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좋은 기업의 8가지 읽고1. 서 론초일류 기업들은 어떻게 시대를 뛰어 넘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일까? 이들 기업이 앞으로도 초일류 기업으로 남을 지는 더 지켜 보아야 하겠지만, 평균 1세기 동안 성공을 거둔 기업들에게는 특별한 비법이나 신화가 있을 것 같다.이 책은 스탠포드 경영 대학의 두 교수가 6년 동안 평균 연령이 100세인 18개 쌍의 초일류 기업과 이류 기업의 특징을 분석하여 성공 비법을 찾아본 것이다. 결론은 초일류 기업에게 특별한 비법은 없으며, 초일류 기업은 이러할 것이다 라는 편견이 틀렸음을 지적한다. 3,000가지 이상의 각종 자료를 근거로 정성적 혹은 정량적으로 분석한 초일류 기업의 공통 사항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들은 초일류 기업을 비전 기업(Visionary Company)으로, 이류 기업을 비교 기업(Comparison Group)으로 부른다.세계 일류 기업들에게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화지 않는 비전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계속 세계 일류의 기업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업의 핵심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핵심가치를 유지하면서 시대에 적응하였다. 따라서 기업의 핵심가치가 변화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의 CEO가 바뀌어도 여전히 일류 기업으로 남을 수 있었다.비전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리더, 비전있는 제품 혹은 시장, 통찰력에 관한 책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비전을 가지고 있는 비전기업(Visionary Company)들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비전기업이 그들의 업종 내에서 다른 동종 회사들에게 널리 인정받고 주위에 영향을 끼치며 오랜 전통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 조직(Institution)이라는 해답을 주고 있으며,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경영기법과 유행어를 넘어 일관성있게 시대를 초월하며 비전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핵심적 특징들을 도출해 내고 있다.2. 성공하는 기업의 8가지 구체적 특징ⅰ. 성공하는기업들의 8가지 습관 하나 : 시간을 알려주지 말고 시계를 만들어 주어라비전기업의 성공비결이 단지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가 잇었기 때문이거나 강력한 권위를 작고 명쾌하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직내에 정착되어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과 그 역동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비전기업에는 뛰어난 아이디어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있다' 라는 기존의 상식을 깨뜨리고, 제품의 수단으로서 기업을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기업의 수단으로 제품을 보게 된다. 아이디어는 포기, 수정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도 되지만 회사는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비전기업에서 뛰어난 제품과 서비스가 나올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조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비전기업의 리더들은 회사를 바라볼 때 건축적 사고법을 지향하고 있다. 즉, 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종업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독자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율성, 창의성 개발에 최선을 다했다.따라서 이 저자는 기업이 특정제품이나 서비스에 몰입하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집착하지 말고 비전기업 자체의 개성을 건설한다는 조직적 안목과 시각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ⅱ. 공하는기업들의 8가지 습관 둘 : OR 이 아닌 AND 를 추구해라비전기업은 서로 상반된 2개의 힘이나 사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아니면(OR)' 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대신 A와 B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기업의 궁극적 목적을 이윤추구가 아닌 핵심이념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경영이다. 이익은 존재를 위한 조건이며 더 중요한 목표를 위한 수단이나 이익이 목적 그 자체는 아니다.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 자체가 기업의 목표는 아니라는 인식이며 기업의 핵심이념을 설정하고 이에 부합되는 창조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 이익은 부수적으로 생기는 것이다.비전기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단계는 기업의 핵심이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비전기업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본서에서는 핵심이념을 구성하는 두 가지 부분의 정의를 이끌어 내었으며 비전기업들은 지속적으로 핵심이념에 충실하였다.여기서 핵심이념이란 조직의 필수적이고 영속적인 신념으로 특수한 문화나 운영지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경제적인 이익이나 근시안적 기대치와도 타협해서는 안된다.목적이란 단순한 이익추구를 떠나 기업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존재이유로 특정목표나 경영전략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비전기업은 위와 같은 핵심이념을 바탕으로 늘 새로운 사업으로 진화해 가면서 그 회사의 핵심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ⅲ. 성공하는기업들의 8가지 습관 셋 : 핵심을 보존하고 발전을 자극하라비전기업은 핵심이념에 철저하면서도 동시에 발전을 추구한다. 핵심이념과 발전을 향한 열정은 마치 중국 이원론 철학의 음양같이 비전기업 내에 동시에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하고 보완하며 강화하는 것이다.핵심이념은 발전자체를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비전기업이 진화하고 실험하고 변화하는 네 기반이 되는 지속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핵심을 명확히 함으로써 기업은 좀더 쉽게 핵심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해 변화와 발전을 추구할 수 있다.발전을 향한 열정은 핵심이념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계속적인 변화와 전진이 없다면 핵심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라도 결국 변화하는 세계에 뒤쳐질 것이며, 활력을 잃고 사멸할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핵심이념이나 발전을 향한 열정의 뿌리는 보통 특정 개인들에서 비롯되지만, 비전기업은 그것들을 조직의 모든 계층에 엮어 제도화한다.ⅳ.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넷 : 크고 위험하고 대담한 목표발전을 자극하는 것만으로 목표(BHAGs)가 달성되는 것은 아니며, 목표를 향한 절대적인 헌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모든 목표가 BHAGs의 수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BHAGs의 본질은 "그것이 발전을 자극했는가? 그것이 추진력을 만들었는가? 그것이 사람을 움직였는가? 그것으로 인해 종업원들이 활력을 가지는가? 종업원들이 목표에 자극 받고, 재미있어 하며 모험적으로 되고 있는가? 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창의적인 재능과 에너지를 목표달성에 쏟고 있는가?" 등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비전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생명력을 지닌 BHAGs를 설정하고, 수 세대에 걸쳐 이를 촉매로 활용한다. 그리고 회사가 미래를 위하여 과감한 목표를 계속 스스로 설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BHAGs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면서 강력해야 한다.BHAGs를 기업의 안전지대 훨씬 바깥에 설정해야 한다.BHAGs는 그 자체로 과감하고 재미있어서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 조직이 떠나더라도 발전을 계속 적으로 자극할 수 있어야 한다.BHAGs는 한번 달성되고 나면 조직이 "드디어 달성하였다" 는 증상에 빠져 표류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BHAGs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회사의 핵심이념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이다.ⅴ. 성공하는기업들의 8가지 습관 다섯 : 사교같은 기업문화'비전있는' 이란 말은 부드럽고 느슨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전기업은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성취하길 원하는지에 대해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바에 별로 부합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비전기업들은 타 기업들과 비교하여 몇가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데 핵심이념을 열렬하게 고수한다. 구성원에 대한 철저한 교화 과정, 적합성에 관한 엄격한 기준, 엘리트 의식 고취 등이 있다.이러한 몇가지 공통된 특징을 이루어 내기위해 비전기업은 이념적인 통제를 강하게 하는 동시에 개인의 창의를 북돋우기 위해 조직의 운영면에서 광범위한 자율성을 부여한다.ⅵ. 성공하는기업들의 8가지 습관 여섯 : 많은 것을 시도해서 잘 되는 것에 집중하라비전기업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들이 상세한 전략적 계획에 의해 이루어 졌다기 보다는 이것저것 하던 중에 우연히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즉, 성공적인 기업전략은 기회주의적인 실험과 우연한 발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비전기업은 우연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무엇인가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잘되면 그것에 집중하며, 무엇이 미래에 일어날지 상관하지 않는다. 비전기업이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는 것은 '가지내기와 가지치기'로 표현되는데, 이는 어떤 나무에 충분히 많은 가지를 내게 하면서 동시에 쓸모없는 가지를 현명하게 선택하여 잘라낸다면, 우리는 항상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는 건강한 가지만들을 가진 나무만을 소유하게 된다.다시 말해서, 비전기업의 성공적인 업적은 전략적 계획이나 통찰력보다는 많은 것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나온 우연한 발견의 산물이었으나 무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며, 적극적 행동(시도)을 위한 계획(초기계획)의 실행과정 중 변화와 선택의 진화론적, 돌연변이적인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창조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것을 시도하고 중요한 것을 선택, 발견하고 있다.
개 요1장. THX의 이해1. THX란 무엇인가?2. THX의 개발3. THX의 발전4. THX의 확장5. 홈 THX의 이해6. THX 승인 시스템과 기준7. 홈 THX 인증 사운드 시스템 요구 사항·Home THX Controller·Home THX Speaker·Home THX Amplifiers, Equalizers, Interconnects2장. SACD의 이해1. SACD란 무엇인가?2. SACD의 개발3. SACD의 특징·PCM방식은 능가하는 디시크 용량의 혁신적인 증가·SACD의 구성·데이터의 왜곡과 손실 없는 고순도의 신호 처리 기능4. DVD 오디오와 SACD·DVD 오디오와 SACD의 배경·DVD 오디오와 SACD의 비교와 확산·현황과 앞으로의 개발 가능성1장 . THX의 이해1. THX란 무엇인가?영화를 즐기는 영화, AV 매니아라면 누구나 한번쯤 THX 라는 단어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지난 15년동안, THX 라 함은 영화감상에 있어서의 하이클래스 사운드 & 비주얼의 대명사로 통해왔다.그동안 분명히, THX 만이 유일한 사운드와 비주얼의 프레젠테이션 방법은 아니였지만 궁극적인 표준으로 확실한 자리를 지켜온 것은 THX 만이 유일하다. 영화관에서의 최고의 퀄리티를 재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관인증 프로그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가정용 홈씨어터까지 포함하는 홈씨어터용 THX 인증 프로그램까지 도입되기에 이르렀다.현재 VHS, 레이져 디스크, DVD 그외 각종 하드웨어에서도 명성을 구가하며, 이제는 영화라는 개념에서 첨단 비주얼&사운드 전반에 걸친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하지만 일반적인 영화관객 뿐만 아니라 매니아들에게까지도 THX 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가 대단히 많다.과연 THX 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며, 왜 그런 처리를 하여야 하는지 등등 그 개념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홈씨어터 뿐만 아니라 영화매니아들에게 또 이제 AV 라는 세딩 장비를 포함한 물리적인 전자기기들의 개조나 변경 등이 포함된다.쉽게 말해 A 파트는 무엇을 재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으며 B 파트는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THX 가 중점적으로 파고 든 것은 바로 후자인 B 파트에 대해서 였다. 영화 사운드의 레코딩, 믹싱, 대사나 효과음들에 대한 처리 등이 이루어지는 더빙 스테이지의 음향학적인 특성과 실제 상영되는 영화관의 특성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파악한 홀먼은 사운드 제작 스튜디오부터 모든 것을 바꾸기로 하였다. 쉽게 말해 사운드 스튜디오에 맞춰 극장을 바꾸기보다는 극장에 맞는 사운드를 위해 스튜디오부터 바꾸려는 것이 홀먼의 생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홀먼의 이야기다."당시 내가 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한 최고의 사운드를 만들어보려는 것 이였지만 나 중에는 그렇게 제작된 사운드를 일반 극장에서 알맞게 재생되도록 사운드 퀄리티를 다운그레이드 시키 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믹서에서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도록 모든 작업을 할 수 있어야만 했었습니다."이러한 믹싱 작업을 위해서 실제 영화관과 똑같은 음향특성을 갖는 더빙 스테이지를 꾸미는 대신, 다양한 환경의 음향적인 특성을 사용자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더빙 스테이지를 구축하였다. 이처럼 사운드 환경을 훨씬 뒤떨어지도록 낮추는 작업이 실제 영화사운드의 전환점이 되었다.THX 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관 사운드의 하이클래스로의 표준화는 영화 상영과 관련된 모든 산업들 전반에 대하여 대대적인 개선을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변화는 THX 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단지 오디오 처리 과정 중 가장 취약한 부분을 바꾼 것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한창 연구 중이었던 홀먼과 그의 팀은 벨연구소, 영화 TV 엔지니어 협회, 국제 표준 기구(ISO), 오디오 공학 협회(AES) 등 다른 오디오관련 연구기관보다 한 발짝 앞서, 개선된 오디오 처리 작업전송방법이 그것이다. 따라서 멀티 채널 포맷에 관한 보다 깊은 연구가 계속 진행되었고, 돌비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994년 가전기기 박람회(CES) 에 첫 돌비 디지털 서라운드 포맷을 발표하게 된다. 처음에 돌비 디지털 AC-3 로 명명되었던 현재의 돌비 디지털 5.1 은 돌비 프로로직의 수많은 한계에 많은 갈증을 느껴온 홈씨어터 시장은 곧바로 이 포맷에 불을 지펴나가기 시작한다.새로운 레이져 디스크 마스터링 프로그램의 발표와 함께, THX 는 소스 필름의 선택방법, 필름에서 테이프로 트랜스퍼링하는 텔리시네처리 단계부터 최종적인 생산과정에 걸친 일련의 완전한 레이져디스크 제작과정을 다루는 광범위한 새로운 처리방식 특허를 제공하였다. 당시 톰린슨 홀먼과 그의 팀은 레이저 디스크가 최상의 비디오와 오디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아주 엄격하고 수많은 퀄리티 처리 표준안을 만드는 데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었다.하지만 이미 한세대가 바뀌는 시점에 이르러(어비스나 터미네이터 2 와 같은 디지털 기술의 영화들이 속속 발표되던 시점이었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빠른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으므로, 소프트웨어 인증 프로그램을 어떻게 적용하여 수행할지에 관한 방향 또한 이미 미래를 대비, 앞으로 나올 매체등을 고려, 앞서가는 노력을 기울였다. 홀먼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레이져디스크가 어떤 부분들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레이져디스크는 DVD 가 출발할 수 있던 좋은 발판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이미 DVD 가 개발되고 있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레이저 디스크 포맷에 대하여 뛰어난 퀄리티를 보장하기 위해, THX 는 또한 미래에 나올 디지털 전송매체와 궁극적인 DVD 인증 프로그램을 대비하는 기본작업을 이때부터 배경에 깔아두었다.수개월간의 개발 끝에 첫 THX 테스트 디스크가 제작되었고, 지옥의 묵시록과 인디아너 존스 트릴로지가 그 대상이었다. THX 레이저디스크 마스터링 프로그램이 사용되고 THX 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THX 로고는 붙이지 않았다. 얼마후 통과, 승인이 되면 이 레이저디스크는 THX 인증마크가 각인되어 상점의 진열대에 꽃히게 된다.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THX 는 그 브랜드 명성이 성공적인 궤도에 진입하게 된다. 전 세계를 통해, 수 천개의 극장들과 더빙스테이지들이 THX 사양을 받아들였고, 돌비 디지털 5.1 은 새로운 디지털 매체인 DVD 와 HDTV 의 표준으로 채택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THX 로고의 레이저디스크나 AV 기기들이 수많은 홈씨어터 지지자들과 매니아 그리고 가전 관련 언론에서 하나의 보증마크이자 하지만 새로운 테크널러지의 패러다임이 이러한 과거의 노력과 업적 자체를 위협하며 모든 가전과 영화산업 그리고 통신세계를 뒤바꾸는 일대 변혁이 일기 시작하였다. 바로 디지털이었다. 루카스 필름 산하의 THX 와 인더스트리얼 라이트 앤 매직(ILM, Industrial Light and Magic) 은 이미 이전부터 디지털로의 변혁의 시대를 끊임없이 꾸준히 준비해온 몇 안 되는 회사들 중 하나였다. 터미네이터 2 와 쥬라기공원의 대단히 성공적인 디지털 특수효과들은 영화제작의 예술 자체에 새로운 혁명을 안겨주었으며 이런 모든 일련의 영화제작 혁명과 디지털 효과기술은 바로 ILM 과 루카스 필름의 산물이었다.5. 홈 THX의 이해홈 THX란 극장의 필름 사운드를 가정에 도입하여 극장에서와 유사한 감동을 느껴보자는 새로운 음향적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홈 THX를 다루기에 앞서 프로페셔널 THX, 즉 극장용 THX 오디오 시스템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보겠다. THX 시스템의 발단은 1980년에 루카스 필름사가, 사운드 트랙 레코딩과 극장용 음성 시스템 연구를 위한 기술연구소와 전용 극장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영화관을 위한 음향 개선 연구를 시작한 데에서 기인한다. 당시 영화관의 음향시스템에 대한 기본 조사를 실시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의 음향이론과 발달된 기기의 사용에 의한 획기적인 종합 개선책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톰린슨 홀만이라는 엔지니어의 이니셜을 딴 THX 가 영화를 보면서 두 사운드 영역 내에 있다는 느낌이 아닌 영화 자체 내에 놓여있다는 실제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사운드 소스가 영화 관람자의 정면에서 옆과 뒤로 이동할 경우 - 매칭되어있거나 완전히 동일한 스피커일지라도 - 관람자는 +8에서 -3dB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사운드의 특성이 관람자의 머리와 귀 밖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소스의 방향이 변화함에 따라 이러한 특성은 변화되게 된다.(사운드 이동시 음색의 특성은 사운드 믹서에 의해 신중하게 조절되어진다.) 극장의 경우 스피커들은 관객의 머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위치하게 되며(전방, 옆, 뒤), 전방 채널과 균일하게 매칭 되어진다. 하지만, 가정의 경우 음색의 불일치는 매우 손쉽게 발생하게 된다. Home THX Timbre Matching 회로는 관람자가 하나의 연속적인 사운드 영역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전방 채널과 서라운드 채널의 음색을 균형 잡을 수 있도록 맞춰주게 된다.·Adaptive Decorrelation마지막으로, Home THX는 돌비 프로 로직의 모노 특성을 가진 서라운드 채널과 같이 서라운드 스피커간의 상관성을 줄여주는 작업을 하게된다. 극장의 경우 사운드는 많은 수의 서라운드 스피커들에 의해 뒤섞이고 적은 공간 반사가 이뤄지기 때문에 관객이 부자연스러움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관객의 왼쪽 귀와 오른쪽 귀에서 완전히 동일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서라운드 사운드를 모노와 같이 동일하게 느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돌비 디지털과 DTS 사운드 및 분리된 좌/우 서라운드 채널에서도 많은 모노 서라운드 사운드 효과를 사용한다. 결국 모노 서라운드 사운드는 극장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THX Decorrelation 회로는 부분적으로 하나의 서라운드 채널과 다른 채널간의 시간 및 상을 조절하게 된다. 이러한 끊임없는 시간과 상의 변화는 좌/우의 귀에서 동일한 신호를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결국.
순결 이데올로기가 남녀의 성(性)행동에 미치는 영향먼저 이 글을 쓰기 전에 분명히 내 스스로 집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나의 “순결”에 대한 사고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나는 여성의 일방적인 순결을 강요하는 전근대적이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속물(?)의 한 부류는 아니다.또한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나 여성이나 순결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단순히 성(性)적인 쾌락을 위해서 어느 누구와 아무 거리낌 없이 즐기려는 그런 성개방론자도 아니다.그렇다면 이렇게 어느 한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우유부단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성(性), 또는 순결에 대해서 분명하게 나름대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한 여성과 남성이 서로 “사랑”이라는 매우 중요한 전제를 두고서야 만이 결혼을 통해서라든지 아니면 혼전이라도 관계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서두에서 길게 언급하기 보다는 여러 매체를 통한 자료들을 참고하여 이러한 나의 “순결”에 대한 가치관을 가지고 “순결 이데올로기가 남녀의 성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나름대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고자 한다.정식 결혼에 앞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여자는 일단 ‘순결’을 잃게 된다.깨끗한 육체의 원상에 흠이 가 더럽혀진다고 해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남녀가 다 같을 텐데 순결을 따질 때면 여성만이 도마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아마도 힘으로 여성의 우위에 서게 된 남성들이 그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 이데올로기의 오랜 작용일 것이다.고대 유대인들은 여자가 결혼을 하면서 스스로 처녀의 몸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돌로 쳐 죽이는’ 잔인한 벌을 내렸다.이슬람교도들도 혼전에 순결을 잃는 여자는 아버지나 오라비가 나서서 살해해 버렸다.여자가 순결을 잃고 몸을 더럽히는 것이 가족 전체의 명예까지 욕되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수치와 불명예를 씻는 의식이 당사자에 대한 가부장의 살인행위로 돌아간 것이다.우리나라에서의 여성의 순결은 엄격히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였다. 처녀가 순결을 잃는다든가 비록 결혼한 경우라도 정조를 잃은 여자는 집안에서 내쫓기거나 자결을 강요 당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순결지상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정착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유교적 전통을 갖는 가부장사회에서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것은 여성의 순종을 이끌어내고 길들이는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남성들에게서 주입 받은 이 순결 이데올로기를 오랜 기간 몸에 익혀온 여성들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지금에 와서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내놓고 말하기가 뭣할 만큼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고 성풍속도 바뀌었다지만 아직 조선 시대나 통할 만한 순결의 가치에 열심히 매달려 사는 여성들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한편 남자들 사이에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차지하는 수단으로 ‘도장(?)을 찍는 것’이 여전히 신봉되고 있다. 왜곡된 순결 강박증을 무기 삼아 강도 등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은 성폭행 장면 등을 사진이나 비디오로 찍어 신고하지 못하게 하거나 돈을 갈취하기까지 한다. 여성들은 순결이 깨졌다는 자책감에 시달리고 남편 등 가족이 알게 되면 결국 가정이 파괴된다는 것을 범인들은 이 사회의 보편적 법칙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적 순결에 대한 젊은 계층의 견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지극히 자유롭고 개방적이다.최근 내가 읽는 한 신문에서의 조사 내용으로는 여성 기혼의 41.6%, 미혼의 44.2%가 ‘처음 만난 사이라도 마음에 들면 성행위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남자의 경우 기혼의 75.3%가, 미혼의 74.1%가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또 여자의 64.3%, 남자의 64.8%가 ‘혼전순결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항목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결혼 후 배우자 외에 다른 상대와 성행위를 한적이 있다’고 답한 이들도 전체 응답자 1.280명의 44%인 565명이나 됐다고 한다.또한 최근에는 혼전 순결을 문제 삼아 이혼재판정에 서는 부부도 희귀해 졌다고 한다.법적으로도 단순히 혼전순결 문제만을 이유로 남편이 이혼소송을 낼 경우 이혼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도리어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이 아내를 구박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부인이 이혼소송을 내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이렇듯 우리 사회가 순결 강박증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일부 여고에서는 순결 서약식을 갖고 은장도를 주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내 생각엔 처녀성을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교육이라는 보기 좋은 명목으로 무지막지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미혼여성의 일부는 이러한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순결에 대한 의식이 요즘 들어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혼을 앞둔 많은 여자들이 처녀막 재생 수술을 위해 산부인과를 찾는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남자의 순결에 대해서는 묵과하고 있지만 여자의 순결에 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한다.사랑하는 남녀가 강도나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하다가 헤어지는 등 순결 이데올로기의 희생이 되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만약 이런 안타까운 사건이 나의 경우라고 생각한다면 나 역시 많이 고민할 것이고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라고 생각해도 평생 그런 악몽을 가지고 살아가기 보다는 서로를 위해 헤어지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나는 여성의 순결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여성의 지금 만나고 있는 남성과 교제하기 전에 다른 남성과 진정으로 사랑해서 성관계를 가졌다면 분명 그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반대로 그 여성의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 했다고 비난하는 남성들 보다는 여성 자체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바로 위에서 언급한 내 생각은 여성들 보다는 남성들이 더욱더 반성하고 각성해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비싼 값을 치르면서도 상당수의 남성들이 끊임없이 10대의 어린 여성들을 찾거나 여중, 여고생을 상대로 원조교제에 나서는 것도 순결 이데올로기의 다른 표현이다. 단순히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리나 말 그대로 ‘처녀성 사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오! 수정”이라는 영화에서는 우리사회의 순결이데올로기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이 영화에서는 순결이데올로기가 영화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데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그에 따라 여성의 가치를 판단하는 남성과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등장 인물 중 오빠가 그리는 수정의 이미지는 바로 남성들이 받아들이는 순결한 여성 그 자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성은 순결의 존재를 믿으며 그것을 찾지만, 여성은 그 순결이라는 것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데도(여기서의 순결은 처녀막의 유무를 말하는 것이 아닌 넓은 의미로 순결한 여성 자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이다. 수정은 재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척 행동 하지만 실제로는 키스하는 것은 느낌이 좋아서 한다고 말하고 오빠의 자위를 도와주고 친한 친구와 몇 차례 관계를 시도하는 등 경험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구성하고(“저 처녀에요.”) 관계에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남녀의 관계 맺음의 방식은 그것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여성의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처녀성을 둘러싼 입장들과 의도들의 부침은 여성의 몸이야말로 사회적 모순이 가장 치열하게 부딪치고 드러나는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 목 차 ◎※ 서론························2※ 본론························21. 한국사회 종교의 변천사·············22. 산업화에 의한 한국종교·············33.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34. 신 흥 종 교···················65. 현대종교의 실태와 문제점········ ····66.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77. 종교의 바람직한 형태의 모색············8※ 결론························8※ 서 론어떤 이는 인간의 마음에 평온함을 주는 것이 종교라 말한다. 혹은 종교란 교리의 진리를 통해 가장 인간미 넘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며 사회에 공헌해 가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 얘기하기도 한다.지금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로 만연한 우리사회는 이러한 종교의 진정한 의미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많은 매체를 통해 우리가 듣고 있는 각 종교(교단)의 모습은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참진리를 통해 사회를 변혁해 갈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현대 한국사회를 단숨에 바꾸어놓은 급속한 산업화는 한국종교의 세속화와 물량적 성장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는 한국종교가 문화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만큼 사회변동에 휩쓸려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종교는 문화적 기능을 수행한다기보다 정치적 기능에 더 치중해 왔다. 그리고 사회 혜택을 받은 자에게는 부의 정당함을, 소외된 대중들에게는 정신적인 위안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었다.이 같은 한국의 종교상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증가하는 영향력, 감소하는 공신력'이라는 대구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1964년부터 1994년까지 30년 동안 총인구는 1.58배 증가한데 비해, 같은 기간동안 종교인구는 무려 6.2배 증가하였다고 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종교 인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종교집단들이 보유하고 있는 경제적인 자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오랜 동안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어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카톨릭도 미국사회에서 상당한 신도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카톨릭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들이 오랜 동안 주도해온 종교였다. 그 결과 정치 권력과 쉽게 유착될 수 있었다.또한 미국은 개신교 출신이자 미국에서 활동을 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함으로 이런 영향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종교의 성장은 90년대까지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양적 성장은 교인 늘리기와 교회 넓히기에 급급했을 뿐 질적인 성장을 하지 못했다. 거기에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서민층의 외면이다. 60년 경제개발정책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간의 많은 격차를 야기 시켰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중산층화 되고, 교회는 중산층 쪽에 편중된 종교활동을 하게되었다. 이것은 서민층의 소외현상을 야기 시키게 되었다. 이런 소외된 서민층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할 수 있는 곳을 찾게되었고, 결국 신흥종교라 불리는 다양한 종교가 증가하게 되었다.2. 산업화에 의한 한국종교현대 한국사회를 단숨에 바꾸어놓은 급속한 산업화는 한국종교의 세속화와 물량적 성장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는 한국종교가 문화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만큼 사회변동에 휩쓸려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종교는 문화적 기능을 수행한다기보다 정치적 기능에 더 치중해 왔다. 그리고 사회 혜택을 받은 자에게는 부의 정당함을, 소외된 대중들에게는 정신적인 위안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었다.급속한 산업화는 한국종교에 다양한 문제점을 불러오기도 하였다.Ⅰ. 한국종교는 급속한 산업화과정에서 자신들의 문화적 소임을 잊은 채 외형 성장에만 치중하여 왔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종교들은 한국인의 종교 심성을 재충전해 줄 수 있는 제도 능력이 불충분하여 시간이 갈수록 내면적 가치관의 영향력마저 점점 상실해 가고 있으며, 기독교는 아직 한국인의 심성에 그 닻을 깊이 내리지 못한 채 세속화국을 대표하는 종교Ⅰ.기독교초기 기독교는 단순 신앙 뿐 아니라, 그 교리에서도 보여지듯 인간애와 평등을 중심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근대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회·문화적 활동에서도 보여지듯이 곳곳에 의료·교육 사업 등의 활발한 활동을 이룬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더욱이 그들이 받아야했던 박애는 봉건사회의 청산과 근대화로의 이양에 더욱 기여한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이 장점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일제점령이 시작되면서 카톨릭은 억압을 벗어나 활기를 띠게된다. 이는 국가 간의 정치적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국을 차지하겠다는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교류 속에서 서양 종교인 카톨릭은 종교자유란 이름하에 활성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카톨릭은 정교분리원칙을 강조하면서 의병활동을 반대하고 오히려 일본의 우위를 인정하는 경향을 띄었다.더욱이 정교분리가 정치와 종교의 완전한 분리가 아닌 기존 세력의 옹호를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부터 해왔던 사회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사회복지, 의료, 언론, 교육 등이 그것이며 이런 것들은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 주체가 서양 선교사들이었으므로 기본교육이상의 것이 행해지지 못했다. 결국 카톨릭은 우리 역사속에서 새로운 종교로서의 탈출구를 제공하며, 근대화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한계성을 띄었고 일제하에서 민족의식을 외면하는 오점을 남기었다.또한, 기독교의 포교 형태를 보면, 상대적으로 조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다른 종교에 비해 매우 역동적이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보였다. 그 와중에서 가정방문 설득은 타종교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동을 마치 이것이 당연하고 정당한 일인 것처럼 거침없이 행했고, 신앙의 독선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인들은 남의 종교를 '우상숭배'라고 하고 자기의 종교만이 '세계종교이며, 과학적 종교'라는 맹신에 사로잡혀 다른 종교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의 독선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넷째로, 종교의 현안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교파분열, 신종교와 사회정책과의 갈등, 품위 없는 성직자, 헌금의 지나친 강조와 같은 문제들은 개신교의 경우 특히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다.한국 개신교는 한동안 보수적인 신앙 성향 때문에 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지나친 보수화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성장 침체와 이탈 가속화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성의 보수화(특히 구원과 교리 문제에 있어서의)가 심화되기 시작한 것과 수백만이 교회를 떠나가기 시작한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기 때문이다.분명히 지나친 배타성, 폐쇄성, 보수화는 한국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수용성, 개방성, 자유화 흐름과는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앞으로는 선교에 있어서 하나의 장애물이 될 것이며 기존 신자로 하여금 교회를 이탈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다. 아마 개신교의 이러한 보수화 경향이 특히 젊은 층과 지식층으로 하여금 개신교를 떠나가게 만드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상 젊은 층과 고학력자는 종교적 성향에 있어서 보수화 경향과 가장 거리가 멀다.젊은 층과 고학력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개신교로는 이들의 이탈은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의 보수화가 장년 혹은 노년층을 끌어드리는데 효과적이라는 증거도 없다. 그리고 또한 개신교의 배타적 성향은 타종교로부터 개신교로의 개종률을 가장 낮게 만드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타성 때문에 타종교인들은 개신교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물론 어떠한 변화가 없다면 개신교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다른 요소들도 많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 사회적 공신력의 문제다. 앞에서 논의된 여러 가지 종교 현안문제(교파 분열, 신종교문제, 품위 없는 성직자, 지나친 헌금강조)들은 특히 개신교를 향해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들이다.개신교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지적은 오늘날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핵심적 현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첫째로 지적되교에 대한 비방과 비판을 멀리하고, 만남과 대화의 노력을 꾸준히 증진해야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다종교(多宗敎)사회에 어떻게 공존해야 되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4. 신흥종교한국사회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흥종교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부터였다. 당시, 조선봉건사회의 체제적 모순이 극대화되고 여기에 덧붙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충격이 가해짐에 따라 민중의 생활과 국가의 정체가 위기를 맞게 되자,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운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신흥종교운동은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궁핍화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중이 대상욕구와 손상된 민족적 자존과 긍지를 회복하려는 민중의 열망을 토대로 하여 전개된 사회운동의 한 형태였다.이렇게 초기 신흥종교는 핍박받고 서러운 민중의 탈출구로써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신흥종교는 민중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관리들은 수시로 농민들을 억압하고 수탈하였고, 각종 부당한 징수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에 전봉준을 위시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신흥종교의 한 예로 보여진다. 신흥종교에는 인간존엄사상이 내포되어 있으며, 강한 민족주체사상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교단의 창시자를 구세주로서 '신성화'시킴으로써 여러 문제를 야기 시킨다. 한때 방송에서도 시끄러웠던 JMS(정명석) 사건 등이 좋은 예이다.이들은 초기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심 채우기에 집착하고 있다. 이것뿐 아니라 이런 소수 종교들은 집단자살이나 광적인 행위들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인 거부감을 부각시킨다. 이것은 사회의 계층간의 이질감이 형성되 있고 소외된 계층을 또다시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일 것이다. 어찌보면 그들은 소외된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며 소외당하며 누리지 못했던 화목한 동네를 그 안에서 꾸미는 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그들의 행동이 그들에게는 행복의 하나일지도 모른다.현재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는 500여 개를 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이다.
< 서론 >양란 후, 17, 18세기는 민족적인 자아 의식이 성장하여 역사의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성리학에서 독립하여 경사 일체적 역사인식이 나타났고 시세론, 성패론을 비롯한 역사 인식으로 새 기준이 등장했다. 또 지역 중심의 화이론과 정통론이 부정되고 문화 중심의 화이관이 제시되고 한국사의 정통론이 대두되었다. 철학자들에 의해 역사의 객관적 인식이 강조되고, 자국사의 독립성에 대한 인식도 강화되었다. 역사 서술 체제에 있어 범례라는 역사적 가치관의 범주를 먼저 설정하고, 범주에 따라 서술하는 강목서술이 등장하여 동사강목 같은 사서가 나왔다. 또 남인학자들에 의해 정통론이 강조되어 한국사와 중국사를 대등하게 연결 하였다. 강목체 서술과 정통론 대두는 국제적 상황에 따른 반성, 자기인식의 심화와 중국 중심의 세계관 탈피를 촉진시켰고 한국사의 주체적 체계화 작업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익에 의해 주장되고, 안정복이 수용한 시세론과 성패론은 객관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적 제 관계의 결정과 역사적 시간성의 추세로 보는 것으로 성리학의 도덕중심사관을 극복하였다. 사료가 역사연구에 중요함을 인식함으로써 국가에서 비장하고 있는 자료와 모든 제가의 문서까지 참조하는등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고증적 방법을 강조해 도덕주의적 한계를 극복했다. 또 귀납적 실증주의를 지향하여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으며 시공간적으로 역사연구의 대상을 확대했다.1.17세기의 역사서술.17세기는 붕당정치가 궤도에 오르던 시기로 각 붕당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사상이나 학문경향이 달랐고, 붕당의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개성있는 사서가 경쟁적으로 출간되어 정치에 응용하였다. 일본과 청의 성장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개편되고 농본적 새질서가 흔들린 상황에서 정치집단과의 견해차이등은 역사서술에 반영되었다. 17세기 역사서술을 보면, 성리학의 지도이념이 흔들려 성리학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역사주체문제에 있어 국내적으로 신화와 국제적으로 명나라의 정통론을 탈피하여 조선의 인식을 하게되었다.강목체로 서술하여 붕당체제안에서리지』의 체제는 삼국이전, 삼국, 고려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삼국 이전 부분은 중국사서의 관련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서술하고 각 항목 뒤에 대체적으로 사론(史論)의 성격에 해당하는 자신의 견해를 달았다. 『한서』와『후한서』의 「동이전」, 『통전』등 중국측 사서를 주로 인용하였으며, 우리측 사서로는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사찬요』등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였다.한백겸은 국내자료가 열악한 삼국이전의 경우 중국측 자료를 신빙하였으며, 삼국과 고려의 경우 한사군처럼 중국이 지배했던 지역이나 요동처럼 고구려에게 병합된 지역 등을 서술할 때는 중국측 자료를 주로 인용하고, 신라나 고려의 지역을 서술할 때는 주로 우리측 사서를 인용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증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연구 태도를 잘 나타내준다. 한백겸은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愚按이라 시작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사론 형식으로 밝히고 있다. 이 사론은 역사적 사실의 진위만을 밝히려는 경향이 강하여 경학에서 떨어져나간 독립적인 학문으로서의 역사 연구방법의 단서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한백겸은 중세 유교적 역사연구 경향과는 달리 객관적 기준 위에서 사료비판·고증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하여 『동국지리지』를 저술함으로써 역사지리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는 경학에서 역사를 독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후 조선 중·후기 역사서술의 한 흐름이 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주자성리학만을 묵수하지 않고 육경·고례를 중시하며 고증을 통하여 의문점을 해결하려고 했던 과학적인 학문방법과, 외적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게 된 이유를 지리적 요인, 대외정책과 관련해서 찾아보려고 하는 등 객관적 기준에 바탕을 둔 역사의식, 그리고 후금과의 전쟁을 경계하는 현실 의식 등이 결합되어 한백겸은 역사를 지리라고 하는 객관적인 요소를 통해 살펴보는 역사지리서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리서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백겸의 역사학은 이후 유형원을 비롯하여 홍만종·신경준·안정복·정약용 등 조선후기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익을 주축으로 성립된 경학 중심의 학풍이 다산 정약용에까지 전수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사』로 요약되는 독특한 사관은 단군 중심의 역사이해 방식으로 선교(仙敎) 혹은 도가 쪽을 향해 근대 민족주의사학에 계승되고 있다.5 홍여하의 휘찬여사와 동국통감제강휘찬여사는 고려사를 대본으로 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기전체를 따랐으나 고려사와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범례·세가·지·열전·부록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총 47권으로 137권인 고려사의 ⅓ 정도의 분량이다. 이는 홍여하가 열전을 중심으로 3/5 가량을 생략하고 새로 1/10 정도를 첨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가에는 중국에 관한 기사가, 열전에서는 새로운 인물들이, 각 지의 앞 부분에는 논(論)이, 부록으로 외이전(外夷傳)등이 첨가되었다. 이책은 17∼18세기 역사서술의 새로운 경향인 강목법과 정통론에 의해 서술했기 때문에 열전의 비중이 크다.『동국통감제강』은 홍여하가 서인의 공격을 받아 관직을 그만두고 학문연구에 참잠했던 기간인 1672년(현종 13)에 저술하였다. 『동국통감』을 주자강목법에 따라 고쳐 이 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후손들에 의해 가숙용으로 읽혀져 내려오다가 1786년경에 간행되었다. 서문은 안정복이 썼다. 『동국통감제강』은 총 13권으로 고려 이전의 역사를 다루었다. 『휘찬여사』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을 보충하여 우리나라 전체 역사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다.내용은 크게 범례, 조선기(朝鮮紀),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홍여하는 經과 史를 道의 體用관계로 이해하고, 역사서를 포폄하고 권징하는 책으로 보았다. 이는 역사를 객관적인 학문이 아닌 도덕적 효용을 위한 학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정통과 참위를 명확히 구별하고 신화·설화에 대해 부정직인 입장을 취했다.기자조선의 계승여부에 따라 '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전통체재를 세웠으며, 기자는 우리의 역사에서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존재로 위치지었다.『휘찬여사』에서도 명분을 강조하였고 외이전을 새로 설다.임상덕의 『동사회강』은 18세기 후반의 이종휘와 안정복의 사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임상덕의 『동사회강』은 17세기의 『여사제강』과 18세기 후반의 『동사강목』을 이어주는 역사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강목체 사서는 『여사제강』과『동사회강』의 과정을 거쳐 『동사강목』의 완결된 체재로 발전했다. 또한 역사지리의 고증은 17세기 한백겸의 설이 임상덕에게 수용되어 이종휘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해된다.임상덕의 소중화의식은 18세기 초 대명의리론의 연장선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소중화의식은 조선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조선이 중국과는 분리된 독립적 민족국가임을 발견해가는 단초로 이해할 수 있다.2.이익18C 남인 근기파의 거목이었던 이익은 화이관·소중화 의식에서 탈피하여 현실적인 국제관계를 파악하였다. 그래서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고, 청조긍정론을 펴 북학론의 선구 및 일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길을 열었다.역사학에서도 유교적 도덕사관의 한계를 비판, 역사를 독립적 학문으로 확립시켰고, 역사서술 방법에 있어 엄격한 사료비판관 문헌실증주의에 입각한 객관성 확보를 주장했다. 자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독자적 방법론을 제시하여 한국사의 세계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그의 사학사상은 실학파의 역사인식관 방법론에 선구를 이룬 바가 많다. 그가 제시한 고대사 체계와 강역비정에 관한 설은 이긍익·이종희·한치윤 등의 역사해석에 영향을 주면서 수용되었다. 허목에서 비롯된 발해사 연구도 이익을 통해 심화되었고, 그 후 안정복의 「동사강목」, 유득공의 「발해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다.3.신경준신경준은 이전 시대의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강역에 대한 기록이 분명치 않음을 편찬이유로 들고 있다. 편찬에서 특별히 지적할 것은 주로 옛 강역들의 현재 위치에 대한 고증에 주의하고 있는 점으로 그의 역사지리학에 대한 현재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역사연구방법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향을 끼쳤다. 위와같이 이종휘의 역사인식은 유교문화의 제도적 실현과 영토확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는 중화문화를 유지하고 유교의 가르침을 지켜본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 기원을 고대 단군과 기자시대로 소급하였다. 이종휘는 중화문화 못지않게 영역을 중요시 하였다. 그는 조선이 중화의 문화를 실현하기에 충분한 자연적·문화적 조건을 갖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전략상 요충지로 만주지역을 중시하였는데, 그 지역이 조선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영역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수복의 필요성이 크다 하겠다. 결국 이종휘는 중화문화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그 영역을 확대하여 국력이 신장되기를 바라면서 『동사』를 서술하였다. 그의 사학은 박주종의 『동국통지』에서 처음 주목받았고, 주로 역사지리 고증에 많이 이용되었다.5.안정복의 동사강목그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술은 『동사강목』이다. 그가 『동사강목』을 저술한 것은 자국 역사에 대한 관심이 토대가 된데다가, 기존의 역사서가 통계(統系)를 밝히고 찬역(簒逆)을 엄히 하며 시비를 바르게 하고 충절을 포장(褒奬)하는 데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증의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개탄하고 또 기존 사서의 오류를 비판한 후, 사실고증에 충실한 완성도 높은 역사서를 저술하고자 하였다. 통계를 밝히는 것은 정통론의 문제를 올바로 해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이는 강목체(綱目體)라는 서술방식을 택한 것과도 관련된 것이다. 동사강목』은 통계·찬역·시비·충절의 문제를 다루어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증의 문제를 치밀하게 다루어 완성도 높은 저술이 되었다. 서술에 있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여사제강(麗史提綱)』 뿐 아니라 중국서적과 문집류, 비문 등을 이용하였다. 한편, 지리고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부록으로 「지리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는 요동지역을 천하의 요충지로 인식하고,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