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동 인영원한 천재………리어놔*^^*1. 김동인(1900∼1951)* 호는 금동(琴童)* 평양 출생* 어려서 일본 유학 메이지학원 및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수학.* 1919년 주요한, 전영택 등과 함께 를 창간함. 이광수 등의 계몽주의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근대 소설인 사실주의를 표방함.* 1926년 사업에 실패하여 생계를 위한 문필 활동을 함.* 1951년 1·4후퇴 때 서울에서 작고* 이광수가 한국 신문학사상 장편 소설의 개척자라면, 김동인은 단편 소설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문학의 독자성, 예술성을 추구하여 예술 지상주의를 표방했으며, 사회 속에서 몰락해 가는 인간의 삶을 그리는 자연주의 경향을 보임. 또 민족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등 다양한 유파의 작품을 창작함- 자연주의 : 약한 자의 슬픔(1921), 감자(1925), 명문- 낭만주의 : 배따라기(1921)- 유미주의 : 광화사(1935), 광염소나타(1930)- 인도주의 : 발가락이 닮았다(1932)- 민족주의 : 붉은 산(1932)- 역사주의 : 젊은 그들(1929), 운현궁의 봄(1933)김동인은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 ·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 거기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서정적 비애가 함께 서린 작품이다.* 줄거리 *어느 화창한 봄날, 나 는 대동강으로 봄 경치를 구경갔다가 영유 배따라기 를 부르는 그 를 만난 사연을 듣는다.그 는 영유한 사람으로, 아름다운 아내와 늠름한 동생을 두었다. 그 는 성품이 쾌활하고 친절한 아내가 동생에게 특히 친절한 것을 못마땅해 하며 아내를 자주 괴롭힌다. 어느 날, 장에서 거울을 사 들고 들어오다가 아내와 동생이 방에서 쥐를 잡는 것을 보고 오해한 나머지 아내를 때려 내쫓는다. 결국, 아내는 물에 빠져 자살하고, 이 때문에 동생은 고향을 떠난다. 오해였음을 깨달은 그 는 사무치는 회한을 이기지 못해, 배따라기를 부르면서 동생을 찾아 방랑을 계속한다.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동생을 만난다. 형님, 그저 다 운명이웨다! - 이 한마디와 함께 동생은 환상처럼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시 10년 세월을 유랑하지만 동생을 만나지 못한다.그날 밤 나 는 그 의 숙명적 경험담에 잠 못 이룬다. 다음날 아침 대동강에 나갔지만, 그 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구성 : 작품 전체의 구성 - 액자 구성▷도입 : '나'가 그를 만남.▷발단 : '그'의 형제가 영유에서 삶.▷전개 : 동생에게 친절한 아내를 자주 괴롭힘. '그'의 질투.▷위기 : 쥐잡이 사건과 오해. 아내를 때려서 내쫓음.▷절정 : 아내가 죽고, 동생도 고향을 떠남.▷결말 : 동생을 찾아 방랑함.▷마무리 : '나'를 위해 배따라기를 한번 더 부르고 '그'가 떠남.* 작품의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은 운명과 마주쳐 생기는 한의 정서이다. 의처증과 오해가 증오로 표출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관계를 와해시키고,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한 모습, 그리고 끝없는 자책과 회한의 정서는, 특히 '바다'의 이미지와 어울려 매우 서정적인 심미감을 더해 준다.문체에 있어서 이 소설은 김동인의 후기 작품들과는 달리 유려한 우유체적 문체도 보이나, 역시 필요한 부분에서는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호흡 짧오면 복녀의 남편은 복녀가 마음놓고 몸을 팔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중국인 왕 서방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 새로 색시를 사온 것이다. 복녀는 타오르는 질투를 참지 못해서 결혼식 날 왕 서방을 찾아가서 저의 집으로 가기를 청했다. 이 때에 결혼식장은 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복녀는 손에 낫을 쥐고 대항하다가 피를 뿜고 죽어 갔다. 이 날 밤 왕 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의사에게 각각 30원과 20원씩을 주었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 묘지로 실려 갔다.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 왕 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 묘지로 실려 갔다.* 등장인물 *◇ 복녀: 가난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엄한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난 도덕성과 윤리 의식이 있던 처녀였으나 돈 80원에 게으른 남편에게 팔려와 빈민굴 동네로 이사간 후 자신을 둘러싼 상황 때문에 도덕성을 잃고 몸을 팔다가 질투로 인해 타락과 파멸의 길을 걷는다. '복녀(福女)'라는 호칭은 반어적 명명법이다.◇ 남편: 천성이 게으르고 아내의 매춘으로 편안히 사는 것을 동조하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파렴치한 인간.◇ 왕서방: 중국인 지주로 돈으로 세상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배금주의자며 호색한(好色漢).◇ 감독: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공정치 못한 관원.* 배경 *1920년대의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 빈민굴이 주는 무질서와 불안정성 및 야생적 활기는 일제치하 20년대의 암울한 분위기와 함께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구성 *발단: 온갖 죄악의 소굴인 칠성문 밖 빈민굴의 복녀.전개: 복녀에게 닥쳐온 환경의 변화와 점진적인 타락. '성(性)'에 눈뜸.위기: 새 장가를 드는 왕서방에 대한 강한 질투절정: 복녀가 왕서방의 신방에 .그러던 중 이 동네 주민인 송 첨지가 그 해의 소작료를 나귀에 싣고 만주인 지주에게 바치러 갔다가 부당하게 폭행을 당하여 죽자, 주민 모두가 원수를 갚자고 흥분하나 막상 지주와 맞서려는 사람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삵이 듣고는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서린다. 다음날 아침, 그는 동구 밖의 밭고랑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된다.그는 단신으로 못된 만주인 지주의 집에 가서 송 첨지를 죽인 분풀이를 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불러 주는 애국가를 들으며 그는 죽어 간다.* 등장인물 *◇ 삵(정의호): 투전이 일쑤이며 싸움 잘하고 트집 잘 잡고 색시에게 잘 덤벼드는 깡패. 주위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며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하나 결말에 가서 민족애를 확인시켜주는 동적인 인물.◇ 여(余: 나): 의학 연구차 만주를 순례하다 가난한 소작인이 모여 사는 조선인 마을에 들려 삵의 행위를 지켜보게 되고 삵에게 마음속으로 존경받은 인물◇ 송 첨지: 만주에서 소작하는 조선 사람.* 주제: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출전: 『삼천리』,1932년 3월* 구성 *도입: '여(余)'가 만주 ××촌에서 겪은 일을 적음.발단: 정익호('삵')가 ××촌에 나타남.전개: 마을 사람들이 '삵'을 싫어하여 내쫓고자 하나 어찌하지 못함.위기: 지주에게 갔던 송 첨지가 죽어서 돌아옴.절정: 지주에게 항변하러 갔던 '삵'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옴.결말: 애국가를 부르는 가운데 '삵'이 죽어감.* 해설 *1932년 4월 25호에 발표. [어떤 의사의 수기(手記)]라는 부제(副題)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비도덕적이고 몰염치한 인물인 '삵'까지도 숭고한 민족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그가 죽어 가면서 '붉은 산'과 '흰 옷'이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는 대목은 주제를 극명히 제시한다.'붉은 산'은 환경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등장 인물들의 민족주의적 의식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부제(副題)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의사의 목격담을 적은 수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방법은 박차고 나선다. 그리고는 어진 송 첨지를 죽인 만주인을 향해 복수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임종에 닥쳐 머릿속으로 그리는 '붉은 산'과 '흰 옷'은 우리 국토와 겨레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태형 ☆* 줄거리 *3·1 운동 직후, 무더운 여름. 다섯 평도 안 되는 미결수 감방. 3.1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옥에 갇히게 되자 감방마다 미결수들이 꽉 차게 되었다. 잠도 사람들을 삼등분해 돌아가며 잘 형편이고 더위 또한 견디기 어려웠으며 종기, 옴, 탁한 공기 등 최악의 조건이었다. 이 밀폐된 공간에 사십여 명이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가운데 죽음보다도 더한 이 상황에서 일초만이라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었다. '나'가 절실히 바라는 것도 조국의 독립, 민족 자결, 자유가 아니라 냉수 한 사발과 맑은 공기인 것이다. '나'는 공판 날만 기다린다.엉덩이 종기를 핑계로 진찰실에 가서 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날, 70대의 영원 노인이 재판을 받고 돌아 왔다. 태형(笞刑) 구십 도 형을 받은 노인은 나이가 있어 그 매를 맞으면 죽을 것 같아 공소를 했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라도 나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넓은 공간에서 살 수 있으므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한 패가 되어 "당신이 나가면 자리가 넓어질 것이고, 3·1 운동 때 총 맞아 죽은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 당신 혼자 더 살아서 무엇하겠느냐?"고 윽박지르며, 다른 사람들과 공소를 취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저녁때가 되어 노인은 공소를 취하하겠다고 해 간수를 불러 이야기를 전했다.간수는 영감을 데려 갔다. 영감이 태형을 받으러 가자 이기심으로 가득찬 '나'와 감방 안의 다른 사람들은 자리가 조금 넓어졌다는 생각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한다. 오랜만에 목욕을 하는 날이어서 모두들 즐거움에 젖어 이십 초 동안의 짧은 행복을 느끼고 감방으로 돌아 왔다. 매를 맞더라도 목욕을 좀 더 할걸 하는 이도 있었다. 몇 시간 후 더위로 무감각해진 우리들의 귀를 찌르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하겠다.
금오신화(金鰲新話)00 이은아서론금오신화 에 대한 연구는 작가, 작품, 전등신화와의 비교 등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작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여도 아직까지 금오신화를 최초의 소설로 인정해야 하는지, 문학사적으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또한 학생들에게 어떠한 관점으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번 발제에서는 금오신화 에 대한 선행된 연구들을 정리해보고, 더불어 아직까지 논쟁되는 문제와 문학사적 의의, 교육 방법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본론1. 작가 김시습생애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자를 열경(悅卿), 호를 매월당, 벽산, 청한자, 췌세옹, 설잠등으로 불렀다. 그는 1435년 서울의 성균관 북쪽 여러 대에 걸쳐 무직에 종사하던 한미한 가정에서 충순위 일성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낳은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깨쳐 이웃의 친척이 이름지어 시습이라 하였는데, 이는 논어 학이편의 學而時習之不亦說乎 에서 따온 것이다. 3세 때 시습은 이미 시를 짓고 5세 시에는 이수전 등에게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세종대왕에게까지 알려져 김오세 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13세에는 대사성 김반 등의 당대 석학들로부터 사서삼경, 제가 백가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15세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되었으며, 20세에는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게 된다. 그는 이듬해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문에 뜻을 세우고 독서에 열중하다가 단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그 후로는 여러 해 동안 관서, 관동, 호남 등지를 돌면 문필로 그의 뜻을 달래다가, 31세 되는 봄에는 삶을 마칠 장소로 경주의 남산을 택하여 그 곳에서 금오산실을 짓는다. 그러나 37세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47세에는 다시 머리를 기르고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환속의 길을 다져 나간다. 그러나 48세에 이르면서 그는 또 다시 현실에 환멸을 느껴 인간사를 멀리하고 육경 등 많 정병욱, 설중환 등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앞의 두 명은 작자의 사회적 삶을 기준으로 하여 구분을 한 데 반하여, 설중환은 그의 내적 성장에 포인트를 두고 생애를 나누었다.1정주동: 주로 김시습의 시작품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여 크게 생장수학기와 방랑은거배회기로 나누고 각각을 세분하였다.2정병욱: 불우한 정치가, 전환기에 처한 사상가, 영원히 기념할 문학가 이 세 가지 요소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서 이루어진 김시습은 그만큼 기구한 생애를 살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보고 그의 생을 수학기(탄생으로부터 20세까지), 유랑기(21세부터 30세까지), 금오기(31세부터 36세까지), 실의기(37세부터 48세까지), 만년(49세부터 59세까지)로 나누고 있다.3설중환: 정병욱을 기반으로 하되 외적 환경보다는 그의 내적 성장에 포인트를 두고 4기로 분류하였다. 현실적 이상의 추구(수학기, 1-20), 현실과 이상의 갈등(실의적 은둔기 21-30, 참여적 은둔기 31-36), 현실의 긍정과 부정(좌절기, 37-48), 초월적 이상의 추구(은일기, 49-50)사상1민본주의: 보잘 것 없는 무관집안에서 태어나 사회적 혜택을 누릴 수 없었고, 유가적인 야망은 대단해서 불만은 누구보다 컸으며 비판적 기질은 남달라 소외된 불평지식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로부터 등을 돌리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기회주의적인 사대부를 조롱하고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민본사상이 형성되었다. 애민의 , 인군의 , 생재설 등의 논설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사회적 견해를 뚜렷이 하였고, 남염부주지 에서는 염마왕의 입을 빌어 임금에게 있어서 백성이 두려운 존재임을 강조해 두었다.2철학사상: 당시 집권사대부들은 주자학을 새 왕조의 지도이념으로 채택, 그것을 주리론으로 해석하여 지배질서를 합리화하고자 했다. 그들은 이가 기보다 먼저 있어 기를 있게 하므로 이를 만물의 본원이라 하면서 이로써 중세적 질서의 이념적 근거를 삼았다. 여기에 김시습은 주리론이자체로서 존재하면서 스스로 대립적인 운동을 하는 기이며 그 대립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무엇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와 그것을 개조하려는 자신과의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 승패도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3세계관: 경험적인 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고, 그 밖에는 어떠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종교적 신비주의나 영혼불멸설 같은 것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미신적, 비현실적 사고를 철저히 배격했다.4종교관: 불교는 그 성격이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기에 김시습 역시 그런 태도를 가졌으며 철학적 탐구에 열중하여 새로운 이론까지 개척했다. 그는 불교에 종교적인 애착을 가지지 않았으며 다만 세상을 피해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 및 은둔처로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불교를 이단이라고 하면서 다만 자신이 중들과 어울린 것은 물외에서 놀고자 한 것, 즉 혼탁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였을 따름이라는 것이다.2. 작품 금오신화자료의 전래김시습이 석실에 감추었다는 금오신화는 4세기 이상이나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조선조에는 이황이 읽었고 송시열이 그것을 구하고자 하다가 못 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문헌에 간혹 책명이 오르내릴 뿐이었다.그러나 금오신화 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총본에 소장되었다가 동경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2차로 간행된 책은 두 권이었으며, 책의 말미에 書甲集後 라는 말이 있어 이 작품이 현전 5편 외에 다른 작품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 동경 판각본은 최남선이 일본에 갔다가 입수, 1927년 잡지 개명 19호에 그 원문을 싣고 해제를 붙임으로써 우리나라에 그 내용이 처음 소개되었다.그 후 1950년대에 국내에서도 금오신화 의 일부가 필사본으로 발견된 바 있다. 17세기의 인물인 김집이 애장했던 한문소설집에 실린 만복사저포기 와 이생규장전 이 그것인데 작품의 내용이 동경판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다.그런데 1999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중문학과 최용철 교수가 중국 따 책은 윤춘년이 명종 연간의 말기에 교서관제학을 겸하고 있을 때 간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창작시기여기에 관해서는 거의 의견이 김시습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 부근에 은둔하던 1465년부터 1470년까지 사이에 이 소설집을 엮은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이설들은 다루지 않고 위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해보도록 하겠다.권문해(1534∼1591)도 1589년에 편찬을 끝낸 대동운부군옥 에서 금오산은 동도(경주)에 있으니, 김동복이 일찍이 이 산에 거주하면서 전등신화 를 본받아 금오신화 수권을 저술하였다 라고 하여 이 작품이 경주의 금오산에서 이루어졌다는 전승을 문헌으로 기록하여 둔 바 있다.그리고 이미 앞에서 밝힌 바처럼 최근 발견된 목판본에서 유금오록 의 후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김시습이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저술하였음이 더 유력해졌다.내용1만복사저포기: 남원의 양생이라는 총각이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해 이긴 대가로, 왜구에게 죽은 여자의 환신을 점지 받아 사랑을 하다가 여자가 사라지자 여자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이다.2이생규장전: 송도에 사는 총각 이생이 최씨라는 처녀와 연애를 해 나중에는 결혼까지 했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최씨가 죽었으며 환신으로 나타난 최씨와 다시 사랑을 하다가 최씨가 저승으로 사라지매 아내를 생각한 나머지 병이 나서 자신도 죽었다는 이야기이다.3취유부벽정기: 송도에 사는 홍생이 평양의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놀다가, 꿈에 위만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이라고 자칭하는 여인을 만나 고금의 흥망성쇠를 슬퍼하고 시를 주고받다가 꿈을 깨어 귀가한 후 그 여인을 잊지 못해 병이 들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4남염부주지: 경주에 사는 박생은 의지가 굳고, 지식이 풍부하며 사상이 확고한 인물인데도 세상에서 알아 주지 않았는데 꿈에 염부주라는 이상한 세계에 초대되어 염마왕이라는 자로부터 환대를 받으면서 담론을 벌인 결과 평소에 자신이 지닌 지식과 사상이 아주 글재주로 이름났는데 꿈에 박연이라는 못 속의 용궁으로 초대되어 용왕이 베푼 잔치에 참여, 글 재주를 발휘해 칭찬을 받고 궁중의 기이한 물건들을 두루 구경한 후 선물까지 받아가지고 나왔으나 세상의 명리를 뿌리치고 명산에 들어갔는데 어디서 생애를 마쳤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내용의 특징3. 논쟁점최초의 소설인가?금오신화 를 최초의 소설로 인정하는 학설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1김태준: 최초의 소설로 언급한 적은 없으나, 단지 금오신화 가 전등신화 보다 질로써 우승한 작품이고, 명백한 향토색을 발휘하고 자주적 정신을 보인 소설이란 점에서 그 작자 김시습은 이조 초의 일류소설가로 평가하였다.2조윤제: 금오신화 는 완전한 전기소설이라는 점과, 형태에 있어 소설의 체제를 구비하였다 에서 소설문학의 효시로 파악하였다.3주왕산: 조선을 배경으로 한 점과 조선의 인물과 풍속을 묘사하여 향토색을 지닌 점등을 볼 때 최초의 소설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4조동일: 소설의 기본특성을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입각한 대결이라고 규정짓고 금오신화 가 여기에 합당하므로 최초의 소설로 인정하였다.그러나 최근에는 최치원전 등을 소설의 기원으로 앞당기려는 학설이 등장하여서 그 타당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는전등신화 와의 관계금오신화 는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 를 모방하거나 표절을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향을 받거나 단순히 암시를 받은 정도인가? 이 문제는 계속 논쟁이 이루어져 왔으며 과거에는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나 서거정의 동인시화 의 기술에 근거하여 단순히 모방작이라고 결론을 내려서 사대주의적인 해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근의 비교문학 연구 성과에 의해 비록 두 작품 사이의 외형적 유사성은 인정되지만 실제 내용이나 세계관 등에 상당한 상이성을 보여주고 있고, 더욱 외적 영향은 작품의 내적 조건에 따라 그 원칙과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이 작품을 창작하게 된 독자적 자생적 분위기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면서 금오신화 의 독창성을 규명해주고 있다. 이를 좀더 구체화시켜보면 다
향가향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적는 향찰표기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시가를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가는 에 실린 14수와 에 실린 11수 등 모두 25수의 시가를 지칭하는 장르 명칭이다.1. 명칭과 갈래1 문헌기록향가 라는 명칭이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常人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明素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梵聲…明又嘗爲亡妹營齊, 作鄕歌祭之…羅人尙鄕歌者尙矣. 釋永才 性滑稽, 不累於物, 善鄕歌. 夫如是則 八九行之唐序, 義廣文體,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향가란 명칭은 고려 문종 때(1075) 혁련정의 에 처음으로 보이고, ,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은 고려 때의 것이지만 그 내용을 보아서는 신라 당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2 명칭일반적으로 鄕 즉 시골이란 말이 암시하듯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 노래의 비칭의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가 점차 향가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라 노래 , 우리 노래 등으로 풀이코자 하는 학설도 대두되고 있다.·근대에 일본 학자인 오꾸라(小倉進平)의 식민사관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자기비하적이고 부적으로 인식되어 온 단어이다. -신라 것을 鄕言·鄕樂·鄕謠·鄕人 이라고 하고 唐을 國 이라 한 것을 보아 사대모화적 사고가 들어있다고 본 것. 양주동, 조윤제·國風- 최남선, 이은상, 지헌영 등으로 향가라는 명칭이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님.홍기문도 鄕 을 國 의 의미로 해석되다가 황패강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는데 즉 향가 란 國歌(나라노래) 로 한시나 한문이 아닌 우리말로 된 노래를 지칭하되, 향가라는 말로써 우리 노래를 지칭했던 신라와 고려시대에 국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3갈래현전하는 작품과 용어의 개념에서 볼 때, 향가의 갈래로 크게 도솔가와 사뇌가, 그리고 불찬가의 세 갈래를 설정할 수 있다.·도솔가(兜率歌) : 처음 제정되었을 당시 도솔가는 구체적인 한 노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향가의 하위 장르로서 일군의 시 같다. 詞腦 라는 명칭은 유리왕 때 도솔가 관련기록에 有嗟辭詞腦格 이라 한 데서 볼 수 있고, 또 제 7 歌行化世分 과 제 8 譯歌現德分 에 용례가 나타난다. 또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와 원성대왕 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들 용례를 살펴보면, 사뇌가란 어느 특정 시가군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詞腦의 의미-양주동은 詞腦 를 싶다 의 차자로 풀이하여, 신라(싶빛)와 같은 의미로 보았다. 즉 싶다 라 할 때 싶 는 東의 뜻이고, 다 는 川 또는 國의 뜻으로 보아, 東川·東國 의 의미라고 풀이하여, 사뇌가는 곧 東國의 노래 , 東方의 노래 를 뜻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혜구는 시나위 로 보아 정악과 반대되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노래라고 풀이하였고, 조지훈은 순우리말인 스레 의 차자로 보아 上·高 의 뜻을 담고 있는 수리노래, 곧 싶링노래 라고 하여 천신과 부락 수호신을 제사지낼 때 불렀던 신가나 주가 혹은 무가의 성격을 띤 노래를 뜻한다고 보았다.사뇌가는 향가 전체나 어느 한 작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향가의 하위장르로서의 시가군의 명칭이며, 즉 생활적인 서정가요로서 개인의 감정과 정서를 노래하는 경향을 띤 시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뇌가 계열의 작품으로는 도솔가류 작품과 , 등 민요 계통의 노래를 제외한 소재 9수의 노래를 들 수 있다.·불찬가 : 균여의 보현십원가 에 국한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 노래는 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보현행원품에 실린 보현십원을 노래로 옮긴 부처찬미가의 성격을 지닌 포교의 노래이다. 이는 에 실려 있는 여타의 불교 노래와는 성향을 분명히 달리하는 것이다.2. 형식적 특징형식면에서 볼 때 향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다. 향가의 형식에는 4구체와 8구체, 10구체 세 가지가 있다. 聯 구분은 없다. 4구체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민요적 시형이다. 8구체는 4구체를 중첩시킨 시형이다. 이 8구체에 감탄사로 시작되는 낙구 2구를 보태어 완성형인 10구체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원가 , 제망매가 , 안민가 , 찬기파랑가 , 도천수대비가 , 우적가 , 외 보현십원가 11수8구체에서 10구체로의 이행은 8구까지에서 전개되어 온 시상을 비약시켜 전체를 마무리짓는 기능을 갖는다. 특히 이는 후대 고려가요나 시조의 종장 첫구에서도 문학적 관습으로 계승되고 있어, 우리나라 고전시가 발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문헌기록으로 향가의 형식에 대한 것은 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뿐이다.詩構唐辭 磨琢於五言七字歌俳鄕語 切磋於三句六名이 전문에서 3구6명에 대한 의문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해 온 결과로서 비교적 공통된 견해는 10구체 사뇌격 향가의 3연 6구 형식을 말한다는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3. 작자· 향가를 화랑이나 승려의 노래라고 하는데, 그것은 현전 향가의 작자 중에 화랑의 무리이거나 혹은 승려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가 전체를 두고 본다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대개 민요이거나 민요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4구체 작품의 문학담당층이 하층민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분포를 보이고 있고, 또 개인의 서정을 담아 노래한 8구체, 10구체의 경우도 화랑과 승려 등 상층 신분에 속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은 것이 사실이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양주동 - 화랑 2인, 승려 4인 6수, 여류 2인 2수정병욱 - 의 11수까지 합쳐서 승려 11수, 화랑이 지은 3수, 여류 2수, 민요 2수, 失名 1수⇒이는 작자 중 승려이면서 화랑에 속해 있던 인물들을 어느 편에 포함시키느냐에 따른 결과·에 실려 있는 향가 14수 가운데 작자의 이름을 알 수 있는 노래는 풍요 와 헌화가 를 제외한 12편이다. 이들 작가의 이름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된다. 향가 작자의 이름이 노래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이다. 혜성이 나타난 변괴를 혜성가 를 지어 물리친 융천사,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큰길을 지나 다녔던 월명사, 안민가 를 지어 충성스런 말을 임금께 올렸던 충담사, 천수대비전에 눈 먼 자식의 득명여 당시의 국민문학적 성격으로 변모해 갔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향가에 나타난 내용적인 특성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1 민요계열 향가 : 서동요, 풍요⇒서동요 : 경사의 남지라는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과부가 地龍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기량이 난측했고 마를 캐어 팔아 생업을 삼았으므로 서동이라고 했다. 그는 신라 진평여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 노래가 궁중까지 퍼져 공주는 귀양을 가게 된다. 왕후가 준 순금 한 말을 가지고 귀양처에 이를 무렵 서동이 나와 절하고 모시고 가겠노라 하니 공주는 그를 믿고 수행하게 하여 잠통하게 되었고, 마를 캐던 곳에 쌓여있던 황금을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력으로 신라 왕궁으로 보낸다. 이로부터 진평왕과 항상 편지로 내왕하였고, 서동은 인삼을 얻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무왕이다.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다녀오던 중 미륵 3존을 만나게 되어 그곳에 미륵사를 세웠으며,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배경설화에서는 서동이 지었다고 하나 원래는 민요, 곧 동요였을 것으로 본다. 참요적 성격으로 주술성을 찾아볼 수도 있고, 미륵사 연기설화로 불교와도 관련지을 수 있는 작품이다. 서동의 정체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여 동성왕(이병도), 원효(김선기), 남순동자(김종우), 무녕왕(사대동) 등의 제설이 있다.⇒풍요 : 선덕여왕 때의 석양지는 석장사에 있으면서 헤아릴 수 없는 신이를 보이기도 했고, 筆札(필찰)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소상할 때에 경성사녀들이 진흙을 다투어 운반하면서 부른 노래이므로 노동요로 보기도 한다. 소위 4구체로서 반복구를 제하면 불교적 공덕을 닦으러 온다 는 가장 소박하고 짧은 형식의 노래라 하겠다.2 서정계열의 향가 : 모죽지랑가, 헌화가, 원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모죽지랑가 : 효소왕 때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의 작품이다. 향가 작품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 무격, 무명의 촌로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은 민요적인 것으로 이해하나 조동일은 굿거리에서 불리어진 노래로 보고 있다.⇒원가: 효성왕 즉위 초에 신충이 지은 것이다. 효성황이 잠저 시에 현사 신충과 더불어 궁정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여 후일을 약속하였다. 수 개월 후 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등용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충이 원망하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잣나무가 홀연히 시들었다. 왕이 뒤늦게 깨닫고 그에게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배경설화를 지니고 있다. 원래 이 노래는 10구체였다고 하며, 현재는 8구만이 남아 전한다. 백수가 또는 궁정백 이라고도 하며, 고려 때의 부전가요인 동백목 이나 향가의 잔영이라 하는 정과정 등 연군지정을 읊은 노래들의 원류로 잡기도 하는 작품이며, 유일하게 진골귀족의 작품이라 하겠다.⇒제망매가 : 경덕왕 때 월명사가 죽은 누이의 49제를 지내면서 지은 10구체의 사뇌가이다. 찬기파랑가 와 함께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며, 위망매영재가 라고도 부른다. 4/4/2의 3단으로 나눈다면, 애도(직서)/자탄(비유)/합일화(방향제시) 로 나눌 수가 있다. 누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무상감을 비유적으로 자탄하면서, 도를 닦아 미타찰에 귀의함으로써 만나보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미타신앙을 읊은 작품이다. 배경설화에는 이 노래를 부르자 바람이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는 주술적 요소까지 가미되어 있다.⇒찬기파랑가 : 경덕왕 때 충담사가 지은 사뇌가이다. 삼국통일의 주역이라 할 화랑을 찬미한 노래로, 화랑도가 유, 불, 선 3교를 포괄한다고 하지만 이 노래에는 도교적인 색채가 가장 두드러진 듯하다. 소재 향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배경설화가 따로 없고, 안민가 의 설화 중에 경덕왕이 찬기파랑 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하고 물었고, 충담사가 짤막하게 그렇다 고 대답했다는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이 작품은 3/45/하겠다.
한 중 록00 이 은아한중록 은 계축일기 , 인현왕후전 과 함께 우리 문학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들 작품이 궁중이라는 특수한 사회를 토대로 역사적인 대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묘사하여 창작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중록 은 세 작품 중 유일하게 작자를 알 수 있고, 작품의 창작 시기와 목적을 명확히 밝힐 수 있으므로 더욱 소중하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발제에서는 한중록 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정리해보고, 이를 어떻게 교육해야하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작품 분석《장르 문제》이 작품은 처음에 가람 이병기에 의해 소설이라고 구분되어 졌고, 이 후에도 계속 소설로 굳어져 왔으나 점점 이 작품을 소설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음이 제기되었다. 이 작품은 창작되던 시가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작가와 창작 연대가 분명한 대신, 작품 제목도 없이 4번에 걸쳐 나누어 쓰여지고 시간의 순차도 뒤섞여 있기 때문에 장르에 대한 의견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소설: 이병기가 계축일기 , 인현왕후전 과 함께 관중을 무대로 하여 일어난 사건들이 소설적인 수법으로 서술했음을 들어 관정소설로 규정한 이래, 고정옥, 김기동, 박성의, 장덕순 등이 소설 작품으로 주장하였다.수기: 조윤제는 조선왕조사의 비참한 인생들의 숨은 비화들이 국문학의 발전 시기에 들어와 기사체로 기록된 계축일기 와 인현왕후전 을 관정기사체문학이라고 하면서 한중록 은 관정기사체의 계통을 받은 일기 기행문류에 속한다고 보았고, 김동욱은 사실 자체가 역사적 사건으로 국문학사가 중에는 관정소설로 다루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허구성을 배제하고 사실을 밝히려고 쓴 의도적 작품으로 일종의 수기에 속한다고 했으며, 이에 신정숙, 김일근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실기문학: 고소설전집이나 고소설 목록에서 실기 라는 명칭이 붙은 작품선이 발견되었으며 이들 작품이 지닌 공통점을 추출해 보면, 이들은 전쟁이나 격동기를 살아가는 동안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실존인물이 그들이 겪은 사건들을 전 , 록 , 기 라는 고전문학의 대표적 양식을 빌어 썼음을 발견하면서 실기문학은 창조적 문학과는 달리 기록문학의 종개념에 속하며, 한중록 등은 관정실기문학이란 세분된 양식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김용숙외의 최근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명칭 문제》한중록 의 명칭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이본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본에 대한 연구는 김용숙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그 연구도 여러 차례에 걸쳐 세심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연구보다는 많은 사람의 연구가 필요하다. 여러 이본들 중에서 아직 원전이 확정되지 않았고, 새로운 이본 출현이 가능한 현 시점에서는 다양한 방법론에 의한 깊이 있는 문헌 연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이본들에 한듕록 , 한듕만록 , 閑中漫錄 , 읍혈록 , 泣血錄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한글과 한문 표기법의 차이, 그리고 한중록 은 한중만록 의 축어로 본다면 한중록 과 읍혈록 으로 압축된다. 또 한중록 중에서도 閑中錄 인지 恨中錄 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읍혈록 이라 실린 이본들 중에서 「자세한 마디는 한듕만록에 있으니 내 경력을 자시 알려든 한듕만록 있노라」하고 쓰여 있음으로 보아서 한듕만록 에서 파생됨을 알 수 있다. 그럼, 남은 두 閑 과 恨 중에서 恨 을 지지하는 쪽은 작자의 한스러운 일생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찾고 있으며, 閑 의 입장에서도 한가로운 가운데 쓰여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작품 구조》현존하는 이본에 따라 그 구조가 다르지만, 편의상 4편이 모아진 종합편을 중심으로 정리하겠다.1편 : 작가가 회갑이 되는 해(1795)에 쓴 것으로 평소에 친정 조카인 수영이 본 집에 마누라 수적이 머문 것이 없으니 한번 친히 무슨 글을 써내리오면 보장하여 집에 길이 전하여 미사로 삼겠다. 라는 청이 있었으나 미루어 오다가 회갑해를 맞으니 추모지통이 더하고 세월이 더가면 정신 근력이 이제만도 못할 듯하기에 써 준다면서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출생에서 임오화변까지, 임오화변에서 홍국영의 몰락까지, 순조의 탄생에서 작자의 회갑연까지의 일들이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2편: 작자가 67세(1801) 때 쓴 것으로 임오화변 후 화완옹주의 이간책, 을축년 별감사건(작자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이 세손 외인의 직언하여 세손의 미움을 산 사건), 홍 한이 미움을 받게 된 동기(화완옹주의 양자인 정원겸과 홍국영의 부 홍락춘의 취직을 거부한 사건), 홍국영 세도의 좌절(홍국영이 자기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바치고 세도를 누리려 하다 1년 만에 죽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아들 당계군을 누이인 원빈의 양자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일) 등 여러 사건의 진실과, 숙제(홍락임)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면서 신왕인 손자에게 은근한 부탁을 하고 있다.3편: 작자 68세(1802) 때의 작품으로 2편의 후반부와 같이 숙제의 억울한 죽음을 항변하였으나 좀더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선왕인 정조가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소년시절 외가에 한 일들을 뉘우치며 효도하던 일들을 상기시킴으로써, 친정 집안이 무고하게 화를 입은 억울함을 밝히고 있다.4편: 작자 71세(1805)의 마지막 작품으로 주상이 임오화변의 진상을 알고 싶어하여 순조의 생모인 가순관이 써내라 하므로 쓴다 고 서문에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 편에서는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던 부자간의 갈등 요인을 밝히기 위해 사도세자의 탄생과 성장과정, 병환으로 이어지는 심리적 갈등을 심도있게 묘사하여 작자의 한 많았던 인생과 문학적인 감동을 전하는 작품이다.
가사의 기원과 발생시기사범대학 국어교육과2000066039 이 은 아▶들어가며가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속요 또는 경기체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설, 4음보의 연속체 교술 민요가 기록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이루어졌다는 설, 나 등 악장의 형식이 그 기원이라는 설, 시조 기원설 등이 있지만, 아직까지 정설로 인정되는 주장은 없다. 가사의 발생에 대해서 역시 기원에 대한 견해들과 같이 많은 주장들이 있는데, 조선조 초기 정극인의 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과 고려말 나옹화상의 를 효시로 보자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을 효시로 보자는 입장이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가사의 기원과 발생시기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1. 가사의 기원이병기에 의하면, 가사의 기원적 형태는 「十二歌詞」가운데의 하나인 「漁父歌」와 같이 옛날 시귀들에 우리말로 토를 달고 여음구를 삽입한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규보의 「東明王篇」·이승휴의 「帝王韻紀」·오세문의 「歷代歌」 같은 장편 한시에 토를 달아 읽든지, 시조체의 초·중장을 연속하면 가사체가 연속될 수 있다고 보아 한문 어귀에 토를 단 것 같은 나옹화상의「西往歌」를 효시 작품으로 들고서, 가사의 형성시기는 고려 말이라고 밝혔다.이에 비하여, 조윤제는 가사가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를 조선조 전기의 사화에 의한 일부 사대부 계층의 강호에의 몰입 현상에서 필연되는 자연미의 발견에서 찾음으로써 정극인의「賞春曲」을 효시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가사의 형태적 기원을 경기체가에 두고 있는데, 순한문적이며 귀족적이어서 미사여구만을 나열하던 낡은 문학장르인 경기체가가 자연미의 발견 같은 새로운 내용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기왕에 파괴되기 시작한 그 형태에서 4·4조의 음수율만 남고, 분장·분절되는 특성은 사라지게 됨으로써 방만한 생활 감정을 폭넓게 그려낼 수 있는 가사형태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이상 대별되는 두 가지 견해를 통하여 가사의 기원을 한시 또는 한문구에 토를 다는 데서 찾을 수 을 수 있는가, 또 가사의 형성시기는 고려말인가 아니면 조선조 전기인가 하는 것이 「서왕가」와 「상춘곡」을 실험적인 경우로 하여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럼 이러한 기본적인 것들을 바탕으로 기원에 대한 여러 의견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고려장가(특히 경기체가)에서 영향을 받아 가사는 이루어졌다는 학설이다. 조윤제·고정옥·박성의·정병욱·정익섭·이동영 등이 나름대로의 근거를 제시하고 이러한 견해를 피력하였다.이들 입론의 주된 근거는 형태적인 면에서 분장·분절로 된 고려장가가 점점 파격화 과정을 거치면서 분장·분절 의식이 사라지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장형의 가사가 성립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본 데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가사는 역시 경기체가의 그것을 계승·발전시켰다는데 논리적 근거를 공고히 하였다.그런데 가사와 경기체가의 관계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두 장르는 똑같이 사물이나 생활을 나열 서술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경기체가가 쇠퇴하면서 가사가 발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짙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체가에서 다룬 사물이나 생활이 단편적이라 한다면, 가사에서는 이들을 훨씬 지속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가사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사대부들이 고려조의 경기체가가 수행하던 구실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장르로 볼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가사의 기원을 고려장가(경기체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 학설에 문제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장가의 형태적 특징의 하나인 분장·분절의식이 무슨 이유 때문에 소멸되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5∼8연을 기본으로 하여 몇 개의 연이 중첩되어 한 시가를 형성하던 고려장가가 분장·분절되지 않는다고 해서 까닭없이 가사의 경우처럼 길어질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사물이나 생활을 단편적으로 다루던 경기체가가 어떻게 해서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깊이있게 다루는 가사로 발전되어 나갔는지, 창작의식의 변이 및 장르 교체의 동인도째, 시조에서 영향을 받아 가사가 이루어졌다는 학설이다. 김기동·이능우·김사엽·이태극 등에 의해서 피력된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가사의 각 행은 시조처럼 4음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히 가사의 마지막 행이 시조의 종장과 그 모습이 같다는 점에 있다.그러나 이 학설 역시, 극히 간결한 시조 형태에 기원을 둔다는 가사가 왜 그토록 길어졌는지 설명하지 못하였고, 실제로 가사 가운데는 시조의 종장과 같은 형태를 취하지 않은 작품도 상당히 많이 있는 까닭을 풀어내지 못하였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시조가 가사보다 선행된 장르이어야만 이 학설은 설득력을 갖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다.셋째, 악장체에다가 가사의 기원을 두는 학설이다. 정형용이 이러한 입장을 밝힌 이래 김동욱·유창균에 의해 구체화 되었는 바, 그 근거는 악장체나 가사 모두가 긴 시가라는 점에 있다.그러나 악장이 분명한 분장체의 시가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어떻게 해서 분장되지 않은 가사가 악장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지 해명되지 않는다.넷째, 앞서 거론한 바 있는 이병기의 의견에서와 같은 학설이다, 즉 한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인데, 장편 한시에 토를 달아 읽든지 시조의 초·중장을 연속하면 가사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 우리의 시가가 엄연히 표현 언어가 다른 데에서부터 출발한 점을 방치하고, 한시에 토를 달아 읽을 때의 율조상 비슷한 점만을 가시고 가사의 기원을 한시에 둔다는 것은 본질을 도외시하고 지엽만을 비교해 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인 면에서의 비교문학적인 입증을 거친 후에야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학설이라고 하겠다.다섯째, 민요 가운데의 교술민요에서 가사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학설이다. 조동일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서, 기록문학에서의 선행 시가장르에서는 가사의 기원이 찾아지지 않으니 구비문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는 가사뿐만이 아니고 향가·별등 제반 고전 시가장르들의 기원 역시 구비문학 가운데의 민요에서 찾아야만 하는 당위성과 이를 토대로 우리의 시가사를 재편성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였다.모든 노래의 기원은 노동요에 있다는 전제 하에 논의를 진행시키면서 가사는 말을 혼자서 하거나 여럿이 함께 일해도 자기 일을 하는 경우에 독창으로 부르는 노래에서부터 출발한 장르라는 것이다. 즉, 이런 노래는 자기 일을 하며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의 진행 과정에 매이지 않을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생활의 내용을 자세하게 나타낼 수 있는 점으로 보아서 가사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래에 해당되는 것이 교술민요와 서사민요인데, 교술민요는 가사로 상승했지만 서사민요는 서사시나 소설로 상승시킬 만한 주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판소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록 문학으로 전환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2. 가사의 발생시기가사의 형성시기에 대한 논의는 이를 입증시켜줄 만한 구체적인 작품, 즉 효시 작품을 찾는 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병기와 조윤제가 바로 그 선도적인 구실을 한 주장들로서, 이병기는 「서왕가」를 효시 작품으로 보아 가사의 형성시기를 고려 말기라 하였고, 조윤제는 「상춘곡」을 들어 조선 전기(성종연간)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후 이제까지 진전된 대부분의 논의들도 이 테두리에서 출발하여 보완·확충·수정된 것들이었고, 이러한 연구 방법은 실증적인 구체상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땅히 시도될 수 있는 것이었다.위에서 가사의 형성시기와 효시 작품에 관한 논의가 있은 이래, 이제까지 진전된 논의는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학설로 집약될 수 있다.첫째, 이병기와 같이 「서왕가」를 효시 작품으로 보고, 가사의 형성시기는 「서왕가」의 작가 나옹화상의 활동 연대인 고려 말기라는 학설이다. 정병욱·서수생·이상보·김종우·이동영·최강현 등이 이병기의 뒤를 이어 이러한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보완·확충하였다.그 중 가장 깊이있게 진전된 논의를 전개시킨 최강현에 의해 확충된 이 주장의 논리적 근거를 으로 보아서 「서왕가」는 조선 전기 가사와 별 차이가 없다.ⅱ)「서왕가」에 나타난 어휘가 나옹화상의 여타 저술에 나타난 어휘들과 약 70%나 공통된다는 점에서 「서왕가」는 나옹화상의 작품임이 확실시된다.ⅲ)「서왕가」에 반영된 사상과 나옹화상의 사상이 일치하며, 또 「서왕가」의 시상과 나옹화상이 지은 여타의 시상과도 일치한다.그리고 나옹화상의 「서왕가」가 그가 죽은지 400여년 후에야 국문으로 정착된 이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ⅰ)나옹화상이 이 작품을 지을 때 국자가 없었기 때문에 구송하여 전승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ⅱ)당시에 한문으로도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지식인 상태의 포교 목적이 아니었고, 무식인 상태의 그것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비의 상태이었다.ⅲ)나옹화상에 좀더 가까운 시대에 기록화되지 못한 이유는 훈민정음의 보급 속도가 완만했던 데에 있다.ⅳ)국한문 혼용의 「勸佛書」들이 인조 이후에야 간행되기 시작했다.이렇게 논리적 근거가 확충되었다고 해서 이 학설이 가지는 의문점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이 학설에 따를 때, 가사 장르의 창안 계층은 불교의 승려 계층인 바, 주지하다시피 배불숭유를 국책으로 내걸었던 조선조의 사대부들이 과연 승려 계층의 창안물인 가사 장르를 그네들의 주요 문학 형태로 삼았겠는가 의문이다. 또 400년 후에야 국문으로 기록된 이유에 대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문점은 여전히 남는다. 김종우는 나옹화상의 또 다른 작품으로 「僧元歌」를 들고, 이 작품이 이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가사의 형성시기는 여전히 고려 말기로 보되 효시 작품으로는 「서왕가」보다 「승원가」를 더 확실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으로 볼 때 같은 작가 동일 계열의 가사 작품을 무슨 이유로 해서 어느 것은 이두로 어느 것은 국문으로 기록했는지 과정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병주에 의하면 나옹화상의 여타의 한시에 비교할 때 「서왕가」는 작품의 격이 훨씬 떨어진다고 하는데, 이 점도 나옹화상과 「서왕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음.