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히스클리프와 캐더린의 성격을 분석하고 이 분석에 기초해서 이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 설명해 보시오.히스클리프와 캐더린의 성격은 그 어느 소설의 인물보다도 뚜렷하게 그리고 탄탄한 인과에 의해 형성된다. 아마도 2대에 걸친 복잡한 사랑공식을 풀어놓기 위해 인물묘사는 되도록 명확하게 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둘의 사랑에 붙들어 놓으려는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둘의 성격은 철저하게 유년시절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데 히스클리프는 ‘피해의식’, 캐더린은 ‘고집’이라는 단어로 각각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먼저 처음 히스클리프가 언쇼씨의 손에 이끌려 집에 들어온 순간을 살펴보자.All that I could make out was a tale of his seeing it starving, and houseless, and as good as dumb, in the streets of Liverpool where he picked it up and inquired for its owner- Not a soul knew to whom it belonged, he said.(중략)“I'm trying to settle how I shall pay Hindly back I don't care how long I wait, if I can only do it, at last. I hope he will not die before I do! … while I'm thinking of that, I don't feel pain.”비록 히스클리프가 언쇼씨 집에 오기 전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가 부모도 잃고 집도 없어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상황에서 자란 아이들은 집 잃은 강아지처럼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자기 손에 들어온 것에 과도할 정도로 집착하는 특징을 가질 수밖에 없다.또한 학대와 멸시로 점철되는 그의 청소년기는 복수의 칼을 가는데 소요된다. 힌들리의 계속적인 폭력과 차별은 히스클리프의 내성적인 성격과 캐더린에 대한 집착과 맞물려 더욱 그의 복수심을 키우게 만든다. 결국 이러한 복수심이 헤어튼은 물론이고 린튼가와 그의 자식에게 마저 흘러가게 된다.이제 캐더린의 성격을 살펴보자.Her spirits were always at high-water mark, her tongue always going-singing, laughing, and plaguing everybody who would not do the same. A wild, wick slip she was-but she had the bonniest eye, and sweetest smile, and lightest foot in the parish; an, after all, I believe she meant no harm.그녀는 전형적인 말괄량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활발함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인물보다도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다.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가지려 한다. 이 소설은 유난히 어머니의 역할이 드러나지 않는데 바로 그 어머니의 부재와 언쇼씨의 무관심이 자유로우면서도 고집스런 캐더린의 성격의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성격은 차후 에드거와의 결혼도 포기할 수 없고 히스클리프와의 사랑은 더더욱 버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시발점으로 작용한다.피해의식과 복수심에 불타는 히스클리프와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캐더린의 사랑은 마치 강력한 폭풍우 같다. 캐더린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이전까지는 폭풍전야의 분위기가 시종일관 소설을 압도하고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을 쓸고 간 폭풍의 흔적이 히스클리프의 차가움을 더욱 차갑게 만든다. 서로를 향한 폭풍 같은 사랑의 고백을 살펴보자.“If all else perished, and he remained, I should still continue to be; and, if all else remained, and he were annihilated, the Universe would turn to a mighty stranger.”
‘폭풍의 언덕’의 사회적 기반많은 사람들은 캐더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라를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에 초점을 맞춰 폭풍의 언덕을 감상한다. 나 또한 그들의 폭풍같은 사랑과 처절한 복수극에 빠져 이 소설을 감상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소설을 살펴보면 이 소설 또한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소산임을 알 수 있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살고 있는 사회와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먼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후반은 프랑스대혁명으로 귀족중심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과도기이다. 이 시대의 주요 쟁점은 신분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다. 폭풍의 언덕은 힌들리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와 에드거 린튼, 헤어튼과 캐시를 통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갈등은 죽음이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지만 헤어튼과 캐시 사이에 시작되는 사랑은 새로운 가능성과 시대에 대한 낙관론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작가는 신흥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부르주아에 대한 관점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캐더린이 넬리에게 에드거의 청혼 소식을 알리는 장면은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낼 뿐만 아니라 히스클리프를 자극시켜 집을 떠나 돈을 벌어오는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만든다. 이는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신분상승의 기회가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표어를 대변한다. 그리고 히스클리프는 부유한 사람이 되어 돌아와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이 읽힌 시대의 누구라도,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부분을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키우거나 대리만족을 느끼게 만든다.중세시대의 산물인 귀족주의의 멸망과 함께 기독교의 쇠퇴 또한 풍자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인물은 언쇼 집안의 하인인 조셉이다. 그는 절실한 기독교 신자로 늘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데 그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보다는 고리타분하고, 인자하기 보다는 독단적이며, 평화롭기 보다는 초조하다. 기독교 정신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그의 이미지를 통해 기독교를 비판한다. 시대의 변화는 혁명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혁명의 정당성이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굳어진 귀족중심의 기독교원리를 비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에 이 또한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으로 보여 진다. 히스클리프와 캐더린의 삶, 유령의 등장,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언급 또한 기독교 정신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드러난다.어떠한 소설도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의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드러나는 것은 돈의 문제이다. 끊임없이 재산, 상속에 관한 요소들이 따라다닌다. 린튼을 선택하는 캐더린,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 히스클리프, 이사벨라와 결혼하는 히스클리프, 힌들리의 몰락과 죽음, 린튼과 캐시의 결혼 등에는 빠지지 않고 돈이 라는 원인과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돈이다. 부르주아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도 돈이며 농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도 돈이다. 에밀리 브론테 또한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또한 그 시대에 두발을 딛고 사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랑과 복수라는 거대한 타이틀 뒤에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 변화들을 숨겨 놓았을 뿐이다. 모든 작품이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 의해 쓰여 지는 한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빼놓고는 결코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외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이 사회와 함께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고유가(高油價)와 고물가(高物價)의 늪에 허덕이며 물가는 상승하고 경기는 침체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빠져있다.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약속했던 7% 경제성장률은 어느새 4.7% 로 하향 조정되었고 그나마 달성 여부마저도 불확실해 보인다. 야심 차게 내놓은 고 환율(高換率)정책이 실패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실정이고 환율을 일정한 위치에 잡아두려는 ‘가두리’식 환율 정책이 정부의 무리한 시장 개입으로 외환보유액만 낭비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유가는 150달러를 넘어 200달러까지 상승할 것이고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게 흘러 나온다. 과연 어떠한 정책이 필요한가? 먼저 세계적인 동향(動向)을 살펴보면,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이 물가 급등에 대한 염려로 금리 인상 기조로 돌아서고 있다. 인도, 브라질, 러시아,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란드, 노르웨이, 인도네시아 등 지역을 불문하고 긴축정책을 강화하는 도미노 현상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유럽중앙은행 (ECB) 또한 동결해 오던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바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금리를 올리는 것은 물가 안정에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경기 침체를 불 보듯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고금리정책이 달러가치를 하락시키고 국제 원유 가격을 상승시켜 결국 물가 상승을 다시 부채질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나타낸다. 그렇다면 저금리정책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사실 2000년 안팎으로 선진국을 중심으로 실시된 저금리정책을 통해 연평균 10%가 넘는 유동성 증가를 보였고 이것은 석유 수요를 자극해서 유가 상승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공포라고까지 표현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고금리도 저금리도 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이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이다. 다만 통상적으로 물가의 안정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고금리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녹록하지 않은 위험 요소들이 산재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금리정책을 채택하기 이전에 반드시 결정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첫 번째는 상황 판단이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이 단기적인 것인지 장기적인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평가와 시장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2-3년간의 가격 상승이 예상되는 장기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긴축 정책으로 기조를 바꾸고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막고 임금 인상을 최소화해야 한다. 둘째로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물가 목표를 상향 조정해야 한다. 물론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재정 확대를 통해 경기 침체는 최소화하고 한국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성장률을 설정해 인플레이션 목표를 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요즘 들어 부쩍 많이 쓰이는 ‘국민과의 소통’이 화룡점정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솔직하고 투명하게 한국 경제의 위기에 대해 국민들에게 고하고 그들의 공감과 도움을 호소해야 한다. 다같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난 후라야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일 것이다.
치즈, 한국을 만나다.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하던 나에게 요리라는 것은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눈요깃거리 또는 식당 메뉴판에 그려져 있는 화려한 그림들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행위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짓으로 밖에는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나였다. 메뉴를 정해서 직접 요리를 해보고 체험기를 적어 제출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이 추운 겨울, 날이 선 살얼음보다도 차갑고 매섭게 느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피할 수 없다면 부딪칠 수밖에. 우선 가능한 메뉴들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시작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캄캄했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는지 교수님의 마지막 코멘트가 기억이 났다. 라면. ‘그래, 해보자!’우선 필요한 재료들을 써내려갔다. 라면, 체다 치즈, 비스킷, 까망베르 치즈. 너무 간단해 보이는 메뉴였지만 내게는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실은 라면 하나도 제대로 못 끓였던 나였다. 어쨌든 홈플러스에 가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라면을 끓이고 치즈를 벗겼다. 부글부글 라면이 거의 다 익었을 때쯤 체다 치즈 한 조각을 라면위에 슬며시 덮었다. 그런데 막상 음식을 보니 먹고 싶지가 않았다. 맛이 없어 보였던 까닭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 위를 가로질러 라면을 덮고 있는 치즈를 헤치고 라면을 한 젓가락 떠올렸다. ‘아, 이런.’ 생전 처음 접해보는 맛이었다. 그리고 그 맛은 아주 부드럽고 단백 했다. 실로 음식 앞에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던 순간이었다. 그때, 그 흔하던 치즈라면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던 나의 우둔한 고집에 물밀 듯이 밀려오는 분노, 그리고 치즈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과 사랑이 교차했다. 이러한 감정은 치즈에 대한 실험적인 행위도 불사르게 했다. 라면 한 그릇을 후딱 헤 치운 나는 계획하지도 않았던 밥솥으로 눈길이 갔다. -몇 년 전 친구가 밥에 우유를 말아먹던 장면이 순간 떠올랐고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은 듯싶다- 밥과 치즈라, 그야말로 한국 대표와 프랑스 대표의 극적인 만남이었다. 우선 밥을 2/3정도 밥그릇에 채워 넣고 그 위로 까망베르 치즈를 펴 발랐다. 라면을 먹는 동안 치즈가 어느 정도 녹아있었기 때문에 밥 위에 치즈를 바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대로 먹기보다는 완전히 녹여 먹는 것이 그 맛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아 전기밥솥에 치즈를 바른 밥을 밥그릇채로 집어넣었다. 기다리는 동안 그대로 있기에는 치즈라면이 건네준 감동이 너무나 컸다. 비스킷(특별히 영국산 비스킷을 샀다.)을 꺼내 까망베르 치즈를 바르고 한 입에 쏙 집어넣었다. 치즈의 여왕이라 불리는 까망베르 치즈는 확실히 오묘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단백하기 보다는 신 맛이 앞섰고 가볍게 느껴지면서도 끝 맛은 무언가 꽉 찬 느낌을 주었다. 여왕이라는 별칭의 연유는 나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이렇게 결론지어졌다. 5분정도 밥솥에 있던 까망베르를 얹은 밥을 꺼내서 한 숟갈 먹었다. 여기서 나의 실험 정신은 무너졌다. 단백 한 치즈라면과는 달리 느끼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음식은 절대 남기지 말자는 나의 음식철학에 위배되는 행동은 나 자신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꾹 참고 한 숟갈 더 떴다. 역시 입 안에서 미끄러지는 그 느끼함은 도저히 참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남아있던 라면 국물에 손이 갔다. 그런데 라면 스프 특유의 매콤함이 입 안의 느끼함과 절묘한 궁합을 이루며 다시 밥으로 손이 가는, 나조차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남아있던 라면 국물은 밥과 함께 싹쓸이 되었다. 주 요리를 먹었으니 이제는 디저트를 맛볼 차례가 왔다. 아까 뜯었던 비스킷을 다시 꺼내 까망베르 치즈를 발랐다. 그 때 문득 군 시절에 한 달에 두어 번 있던 햄버거 메뉴에 나오던 치즈를 주머니 속에 숨겨 내무반에 가져와 건빵에 싸먹고, 쵸코파이에 싸먹던 생각이 났다. 집에 있던 다이제 초코 과자와 비스킷에 체다 치즈를 얹고 먹어봤다. 초콜릿과 함께 녹아드는 치즈는 너무 강한 초콜릿의 단맛을 단백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고 심심한 비스킷은 싱거운 국에 소금을 넣은 것처럼 치즈와 함께 고소한 맛을 내며 제대로 된 맛을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과일에도 치즈를 얹어 먹어 보았다. 귤을 까서 까망베르 치즈를 살짝 발라서 먹어보고 체다 치즈를 얹어서도 먹었다. 귤의 신맛과는 까망베르 보다는 체다 치즈가 더욱 잘 어울렸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론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있는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이 강의 상류라면 그의 흐름을 이어 중류의 위치에 있는 사상이 바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론 이다. 사실 플라톤이 이상 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뿐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들을 건드리지 못한 반면 토마스 모어는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면에서 접근했다는 차이가 확연히 들어 난다.어떠한 사상이 발생될 때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인 듯 하다. 다시 플라톤의 예를 들자면 플라톤이 살기 전후의 시대적 사상적 상황을 보면 전쟁으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혼란 사상적 싸움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사회는 어지러웠고 누군가 이러한 사회에서 무언가 납득할 만 하고 누구 나가 열망할 수 있는 사상이 출현이 필요했다. 그러한 시점에서 플라톤이 그의 스승의 과업을 잇는 시대적인 상황이 요구하는 그러한 사상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도 마찬가지로 그의 생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굉장한 비리를 드러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 모어는 휴머니즘적 입장에서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의 비판은 단순히 그 시대에만 국한되어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문제들이었다.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세상은 쾌락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한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섬을 만들고 여러 개의 도시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언어도 같고 생활양식도 같다. 모든 상황이 같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모든 사람의 행복을 지향한다.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법도 있고 가정도 있고 도덕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것을 탐내거나 훔치지 않는다. 유혈에 의한 전쟁도 삼간다. 보석이나 희귀한 물건에 대한 소유심도 없다. 정해진 시간동안 노동하며 그 후에는 원하는 데로 어떠한 일들을 배운다. 물론 남에게 해가 되는 일들은 아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유토피아 섬사람들을 살아간다.나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론 에서 중요한 점은 이 이론을 자세히 알고 그것을 외우고 기억하는 것보다는 과연 토마스 모어의 생각이 그 시대는 물론 지금 이 시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는 분명 공산주의를 지향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의식주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일자리를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범죄도 드물고 사회는 평화롭다. 하지만 과연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그의 이상국에 발전이 있는가? 진정한 기쁨이 있는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방법 데로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가 말하는 이상 국가는 현존하기 힘들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또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 국가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 이런 전재는 이미 내 안에 깔려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과연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이상 국가가 진정한 이상향이냐는 물음이다. 그는 이상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모어의 국가는 사회적으로나 어떠한 면으로나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안주의식이 되어버린다. 우리에게 있어 안주의식은 발전이 없고 무신경적이 되어버려 아무런 감각 없이 살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국가 자체가 발전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를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