는 작품보다 중요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올가 코클로바에바가 죽은 후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던 피카소는 자신이 무대미술과 의상을 담당했던 퍼레이드 공연에서 25세의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에게 흠뻑 빠지게 되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자콥,쟝콕토가 증인으로 참석한 파리의 한 교회에서 올가와 결혼식을 한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는다. 올가와 결혼생활을 하는 시기에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아닌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강렬한 사실주의 작품을 그린 탓에 일부 비평가들은 입체주의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마흔을 갓 넘은 화가로써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었으면 점차 거부가 되어갔다.아들 파울로를 낳은 후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수까지 둔 한층 더 사치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등장하는 작품은 등이 있다.마리 테레즈 발티마리 테레즈는 17세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수영과 등산 등의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천진한 소녀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프로포즈를 육개월이나 거절했으나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마리 테레즈의 18번째 생일이자 성년식 이였던 날 이후 피카소는 올가와 살고 있는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마리 테레즈를 위한 비밀거처를 마련해 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인 딸 마야를 낳는다.피카소는 그녀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그림, 판화를 통해 다른 어떤 여인들을 그린 것보다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등이 그것이다.
    예체능| 2003.10.24| 6페이지| 1,500원| 조회(2,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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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업에서의 의사소통의 중요성과 역할
    미술교육과 20014021 강지현◎ 수업에서 교사의 의사소통방법의 중요성과 그 효과에 대하여 기술하시오.사람은 항상 누군가와 혹은 자기 자신과 의사소통을 한다. 그것은 자신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사람이 살아가는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행동양식이다.의사소통은 언어적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나눌 수 있다. 언어적 의사소통은 말로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 하는 것, 즉 대화를 말하는 것이고,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말을 제외한 인간의 표현 방법, 몸짓이나 표정 등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의사소통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을 자신의 의사를 전달 할 때, 이 언어적 의사소통 방법이나 비언어적 의사소통방법중의 한 가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상호작용은 거의 이 의사소통의 방법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의사소통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하게 된다. 어떠한 지식의 전달이나, 자신의 생각의 표현, 감정의 표현 등이다.지식의 전달 측면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더욱 부과된다. 지식의 전달은 사람들의 말이나, 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언어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달이란 개념도 거의 성립할 수 없다. 지식이 전달이 의사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식의 전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교실에서 의사소통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들 간의 의사소통이 끊임없이 이뤄진다. 여기서는 교사와 학생간의 의사소통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기로 한다. 수업의 방식은 의사소통의 방식이라는 말과 함께 쓸 수 있다. 수업이 의사소통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피드백을 수반한다. 피드백이란 쉽게 말해서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때에 전달받은 쪽에서 전달한 쪽으로 보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업의 방식이 토론수업일 경우에는 이 의사소통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간의 피드백이 더욱 빈번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토론 수업이 아닌 종전의 강의식 수업이라 할지라도 교사와 학생간의 피드백은 일어나고 있다. 능숙하고 현명한 교사라면 후자의 수업방식을 취한다하여도 학생들에게서 빈번하게 피드백작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피드백의 빈도에 관해서는 교사들마다의 의사소통 방법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의 빈도 (학생이 교사의 수업에 얼마나 반응하고, 또 수용하는가 ) 에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교사는 수업 중에 학생들의 어떠한 반응도 얻어내지 못하는 반면 또, 어떤 교사는 수업 중에 계속해서 학생들의 반응을 얻고, 그것을 통하여 수업의 방향을 이리저리 변화시키기도 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가 학생들의 학습효과에 훨씬 더 긍정적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교사는 의사소통의 방법을 고찰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개발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무엇인가?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은 학습자의 집중을 유도할 수 있다. 교사가 아무리 좋은 수업내용을 준비해왔다 하더라도 학습자가 집중하지 못한다면 학습의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사는 언어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의사소통방법을 통하여 학습자의 집중을 유발할 수 있다. 계속해서 고함을 치는 것보다도 굳은 표정의 침묵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는 것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일방적으로 설명하고 학습자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방법은 좋지 않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조금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습자가 어려운 부분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하여 서슴없이 질문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일방적으로 설명만 할 때 교사는 학생이 어느 정도 자신의 수업을 받아들이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다면 교사는 어떠한 부분이 학습자에게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어, 학습자를 충분히 이해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효과적인 의사소통에는 적절한 통제도 포함이 된다. 적절한 통제는 수업의 진행을 도와준다. 이러한 예를 들 수 있다. 만약 어떤 학생이 수업 중에 쉴 새 없이 어떤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한다면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 될 수 없다. 적절한 선에서 질문을 그만하도록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학습자로 하여금 다시는 질문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교사가 수업내용을 제외한 다른 일들을 말로써 일일이 통제하는 것은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수업을 하는 중간 중간 교사가 계속 수업과 관계없는 일 때문에 학생들에게 훈계를 한다면 수업의 흐름이 자꾸 끊기게 되고 학습자는 수업에 집중할 수 없게 되어 산만한 수업이 될 것이다.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수업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도 학생들의 행동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육학| 2003.10.24| 3페이지| 1,000원| 조회(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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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교육의 발아와 변화과정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미술교과는 어떻게 시작됐으며해방이후 어떻게 바뀌었는가.교과명 : 교육과정 및 교육평가수업일 : 월요일 6-7교시교수명 : 권 성 아학 과 : 미술교육과학 번 : 20014021이 름 : 강 지 현제출일 : 2003년 4월 28일미술교육의 발아한국 미술교육의 시작은 조선시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당시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적 사상과 후기의 실학사상의 대두와 함께 일어난 의식의 변화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당시의 교육기관으로는 서당과 서원이 초등과 중등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이 고등 교육기관으로 있었는데,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서당이 발전하면서 그곳에서 모필에 의한 습자나 간단한 그림교육도 이루어졌었다. 또는 개인적으로 사대부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사군자를 익히기도 하였다. 국가의 공식 화가양성기관으로는 도화서라는 곳이 있었다. 도화서는 조선시대에 궁정에서 필요한 그림을 제작하는 기관으로서 처음에는 도화원이라고 했으나 1469년 이후 도화서로 바뀌어 구한말 순종 때까지 존재하였다. 도화서에는 화원이 20명, 그림을 배우는 화학생도 15명과 잡역 9명이 있었다. 생도가 되기 위해서는 죽, 산수, 인물, 영모, 화초 등의 5종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들은 훈련생으로 화본을 통한 모사, 새 풀 나무 짐승들을 실물 사생하는 방법, 실제로 산수를 돌며 풍경을 그리는 등의 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았다.조선시대에는, 회화영역에서 당시 문인화라고 불린 수묵화나 서예가 유행하여, 일반 사대부의 자제들이 문장과 함께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서 자리하였다. 그러나 미술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는 장인들은 오히려 경멸당하는 낮은 사회적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갑오경장(1894)이후, 미술을 특정계급의 교양이나 여가를 즐기는 기예로 여겼던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1895년부터 미술교육은 근대적 의미로서의 새로운 교육제도를 갖추고, 신교육의 형태인 습자와 도화교육을 구분하는 계기가 이루어진다.우리나라에서 학교에 의한 미술교육이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1895년부터였다. 교육을 국가 중흥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관립한성 사범학교가 생겼다. 초등교원양성을 목적으로 한 한성사범학교는 부속초등학교를 개교하여 한국최초의 공식적 교육기관이 되었다. 당시 소학교령에 의한 심상과의 교과목인 수신, 독서, 작문, 습자, 체조 가운데 미술교육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습자가 있는 정도였고, 도화는 체조 대신 추가할 수 있는 과목으로 존재했다. 이 시기의 미술교육은 정식 학과목으로 취급되기 보다는 교과목으로 자리 잡아가는 초기형태의 미술교육이었다고 볼 수 있다.이후 보통학교령이 공포되고, 심상과에서는 습자 도화 수공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고등과에서는 습자와 도화가 다른 과목과 함께 교과과정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당시 미술교육은 주로 임화였고, 연필이나 모필을 사용하는 모방에 의한 교육이 대부분이었다.해방이후의 미술교육해방이후 우리나라에는 미군정이 들어서게 된다. 이 시기에 학무당국(문교부)은 한국교육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이상의 교육기관의 수업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이시기는 해방 직후 혼란했던 시기였고 77%가 넘는 문맹자의 퇴치가 급선무였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미술교육은 우선교과순위에서 제외되었다.미군정은 계속해서 ‘교수요목’을 제정하여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교수요목 중에도 미술과에 대한 내용의 요목은 없었다. 또, 일본교과서의 사용금지에따라 미술교과서가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교사들은 교수 학습 자료를 직접 만들거나 복사한 임시 프린트물 등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미군정하의 교육이념이나 미술교육의 목표는 존 듀이의 경험주의 교육사상이나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미술교과의 목표는 ‘숭고한 예술의 감상과 창작성을 고양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의 미술수업에서는 실제 그 목표에 어울리는 미술교육이 아니, 종래의 임화나 사생, 모방을 반복하는 정도의 수업이 행해졌다.미국정기에 자유와 인간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교육사상이 도입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에 이어 이듬해 12월에 교육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시기에 서구의 새로운 문화와 교육사상, 미술사조의 영향으로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이 설립되고, 1949년에는 한국 정부주최로 국전이 개최된다. 또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주최 중학생미술전이 열리는 등, 미술에 대한 일반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학교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되려고 하던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모든 교육활동은 치명적이 타격을 입게 된다.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까지의 약 3년 1개월간, 전시 중의 한국의 교육은 최악의 혼란기와 시련을 겪게 된다. 전시 중 문교부는 ‘전시 하 교육특별조치 요강’을 제정 발표하였다. 그에 EK라 피난지의 가교사나 텐트, 임시교실 등에서 임시로 발간된 전시교재에 의해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의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 당시는 일반교과가 필사적으로 교육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시기였고, 학용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시였으므로 정상적인 학교미술교육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의 교육법에 공통의 미술과의 목표로서 ‘심미적인 정서를 함양하여 숭고한 미술을 감상 제작하고, 자연의 미를 즐기며, 여가를 유효하게 사용하여 조화롭고 명랑한 생활을 하게 한다’는 내용이 제시되어 있으나, 실제로 학교의 수업에서 미술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미술품의 창조보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기능 위주의 공작실기 등을 중심으로 한 미술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이 시기까지를 과도기의 미술교육(1945~1953)이라고 한다.기능적인 면을 중시했던 전시의 미술교육은 1953년 휴전 후, 한국사회가 점차로 국력을 회복해감에 따라 다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휴전 후, 정부는 교육시설의 복구에 온 힘을 쏟게 된다. 미국 교육사절단은 전쟁 중이 1952년 8월부터 3차에 걸쳐 내한해서, 전국을 순방하며 생활중심의 교육운동과 민주적인 학습지도법 등을 보급하였고 1955년 처음으로 교과별 교육과정이 제정 공포되어 미술교육은 새롭게 활기를 띠게 되었다.이 시기에, 우리나라 미술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1956년에 내한한 미국의 피바디 교육사절단이었다. 그들의 한국에서의 미술과 공예활동은 지난 40여 년간 한국 학교미술교육의 주요 흐름이었던 창조주의 미술교육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피바디 사절단은 약 6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교원양성과 교원교육 분야에 관한 원조사업에 참가하고, 사범학교 교사들과 사범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미술과 공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미국식 도서관 운영방법을 최초로 전달하였고,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유아교육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고조시키는 역할도 하였다.피바디 교육사절단의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는 슈드로우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는 피바디 사절단원 중 유일하게 미술과 공예의 자문이자 교사교육의 전문가였다. 슈드로우를 중심으로 한 피바디 사절단의 미술교육활동이 우리나라에 준 영향을 정리해 보면, 첫째, 미술교육의 시범을 통한 창조주의 미술교육을 전파한 것, 둘째, 새로운 미술교육의 시사를 통해 한국 미술교육 관계자들과 교사들의 미술교육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고, 창조주의 미술교육으로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 기여한 것, 셋째, 미술교육연구회의 결성에 촉진제가 되어 ‘한국학교 미술교육연구회’의 발족을 이룬 것, 넷째, 미술교육 관련 출판물의 간행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 것, 다섯째, 전국에 아동미술의 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등이다. 그 외에 피바디 사절단은 한국과 미국학생들의 작품 전시회나 교류전을 주선하는 등 미술국제 교류에도 기여하였다. 이들이 내한하고 1963년에 개정된 제 2차 미술과 교육과정의 내용에 창조주의 미술교육이 상당부분 반영되었고, 1963년 개정시 새 미술교과서의 내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이시기는 재건기의 미술교육(1953~1963)이라고 한다.우리나라의 미술과 교육과정은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로 개정을 거듭해왔다. 또한 미술과의 교육내용은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상황에 따라 상당히 영향 받아 왔다. 미술표현활동에 대한 관점도 이전의 자연의 모방에서 실생활에 필요한 기능의 하나로, 그리고 개인의 감정이나 창조성의 표현수단으로 점차 바뀌어 왔다. 1950년대에는 기능중심의 미술교육이 상당부분 행해졌으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당시의 한국사회가 추구했던 반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조국근대화’의 가치 아래 국가가 주도한 경제적 성장강조 등의 국가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여 유용성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미술교육이,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점차 인간중심 교육이념이 강조되면서 개성적인 조형능력의 신장과 창조성의개발을 중요시하는 미술교육으로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다.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괄목할 만한 미술교육계의 성장은 미술교육 관련학회의 성립과 전개과정에서 보여 진다. 1984년 ‘한국조형교육학회’의 창립에 이어 1990년대 초에 한국교원대학교를 중심으로 ‘한국미술교육학회’가 창립되었고 1994년 10월에는 전국 교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회’가, 1984년 4월에 출범했던 ‘전국교육대학교 미술교육연구회’를 전신으로 개칭, 발족되었다. 잇달아 1996년 7월에 서울교육대학교를 중심으로 ‘한국초등미술교육학회’가 1985 5월에 발족된 ‘사향도예회’를 전신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이 외에도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을 중심으로 창립된 ‘한국색채교육학회’ 그리고 ‘한국미술교육연구회’, ‘서울대학 미술교육연구회’ ‘교육미술연구소’ 등이 발족하여 미술교육의 각 분야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게 된다. 이렇게 1990년대에 학회활동 및 여러 미술교육 관련 연구회들의 연구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한국 미술교육계는 초 중등학교 현장과의 연계성을 가지고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예체능| 2003.10.24| 5페이지| 1,000원| 조회(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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